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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그 이후, 미국 핵전략의 기원

동아시아의 어제를 보고, 오늘을 느끼며, 내일을 바라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0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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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자료관 · 태 희 준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1945 년 8 월 6 일 인류 “최초의 핵전쟁“이 일어났습니다(Mandelbaum 1979, 41). 히로시마에 인류의 첫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이죠. 3 일 뒤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두 차례의 폭격으로 20 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충격으로 비로소 일본은 항복했습니다. 두 사건은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림과 동시에 핵 혁명(nuclear revolution) 시대의 서막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Little Boy)는 64 킬로그램의 우라늄 236 핵물질로 TNT 13 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나가사키에서 팻맨(Fat Man)은 불과 6.2 킬로그램의 플루토늄 239 핵물질로 TNT 22 킬로톤에 상응하는

5 폭발을 야기했습니다. 두 원자폭탄의 폭발 규모는 당시 재래식 무기로 환산하면 5000 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어야 가능했을 수준이었습니다(E. Tashiro and J. Tashiro 1982, 32; Wilson 2013,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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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입구 이처럼 “전례 없는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Truman, 1945) 의 발견은 새로운 혁명 시대의 도약을 알림과 동시에 중요한 두 가지 교훈과 경고를 남겼습니다. 첫째, 인류는 전쟁의 승리를 좌우하고 강압외교

6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절대무기’(Brodie, 1946; Mueller 2010, 18)의 위험을 확인했습니다. 둘째, 핵무기는 군(軍)과 민(民)의 피해자를 구별하지 않고, 인류 최대의 부도덕한 살상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Morris 1963, 85).

그로 인해 세계는 나가사키 이후 원자력의 남용 방지와 군축을 위한 제도적 해결방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46 년 1 월에 국제연합원자력위원회(UNAEC)가 설립되었죠. 이는 국제사회에서 핵무기의 통제를 위해 소련ㆍ미국ㆍ영국이 오랜 합의과정을 통해 마련한 최초의 해결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자력위원회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리로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추가적인 해결방안에 합의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Kissinger 1957, 177-178; Price and Tannenwald 1996, 137). 원자력의 제도적 관리에 대해서 미 · 소 양국이 대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미국은 국제연합(UN)을 통해 소련의 동태를 감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반면에, 소련은 미국이 핵무기를 폐기하는 결과를 기대했습니다. 결국 원자력의 사용과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붉어져 전후 세계정치에 획기적인 변화가 초래되었습니다.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필두로 양분되었습니다. 특히 유례없는 핵 군비 경쟁이 일어났고 이는 세계의 분쟁과 전쟁 양상에도 큰 변화를 야기했습니다. 핵무기의 존재는 미 · 소 간에 총력전(all-out war)과 전면전(general war)을 억제했습니다. 반면에 제한된 지역에서의 크고 작은

7 제한전(limited war) 및 국지전(local war)의 발발을 예방하지는 못했습니다(Halperin 1963, 6, 12-13; Jervis 1984, 150-153). 이는 양국이 상대방 국가와의 전면전을 우려해서 일방이 관여되어 있는 분쟁에 개입하기를 피했기 때문이었죠. 이처럼 인류사에서 핵무기의 등장으로 국제사회가 양차대전 이후 지향했던 평화와 안보전략은 서로 상반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Mandelbaum 198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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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 팻맨(Fat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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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략의 기원 연구

