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를 위한 변호: 명청(明淸) 교체기 인조의 대중국 외교
베이징에서 동아시아 복합질서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자금성 · 이호준 · 국방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 답사를 위해 도착한 베이징의 7 월 날씨는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일기예보 상으로 37~38 도를 오르내리는 날씨는 공항에 도착한 첫 순간부터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공항에서의 강화된 보안검색과 베이징 시내에서의 교통정체는 2 박 3 일 간의 베이징 답사가 결코 쉽지만은 아닐 것임을 예감하는 듯 하였습니다.
먼저 본격적인 답사에 앞서 훠궈(火鍋) 음식점을 방문하여 북경식 훠궈를 맛본 후 천안문 광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훠궈 소개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훠궈의 유래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원나라 때부터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먹기 시작하였다는 설명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특히 사천(四川) 지방에서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천의 대표 요리 중 하나로 분류가 되며, 오늘날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중국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합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자금성(紫禁城)이 중국의 정치 중심인 중난하이(中南海)와 맞닿아 있는 만큼 자금성 주변으로 가는 길의 보안 검색은 엄격했습니다. 차량 테러의 위협 때문에 천안문 광장 주변에는 차량의 주정차가 금지되어 있어 자금성과 떨어진 먼 곳에서 내려서 걸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걸어가는 와중에도 몇 번의 검문검색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결국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天安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천안문은 명(明)과 청(淸)나라 시기 황성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 15 년(1417)에 공사를 시작하여 영락 18 년(1420)에 준공된 문으로 명나라 시기에는 승천문(承天門)으로 불렸습니다. 명나라 이래로 이 문은 황제가 출입하거나 국가의 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인 출입은 지금은 헐려서 없어진 동ㆍ서 장안문 (東ㆍ西長安門) 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동장안문은 황족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관료들은 주로 서장안문을 통해 자금성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이 서장안문에서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1623 년 8 월 3 일, 북경에서는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날 서장안문 앞에는 새벽부터 이경전(李慶全)을 비롯한 조선의 사신단이 명나라의 각료들이 입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명나라의 각료들이 입궐하기 시작하자 사신단은 무릎을 꿇고 인조(仁祖)를 조속히 책봉해줄 것을 요청하는 정문(呈文)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한참이 지난 후에야 멀리서 지금의 총리 격인 섭향고(葉向高)가 입궐하는 모습이 사신단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사신들은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섭향고는 인조가 정상적이지 않은 과정을 통해 등극하였음을 지적하며 “신중한 조사” 후에 황제에게 승인을 주청하겠다며 사신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인조 책봉을 위한 과정은 피 말리게 진행되어 조선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책봉 절차를 완료하는 데까지 2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기술하면서 당시 후금과의 대결 관계에 있던 명나라가 조선을 정치적ㆍ군사적으로 더욱 속박하기 위해 책봉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은 이러한 명의 의도에 말려들어 광해군대에 유지해오던 중립외교를 파탄 낸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이영춘 2011, 135-138).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인조는 국제정세가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는 해인 명나라에 정성으로 사대(事大)하며 뜨는 해인 후금에게는 강경하게 일관했다가 정묘ㆍ병자호란의 치욕을 맞본 무능력한 군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한명기 2013, 357-364).
