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의 1960 년대와 미중데탕트
천하질서를 앞서 근심하고, 뒤미처 즐기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마오쩌둥 주석 기념당 · 강애리 · 성균관대학교
들어가며
“공칠과삼(功七過三)”
마오쩌둥(이하 마오)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라는 이름 하에 부렸던 광기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 덩샤오핑이 마오에 대해 한 말로, 마오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공식 평가도 이와 같습니다. 마오가 일정 기간 착오(과삼, 過三)를 범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가 중국공산당과 중화민민공화국의 주요한 창시자(공칠, 功七)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방 12 기의 둘째 날의 첫 일정으로 우리는 마오쩌둥 주석 기념당(이하 기념당)으로 향했습니다. 필시 아침부터 사람이 많기에 매표소가 시작하기 전부터 가라는 버스 기사님의 조언에 따라 이른 아침부터 향했습니다. 보안검사를 끝내고 천안문 광장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채 기념당에 가까워지기 전부터 중국
30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사불란하게 기념당으로 향하는 그 모습에서 말이죠. 그들에게 있어 마오주석은 당과 국가의 창시자로 영원히 기억될 수 밖에 없다는 것, 군부독재정권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진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기시감이 일었습니다. 최근에 갔었던 중국 장사의 마오쩌둥 생가를 방문했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10.1m 의 마오 동상 앞에서 헌화를 하고, 3 번의 절을 하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 마오의 생가에서 마치 성지순례를 하러 온 시끌시끌한 중국사람들과 함께 여유 부릴 틈조차 주지 않는 줄을 서서 마오의 생가를 ‘타의적으로 통과’한 경험, 그들의 옷에 하나같이 달린 마오쩌둥의 얼굴 모양 배지를 관찰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생경했는데, 마오 기념당을 들어가기 위한 줄을 섰을 때 다시금 장사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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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은 지점이 줄의 앞 부분이고, 뒤로는 긴 줄이 늘어져 있다.
중국에게 있어 마오는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고향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과는 달리, 포름알데히드가 주입된 채 북경 한복판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한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다시금 중국을 이해하는 데 마오가 중요한 열쇠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본 답사기에서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1972 년, 냉전 시기의 국면이 전환된 그 때로 말입니다.
1972 년 냉전 시기의 국면은 전환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국제정세의 변화는 기존의 냉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라 사후적으로 평가할 만큼
32 중요했습니다. 당시의 다른 행위자들을 차치하고 중국만을 보았을 때, 이 미중데탕트와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이후의 1978 년 중국의 개혁개방, 2000 년대의 중국의 부상까지 현재에 이르러서도 궁극적으로 국제질서의 재편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 답사기는 미중데탕트의 배경에 있어 1960 년대 중국의 對소련 인식변화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1960 년대의 인식이란 마오의 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60 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은 대외관계에 있어 철저하게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세계 공산주의 혁명과 이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창하며 중국의 대외정책을 구상하였고, 당시 중국에 있어 위협으로 상정되었던 것은 미국이었기 때문에 소련일변도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물론 1950 년대 말부터 흐루시초프 집권 이후에 중국이 소련에 대해 불편한 감정들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1960 년대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이 불편한 인식이 확장되었습니다. 중국은 1960 년대 말부터 대외적으로 세계혁명론과 반제반수(反帝反修) 의 이름 하에 미국과 소련 모두를 패권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각 국에 대한 독자노선을 선택했습니다.
다만, 1960 년대는 어떻게 보면 지금보다 더 마오와 문혁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이 문혁을 ‘마오의 실수’, ‘10 년 동란’으로 규정하고 1960 년 당시의 상황은 중국이 지나친 좌경화에 빠져 세계로부터 격리되었으며, 이후 개혁개방시기에 본격적으로 세계와 소통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33 ‘좌경화’란 마오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을 당시, 중국의 열사들이 희생하여 쟁취한 사회주의 정권이 자본주의에 의해 무너진다고 믿었던 부분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문혁을 국가 내부의 ‘동란’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대의 상황을 보았을 때, 이는 오히려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이념적, 정치적 분화에 따른 국내의 ‘반발’로 평가하는 것이 더 옳은 것 같습니다.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문혁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인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만일 몸소 겪지 않았다면, 근본적으로
문혁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고난을 두루 다 겪은 우리 민족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 다음에 가지게 된 재산이다.”
