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를 수밖에 없었던 원명원 -원명원 2 차방화사건의 원인 규명
베이징에서 동아시아 복합질서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베이징 원명원 · 류다정 · 서울대 국제대학원
들어가며
사랑방 10 기의 중국 답사 첫째 날인 2018 년 7 월 3 일,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원래 둘째 날 예정이었던 원명원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우리는 원명원의 폐허속으로 들어가며 150 여년전 활활 타올랐던 원명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원명원의 폐허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처음 본 것은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였습니다. 그가 1861 년 영불연합군의 만행에 대해 프랑스 버틀러 상위에게 영불연합군의 만행을 비판하며 보낸 서신 발췌문이 원명원의 문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명의 강도가 원명원에 침입했습니다. 한 강도는 샅샅이 약탈을
했고, 다른 강도는 불을 지폈습니다. 마치 승리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말입니다. 원명원의 대규모 약탈이 실시되었고, 도난 당한
물품들이 두 승리자에게 동등하게 나뉘어 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엘긴의
이름과 연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엘긴의 이름은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케 했습니다. 1 일전에 파르테논 신전에 했던 것과 같이
원명원을 파괴했습니다, 그저 더 철저히, 더 예쁘게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었죠. 우리의 모든 대성당의 보물들을 합해도 동쪽의
위치한 저 위대하고 웅장한 박물관과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술품들뿐만 아니라 많은 금은보화들도 있었습니다. 위대한
업적입니다! 큰 수확입니다! 주머니가 가득 찬 승자 두 명은 여전히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미소 지으며 유럽으로 돌아왔죠. 이것이 두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유럽인들은 문명인입니다. 중국사람들은
우리에게 야만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문명인이 야만인에게 한
짓입니다.
원명원의 파괴는 당시 중국인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위고의 편지에서는 ‘원명원은 우리가 꿈꿀 수 있는 환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환상이, 왜 엘긴에 의해서 불타올랐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56 년 애로호 사건1을 도화선으로 촉발된 제 2 차 아편전쟁은, 1860 년 원명원의 파괴와 동서양이 『톈진조약』, 『북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불미러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과정속에서, 중국은 자신의 천하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2 차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국제법, 국제외교질서, 그리고 새로운 문명관을 시사해 주면서 서양의 문명표준이 범 1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청나라 관원에 의하여 승무원 전원이 체포되고 영국 국기가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였으며, 해적선으로 영국 국기를 달았고, 중국인 선원 13명과 영국인 선장 한 명이 있었다. 그러나 체포 당시 선장은 배 안에 없었고 중국인 선원 13명만 체포되었다. 바다의 안전을 위협하 는 해적선을 단속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국기를 모욕한 혐의로 배상금과 사 과문을 내라고 하였으나 당시의 양광총독(兩廣總督) 엽명침(葉名琛)은 사건 당시 배 에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중국인 소유의 배이므로 영국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세계적으로 지배되고 있음을 상징하게 되었 습니다. 중국은 패전과 동시에 국제법 번역작업을 시작하고, 총리아문(외교부)를 설립하고, 양우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수 천년간 유지해 왔던 ‘예’로 기반한 국제질서를 서서히 폐기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 차 아편전쟁은 중화질서와 서양질서의 만남 속에서 이뤄진 전쟁입니다. 두 질서의 충돌은 한 질서의 몰락과, 다른 질서의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중국의 질서는 원명원의 타오름과 동시에 역사 속에서 그 발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원명원은 황제가 정사를 돌보고 생활을 하는 장소로, 출입이 매우 제한적이고, 원내의 규율 또한 엄격히 지켜졌습니다(왕롱주 2015). 그런 원명원이 1860 년 10 월 18 일 영국 전권 특사 로드 엘긴의 명령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습니다. 방화는 매우 야만적인 행위로, 국제법상으로도 문화재에 대한 방화는 중죄에 해당합니다. 소위 문명인이 와서 야만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Erick 2015). 당시 방화 주범인 로드 엘긴은 왜 원명원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갖고 저는 『圓明園:清代檔案史料』,『筹办夷务始末·咸丰朝(第 7 册)』,『 清朝柔遠記』그리고, 입수하게 된 The Times 신문 자료와, 엘긴과 파크스의 편지와 일기의 내용을 통해, 1860 년 10 월 18 일 엘긴이 원명원에 방화를 명령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습니다.
