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와 스탈린의 만남, 그 꿍꿍이의 시작
베이징에서 동아시아 복합질서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마오쩌둥 기념당 · 김호인 · 한국외국어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 10 기 답사 마지막 날의 시작은 마오쩌둥 기념당이었습니다. 중국헌법에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남아있는 권위를 보여주듯 새벽부터 곳곳에서 올라온 중국인들이 줄을 서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장관이었습니다. 긴 시간의 대기 끝에 들어선 마오쩌둥 기념당 한가운데에서 이 유명한 혁명가의 모습을 실제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보존 처리한 채로 안치된 마오쩌둥(毛澤東, Mao Zedong)의 시신은 다소 현실감이 없었지만, 그가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가지고 있는 위신은 그 어떤 책에서 읽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오쩌둥 기념당은 천안문 광장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안문에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현재는 그의 초상화만 걸려있지만,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및 스탈린의 초상화도 함께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중 스탈린(J. Stalin)은 실제로 마오쩌둥과 만난 인물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냉전기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중요한 사건 이었기에 그들 마음 속의 꿍꿍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번 답사에서 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왜 1950 년의 마오는 아시아의 티토가 되지 않았는가
1949 년 10 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2 월 동아시아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의 주석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국제정치 권역을 이끌고 있던 스탈린의 70 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의 결과로 1950 년 2 월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됩니다. 이후 10 년간 지속되는 중국의 소련에 대한 ‘일변도 정책’의 공식적인 시작이었죠.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모습 이었습니다. 중국의 내전이 마무리되어 가던 1948 년 말 미국 국무부의 분석보고서는 아래와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마오가 티토보다 열 배 가까운 세월 동안이나 권력을 누려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모스크바는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소련 지배하에 두기
위해 애써야 할 엄청난 과제에 당면해 있다. 다시 말해, 미국 정부는 중국이 아시아의 티토(J. B. Tito)가 될 것이라는 엄청난 착오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8 년 6 월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 통치자인 티토는 스탈린과 관계를 단절 하였으나, 곧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았습니다. 소련의 충실한 동맹국이었던 유고의 이탈은 공산권 국가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안겨주는 한편, 냉전적 질서에 완충지대를 형성하는 역할을 했습 니다. 마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티토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 스탈린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코민포름의 정통성에 유고를 예속시키려는 스탈린의 시도는 그를 분노하게 하였죠. 미국은 마오 역시 티토의 전철을 밟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2 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어 마음을 놓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 냉전이 구조화되고 있던 그 시기에, 중국 공산당은 소련에 대한 일변도를 제창하고 공산주의 진영에 들어가며 중간노선은 없다고 기치를 선명하게 내세웠습니다. 스탈린 역시도 1949 년 7 월, 베이징에서 온 중국 사절단에게 아시아에서의 분업을 제안하며 미국이 염려하던 ‘제 2 전선’을 제안했습니다(존 루이스 개디스 2010, 55-63).
그렇다면 마오는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왜 티토와 다른 결론을 가지고 귀국했는지에 대해서 조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2 전선’의 형성이 냉전시기에서 최초의 열전이자 한국 국제정치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간접적 계기가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도외시되어왔던 제 2 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초기의 마오 심상을 중심으로 그 계기를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제 2 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마오쩌둥의 저술 및 연설과 우드로 윌슨 센터의 ‘Making of the Sino-Soviet Alliance’ Collection 등의 1 차 자료에 기초하여 그 원인을 추적해보고자 했습니다.
항일전쟁 전후 중국의 대표권 문제
마오가 처음부터 스탈린의 대화상대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35 년 행정원장에 취임한 이래 장제스(蔣介石, Chiang Kai-Shek)는 중국 국민정부의 외교권을 장악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대 강대국’ 가운데 하나라는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제도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공산당 세력의 증대는 중국의 대표권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가와시마 신·모리 가즈코 2011, 117-137) 이미 한차례의 국공내전을 치른 바 있는 마오의 공산당은 장제스가 행사하고 있던 중국에 대한 대표권을 거부하고자 했죠. 홍군의 독자적 통수권 주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집니다. 1945 년 장제스는 공산당의 군대에게 모든 행동을 멈추고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명령합니다. 당연히 마오는 이를 내전을 위한 시도로 간주하고 거절합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전개하는 논리의 근거가 당시의 국제규범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례로, 1945 년 8 월 13 일의 신화사 논평에서는 주더 총사령관의 명령은 바로 “일본이 저항을 중지할 때까지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한다.”는 포츠담선언 제 2 조의 규정을 단호히 실행에 옮긴 것이고, 장제스는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하죠.
