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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이가 기회를 잡는 법! 일본 도자기를 통해 본 17-18 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치

EAI 사랑방 11기 규슈 답사기: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9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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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도자기박물관 · 김도현 · 연세대학교

들어가며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첫째 날과 달리 도잔신사로 향하는 둘째 날 아침은 햇살이 유난히 포근했습니다. 도자기와 신사, 도자기와 국제정치, 이들이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지 궁금하신 분들도 있겠습니다. 오늘은 연관성을 한걸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겠습니다. 저희가 아침부터 향한 도잔신사는 바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강제)이주되었던 수많은 도공들 중 한 분인 이삼평이란 도공을 모신 신사입니다. 여기서 (강제)이주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과 일본 학자들 간에 당시 도공들의 이동이 강제성을 띈 납치였는가, 아니면 자발적인 이주였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이는 명백한 강제 이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옛 히젠국의 번조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유입되고 1616 년 조선 도공 이삼평이 이즈미야마에서 자기 생산의 중요한 원료인 백자토를 발견하고 고급 도자 기술을

하영선 선생님과 사랑방 11 기,
하영선 선생님과 사랑방 11 기,

요하는 백자를 생산하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1,300 ℃ 이상의 고온에서 자기를 생산하는 기술이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이었고, 지금의 반도체처럼 도자기 산업은 높은 수준의 기술 집약적 산업이자 외국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윤을 남기는 산업이었습니다. 일본은 이삼평이라는 인물 덕분에 17- 18 세기 유럽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이윤을 남기는 도자기 생산 기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희가 오전부터 방문한 도잔신사는 바로 도자기의 조상인 이삼평을

모시는 신사였고, 신사에서

도산신사 앞에서 10 여분 걸어 올라가면 그를 모시는 도조이삼평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이삼평의 위상이 '도자기의 신'으로 불릴 만큼 높은 것입니다.

하영선 선생님과 도잔신사에서
하영선 선생님과 도잔신사에서

하지만 기술력만 갖췄다고 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이 흥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시 고급 도자기 생산 기술을 가진 중국, 조선, 일본 이 세 동아시아 국가들 중 17-18 세기 일본의 도자기가 유독 유럽 국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희는 두 세기 동안 역동적으로 흥하고 쇠했던 일본 도자기 무역의 양상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는 1602 년 설립되고 1799 년 해산되기까지 17-18 세기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활약했습니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도 동인도회사를 설치하여 대아시아 무역을 시도하지만, 적어도 17 세기와 18 세기 초반까지는 VOC 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VOC 도자기 무역 양상 중에서 특이한 지점은 바로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수출하던 도자기 무역의 상당 부분이 17 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급격하게 일본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비약적으로 상승하던 VOC 와의 무역량은 18 세기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감소하게 됩니다. 이 특이점을 관찰하며 저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고 이번 답사를 통해서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VOC 는 왜 하필 조선이 아닌 일본의 도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일까요? 그리고 50 년간 이어진 VOC 의 일본 도자기에 대한 사랑은 어떤 이유로 점차 사그라진 것일까요? 다른 사랑의 대상이 생긴 것일까요? 아니면 그 둘은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것일까요?

