두 패러다임의 격전지
격동의 동아시아에서 중심을 찾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데지마 · 김재호 ·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들어가며
현재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시기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 전략을 천명한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였으며, 트럼프 정부 들어 ‘인도-태평양 전략’ (Indo-Pacific Strategy) 으로 확장되어 군사적 부분뿐만이 아니라 경제, 인권 등 많은 분야에서 중국과의 마찰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 또한 대중 공세 기조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충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패권국이 전환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 전환이 서구 가치라는 동일 패러다임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면, 현재의 미중 충돌은 단순한 패권 투쟁일 뿐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서구 가치 기반의 패러다임과 그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는 중국의 패러다임 충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충돌 속에서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서구 패러다임에 속한 국가라는 정체성과 중국의 이웃 국가이자 강한 영향을 받는 국가라는 진퇴양난의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것과 비슷한 상황을 슬기롭게 해쳐 나간 국가가 있습니다. 일본입니다. 과거 일본은 중국 중심의 화이 질서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동서 양대 질서를 배우며 성공적으로 서구 질서로 전환에 성공하였습니다. 따라서 중화 패러다임과 서구 패러다임이라는 두 패러다임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어낸 일본의 사례는 오늘날의 한국이 마주한 미중 패러다임의 충돌 속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참고 사항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보고자 하는 곳은 서구 문명과 일본의 접촉지였던 데지마(出島) 입니다.
데지마의 설립 배경
최초로 일본이 서양과 접촉한 곳은 데지마가 아니라 가괴마 남단의 다네가시마입니다. 이후 선교사들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히라도,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일본과 교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확산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1636년 작은 반도에 운하를 2. 두 패러다임의 격전지_데지마 판 뒤 다리로만 연결한 구역을 만들고 데지마라 이름지은 뒤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일본인과 서양인의 접촉을 차단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1637년 과도한 세금과 기독교 탄압에 시마바라의 난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 민란의 추축에 일본인 기독교도들이 있었다는 점과 포르투갈의 포교를 문제삼은 막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추방한 뒤 히라도에 위치하던 네덜란드의 상인들을 이 곳으로 이주시켜 통제합니다. 네덜란드의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데지마 밖으로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일본인 또한 허가를 받지 않은 경우 데지마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심지어 통역 또한 일본에서 네덜란드어를 공부한 통역관들로만 이루어졌으며 이 또한 세습되어 다른 사람들은 네덜란드어를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메이지 유신 이후 데지마가 무역 기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며 사라집니다. 그 때까지의 일본은 중국과 조선, 그리고 네덜란드 세 나라와만 공식적인 교류를 하는 이른바 쇄국(鎖國)정책을 펼칩니다. 비록 데지마는 서구의 문물을 통제하려 설치된 면이 있지만 동시에 서양의 정보를 일본에 전해주는 창구로써의 역할 또한 했습니다. 이렇게 데지마를 통해 소개된 서양의 정보는 일본에서 란가쿠(蘭学) 즉 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기존의 중화 패러다임
당시의 일본은 중국 중심의 화이 질서 체계의 일부였습니다. 이러한 기존 질서 체계 하에서 일본과 조선을 비롯한 중국의 주변 국가들에게 중국이란 사상, 문화, 지식, 규범의 중심이었습니다. 비록 일본은 조선이나 베트남처럼 직접적인 조공 책봉관계로 중국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등 중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시기도 있는 등 화이질서의 변방국으로 존재하였으나, 류큐 왕국과 조선을 통해 중국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동아시아의 중화 세계의 일원으로 존재해 왔습니다(김기혁 2002, 66). 일본 또한 중국의 한문으로 쓰인 중국의 경전인 사서삼경을 읽고 공부하였으며,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였습니다.
이는 의학 분야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1867년 이전까지 일본에서 복각된 의학 도서는 중국 도서 315종과 조선 도서 7종으로 의학 전 분야의 기초부터 임상까지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그 중 민간이 아닌 에도 막부가 직접 관여하여 인쇄한 도서 또한 자주 존재하는 것에서 일본의 의학 또한 중국의 한방 의학에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真柳誠 2010, 156). 그러나 데지마를 통한 지속적인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은 차츰 중국의 영향권에서 이탈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2. 두 패러다임의 격전지_데지마
새로운 패러다임의 소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그들의 교역품 뿐만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 그리고 지식 또한 일본으로 유입시켰습니다. 난학이라 불린 서양의 지식은 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데지마가 위치한 나가사키로 끌어들였으며, 이로써 나가사키는 난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 중 난학의 시작으로 꼽히는 사건 중 하나가 스기타 겐파쿠 (杉田玄白), 마에노 료타쿠 (前野良澤), 나카가와 준안 (中川淳庵) 의 해체신서 발간입니다. 스기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는 각각 오바마 번과 나카쓰 번의 번의의자 친구였으며, 둘 모두 네덜란드의 의학에 영향을 받은 ‘오란다 류’ 의학을 행해왔습니다. 이 둘은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요한 아담 쿨무스 (Johan Adam Kulums)가 쓴 『타펠 아나토미아』 라는 책을 입수합니다. 겐파쿠는 이 책을 읽으며 지금껏 자신이 배우고 행해온 의학과는 크게 다른 책의 내용에 놀랍니다. 지금껏 한방 의학에서 말해오던 ‘오장육부’와 해부도와는 전혀 다르게 인체를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종각, 73).
