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상하도의 국제정치학
베이징에서 동아시아 복합질서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중국국가박물관 · 주연정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중국 국가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국가 형성과 발전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19 세기를 기준으로 그 이전 고대 중국 역사의 찬란함과 이후 근현대 중국의 근대국민국가화 과정에서의 민족적 부흥의 노력이라는 두가지의 큰 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편전쟁 이전 중국 역사에 대한 전시는 상고시대 및 하은주의 고대사부터 청 말기까지 중국 역사의 발전에 대해서 통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송 왕조 시기의 전시품들이 그 어느 시기보다 크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달을 반영한 유물들로 가득해 송 대에 이룩한 발전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국가박물관이 보여주는 송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문명적 수준을 고려했을 때 북방민족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열세로 인해 전연의 맹을 맺고, 남쪽으로 쫓겨가는 상황은 송의 실체에 대해서 이분법적 평가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군사적으로 취약하였던 관계로 결과적으로 송의 영향력이 동아시아에서 축소되었다는 점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특히 야만, 금수인 북방민족국가에게 군사적으로 참패하여 남송으로 쪼그라진 송의 역사는 비군사적 분야의 발전상과 대비되어 드라마틱하게 인식되곤 합니다.
북송 말기, 수도 개봉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청명상하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중국에 국보 제도는 없지만, 만약 있다면 국보 1 호로 손꼽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제작 시기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지만 보통 1120 년대 초반에 그려졌다고 전해집니다. 성문 안은 거리에 크게 늘어선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식당에서 무언가를 먹는 사람들, 짐을 잔뜩 실은 말과 수레를 끌고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활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문 밖은 물자를 실어 나르는 것으로 추측되는 큰 배들이 여러 척 정박되어 있거나 이동하고 있고, 강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 위로는 무수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문에는 물건을 등에 실은 낙타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서역과도 교류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갓을 쓴 고려인 역시 짐을 들고 뒤따르는 하인들과 한 무리를 이루어 개봉의 거리를 이동하고 있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27 년 금에게 패퇴해 북송은 망하고 남송으로 후퇴하기 직전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활발하고 화려하며 국제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11~12 세기 세계의 도시 발전수준을 봤을 때 청명상하도 속 개봉의 모습은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크고 화려한 건물들, 강과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 시장경제활동,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림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람들은 의복을 갖추고 정돈된 차림을 하고 있으며, 도시는 평화롭고 깨끗합니다. 또한 군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공권력 등 상위의 통제가 없이도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개봉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Hansen 1996; 김민호 2006). 실제로 송은 11~12 세기 세계 경제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였고, 이 당시 송에 출현했던 사회경제적 변화의 모습은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세계체제의 발전에 변혁을 가지고 올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모델스키는 송을 근대 세계질서의 맹아로 규정하며 포르투갈- 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이어지는 서구의 국가들이 세계질서를 주도하기 이전 세계체제의 혁명의 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송 대의 다양한 발전을 단순 중국의 내부적인 성장동력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수준에서 근대적인 발전의 초기 모습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모델스키의 접근에 기반한다면 송은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위용을 떨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와 금과의 군사적 경쟁에서 패해 남송으로 쫓겨 내려갔다는 사실은 사회경제적으로 세계적 혁명을 이루었던 송의 위상과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 세계의 공식적인 