(왕지엔이(王建一) <쟈오띠엔(焦点)> 잡지 편집장 발언)
이처럼 마오쩌둥과 문혁을 배제한 채 중국, 특히나 1960 년대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문화대혁명부터 미중데탕트에 이르기까지 현재는 과거를 딛고 구성되는 것이겠지만, 문혁은 1949 년 신중국 성립 이후 지속되던 중국사회주의체제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변곡점으로 작용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문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의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중국현대사연구는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의 배경,
34 문화대혁명의 전개과정, 문화대혁명의 결과와 그 이후 개혁개방까지의 과정과 같이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발생배경을 분석하는 데 있어 1)사상적으로 좌경화된 이론과 현실과의 상호작용, 2) 정치적 측면에서 개인독단과 개인숭배의 상호작용, 3) 마지막으로 국제적 반수정주의와 국내적 반수정주의의 상호작용 이 세가지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본 답사기에서는 이 세 가지 발생원인 중, 첫 번째와 세 번째에 가까운 입장에서 1960 년대 인식변화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즉, 당시 상황에서 중국 외부에서 수정주의가 나타나고 소련공산당 20 대가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국내에서도 이러한 수정주의가 나타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좌경화된 이론과 실천이 확대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상적 배경 속에서 소련과의 다소 경쟁적인 상호작용으로 반소(反蘇)인식이 커진 것이죠.
‘중국과 소련이 불평등하다.’
마오는 기본적으로 중국과 소련이 불평등하다고 인식했습니다. 1960 년대에 이르러 소련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1950 년대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35 1950 년 2 월 14 일, 중국과 소련 양국은 모스크바에서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中蘇友好同盟互助條約, Zhōng-Sū Yǒuhǎo Tóngméng Hùzhù Tiáoyuè), 이하 중소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기존의 1945 년에 소련과 중국국민당 사이에 맺어진 동맹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자 새로이 중국공산당과 조약을 맺은 것이죠. 이는 물론 마오의 입장에서 스탈린을 따라가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스탈린의 외교인식의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당시 스탈린에게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자국의 안보였는데, 스탈린은 구체적으로 소련 주변에 비무장지대를 만드는, 즉 미국 편이 없는 것으로 안보를 추구했습니다. 마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1949 년 10 월 1 일 새로이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확실한 우방을 확보해야 했고, 이는 중간 지대가 필요했던 스탈린의 계산에 맞아떨어졌습니다. 물론 양국 간의 사상적인 유사성이 있지만, 이전의 소련과 국민당과의 동맹을 고려했을 때, 1950 년 중소 조약 역시 이념/사상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해관계는 1949 년 12 월 16 일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이후 1950 년 1 월 말까지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회담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맺어진 조약의 내용도 비교적 소련에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중국은 소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실한 약소국이었기 때문이죠.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友好同盟互助條約)으로 명명되었지만 사실상
36 중국이 얻은 것은 5 년에 걸친 약 3 억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반해 스탈린은 창춘 철도, 뤼순, 다롄 에 관한 협정, 중국에 대한 차관 대부 승인에 대한 협정 등 스스로가 원했던 중간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중국 영토에 대한 특권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마오는 이러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1950 년 4 월,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열린 중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 찬성투표에서 마오가 손을 들지 않았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런 불평등한 조약의 내용에 불만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1960 년, 중소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 중국과 소련이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있고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스크바 선언의 준수를 촉구하는 형태로 간접적으로, 그렇지만 보다 공식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는 형제적, 평등적, 동지적, 국제주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모스크바 선언’을 소련이 지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1963 년 6 월 14 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제공산당운동의 총노선에 관한 건의 (關于國際主義共産黨運動 總路線的建議)>을 통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평등한 양국관계의 당위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동안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불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인식의 흐름이 변화하는 계기가 바로 스탈린의 죽음이었습니다. 