핵전략의 기원(origins of nuclear strategy)이라는 주제는 기존문헌에서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입니다(Glaser 1990, 7). 기존의 핵 담론은 절대무기의 영향을 존재론적 · 목적론적 · 규범론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할 뿐, 핵전략이 기원한 배경은 설명하지 않고 있죠. 무엇보다 담론 중심의 설명에서는 같은 개념이나 이론에 대해서도 상이한 입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저비스(Jervis, 1979)는 핵전략에 관한 이론을 세 가지 학파로 구분합니다. 첫째, 브로디(Brodie, 1946; 1959), 만델바움(Mandelbaum, 1979; 1981)과 왈츠(Waltz, 1981; 1990)를 중심으로 형성된 ‘핵혁명이론’(nuclear revolution theory)이고, 둘째, 스나이더(Snyder, 1965)의 ‘안정성-불안전성 역설’(stability-instability theory)에 근거해서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 간의 ‘대치의 위험성 문제’(problem of risk)를 다루는 핵무기의 ‘위험조작 · 확산 · 제한전 이론’(nuclear risk manipulation, escalation, and limited war theory)입니다. 셸링(Schelling, 1960), 칸(Kahn, 1960; 1966)과 할페린(Halperin, 1963) 등이 이 학파를 대표하는 이론가들이죠. 끝으로, 저비스 본인을 포함한 핵전략의 세 번째 학파는 탄넨왈트(Tannenwald, 2007), 뮐러(Mueller, 2010), 윌슨(Wilson, 2013) 등 최근에 핵무기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에서

9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핵무기의 ‘무관계성 이론’(nuclear irrelevance theory) 학파입니다.

그런데 이들 각 학파는 서로 상이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핵무기의 특성에서 출발합니다. 첫 번째 학파의 경우 핵무기의 파괴력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로 하여금 전쟁으로 확장 가능성이 있는 분쟁에 관여하지 않게 한다고 주장하죠. 즉, 핵무기 보유국들 사이에는 대치나 위기의 위협이 적으며, 핵확산이 국가로 하여금 분쟁에 참여할 의지를 낮춤으로써 전쟁의 빈도가 줄어들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Sagan and Waltz, 1995). 미국의 초기 핵전략도 핵무기의 이러한 특성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죠.

반면, 두 번째 학파는 반대로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 사이의 대치의 위험성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핵무기의 특성은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기로 만들며, 그로 인해 핵전쟁 확산의 위협은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은 핵무기 미보유국 및 상호 간에 핵 선제공격(preemptive-strike) 및 예방전쟁(preventive war) 위협과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위협을 제기하면서 분쟁을 격화시켜 전쟁의 위기를 조작한다고 봅니다. 이 학파의 주장은 결국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 간의 대치는 위기술이나 벼랑끝전술이 지배적인 형태가 되어 강압적 협상과 제한전 수준에서의 힘의 투사로 이어진다는 논지인 것이죠.

10 마지막인 세 번째 학파의 주장은 저의 연구와는 관련이 낮음으로, 상세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결국, 요점은 미국 핵전략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거의 부재하고, 같은 역사자료와 시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점이 기존문헌에서 일관되게 발견된 수수께끼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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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기까지의 경과

한편, 핵전략의 발전사는 핵기술 및 핵무기의 발전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서술되어 왔습니다. 이례적으로 ‘핵전략의 기원’

11 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한 만델바움(1979) 역시 “전략은 기술을 따랐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미국의 핵전략이 1953 년에서 기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이유로는 첫째, 미 · 소가 1953 년 이전까지는 충분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둘째, 핵무기의 생산에도 뚜렷한 전략적 의도가 보이지 않았으며, 셋째, 미 · 소의 군비경쟁이 1953 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제기하고 있죠. 무엇보다 1952 년 11 월과 53 년 8 월은 미국과 소련이 각각 수소폭탄을 실험한 시점이었습니다. 수소폭탄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보다도 700 배의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는 점에서 기존문헌은 수소폭탄의 개발을 “세계정세에 대변환을 일으킨”(Ibid)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전을 위해 생산된”(Ibid) 원자폭탄과 달리, 수소폭탄은 사용되어서는 안 될 무기로, ‘최소억제’(minimum deterrence)라는 전략적 목적을 처음으로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죠(Kahn 1960, 15).

나아가 기존문헌이 핵전략의 발전사에서 주목한 변곡점은 소련과 미국이 탄도미사일을 실험했던 1957 년과 58 년이었습니다. 탄도미사일이라는 새로운 무인 핵 투발수단의 개발로 세계는 즉각적인(instant) 핵공격의 위협에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Brodie, 1959, 158-160). 탄도미사일은 핵공격 개시의 소요시간과 목표물 요격까지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핵공격에 대한 예측과 방어를 어렵게 했고, 세계 각지에 있는 목표물의 동시다발적 타격을 가능케 했습니다. 또한, 장거리 폭격기와 달리 탄도미사일은 은폐 및

12 보호가 용이한 전략무기였죠. 이러한 점에서 미 · 소의 핵ㆍ안보전략은 다시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수정되었고, 기존문헌은 수소폭탄과 탄도미사일의 개발을 핵전략의 발전사에서 서막이 되는 “판도라의 상자”로 평가해왔습니다(Schwartz 1995, 37; Lindley-French and Boyer 2012, 500).

