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 경험의 기억 사이에서
EAI 사랑방 11기 규슈 답사기: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 정윤주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 11 기 규슈 답사의 첫 답사지는 나가사키에 위치한 원폭자료관이었습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2 시간 동안 첫 번째 답사지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원폭자료관으로 향하는 길에 발표와 답사를 통해 만나게 될 1945 년 ‘그 날’의 역사에 설레면서도 약간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향하였습니다. 한 학기 동안 하영선 선생님과 국제정치학의 역사와 계보를 배우면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국제정치학은 결국 평화를 향한 사람과 국가 간의 관계 맺기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 세기 제국주의와 그리고 이후 냉전 세계질서의 중심에 있는 원자폭탄을 국제정치학적으로 이해하고 성찰하는 것이 인류 사회에 평화를 뿌리내리는 데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폭자료관을 주제로 첫 발제와 답사를 진행하게 된 저의 마음은 설렘과 동시에 다소 무거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 원폭 투하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인 미국을 중점적으로 분석한 지금까지의 저의 공부와, 답사를 통해 만나볼 일본이 바라보는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그들 일본을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식민 지배’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21 세기 사랑방의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공부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우리는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으로 향하였습니다. 답사는 크게 원폭 자료관, 나가사키 평화공원, 그리고 원폭조선인 피해자 추모비의 방문으로 준비하였습니다.
1945 년 8 월 6 일과 8 월 9 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진 원자폭탄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인해 6 만 6 천 명의 일본인들이 폭발과 이후 화재로 사망하였고 3 일 후엔 나가사키의 도시에 떨어진 폭탄으로 4 만 명이 즉사하였습니다. 동시에 원자폭탄은 미국과 일본 간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였고, 세계대전을 종료시키고 이후 냉전시대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도 일본의 피폭으로 큰 변화를 겪습니다. 당시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 비자발적 광복을 맞게 되고 한반도는 냉전의 격전지가 되고 맙니다.
원폭자료관의 첫 번째 전시물도
바로 1945 년 8 월 9 일 오전 11:02, 원자폭탄이 투하된 시간에 멈춰있는 낡은 시계였습니다. 그날의 비극을 일본의 관점에서 풀어낸 원폭자료관을 관람하면서 미국의 원자 폭탄 투하가 꼭 필요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세 가지 관점을 가진
원폭이 투하된 시간에 멈춰있다. 상태로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첫 번째
관점은 미국의 원폭 투하는 전쟁을 끝내는 데에 필연적인 장치였다는 전통주의적 관점, 두 번째 관점은 이에 반하여 원폭투하가 미국의 국제정치적인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의 수정주의적 관점, 세 번째 관점은 이 두 가지 관점을 절충시킨 중도의 관점(Middle ground view)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중 어느 하나의 관점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원폭투하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숨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이제까지 역사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 않았던, 수정주의의 주장을 바탕으로 그 배경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트루먼의 친필 편지들과 1979 년 발견된 포츠담 일기(Potsdam diary)로부터 미국 정부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전후 질서 재편의 욕심
루즈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세상을 뜬 후, 그를 뒤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인테림 커미티(Interim Committee)을 구성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 28 명과 함께 논의하여 원자 폭탄 사용 결정 여부를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인테림 커미티는 원자 폭탄의 투하를 결정하고 그 정당성을 심의한 실질적인 기구로 기능하였습니다. 인테림 커미티에서는 5 월 31 일 회의를 통해 미국이 핵무기의 우위를 점하면서 독점하는 형태로 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1945 년 6 월 1 일 위원회에서 일본에 대하여 사전 경고 없이 일본에 대하여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경고 없이 폭탄을 투하하였을 때 위력이 더욱 강력할 것이고, 미국이 핵 제조를 위한 생산하는 산업이 소련에 비해 3 년에서 10 년 동안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근거로 핵폭탄 투하를 설득하였고, 인테림 커미티는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이후 6 월 21 일 인테림 커미티에서 일본 내에서도 군수 산업이 활발한 지역에 대해 2 개의 타겟 지역을 설정을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트루먼의 행보는 세계 대전 후를 설계하고 예상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전후 문제 해결을 구체화하는 데에 있어 미국이 무엇을 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강대국들로 이루어진 대일본 연합은 동맹의 끈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에 국제 정세 지형도를 그리는데 나라들 간의 차이가 존재하였습니다. 특히 전후 질서를 주도하는 데에 있어 미국에 가장 큰 미래의 적은 현재의 동지인 소련이었습니다. 이런 국제정치적 배경에서 미국이 원자 폭탄을 투하한 이유는 소련의 군력에 대하여 미국의 군사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고 학자 가르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는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전쟁터 그 자체였던 유럽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대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미국이 전쟁터로 작용하는 등의 크게 불리한 점은 없었지만, 미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대륙을 초월한 지배 원리를 주도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사상계(思想界)에 영향력을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던 미국은 냉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설계하는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이러한 열망은 전통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불필요한 원폭투하의 결정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학계의 주장도 존재합니다.