제 2 차 아편전쟁 사건 경과
원명원이 파괴되는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그 사건 경과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2 차 아편전쟁은 1858 년 『톈진조약』의 체결까지의 단계와 그 후 1860 년 『베이징조약』의 체결까지, 두 단계에 거쳐서 일어났습니다. 『톈진조약』을 작성하고, 비준하는 과정에 있어서, 청조는 비준을 언제 할 것인지, 영불미러는 어디에서 조약문 교환을 할 것인지, 외교단은 어느 노선으로 베이징에 들어올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청조와 영불이 실랑이를 벌이 던 중, 당시 주 베이징 사절단이 인질로 잡혀가는 상황이 발생했고, 인질이 고문당하고 사망까지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859 년 5 월, 흠차대신(钦差大臣) 승격임심은 영국군에게 조약문을 교환하고 싶을 경우 다구 포대가 아닌 베이탕으로 올 것을 요청했으나, 영국은 그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영국군은 결국 다구 포대로 침입했고, 승격임심의 대비책으로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패전소식이 영국에 알려지자, 국내 여론과 의회에서는 중국의 총 책임자인 엘긴 공사의 무능함을 질책하기 시작했고, 엘긴은 이런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승리로 보였으나, 다구에서의 승리가 결국 원명원의 비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구의 참패가 오히려 엘긴의 강경 노선을 지지해준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왕롱주 2015). 이로써 엘긴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을 택했고, 외교적인 협상책보다는 군사적인 압박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王天根 2014).
그 해 8 월, 런던은 엘긴을 파견해 21 일 다구를 점령하고, 곧 바로 북상하여 26 일 톈진을 점령했습니다. 9 월, 퉁저우 부근 바리차오에서 전투를 벌여, 중국은 현대화된 영불연합군의 군사력 앞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9 월 25 일 연합군은 체포된 포로를 석방하라며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공친왕이 이에 응하지 않자 영불 연합군은 10 월 3 일 베이징을 향해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6 일 영불연합군은 원명원을 점령하고, 7 일 부근 민가와 원명원 몇몇 장소에 불을 지르고 영국영사 파크스가 석방되자, 8 일 원명원에서 퇴군하였습니다. 12 일, 영불미 삼국영사는 13 일에 공친왕이 베이징성으로 들어와 조약문을 교환하지 않으면, 포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15 일, 공친왕은 언제 조약문을 교환하겠냐는 서신을 보냈고, 17 일에 답신이 오길, 청조는 포섭된 인질학대와 사망사건에 대해 영국에 30 만 냥을 납부하고, 원명원을 파괴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20 일까지 답신을 주고, 22 일까지 배상금을 지불하며, 23 일 조약문 교환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곧이어, 18 일 원명원은 불타기 시작했고, 엘긴은 영국정부와도, 동맹군인 프랑스와도 아무런 상의 없이 방화를 저질렀습니다.
당시 기록에 차이점에 대해서, 중국측 자료 『翁同龢日记』에는 배상금을 즉시 납부하지 않을 시 원명원을 파괴한다고 하였으나, 『圓明園:清代檔案史料』에서는 배상금과 원명원 파괴에 대한 조건을 동시에 걸었습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되었으나, 영국이 22 일까지 배상금을 납부하라는 서신과, 18 일에 방화한 것에 따르면, 저는 후자의 기록(공친왕의 상소문)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됩니다.
제 2 차 아편전쟁의 시작과 원명원 방화사건에 이르기까지 대체적으로 영불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기반으로, 청조의 속수무책을 볼 수 있습니다.