중국 도자기와의 이별, VOC 를 눈 돌리게 하다

VOC 가 일본의 도자기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중국의 정치적 배경 때문입니다. 사실 VOC 는 일본과 도자기 교역을 하기 전 이미 중국의 도자기와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말부터 이어진 교역은 명-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인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7 세기 명-청 교체기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변환으로 인해 주요 도자기 생산기지였던 경덕진이 파괴되고 여러 관요가 폐쇄됨에 따라 중국의 고급 도자기의 공급에 차질이 발생했습니다. 이로써 중국 독점적인 도자기 산업구조가 일시적으로 균열되는 변화를 겪게 됩니다. 당시 VOC 는 유럽에서 증대된 고급 도자기의 수요에 맞추어 새로운 대체품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VOC 는 중국의 정치적 배경으로 인해 일본의 도자기를 중국 도자기의 대체품으로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산 청화백자가 유럽시장에 대량으로 처음 수입된 것은 1602 년으로 VOC 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무역시장에 발을 디디면서부터였습니다. 하지만 1636 년 청이 건국되고, 1644 년 명이 완전히 멸망하는 과정에서 1654 년까지 경덕진요를 포함한 중국의 관요는 모두 폐쇄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1673 년 오삼계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경덕진요 대부분이 파괴되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1683 년 청나라가 중국 국내 통일을 달성하면서 1668 년 해금정책을 풀고 경덕진의 자기 생산이 재개된 1684 년 이후 본격적으로 수출이 가능하게 된 시점까지 40 여 년 정도의 불안정한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이러한 중국 자기 생산의 불안정성은 네덜란드와 같은 수입국들이 새로운 대체품을 찾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T.Volker(1971)에 따르면 “VOC 가 명나라에 접근했을 때, 이미 청나라에 의해 거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1644 년 만주족이 명나라를 대체하면서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청나라를 건국한다. 만주족은 네덜란드와 수 차례 무역과 포모사에 관한 이해를 도출하고자 한다. 만주족 정부는 심지어 정성공을 포모사와 남중국해로부터 쫓아내는 조건으로 VOC 에게 포모사를 복구해주기로 약속한다.” 명-청 교체기라는 혼란기에 VOC 는 명나라를 계승한 정성공과 청나라 간의 대립된 관계를 풀어나가며 무역을 성공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VOC 에게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청나라는 VOC 에게 정성공이 차지한 타이완 섬을 차지한다면 이후 경덕진이 복구된 뒤에 청과의 무역에 대한 이점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시 중국과의 관계는 무역과 같은 경제적 관계보다도 정치적 관계가 더욱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도자기 수출 공백기를 틈타 동아시아 도자산업에서 후발주자였던 일본은 VOC 의 중개 무역을 통해 새로운 고급 도자 공급자로 급격하게 성장합니다. 중국의 공백기는 일본의 도자기가 중국 도자기의 대체품으로서 세계 무역시장에 등장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아리타와 이마리에서 꽃 피운 일본의 도자기

규슈 도자기문화관에 전시된
규슈 도자기문화관에 전시된

중국의 구조적 공백을 틈타 성장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국 도자기와는 다른 기술적 차별성을 내세우면서 유럽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T. Volker (1971) 에 따르면 VOC 는 일본에 단순히 생산된 제품을 구매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주문함으로써 유럽시장에서

원하는 도자기를 생산하도록

화려한 도자기 그릇

유도했다고 합니다. 당시

도자시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수요였던 청화백자뿐만 아니라 채색자기까지 다양한 용도와 기형의 도자들이 상당수 수출되었습니다. 유럽인의 수요에 맞춘 일본 상품들의 차별성은 19 세기 유럽 내 '자포니즘'이라는 일본풍의 유행을 이끌게 됩니다. 이처럼 일본이 VOC 의 요청에 부합하는 청화백자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얻게 된 데는 일본으로 (강제)이주한 조선 도공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조선으로부터의 도자기 기술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도자기 무역의 기초 토양이 된 것입니다.

김유정(2017)의 네트워크 분석에 따르면 다양한 형태의 도자가 조선 도공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16 년 조선 도공 이삼평이 이즈미야마에서 백자토를 발견하고 고급 도자 기술을 요하는 백자를 생산을 시작한 이후 일본 수출 도자는 청화백자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붉은색의 가키에몬 또는 고이마리 양식의 채색 자기로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또한 18 세기에 일본 아리타·이마리도자 양식을 모방한 차이니즈 이마리라고 불리는 도자가 유럽시장에서 유행하는 것으로 일본의 도자 기술은 정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리타와 이마리는 일본 내에서 도공들이 가장 많이 이동한 정착지였습니다. 그 때문에 아리타와 이마리는 17 세기 일본 수출 도자를 가장 많이 생산한 대표적인 요업지로 자리합니다. 수많은 조선 도공들의 기술 전파를 통해 일본은 도자 산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가사키 개항을 통한 외국과의 교역 확대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정치적, 기술적 배경은 당시 조선에도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명-청 교체기는 조선과 일본 모두에게 기회였고 기술력 또한 조선이 일본에 결코 뒤쳐진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본과 조선의 도자기 산업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로 작용한 요인은 무엇일까요?

