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 : 이상과 한계
베이징에서 동아시아 복합질서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 손상용 · 성균관대학교
들어가며
“내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 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나 자신에 대하여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님 웨일즈, 1984, 464) 이런 말을 남긴 주인공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본인의 생애와 나라의 역사가 실패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주인공은 바로 사랑방 10 기 답사의 둘째 날 우리가 만나고자 했던 감산입니다. 우리는 과거 중국 인민공사를 모티프로 운영 중인 식당에서 푸짐한 점심을 먹고 김산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 청시(城西) 구역의 완핑청(宛平城)에 위치한 중국 인민항일전쟁 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전쟁기념관은 1987 년 항일전쟁 50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1931 년 9.18 사변부터 1945 년까지 항일전쟁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박경석 2009, 169).
하지만 약 5000 여 점에 이르는 중일 전쟁과 관련된 사료 속에서도 주인공인 김산의 행적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김산 이외에도 과거에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항일 투쟁을 했던 적지 않은 수의 혁명가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기록조차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김산의 행적은 님 웨일즈에 의해 『아리랑』 이라는 소설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김산의 삶을 소개하기에 앞서 김산과 님 웨일즈의 만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둘의 만남은 1937 년 옌안의 루쉰 도서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님 웨일즈 1984, 40). 이후 님 웨일즈는 약 3 개월 동안 김산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하며 김산의 삶과 행적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님 웨일즈는 ‘중국 인민의 친구’라고 불리우는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으로 남편인 그에게 “아시아의 황후가 되고 싶어 중국에 왔다” 라고 말 할 정도로 당돌한 여성이었는데요. 그렇다면 그녀가 옌안의 작은 도서관에서 영문책을 유난히 많이 빌려가고 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한 청년에게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님 웨일즈는 김산으로부터 이름조차 낯선 나라인 ‘조선’을 처음 듣고 김산의 인생에 크게 매료되고 그의 삶을 엮은 한 편의 소설을 작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 답사 보고서에서는 김산과 님 웨일즈가 함께 작성한 『아리랑』을 중심으로 김산의 삶을 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서 생생한 중일전쟁의 기록과 함께 복원해 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으로 김산의 삶을 복원하기에 앞서, 그의 삶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으로 1905 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산은 10 대 시절을 조선에서 보내며 일제 강점기의 쓰라린 아픔을 몸소 체감하는데요. 무엇보다 1919 년 3.1 운동의 좌절을 직접 목격하며 김산은 16 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르게 됩니다. 1 년 남짓의 짧은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김산은 본격적으로 중국으로 넘어가 중국 혁명에 참여하고 조국의 해방을 위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처럼 김산은 조선의 가장 참담한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불꽃 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다 떠났습니다. 김산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그가 가장 절망적이고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싸웠던 항일 독립운동의 장면을 집중적으로 촬영했지만, 본 보고서에서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김산이 평생을 믿고 실천했던 생각을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으로 명명하고 이에 대해 탐구하고자 합니다.
김산에 관한 미스터리
김산은 1938 년 그가 평생을 헌신했던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비밀리에 처형당합니다. 하지만 1983 년에 중국 공산당은 그의 당적을 복권 시켰으며, 1992 년에는 북한 정부는 김산을 항일투쟁사의 인물로 기록했고, 2005 년 한국 정부는 조국해방을 기념하며 김산에게 서훈과 함께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김산의 삶과 죽음에는 아직도 많은 의문점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김산의 삶에 대한 대표적인 의문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활동한 조선인으로서 김산이 지니는 대표성 논쟁입니다. 다시 말해, 김산은 1920 년대, 1930 년대에 중국 혁명에 참가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을 대표할 수 있는 혁명가 일까요? 중국 측 사료에 따르면 김산은 공산당 내부에서 북경 공산당 비서이자 화북 조직 위원회 위원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 정치와 물리학 등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김산의 이력만을 보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항일 독립 운동가였던 김성숙 선생님이 김산의 지위와 행적에 대해 치켜세우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김학준 2005). 하지만 김산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중국의 항일 전쟁기에 조선의용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하고 광복 후에 공산당 고위직에 오른 문정일이라는 인물입니다. 문정일은 “그런 인물을 중국 내 조선인 혁명가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추켜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미즈노 나오끼, 1993, 147). 이처럼 김산의 중국 공산당 내부 입지와 활동에 대한 상이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둘째, 김산의 죽음에 대한 의문입니다. 김산의 죽음에 대한 다른 해석은 『아리랑』의 저자인 님 웨일즈가 주장하는 ‘병사설’과 『아리랑 그 후』의 저자인 이회성 ∙ 미즈노 나오끼가 주장하는 ‘숙청설’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후자는 김산이 ‘트로츠키주의자’와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서 숙청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 내부 문건과 중국에서 발간된 『조선족 혁명 렬사전 제 3 집』에서 확인되어 정설로 수용되었습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는 김산의 명예와 당적을 회복하며 김산의 죽음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 내 조선인 혁명가로서 김산의 대표성과 김산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트로츠키주의자’ 혹은 ‘일본의 스파이’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무엇이 김산의 죽음에 이러한 오명을 부여한 것일까요? 본 보고서에서는 김산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넘어 학술적으로 혁명에 대한 김산의 생각을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이라 명명하고 형성 과정, 실천, 한계를 그의 삶을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김산의 삶과 관련된 논쟁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김산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 형성 과정