제 2 차 원명원 방화사건의 원인규명
왕카이시는 원명원 방화사건에 대해 문헌 정리를 한 결과, 아래 다섯 가지 이유로 묶을 수 있다 말했습니다. 첫 번째 주장은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이 주장은 1860 년 10 월 6 일에서 8 일, 영불 연합군이 원명원에 도착해 수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불을 저질렀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방화라는 사실은 약탈보다 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써, 약탈이라는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힘듭니다. 두 번째 주장은 ‘범죄를 감추고, 함풍제를 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원명원 방화사건의 본질을 다루긴 했지만, 여전히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압도적인 반면에, 왜 함풍제를 벌하기 위해서 방화를 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부족합니다. 세 번째로는, ‘군사행동설’인데, 이는 영불연합군과 청군의 군사전투 속에서 일어난 자연적인 군사 행위였다고 설명합니다. 이 주장은 영불연합군이 원명원을 표적으로 삼은 것에 대한 설명은 되나, 엘긴이 왜 원명원에 방화를 명령했을까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함풍제가 인질을 고문하고 살해한 하책을 펼쳤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간악한 백성이 방화를 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도적떼들이 원명원으로 들어와 약탈을 했다는 증거는 있지만, 이들이 방화를 주도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엘긴의 단독행동과 그의 개인적인 욕구 우선 영국군의 1 차 방화와 2 차방화를 구분 지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학계서는 1 차 방화사건과 2 차 방화사건을 혼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며, 이럴 경우 엘긴의 명령, 즉 2 차 방화사건의 진실 규명이 더욱 복잡해진다는 것입니다(裴广强 2014). 1 차 방화는 10 월 7 일 영불연합군이 같이 저질렀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裴广强의 논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엘긴의 단독 명령에 대하여, 그가 바랬던 인질을 석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10 월 18 일 자신의 동맹군인 프랑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방화를 명령한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논하고자 합니다.
우선 2 차 방화가 영국군의 단독행동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친왕의 상소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10 월 19 일), 불이(法夷)가 비밀리에 찾아와서, 영이(英夷)의
행동이 분별없이 도리에 어긋나고 과해, 이에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영국과 같이 협력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란트 장군과 엘긴이 한
일에 대해서 정확히 해명하지 않았고, 지금 날씨가 매우 추워졌으니,
여기서 겨울을 보내기 힘들어 조속히 조약을 교환하면 바로 군사를
물리겠다고 했다(本日法夷带兵向该员等密语,以英夷狂悖过甚,心众颇为不
服,不愿与该夷同在一处,无如葛酋与额酋同办一事未便明言,天气寒冷,难
以在此过冬,如可早日换约,即愿退兵等语。) --『圓明園:清代檔案史
料』(咸丰十年九月初六日).”