그 후 1771 년, 한방의학과 서양의학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마에노 료타쿠, 나카가와 준안와 함께 처형장에서 사형수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인체 해부인 후와케(腑分)를 참관합니다. 당시 후와케를 맡은 아흔 살 노인에게 여러 장기에 대해 질문하자 그 노인은 각 장기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항상 같은 위치에 같은 장기가 있었다며 지금껏 후와케를 참관한 의사들 중 질문을 한 사람은 한번도 없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겐파쿠와 료타로는 사형수의 뼈와 장기 등을 직접 『타펠 아나토미아』의 해부도를 비교하며 이 책의 정확성에 감탄합니다. 물론 이들은 후화케를 참관한 최초의 의사들은 아니었습니다. (이종각, 225)
이들이 참관하기 17 년 전인 1754 년 막부의 관의 중 두 번째 높은 지위에 있던 야마와키 토요가 참관한 것이 처음이며 그는 이를 통해 『장지』(藏志) 라는 책을 출판하며 중국의 오장육부설이 실물과 다르며 서양의 책이 더 정확하다고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오카다 요센과 후지모토 립센이라는 의사들 또한 여러번 참관했으나 그들은 중국인과 서양인은 인체구조가 다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한편 겐파쿠는 후화케 참관 이후 한방과 양방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직접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을 행운이라 생각함과 동시에 인체의 구조도 모른 채 의술을 행해온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하여 사람들이 인체의 구조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다면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번역을 제안합니다. 2. 두 패러다임의 격전지_데지마
『타펠 아나토미아』 번역 시작부터 3 년이 지난 1774 년 드디어 『타펠 아나토미아』 는 『해체신서』 라는 이름과 함께 번역이 완료 됩니다. 그러나 이전에 있었던 『홍모담』 발매 금지 사건은 이들에게 출판 후 닥칠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해 고려하게 만들었습니다. 『홍모담』은 1765 년 발간된 네덜란드의 풍속이나 이야기들을 엮어 만든 책인데 이 안에 알파벳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저자를 문책하였습니다. 『해체신서』를 출판 하였을 때 이러한 일이 닥칠 것 을 걱정한 스기타 겐파쿠는 두가지의 방법을 내놓습니다. 첫째로 책의 출판에 앞서 『해체신서』의 일부를 『해체약도』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아 세간의 반응을 보는 것이고 둘째로 쇼군에게 이 책을 헌상함으로서 막부의 보호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막부와 세간에서 큰 반발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출판된 『해체신서』는 난의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한방의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두 패러다임의 충돌과 겐파쿠의 선택
『해체신서』가 출간되자 네덜란드의 의술의 정확성에 놀라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지만 동시에 한의학 측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반발을 예상하였던 겐파쿠는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광의지언』(狂醫之言) 이라는 책을 출판합니다. 이를 통해 겐파쿠는 기존의 한방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서양의학이 옳은 이유를 담화의 형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담화는 단순히 한방과 양방을 비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에 따른 단어 선택까지 두 화자가 달리 말하고 있어 겐파쿠가 전통적 화이사상에서 탈피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광의지언』에서 한방을 대표하는 “친구”는 ‘중화’는 성인, 현자의 나라이자 문명의 중심국으로, 그들이 전파한 의학을 통해 수천년에 걸쳐 질병을 치료해 왔는데 스기타는 사람은 세계 변두리의 야만국의 질 낮은 지식을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이에 겐파쿠는 세상에 중심이란 없으며 ‘지나’ 또한 동쪽 한 구석의 소국에 지나지 않으며 각 지역은 각기 환경에 적응할 뿐 ‘도’는 어느 지역에나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중국 중심의 화이 체계를 부정합니다. 그 뒤 겐파쿠는 지금까지 한방으로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왔다는 ‘친구’의 주장에 사람은 새가 먹는 벌레의 맛은 모르더라도 새가 먹을 모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며 근본 원인을 모르더라도 어느정도 치유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겐파쿠는 한방을 “동으로 만든 그릇을 멀리 놓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추측하는 것과 같다”며 그릇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뜨거운 물이 들어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화롯불이 들어있기 때문인지 알 지 못하고 단순히 그릇이 뜨겁다는 것만 안 채로 내부에 대해 논하고 있다고 비판함과 동시에 서양의학은 어떠한 상태를 만드는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2. 두 패러다임의 격전지_데지마 그 원인에 직접 작용하기에 옳은 것이라 말합니다(이예안 2016, 240). 즉 병의 근본 원인을 확실히 하는 것이 ‘법’이고 병을 치료하는 것이 ‘방’인데 서양 의학은 ‘방’과 ‘법’ 모두를 지니고 있으나 한방은 ‘방’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담화에서 겐파쿠는 한방을 ‘한설’(漢説), 중국을 ‘지나’로 낮잡아 부르는 한편 서양 의학서를 ‘난서’(蘭書)라고 높이 부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광의지언』의 말미에 중국의 의학을 따르는 자가 많아 중과부적일 지라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며 책은 끝납니다.