우리는 전국의 동포와 전 세계 인민들에게 선언한다. 중경의 통수부는
중국인민과 중국의 진정한 항일부대를 대표할 수 없다. 중국인민은
중국해방구의 항일부대가 주더 총사령의 지휘 하에 직접 그 대표를
파견해 4 대 연합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일본을 군사적으로
관리하는 데 참가할 권리를 지니고, 또 앞으로 열릴 강화회의에도 참가할
권리를 지니게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면
중국인민은 대단히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오쩌둥 2008, 31-32). 1945 년 8 월 16 일 장제스에게 보내는 전보에서도 마오는 자신의 견해가 영국이나 미국, 소련 등 각 연합군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오 쩌둥 2008, 39). 이러한 일련의 담화적 행위를 통해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지는 국제적 ‘정당성(Legitimacy)’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공내전 초기부터 나타난 마오의 친소노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45 년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중일전쟁이 마무리되는 기미가 보이자 또다시 국공 내전의 가능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마오는 이미 소련을 잠재적 파트너로 상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중국의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혁명역량이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시각을 자주 표출하는데, 이중 국제적 요인은 각국 인민들과 더불어 강대국 정치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강대국 정치의 원동력은 지도적인 국가 사이의 권력 배분(극성), 강대국 간의 우호와 적의의 유형, 강대국의 참여와 개입의 정도, 안보 수준에 대한 강대국의 특정한 사회적 성향 등으로 구성됩니다(베리 부잔·레네 한센 2010, 103). 마오는 냉전 초기 세계적인 세력균형이 미국과 소련의 양극으로 나뉘고 있는 정세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일전쟁의 종결에 있어 소련의 군사적 기여를 평가하고 다가올 국내적 투쟁에 있어서 그 영향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1945 년 8 월 13 일 옌안 간부회의 연설에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소련이 출병하고 붉은 군대가 침략자를 몰아내고 있는 중국인민을
도와주러 왔는데, 이것은 중국역사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이 일에서
비롯되는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미국과 장개석의 선전기관은
2 개의 원자폭탄으로 붉은 군대의 정치적 영향을 없애 버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없애버릴 수 없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해결할 수 없다.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항복시킬 수 없었다. 인민의 투쟁이 없으면 원자폭탄 단독으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해결할 수 있다면 어째서
또 소련에 출병을 요청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어째서 원자폭탄을 2 개나
떨어뜨려도 항복하지 않던 일본이 소련이 출병하자 곧 항복했겠는가?
우리 동지들 중에도 원자폭탄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마오쩌둥 2008, 26)
냉전 초기 미소간의 적의는 권력적 배분상태와 더불어 이념의 차이에서 기원하는 부분이 상당하였습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념의 차이가 상대방의 권력자원에 대해 느끼는 위협을 증폭시키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는 마오에게도 국제정치는 단순히 물리적 폭력의 싸움을 넘어선 이데올로기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념적으로 우호적 태도를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의 지원을 모색하고자 했죠. 마오는 위의 연설에서 주어진 정세에 대응하는 방침으로 자력갱생과 반제국주의 세계 연대를 제시합니다. 중국공산당은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함 으로써 우호적이고 비침략적인 민주주의-자본주의 열강과 그렇지 않은 국가를 뚜렷이 구별했습니다(에드가 스노우 1985, 124). 마오는 이러한 구분법 하에서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미 제국주의를 장제스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을 예속화하고자 하는 존재로 주장하죠. 1946 년 노비코프(N. Novikov)의 보고서처럼 상대방을 팽창주의 국가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마오는 공통의 정체성을 가진 소련에 대해서 적극적인 친선 노력을 펼친 것입니다. 나아가 마오는 미국과 소련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보일 참여와 개입의 정도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보았기에 친소노선은 당연한 결론이었습니다. 소련의 과도한 군사적 개입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지리적 인접성에서 비롯되는 안보적 위협이 완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념적 우호에 근거한 소련과의 동맹 추진은 그 효용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오는 제 2 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국공내전은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국지전에 머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강대국들 역시 곧바로 제 3 차 세계대전에 돌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45 년 10 월 17 일, 마오는 충칭 협상에 관한 옌안 간부회의 보고에서 그러한 견해를 피력합니다. 런던의 5 개국 외상회의가 실패했지만, 이것으로 곧 제 3 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방금 끝났
는데 어떻게 제 3 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국가와
사회주의국가는 많은 국제문제에서 여전히 타협할 것이다. 그것은
타협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소ㆍ반공전쟁에 전 세계의 무산
계급과 인민이 모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최근 30 년동안 세계대전이
두 번 일어났는데, 제 1 차 대전과 제 2 차 대전 사이에 20 년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 50 만 년의 인류 역사상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은 이
30 년간뿐이다.