머지않았던 일본의 항복
한창 태평양 전쟁 중인 1944 년 9 월 7 일의 일본 천황 칙어에서 천황은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 전쟁을 지속할 것을 말할 정도로 전쟁의 의지가 강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정세가 변화하면서 일본의 태도도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었습니다. 1945 년 5 월 9 일에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일본 제국은 전쟁을 고집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동시에 국제 정세는 전쟁의 막바지로 흐르며 다양한 동맹과 결탁이 존재하였고, 독일의 포츠담에서 진행된 포츠담 회담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포츠담 회담은 소련, 미국, 영국의 지도자 스탈린, 트루먼, 처칠이 독일에서 모여 2 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수립하고 방향을 논의한 회담입니다. 포츠담에서의 트루먼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스탈린이 얄타에서 약속 한대로 소련이 일본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급박한 1945 년 여름을 분석한 하세가와의 소련과 일본을 포함한 다각화 연구는 미국 이외의 국가들을 주요 행위자로 분석한 데에서 의미가 있고 간접적으로 수정주의적 입장을 강화합니다.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는데 히로시마 폭탄보다 소련의 참여가 더 중요했다는 하세가와의 분석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투하 이틀 후인 8 월 8 일 소련 참전이 결합되어 일본의 항복을 이끌었던 것이지만 둘 중에 소련 참전이 더 영향력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소련의 참전과 소비에트 연방과 일본 간 중립 조약의 파기로 인해 일본의 소련과의 외교 협력을 통해 평화를 모색할 방법이 없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는 수정주의의 견해 중 트루먼 대통령이 소련의 참전을 기다리기만 했더라면 원자폭탄이라는 극악의 무기를 사용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당시 전시 상황에서 불리한 자신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7 월 18 일 트루먼의 일기에서 일본 천황 (Jap Emperor)으로부터 평화를 갈구하는 전보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7 월 18 일의 트루먼 일기에 의하면 일본 천황으로부터 평화를 바라는 전보(“telegram from Jap emperor asking for peace,”)를 언급하며, 일본 천황이 물러나지 않는 조건 하의 항복을 고려하고 있던 일본의 상황을 트루먼은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적 불리함의 부재
미국이 처음 원자폭탄을 발명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이유는 전쟁 말미에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독일이 원폭 연구에 있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미국은 서둘러 핵무기를 구상하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원폭 과학자 Szilard 에 의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원폭을 개발하였는데 독일 항복으로 인해 목표가 없어졌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미국 정책 결정가들과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 폭탄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한 데 반해 독일은 1945 년 5 월 7 일에 항복을 고하였습니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인 독일에 대항하여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명분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원폭 연구의 가속화는 진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트루먼은 왜 “half a million”의 미국인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본 것일까요? 1955 년 출간된 트루먼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원폭투하를 “it might cost half a million American lives to force the enemy’s surrender on his homegrounds”라고 하며 이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미국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기존의 전통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원폭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원폭 투하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일본에 항복을 받아내는 수단을 명분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6 월 18 일에 트루먼이 백악관에서 미국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를 만나서 회의를 했을 때 군사 관계자들은 트루먼에게 전쟁 진행을 통한 미국인 사상자들의 수는 “relatively inexpensive”, 즉 큰 피해가 아닐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6 월 17 일의 트루먼의 일기에는 그가 일본에 대해서 어떤 전략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한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은 일본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에서 시민들이 군수 물자의 생산을 돕고 있고, 일본 산업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침공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많은 미국인들의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때 그는 최소 500 만 미국인의 목숨이 희생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즉,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고민을 한 그는 “there are no civilians in japan”이라 하며 일본에 폭탄을 떨어뜨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전통주의가 강하게 주장하는 근거로써, 전쟁을 끝내기 위한 할 수 없는 방편으로써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도 수정주의는 일본과 독일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인은 총 30 만 명을 넘지 않았다는 근거로 반박합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주요 전투 지역인 유럽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진주만의 초기 습격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공격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미국은 전쟁을 통해 경제 성장의 덕을 본 국가입니다. 전쟁을 시작한지 4 년도 안 된 기간에 미국의 국내총생산이 두 배가 되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전시 경제를 성장시키는 미국은 철저하게 전쟁에서 유리한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간간히 일본의 공습이 존재하였지만, 그것이 미국의 군사나 경제에 크게 타격을 준 사실은 기록으로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전시 상황은 기존의 전통주의의 주장과 달리 일본에 대해 서둘러 원폭 투하를 내린 결정이 군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또 다른 피해자들을 추모하며