경제네트워크의 루트가 개봉-콘스탄틴노플 (비잔틴)의 연결망이었고, 개봉이 세계 경제의 수요와 공급의 중심적 역할을 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야만이었던 금의 군사적 침입을 막지 못해 갑자기 망해버렸다는 이 극적인 역사는 단순 로사비적 관점에서 현실주의 힘이 작동하는 국제정치의 시기로만 분석한다면 송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부분은 개봉의 일상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고려인 4 명이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짐을 실은 낙타 몇 마리가 그림 속에 있는 것을 보고 실크로드를 타고 서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림에 등장하는 고려인 일행을 보면 송과 고려 간 상당한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송과 고려는 1070 년대 다시 복교를 한 이후 상거래나 교역 부분에서 활발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고려와 송은 사대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특히 북송이 금에 멸망하기 직전인 1123 년에 고려로 보낸 사절단을 고려가 사대자소에 의거하여 상당히 극진히 대우한 것은 송과 고려 관계에는 송과 금 사이에 작동하던 질서와 다른 종류의 작동원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청명상하도는 송에 대한 국제정치적 해석을 상당히 흥미롭게 만들어줍니다. 이적인 금에 패하게 되는 송을 희화화하거나 중화로써의 송에 대한 향수를 그린 것이라는 논쟁점이 있지만, 모델스키가 보여주는 송의 위상을 고려하면 청명상하도 속 개봉의 모습은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송이 가진 경제력과 군사력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고려와의 관계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공시적 체제에서 질서 유지는 다양한 차원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천하질서를 분석하는 기존의 대표적인 접근법인 페어뱅크와 로사비의 모델은 각각 예와 힘을 중심으로 질서의 한 단면만을 봅니다. 이는 가장 대표적인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할 지 모르나, 천하질서가 보여주는 역사의 역동적인 부분을 포착하기에 한계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청명상하도에서 출발하여 송이 국내의 사회경제적 부흥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발전을 이루어 안정적인 국내질서를 형성한 반면 북방지역과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보였던 외부질서를 다루는 속에서 송이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力과 利와 義가 모두 작동하는 국제정치 질서의 총체적 작동원리를 초보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청명상하도’라는 그림이 이상하다
청명상하도는 수도 개봉의 전체적인 경관을 묘사하는 풍경화 류의 그림이 아니라 상업적, 경제적으로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는 개봉의 모습을 보여주는 풍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과 항구 그리고 이와 가까운 성문 안을 중심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나, 다리를 통해 물자와 함께 이동하는 수 많은 사람들, 성벽을 지나 도시 안에서 여러 경제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으로 꽉 차있습니다. 도시가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느낌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또한 여러 상점과 음식점의 건물도 여러 층으로 잘 지어진 건물들이고, 번잡한 시장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사람들의 모습도 잘 정돈되어 있으며, 일부는 문화적인 놀이를 즐기기도 하며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는 개봉의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청명상하도만 본다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번영을 이룩하였던 개봉과 북송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방민족국가들과 군사적으로 세력균형의 경쟁에서 결국 패하면서 남송으로 쫓겨가는 모습은 사회경제적인 발전상과 불균형합니다. 송의 이러한 역사와 청명상하도가 보여주는 불일치로 인해 청명상하도의 진위에 대한 논란도 존재합니다. 특히 청명상하도의 제작 날짜를 북송이 금에 패하게 되는 전후 시기로 본다면 청명상하도는 송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되는 그림일 것이라는 논의가 있습니다. 활발한 시장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구 수에도 안정적이고 깨끗하게 질서가 잡혀있는 개봉의 모습을 의아해 하는 것이지요. 그림에서 보이는 인구밀도 정도라면 도시는 번잡하고, 가난하며 범죄도 많이 발생해야 하는데, 청명상하도 속 개봉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림 제작 시점을 1100 년대 중반으로, 북송의 멸망 시기보다 더 뒤의 시점으로 잡는 논의들은 그림에 드러나는 생활 풍속들이 송 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금과 원이 천하질서를 장악해나가는 속에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실제 모습이라기 보다 노스탤지아 차원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청명상하도는 실제를 그린 것이 아니라는 의견, 실제보다 과장되어 표현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Hansen 1996, 190-194).