김산의 혁명론은 동아시아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그의 삶의 경험 속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김산은 유년시절을 조선에서 보내며 일본의 잔혹한 지배 속에서 국내 해방운동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919 년 3.1 운동 실패를 기점으로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꿈꾸게 됩니다. 조선을 떠난 김산은 일본에서 1 년 남짓의 짧은 유학 시절을 거치고 본격적으로 중국 혁명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김산은 국제사회주의에 근거한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을 형성합니다. 즉 김산은 조선, 중국, 일본 노동계급 간의 연대를 바탕으로 추후에 일본에서 일어날 사회주의 혁명이 조선과 중국으로 확대되어 조선이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이를 평생에 걸쳐 실천합니다. 다시 말해, 조선의 혁명 역량이 성숙되기 전까지는 중국 혁명에 참가하여 중국의 혁명 역량 성숙을 도모하고, 중일 전쟁을 기점으로 조선의 혁명 역량 제고를 통한 조국 독립 투쟁을 도모한다는 생각입니다(님웨일즈 1997, 334). 본격적으로 1920 년대, 1930 년대 김산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그의 혁명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 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921 년에 김산은 16 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동아시아 지식의 메카였던 동경의 분위기 속에서 초보적인 수준의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일본 공산당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됩니다. 즉 김산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 분노하면서도 일본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애정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 김산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1919 년에 혁명적 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일본
공산당원은 정직하고, 강인하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열적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몸을 바친다. 나는 내가 잘 아는
일본인을 정말로 좋아한다. 중국인과 달리 일본인은 조선인이나 그 밖의
외국인 동지들을 절대로 구별하지 않으며 정말로 국제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님 웨일즈 1997, 114).”
1921 년 후반에 김산은 일본 유학 생활을 끝내고 중국 본토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물론 김산은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잠시 상해에서 활동하며 이동휘, 안창호 등을 만나고 의열단에 가입하며 잠시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손염홍 2017, 308). 하지만 북경으로 건너간 그는 김충창을 만나 본격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중국 혁명에 참여하는 어엿한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됩니다(손염홍 2008). 1927 년 김산은 조선인들을 이끌고 광둥 봉기에 참여, 활약하며 중국 공산당원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게 됩니다(중국공산당 역사 자료 총서 중공당사자료출판사 1988). 이와 더불어 김산은 1920 년대에 중국 혁명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혁명 역량 강화에도 힘씁니다. 대표적으로 김산은 1925 년에 북경 사회과학연구회, 1927 년에 의열단, 한국혁명동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머나먼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합니다(미즈노 나오끼 1993, 93).
1930 년대 김산의 행적은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은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중국의 혁명역량 제고에서 ‘조선의 혁명역량 제고’로 노선이 급변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1930 년대 전반부에 김산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두 가지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첫째, 김산은 두 차례나 체포되어 일본 경찰로 이송됩니다. 1930 년 11 월 김산은 광둥 무장봉기 3 주년 기념행사 집회를 준비하던 도중에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로 이관됩니다. 일본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과 재판을 받았지만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됩니다. 이후 1933 년 4 월에 김산은 두 번째로 체포되지만 공산당원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당국은 김산을 석방하게 됩니다. 두 차례의 투옥을 통해 김산은 건강과 정신이 많이 피폐해지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공산당 동료들은 김산이 일본에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풀려난 것을 보며 김산을 ‘일본의 스파이’라고 의심하게 됩니다. 둘째, 김산과 중국 공산당 내부의 또 다른 조선인 혁명가인 한위건의 갈등관계가 증폭됩니다. 김산에 대한 중상모략의 이면에는 한위건이 있었습니다. 한위건은 김산이 베이징 당 조직위원회 서기로 재직하던 시절에 자신의 당적과 관련된 부탁을 김산이 거절한 것을 계기로 김산에 앙심을 품었습니다. 물론 이를 단순히 개인 간의 갈등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김성숙의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따르면 “한위건은 중국 공산당 안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철부라는 필명으로 이론을 제시하여 중국 공산당 안에서도 철부 노선이라는 말이 퍼졌다”에서 드러나듯이 한위건의 위상은 매우 높았고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김산의 입지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지대했습니다 (한상도 2004, 184). 아래에서 김산의 인식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1931 년 4 월에 그는 다른 조선인의 추천으로 당에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제 내가 돌아왔으므로 만일 내가 책임 있는 자리에 다시 앉게
되면 자기가 나나 당에서 함께 일 할 수 없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생사를 걸고 정치적, 개인적 숙적과의 투쟁에 몸을 바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씨는 이전에 나와 싸운 적이 있어서 나를 미워하는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을 몇 사람 동원하고 또한 몇몇 공산당원들까지도
내가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내가 자술서를 썼으며
첩자로서 왜놈들과 비밀 연락을 갖도록 강요 받았다고 하는 암시를
넌지시 비춘 것이다.”