1953 년 3 월 5 일,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37 사망했습니다. 마오의 개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스탈린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의 전략적 계산과 필요에 의해 기꺼이 모스크바의 지시를 따르면서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소관계가 불평등하다고 생각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감으로 커지게 되었으며, 1960 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대등하게 취급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에 탐탁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이후에 사회주의 진영에서 마오가 가지게 된 위상이 상당히 올라갔고, 스탈린이 죽은 뒤 마오는 이러한 흐름을 타고 세계사회주의 진영에서 지도권을 주장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의 죽음이 마오에게 있어 사회주의 진영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던 것과 함께 이는 이후의 중소 관계에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1956 년 2 월 소련 공산당 제 20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소련공산당 제 1 서기 흐루시초프가 대회에서 당의 영도자 스탈린에 대해 공격하는 비밀연설을 했습니다. 마오는 스탈린을 격하하고 탈스탈린화하는 것은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한 혼란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마오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마오의 반대세력이 마오를 견제하는 공격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집단지도체제의 원칙이 점차 강조되고 개인 숭배가 규탄 받았는데, 이에 마오 역시 흐루시초프의 연설에 연동되어 집단지도체제를
38 강조하는 조치들에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마오가 이에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고, 사적으로는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오가 당시 상황에서 마지못해 집단지도체제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도 그럴 것이, 점차 마오에게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국내의 상황에서 1958 년부터 1961 년까지 마오가 야심 차게 진행한 대약직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마오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오의 반수방수(反修防修) 인식
마오는 점차 흐루시초프의 집권과 비밀 연설 이후 반소인식과 중국만의 길의 사상적 배경을 닦기 시작하고, 문혁은 큰 틀에서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오는 다음과 같이 모순론에서 ‘공성’과 ‘개성’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모순의 보편성과 모순의 특수성의 관계는 모순의 공성(共性,
공통 성질)과 개성(個性, 개별 성질)의 관계이다. 공성은 일체의 과정
에 존재하는 모순이며, 일체 과정의 시작과 끝을 관통한다. 모순은 바
로 운동이며, 사물이며, 과정이며, 사상이다. 사물의 모순을 부정하는
것은 일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공통의 원리이며 동서고금을 막
론하고 예외는 없다. 고로 공성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성은
39 일체의 개성 중에 포함되어 있으며, 개성이 없으면 공성도 없다.”
여기서 모순의 공성이란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을 말하며, 모순의 개성이란 중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중국이 행한 일련의 혁명은 중국이 처한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고 이를 실천하여 달성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중국과 소련이 같은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이더라도 서로 다른 길을 갈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모순론의 개성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의 죽음 이후 사회주의 진영과 소련 스스로의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길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 역시 소련의 개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 중소논쟁 자료들을 보면, 당시의 중국과 소련이 해결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이 사회주의이고 사회주의는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중소 간의 불평등 인식을 바탕으로 스탈린의 죽음 이후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일어난 흐루시초프와 마오의 대립까지 함께 작용하여 중소 양국은 같은 공성 하의 다른 개성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중소관계에서 소련은 우파적으로 경사되어 대내외의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중국은 좌파적으로 경사되어 소련공산당의 변화를 수차례에 걸쳐 비판했습니다.
1963 년 9 월 6 일부터 1964 년 7 월 14 일까지 <인민일보>와 잡지 <홍기(红旗)>에 발행된 9 편의 논평은 흐루시초프가 소련
40 공산당을 주도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켰고, 소련을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라 볼 수 없다고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9 평의 제목만 보아도 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9 평(九評)>
1. 소련공산당 지도가 우리와 분기하는 유래와 발전(苏共领导
同我们分歧的由来和发展)
2. 스탈린 문제에 관하여(关于斯大林问题)
3.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인가?( 南斯拉夫是社会主义
国家吗?)