하지만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모델스키의 장주기론에서 송이 가지는 위상을 고려한다면 개봉은 사회경제적으로 세계적 수준의 글로벌 도시였던 것을 확실해 보이고, 따라서 청명상하도 속 개봉의 모습은 당시 실제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야만인 금에게 북송을 패했던 것일까요. 모델스키가 주장하는 대로 근대적 세계질서의 선행지표로 송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경제적 능력과 상대적으로 약했던 군사적인 능력은 송이 패권국으로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송이 주도세력으로써 내세웠던 발전모델은 군사적 경쟁에서 밀림으로써 영향력이 쇠퇴하였습니다. 군사력과 방어력의 취약성의 원인으로 개봉이라는 도시의 특징이 거론됩니다. 개봉은 황하 가에 위치한 평원 지역으로 방어 차원에서 도시를 보호해 줄 만한 산과 같은 자연환경이 없습니다. 북방의 기병들이 침략한다면 몇 일 걸리지 않아 황하를 거쳐 개봉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국방이라는 관점에서 개봉은 낙양이나, 장안에 비해 안보상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은 조운의 편리함이라는 이유로 개봉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물자의 수요와 공급 기반을 고려하는 데 있어서 육지보다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안보를 위해서 전대의 왕조들에 비해 더 많은 수십 만의 병사를 북방 지역에 주둔시켰는데, 조운을 통해서 북방의 군대에 양식과 물품을 공급한다면 안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김민호 2006, 321-2; Twitchett and Fairbank 2009, 222). 안보상으로 개봉은 최적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수도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관련해서는 유리한 조건을 가진 도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봉이 가진 지리적 조건은 송이 보여준 고도의 사회경제적 성장에 영향을 미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해주지 못함으로써 근대 국제질서의 선행지표로 송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경제적 발전은 지속가능성과 관련하여 한계 또한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특히 북방민족들과 고려와 같은 주변국을 관리하는 문제에서 로사비 모델(북방민족, 군사적)과 페어뱅크 모델(고려, 예적)이 혼합된 속에서 북방민족과의 경쟁에 군사적으로 패하면서 북송의 영향력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의 국내질서 다루기: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부상
모델스키의 장주기이론에 따르면 콘트라티에프(K-Wave)의 선도 부문(Leading Sector)의 부상 및 성장과 패권국의 등장 및 쇠퇴는 일치하며, 선도 부문에서 기술혁신이 일어나면 세계 경제가 발전된 순환을 보이게 됩니다. 선도 부문의 기술혁신은 특정 지역 및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며 선도 부문을 이끄는 국가는 세계정치경제질서와 규범체계 재편을 주도하면서 패권국으로 부상합니다. 즉, K 파동의 선도 부문을 주도하는 국가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모델스키는 북송-남송의 기간을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이어지는 세계 패권의 부침의 가장 앞에 송을 위치시키며 세계체제는 송나라 시기에 근대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Modelski and Thompson 1995).
송은 11~12 세기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이었고, 사회경제적 변혁의 중요한 모습을 보여주는 국가였습니다. 이는 중국 내부적인 성장동력 차원으로 한정해서 볼 수도 있지만, 세계체제 차원에서 세계 시장경제의 첫 번째 발흥이라는 점에서 송의 경제혁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송에서 시장경제가 출현하고 중국의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중세의 혁명이라 불릴만 했던 중요한 요소로 경제와 기술 패턴의 변화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농경과 관개, 화폐, 시장구조, 도시화,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인쇄(930~990), 시장경제 네트워크 구축(990~1060), 정치적 행정체제 구축(1060~1120), 글로벌 무역 확장(해양 교역 확장, 1120~1190)의 4 가지 K-Wave 의 선도 부문을 송이 주도하였습니다(Modelski and Thompson 1995, 159-170).
당시 세계는 체제적으로 국민국가, 기업체, 세계 수준에서의 네트워크가 초기의 형태로 조직되고 있었습니다. 인쇄 기술의 발달로 정보관리가 용이해졌으며, 해양을 넘나드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발전했고, 군사, 경제적 영역에서의 기술적 혁명은 세계시장 형성의 기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조건의 발전이 실제 사회경제영역의 발전을 촉진하고, 조직화되기 위해서는 1) 국가 레벨에서 시장형태의 조직이 생겨나야 하고, 2) 글로벌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 구조가 점진적으로 조합되어야 하며, 3) 무엇보다 경제적 수요와 공급을 감당할 수 있는 인구가 필요합니다(Modelski and Thompson 1995, 143-146).