(마오쩌둥 2008, 59)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는 우호 적인 것으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우선 코민테른을 대표해 왕밍이 제기한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서 진행한다’는 전술과 마오가 제기한 ‘항일민족통일전선에서 자주적, 독립적 입장’을 요구하는 전술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항일전쟁 시기에 마오가 중국의 실제상황에 근거해 제기한 자주독립 노선은 국민당 정부를 겨냥한 것일 뿐 아니라, 코민테른과 소련의 지휘부를 겨냥한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42 년 2 월 옌안에서의 정풍 운동, 당의 형식적인 지시, 교조주의의 반대에서부터 1945 년 4 월의 중국공산당 제 7 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제기될 때까지의 목표 중의 하나는 당 내에서 소련세력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주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힘을 확대하는 것이었습니다(션즈화 2010, 81-82). 그러나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위협이 약화되자, 마오는 국제적으로 친소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소련이 중국 공산당 세력의 독자노선을 제재하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죠. 1946 년 4 월이 되면 마오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비밀 문서에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와 소련과의 관계는 타협이나 결렬이냐 하는 문제가 아닌 시기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마오쩌둥 2008, 83). 이처럼 미국과 소련이 직접 개입하는 전면전의 가능성이 차단된 상황에서 그에게 남은 시나리오는 양국의 대리전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과 경쟁의 무대가 어떠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지였습니다. 중국의 독자적 외교정책 노선으로서 중간지대론은 1958 년 이후로 표면화되지만, 지정학적 공간으로서 중간지대론은 이미 1940 년대부터 존재했습니다. 마오는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에드가 스노우가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중국 고전에 깊은 소양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에드가 스노우 1985, 112). 때문에 마오가 가지고 있던 공간 개념은 전통적인 중화질서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중간지대 개념은 전통천하질서의 동심원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황복의 오랑캐에 대처하기 위해 수립된 오복의 천하질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간지대의 국가는 중심부의 소련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1946 년 8 월 6 일, 그는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담화에서 미국이 중간지대를 먼저 굴복시켜 반소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매우 광활한 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고, 거기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주의 많은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가
있습니다. 미국의 반동파가 이러한 나라들을 굴복시키기 전에는 도저히
소련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지금 미국은 태평양에서 전에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전 세력범위보다 더 큰 지역을 지배하고, 일본,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국과 조선의 절반, 남태평양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지배하고
있고, 나아가 대영제국과 서유럽 전체를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여러 가지 구실 하에 많은 나라들에서 대규모적인 군사배치를 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동파는 그들이 세계 각지에
이미 설치해 놓았거나 설치하려는 군사기지는 모두 소련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 말대로 이러한 군사기지들은
소련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맨 먼저 미국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은 소련이 아니라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있는 이 나라들입니다.
(마오쩌둥 2008, 93-94)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계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국제체제에서 중국 역시 중간지대에 놓여있었습니다. 미국의 친선 세력으로서 장제스의 국민당은 소련에 대항하는 미국의 군사기지에 준하는 지위라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외관 속에서 미국의 존재는 국민당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마오에게 굉장한 안보적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마오는 소련 역시 공통의 안보 인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오의 지속적인 친소노선 견지는 결국 그가 창설하고자 하는 중국의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이때의 안보는 국가 내부적 투쟁과 외부적 투쟁 양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개념입니다. ‘혁명’의 기치는 중국 공산당 해방구의 내부적 결속을 다져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봉쇄 대상이 되는 정체성이자 소련의 지원을 구하기 위한 정당성의 요소였습니다.