그러나 핵전략의 역사를 핵무기 기술의 발전사와 결부시켜 설명하는 기존문헌의 방식은 역사를 특정한 기준에 맞추어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즉, 기존문헌은 ‘핵억제’(nuclear deterrence)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 군사적 · 국제정치의 구조적 조건(Glaser 1990, 19-21)들이 충족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을 핵전략의 기원으로 삼았던 것이죠. 요컨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위력을 비교하고, 폭격기와 탄도미사일의 전략자산으로의 가치를 비교해서, 이들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들에 의미를 사후적으로 부여한 것이죠.

따라서 저는 기존문헌의 결과론적 설명방식이 아닌, 각 정책이 결정된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접근의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개별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한해서 당시 정책결정자에게 보고되었던 정보 및 당시의 국제정세만을 참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면밀한 1 차 사료조사를 통해 역사가 전개된 과정을 상세히 기술(detailed narrative)하고 시기적으로 발견되는 규칙성과 변화 사이의 인과관계를 과정추론(process-tracing) 방법을 통해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즉, 핵전략의 기원을 목적론적으로 혹은

13 결과론적으로 설명해온 기존 방식과는 달리, 저는 핵전략의 발전을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핵전략이 발전하게 된 맥락을 파악해보고자 했던 것이죠. 결국 핵전략의 기원은 이미 수립된 전술과 정책에서 찾는 것이 아닌, 전략의 필요성이 발생하게 된 상황에서 찾아야한다고 보았습니다.

트루먼 행정부의 퍼즐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핵전략의 발전사에서 기존문헌은 미 · 소가 수소폭탄을 실험한 1953-54 년과 탄도미사일을 실험한 1957-58 년 시기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공개된 자료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 생산량이 1951 년을 기점으로 급증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특이할 점은 미국의 핵억제 전략을 핵무기의 개발사와 결부시켜 분석한 기존 방식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소련이 첫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던 1949 년을 새로운 분기점으로 변경한다고 해도, |표 1|과 |표 2|에서 살피는 바와 같이, 1949 년과 1950 년에는 특이할만한 변화 없이 무난하게 유지되던 미국의 핵무기 생산 및 핵 예산 추이가 1951 년과 52 년에 급격한 전환을 보이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처럼 나가사키 이후부터 미국의 핵무기 생산 추이를 10 년간 추적해보면, 1949 년과 52 년에 생산량이 크게 급증했다는 사실을

14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현상의 경우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점과 연관시켜 설명해볼 여지가 있죠. 그러나 핵무기 기술의 발전사에서 1951 년의 두 번째 현상과는 결부시킬 만한 사건이 없습니다. 특히 1951 년의 전환은 1949 년보다도 변화의 폭이 큰 사건이었죠. 당시 미국은 핵무기 400 여 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듬해 400 기를 추가로 생산하여 전년대비 두 배에 가까운 보유량을 확보하게 됩니다. 핵무기의 생산 증가율 자체는 1949 년에 더 높았는지 몰라도 한 해에 추가된 핵무기의 절대적인 증가량은 1952 년이 다른 해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미국 국방부 및 공군의 7 개년(1947-1954) 핵 예산 추이를 살피는 |표 1|에서도 확인할 수 있죠. 요약컨대 두 기관의 1951 년도 핵무기 예산 및 예산의 증가율은 다른 해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게(공군 예산: 452%, 국방부 예산: 261%)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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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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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래서 저는 재검토의 필요성이 발견된 새로운 연구시기에 미국의 핵무기 대량생산능력(mass production capacity)이라는 변수가 야기했을 수 있는 차이를 확인해보았습니다. 즉, 1951 년 이전과 이후에 미국에서 운영되었던 핵 생산시설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면, 우선적으로는 대량생산능력이 가능했던 시기와 불가능했던 시기로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1942 년부터 57 년 사이에 운영된 미국의 주요 핵 생산시설은 이미 1952 년 이전에 완공되어 가동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본 연구논문 참고) 나아가 1952 년에 추가된 시설의 경우 대게는 9 월과 11 월 이후의 시점에 완공되거나 운영되기 시작해서, 1952 년의 미국의 핵무기 생산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변수가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생산능력(production capacity)의 차이에서 일어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1950 년부터 1953 년 사이에 발생한 대전환은 미국의 의지(willingness)가 만들어낸 변화였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은 기존문헌에서는 간과되었던 점이고, 저의 연구에서 핵심적으로 제기하는 퍼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존의 미국 핵전략 문헌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트루먼(Truman) 행정부의 역할을 재조명해보았습니다. 핵기술의 발전사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1950 년부터 53 년 사이의 급변시기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즉, 저는 특정 핵 담론에서 제기하는 핵전략의 성립 조건이 충족된 시기에서 핵전략의 기원을 찾지 않고, 가장 근본적으로