얼핏 듣기에 이러한 주장들은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며 국제정치에서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약소국의 비애를 떠올리기도 하고 무능력한 국가 지도자를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인조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이러한 인식의 대표격에 올라와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인조가 무능한 왕이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영특하다는 평을 들었으며, 스스로 주도자가 되어 반정을 조직하고 또 그것을 성공시킬 정도로 치밀한 성격을 가진 그가 어째서 재위 기간 중에는 현실감각을 결여한 채로 무능력으로 점철된 외교 정책을 펼치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명청 교체기 인조 시대의 대중국 외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역사가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밝혀낸 사실을 토대로 인조를 변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법률을 전공한 변호사는 아니지만, 지금부터 역사적 사료를 법전으로 삼아 당시의 진실을 밝혀 보고 그를 한번 변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그 당시의 기록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권력
이 시기 조선의 대중국 외교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동아시아를 관통했던 국제질서의 작동원리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개념은 권력(權力, power)인데, 이것은 근대 이후에 생겨난 개념은 아닙니다. 서구의 대표적인 국제정치 학자인 모겐소(Hans J. morgenthau)는 권력을 “다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힘(모겐소 2013, 132)”으로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요소(權)와 군사적인 요소(力)가 모두 필요합니다. 권력에 대한 모겐소의 언급처럼 국제정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모겐소가 언급한 권력의 정치적 요소와 군사적 요소를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권력은 인간이 정치 행위를 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생겨난 개념으로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동 방식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특히 근대 이전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권력은 근대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랑방 수업 시간에 배웠듯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는 일찍부터 예치(禮治)로 표현되는 독특한 국제정치 질서 속에서 운영되어 왔습니다. 근대 이후 서구의 국제질서가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간의 이익 배분에 중점을 둔 질서였다면,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예(禮)로 대표되는 정치력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치로 계량화할 수 있는 군사력과는 다르게 예에 기반한 국제질서는 그 작동 방식이 굉장히 복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력을 수치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국제정치가 서구와는 다르게 복잡한 양상을 보인 것은 바로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권력의 이러한 속성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국제정치가 가지는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명청 교체기에도 예외 없이 작동 하였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면 예치에 기반한 국제질서는 그 절정에 달한 상태였으며, 이는 당연히 조선과 명ㆍ후금(後金)의 관계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국제질서의 권력이 변동하는 가운데 사대와 자소(字小)를 기반으로 200 여년 이나 넘는 관계를 지속해온 명과의 의리를 택할 것이냐, 아니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할 가능성이 보이는 후금을 따를 것이냐. 인조가 즉위할 당시 조선은 바로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인조의 대중국 외교
이 당시 인조는 정말로 국제적인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을까요? 당시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기록을 담고 있는 사료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조선 시대 역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실록을 살펴보면 인조는 즉위 초부터 후금의 국력이 성장일로에 있으며,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후금과의 한판 대결이 불가피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적(후금)의 동태로 보아 조만간 필시 한 번 쳐들어 올 것이다. 방어할
방법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탐에 능하지
못한데, 만약 미리 적병의 다과를 탐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 인조실록 1 년 3 월 18 일 - 위의 기사를 살펴보면 인조는 다가올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야 하며, 정탐에 취약한 조선의 약점 역시 인지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조실록을 살펴보면 인조는 즉위 이후부터 서북 지역의 방어에 대해 2~3 일에 한번 꼴로 대신들과 논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조는 즉위 직후부터 서북 지역을 방어할 책임자로 장만을 원수로, 부원수로는 이괄을 임명하였으며,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확충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아직 임진왜란의 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우선 군사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의 군사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비록 왜란 이후 군제 개혁을 통해 점차적으로 예전의 수준을 회복되게 됩니다만, 당시 조선의 정예 병력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1 만여 명의 조선군이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후금군 정벌에 나섰다가 사르후(薩爾滸) 전투(1619)에서 후금군에게 대패하여 군사력에 큰 손실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이때 포로로 잡힌 조선군의 숫자는 4,000 여 명이었으며, 인조 즉위 이후에도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후금군에게 억류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조가 즉위 직후부터 서북 지역에 대한 방어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으로 군사력의 대폭적인 강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군사력의 확충도 시급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군량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경작 가능한 토지는 대략 113 만결 정도였는데, 전란을 겪으면서 25% 정도인 29 만결 이하로 감소하였습니다. 