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세기 동아시아 지진의 끝과 시작
동아시아의 어제를 보고, 오늘을 느끼며, 내일을 바라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일청강화기념관 · 공 도 영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답사 마지막 날 오전, 후쿠오카 시내에서 약 한 시간 반 가량 차를 타고 시모노세키(下関)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125 년 전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이 청일전쟁의 종전 협상을 진행하고, 마침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곳입니다. 일청강화기념관은 탁 트인 드넓은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19 세기 동아시아 질서가 뒤바뀌던 생생한 역사의 중심지라고 하기에는, 일청강화기념관은 매우 소박한 모습으로 시모노세키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 동아시아의 오랜 패주였던 중국이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고, 조선, 대만 등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게 되었으며 근대 일본이 부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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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일청강화기념관 앞 바다
청일(淸日)전쟁은 19 세기 말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힘의 균형에 지진같은 변화를 촉발하고, 유교 세계 내에서 수세기 동안 지속된 국제 화합을 깨뜨렸으며, 아시아 국가가 유럽으로부터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Paine 2003, 3).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은 1 세기가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동아시아의 영토 및 정치적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습니다(Greve and Levy 2018, 149). 청일전쟁의 유산과 중국의 급부상으로 인한 현대 동아시아 지역 질서를 생각할 때, 그리고 청일의 무력 충돌이 한반도 땅에서
119 발생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국제정치를 위해 청일전쟁을 되돌아보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한 조선 땅에 대한 청과 일본의 파병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됩니다. 1894년 제 1차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마침내 전주성을 함락하면서 조선정부는 4월 29일 긴급 대신 회의를 열어 청병(淸兵)의 차병(借兵)을 결정하고, 5월 1일 북양대신 이홍장은 군함과 정예부대 등을 조선에 파견하며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일이 많이 위급하여 영사(領事) 및 상민(商民)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청에 알리지 않은 채 일본군을 조선에 파병했습니다. 이홍장은 지속적으로 양국의 철병을 주장하며 무력충돌을 최대한 피하려는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 조선 땅에서는 양국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근대적인 군사 시스템을 도입한 일본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고 맙니다.
대부분의 선행연구에서는 청일전쟁의 원인을 동아시아 지역 질서 내 일본의 부상과 경제적, 위상적 목표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더하여, 전쟁이 1894년 8월 1일 청과 일본 양측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청국은 지역 내 힘의 추가 일본으로 기울고 있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청의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왜 개전을 결정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청나라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
120 논쟁과, 이들이 조선 문제와 국제정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문정식과 이홍장의 목소리를 통해 각각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사진 2. 청일전쟁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랑방 13기
청일전쟁 발발 전 청국 내 주전, 주화 대립
121 1894 년 1 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으로 인해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무장 봉기하게 되고, 이들은 3 월 말 정부가 진압을 위해 파견한 관군을 4 월 8 일 고부 근처 황토현에서 무찔렀으며, 4 월 27 일 전주를 점령하게 됩니다. 조선 정부는 4 월 27 일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조선은 결국 공식적으로 청에 파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파병 요청을 받은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 원세개(袁世凱)는 이홍장에게 출병을 의뢰했고, 이홍장은 섭지초와 섭사성에게 북양 육군의 정예 7 영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갈 것을 명령했고, 또한 북양 해군 제독 정여창(鄭汝昌)에게 순양함 제원과 양위를 인천에 파견하여 거류민 보호와 수송선 호위를 맡을 것을 명령했습니다(후지무라 미치오 1997, 75-81). 동시에 이홍장은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의 요청에 의해 파병하였으나 난이 진압되면 곧 철수할 것’을 일본 측에 알리게 되지만, 일본은 상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5 월 3 일 300 명의 병사를 파견하였으며, 5 월 8 일-9 일이 되자 14 척의 배를 파견하여 2000 여 명을 추가 파병하였습니다. 이홍장은 일본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차일피일 철병을 미루며 청일 양국의 조선 내정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하며 조선 땅에서의 긴장감을 증폭시킵니다.