햇살이 부서져 내리던 도조이삼평비 앞에서
햇살이 부서져 내리던 도조이삼평비 앞에서

그 차이점은 일본의 경제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 도자기의 수출항 역할을 담당한 나가사키 데지마는 네덜란드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 날 저희가 방문한 곳이기도 합니다. 데지마는 나가사키 지역의 유력한 25 명의 상인들이 출자하여 1634 년부터 2 년 간 건설하여 만들어진 인공섬입니다. 일본은 데지마라는 독특한 창구를 통해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전반적인 쇄국 기조 하에서도 네덜란드와의 지속적인 교류와 상호작용을 유지해왔습니다. 일본은 조선과 류큐와는 예전과 동일한 무역관계를 유지한 반면, 외국선은 중국과 네덜란드만 받아들이도록 정했습니다. 1616 년에 유럽선의 기항지가 히라도와 나가사키로 한정되었고, 1635 년부터는 나가사키에만 기항할 수 있었으며, 그 역시도 나가사키 전역이 아니라 '데지마'라는 제한된 공간으로 한정시켰던 것입니다. 조선의 경우는 일본과 사정이 매우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1648 년 네덜란드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좌초되는 과정에서 조선으로 오게 된 하멜의 이야기가 실록에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조선은 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과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교류의 여부가 17-18 세기의 국제정치적 대전환기를 맞이하면서 조선과 일본에게 큰 차이를 가져다 준 셈입니다.

T. Volker (1971)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처음 도착한 17 세기의 일본은 도쿠가와 쇼군 정부가 1603 년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VOC 는 1609 년부터 1641 년까지 히라도와 1641 년부터 1862 년까지 데지마라는 나가사키 항구에 위치한 인공 섬에 첫 공장을 갖게 되었고, 1641 년 이후 네덜란드는 일본에서 교역하도록 허가 받은 유일한 유럽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자기 생산과 무역의 특별한 결과에 있어서 이러한 네덜란드의 조건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그는 평가했습니다.

VOC 의 쇠퇴를 가져온 1~4 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그렇다면 이렇게 활발하게 진행되던 VOC 와 일본의 도자기 무역은 돌연 어떠한 이유로 쇠퇴하게 된 것일까요? 일본 도자기 무역이 감소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1~4 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거치며 영국과의 해상패권경쟁에서 밀린 VOC 의 침체 때문입니다. C.J.A. Jörg(1984)에 따르면 “17 세기 유럽에서 중국 상품을 판매하는 데 있어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유일한 경쟁자는 영국 런던 회사였습니다.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네덜란드인의 유리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은 여전히 중국 자기를 사실상 독점적으로 그들의 영토 내에서 운반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프랑스인과 덴마크인들은 간헐적인 운반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처럼 영국인들도 중국과 정기적이고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통킹, 반탐, 포모사 그리고 말레이 군도와 인도 해안의 다른 항구들을 활용하여 공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샤만과의 교역에는 성공했지만 수준 낮은 질의 비단과 수요가 있는 상품들, 그리고 교역 제한들이 1689 년 그들이 무역을 포기하게끔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영국은 지속적으로 네덜란드의 해상권을 눈독들일 수 밖에 없었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중국과의 교역을 사이에 두고 패권경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한 히젠 도자기의 공식 수출액(1650-1757)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한 히젠 도자기의 공식 수출액(1650-1757)

(아리타초 역사 편찬위원회, 1988: 와타나베 요시로, 2013에서 재인용)