4. 신식민주의의 변호인(新殖民主义的辩护士)
5. 전쟁과 평화 문제에서의 두 노선(在战争与和平问题上的两
条路线)
6.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평화공존 정책(两种根本对立
的和平共处政策)
7.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당대 최대 분열주의자다(苏共领导是
当代最大的分裂主义者)
8. 프롤레타리아계급 혁명과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无产阶级
革命和赫鲁晓夫修正主义)
9. 흐루시초프의 가짜 공산주의와 세계 역사 속에서 그것의 교훈에
관하여(关于赫鲁晓夫的假共产主义及其在世界历史上
的教训)
41 마오의 문혁은 소련보다 더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문혁의 전개과정에서 마오의 이런 문혁 초창기의 주장에 의심스러운 부분들, 즉 권력투쟁의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상호작용이 역사를 이끌어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 문혁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다른 노선, 즉 다른 개성을 택한 소련을 비판하고 중국공산당에 수정주의의 흐름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防修)하려고 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의 수정주의가 결국 앞서 말했던 중소 관계의 변화에서 출발을 했고 문혁의 전개과정과 이후의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사회주의 혁명들을 고려했을 때, 국내적 반수정주의와 국제적 반수정주의는 필연적으로 상호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수정주의에 대한 움직임은 앞서 언급한 소련공산당 제 20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 연설 이후에 본격화 되었습니다. 물론 마오가 집단지도체제에 지지를 표하는 등의 연설을 한 바 있지만, 이후 한편으로 마오는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며,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혁명을 타도하는 것’을 문혁의 공식적인 목표로 삼았고 마오는 국내에서는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는 ‘반수방수(反修防修)’를, 국외에서는 반수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당시의 마오는 프롤레타리아 집권 정당의 지도자로 해야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주장했을 것입니다. 공산당의 지도자는 응당 언제나 깨어 있으며, 당과 국가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을 폭로하고
42 극복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합니다. 마오 역시 그런 맥락에서 국내외의 수정주의를 대상으로 깨어 있었고, 인민들이 어두운 길로 가지 않도록 압박하고 안내한 역할을 한 것이죠. 대외적으로는 패권을 추구하는 잘못된 길인 반 패권, 반 제국을 외치고, 사회주의 진영이 잘못된 길인 수정주의로 가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에 마오의 반수방수 주장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당내외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지도자의 본 역할을 상기시키고 마침 당시의 이데올로기적으로 분화된 노선의 경계에서 이를 지적하며 환영 받아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수방수의 흐름이 격화되면서 ‘마오의 실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오의 이런 이론적 틀은 좋으나, 국내외의 반수정주의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마오는 이론과 실체의 괴리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인 정책으로 전환되었을 때 원래의 목적과 성격을 잃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읽는 데 실패한 데다 후반부의 문혁을 보면, 문혁의 부작용은 마오의 손을 이미 떠나 홍위병의 손에 있었습니다. 당과 국가의 정치 형세나 사회계급관계에 대해 해석을 실패했고, 이러한 잘못된 해석을 기반으로 수정주의를 정의 내렸을 때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오의 주장에서 벗어난 자는 곧 수정주의자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이것이 애초에 마오가 비판한 ‘수정주의’가 아니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43 정리하자면, 외부적으로 반소외교를 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로 이 국내수정주의와 국제수정주의간의 상호작용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보다 더 심각하게 인식한 것은 당시의 마오의 주장이 중국공산당원과 대다수의 군중들의 사상과 정치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전체 당원들과 간부들이 수정주의의 부활과 위험에 현실적으로 노출되었다고 느끼도록 하였고, 이런 위기감은 많은 사람들이 문혁에 참가하게 하는 사상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중소논쟁에서 이와 같은 상호작용은 이미 좌경화된 중국 공산당의 좌경화를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한편으로는 군중을 대상으로 한 선전물 역시 ‘반수’ 성향이 짙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결국 소련 수정주의와 대결구도에 대중들이 동조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무릇 적이 반대하는 것을 우리가 지지해야 하고, 무릇 적이 지지하는 것을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고 말한 마오의 말은 절대화 되었습니다. 반수정주의 양상이 극단으로 치닫아 마오의 말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관점은 곧 적,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수정주의 딱지가 붙어 고통받았습니다.
44
죄목으로 처벌받고 있다. (https://www.bbc.com/news/world-asia-china-19807561
“Rare Chinese Revolution photos on display”)
45
마오의 전바오다오(珍寶島) 중소 국경분쟁
“전바오다오 전투는 중국이 주도했다.”
‘전바오다오 자위 반격 작전 소개 자료(珍寶島自衛反擊作戰介紹材料)’
1960 년대 말 문혁이란 광기의 끝에 다다를 시점에, 중국은 보다 현실주의적 국가로 변했던 것 같습니다. 1960 년대 초반만 하여도 미국에 대해 ‘미제국주의는 전 세계 인민의 가장 흉악한 적, 투쟁의 대상’으로 규정했던 반면에, 1960 년대 말에 이르러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에 대해 위협 인식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전의 1950 년대부터 쌓아오던 불평등인식, 반소인식이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다만, 그동안 소련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던 중국이 보다 결정적으로 반소인식을 확립한 계기가 된 사건은 전바오다오를 둘러싼 중소 국경분쟁입니다.