일본이 특별한 명분 없이 조선에 파병하여 철병하지 않고 오히려 병사의 수를 증원하자, 청나라 내부에서는 조선에 추가 파병을 하고 일본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전론의 목소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주전론과 주화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 세기 말 청나라 내부의
122 정치 구조와 동학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9 세기 말 청나라는 크게 양무파(洋務派)와 청류파(淸流派)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양무파들은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서구 열강들과 가능한 한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를 희망한 반면, 청류파는 서양 세력의 침략을 중화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서양의 침략에 대항해 중국을 지킬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 대외강경책을 주장했습니다(안철수 2011, 368-386).
청의 광서제(光緖帝, 1871~1908)는 1887년 친정을 시작했으나, 중요 국무에는 서태후가 관여했고, 예친왕(睿親王)이 중심인 군기처(황제 최고 자문기관)와 경친왕(慶親王)이 중심인 총리아문(외교)이 국정과 외교를 담당했습니다. 즉, 군사외교의 실권은 서태후의 신임을 받고 있던 북양대신 이홍장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총리아문도 이홍장의 지시를 받아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황제파는 그것에 불만을 품고 광서제의 친정의 확립을 목표로 이홍장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후지무라 미치오 1997, 123). 이러한 서태후와 광서제의 정치적 대립 구조에 따라 양무파와 청류파는 각각 서태후를 지지하는 후당(后黨)과 광서제를 지지하는 제당(帝黨)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 때 양무파의 대표주자는 이홍장이었으며, 청류파는 광서제의 스승이었던 호부상서 옹동화(翁同龢)와 시독학사(侍讀學士) 문정식(文廷式), 예부시랑 장지예(張志銳), 그리고 남통재자(南通才子) 장건(张謇)이 그
123 중심인물이었습니다(안철수 2011, 368-386). 이 글에서는 청일전쟁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이홍장의 문집과, 청류파의 인물들 중에서도 이홍장을 탄핵하는 상소를 수 차례 올리며 이홍장과 직접적으로 대립했던 한림원 시독학사 문정식의 글을 바탕으로 주화론과 주전론의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이 오히려 증병을 하자, 문정식을 비롯한 주전론자들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맞설 것을 주장합니다. 전쟁 발발 직전 개전에 대한 문정식과 이홍장의 의견 차이는 청군의 군사력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정식은 지속적으로 상소문을 올려 이홍장 등 주화론자들이 ‘화해를 주장하며 당장의 안정만을 도모하려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해군력에 대해 자신감을 보이며, 일본과 전쟁이 발생하면 여전히 청이 이길 수 있다는 인식을 보입니다.
중국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해군을 건설해 왔으며,
천만원 넘는 비용을 쏟아 부었는데 북양해군이 정녕
일본과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인가? 정여창은 원래
범인으로서 청불 전쟁 때는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울면서 눈물까지 흘린 자라고 한다. 이런 자에게
제독(북양함대)이라는 중임을 맡긴 것은 실로 경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石泉 1997, 68)
124 中国练海军已近十年,糜费至千余万,责以一战,亦
复何辞? 然臣不能谅创始之难也。顾臣所不解者: 倭
人之练海军,亦不过二十年,何以此次出兵,北洋即
不敢与之较? 臣闻丁汝昌本一庸才,法越之役,避敌
畏惧,至于流涕。畀以提督重任,实属轻于择人。
실제로 열강의 아편전쟁, 애로 호 사건과 태평천국의 난 등 국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청나라는 19세기 후반 군사 중심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실시하였는데, 대표적인 군수산업시설로는 강남제조총국과 복주선정국이 있었으며, 또한 북양해군, 남양해군, 복건해군, 광동해군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이홍장이 이끌던 북양해군 뿐이었습니다(김지훈 2012, 212).