위의 두 사건을 통해 김산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겪으며 자살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김산은 중국 공산당 내부 활동에 대한 회의감을 갖기 시작하며 근대적이고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역량을 가진 일본과 비교하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부정과 환멸이 커져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사실은 그의 소외감을 더욱 증폭시키게 됩니다.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 이상 및 한계
동아시아 3 국 혁명론과 조선 독립에 대한 김산의 이상은 조선민족연합전선 행동강령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조선민족연합전선 행동강령을 작성하기 전까지 김산의 행적은 중일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조선의 혁명 세력 결집을 위해 상해로 떠나 조선의 독립 운동 단체 결성을 도모합니다. 또한 김산은 조선의 독립 운동을 위해 중국 공산당에서 당적 회복을 바라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이를 거절하며 조선 측의 혁명 운동에 집중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합니다. 이에 따라 김산은 1936 년에 상해에서 김성숙, 박건웅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등 이념을 구분하지 않고 민족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민족해방 동맹을 결성하게 됩니다(미즈노 나오끼 1993, 124). 이와 더불어 김산은 조선민족연합전선을 구축하고 1936 년 7 월에 주도적으로 조선민족연합전선의 행동강령을 작성하게 됩니다. 김산이 직접 집필한 조선민족연합전선의 행동강령의 발췌 항목을 통해 김산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 1 항 전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조선독립의
원칙에 찬동하는 모든 조선인은 사회ㆍ계급ㆍ당파ㆍ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조에 관계 없이 또 여하 한 조직이나 개인의 구별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뭉쳐야 한다.
제 11 항 일본의 대아연방 진출과 중국 침략에 반대하여 중국인의
항일민족 전선과 아연방의 반침략노선과 동맹을 체결하라.
제 13 항 일본 제국주의의 직접적 억압을 받고 있는 동양 전 민족의
중심세력이 되어 동양의 광대한 반침략평화전선을 조직하기 위하여
중국, 소연방, 일본 및 조선의 인민간에 일대 공동전선을 형성하라. 제 3 항에서 김산은 계급 투쟁을 중단하더라도 조선 독립을 위해 모든 세력이 연대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 11 항, 제 12 항, 제 13 항, 제 14 항에서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계급들 간의 연대를 강조하는 그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 12 항에서는 일본 내부의 반파쇼 인민전선을 단호히 지지하며 협력관계를 맺으라고 하는데 일본 노동 계급에 대한 김산의 신뢰와 더불어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의 한 축인 한일 노동 계급의 연대를 시사합니다. 제 13 항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중국, 조선, 일본의 노동 계급이 연대하여 공동 전선을 형성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김산은 피식민지 조선인 혁명가로서 비록 중국 혁명에 참가하였지만 정통 공산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었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중국 혁명은 김산에게 지상 목표가 아니라 조선 독립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방법론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산이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을 통해 예측한 것과 다르게 혁명의 도미노는 일본에서 발생하지 않았고, 중일전쟁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은 요원했습니다. 따라서 김산의 혁명론에 내재하는 논리적 오판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김산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김산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에서 대공황이 발생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혁명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김산은 1931 년 9 월 18 일을 기점으로 일본 경제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의존도가 심각해지고 균형을 잃었다고 분석합니다. 또한 국제체제적 관점에서 유럽 국가들은 스페인에 발이 묶여 있고 소련은 내부적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주요 강대국들이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하지만 김산의 생각과는 다르게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일본 사회주의 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일본 노동당은 정부에 의해 1924 년에 해산되고 1926 년에 다시 지하정당으로 활동하기도 하지만 1925 년 일본의 치안유지법과 1931 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탄압이 심해지고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정혜선 1995, 143). 따라서 일본에 조선 혁명과 해방을 위한 전략적인 ‘혁명기지’가 있고 일본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면 이는 조선이 무장 투쟁에 가담하여 조국 해방을 도모하는 시발점이 된다는 김산의 생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인 것이었습니다.