이로써 2 차 방화사건에 대해서 프랑스 군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가 동맹군 임에도 불구하고 방화명령에 대해서 영국이 단독 행동을 한 것은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 10 월 6- 8 일에 있었던 약탈사건에 대해서 영국군은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The Times 1874 년, 3 월 12 일의 편지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The Summer Palace, as well as the Treasury where the ingots
referred to by General Montauban were found, had been in the
possession of the French Army some hours before any steps were taken for securing to the English Army any share in the captured property,
and it was only when one of the English Prize Commissioners,
seeing the French soldiers in full possession of the Treasury,
insisted upon a fair division of the treasure, that any measures were
adopted by the French for guarding it from further pillaged by their
soldiers. As regards the other valuables taken by the French upon
their first capture of the Palace, I am not aware that any division was
ever made.” –The Times, 1874.3.12
사후, 프랑스군이 원명원 약탈에 대해서 영국군과 동등하게 분배했다는 기사가 나가자, 이에 대응하여 더 타임즈 편집장에게 위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즉, 영국군은 프랑스의 약탈이 동등한 배분이 아닌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에 영불 동맹은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둘째, 엘긴은 다구포대의 패배를 덮을 수 있을 만한 ‘쇼(performance)’가 필요했습니다(Erick 2015). 다구포대에서의 패전은 내각 보수당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고, 전권 대표인 엘긴은 모든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中國近代史從書編寫組 1978). 다구 포대에서의 실패는 엘긴의 나약한 정책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王天根 2014). 이로써 엘긴은 국내의 정치투쟁과 여론과의 싸움 속에서는 자신의 강경함을 입증할 쇼가 필요했습니다. 원명원이 그의 국내정치에서의 입지를 보장하는데 가장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명원은 유럽인들의 중국에 대한 환상이 가득한 정원이었습니다 (Erick 2015). 모토방 장군은 원명원을 보자 감탄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편지에서 ‘짧은 글로 이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한다. 나는 다음 편지에서 자세히 묘사해 주겠다. 이는 나의 영광이다(The Times 1860.12.22)’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환상 속의 궁전이 엘긴 눈에는 그저 황량하고, 지저분 하고, 정돈되지 않은 공원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경외심이라는 것을 갖지 못한 채, 원명원은 ‘함풍제가 사랑하는 공원’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려 자신의 결단력을 영국에게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엘긴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원명원은 재정악화에 처해있었고, 1858 년에 내무부가 보고하기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고, 많은 곳이 헐고 뜯어지고 재정비가 필요했지만, 그럴 만한 자본이 없었습니다(圓明園 1991).
영불연합군의 내부 마찰이 없었다면, 엘긴의 단독 명령 또한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국 국내 정치 상황이 모두 엘긴을 손가락질하지 않았더라면, 엘긴은 강경책을 단행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외부 환경의 조성과 함께 엘긴 개인적인 욕구가 원명원 방화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인질 고문 및 살해 사건에 대한 징계 엘긴은 영국 사절단이 인질로 잡혀간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39 명중, 18 밖에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나머지 또한 고문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것을 보아 매우 화가 났습니다. 엘긴은 그의 일기에서 이는 ‘치떨리는 범죄 행위’라고 규정하고 엄정하게 추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왕롱주 2015). 10 월 19 일 공친왕의 상소문에서 보면, 영국군은 그들이 방화한 행위에 대해 그 원인을 사전에 정확히 규명하고 있습니다. 엘긴은 사절단에 대한 감금, 고문 그리고 살인 행위에 대해 징벌을 내리기 위해 원명원을 태운 것입니다.
“(10 월 17 일)나는 이런 서신을 받았다. 외국 병사 20 여명이 감금당하고,
학대당했다. 이에 대해 청조는 30 만 냥을 배상하고, 우리는 원명원을
부수어 버릴 것이다. 이에 20 일까지 답신을 주고, 22 일까지 배상금을
지불하고, 23 일에 조약을 교환할 것이다. 이런 말들을 했다. 이러한
무례한 상황에 대해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日亥刻接到英法两
夷照会,均借口于前夷兵二十余名监禁凌虐,英夷则称欲赔恤银三十万两,及
拆毁圆明园宫殿。均定于初七日照覆,初九日给银,初十日换约各等语。种种
狂悖情形,实勘发指).”-- --『圓明園:清代檔案史料』(咸丰十年九月初六
日) 다른 연구는 엘긴의 방화 행위가 더 타임즈의 기자 볼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국내 여론을 선동하려는 동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제가 입수한 더 타임즈 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The Palace was not burnt for several days after its capture, and was
destroyed, not to avenge the death of Mr. Bowlby, The Times
correspondent, as is apparently implied by General Montauban, deeply as