18 미국이 핵전략의 필요성을 직접 인식하게 된 시점, 혹은 그것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결국, 위에서 살핀 자료를 통해서는 오히려 미국이 최초로 핵무기의 대량생산을 결정하게 된 시점이 1950-51 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특히 해당 시기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가설이 도출됩니다. 즉, 핵전략의 기원이 되는 미국의 위협인식 변화에는 한국전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점이 저의 가설이 된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핵 혁명 시대에 핵전략의 필요성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핵전략의 초기 기원: 나가사키와 한국전쟁 사이

2 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종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옹호하는 국가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라 전망하면서 전후의 국제사회를 낙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940 년대 초중반의 시점까지만 해도 소련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과 적극 협력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스탈린은 공산주의 진영의 기반인 코민테른(Comintern)을 자발적으로 해체하려 했기 때문이죠. 이에 미국 지도자들의 소련에 대한 기대는 맹목적인 믿음의 영역까지 확장되어 소련이 더 이상 세계혁명을 조장하는 데 나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5-1947, 8).

19 소련에 대한 당시 미국 행정부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문서 중 하나는 1945 년 12 월 1 일 국무부의 ‘미국 대외전략 발표문’ 입니다. 해당 문서는 소련과의 대외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소련을 모든 국제관계 분야에서 미국과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국가로 묘사하고 있고, 나아가 소련과의 관계 개선은 여타 국가들보다도 특별히 더 많은 ‘성실함(diligence)과 인내심(patience)’을 요하는 일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5-1947, 37). 무엇보다 해당 보고서의 말미는 미 · 소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보여주는 확고하고 친구와도 같은 신뢰행위는 경우에 따라 친구 관계보다도 더 끈끈하게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가능케 한다.”며 ‘소련의 동기에 대한 의심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일방적인 공격행위조차 꺼려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Ibid.).

물론, 전후 미국이 소련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가사키와 한국전쟁 개전 사이의 기간 동안 미국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나름의 대응책을 강구하기도 했죠. 1948 년 4 월 2 일자 중앙정보국(CIA) ‘분석평가실보고서’(Office of Research and Estimate Report, ORE)에는 1948 년 소련이 전쟁을 개시할 가능성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해당 보고서는 소련이 서유럽과 근동지역을 단기간 내 점령할 수 있는 군사역량이 충분하다고 평가하고, 소련군의 기동성이 뛰어나고 육해공군 간 군사연계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점을 근거로 소련의 전면전 개시

20 가능성을 마냥 낮게만 볼 수는 없다고 평가했죠. 그러나 소련이 국가 전반의 경제가 안정을 되찾고 핵무기 개발을 위한 기술적인 발전이 충분히 이루어진 시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전면전을 최대한 회피하려 들 것이라는 이유에서, 결국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결론짓습니다.

