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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을 사랑한 서태후와 청일전쟁의 패전책임

베이징에서 동아시아 복합질서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8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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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 이지은 · 서울시립대학교

서태후의 여름궁전

2018 년 7 월 4 일, 사랑방 10 기는 베이징 답사의 두 번째 날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오전에는 차례로 국가박물관과 전쟁기념관에 들러; 각각 송나라와 김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모두가 지쳐갈 때쯤 동북지역 음식을 맛보기 위해 ‘인민공사’라는 상호의 식당에 들렀습니다. 문혁시기의 마오쩌둥과 인민의 모습이 그려진 삽화들을 보면서 유쾌한 식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청조의 여름궁전으로 유명한 이화원이었습니다. 날은 여전히 찌는 듯 더웠지만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궁의 입구는 이화원이 서태후에게 그토록 사랑받은 이유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화원을 서태후의 화려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운 삶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새롭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화원은 어제 우리가 방문한 자금성으로부터 약 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건륭제 재위 당시에 ‘청의원(淸漪園)’이라는 이름으로 청조의 황실정원으로 처음 조성된 이곳은 1860 년에 영불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은퇴하는 서태후의 거처로 사용하기 위해 1886 년 지금의 명칭으로 재건공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공사에 소모된 비용의 규모와 조달 방법과 관련해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서태후입니다. 서태후는 이화원을 짓기 위해 거액의 북양해군 예산을 유용했고, 군비가 부족한 채로 청일전쟁에 임했던 북양해군이 패퇴하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오늘은 이곳 이화원에서 그녀가 휘두른 권력의 양상과 청 해군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우리가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에 얼마만큼의 책임을 서태후에게 물을 수 있을지를 논의해보겠습니다.

권력자 서태후

훗날 서태후로 불리는 자희(慈禧)는 1835 년 11 월 29 일 베이징의 한 만주족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1852 년에 총 8 계급의 내명부 내에서도 하위계급인 6 급에 해당하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합니다. 그러다 1856 년 동치제가 되는 원자를 출산하면서 자희는 황자의 생모자격으로 1 급에 해당하는 황후의 칭호를 받습니다. 이는 황제의 정실부인인 자안태후와 동일한 계급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자희태후는 동쪽의 자안태후와 구분하여 서쪽의 태후, 즉 서태후로 불리면서 내명부 내에서 2 인자로 자리매김하게됩니다. 그러던 중 1861 년 남편인 함풍제가 8 명의 대신이 공동으로 동치제를 섭정토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그러나 서태후는 공친왕, 동태후와 함께 신유정변을 성공시키면서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합니다. 이때 황실이 내리는 칙명에는 두 태후 모두의 인장이 필요하긴 했지만 점차 모든 결정이 서태후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합니다(김형종 2010, 44). 이렇게 섭정이라는 간접통치 형태로 서태후가 청조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시기는 신유정변부터 광서제의 친정이 시작되는 1889 년까지입니다.

광서제와 서태후는 광서제의 혼인을 기점으로 점차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데요,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 광서제는 이제 서태후를 견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은퇴와 동시에 자금성을 나온 서태후는 1891 년에 아직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이화원으로 우선 이사하였습니다. 이때의 이화원은 서태후가 광서제에 의해 자금성에서 일어나는 국정 전반에서 배제 및 고립된 공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화원으로 이사한 후에 서태후의 정치적 영향력이 광서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고 볼 수 있는 까닭은, 은퇴 이후에 서태후의 정치적 활동은 대신들이 마련한 일련의 규칙을 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칙에는 광서제가 국정을 서태후와 논의할 의무가 없고 또한 서태후도 그 결정에 발언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황실에 접수된 보고서들의 내용은 제외한 그 제목만을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광서제는 문안인사를 위해 서태후를 방문하면서도 그녀와 국사를 논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안들은 광서제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서태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Chung 2013, 252-253).