다시 말해, 1946 년 아직까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던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서 ‘혁명’은 안보추구를 위한 병행적 개념이었 습니다. 따라서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성공을 정치ㆍ군사적으로 뒷받침해줄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마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는 국제정치의 권역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부적 균형화를 통한 ‘자력구제(Self-help)’가 어려운 상황에서 외부적 균형화 기제로서 같은 권역 내의 소련과의 동맹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던 것이죠.
국공내전을 대하던 미소의 태도
국제정치는 상호작용을 통해 전개되기 때문에, 마오의 대외관만 가지고는 당시 중국을 둘러싼 대외관계의 양상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국공내전을 바라보는 미국과 소련의 태도는 이후 국제정치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간략하게 양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은 국민당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중국이 국민당 일당 독재 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초부터 일본이 점령하여 통치하던 지역을 중화민국 정부가 인수하도록 하고 국민당 주도의 ‘국공 연립정권’을 수립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주의 국가이자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협력국가로 삼기로 구상 했습니다. 실제로 1946 년도에는 미국의 조정 아래 국공내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함에 따라 만주를 둘러싼 국공대립이 격화되었고, 미국도 1947 년에 접어들면서 조정자 역할을 단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가와시마 신ㆍ모리 가즈코 2011, 148). 1946 년 9 월 29 일 마오와 미국 기자 스틸의 담화를 보면 미국의 조정이 국민당 원조와 병행되었다는 점에서 미국 정책의 진의는 의심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마오쩌둥 2008, 103-105).
소련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드로 윌슨 센터의 자료를 검토해도 1947 년까지 소련의 공식적인 대외문건은 국민당 정부를 주요 교섭대상으로 놓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궁극적 목표는 극동지역에서 얄타협정이 전면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보장하여 러시아가 러일전쟁으로 상실한 중국에서의 모든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었으며, 이념적인 문제는 기껏해야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와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데 하나의 정치적 수단일 뿐이었습니다(션즈화 2010, 88). 소련군의 동북지방 진주가 공산당의 근거지 마련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스탈린의 전략적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중국 내전의 전세가 변하기 전까지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와의 협상을 위한 레버리지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련에게 있어 ‘혁명’이란 안보의 보완적 개념에 불과했죠. 이러한 소련의 태도는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환의 시기: 1947~1948
그러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방임적 태도는 1947 년을 계기로 바뀌게 됩니다. 중국 내부적인 상황의 변동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죠. 1946 년 9 월 16 일의 중국공산당 당내 지시문을 보면 항일 시기에 진행했던 유격전 중심의 전술을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각개 섬멸시키는 운동전 중심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벌어집니다 (마오 쩌둥 2008, 97-100). 지역이 아닌 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방침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1946 년 10 월 1 일 당내지시문의 내용을 보건대 비록 공산당 측의 출혈도 상당했음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상황은 더욱 진전되어 1947 년 2 월 1 일에는 중국의 시국이 전국적 범위 반제ㆍ반봉건 투쟁에서 새로운 인민대혁명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선언하게 되고, 동년 5 월 20 일 신화사 논평은 장제스 정부가 이미 전 인민에 포위되어 있음을 주장합니다(마오 쩌둥 2008, 106-132). 물론 이 과정에서 장제스 측의 서북지방 진격으로 수도였던 옌안이 함락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전선의 확장은 국민당 측에게 군사적 부담의 증가로 다가왔습니다. 다만, 그러한 과정들이 서구외신들에 의해 모스크바에는 잘못 전달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47 년 6 월 15 일 스탈린은 중국에서 머물고 있던 의사 테레빈을 통해 마오 쩌둥에게 모스크바 비밀회동을 추진하고자 하는 의사를 전합니다 (Woodrow Wilson Center 1947). 마오쩌둥의 통역 겸 비서였던 스저의 기억에 의하면, 실제상황은 스탈린이 서방 통신사의 보도를 통해, 중국공산당이 대패하여 엄청난 손실을 입고 허롱, 심지어는 마오의 부인인 지앙칭 같은 고위 간부들까지 포로가 되어 시안으로 옮겨 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 소련이 먼저 주도적으로 전용기를 파견해 마오와 다른 고위 간부들을 소련으로 데려갈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션즈화 2010, 88). 그러나 실제 정세는 보도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스탈린은 모스크바행을 연기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Woodrow Wilson Center 1947).