또한 이후 청일전쟁에 동원된 전체 해군력을 살펴보면, 일본의 연합함대는 모두 27척, 청의 북양함대는 21척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의 해군함정들은 1000톤 이상 7000여 톤 급의 배가 12척이고, 나머지 9척은 수백 톤 급의 작은 배들이었던 반면, 일본 해군의 네 척이 4천 톤을 웃도는 최대 함정이었고, 그 아래로 천 톤~3천톤 급 등의 중, 대형 함정들이 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또한 청 해군의 7천 톤 급 거함들의 속도가 14노트, 가장 빠른 18노트 속도의 두 척은 2300톤 급이었던 반면 일본의 4천톤 급 요시노는 23노트였으며,
125 대부분의 함정들은 거함인 동시에 쾌속선이었습니다. 또한 청군의 최대 함정 ‘팅위엔’만이 구경 30센티 거포 4문을 장착했고, 구경 10~26 센티 이상의 함포는 모두 합해 30여 문 정도가 장착되었을 뿐 나머지는 기관포 등이었습니다. 일본은 구경 32센티 포 4문을 필두로 10~26센티 급이 모두 200문 이상 장착되어 있었습니다(박영재 2002, 52-53).
북양해군을 총괄하고 있었던 이홍장은 상대적 열세인 청의 군사력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례로, 해안방어시설을 설치하는 데 찬성하는 1875년의 상소에서, 중국의 군사력에 대한 이홍장의 불안감과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양인의 증기선과 전보의 속도는 순식간에 천 리
밖까지 다다를 정도로 빠르고, 그들의 신식 무기는 우리
것에 비해 100 배는 더 강합니다… 오랑캐 침입으로 인한
변화가 이같이 빠른데도 중국은 여전히 낡은 방법으로만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응방식은 절대로 효과를 볼
수가 없습니다.
(량치차오 2013, 162)
이러한 이유로, 이홍장은 청일 양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일본 주재 왕성(汪星) 청 공사는 5월 14일, ‘일본이 대적(大敵)을 준비하는 듯하기 때문에, 마땅히 두터이
126 병력을 모아 은밀히 그 모략하는 바를 깨 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163), 이홍장은 전함이 지나치게 적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군대 증원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戚其章 第2冊 1989, 583) 그리고 청나라의 추가 파병을 미루고, 원세개에게 일본과 비밀리에 협상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청이 군사를 파병하여 일본과 무력충돌하는 것은, 일본의 모략이라고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싸움이 상책이 아니라고 총리아문에 알립니다.
총리아문에 보냄, 1894년 5월 15일:
일본인의 성격은 흔들리고 불안정하니, 만약 우리가
다시 병사를 추가해 넉넉하게 집합시키면 일본인의
교활한 모략을 열게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의심 때문에
반드시 싸우게 되는 것은 특히 모략을 깨부수는 상책이
아닙니다.
(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166)
원세개와 왕성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이홍장은 일본이 철병하지 않는다는 최악의 경우 궁극적으로는 군사를 동원하겠다는 의중을 보이지만, 이홍장은 이러한 추가 파병이 일본의 의심을 쌓아 ‘대국을 그르칠까 우려된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167-170). 또한 왕성에게 무쓰 무네미쓰 및 이토 히로부미와 ‘절실하게 협상할 것’을 당부합니다(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175).