비록 그녀가 동식물에 둘러싸여 뱃놀이를 즐기는 이화원에서의 삶을 무척 사랑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움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던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강력한 지도력이 요구되는 청일전쟁 도중에야 다시금 정계로 나서게 됩니다. 이처럼 서태후가 가졌던 권력의 정도와 한계는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습니다. 일선에서 서태후가 최대 48 년 동안 한결같이 청조를 휘두른 절대권력자로 묘사되는 것과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화원 재건공사

다시 이화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앞서 청조가 이화원을 재건하게 된 까닭이 이곳을 서태후의 은퇴 후 거처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화원보다도 먼저 이러한 목적으로 고려되었던 공간은 원명원圓明園이었습니다. 동치제 12 년인 1873 년에 원명원을 부분적으로 재건하도록 하는 칙명을 발표하였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1886 년에 특히 이화원을 마음에 두었던 서태후가 은퇴를 앞두고 “예전의 황제들이 자주 찾아갔던 승덕의 피서산장과 같이 값비싼 여행을 다니거나 최근에 근대화된 해군을 방문하기를 포기하는 대신에 평소 소망해왔던 은퇴 후의 거처를 건설하고 싶다(Chung 2013, 247)”고 밝혔고 이전과 같이 극심한 반대는 없었기에 이화원 재건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화원에서 곤명호를 바라보는 사랑방 학우들
이화원에서 곤명호를 바라보는 사랑방 학우들

여기에는 1894 년이면 환갑을 맞이하는 서태후의 생일잔치를 이화원에서 성대하게 치르기 위한 서태후의 개인적인 욕심뿐만 아니라, 서양의 공격으로 인해 실추된 청 황실의 위상을 회복하려는 청조의 정치적 고려가 모두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허명길 1984, 30-32).

문제는 이 공사에 소모된 비용이 막대했으며 이를 조달하기 위해서 서태후가 당시 리훙장이 이끌던 북양해군의 예산을 유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복구비용 및 유용자금의 규모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각기 다른 규모와 출처를 언급하고 있지만, 일부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총 복구비용이 최대 은 600 만냥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당시에 예산처가 전체 공사 규모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56 개 공사 현장에 필요한 초기 비용을 316 만 6700 냥으로 추산했기 때문입니다(Chung 2013, 247-248). 이화원을 복구하는 데에 600 만냥이 들었다고 한다면 이는 광서제의 결혼 비용인 550 만냥을 조금 상회하는 수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서태후는 공사비용의 절반에 가까운 300 만냥을 직접 저축한 자금에서 보태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비용을 어떻게 마련했는가 하는 것이 논쟁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화원 재건을 꼭 추진하고 싶었던 서태후는 공사를 추진하기에 앞서서 호부(戶部)의 예산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그녀가 찾아낸 방법은 당시 해군을 재건하는 역할을 맡았던 순친왕과의 정치적 친밀함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청의 해군에는 매년 400 만냥에 가까운 예산이 배정되었는데, 순친왕은 서태후가 외국의 은행에 넣어둔 해군의 예산에서 연간 30 만냥의 이자를 취하도록 협조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장융은 서태후가 국가 재정에 직접 손을 댔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후에 300 만냥 가량을 해군비에 기부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흡사 서태후의 자금 유용을 합리화하는 논지를 펼쳤습니다. 이러한 기부가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시 청의 국가재정과 일반 국민의 생활상을 고려한다면, 황실의 여름궁전을 마련하기 위한 공사는 필수가 아닌 사치스러운 선택이었고 이에 소모된 공사비용이 국가에 손해를 끼쳤음은 확실해 보입니다.

