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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김지남의 천하질서관

EAI 사랑방 11기 규슈 답사기: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9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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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교류박물관 · 전재은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 11 기의 규슈 답사 둘째 날 마지막 일정은 한일교류박물관 방문이었습니다. 이삼평 신사, 도자기 박물관과 사세보 해상자위대 자료관을 답사한 후 사랑방에서 ‘한일교류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한일교류박물관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곳은 한일 교류와 관련하여 일본의 시각이 아닌 제 3 자의 중립적인 시각에서 전시를 하고 있으며, 16 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전시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기대가 커졌습니다. 특히 원폭자료관이나 해상자위대 자료관에서 일본의 시각에서 일본을 피해자로 서술하여 전시한 모습에 실망을 한 뒤라서 더욱 기대됐습니다.

한일교류박물관의 주요 업무는 나고야성 보존, 한일 교류사 전시 및 한일 교류사업 지원입니다. 이러한 한일 교류사업 지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통신사를 통해 문화, 의료, 기술 등을 교류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 같습니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한일교류박물관 에는 파랗고 높은 하늘과 맑은 공기가 저희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한일교류박물관에 입장하기 전에 저희는 박물관 앞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다도 떨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열심히 토론하고 공부하느라 나누지 못했던 얘기들을 하며 빡빡했던 규슈 일정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일교류박물관 앞 카페에서 사랑방11기
한일교류박물관 앞 카페에서 사랑방11기

아이스크림을 먹고, 저희는 한일교류박물관을 향했습니다. 이전의 답사 보고서들과 블로그의 글들을 통해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이 드물며 아예 다른 방문객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봤던 저는 박물관을 나오는 일본인 가족을 보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한일간 감정이 악화된 현재, 한일교류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 또한 적었다면 매우 안타까웠을 텐데, 다행히도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올 때까지 생각보다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어 왠지 뿌듯하고 기뻤습니다.

답사 이틀 동안 ‘시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던 저는 김지남의 시각과 천하질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 저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술과 일본을 원폭의 피해자로만 표현한 것에서 누구의 시점에서 보는가에 같은 것도 너무나 다르게 보여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Russo-Japanese War 혹은 Sino-Japanese War 이라고 배웠던 것들을 일본에서는 읽기도 불편한 Japanese-Russo War 이나 Japanese-Sino War 라고 지칭한 점에서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술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지남은 이러한 일본 중심의 서술이 아닌 천하질서관을 바탕으로 일본을 평가하였었습니다.

김지남의 삶과 앎

1654 년에 태어난 김지남은 1672 년 18 세의 나이로 역과에 급제했습니다. 그는 사역원에서 다양한 언어를 익히며 역관으로서의 업무를 익혔는데, 특히 한학 혹은 중국어를 전문적으로 하였으며 당시의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1682 년에 그는 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학 역관의 자격으로 합류하였지만, 이후 압물통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지남은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96 일간 보고 느낀 것들을 자세히 기록한 <동사일록>을 작성하게 됩니다. 자신이 나눈 대화, 관찰한 역참들, 일본의 풍경 및 시설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 남아있습니다.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사절단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사절단

같은 해, 김지남은 청나라에도 연행사로 방문하며 역관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김지남은 1712 년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지남은 뛰어난 언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백두산 정상을 지점으로 국경을 확정해야 한다고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업적을 지금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후 김지남은 그의 역관 생활을 바탕으로 조선의 외교 및 통상을 정리한 외교서 《통문관지》를 편찬하게 됩니다. 조선의 지리학적 위치로 인해 중국, 일본과 여진과 접하거나 이웃해 있으며, “외교적 규례와 교섭 사례들을 후세에 남긴 문헌이 부족하고, 그나마 전란으로 말미암아 모두 인몰되어, 전례를 고증할 적에 아무런 징험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는 한계를 인식하여 《 통 문 관 지 》 를 편찬하게 되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통문관지 국역 홈페이지). 내용은 중국에 대한 사대 외교와 일본과 다른 이웃나라들에 대한 교린 외교를 체계적인 서술과 통상 및 외교 분쟁에 대한 기록을 통해 전례의 고증을 포함합니다. 《통문관지》는 당시의 사대교린의 외교를 반영하여 당시의 국제질서를 잘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러한 김지남의 적극적인 역관 활동은 1714 년,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들 중 5 명이 역과에 급제하여 역관 가문의 대를 잇게 되면서, 김지남은 조선의 대표적인 역관들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런 김지남의 저술《통문관지》와 <동사일록>을 통해 각각 17-18 세기 천하질서와 김지남의 이중적 일본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통문관지》와 17-18 세기 천하질서