that gentleman’s death was lamented, but as a punishment, inducted upon
the Emperor of China for an act of treachery to a flag of truce perpetrated
by his Government, if not by his direct instructions, and the subsequent
murder of some, and the ill-treatment of the remainder, of those who had
been captured while under its protection.”—The Times, 1874.3.12
이 내용을 보면, 또 한가지, 프랑스 장군 몽토방이 허위사실을 유표했다는 점 도 발견할 수 있습. 1860 년 10 월 6 일, 영국군은 길을 잃어 프랑스 군 보다 늦게 도착했고, 이로써 프랑스군은 여론을 먼저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裴广强 2015). 더 타임즈에서 뒤늦게 해명 글들이 올라오는 것에는 영불연합군의 불화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더 증명하는 바입니다. 엘긴의 방화명령 뒤에는 인질 학대 및 고문이라는 분노와 청조에 대응하겠다는 결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영국의 방화가 함풍제의 투항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圓明園』에 있는 상소문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친왕은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조약문 교환 시기에 대해 물었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엘긴이 17 일 서신을 보내기 이틀전에, 공친왕은 이미 서신을 보내 교환 시기에 대해서 물었지만, 이틀 뒤에 서신에는 배상과 파괴라는 통보뿐이었습니다. 원명원의 화재사건이 청조의 투항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조약문 비준과 교환이 소위 투항이라고 일컫는 다면, 투항은 엘긴의 방화가 있기 전부터 일어났습니다. 중국의 기미책과 서양의 근대 외교 원명원의 방화사건은 엘긴의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중국의 질서와 서양의 질서가 충돌하는 사고였습니다. Erick 에 의하면, 수평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서양의 자유 국제관계와, 수직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중화의 권위적 국제관계는 상존할 수 없는 관계이며, 하나의 질서가 다른 하나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비 대칭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원명원의 방화사건이 있기 전까지, 너무나도 다른 두 질서가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오해와 불신이 쌓여, 오늘날 원명원의 파괴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청조는 영불군의 군사력이 자신의 군사력보다 월등히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기미책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기미정책은 이(夷)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오랜 세월 이어져 왔습니다. 원명원 방화사건 뿐만 아니라 2 차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영불미러를 상대로 ‘기미’하고 있으며, 이는 주로 두 가지의 수단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초(剿), 군사적인 행동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무(抚), 어루만지는 외교행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한자에서 나타났듯이, 중국의 ‘무’외교는 동등한 국가간의 관계의 외교가 아니라, 상하관계가 분명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어루만지는’ 기미정책입니다. 기미정책의 원칙은 청조에 대한 공손(恭顺)한 태도입니다(魏军 2000). 이러한 원칙을 고수한 청조는 원명원이 불 속에서 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톈진조약』에서 함풍제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항목은 외교 사절단의 베이징 상주였습니다 (『筹办夷务始末·咸丰朝(第 7 册)』 1979). 이는 중국의 전통 예절과 체통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왕롱주 2015). 중국의 ‘예’와 서양의 평등한 국가관계는 상존하기 힘든 질서라는 것은 여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원명원 방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파크스 사절단의 인질 사건 또한, 근본적으로는 동서양 질서의 만남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파크스가 공친왕과 협상을 할 때 영국의 오만함과, 프랑스의 공손함이 결국 파크스 사절단의 감금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대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 때, 파크스가 일어서 말하길, 오늘
날의 조약은, 그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 황제를 직접 봐야한다고 했다.
또한, 그가 청하길, 먼 곳에서 온 병사들은 중국을 보기를 원하니,
군사들을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공친왕은 그의 태도가 공손하지 않자,
자신의 답을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 뒤, 공친왕이 승격임심과 상의후,
파크스를 잡아 도성으로 보냈다. 프랑스 대사는 공손하게 대하자, 공친왕
또한 예로 대했다(法使无词,巴夏礼起曰:“今日之约,须面见大皇帝,以昭
诚信。”又曰:“远方慕义,欲观光上国九矣,请以军容入。”王见其语不逊,答
以须请旨定夺。久之,巴出,王密会僧格林沁计擒巴夏礼,送京师,以法使尚
恭顺,仍礼遣之。).” -- 『清朝柔遠記』, 1989 영국이 원했던 외교는 평등한 외교였던 반면에, 중국의 외교는 예를 기반으로 상대방을 다스리는 기미책이였다. 결국 파크스는 감금당했고, 인질의 고문과 사망사건은 원명원의 방화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중화질서를 기반으로 한 기미책과 자유와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서양 질서의 충돌이 원명원 방화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공친왕의 외교책은 점차 서양의 외교방식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그의 변화된 외교책은 시대의 맞는 외교라며 후대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제 2 차 아편전쟁은 서양의 승리로 그 끝맺음을 지었습니다.