1969 년 3 월 2 일, 중소 국경지대인 중국 헤이롱장 성 우수리강 중류에 있는 섬 전바오다오에서 양국 군대가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복싱에 특화되어 있는 러시아 군대에 대적하기 위해 죽봉을 이용한 무술을 쓴 중국 군인이 동원되었다는 일화를 남길 만큼, 어쩌면 그 시작은 중소 양국 군인들 간의 단순한 몸싸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몸싸움이 있고 열흘 뒤쯤부터 장갑차와 대전차포가 동원되었고 무력 분쟁으로 격화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인민일보의 자료를 보면 중국은 전시 수도를 충칭(重慶)으로 옮길 생각까지 가지고
46 있었고, 전바오다오 인민들은 실제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소식들이 퍼지면서 1960 년대 확산되었던 반소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목에서 이 전바오다오 사건을 ‘마오의 전바오다오 국경분쟁’이라 명명한 데에는 최근 이 사건이 마오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의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1960 년대 말에 들어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물려 중소 간의 크고 작은 국경분쟁은 사실 자주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9 60 년대 국내의 상황으로 인해 당시 중국은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보다는 자위적인 반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전바오다오 사건이 일어나기 1 년 전인 1968 년에 중소국경에 무단으로 들어온 소련 장갑차가 중국 인민 4 명을 죽이는 사건(치리친다오(七里沁島)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국경협상도 협상이지만, 마오는 이에 ‘쓴 교훈을 소련에 보여주자’며 이후 소련이 또다시 중국의 국경지역에서 공격한다면 자위적인 목적을 가진 반격을 확실히 하자고 주장하고 소련을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바오다오에서 전방부대 간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소련의 국경 침입에 대한 마오의 지침에 따라 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반소 인식이 반영된 결과물이자,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즉 미중데탕트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실제 마오는 그래서인지, 3 월 15 일 전바오다오 국경분쟁에서 중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소식에서 마오는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47
나가며
“복잡한 국제정세는 (저우언라이를 가리키며) 저 사람과 이야기하고,
나하고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자.”
(1972 년 2 월 닉슨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마오쩌둥 발언)
현재에도, 1972 년 ‘상하이 코뮈니케(상하이 공동선언)’이 발표되는 그 순간에도, 마오는 중국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1972 년 당시에는 마오가 살아있어 방중한 닉슨을 마오가 집무실로 초청해 직접 면담했다고 하나, 건강 상의 악화로 구체적인 정책 논의는 저우언라이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닉슨과 저우언라이 모두 느꼈을 것입니다. 마오가 정신적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1960 년대는 그것이 실수든, 공적이든, 어쨌거나 마오로 점철된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문혁을 둘러싼 중국 국내의 상황에 대해 안타깝긴 합니다. 다만, 대외적으로 반소인식을 갖추기까지, 정책레벨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미국의 실리를 계산해보기까지 마오가 함께 한 것은 분명합니다. 1974 년 운명을 달리하기 직전에 닉슨과 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군대를 외부에 내보내지 않습니다”라고 마오가 발언한 바 있는데, 이 역시 마오가 당시 미국에게 베트남 전쟁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랑방에서 형과 세를 잘 읽어야 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대외정책을 꾸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문혁의 말로를 보았을 때, 마오는 문혁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 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48 생각이 들 정도로 형과 세를 읽지 못했습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큰 틀이든, 국내 정치적 싸움의 틀이든 그는 오판했고 ‘실수’했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다만, 그의 1960 년대의 그런 행보는 적어도 중국의 미래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미데탕트를 시작으로 중국은 1978 년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뤄냈으며, 중국은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혁에 대한 반성으로 지나친 좌경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중국의 모습이 과거 1960 년대의 중국에 비해 변했다고 해도, 마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할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의 임무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방향에 따라 역량을
집중하여 사회주의 현대화를 이루는 것이다”(중국 헌법)
중국이 흔히 말하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역시 이론적으로 마오의 모순론에 나타난 공성과 개성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곳곳에서 마오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마치 장사와 북경에서 느꼈던 기시감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본 답사기를 준비하며 사랑방을 통해 중국을 이해하는 열쇠로 마오와 문혁, 당대의 대외 인식을 짚어 나간 이 경험은 앞으로의 중국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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