인조 1 년(1623) 4 월 25 일자 기사를 보면 호조(戶曹)에서 인조에게 조정의 1 년 경비가 11 만석이지만 수납한 것은 10 만석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에 인조는 “양식을 마련하는 일이 군사를 뽑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하며 군량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걱정을 표현합니다. 이 외에도 인조실록에서는 군량 부족에 관한 논의가 곳곳에 등장하는 등 군량 부족은 정묘ㆍ병자호란 직전까지 조선 조정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렇듯 인조 즉위 당시의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명을 도와 후금을 정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어기고 후금과 내통하였다는 것이었지만, 인조의 입장에서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국가의 안위를 내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딜레마에 직면한 인조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통해 후금의 침략을 방어하거나, 후금의 힘을 인정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음과 동시에 후금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후금의 군사력에 굴복하는 정도의 선택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였으며, 그렇다고 명에 대한 사대를 철회하고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거나 후금의 힘에 굴복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인조는 명에 대해 지속적인 사대를 유지하면서 후금과의 군사적 충돌을 최대한 회피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 중략 … 저 적(후금)이 혹시라도 우리 국경을
넘어와 말을 붙이면 의당 ‘두 나라는 일찍이 원한이 없었다. 너희나
우리나 국경을 서로 넘어와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정해진 영토를
지키는 것이 가하다. … 중략 … 중국 장수가 우리나라 국경에 주둔하는
것이나 요동 백성이 국경을 넘어와 중국 장수에게 귀순하는 것은 모두
우리나라가 지시한 것이 아니니 너희는 이것으로 꼬투리를 잡아서는 안
된다.’ … 중략 … 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1 년 3 월 27 일 - 인조는 후금에 대해 유화책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즉 조선 왕조가 건국 이후부터 여진족을 대하던 방식인 기미(羈靡)로 돌아간 것입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와는 사대 관계를 여진, 일본과는 교린 관계를 기초로 외교 정책을 수립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진에 대해서는 정벌과 기미를 적절히 활용하여 북방 국경에서의 안정을 확보해 나갔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인조가 후금에 취했던 정책을 기미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원래 기미라는 용어가 말의 굴레(羈)와 소의 고삐(靡)를 합친 것으로서 소나 말의 고삐를 잡듯이 이적(夷狄)을 통제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김한규, 2005, 118)에서 볼 때 기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미의 대상보다 우월한 힘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은 여진보다 강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미를 통해 여진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조 대에 이르러 후금의 국력이 급성장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점차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조선 초기와 중기에는 여진의 힘이 조선보다 약했기 때문에 기미를 통해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힘의 균형이 뒤바뀐 이 시기에 후금에 대한 조선의 기미 정책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인조가 후금에 취했던 정책을 기미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조선 조정에서 이러한 정책을 기미라고 불렀다는 점과 이 당시의 외교 정책에 대해 아직까지 아직까지 학계에서 통일된 논의가 없다는 점에서 일단은 기미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조의 대 후금 외교를 살펴보기 전에 이야기를 조금 앞으로 돌려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잠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광해군은 그 당시 국제정세의 이런 미묘한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챘던 것 같습니다. 그가 현재의 중립외교와도 비슷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줄타기를 시도하였으니까 말입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실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복원할 때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서 그 시대를 바라봐야 합니다.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 질서였습니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분이 뚜렷하고 국가 간의 위계가 비교적 명확한 체제였죠.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명(중화)과 후금(이적)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왕조의 정통성과 중화질서의 정당성을 모두 부정하려는 이단적인 행위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광해군 10 년(1681) 6 월 20 일자 기사를 보면 명의 계속된 파병 요구를 광해군이 거절하자 비변사 당상들은 “중국 조정에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성상(광해군)에게 죄를 짓는 것이 낫다”라고 언급하며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비판하고 명에 대한 사대의 의리를 지켜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인조 14 년(1636) 9 월 22 일의 기사는 조선 왕조의 건국 이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리 조빈이 상소하기를,
“국가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근본이 있습니다. … 중략 … 아, 우리
왕조가 왕업을 일으킨 것도 근본이 있습니다. 고려 말에 난신의 모략을
듣고서 홍삭(洪武)의 정삭(正朔)을 폐하고 북원(北元)의 연호를 사용하 면서, 병기를 들어 반란하여 위화도에 진군하였으니, 당시 생민의 화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성조께서 의를 들어 회군하여 크게 동방
사민의 소망을 위로하였으므로, 천심과 인심이 함께 돌아와 … 중략 …
그러므로 신은,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존주(尊周)의 의리를 밝힌 것은
우리 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손이 이 도리를
배반하면 반드시 천의(天意)의 민심을 거슬러서 국가를 보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인조실록 14 년 9 월 22 일-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광해군이 중립 외교를 지속했다 하더라도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는 왕조의 건국 이념을 부정하는 행위와도 같았으며, 이는 곧 반정에 대한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실제로 일어 났습니다.
