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

간서치의 세상 읽기

베이징에서 동아시아 복합질서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8년 7월 30일
sarangbang_10_ch6_cover.png
sarangbang_10_ch6_cover.png

유리창 · 이새라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우리가 유리창을 찾은 것은 답사의 둘째 날 저녁, 뉘엿뉘엿 해가 져가던 때였습니다. 바로 전에 방문했던 이화원에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함과 풍족함이 이런 것이 구나를 느낀 저는 청나라 때 가장 번성했던 거리, 모든 문화와 물건, 사람이 모였던 거리인 유리창의 모습이 기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맞은 것은 어둠이 내려앉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거리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사동쯤 된다는 그 거리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서만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채 인적이 드문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유리창이 항상 그런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랑방 선배들이 언급했다시피 청나라 때의 유리창은 너무 화려해서 눈을 뜰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특히, 유리창은 당시 연행을 위한 한중 문화교류의 중신이었고, 청조 출판문화의 중심이었던 동시에 청나라 지식인들과의 교우가 이루어지는 공간, 다양한 시사들이 운집 해 있던 북경 제 1 의 상업공간이기도 했습니다(정민 2013, 21). 제가 이 유리창을 통해 만나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의 지식인, 이덕무였습니다.

생각보다 황량했던 유리창 전경
생각보다 황량했던 유리창 전경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이덕무라는 이름은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덕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의 북학파와 친구였던 것을 알고 있거나 뛰어난 문장가로서의 이덕무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덕무는 박제가와 함께 연행을 갔던 조선의 청년 중 한명으로 박지원, 박제가와 함께 북학의 꿈을 키워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덕무가 북학파로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그가 청나라를 다녀온 기록인 “입연기”에서 청나라 문물에 대해 제한적 관심을 보이거나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이덕무는 누구보다 치열한 인생을 살면서도 조선을 사랑했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그 기준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 개혁가이자 정당한 북학파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입연기 내내 그의 친구들과는 다른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었을까요? 그는 친구들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덕무의 생애; 책 바보의 탄생

이러한 차이점을 알기 위해 저는 먼저 이덕무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덕무의 어린시절은 서얼, 가난 그리고 책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덕무는 1741 년 영조 17 년에 서울 중부관 인방 대사동, 현재 인사동 4 가에 있는 본가에서 아버지 이성호와 어머니 반남 박씨 사이에서 2 남 2 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이광규 1978, 321). 전주 이씨의 33 대손으로 왕족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나 아버지가 서자였던 까닭에 평생에 걸쳐 서얼의 비애를 느껴야 했던 이덕무는 39 세가 될 때까지 나라에서 일을 할 수 없었고, 이러한 환경은 일종의 무력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몸을 움직여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던가? 고작 종이를 묶어 책을

만들거나 밀랍으로 윤회매를 만드는 것뿐. 그러나 살아가는 데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안소영 2004, 185).

게다가 가정형편까지 넉넉한 것이 못되어서 박지원이 써준 이덕무의 글 모음집 청장관전서의 서문을 보면 이덕무의 집은 무너질 듯 해서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고 변변치 않은 음식조차 자주 때를 걸러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덕무에게 좋은 스승 밑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는 것은 사치였을 것입니다(권정원 2007, 421). 따라서 이덕무는 자연스럽게 혼자 공부할 수 있는 책을 중심으로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덕무에게 책이란 생계와 직결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덕무는 39 세 이전까지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따라서 선택한 것이 책을 옮겨 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권정원 2015, 332). 평범한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글 솜씨를 뽐내며 살았을 이덕무가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옮겨 쓰는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은 비참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에 들어오는 청의 책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유리창 방문 후 식당에서 발표하는 모습
유리창 방문 후 식당에서 발표하는 모습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책 바보, 그러니까 간서치(看書癡)는 26 세 때 백탑 근처 대사동으로 이사가면서 근처에 살던 이른바 북학파와의 교제를 시작합니다(권정원 2007, 417). 이서구, 유득공, 박지원, 박제가 등 이덕무가 유별나다고 할 정도로 사랑했던 친구들과 함께 그는 비슷한 처지와 술을 나누며 북학의 꿈을 키웁니다. 이후 박제가와 함께 연행을 가거나 연암이 이덕무의 책에 서문을 써주고(아정유고 8 의 서), 이덕무가 다시 박제가의 글에 서문과 해설을 붙이는 인연(친애지기서)이 바로 이때 시작된 것이지요.