《통문관지》의 사대편과 교린편에는 17-18 세기의 천하질서와 사대교린 예법이 드러나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천하질서 아래 조선과 일본의 지위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지남의 시각으로 바라본 일본의 지위는 교린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사대편에서는 조선이 중국의 요청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예이자 법으로 따라야 했었는데, 교린편에는 이와 다른 일본이 조선에 요청을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1 특송사, 2 특송사, 3 특송사와 부특통사는 각각 해당 사선만을

다른 배를 대동하지 아니하였는데, 중간에 4 개 사선이 해마다

내조할 때에 부선, 수목선이라 일컫고 각각 2 척을 대동하고

왔으나, 우리 조정에서 규정된 선박 이외라고 하여 물리치고 접대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왜인들이 많은 방면으로 간절히

애걸하면서 기꺼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래부에서 편의에 따라 그들을 대접하도록 허락하고, 금후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고 유시할 것을 계청하였다(통문관지 국역

홈페이지).

왜인들이 접대를 허락할 것을 간절히 애걸하여 동래부에서 대접을 하도록 허락 받았다는 점에서 중국과의 위계구조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힘을 바탕으로 위계구조를 따르도록 했다면, 일본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간절히 바라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조선을 두려운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용재총화에서 이르기를, “고려 말에 왜구가 많았으므로, 조선을

개국한 뒤에 바다 항구의 요해처에다 만호와 수군 처치사를 두었다.

이 때문에 왜인들의 변란이 조금 그쳤으나, 뒤에 또 문제를

일으키므로, 세종이 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비록 크게

이기지는 못하였으나, 왜인들도 또한 우리 나라의 위력을

두려워하였다(통문관지 국역 홈페이지).”

나아가 국제질서 측면에서 일본을 동등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 교린 (상)의 왜사의 숙배를 하는 법식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만력 기유년에 관백의 차왜 현소와 평경직이 와서 말하기를, “이미

서울에 입조할 수 없으니, 전패에 숙배하는 것으로 궐내에서 국왕이

인접하는 의식을 대체하기를 간청합니다.” 하였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도 이것을 허락하고, 부산의 객사에서 행하도록 하였는데,

한결같이 궐내의 의식을 쓰게 하였다. 왜인들이 부산성 밖에 이르러

하마한 다음에, 걸어서 객사의 마당 가운데에 들어와서 땅에 자리를

잡고 행례하였는데, 수십년 이래 감히 이것을 어기지를 못하였다.

그런데 평의성과 평조흥이 사이가 나빠지면서 평경직의 잘못을

드러내고자 하여, 이에 숭정 정축년에 차왜 평성련을 보내 와서

말하기를, “ 조 선 의 통신사는 강호의 당상에서 행례를 하는데,

우리들은 마당에서 숙배하니, 피차에 공평한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청컨대 청 위에서 행례를 하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교지로 인하여 모두 그 숙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왜사가 계책이

궁하자, 이에 마당 가운데에서 판자를 깔고서 행례하기를 청하니,

우리 조정에서 이것을 허락하였다(통문관지 국역 홈페이지).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의 통신사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경도(교토)까지 행차를 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조선은 명의 눈치를 보며 일본의 차왜가 상경하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부산에서 숙배하게 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일본의 사신들에 대한 제한이나 조건들이 존재했습니다.

무릇 일본에서 보내는 사선은 모두 대마도주의 문인을 받은 뒤에야

나올 것. 대마도주에게 전례에 의하여 도서를 만들어 주는데,

종이에다 견양을 찍은 다음에, 예조와 교서관에 갈무리할 것이며,

또 부산포에 두었다가 매양 왜인들이 서계를 가지고 올 적마다

이것으로 빙고해서 그 진위를 검증하여, 만약 격식에 어긋나거나

부험할 수 가 없으면, 배를 도로 일본에 돌려보낼 것(통문관지 국역

홈페이지).