나가며
제 2 차 아편전쟁은 제 1 차 아편전쟁에 이어서 서양이 상업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만약 상업적인 이익에 의해서 두 질서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두 개의 상존할 수 없는 국제 질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상존했을 것입니다(Erick 2015). 하지만 두 질서가 만나는 순간, 힘의 논리로 하나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번 답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던 원명원의 방화사건에 대해 논해 보았습니다. 1860 년 10 월 18 일에 있었던 원명원 방화사건은, 영국의 전권 대사 엘긴이 영국 사절단의 고문과 사망소식을 접하고, 이에 청조에 ‘벌’을 주기 위한 영국군의 단독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이는 엘긴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 한 강경책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는 다구 포대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고, 승리와 성공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사절단의 인질 사건은 아주 좋은 계기가 되었고, 원명원은 엘긴 개인의 욕구에 대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파크스 사절단 인질 사건에 의한 직접적인 원인 뒤에, 동서양 질서의 충돌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이 뒷받침해주고 있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서양의 국제질서는 상하관계와 예를 중시하는 중국질서와는 상충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두 질서의 싸움에는 군사력의 경쟁이 있었고, 재정이 점차 악화되어 가고 있는 청조에 비해 서양은 상업과 자유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앞서 나갔고, 그런 선진된 문명 앞에서 함풍제는 무기력함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60 년 중국의 질서는 원명원의 화재와 동시에 그 발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로 기반한 질서는 힘의 논리로 인해 처절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참고문헌 왕롱주. 2015. 《잃어버린 낙원, 원명원》. 김승룡·이정선 옮김. 서울: 한숲. James L. Hevia. 2003. English Lessons: The Pedagogy of Imperialism
in Nineteenth-Century China. Hong Kong: Hong Kong
University Press.
Major General G. Allgood. 1901. China War, 1860, Letters and
Journals, New York and Boombay: Longmans, Green.
Ringmar, Erik. 2015. Liberal Barbarism: The European Destruction of
the Palace of the Emperor of China.
The Times. 1860, 1874 裴广强. 2014. “英法联军第一次火烧圆明园诸问题再考.” 北京社会
科学第 6 期.
________________ 2015. “再论第二次鸦片战争中圆明园被焚毁之
因:基于宏观视角的考察.” 北京社会科学第 8 期.
【清】王之春撰. 1989. 《清朝柔遠記》. 北京:中華書局. 【清】贾桢等编. 1979. 《筹办夷务始末·咸丰朝(第 7 册)》. 北
京:中華書局. 王开玺. 2006. 《晚清政治新论》. 北京:商务印书馆. 王天根. 2014. “火烧圆明园时外交照会及礼单原件等稀见史料考
释:兼论恭亲王奕訢与清季政治舞台.” 人文杂志第 4 期. 魏军. 2000. “试论鸦片战争前期道光皇帝的“羁縻”外交.” 西安外国语
学院学报第 8 期卷第 2 期.
杨津涛. 2017. “英法联军为何只烧圆明园,不烧紫禁城?”文史博览
第 12 期.
【英】斯坦利·莱恩-普尔. 2008. 金莹译.《巴夏礼在中国》. 广西:
广西大学出版色.
中國第一歷史檔案館 編. 1991. 《圓明園:清代檔案史料》上、下
冊. 上海:上海古籍出版社.
中國近代史從書編寫組 編. 1978. 《第二次鴉片戰爭》. 上海:人民
出版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