둘째,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은 당대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던 코민테른 뿐만 아니라 김산이 활동했던 중국 공산당과도 엇박자를 보이게 됩니다. 김산이 활동하던 당시에 개최된 코민테른의 주요 회의는 1924 년 코민테른 제 5 차 대회, 1928 년 코민테른 제 6 차 대회, 1935 년 코민테른 제 7 차 대회입니다. 1920 년대의 코민테른 주요 쟁점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독자적 혁명 역량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으며 이에 따라 제 5 차 대회에서는 트로츠키주의를 위험한 이념 편향으로 간주하고 레닌주의를 추진하게 됩니다. 또한 제 6 차대회에서 소련 공산당은 기존의 국제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 스탈린주의로 노선을 변경하고 자본주의 몰락을 예견하며 공산 세력이 독립성을 지키며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할 것을 명령합니다. 동시에 ‘12 월 테제’를 통해 한인 혁명가들이 중국 공산당 내부로 편입할 것을 지시합니다(손염홍, 2017, 297).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은 코민테른 노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형성되고 제약을 받으며 발전하게 됩니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코민테른 제 5 차 대회를 지지하며 코민테른 제 6 차 대회를 충실히 이행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산은 광둥봉기 이후 조선 혁명역량이 부재했다고 믿고 북경 공산당 비서 및 화북조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1935 년을 기점으로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은 코민테른 ∙ 중국 공산당과는 다른 노선을 걷게 됩니다. 김산은 중일전쟁이 임박했고 조선의 혁명 역량이 충분히 배양되었다는 판단 하에 조선의 자체적 혁명 역량을 키우기 위해 모든 힘을 쏟습니다. 조선 공산당이 하나의 세력으로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김산의 인식은 아래에서 잘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은 중일전쟁이 임박하자 일본과의 격전을
“우리는 더는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 자신을 잃어 버릴 처지가
못 된다. 우리는 쫓겨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세력에 가담하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중국에 가세해야만 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장래의 행동을 위하여 조선인의 운동을
건설하고 준비하는 방향으로 재빨리 우리의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님
웨일즈 1997, 459)”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산은 중국 공산당 노선에 분노를 표하고 당의 노선 변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내기도 합니다. 심지어 항일 군정대학에서 김산은 일본에서 대공황과 사회주의 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날 것이라는 위험한 그의 사상을 설파하기도 합니다. ‘일국 사회주의’에 입각한 중국 공산당의 노선에 비추어 볼 때,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의 한 축인 일본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 혹은 ‘일본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치며
중국 인민항일전쟁기념관의 시작과 끝에서는 결연한 표정의 거대한 중국군 조형물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를 압도하는 진중한 표정과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담고 있는 그 무게 속에서 저는 김산에 대한 미스터리가 서서히 풀려갔습니다. 중국 혁명에서 마오쩌둥은 오늘날까지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산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본 답사 보고서에서 추적했던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은 당시 동아시아의 제반 환경에 대한 김산의 판단이 완벽한 오판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신뢰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받았던 의심의 눈초리는 결국 김산이 ‘트로츠키주의자’ 혹은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중국 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서 김산을 떠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반대로 전쟁기념관의 무거운 공기를 느끼며 김산이 살았던 1930 년대의 중국과 조국을 잃은 한 청년의 연대기를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김산은 어린 나이에 홀로 일본 유학 생활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혁명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김산의 가슴 속에서 조국의 해방이라는 목표는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물고문을 받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조선인 동포와 함께 투쟁했던 중국 공산당 동료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조차 그의 목표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살기도를 하기도 하지만 김산에게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은 중일 전쟁의 임박과 조국의 해방에 대한 믿음이 담긴 그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이었습니다. 물론 한 명의 혁명가에게 엄정한 사상체계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김산의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은 동아시아를 누비며 항일 운동을 도모했던 김산의 삶의 정수이며 동시에 가장 암흑같은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촛불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김산의 삶을 이해하고 그가 느꼈던 시대의 무게를 나누기 위해 ‘동아시아 3 국 혁명론’을 소개하며 답사보고서를 마치겠습니다. 참고문헌 김산, 님 웨일즈. 1997. 《아리랑》. 송영인 역. 서울: 동녘. 님 웨일즈. 1986. 《아리랑 2》. 편집실 역. 서울: 학민사. 미즈노 나오끼. 1993. 《격동의 서른 세 해》. 서울: 동녘. 박종성. 1995. “김산의 혁명사상 연구: 유산된 혁명의 정당성은 옹호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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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성, 미즈노 나오끼. 1993.《아리랑 그 후》. 윤해동 역. 서울: 동녘. 이회성. 1993. 《특별한 여행》. 서울: 동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