이런 식으로 일본에서 보내는 사선은 대마도에서 한 번 확인을 받고, 다시 부산포에서 확인을 받는 형식으로 제한을 두었습니다. 특히 진위 확인을 하거나 격식에 어긋날 경우에는 배를 일본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은 거부권이 있는 조선의 우월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동사일록과 이중적인 일본관

사대자소를 예로 받아들이며 천하질서 아래 한학 역관으로 지냈던 김지남이 본 일본은 어땠을까요? 김지남의 일본 방문기 <동사일록>을 통해 일본에 대한 김지남의 이중적인 시각을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통신사의 경로
조선 통신사의 경로

우선, 김지남은 일본의 정치, 문화, 지적 수준을 저평가했습니다. 당시 소중화 의식이 팽배했던 조선은 자신들이 진정 정통 중화사상을 계승 받았다고 생각하며 일본을 낮추어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통신사가 조선의 우수한 문화, 문물, 지식을 일방적으로 일본에게 전수하기 위했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을 낮추어 보는 시각이 김지남의 <동사일록>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일본인들이 조선 통신사로 온 자신과 다른 사신들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왜인들 중에는 우리나라 서화를 구하는 자가 매우 많으나, 대마도

도주는 이를 일체 금하여 써 주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서화를

얻으려는 사람이 도주에게 청하면 도주가 상사에게 청해서 자기

생색을 내자는 까닭이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나라 글이 저들에게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내 글을 간곡하게

구하기에 못쓰는 글씨지만 몇 장을 써주었더니, 마치 소중한 보배를

얻은 듯이 여러 번 고맙다고 하고 갔다. 가소로운 일이다. …… 방자

세 묶음과 모지 두어 장을 가지고 와서 글을 써 달라고 간청한다.

체면과 인정 때문에 졸필이나마 써 주었다. 단파와 그를 따라온

왜인들은 고맙다는 뜻을 표하고 공경을 다해 예를 하고 갔다.

가소로운 일이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55-361).

이러한 서술을 통해 사신들에게 글을 청하는 왜인들에 대한 김지남의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자신들의 글을 얻기 위해 간곡히 요청하는 모습과 얻었을 시에 소중히 하는 모습과 가소롭다고 하는 표현을 통해 일본을 낮추어 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왜인들의 모습에 대해 “왜인들이 글씨를 보는 밝은 눈이 없어서 그런가?”라고 표현하며 왜인들의 지적 혹은 문화적 수준에 대해 저평가하는 듯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외에도 김지남은 일본의 문화와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도주와 세 중, 그리고 모든 왜인들이 쓴 관과 입은 옷이라든지

절모나 활 화살의 만든 제도는 사치스럽고 묘하나 괴상하게 생겨서,

그 모양을 다 쓸 수가 없다. 도주를 돌려보낸 뒤에 곧 홍수역을

보내서 회사를 했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46).

그들의 의복 문화를 자신의 기준에서 묘하고 괴상하다고 평가하며, “쓸 수가 없다”고 까지 부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일본의 정책적인 측면까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우연히 만난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자와 대화를 나누며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사대와 교린은 국가마다 있어야 하고 다른 나라 손님을 접대하는

환인이라는 직책과 나라끼리 언어를 소통시키는 기상이라는 벼슬은

옛날로부터 전해오는 것인데, 너희 나라는 어찌해서 유독 그렇지

못하고, 수호가 사사로이 그런 기능을 가진 사람을 기르는가? ……

공물사신이 다닐 때는 왜어를 아는 자가 따라야 하고 통신사에게도

한학을 아는 통사가 따르게 하는 것은 곧 조정에서 깊이 생각하고

원대한 계획에서 나온 일이다. 수호라는 왜인이 통역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도 역시 여기에 뜻이 있어서였던가? 다만 공사로 하지 않고 사사로 한다는 것은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83-385).

그는 조선의 사대교린 외교를 기준으로 일본의 한학 통역관의 부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너희 나라는 어찌해서 유독 그렇지 못하고”와 “사사로이” 같은 표현을 통해 일본의 정책이 사대 교린의 기본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들어 낮추어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한학 역관인 자신이 일본에 통신사로 동행한 것에 대해 조선의 조정이 “깊이 생각하고 원대한 계획에서 나온 일”이라고 높여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을 높여서 보는 듯한 시각은 왜인 선비가 일본의 예법에 대해 써서 보여주며 조선의 예법에 대해 묻고 답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왜인 선비가 예법을 가지고 물어보기를 조선에서 보통 쓰는 예법도

비슷한지를 물으니, 내가 그 쓴 것을 보니 모두 추하고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그 끝에 큰 글씨로 쓰기를, “우리나라에서