39 세 이후 연행에서 돌아온 이덕무는 드디어 정조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서게 됩니다. 외각 검서관 등의 직무를 맡으면서 무예도보통지 등의 성과를 남긴 그는, 관직에 있는 내내 규장각 팔경시, 20 운 배율시 등을 지어 경합에서 1 등을 도맡아 하며 정조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래서 정조가 1795 년 이덕무가 53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3 년이 되던 해에 이덕무의 아들인 이광규에게 “지금 운서를 새로 간행하면서 예정일을 떠올려 보니, 처음 이 책을 간행할 때 애쓴, 죽은 이덕무의 재주와 식견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각신에게 명하여 이덕무 본가에서 그가 남긴 글을 가져다가 다듬어서 문집을 간행하게 하라(권정원 2004, 5)”고 명했고, 이것이 ‘청장관전서’가 되어 우리가 아직도 이덕무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가감정의 유리창 방문기

그렇다면 이덕무는 유리창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을까요? 그의 입연기를 보면 그가 왜 북학파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이덕무의 유리창 방문기를 세 개의 장면으로 요약하고 그 장면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이덕무의 마음을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바로 서점가와 서적을 대하는 장면입니다. 소문난 간서치답게 이덕무는 책방과 책을 볼 때 가장 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문조의 유리창 서사기에 따르면 당시 유리창에는 30 곳 이상의 서점이 있었고, 이 서점들은 대부분 새로운 서적을 취급하였는데 이덕무가 즐겨가던 오류거, 문수당 등은 고서도 함께 취급하여서 희귀한 책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정민 2013, 98).

유리창 입구에 있는 중국 서점
유리창 입구에 있는 중국 서점

이덕무의 서점가 사랑은 박지원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문을 나서서 오른편으로 구부러져 유리창 첫 거리에 닿으니 오류거라는 석 자 문패가 눈에 띈다. 이곳이 바로 도옥 책방으로서 지난해에 이덕무 일행이 이 책방에 와서 책을 많이 샀다고 하여 오류거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들었던 터라 이제 이곳을 지나려니 무슨 구면 친구나 만난 듯 했다(박지원 2014, 406).”고 남겨 놓았을 정도로 유리창의 서점가에 가장 큰 감명을 받았고 간증하듯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덕무가 책방들을 들르고 책을 열람하면서 느꼈던 감상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책방과 서적의 규모로 청나라 문물의 번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덕무의 입연기에서는 청나라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사실 유리창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런 기록이 종종 있습니다. 북학파의 일원답게 이덕무 역시 청나라의 배를 만드는 기술이나 바퀴를 보고 감탄하기도 하고 이를 배워가고 싶어하는 마음도 얼핏 드러냅니다. 하지만 유리창에 들어서자 이덕무의 모든 관심은 책으로 바뀌게 됩니다.

책을 통해 청나라 문물의 부유함을 깨달은 그는, 책을 통해 청나라를 배우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일찍이 천애지기서에서 조선에 들어오는 책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아쉬워했던 이덕무는, 청나라에 많은 책이 있는 것, 특히 희귀한 의학, 약초, 농업 서적들이 있는 것을 보고 부러움과 감탄을 마지 않습니다. 이덕무가 유리창에 도착하자 마자 한 일은 바로 서점마다 다니면서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책을 기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자신이 “외잡스러운 책을 제외하고” 중요한 책, 자신이 관심 있는 책만 기록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유리창을 거니는 학우들의 뒷모습
유리창을 거니는 학우들의 뒷모습

그가 남겨놓은 책들의 대부분은 이미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게 많지만 검색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보면 그의 관심은 청나라 정치(지신록 등), 명문(경의고, 대경당집 등), 약초(본초경소, 본초회), 무예(병법전서, 형천무편 등), 의서(본초유방 등), 고증학(의문독서기 등), 농업(왕씨농서 등) 등 청나라의 문화와 지식, 역사까지 담고 있는 책들이었습니다. 그가 찾아낸 이 책들을 필사적으로 읽어낸 것은 불을 보는 뻔한 일일 것입니다. 그는 이렇듯 책을 통해 처절하게 청나라를 배워내고 이를 통한 조선의 부흥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덕무의 심상은 여전히 숭명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장면에 걸쳐서 명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국조시별재집 어제서를 읽으며 “본조에 살면서 망령되이 전조인 명 나라를 생각하는 자는 난민이니 국법이 있다. 명나라 달관의 신분이었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다시 본조를 섬긴 자를, 비록 일시의 권도로 국가가 초창하는 시기에 있어 버리지 못할 바나, 요는 옳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이덕무 1978, 240).”고 한 부분을 발췌하거나, 수역관 이언용이 구한 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를 읽으며 나덕헌과 이곽의 일을 “조선이 청을 섬기자 나씨, 이씨가 복종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에 대해 이 둘이 후금이 보낸 국서에 후금의 왕을 황제라 칭한 것을 보고 그 글을 버리고 온 일화에 대해 우리나라의 사대부 들이 이러한 대절을 알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는 모습은 그의 이러한 심상을 잘 보여줍니다(이덕무 1978, 257). 두 번째 장면은 바로 청나라 문인들과 교제하는 장면입니다. 이덕무가 책을 읽는 것만큼 좋아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친구를 사귀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일상은 연행 중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가 특히 친하게 지낸 것은 반정균과 축덕린, 심영, 묵장, 당원항 등 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문장을 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덕무가 그들과 나눈 대화가 문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덕무가 가장 열을 올린 것은 경전의 해석이나 서로의 문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그는 예법과 명물학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새로 사귄 친구들을 통해 청나라를 배우려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청나라 문물과 문화에 대한 이덕무의 물상과 심상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덕무는 유리창에 도착한 이후 청나라의 물상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고있고,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점가의 번성이나 책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한 감탄이었습니다.