또한 명나라가 과연 후금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1619 년 명나라가 사르후에서 후금군에게 대패하기는 하였지만 명나라는 그 정도의 패배로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1626 년에 후금은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袁崇煥)이 이끄는 명군에게 대패합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해에 누르하치(奴爾哈赤)마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비록 1641 년에 들어서면 산해관(山海關) 외곽 지역이 모조리 홍타이지(皇太極)에게 함락 당하게 되지만, 1644 년 명나라가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인해 멸망한 후 오삼계(吳三桂)가 산해관의 문을 홍타이지에게 열어주기 전까지 후금은 결코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가 후금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명나라가 어쩔 수 없었던 조선의 현실을 이해했을까요? 아마도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신한 조선을 이해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을 능가하는 무서운 보복이 뒤따랐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조일수 2017, 364).
인조 역시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조가 명나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대하면서 후금에 기미를 한 것을 이러한 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세력 관계 속에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유지하면서 성장하는 후금과의 충돌을 회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명나라와 후금이 전쟁 중인 상태에서 후금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조선이 분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인조의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후금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다음의 기사는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랍(烏拉)의 패륵(貝勒)인 포점태(布占泰)가 조선을 침공(1612)하였을
때, 황제(누르하치)와 포점태는 친척 간이어서 그들의 진군을 중지하도록
늑유(勒諭)하였건만 조선에서는 역시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았다. 또한 황제(누르하치)가 붕어(崩御)하였는데도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지 않았
다(1626).
- 청사고(淸史稿) 조선열전 - 사실 누르하치는 건국 초기부터 조선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를 오랫동안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조선만 회유할 수 있다면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있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후방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조선 조정에 지속적으로 서신을 보내 조선을 회유하는 한편 명나라가 조선을 종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등의 말로 조선을 모욕하면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이간질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가 조선을 몹시 미워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지요(천제셴 2015, 314-315).
그 외에도 문제는 더 있었습니다. 1621 년 이후부터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은 조선으로서나 후금으로서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는 가도에 주둔하면서 후금을 견제하는 척하며 이를 빌미로 조선 조정에 군량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시도 때도 없이 압록강변을 넘어 후금의 경계를 침략하면서 누르하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누르하치는 조선에 서신을 보내 모문룡에 대한 군량 공급을 중단하고 그를 잡아 보내면 강홍립(姜弘立)을 비롯하여 사르후 전투 때 포로로 붙잡힌 조선 관병 모두를 석방하겠다고 보증합니다. 조선으로는 귀가 솔깃해질 만한 조건이었지만 인조는 후금의 제의에 무대응으로 일관합니다.
또한 조선의 경계로 도망간 한족(漢族)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후금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한족의 거주지까지 침범하게 되자 포로가 된 한족은 지속적으로 후금의 경계를 넘어 조선으로 도주하였습니다. 1621 년이 되면 도망자의 수는 무려 10 만여 명에 이르게 됩니다. 여진족은 포로를 재산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주민의 도주는 재산을 잃는 것과 같았으므로 갖은 방법을 강구해 도망자를 데려오고자 했습니다. 누르하치 역시 이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수 차례 인조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으로 도주한 한족을 받아오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명나라의 주민을 마음대로 넘겨줄 뜻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후금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외교와 명분을 통해 조선의 협조를 구할 수 없다면 결국 남은 것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굴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626 년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칸(汗)의 자리에 오른 홍타이지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재개하기 전에 먼저 조선을 응징하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정묘ㆍ병자호란과 새로운 평화
1627 년 1 월 후금의 군대는 압록강을 넘어 한양으로 곧바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후금의 침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책을 강구하고는 있었지만 이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인조는 강화도에서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의지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지루한 협상 끝에 후금과 ‘형제의 의(兄弟之誼)’ 를 맺는 선에서 화친이 이루어집니다.