보통 쓰는 예법은 모두 주문공의 《오례의》를 좇아서, 심지어 하인

같은 천한 자라도 이것을 좇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공이 만일

이것을 알고 싶거든 주자의 예를 상고하면 그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했다. 그 왜인은 부러워함을 이기지 못하여

공경함을 표하고 돌아갔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97). 중국의 예법을 따르며 하인까지도 따르는 조선의 예법에 대해 왜인이 부러워하고 공경함을 표한다고 표현하며 예법에서까지 조선의 우세함을 드러냈습니다. 김지남은 은연중에 일본을 낮추어 보는 모습 외에도 직접적으로 무시하는 모습도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진 스님 토묵자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하필이면 친척을 떠나고 조상의 무덤을 버린 채 천만 리 바닷길을

건너 맨발에 이빨을 까맣게 물들인 사람들이 사는 이곳에 와서 머리

깎고 관을 벗고서 구차스럽게 80 여 세까지 산 것은 무슨

마음에서였을까? (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85).

라고 토묵자가 일본에 와서 정착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일본인들을 “맨발에 이빨을 까맣게 물들인 사람들”이라고 칭하면서 천하질서 아래에 만연했던 문명 대 야만의 구조에 왜를 야만인으로 대입한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김지남은 일본을 저평가하면서도 일본이 경제적으로 발전해 있었으며 예절의 측면에서도 조선보다 나은 점이 있었음을 서술합니다. 특히 그는 사행원들과 역참들을 방문하며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그는 대저택들과 화려한 장식에 대한 서술을 할 뿐 아니라 사치스러울 정도의 대접에 대해서도 서술했습니다. 이쪽으로 오면서 태수가 문안하는 거시안 참관이 음식을 준비한

것이 역참마다 비슷하였지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이나 접대의

정성스러움은 왜경에 가까울수록 더욱 융숭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다 열거하지 못하고 다만 목격한 것만을 기록하였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72).

이 외에도 김지남은 아름다운 저택들이나 자신이 대접받은 상황과 차려진 음식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민족·문화적으로 무시했던 일본에서 성대한 대접을 받았던 것은 일본이 비교적 경제적 안정을 이룬 것에 기인해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안정에는 일본의 기름진 땅이 일조했습니다.

지나는 길에는 풍년이 들었는데, 높은 데 올라 내려다보면 논밭의

경계가 분명하여 천 리나 되는 기름진 들판이 마치 바둑판을 펴

놓은 것과 같았다. 옛날 정전의 제도가 이러한 것이 아닐지 알 수가

없다. …… 땅이 기름져서 주위 4 백리 땅에는 풍년이 들지 않는

해가 없다고 한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77).

일본의 경제적 발전은 사회기반시설에서도 나타납니다. 김지남이 대접을 받는 것 다음으로 가장 많이 그리고 자세히 서술된 부분은 이러한 일본의 사회기반시설들에 대한 것입니다. 김지남은 특히 대판 하구에 도착했을 때의 일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집들 중에는 물을 향해서 문을 낸 데도 있고 물을 끌어들여서

항구를 만든 뒤에 그 안에 수각을 짓고, 수각 밑에 누선을 띄워

두기도 했으니, 곧 배를 놓아두는 곳을 만든 것이다. …… 또 두세

곳에 큰 부교가 호수 위에 세워졌다. 기둥과 들보가 견고하고

튼튼하며, 제도가 웅장해서 위에는 수레나 말 탄 사람이 열을 지어

다닐 만하고 아래에는 배가 지나갈 수 있다. …… 시가로 들어가니

거리의 넓이가 겨우 한 길밖에 되지 않지만 갈림길들은 모두 우물

정 자를 이루어 모가 지고 반듯하여 사방을 바라봐도 모두 통해

있다. …… 대체로 성지의 견고함과 배의 정밀함과 누각의 웅장하고

화려함과 사람들의 번성함이 너무나 놀라워 중국의 소주나 항주를

보기 전에는 아마 이곳을 제일이라 하겠다. …… 대판은 일본의 큰

도시로서, 본래 수길의 옛 도읍터다. 웅장하기가 비할 데가 없는

곳인데 그 뒤부터 관백의 장입으로 된 곳이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65-366).