127 하지만 군사력의 차이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정식과 이홍장은 조선의 속방 문제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정식은 ‘중국의 번속 국가 중 조선보다 중요한 나라는 없으며(文廷式 1993, 7)’, 20여년 동안의 조공은 부족함이 없으니 신하의 예를 지키고 있고, 조선에서 내란이 일어나면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고 그 난을 평정하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보호하는 것처럼 도리에 마땅한 일이라고(文廷式 1967, 29-31)’ 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사대자소의 질서 내에서 조선과 청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도 같은 관계였으며, 특히 청의 조공 질서 내에서 조선은 가장 중심 국가였기에, 조선에 대한 종주권이 무너지는 것은 곧 동아시아 내 청이 구축해 온 구 질서가 무너짐을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정식은 ‘무릇 조선은 우리 조정을 신하로서 모시는 나라로, 동삼성(東三省)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文廷式 1967, 29-31)’ ‘일본이 우리의 무방비를 틈타서 군대를 잠입시켜 우리를 기습하게 되는 급작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큰 손실이 있을 것이라(文廷式 1993, 5-6)’고 기록하였습니다. 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이 일본을 포함한 열강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면 청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으로 해석하였기에, 문정식은 일본이 조선의 요충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의 변방을 노리고 있으니 군대를 증강시켜 남북양 해안을 순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文廷式 1967, 29-31).
조선에 대한 종주권에 대해서는 이홍장 역시 비슷한 인식을 보입니다. 북양대신이었던 이홍장은 북양 육해군을 통괄하고
128 재외공관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한 동시에, 1881년 이래 조선 사무를 관할하였고 1885년 이후 한성 주재 원세개를 통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해 왔으므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이홍장은, 일본이 철병을 차일피일 미루던 5월 말이 되자, 조선이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중국의 속방이 아님을 인정한다면 중국은 반드시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물을 것이라고 강경하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226).
하지만 일본의 조선 파병은 이미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1876년 체결된 조일수호조약의 제 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임을 천명하였으나, 청은 기존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1894년 조선에 대한 청의 파병에 대해 청이 일본에 보낸 공문에서 ‘속방(屬邦)’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일본은 이를 수정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이홍장은 ‘속방을 보호하는 구례를 어지럽히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며 일본의 인정여부에 따라 이를 수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답하며 일본과의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121).
무쓰 무네미쓰는 5월 중순이 되자 일본의 철병을 미루며 양국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 정부 및 세무(稅務)를 정리하고 개혁하며, 조선 군대를 가르쳐서 스스로 반란을 진압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홍장은 조선의 반란이 이미 평정되었으며, 일본은
129 더더욱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무네미쓰의 요구를 묵살하였습니다(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164). 또한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7월 19일, 일본과의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도 이홍장은 청일 양국군의 조선 출병이나 이권 협상, 내정개혁 등 조선의 국가적 행사에서의 청일 평등 대우는 불가능하다고 못 박기도 했습니다.
청의 군사력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속방으로서의 조선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시각을 공유했던 문정식과 이홍장은, 외교적인 방법을 모색하며 서로 다른 대안을 제시합니다. 문정식은 영국과 독일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형세이기 때문에, 청나라가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면, 영국과 독일은 자연스럽게 청나라를 도울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러시아와 결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역시 영국과 연합하여 일본과 러시아를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후지무라 미치오 1997, 124). 영국과 독일은 항상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주목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가 일본과 러시아를 저지할 경우 영국과 독일이 청나라를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반면 이홍장은 원세개를 통해 일본과의 협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러시아에게 중재를 요청하였습니다. 이홍장은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게 조선에 개입하는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곧, 러시아와 영국이 일본을 견제하되 조선에 야욕을 품지는 않고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5월 17일 이홍장이 총리아문에 보낸 글에 의하면, 일본이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형세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개입한다면
130 일본이 바로 통제될 것이라는 그의 굳은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동학혁명기념재단 2017, 181).
하지만 러시아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무네미쓰는 청국 정부가 조선이 내정개혁을 완결할 때까지 일청 양국이 조선의 내정개혁이 완료될 것을 기다리거나, 일본정부가 독자적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실행함에 청국 정부가 방해하지 않는 쪽을 보증한 후에만 철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무쓰 무네미쓰 2013, 83-84). 또한 러시아 정부는 이미 일본이 막대한 수량의 병력을 파견하였고, 조선의 자주 독립 외에는 일본의 별다른 야심이 없기 때문에 러시아가 청을 도울 경우 영국이 적대 행동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를 잃게 됩니다(吳相湘 1959, 194).