미국 지도부의 낙관적인 세계인식은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됩니다. 1948 년 9 월 28 일자 및 1950 년 4 월 6 일자에 발간된 분석평가실보고서(ORE)에서도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 시기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시기보다 늦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죠.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 제작을 위한 핵실험의 성공 시기를 1950-53 년으로 추측했고, 1953 년까지는 핵탄두 100 기를 생산하고 1954-55 년까지는 200 기를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으나 그러한 가능성은 낮게 평가되었습니다. 미국이 소련이 핵폭탄 200 기를 생산하는 시점에 기준을 두었던 이유는, 미국의 주요 전략시설을 효과적으로 파괴함으로써 국가안보에 즉각적인 위협을 끼칠 수 있는 핵무기 최소 수량이 200 기라고 스스로 평가했기 때문입니다(ORE 60-48: Threats to the Security of the United States, 28 Sep. 1948; ORE 91-49: Estimate of the Effects of the Soviet Possession of the Atomic Bomb upon the Security of the United States and upon the Probabilities of Direct Soviet Military Action, 6 Apr. 1950).

이러한 평가는 유사 시기 다른 국가기관 보고서에서도 발견됩니다. 1950 년 4 월 14 일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21 보고서는 시기별 소련의 핵무기 개발 수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1950 년에는 10-20 기, 1952 년에는 45-90 기, 1954- 1955 년에는 200 기가 될 것으로 재평가했죠(NSC 68: U.S. Objectives and Programs for National Security, April 14, 1950).

트루먼 행정부의 이러한 여유는 1949 년 국무부(DOS)의 ‘핵에너지에의 국제사회 통제에 관한 문제의 결론’(Conclusions on Problems Related to the International Control of Atomic Energy)이라는 제목의 메모에서도 나타납니다. 해당 문서는 다음과 같이 소련의 전면전 개시 가능성을 평가하고 있죠: “소련의 전면전 개시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 시점, 소련의 지도자로써 정점에 도달해 있는 스탈린이 영토 침탈과 국가 위협과 같은 무모한 도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없다. 소련의 정치체제 자체가 변화를 겪지 않는 한 소련이 미국을 상대로 섣불리 전면전을 걸어올 국내정치적 유인은 없다.” (Policy Planning Staff of the DoS: Memorandum Draft, Formosa, 7 Aug. 1950). 무엇보다 1950 년 4 월 25 일 시점에도 미국은 여전히 중국과 소련의 공산진영에 대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즉 자유진영의 우위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내용은 주소련 미국대사관의 합동정보위원회(Joint Intelligence Committee)의 보고서(Soviet Intentions)에서 확인할 수 있죠.

이 같은 확신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로는 첫째, 소련 군부가 1950 년을 기점으로 전쟁부와 해군부로 분리됨으로써 종전 군에 대해 소련 지도부가 갖고 있던 절대적 영향력이 상당 부분 축소되었다는

22 점, 둘째, 소련은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지 않고 원해에서의 군사작전 경험이 전무함으로 해군의 전략적 운용범위가 근해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 셋째, 일각에서는 소련의 공군력이 유럽 대륙을 단기간에 점령할 수 있을 만큼 발달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 보유하고 있는 전력자산(특히 원자폭탄 수량)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이는 가능성이 낮은, 무엇보다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없는, 희망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점이었습니다(FRUS Report: Enclosure 514 - Soviet Intentions, 25 Apr.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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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나가사키 평화기념상

23 결국 1940 년대 미국의 안보전략 및 대소련 인식은 미국의 증대된 국제적 영향력과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다소 희망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유일한 핵보유국(nuclear monopoly)이었던 미국이 그려낼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죠.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미국의 이 같은 희망적 태도는 한국전쟁의 발발, 특히 중국이 참전하게 되는 1950 년 10 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변화합니다. 이는 미국 지도부가 종전 직후 수립했던 대소련 핵전략이 사실상 이상적인 낙관론에 불과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죠.