이 무렵부터 중국 공산당은 내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공산당 해방구 내에서의 운동전에 머물지 않고 공세적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1947 년 9 월 1 일 발표한 해방전쟁 제 2 차년도의 전략방침에서 이러한 태도가 잘 드러나죠.
아군의 제 2 차년도 작전의 기본임무는 전국적 반격에 나서는 것, 즉
주력을 동원해 외선으로 진출해 전쟁을 국민당의 지역으로 끌고 들어가
외선에서 적을 대량으로 섬멸시키고, 전쟁을 계속 해방구로 끌고
들어감으로써 해방구의 인력과 물자를 더욱 파괴하고 소모시켜 우리가
오래 버티지 못하게 하려는 국민당의 반혁명적인 전략방침을 철저히
분쇄하는 것이다. 아군의 제 2 차년도의 작전의 부분적인 임무는 일부의
주력과 많은 지방부대를 동원해 계속 내선에서 싸워 내선의 적을
섬멸시키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마오쩌둥 2008, 135) 얼마 후 1947 년 10 월 10 일에 발표한 중국인민해방군 선언에서는 중국공산당의 8 개 항목의 기본정책을 공포하고,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46 년 소련군의 철군 이후로 만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소련은 중국 공산당과 제휴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1947 년 12 월 16 일 스탈린은 전보를 통해 소련 방문을 요청한 마오에게 공식적인 환영의 뜻을 보냅니다. 시기는 다음 해인 1948 년으로 명시되었 습니다. 다음날 이루어지는 테레빈의 보고에 따르면, 마오는 오랫 동안 소련 방문의 염원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며 매우 만족 스러워했다고 합니다(Woodrow Wilson Center 1947). 해당 보고에서 소련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심리적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오와 스탈린 만남의 조율
마오와 스탈린의 만남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48 년은 역사적 만남을 위한 조정기였습니다. 그리고 1949 년에 일련의 대화들이 오고 가면서 중국의 첫 번째 외교노선으로서 ‘대소일변도’ 정책이 굳어졌습니다. 그 결과물이 중국 공산당 창건 28 주년을 기념하여 발표된 6 월 30 일의 인민민주주의독재론 이었습니다. 이 문서에서 마오는 소련과 연합하고, 각 인민민주주의 국가와 연합하고, 그 밖의 여러 나라의 무산계급 및 광범위한 인민과 연합하여 국제적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대외노선을 천명합니다.
‘당신들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바로 그렇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손중산의 40 년간의 경험과 공산당의 28 년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 승리에 도달하고 승리를 굳히려 한다면 아무래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40 년과 28 년 동안
쌓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중국인은 제국주의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사회주의 쪽으로 치우치게 되며 여기에는 절대로 예외가 없다.
이쪽저쪽에 붙어 태도가 일정치 않은 것은 통용되지 않고, 제 3 의 길은
없다. 우리는 제국주의 쪽으로 치우친 장개석 반동파에도 반대하고,
제 3 의 길에 대한 환상에도 반대한다.
(마오쩌둥 2008, 395) 이때, 중국의 ‘국가안보’ 논리는 자신과 타자 사이의 구별이 명확하게 지워지는 위험의 지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베리 부잔ㆍ레네 한센 2010, 103). ‘우적개념’에 따라 형성되는 안보관이라고 할 수 있겠죠. 중국 내전에서 승리로 자신의 존재가 굳어지자 이러한 위험에 대한 인식도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1948 년 이후로 오히려 소련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때의 소련은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세계 정책에 있어서 중국이 가지는 중요성을 재평가합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동아시아에서 두 나라의 동맹 관계는 1950 년 새로운 양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만, 두 국가의 신뢰 관계가 아직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이 여러 차례 이들에 대한 의구심을 보였고, 한국전쟁 발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바 있습니다.