후금이 다른 군사 거점들은 점령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한양으로 신속하게 진격해 들어간 점이나, 먼저 화친을 제안한 점에서 볼 때 정벌을 결정하기에 앞서 군사력 만으로는 조선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홍타이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끝까지 고수하는 조선을 보며 자신들이 지금까지 정복해왔던 만주의 다른 부족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즉 군사력을 통해 조선을 정벌하더라도 그들이 후금의 통치에 고분고분하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홍타이지의 이러한 속내는 당시 후금군을 따라 왔던 강홍립이 인조를 접견하면서 했던 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강홍립이 말하기를
“저 적(후금)은 언제나 황조(皇朝)를 신하로 섬기는 것을 불가하게
여겼는데, 국서를 본 뒤부터는 말하기를 ‘조선이 2 백년 동안 황조를
신하로 섬겼다는 말이 극히 신의가 있으니, 이들과 우호를 통하면 오래
지속될 지속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숙부가 볼모로 있기 때문에
신을 보내어 화친을 결정하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 인조실록 5 년 2 월 10 일-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행동은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만약 조선을 군사력만으로 굴복 시킬 수 없다면 먼저 형제의 관계를 맺은 뒤 서서히 회유하면서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군신 관계를 요구한다든지, 영토의 일부를 후금에 병합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면 아마도 조선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을 것입니다.
조선이 후금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으로서는 후금의 군사력 앞에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 속까지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화친을 맺는 과정에서 명나라 연호의 사용 문제가 불거지자 인조는 “대의에 있어서 나라가 망하더라도 결코 따를 수 없지만, 지금 억지로 다투면서 국가를 위망하게 만드는 일을 자초할 것은 없다(인조실록 5 년 2 월 22 일)” 라고 하며 후금에 보낼 국서에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우리가 신하로 2 백여 년 동안 황조(明)를 섬겼으므로 받은 은혜가 깊고도 중하여 의리 상 저버릴 수 없으니 이를 양해해달라(인조실록 5 년 2 월 23 일)” 고 명시 하는 등 마지막까지 조선의 의도를 전달하려 노력했습니다. 인조의 이러한 노력은 후금에게도 받아들여져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과 후금은 큰 충돌 없이 평화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명나라의 쇠락과 후금의 성장이라는 상황이 존재하는 한 양국의 관계는 언제든지 깨져버릴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상은 곧 현실이 되고 맙니다.
1634 년 홍타이지는 차하르(察合爾) 몽골의 릭단 칸(林丹 汗)을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몽골 전역을 평정하였습니다. 곧이어 릭단 칸의 잔여 세력들이 원(元)나라의 옥새를 가지고 투항하게됩니다. 원나라의 옥새를 손에 넣은 홍타이지는 천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홍타이지의 의중을 확인한 대신들은 그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이때 홍타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계(天聰) 9 년(1635) 차하르(察合爾) 의 릭단 칸(林丹 汗) 을 평정하고
원나라의 국새를 얻었다. 팔화석(八和碩)의 패륵과 외번(外藩)인
몽골(蒙古)의 49 패륵이 표문을 올려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주청하였다.
황제(홍타이지)가,
“조선은 형제국이므로 함께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 청사고(淸史稿) 조선열전 천계 9 년- 홍타이지로서는 군사력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였고 또 원나라의 옥새까지 얻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이들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모겐소의 언급이 보여 주듯 다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한 법입니다.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홍타이지가 이를 모를 리는 없었겠죠.
1636 년 2 월 24 일 마침내 용골대(龍骨大) 일행이 인조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용골대 일행은 인조에게 평소와는 다르게 특이한 문서를 하나 바칩니다. 바로 홍타이지의 황제 추대를 요청하는 팔화석과 몽골의 패륵들의 글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신하의 처지로 다른 나라 임금에게 글을 보내는 규례는 없다” 는 점을 들어 용골대가 들고 온 문서의 접수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용골대는 크게 화를 내며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인조가 홍타이지의 황제 등극을 거부하였으니 당연히 조선에는 곧 후금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금과의 대결에 대비해 전쟁에 대비하라는 사신의 공문마저 용골대 일행에게 탈취 당하는 사건마저 발생하게 됩니다. 이제 후금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곧이어 홍타이지는 화나게 하는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납니다.