원폭 자료관 본관과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방문 후에 우리는 공원 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원폭조선인피해자추모비를 방문하였습니다. 1979 년 8 월 9 일 나가사키 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에서 만든 이 추모비는 공원 내에서도 후미진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정표 하나 없이 찾아간 이곳에 설치된 안내판도 많이 닳아 있고 글씨들이 지워진 상태였습니다.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에 따라 약 만 명의 조선인이 폭사하였고 2 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피폭한 것을 추모하며, “우리들 이름 없는 일본 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 만여명의 조선 사람을 위하여 이 추모비를 건설하였다”라고 설명이 되어있었습니다.
원자폭탄이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바라보는 두 상반된 모습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역사를 기억하고 학습하는 자세에 대하여 고찰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역사를 공부하고 마주했을 때에는 인류의 근현대사가 마냥 답답하게 여겨졌습니다. 과거에 꼬인 매듭이 현재를 옭아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기성세대가 이 매듭을 푸는 것은 기피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원폭의 피해
원폭조선인희생자추모비에
방문하여 추모하는 모습
국가이지만, 제국주의의 가해 국가로
기억되고 있는 일본에 이중적인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식민 지배와 침략 경험이 있던 피해 국가들은 일본에 대해 다른 기억을 안고 역사를 기억하기 마련입니다. 언론에서 자주 등장한 야스쿠니 신사가 대표적인 예시일 것입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이 부재한 채, 그저 힘이 있었기 때문에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적 팽창을 할 수 있었다는 일본의 어조는 피해 국가와의 긍정적인 관계 유지에 큰 장애물입니다. 원폭자료관에서도 제국주의 가해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피폭국가라는 이유로 피해 경험에 집중하고 있는 어조가 느껴졌습니다. 피폭을 당했다는 이유로 조선에 대해 36 년간의 식민 지배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비극적인 역사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성적인 인간 사회에 살고 있고, 그 시발점이 역사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오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이를 한 국가 차원, 혹은 국제사회의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피해 국가입장에서는 피해에 비해 성찰이 늘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폭 투하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역시 우리는 다양한 각도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통주의, 수정주의, 그리고 제 3 의 시각 모두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일본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특히 조선인 추모비에 방문하면서 원폭투하의 역사라는 무대에서 한국이 구성하는 내레이션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학자 존 다우어(John Dower)가 일본 피폭 역사를 서루하며 “일본이 느꼈을 감정을 ‘안으로부터’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1945 년 광복 당시의 조선인의 눈을 빌려 원폭 투하를 바라보며 또 새로운 역사의 내레이션을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은 패망하였기 때문에 해방의 원폭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역사를 해석한 경우가 대다수로, 해방을 선물 받은 셈이지만, 그 원폭으로 직접적으로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이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과 이후 역사에서 냉전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겪었다는 점에서 인류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을 해방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반겨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언제나 피해자 중심에서 국제정치를 생각해온 경향이 많았던 한국도 피해와 가해 경험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에 대해 저지른 범죄가 대표적인 예시일 것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한 행위자는 언제나 선(善)의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행위자는 선 일수도 악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주의, 수정주의 등의 하나의 관점에만 매몰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늘 가해와 피해 경험의 시각을 함께 들여다보며 국제사회의 정의로운 행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나가사키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참고문헌 나종남, 박일송. 2007. “트루먼 행정부의 태평양 전쟁 종전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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