나오며: 냉전 초기 공산주의 국제정치의 3 중 시각
마오와 스탈린을 비롯하여, 공산권 지도자들이 국제정치에 대해서 가진 시각은 기본적으로 ‘무정부성의 권력 정치적 시각, 공산주의 국제혁명의 세계체제적 시각, 국내적 혁명역량의 시각’이라는 3 중의 형태를 가졌습니다. 무정부성의 권력 정치적 시각이라고 함은 미국과 소련 양극 체제가 가하는 구조적 압력을 의미합니다. 공산주의 국제혁명은 그 권역 안에서의 영향력으로 이후 소련의 지도력과 중국의 도전이라는 양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세계를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해당 요소 역시 체제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국내적 혁명 역량은 레닌이 언급했듯이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세계 혁명은 중간단계로서 국가의 수준에서 프롤레타리아적 권력 수립을 거쳐야 하기에 마찬가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3 중의 요소는 구분된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는 복합적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냉전 초기에는 미국과 소련 양극의 강대국이 자국의 정통성을 이념에 기초하여 구축하고 있었죠. 따라서 국내적 혁명역량 증대를 무정부성의 권력정치에서 기본적 생존과 연계시켰고, 공산주의 국제혁명의 소련의 지도적 위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국의 위상을 어느 정도 정립한 이후에는 국내적 혁명역량을 공산주의 국제혁명에서 지위 확보와 연계시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1972 년에는 미국과의 데탕트를 모색하면서 이념과 권력 정치를 일정 정도 분리시키는 정책을 보였죠. 그러나 데탕트 과정에서 중국 지도부가 공동성명의 문안에 “인민의 혁명”이라는 문안을 포함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점을 볼 때, 완전한 분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49 년에서 1950 년으로 넘어가는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마오가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경제적 원조 및 소련 모방 이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냉전 초기 공산주의 국제 정치권역이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시점에서 국가 수립 초기의 중국은 내부적 안보 충족이 선행과제였습니다. 국민당 정권 역시 대만에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내부적 혁명역량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국가 전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취약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험을 하기보다는 대국 중에서 유일한 성공 모델이었던 소련의 ‘혁명 역량’이 자국에 전파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다만, 소련도 인정하다시피 중국의 혁명이 가진 독자적 성격에 따라 변용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공산권 내에서 소련이 가지는 지도력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용하고 따라가는 대소일변도 노선이 채택되는 것입니다. 마오가 아시아의 티토가 될 것이라는 미국의 결론 자체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중 소련대사였던 로쉰조차도 “소련이 중국의 내전 중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마오쩌둥이 아시아의 티토가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션즈화 2010, 108). 왈트(S. Walt)가 정의하는 것처럼 ‘위협(Threat)’의 요소를 ‘총체적 권력’, ‘군사력’, ‘지리적 근접성’, ‘공격적 의도’으로 나누어보아도 동북지역과 신장 지역에서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투사하고 있는 소련이 미국보다 더 큰 위협을 주고 있다고 판단하기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국민당에게 원조를 하고 있을 뿐, 중국 본토에 대해서 군사적 개입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왈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는 동맹을 공고화시킬 수는 있어도 동맹 형성의 근본적인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산주의권 국제정치는 단순히 서구적인 권력정치 개념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 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공격적 의도라는 변수 자체가 이데올로기에 따라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과 같이 국가의 규모가 커질수록 국내적 혁명역량에 대한 의구심이 큰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와의 협력 제고가 절실할 수 있었죠. 이번 답사를 준비하면서 서구적 국제정치학의 분석을 보완하고자 마오와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국제정치적 인식론을 추적하여 재구성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마오에게 있어서 스탈린과의 만남과 중소우호동맹 조약의 체결은 공산권의 국제적 협조를 통해 국내적 혁명역량을 제고하여 권력정치 속 생존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국내 공산주의 혁명 기틀 확보 이후에 ‘혁명’은 안보의 병행적 개념에서 보완적 개념으로 진화해나갔습니다.
시진핑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천명해나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현대 중국 지도부의 대외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번쯤 반드시 해보아야 할 작업이었습니다. 당대의 프로파간다를 걷어내고 마오 쩌둥의 글 속에 남아있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냉전 초기 중국 역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몸부림을 부렸다는 절실함은 2018 년의 저에게도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지켜보고 있는 마오쩌둥 사진이 천안문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중국의 대외 정책에도 그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참고문헌 가와시마 신, 모리 가즈코. 2011. 《중국외교 150 년사》. 이용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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