송은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발전양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직, 체제가 구축되었고, 그 양적, 질적 규모와 발전 정도가 세계적이었던 관계로, 송의 국가 수준에서의 인구 폭발과 시장의 조직은 세계 경제의 수요와 공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으며, 대륙과 해양이 연결되는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세계 경제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글로벌 무역체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즉, 송이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데에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인데요. 980 년 620 만호에서 1101 년 1,750 만호로 가구 수가 2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표 1>에서 볼 수 있듯 1100 년대 세계 인구의 1/3 이 송의 인구였습니다. 송의 빠른 인구의 증가는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다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송의 정부가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인구 증대에 따른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이 촉진되었던 것이지요(Deng and Zheng 2015)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도시화도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20 개 주요 도시 중 7 개가 송의 도시였을 정도입니다. 즉, 세계적으로 태동하고 있던 근대적 국가, 사회, 경제 조직이 송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표 1> 800~1100 년 세계 인구에서 중국 인구의 비중
Population
World China China
Year
(in Million) (in Million) (% of the World)
800 220 50 23
1000 265 60 23
1100 320 100 31
(Modelski and Thompson 1995, 146)
<표 2>를 보면 1100 년경 송과 동아시아 주변국의 인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송과 주변국의 인구 규모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960~1125 년의 송의 인구가 약 1 억 2 천명의 수준을 보일 때 일본은 6 백만명, 고려는 3 백만명, 요는 3 백 80 만명, 여진은 1 백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국과 비교하여 기본적인 규모부터 큰 차이를 보이고, 사회경제적 영역에서도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송과 요, 여진은 국가발전 수준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 북방민족국가들과 정치군사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 2> 1100 년 경 동아시아 지역체제(regional System)의 인구
Political Unit Year Population
(in millions)
Sung 960-1125 120
Japan 6
Koryo 935-1392 3
Liao 930-1125 3.8
Jurchen 1069 (1115-1234) 1
(Modelski and Thompson 1995, 150)
송의 국제질서 다루기: 군사적 경쟁의 실패
송은 당이 멸망한 이후 5 대 10 국의 분열을 봉합하면서 등장하게 됩니다. 송 태조는 963 년 이후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송의 기반을 다지고자 합니다. 태조는 북쪽 세력의 실질적 위협을 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요와의 직접 대결뿐만 아니라 북쪽 동맹왕국들에 대한 공격이 요와의 전면전으로 확장될 위험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고민이었습니다. 건립 초기 송 조정의 결정은 북쪽 세력의 군사적 힘과 맞서기 전에 남쪽 왕국들의 부유함과 인적자원을 먼저 흡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Twitchett and Fairbank 2009, 221).
<표 3> 송과 요의 군사력 비교
Sung Liao
Years Total Number Imperial Troops Mounted Troops
of Troops (in Thousand) (in Thousand)
(in Thousand)
968-976 378 193
969-983 36
995-998 666 358
1017-1021 912 432 Before 1031 61
1041-1048 1259
1064-1068 1162 663 1078-1085 612
1101-1125 76
(Modelski and Thompson 1995, 152)
이상의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송의 군사력은 양적 규모의 부분에서 매우 우세했으나, 문제는 질적인 측면이었습니다. 북방민족과 군사적으로 겨룰 때 중요한 부분은 북방의 기병들을 상대할 수 있는 기동성인데 송은 이 부분에서 약했습니다. 송의 군사들이 말을 다루는 능력이 약했음에도 수도인 개봉의 주변은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북쪽 국가의 기병을 활용한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요가 송을 군사적으로 다루었던 전술은 말과 기병을 활용하여 치고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요는 500,000 마 정도의 우수한 말과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송이 가지고 있었던 말과 기병의 수는 요의 1/3 수준인 193,000 마 정도였습니다. 군사들이 말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활솜씨, 기동성을 무기로 송나라의 보병 위주의 군사력을 위협하였습니다. 요는 눈부신 속도를 무기로 공격하고 후퇴하는 전술을 활용하여 송을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었습니다. 송의 건립 초기, 개봉을 중심으로 하는 송이 남, 북쪽의 여러 왕국들과 병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유하나 군사적으로 약한 남쪽 왕국들을 먼저 정복하는 전략을 세우고, 남쪽으로 확장하는 제국의 모습을 보였던 것은 당시 상황 속에서 크게 이상한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할 수 있습니다(Twitchett and Fairbank 2009, 221-222).
송의 등장과 북쪽 세력의 확장은 탕구트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삼각균형체제를 만들었습니다. 960 년대 초반 이후 970 년대 후반까지 송과 요의 대립이 거의 없었는데, 979 년 송의 태종이 북한을 정복하면서 북방 진출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요가 980 년부터 6 년간 송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국경 지역의 경제 기반이 파괴되었고, 허베이 지역 지주들에 대한 감세로 재정 수입이 감소되는 등 송은 국내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중 고려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군사적 협조를 요청했으나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고, 여진과 고려는 오히려 요를 종주국으로 하는 관계를 맺었으며, 탕구트가 송에 등을 돌리고 요에 복속하면서 요가 북쪽에서 헤게모니를 확장, 강화하는 등 국제정치적 손해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송 조정 안에서 요를 다루는 데 있어서 군사적 방법 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옹호하는 의견들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Twitchett and Fairbank 2009, 247-251).