핵전략의 형성기: 38 도선 붕괴 이후 위협인식의 변화

앞선 1 기의 시기, 즉 나가사키에의 원폭 투하 시점부터 한국전쟁의 발발 직전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의 대(對)소련 위협 인식은 대체로 미국 스스로가 관리 및 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되어왔습니다. 군부도 나름대로는 유사시 소련과 소련의 위성국가들에 핵공격을 전개할 22 곳의 요충지를 정해두고 있었죠(Epstein 1987, 14).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1950 년 6 월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특히 10 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는 시점부터 세계 공산진영에 대한 미국의 위협인식에는 상당한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24 1950 년 6 월 25 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 가능성에 대해 상세히 논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죠.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작성된 해당 보고서는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극히 낮다고 보았고, 소련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희망할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군사전력을 불필요하게 낭비하게 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죠(NSC 73: Draft Estimate Possible Further Danger Points in the Light of the Korean Situation, 1 Jul.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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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앞

25 반면에 소련이 한반도 외의 지역, 예컨대 유럽을 침범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7 월 27 일자 보고서는 만약 소련이 유럽을 침범할 경우 미국은 그 즉시 ‘전면전쟁계획’(General War Plan)을 수행할 것이며, 핵무기를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경우 주춤하지 않고 과감히 핵전력을 활용하여 적을 격퇴시킬 것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NSC 73: Draft. The Position and Actions of the U.S. with Respect to Possible Further Soviet Moves in the Light of the Korean Situation, July 27, 1950).

이러한 자신감으로 국무부 정책기획실(PPS)에서는 1950 년 7 월과 8 월 세 건의 메모가 작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메모는 7 월 10 일자에 작성된 것으로, 소련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다면 소모전의 가능성이 높은 한반도에서 소련과 세계전쟁을 시작할 필요는 없으므로 즉각 철수하고 대전쟁계획(General War Plan)에 따라 전쟁에 대비할 것을 피력했습니다(PPS: Memorandum - U.S. Courses of Action in the Event Soviet Forces Enter Korean Hostilities, 11 Jul. 1950). 이후 7 월 24 일자 메모에서는 소련과 불가피한 대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이것이 전면전, 나아가 세계전쟁으로까지 비화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8 월 18 일자의 메모에서는 러시아의 지도부가 결국에는 평화와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방안을 선택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PPS: Memorandum - NSC 76-U.S.

26 Courses of Action in the Event Soviet Forces Enter Korean Hostilities 24 Jul. 1950).

이처럼 위의 시기까지만 해도 미국은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소련과 전쟁을 하더라도 미국이 우위를 점해 전쟁을 승리로 종결하거나, 전쟁이 전면전 나아가 세계전쟁으로까지 확대되지 않고 양국이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종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메모 가운데 소련의 핵무기와 소련이 그것을 전쟁에 사용할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소련의 핵무기 전력과 운용능력 자체를 미국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50 년 8 월 8 일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러한 인식을 엿볼 수 있죠. 그는 소련이 한국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소련에 비해 군사적 우위에 있으므로 중국의 참전 또한 50%의 가능성을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후 약 2 개월의 시간이 흐른 9 월 초까지도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만일의 사태를 배제할 수는 없다고 전제를 하면서도, 중국이 북한을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참전이라는 과감한 선택을 할 가능성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표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채 1 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오히려 국내정치적인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참전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27 않을 것이라 분석했던 것이죠(NSC 81: U.S. Courses of Action with Respect to Korea, 1 Sep. 1950).

그러나 이처럼 소련, 그리고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을 했던 미국의 입장은 1950 년 9 월 말을 기점으로 급변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9 월 21 일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고서에서 미국은 소련이 위성국가들 내 전략적 거점지에 비행장과 전쟁에 대비한 보급로를 구축하고 있음을 상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미국이 소련의 전쟁 개시 파급력을 한국전쟁의 것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인식했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NSC 68/1: U.S. Objectives and Programs for National Security, 30 Sep. 1950). 이는 즉 미국의 소련에 대한 위협인식이 종전에 비해 더 높아졌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또한 소련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이 1950 년 이전 시기에서는 전면전이었던 것과 달리, 해당 보고서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소련 자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NSC 68/1: U.S. Objectives and Programs for National Security, 21 Sep. 1950).