이러한 화이 세계에서의 탈피는 책의 내용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이전까지 일본을 비롯한 화이 질서 속 국가들은 중국이 수도를 ‘경’(京) 그 주변부를 ‘기’(畿)로 부르기 시작하자 일본 또한 수도 교토 (‘京’都)와 그 주변 긴키(近‘畿’)지방으로 부르는 등 중국이 만든 글자와 단어들을 통해 개념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해체신서』를 번역하며 새로운 단어의 필요성을 느낀 겐파쿠는 ‘신경’, ‘연골’, ‘동맥’ 등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단어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중국의 뛰어난 문명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던 일본이 창조하는 위치로의 위치 변화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
『해체신서』의 번역을 효시로 일본에서는 네덜란드 서적 번역의 붐이 일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난학을 전파시키는 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당시 학문의 주류였던 유학에서도 난학의 가치를 인정하게 변화시킵니다.
일본의 유학자 타키 카구다이(瀧鶴臺)는 조선 통신사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의 도 만이 귀한 것이 아니며 오랑캐의 도라 할 지라도 하찮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중화 사상에서의 탈피를 보여줍니다 (구지현 2007, 287). 또한 일본의 국학자인 히라타 아쓰타네는 한학은 무수히 많은 학문 중 하나이며 난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며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즉, 중국의 사상이었던 유학에서조차 중국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한 것입니다.
『해체신서』를 출간 후 41 년 뒤인 1815 년 스기타 겐파쿠는 『해체신서』의 번역 과정을 담은 회고록 『난학사시』(蘭学事始) 를 출간합니다. 이 책이 조명을 받은 것은 이후 한참 뒤인 1869 년 일본 근대화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다시 발견되며 재조명됩니다. 그는 이 책을 읽은 뒤 탈아론을 내새웁니다. 아시아의 질서에서 벗어나 유럽의 질서를 지향하자는 그의 주장의 예시를 중화적 질서와의 2. 두 패러다임의 격전지_데지마 결별의 시작점인 『해체신서』의 출간을 담은 내용의 『난학사시』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나가며
스기타 겐파쿠가 해체신서를 번역, 출판하고 책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며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이 생각났습니다. 이전 일본이 속해있던 중국 중심의 화이 패러다임 속에서 일본은 서양과 접촉하였고, 그들의 지식과 화의 세계관 하의 본인들의 지식을 실제 모습과 비교해 본 뒤 기존의 화이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서양의 개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스기타 겐파쿠는 최초로 한방이 설명하는 인체의 구조가 실제의 인체와 다른 것을 알아낸 사람도 아닐뿐더러 최초로 서양의 의학을 배운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또한 오란다류 의사였고 야마와키 토요의 『장지』를 읽고 한방의 인체 구조가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후화케를 참관한 사람도 이미 이전에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양 의학을 한방이라는 패러다임 아래서 설명하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서양의학의 인체구조도가 더 정확한 것을 확인했음에도 이를 중국인은 인체구조가 다른가라는 의문과 함께 이를 단순히 기존 패러다임의 이변으로써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겐파쿠는 이러한 이변들을 서양의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설명하는데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의학 외 적으로도 화이 패러다임의 탈피의 시발점을 마련했습니다. 토마스 쿤은 이전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의 주류 패러다임인 서구 질서 또한 언젠간 자신보다 못 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교체될 수도 있다는 얘기 입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큰 영향을 받고 있는데 초창기 아시아에서 환자가 급증할 당시 서구 언론은 서방 국가들은 선진적이고 개화된, 그리고 민주적인 국민들로 인해 서구 국가들에서의 확진자 수치가 낮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서구 국가에서의 확진자 수가 급증하고 아시아 국가들에서 확진자 수치가 안정되자 아시아 국가들은 사생활 보호를 하지 않고 통제에 익숙하기 때문에 확진자 수치가 안정적이라는 말을 하며 이변들을 자신들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려 노력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 어느 패러다임을 선택할 지 결정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부터 양 쪽의 인식론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선택의 시기가 임박해서 비교 분석하고 선택하는 것은 너무 늦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기존 서구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중국의 신 패러다임에 완전히 문외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두 패러다임의 격전지_데지마 그렇기에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앞선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야마와키 토요나 오카다 요센, 혹은 후지모토 립센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완벽히 설명되지 않는 이변을 기존 패러다임이라는 틀에 갇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분석하는 시도를 병행하여 패러다임 전환의 선택의 시기가 왔을 때 더욱 정확한 패러다임을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구지현. 2007. “필담을 통한 한일 문사 교류의 전개 양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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