해질녘의 곤명호와 불향각
해질녘의 곤명호와 불향각

다만 이러한 사치가 저지되었던 1873 년과는 달리 1886 년에 재건공사를 강력히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반적으로 청의 국정 운영이 효율적으로 견제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 해군의 군사력과 군사전략

앞에 드넓게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청 해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령 서태후가 해군의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북양해군이 청일전쟁에서 참패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반대로 북양해군이 연간 예산을 충분히 확보했다면 청일전쟁에서의 승자는 바뀌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 해군의 군사력과 군사전략에 대해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근대 전쟁에서 특히 해군력이 전세를 좌우하게 되는 까닭은, 제해권을 차지하는 쪽이 육지를 통해 신속히 군사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일전쟁 당시에 일본과 중국도 바다를 통해서만 조선에 병력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Paine 2003, 152; 김용욱 2008, 31). 일본은 전쟁을 개시한 지 약 2 개월만인 1894 년 9 월 17 일, 이미 황해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청 함대의 30%를 물리쳤고 이는 전세가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될 것임을 말해주었습니다.

사실 일찍이 해군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일본은 청일전쟁을 앞두고 육군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해군력 증강에 투자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육군에는 4 천 700 만엔, 해군에는 1 억 6 천 900 만엔의 예산을 배정하였고 특히 해군예산은 1881 년 대비 1891 년에 200% 증가한 수치입니다. 1895 년 일본의 군사예산은 국가전체예산의 30%를 차지하기에 이릅니다(Paine 2003, 327). 청일전쟁에 참가한 일본의 군사력은 총 10 만의 군사와, 해군의 경우 32 척의 전함 그리고 23 척의 어뢰정을 보유한 규모였습니다 (Rawlinson 1967, 168).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청조 역시 1860 년대부터 서태후와 리훙장이 앞장서서 군사력 증강 및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서태후는 꾸준히 청 해군의 군비가 확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녀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에는 이러한 의지가 북양대신 리훙장을 통해 실제 시행되었습니다. 리훙장은 선박 구매부터 건조, 무기 제작 등과 같은 군사관련 임무 전반을 수행하였으며 1871 년에는 북양함대를 건립합니다. 북양함대는 청일전쟁 전까지 전력 규모로는 세계 8 위, 극동아시아에서는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로 평가 받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적어도 해군력 측면에서 일본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 당시에 중국 해군은 65 척 규모의 전함과 43 척의 어뢰정을 보유하였으며, 특히 북양해군이 보유한 7 천여톤 규모의 철갑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일본에 위협적으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당시 영국해군의 부사령관 발라드(G. A. Ballard)는 이들 철갑함을 두고 “일본 최고의 전함 6 척을 합친 수준의 전함”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한 학자는 이미 북양해군만의 규모가 일본 해군 전체의 규모와 비슷했다는 점에서 해상전에서는 충분히 중국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Rawlinson 1967, 168).