비슷한 위협인식은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1950 년 10 월 11 일자 국무부 정책기획실(PPS)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자국 군사력이 현 시점보다 증강되지 않는 한 소련과 협상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소련과의 전면 대치가 미국에게도 버거울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후 11 월에 발간된 두 차례의

28 보고서에서는 미국이 중공군의 개입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중국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나아가 미국의 소련 및 중국에 대한 위협인식이 종전 시기보다도 더 고조되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 11 월 15 일자 보고서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미국은 해당 보고서에서 중공군과 소련 공군의 지원이 12 개월간 지속되고 소련과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이 공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의 여부가 매우 회의적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 보고서에서 미국은 소련이 세계전쟁까지의 위협을 무릅쓰고 한반도, 나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 한다면, 오히려 미국은 빠른 시일 내에 ‘명예롭게 한국에서 철수’하는 방안을 다시금 적시하고 있습니다(NSC 81: Draft. U.S. Courses of Action with Respect to Korea, 4 Dec. 195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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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나가사키 원폭기념관 內 무엇보다 1951 년 1 월 16 일에 작성된 국무부 정책기획실(PPS) 문서에는 나가사키에의 원폭 투하부터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이전 시점까지 미국이 보여주었던 이상적인 기대, 그리고 미국의 군사전력 우위에 대한 확신이 그 반대의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히려 미국은 소련과의 전쟁을 심각하게 우려하며 극단적인 상황에서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미국과 NATO 를 위시한 서구사회가 소련(그리고 중국)에 대적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죠. 보다 구체적으로 해당 문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유진영이 소련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항복 또는 힘의 상대적 우위에 따라 소련의 팽창 목표를 포기하게

30 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에게도 전쟁을 시작하기 불리한 상황이다. 미래에도 상황은 마찬가지 이겠으나 경쟁자와의 국력차는 새로운 무기체계의 개발로 인해 점차 좁혀질 것이다. 만약 소련의 군사전력이 지속적인 발전을 꾀하게 된다면 제 3 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둘째, ‘따라서 미국은 꼭 전쟁의 수단으로 소련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 즉, 소련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낳을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력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서구진영에서 진행해온 경제제재로는 소련과의 전쟁을 억제하기 부족하다’(PPS: Draft, Frustrating the Design, 16 Jan. 1951).

특기할 만한 점은 종전에 비해 미국이 소련의 핵 역량과 전쟁 개시 가능성 등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으며, 그 기저에는 소련에 대적하는 상대편으로서 미국과 NATO 가 당시 상황으로는 소련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다른 사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51 년 2 월 1 일, 국무부 정책기획실(PPS)은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을 스스로의 힘으로 대적할 역량이 부족하며, 유고슬로비아와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해야만 소련의 세력이 서유럽과 북아프리카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주장에는 소련이 유고슬라비아를 2-3 년 이내 침공할 것을 우려하는 미국의

31 위협인식이 담겨있었습니다(PPS: Draft, Course of Action to Meet the Threat of Soviet Action in the Spring of 1951, 1 Feb. 1951).

이처럼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자신의 군사력은 상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 소련의 핵전략과 핵무기 운용능력은 종전에 비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은 소련이 미국의 핵 역량을 곧 따라잡을 것을 심각한 국가위협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죠. 그 밖에도 상기한 것처럼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소련보다 월등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소련 외교노선을 논하는 국무부 정책기획실(PPS) 문서의 1951 년 2 월 2 일자 메모 역시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독점이 깨지고, 1952 년 중순이 되면 소련이 서구국가들을 무력화시키고 심지어는 파괴할 만큼의 위협이 되는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습니다(PPS: Memorandum - A National Strategy for the Soviet Union, 2 Feb. 1951).

또한, 4 월 25 일자에 작성된 또 다른 메모에는 소련이 자유진영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듯 보여도 사실 소련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국력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소련의 전면전 도전에 대해 효과적인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자유진영의 군사력 증강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양 진영 간 군사역량의 간극이므로 공산진영에 저항하는 자유진영의 군사력을 필사적으로 확보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은 소련이 유럽대륙을 실질적으로 침공할 경우 미국이

32 핵무기로 보복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므로 그것만이 나름의 효과적인 억제 기제가 됨을 설명합니다(PPS: Embassy Dispatch 626, Embassy Estimate of Soviet Intentions to the Department of State from Moscow, 25 Apr. 1951).