1652 년 영국이 네덜란드 중개 무역상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제 1 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영국 왕정복고 정부에 의한 1660 년의 항해조례 경신과 신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 점령 등으로 일어난 2 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 년-1667 년), 프랑스와 도버밀약을 맺은 영국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발발한 3 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 년-1674 년)까지 두 나라는 해상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3 차 전쟁을 계기로 하여 네덜란드의 해상권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동방무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1 의 그래프에서도 보여주듯이 영국과 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했던 시기는 일본의 도자기 무역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따라서 해상권을 둘러싼 영국과 네덜란드의 국제정치적 관계는 일본과의 도자기 무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T.Volker(1971)에 따르면 4 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종전 이후 네덜란드는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속하게 물가가 하락했고 이러한 손실이 지속되었습니다. 1789 년 감소한 대 중국 무역을 통해 다시 물가와 이윤이 증가시킬 것으로 보였으나, 1792 년 홍콩을 떠난 배들이 유럽에서의 전쟁 발발로 인해 네덜란드에 도착하는 데 실패하면서 네덜란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결국 4 차 전쟁에서 네덜란드의 패배는 1799 년 VOC 가 해체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네덜란드 중개무역의 최대 수혜자였던 일본 역시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경덕진의 재부흥으로 인한 일본 도자기 대체

18 세기 들어와서 VOC 가 일본을 포기한 데 또 다른 배경은 바로 경덕진의 재부흥입니다. 1683 년 청나라가 중국 국내 통일을 달성하면서 경덕진의 자기 생산이 재개된 1684 년 이후 기존 유럽시장에 도자기 수출을 담당하던 중국의 물량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렉산드로 지로도(2016)에 따르면, 17-18 세기경 경덕진에는 수천 개의 가마가 위치하여 도공만 5 만 내지 6 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를 미루어보아 중국의 생산 공백기에 일본의 생산량이 급증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충분한 생산기지와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던 중국의 재부상은 일본의 도자기 무역을 위협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VOC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된 일본 도자기
VOC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된 일본 도자기

C.J.A. Jörg(1984)에 따르면 “1683 년 만주족 정권의 안정과 중국 제국의 포모사 합병 이후, 말라카와 마닐라, 일본 그리고 말레이 군도가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비록 허가제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외국인에 의한 중국과의 교역이 그 때 허가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운항에서의 문제를 초래하지 않고, 네덜란드 자국의 배를 구할 필요 없이 중국 상품을 중국 국내 가격보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바타비아와의 교역을 한 단계 끌어올리도록 중국 상인들을 독려했고 물자의 흐름이 중국 상품에 대한 그들의 수요를 맞출 만큼 충분할 때 교역을 멈출 수 있었다.” 이처럼 VOC 의 교역은 청나라의 통일 이후 네덜란드에 상당히 우호적으로 펼쳐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VOC 가 일본 상인들에 한해서 교역을 맺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무역에 있어서 VOC 가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 우위를 점하는 위치를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으로의 도자 기술 전파로 인해 감소된 도자기 수요

세 번째 배경은 유럽으로의 도자 기술 전파입니다.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1640 년대부터 1740 년대까지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방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면, 1709 년 독일 마이센에서 비로소 중국 자기 제조의 비밀이 밝혀지고 유럽 최초의 백자가 만들어집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 세의 노력으로 인해 마침내 확보하게 된 유럽의 도자 기술은 더 이상 도자기의 생산을 중국과 일본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유럽의 도자기는 프랑스 세브르, 영국 제스퍼웨어 등을 거쳐 유럽인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의 도자기를 유럽에서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고, 특히나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도자기의 대량생산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럽으로의 기술 전파는 VOC 의 일본 도자기 수입이 감소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습니다.

Robert Finlay(2010)에 따르면 “유럽의 폭발적인 백자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어 지게 되고 은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자 여러 왕을 비롯한 지역의 권력자들은 앞 다투어 백색 자기를 스스로 개발하기 위한 노력과 투자를 경쟁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순도가 높은 백자기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활발하던 가운데 1710 년 독일 작센주(Sachsen)의 마이센(Meissen) 지역에서 처음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수입되던 것과 같은 품질의 백색 자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엘베강(Elbe) 연안 마이센(Meissen)의 북서쪽의 젤리츠(Selitz), 캠리츠(Kemmlitz) 등에서 연이어 양질의 카올린 광산이 발견되면서 마이센(Meissen)의 백자기 생산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마이센(Meissen)이 유럽 최초로 백자 생산을 하게 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생산 기설을 확장하였으며 1740 년 프랑스의 세브르(Sevres)를 시작으로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Royal Copenhagen, 1727) 등으로 백자 생산 기술이 전파되어 나갔다.” 마이센에서 시작한 도자 기술 혁명은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문화 양식에 부합하는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일본의 도자기에 대한 수요는 자연적으로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1 과 비교해보아도 유럽의 도자기 기술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1720 년대를 기점으로 일본의 도자기 수출은 급감하게 됩니다. 결국 일본의 자기 기술이 유럽에 전파되어 또 다른 문화 양식을 만들게 되고, 이는 VOC 가 중개 무역으로 수출하던 도자기가 유럽 내의 시장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오며: 복합적 외교전략의 필요성