1894년 6월 오오토리는 조선정부가 신속하게 청군이 철수하도록 요구하게 하고, 중국과 조선 사이의 세 건의 통상 장정을 폐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조선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6월 21일 일본은 병력을 파견하여 경복궁을 포위 점령하였으며, 7월 25일 대원군은 일본의 위협 하에 조선의 자주를 선포하고, 청군의 철병권을 일본에게 위임하였습니다. 같은 날 새벽 일본군은 아산만에서 중국 해군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결국 전쟁이 시작되고 맙니다.
결국 조선이라는 좁혀질 수 없는 문제를 둘러싼 채, 구 종주국이었던 청과, 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일본의 대립은
131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일찍이 일본군의 위력을 깨닫고 이홍장은 최대한 물리적 충돌을 피하고자 했으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그 스스로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일본과의 협상은 결렬되고 만 것입니다. 7월 24일 일본은 청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하는 2차 절교서를 발송하였고, 어쩔 수 없이 이홍장도 군사 대응을 준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李鸿章 1985, 775). 이를 통해 이홍장은 결국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청일전쟁 발발 이후 문정식과 이홍장의 대립
7 월 25 일 전쟁이 시작되고 난 후에도 이홍장은 외교적인 중재에 기대를 걸게 됩니다. 7 월 27 일 이홍장은 선전포고문에서 일본의 선제 도발 및 조청, 종번(宗藩)관계를 명시하여 종전 후 조선 문제에 대한 외교적 협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총리아문은 이에 따라 주중 각국 공사에게 전쟁은 일본이 도발한 것이며 조선과 청의 종번 관계는 각국이 이미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때 인정한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李鸿章 1985, 817). 이는 기존에 이홍장이 ‘만국공법’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국공법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일본이 만국공법을
어기면서 중국을 침략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중국은
132 주화로써 대응해야 한다. 만국공법의 규정에 의하면 먼저
전쟁을 일으킨 쪽이 도리에 어긋난다.
(李鸿章 1965, 26)
전쟁이 발생했음에도, 이홍장은 일본이 선제공격했음을 다른 국가들이 인지하면 종전 협상에서 외교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9 월 9 일이 되자 문정식은 주전론자 37 인을 규합하여 상소를 올리며, 영국 및 독일과의 연합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자는 주장을 다시 꺼내 듭니다.
聯銜密陳敵情尀測宜出奇計以弭兵釁摺, 1894 년 9 월 9 일:
이때 왜인이 뜻을 모으면 영국에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인들과 그 군사적 계책을 독일 역시 깊이 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자못 이 나라들과 왜의
싸움을 벌이려는 의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병선 50 여 호는
이미 남양에 집결하였습니다. 독일인들도 특히 우리에게
후하여, 모든 병력이 중국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신 등의
우매한 의견은 현재를 기회로 삼아, 측근 중신을 보내어
그것을 의논하게 하고, 비용을 들여 왜인을 벌채하게 해야
합니다. 영국과 독일 사신은 이미 그 뜻을 내비치고
있으며, 호광독신(湖广督臣) 장지동(张之洞)이 비밀리에
상의를 거쳐 대략 2000 만금 내외로 뜻을 처리할 수
133 있습니다. 왜인이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리에 연계하였고,
어찌 우리가 비밀리에 영국 및 독일과 연계하는 것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文廷式, 汪叔子編 下冊 1993, 26)
此時倭人得志,勢將不利於英; 法人與其兵謀,德國亦
所深忌。故聞英人頗有籍端與倭開釁之志,兵船五十餘
號已盡集南洋。 德人亦特厚於我, 凡將弁之效力於中國
者, 其主皆特賞寶星; 又任中國購買軍火, 籍資馭敵
。 此非偏有所厚也, 衛我即所以自衛也。 臣等愚見,
以為宜及此時, 特派親信重臣與之商議, 資其兵費,
使伐倭人。 聞英、 德使臣皆已微示其意, 湖廣督臣張
之洞亦經密與商謀, 大約不過二千萬金上下, 便可遵辦
。 倭人既暗約法、 俄, 何能禁我之密連英德? 且與其
議和而用為賠費, 何如戰勝而出以犒師? 得失甚明,
可無疑義。 雖他日或有恃功之意, 如回紇之需索於唐,
然兩禍相權, 其輕於受侮於倭則已多矣。