나가며: 미국 핵전략의 기원

트루먼 행정부 시기 핵무기의 대량생산 변이현상(1951-1953)에 대한 원인은 결국 미 · 소의 핵무기 개발사보다도 한반도의 역사에서 발견됩니다. 1949 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미국에게 있어 전혀 예상 치 못했던 변수였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이 예상하지 못했던 두 번째 변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국이 한반도에서 고전하게 되면서 한국전쟁이 소모전의 성격을 지니게 된 점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변수에 직면해 미국의 대소련 위협인식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고, 미국 스스로도 자신이 한반도에서 처한 상황을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죠.

저의 연구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위협인식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와 다른 과정으로 변화했다는 점입니다. 즉, 소련이 원자폭탄 혹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던 시점보다도, 미국의 대소련 위협인식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후의 시점부터 상당한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자신이

33 예상하지 못했던 상기한 두 변수에 직면해, 기존에는 낙관적으로 평가했던 자신의 위기관리 능력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이죠. 요컨대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 년 4 월까지도 소련을 실질적인 핵위협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핵위협이 도래할 시기를 대략 1955 년 즈음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ORE 91-49: Estimate of the Effects of the Soviet Possession of the Atomic Bomb upon the Probabilities of Direct Soviet Military Action, 6 Apr. 1950). 그러나 그러한 미국의 낙관적인 태도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직후인 동년 11 월에는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되죠. 당시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는 소련의 핵 보유량을 정확한 숫자로 보고할 뿐만 아니라, 조만간 소련이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하는 능력까지 확보하게 될 위협과 무엇보다 미 · 소가 2 년 이내로 위태로운 대치 상황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전망하고 있습니다(NIE-3: Soviet Capabilities and Intentions, 15 Nov. 1950).

때문에 미국은 자신이 핵전력에 있어 여전히 소련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많은 논의 끝에 기각 시키게 되죠. 예를 들어 합동참모본부(JCS)의 1953 년 3 월 24 일자 보고서에서는 여전히 한반도에서 핵무기의 사용이 가져올 긍정적 결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엔군에게 야기되는 위협을 보다 효과적이고, 신속하고, 저렴하게,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핵 위협을 세계적으로 억제할 수 있으며,

34 미국의 핵공격 이후 소련이 중국에 대해 지원에 소홀히한다면 이는 중 · 소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4 월 15 일자 국가안전보장회의 NCS-147 보고서는 한반도에서 핵무기의 사용이 가져올 부정적인 효과들을 강조함으로써 군부의 의견과는 대치되는 결정을 합니다(Report by the Joint Strategic Plans Committee to the JCS, 24 Mar. 1953). 그러한 결정의 근거로는 만약 핵무기의 사용이 군사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오히려 핵무기의 억제 기능이 감소된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유사시 세계안보전략 차원에서 미국이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가 부족할 상황을 우려했습니다. 즉,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 보유고가 충분하지 못할 때, 소련과의 전면충돌을 피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죠(NSC-147: Analysis of Possible Courses of Action in Korea, 15 Apr. 1953).

이처럼 트루먼 행정부 시기 미국이 핵무기의 대량생산을 결정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전쟁의 두 가지 변수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중 · 소 공산진영에 대한 미국의 위협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미국은 핵무기의 대량생산을 통해 자국 및 세계 자유진영의 안보를 꾀했던 것이죠. 따라서 트루먼 행정부의 핵무기 대량생산 정책결정은 미국 초기 핵전략의 전술적 목적에서 기원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 연구가 미국 핵전략의 기원을 다시금 추적해보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히 관련한 논의가 학계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35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대한 연구가 핵전략을 다루고 있지만, 그 누구도 핵전략의 기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엇보다 핵의 개발사 측면에서의 접근법으로는 1951 년의 변이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에도, 아무도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핵전략의 기원에 대해 제가 제시하는 새로운 역사적 해석은 기존문헌의 한계를 새롭게 보완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는 핵전략의 발전사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역할을 재조명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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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나가사키 원폭기념관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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