1004 년에 요가 송을 대규모로 공격하였습니다. 요는 6 일 만에 개봉에서 200 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은 Shan-yuan 지역에 도달하였습니다. 요는 전쟁을 지속, 심화시키면서 자신들에 유리한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전략적 목적이었습니다.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Kuan-nan 지역의 지배권 귀속여부를 두고 요와 송이 끝까지 대립하였지만, 송이 요에 금전적으로 매년 조공을 하는 대가로 이 지역의 지배권에 대해서 요가 후퇴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송은 요에게 매년 100,000 은화와 200,000 의 실크를 제공하고 상호 국경의 경계를 존중한다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전연의 맹(Shan-yuan 조약)을 체결합니다. 중화이자 천자의 국가인 송이 이적과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군사적 대결을 최소화하고 금전적 보상을 하는 것은 굴욕적인 것이었지만, 이전의 경험을 통해 외교적 방법으로 요를 다루고자 한 송의 전략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사적 열세를 경제적으로 보완해보고자 한 송의 전략은 지속가능하지 않았습니다. 1126 년에 금의 침략을 받아 남송으로 쫓겨내려간 것입니다(Twitchett and Fairbank 2009, 260-267).
송이 주변국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북방국가들과는 군사적 요소가 강하게 작동하였지만 고려와는 예적인 요소가 이어져왔습니다. 고려가 요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음으로써 려송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1071 년에 복교가 되고 이후 북송이 멸망하는 1127 년까지 송과 고려는 사대자소에 입각한 관계가 지속됩니다. 청명상하도에 갓을 쓴 고려인이 짐꾼들을 이끌고 개봉의 거리를 이동하는 모습이 등장할 정도로 려송 간 교류는 빈번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송의 시기 주변국 정세를 관리하는 문제에서 요가 흥망을 하고 금이 등장하는 속에서 이들과는 군사적 관리를 잘 해야 했고, 고려와는 예를 통하여 관리를 했는데, 고려와의 관계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어 간 반면, 요, 금의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송은 영향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의 패권모델과 국제질서의 복합적 작동원리
송의 패권모델을 보면 국제질서를 다루는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송은 여러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국내적 환경을 관리, 조직, 정비해나가는 과정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전 과정이 당시 세계의 수준에서 가장 선도적이었던 관계로 송은 세계 경제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내질서를 다루는 과정에서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것이지요.
하지만 국제질서를 다루는 과정에서 송의 패권모델은 실패하게 됩니다. 예적인 관계가 작동했던 고려와의 관계는 지속되지만, 군사적 요소가 작동했던 요와 금의 북방민족들과의 관계에서 군사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여 결국 송은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인 제국으로 완전하게 기능할 수는 없었습니다. 송이 자신이 이룬 사회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하며 이(利)의 국제정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예를 바탕으로 하는 의(義)의 국제정치는 고려를 다루는 데 있어서 작동하였던 반면, 력(力)의 국제정치에서는 실패하여 북방국가들에 의해 송은 자신이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가지고 있었던 잠재력을 국제정치적으로 확장시키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전통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다루는 기존의 연구들은 예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내용의 페어뱅크 모델(Fairbank 1968)과 힘의 논리가 강하게 반영되어있는 로사비 모델(Rossabi 1983)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그리고 송과 북방국가 간의 경합적 관계로 인해 이 시기 천하질서를 유지하는 동력은 보편적으로 로사비의 모델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델스키가 지적하듯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송의 고도의 발전 정도와 고려와의 관계에서 보여지듯 예와 규범이 작동하는 당시 질서는 로사비의 접근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남송으로 쫓겨간 상황에서도 송이 약 150 년간 국가를 유지하고, 천하질서가 존속되었던 동력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을 때 현실주의적 경쟁의 관점으로만 국제질서의 운용을 분석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이익과 규범의 압도적 논리에도 힘의 논리에 따라 그 영향이 약해질 수 있음과 힘의 논리에도 이익과 규범의 논리가 지속되는 국제질서의 복합적 작동원리에 대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청명상하도에서 출발하여 송의 실체와 위상을 재고찰하는 작업은 력(力), 이(利), 의(義)의 국제정치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세계질서의 모습에 대한 단초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민호. 2006. “북송 개봉의 풍속과 번영의 기록: 맹원로의 <동경몽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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