17-18 세기 VOC 의 일본 도자기 무역은 당시 최고급 문화 기술로 인식되던 자기 기술의 전파와 국제정치의 구조가 네덜란드와 일본의 도자기 교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줍니다. 17 세기 초반 명- 청 교체기의 혼란 이후 1683 년 청이 중국 국내를 통일하고, 1684 년 경덕진에서 자기 생산을 재개하기까지의 구조적 공백은 일본이 자기 기술의 후발 주자임에도 불구하고 VOC 를 통해 유럽과의 교역을 확대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본은 자기 기술의 정점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정치의 구조를 일본이 활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도공의 (강제)이주로 인해 일본에의 조선 자기 기술이 이미 전파되었기 때문이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데지마라는 특수한 경제 교역지를 중심으로 외국과의 개항에 지체하지 않았던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치, 경제, 기술적 요인은 국제 질서의 혼란기에서도 한 국가가 자국의 발전을 위해서 후발주자라는 불리한 위치에서도 충분히 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VOC 와 일본 도자기 교역이 17 세기 중반에 간헐적으로 중단되다가 17 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축소되었던 이유 역시 정치, 경제, 기술적 요인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1652 년 처음 발발한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780~1784 년의 4 차 전쟁을 정점으로 1799 년 VOC 가 해체되는 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에 동아시아 해역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이 벌였던 패권 경쟁은 당시 VOC 라는 교두보를 통해 유럽 시장에 진출했던 일본의 자기 수출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1683 년 청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1684 년, 경덕진의 자기 생산이 재개된 것은 기존 자기 시장의 패권을 가진 청나라라는 강자가 복귀함에 따라 일본 자기의 위치가 비교적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자기 기술이 일본에 전파됨에 따라 급성장한 일본의 자기 기술이 일본의 부흥을 일궈내는 데 기여했던 것처럼, 1709 년 마이센에서 시작된 유럽의 자기 기술 역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덴마크를 거쳐 영국에 이르기까지 기술이 새로운 문화권으로 전파됨에 따라 더욱 발전하고 대량생산을 통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17-18 세기 VOC 와 일본의 도자기 무역이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확대와 축소 모두 동일한 정치, 경제, 기술적 요인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 대한민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들의 경제 교류가 단순히 한 산업의 기술력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작금의 국제정치적 환경, 국제경제적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 전파와 당대의 정치, 경제 환경이 미래의 국제정치 구조에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충분히 인식하고, 과거로부터의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는 21 세기의 복합적 외교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청화백자를 넘어선 일본만의 도자기 양식을 창조하다
청화백자를 넘어선 일본만의 도자기 양식을 창조하다

참고문헌 김유정. 2017. “17 세기 일본 도자의 등장과 무역시장 변동의 동학 –

기술과 문화 전파의 국제정치경제적 고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미스기 다카토시. 2001《동서도자교류사: 마이센으로 가는 길》,

김인규 역. 서울: 눌와.

알렉산드로 지로도. 2016. 《철이 금보다 비쌌을 때: 충격과 망각의

경제사 이야기》 송기형 역. 서울: 까치.

와타나베 요시로. 2013. “히젠(肥前) 도자기의 해외수출과

나가사키항” <로컬리티 인문학> vol. 10, 241-255. C.J.A. Jörg. 1982. Porcelain and the Dutch China trade. Dordrecht:

Springer.

Robert Finlay. 1998. “The Pilgrim Art: The Culture of Porcelain in

World History” <Journal of World History> vol. 9,141-187. T.Volker. 1954. Porcelain and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Leiden:

E. J. Br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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