청나라의 예법과 이국적인 문화를 대하는 이덕무의 심상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안문에 가서 태학에 배알할 때에 명나라 때의 황제칙수문묘비(皇帝勅修文廟碑)를 고쳐 쓰고 문 옆마다 만주 글자를 써 놓은 것을 보고 “오랑캐의 글자를 어찌 성현의 신판에 썼단 말인가? 만약 신이 있다면 이 신판에 편히 머물지 않으리라(이덕무 1978, 241)”며 부정적 감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청나라의 현판을 보고서는,

준 2 개에는 목지를 꽂아 놓았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금으로 쓴 긴

주련이 기둥에 걸려서, 마치 신사나 불우의 모양과 같으니, 성인께서

취하지 않으실 것이다. 유자와 주자를 십철의 열에 올려 놓았으니, 이

역시 문구 놀음에 불과하므로 전우가 넓고 크며 아름다운 색채가

찬란하니, 고상하고 바른 것이 못 된다(이덕무 1978, 241).

라며 청나라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토아산을 방문했을 때도 산 위의 전각이 열황(명나라 마지막 황제)이 순사한 곳임을 떠올리며 슬픈 생각을 금하지 못합니다(이덕무 1978, 253).

간서치, 책으로 세상을 보다

제가 만난 이덕무는 박제가 만큼이나 청나라를 배우고 싶어했고 박지원만큼이나 국제정치적 감각이 있는, 북학파의 정당한 일원이자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가 조선을 바꾸려는 개혁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덕무가 제한적인 개혁성과 보수적인 물상을 유지했던 이유를 저는 그의 타고난 성품과 서얼이라는 환경에 의해 학습된 무력감에서 먼저 찾고자 했습니다. 이덕무는 스스로에 대해 집필한 이목구심서에서 오랫동안 잘못을 보고도 못 본 척 했더니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지지만 말을 해도 바뀌는 것이 없는데 왜 말을 해야 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덕무가 느낀 조선이라는 사회는 서얼인 자신이 아무리 바꾸고자 해도 바뀌지 않는,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또 한 가지 더 큰 이유는 그가 명나라에 대한 심상을 물상과 비슷한 위치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타 북학파의 연행기를 살펴보면 그들 역시 압록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이덕무와 비슷한 명나라를 그리워하는 심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청나라로 건너가서 그들의 경제가 발전한 것을 보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 인지로 생각인 발전하게 되어 이전의 심상을 마음 한 켠에 접어 두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청나라의 번성이라는 물상을 대하는 마음이 명나라를 그리워하는 심상을 이기게 된 것입니다.

이덕무는 어린 시절 가난을 심하게 겪은 탓에 물상에 의지하지 않는 습관을 들여왔습니다. 있었다 없어지는 물질이 아닌, 마음의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최상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최하등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또한 최하등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간다(이덕무 1978, 211).

이러한 습관은 청나라의 문물을 대하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게 만듭니다. 이렇듯 청나라 문물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었던 이덕무는 청나라와 조선이 반드시 같은 환경에 있지않고 따라서 청나라의 문물이 조선에 무조건적으로 유입된다고 해서 그것이 조선의 번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 망정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이덕무 1978, 263).

하지만 이덕무가 보기에도 청나라 문물 중 조선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문물을 조심스럽게 배우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책이었습니다. 앞선 희귀 도서 목록이 그의 이러한 노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책으로 세상을 보는 눈 역시 탁월했습니다. 그가 쓴 “청령국지(이덕무 1978)”는 일본의 역사, 가계도, 문화, 생활 심지어 지도까지 일본의 전체를 담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 입니다. 어떤 일본 사람이 이 책을 보고 “이 자가 언제 일본을 다녀갔나?”고 물은 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가 이런 저런 책들을 보고 배운 것을 다시 책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보고 배운 간서치 이덕무. 그의 방법은 옳은 것이었는지 혹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이었는지는 이덕무에 대해 더 깊은 연구가 이루어진 다음에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북학파에 이덕무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역시 북학파로써 시대를 살아가고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이덕무. 1978. 《청장관전서》.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정민 외. 2013.《북경유리창》. 서울: 민속원. 임기준. 2014. 《연행록 연구층위》. 서울: 학고방. 하영선. 2011. 《역사속의 젊은 그들》. 서울: 을유문화사. 이덕무. 2011. 《책에 미친 바보》. 권정원 역. 서울: 미다스 북스. 전홍석. 2006. 《조선후기 북학파의 대중관 이해》. 파주:

한국학술정보. 박지원. 2014. 《열하일기》. 리상호 역. 파주: 보리. 권정원. 2007. “이덕무의 가계와 교우관계” <한문학보> 17 권정원. 2015. “이덕무의 명청문학에 대한 관심의 변화 양상”

<동방한문학> 65 안소영. 2005. 《책만 보는 바보》. 파주: 보림.

←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