사실 보유 전함의 규모만을 비교하면 오히려 중국이 일본에 비해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청조가 배정한 연간 400 만냥의 해군예산도 거대한 규모의 전함을 보유하기에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군의 근대화를 위해 동원된 자원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던 점이 지적됩니다(이종호 2015, 30). 또 미흡한 군사훈련과 근대지휘체계 부재로 인해 전투력이 낮았고(Upton 1878, 20), 군사전략이 방어전 위주로 잘못 설정되었던 점 등도 구체적인 패배요인으로 거론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청 해군의 군사전략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리훙장이라는 인물과 함께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청 해군은 지나치게 방어전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이토록 방어적인 해양전략은 중국의 지정학적 특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중국 왕조에게 위협으로 인식된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기에,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내륙방어가 무엇보다 우선시되었습니다(조한승, 119; Paine 2003, 218). 중국은 명나라 들어서야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해상으로부터의 위협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왜구가 연해 지역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수비하는 정도로 대응하는 데에 그칩니다. 육지를 중시하고 바다를 경시하는 기존의 국방관념이 유지되고 있던 것이지요. 해양방어의 중요성을 중국인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사건은 1874 년 일본이 대만을 침략한 사건입니다. 리훙장도 해양방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당시 청조가 내륙방어보다도 해상방어에 예산을 집중적으로 배정하여야 한다고 황실에 주장한 바 있습니다(Paine 2003, 218). 그러나 현장지휘관으로 리훙장은 함대건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렇게 건설한 함대를 주로 연안지역을 방어하는 데에 사용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리훙장은 기존의 국방관념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고, 평소에 타협과 평화를 추구하는 그의 외교주의자적 면모가 이렇듯 수동적인 군사전략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劉中民 2013; 233-243). 실제로 리훙장이 8 월 14 일 하달한 명령서에는 방어와 수비에 관한 내용만이 담겼고 공격 계획은 아예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리훙장의 소극적 방어전략 하에서 강력한 북양함대는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나서지 못한 채, 웨이하이에 머물며 상대를 겁주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와 함께 당시 청해군에는 단일화된 지휘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북양해군을 이끌던 리훙장과 같은 관직과 권한을 가진 사령관이 총 6 명이나 되었습니다. 실제 전쟁에는 일부 함대만 동원되었지만 모든 함대가 참여하였더라도 엄격한 규율이 확립되지 않아 협동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는 힘들었다고 합니다 (Rawlinson 1967, 169; 량치차오 2013, 179). 이처럼 우리는 근대 해군력을 고려할 때 우리는 비단 무기나 장비가 얼마나 마련되었는지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지휘체계와 적극적 군사전략이 마련되었는지 역시도 살펴보아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청일전쟁 발발 약 20 년 전부터 청조가 군사력 증강과 현대화에 힘썼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전략적 한계가 무척 아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일전쟁의 패전책임: 이화원을 나서면서

이화원과 관련한 질문의 시작은 이화원을 복구하느라 북양해군이 패배했다는 논리가 성사될 수 있는가 였습니다. 우선 북양해군이 일본 앞에서 완전히 무너진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군비부족 외에 다른 요소들도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패전의 원인을 따지는 목적이 단순히 특정한 개인에게 패전의 책임을 모두 전가하고, 그를 비난하기 위한 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논의들을 통해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만약 서태후가 아니라면 청일전쟁의 패전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차례로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현장지휘관으로 북양함대를 이끈 리훙장은 군사전략 설정과 현장에서의 전투수행과 관련하여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끈 북양함대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지나치게 수동적인 방어전을 구사하였습니다. 매년 거대한 금액을 들여 새로이 구입하고 건조한 함선이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기회가 리훙장으로 인해 차단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이러한 군사전략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는 인물은 리훙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광서제 혹은 서태후 정도에 한정되지만, 청일전쟁 직전까지 서태후는 이화원에서 리훙장조차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한편 당시에 정치실권을 장악한 광서제와 그의 스승 옹동화는 기본적으로 국방보다 국내적 위기 관리를 우선시하는 인물들 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도 군사적 사안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광서제의 친정이 시작된 1889 년 이후에는 해군함이 전혀 증설되지 않았고, 1891 년 에는 해군을 비롯한 모든 군대에 투자를 중지하도록 명령한 사실도 이러한 논지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서태후가 어떠한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안락한 노후를 위하여 국가의 재정이 어려운 시기에 필수적이지 않은 공사로 사치를 부린 점, 그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국고에 손을 댔다는 점은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찌보면 위기속에서 국가의 수명을 20 세기 초까지 연장시킨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김형종 2010, 63). 우리는 서태후를 완전히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그녀가 누린 권력의 정도와 한계를 고려하여 각기 사안에 따라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녀에게 지울 수 있는 비난과 책임의 범위도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한 국가가 전쟁에서 패하고, 망하는 원인과 책임을 그 시대를 살아낸 특정 개인에게 오롯이 전가하는 단순한 논리를 경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화원에서의 발제를 마친 후 사랑방 학우들과 함께
이화원에서의 발제를 마친 후 사랑방 학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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