하지만 이미 9 월 15-16 일의 평양 전투에서 청의 사상자가 일본 사상자의 10 배에 달하는 등 청이 패하고, 특히 17 일 황해 해전에서 북양 함대가 일본에 패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인해 9 월 19 일, 이홍장은 마침내 북양해군의 전투력으로 일본을 대적한다는
134 것이 불가능함을 실토하게 됩니다(李鸿章 1985, 1008-1009). 10 월 10 일과 12 일 두 차례에 걸쳐 이홍장과 총리아문은 영국 공사 오코너와 러시아 공사 카시니에게 종주권을 포기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일본과 평화협상을 할 수 있도록 거중 조정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约瑟夫 1959,52-54). 또한 11 월 초 일본이 요동반도까지 진출하고, 1895 년 일본이 산둥반도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여 수도 베이징이 공격당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이홍장은 서둘러 강화 협상에 들어갑니다.
한편 12 월 26 일, 문정식은 중국의 강약 형세가 각국의 형세와 밀접하기 때문에, 중국의 이익을 전부 일본에게 주고 조약을 맺는다면 각국이 주시하다가 일본이 얻은 바를 균점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하며, 절대 화해해서는 안 됨을 다시 주장하였습니다.
문정식은 강화 협상에도 부정이었습니다. 1895 년 3 월, 대만을 할양한다면 사방에서 중국을 해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만 순무와 함께 대만을 보전할 계획을 논의하였습니다. 특히 3 월 28 일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이 베이징에 전달되자, 문정식은 상소문을 작성하여 강남성과 강서성에서 각각 54 인, 120 인으로 구성된 상소문을 올리게 됩니다. 그는 수도를 서안으로 천도하고, 다시 병력을 모아 일본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습니다(정재경 2000, 148). 하지만 결국 1895 년 3 월 19 일부터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간에 협의된 강화 조약은, 4 월 17 일에 체결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의 자주 독립국 확인, 요동반도와 대만섬 및 펑후 제도의
135 일본 할양,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불, 청나라 내 충칭, 쑤저우, 항저우 등의 개항과 무역의 자유 허용 등을 골자로 합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청은 ‘백년국치’를 맞이하게 되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부상이 시작되며, 아시아는 격동의 세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나가며
이 곳 일청강화기념관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중국의 아시아 지배권이 막을 내리고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점에서 19 세기 동아시아 지진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의 끝이 곧 아시아 내 힘의 변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서막이었다는 점에서 19 세기 동아시아 지진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적 사건이 종결되고,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끝난 시점에서 이를 되돌아보며 선대의 결정을 옳고 그름으로 평가하는 일은 아주 쉬우며, 우리는 자주 이러한 평가를 내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청일전쟁 전후 주전론과 주화론을 대표하는 문정식과 이홍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저는 이러한 대립과 논쟁이 단순히 정치적 파벌 싸움이 아닌, 치열한 고민의 결과라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청강화기념관을 방문한 당일은 날이 맑고 안개가 없어 바다 건너 저 멀리 도시와 산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시모노세키
136 조약으로부터 125 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어떤 국제정세의 변화를 마주하고 있을까요? 우리 앞에 얽혀 있는 문제들을, 어떠한 식으로 풀어 나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렇게 시모노세키를 떠나왔습니다.
사진 3. 시모노세키에 이홍장이 남긴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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