일본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던 김지남이 웅장하고 번성했다고 표현하며, 중국의 도시들과 비교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사회기반시설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물가에 지어진 집에 있는 수각이나 수레와 말이 다닐 수 있는 견고한 부교를 통해 일본인들의 실질적이면서 계획적인 시설에 김지남이 감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와 일본 국민들 김지남은 일본인들의
조선 통신사와 일본 국민들 김지남은 일본인들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드러날 때는 자신의 말을 인용한다든지 감정적인 표현을 했던 것과는 달리, 이러한 일본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듯한 모습에서도 김지남의 이중적인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질서의식에 대해 관찰하며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맨발에 이빨을 까맣게 물들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던 일본 사람들에 대해 칭찬을 했다는 점에서 시각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품천에서 경도 까지는 30 리 거리인데 인가가 빽빽하고 큰 집들이

즐비하다. 거리와 길은 넓고 반듯하게 탁 터졌고, 길가 좌우에는

대나무로 난간을 설치하여 구경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게 했다. ……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 젊은이들은 감히

어른의 앞을 가리지 않으면서 파리나 고슴도치의 털처럼

모여들어서, 사람들의 얼굴로 장막을 이루었으니 그 광경을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떠들지 않고 조용히

꿇어앉아서 구경하고 있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80).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서의식이 매우 부족하다. 길을 갈 때에 중

하관 등 앞서 인도하는 자들이 말을 타고 달아 나기 때문에

기다리게 한 말이 말의 수가 항상 부족 하였다. 또 길을 가는데

차례를 잃고, 도리어 왜인들을 때리고 욕하는 자가 있기도 하다.

이런 일은 비단 왜인들에게 폐를 끼칠 뿐만 아니라, 기강이

해이해진 까닭이기도 했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8, 371).

김지남은 일본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며 조용할 뿐 아니라 그들이 조선사람들과 비교하여 더 낫다고 까지 표현합니다. 김지남은 이렇듯 정치·문화·지적 수준을 저평가하면서도, 일본의 경제 발전과 질서의식은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시각은 17- 18 세기의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천하질서의 위계적 구조에서 기인되었으며, 특히 그가 한학 역관으로 지내며 중국어와 중국을 중심으로 공부해서 극대화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며

한 학기 동안 사랑방을 하면서 다양한 이론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느낀 것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론들은 하나의 렌즈와 같아서 어떤 렌즈를 통해 보느냐에 따라 그 사건도 달라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규슈 답사를 하면서도 일본의 시각으로 서술된 역사에 대해 배우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답사 보고서의 주제를 정하면서도 《해행총재》의 많은 인물들 중에서 김지남을 만나게 된 것도 시각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한학 역관이자 중국과 관련된 업적들을 주로 남긴 김지남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을까라는 호기심에서 이번 보고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지남의 시각이 드러난 《 통문관지》와 <동사일록>을 분석함으로써, 17-18 세기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와 이를 바탕으로 국가들간의 위계적 구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히 김지남이 조선을 천하질서 내의 2 인자로 보았고, 일본을 조선보다 “중심”에서 멀거나 자신들보다 위계적 구조에서 하위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 때문에 멀리 내다보지 못 하는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화이론을 제시하여 자신들만의 국제질서가 있었음을 주장합니다.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의 위계 구조에서만 일본을 바라보았던 김지남은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다시 시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고 생각합니다. 김지남이 천하질서를 통해서 일본을 저평가했던 모습과 일본이 자신을 피해자로만 서술하는 모습 등 편협한 시각은 저에게 한 가지 렌즈로만 보는 것의 한계이자 위험성을 상기시키고 복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다시 한번 복합이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류박물관에서 나와 저희는 나고야 성터로 향했습니다. 숲길을 지나 언덕에 다다랐을 때,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것이 장관이었습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저희는 답사 둘째 날 마지막 일정을 마쳤습니다.

나고야 성터에서 사랑방 11기 일동
나고야 성터에서 사랑방 11기 일동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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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한길사.

김양수 외. 2008.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 서울: 백산자료원. 민족문화추진회. 2008. 《(국역)사행록 해행총재 제 9 권》. 서울:

한국학술정보.

이상각. 2011. 《조선역관열전: 입은 천개의 칼을 지녔다》. 파주:

서해문집.

이용희. 1970. “한일관계의 정신사적 문제: 변경문화 의식의 갈등에

대하여.” <신동아> 8 월호.

이용희. 1977. “사대주의: 그 현대적해석을 중심으로”. 서울:서문당. 조규익, 정영문 엮음. 2008. 《조선통신사 사행록연구총서》. 서울:

학고방

후마 스스무. 2008. 《연행사와 통신사》. 서울: 서신원. 통문관지 국역 홈페이지. http://www.koreaa2z.com/viewer.php?seq=43

(검색일: 201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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