홍타이지는 결국 4 월 11 일 심양(瀋陽)에서 국호를 청(淸)으로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때 조선의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은 춘신사(春信使)와 회답사(回答使)의 자격으로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두 사람이 즉위식이 진행되는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두사람은 홍타이지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조선과는 형제국이지 상국(上國)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떄문입니다. 만주와 몽골인들,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나라 출신 신료들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식장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행동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한명기 2013, 48).
물론 두 사람은 청의 관원들에게 심하게 얻어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끝까지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나만갑의 <병자록>에 따르면, 두 사람이 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보고 식장에 있던 한족 신료들 가운데는 부끄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한명기 2013, 54). 조선 사신들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홍타이지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정벌한다고 해도 그들이 과연 진심으로 자신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홍타이지의 즉위 소식은 곧 조선 조정에 전해졌습니다. 이로서 조선과 청나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듯이 조선으로서는 후금의 건원칭제 (建元稱制)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인조는 청나라와의 타협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홍타이지의 즉위 소식이 전해진 6 월경, 인조는 청나라에 보낼 국서에 대해 논의하는 경연장에서 ‘대청국 황제’라는 명칭 대신 ‘청국 한(淸國 汗)’이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합니다. 청나라라는 현실을 인정하지는 않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이를 용인할 수도 없으니, 그 속에서 나름의 살 길을 찾자는 의도였지요. 하지만 이미 그 정도의 수준으로는 임박한 청나라의 침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637 년 12 월 9 일, 청나라는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12 월 13 일에는 안주(安州)를 거쳐 한양으로 곧장 진격합니다. 청나라의 두 번째 침입에 직면한 조선은 또 다시 청나라의 군사력에 굴복하고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맞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타이지는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홍타이지는 그들이 다른 나라들에게 해왔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과 ‘군신의 예(君臣之義)’를 맺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합니다. 특히 청나라가 지금까지 정복했던 모든 지역을 직접 통치하고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었다는 점에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대우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국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며 자신의 생존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조선을 보고 군사력만으로는 이 나라를 영원히 복종시키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을 통해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이 시기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보여주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당시 인조가 취했던 외교 정책을 권력의 속성이라는 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나가며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의 답사는 자금성을 지나 후문인 신무문(神武門)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끝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죠.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당시의 국내 상황과 국제 정세를 고려하였을 때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인조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또 있다고 하더라도 불안정한 방책들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명청 교체기 인조의 대 중국 외교는 이러한 관점 속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군주가 오랑캐 앞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었고 또 청나라의 횡포에 시달린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인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지는 해인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며 뜨는 해인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생존과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그들이 정복한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강희제(康熙帝, 1661~1772)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사실상 중단하게 되며, 이후 250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양국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역사의 거센 파도가 몰려올 때, 그것을 온 몸으로 막아내려다 처절하게 부서지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처럼 강대국의 국제 정치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 나라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기민하게 파악하고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의 생존과 독립을 담보할 수 있는 영리한 방안들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오랑캐의 발 밑에 무릎을 꿇더라도 지켜야 할 가치들을 지켜내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 또 이를 통해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영광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지 치욕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 뒤에 영광이 있는 것처럼 시대가 요구할 때 누군가는 치욕의 오명을 써야 하기도 합니다. 그때 그것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의 상황과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고 현재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려 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인조가 살았던 시대로 되돌아 간다면, 그가 했던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제가 그를 변호해 보면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이제 정말로 마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는 동안 우리를 태워갈 버스가 도착했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자금성 에서의 아쉬운 여정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원명원(圓明園)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맡겼습니다. 과연 다음 답사지인 원명원에서는 어떤 사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참고문헌 김한규. 2005. 《천하국가: 전통 시대 동아시아 세계질서》. 서울: 소나무.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공식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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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
/item/level.do?itemId=jo
조일수. 2017.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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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서울: 푸른역사. 이영춘. 2011. “인조반정 후에 파견된 책봉주청사의 기록과 외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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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운. 2009. “서구 권력의 도입.”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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