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청은 왜 청일전쟁에 참전했을까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sarangbang_9_ch5_cover.png
sarangbang_9_ch5_cover.png

일청강화기념관 · 김동진 · 칭화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 9 기의 일본 답사 마지막 날인 2017 년 12 월 28 일, 우리는 일청강화기념관(日淸講和記念館)에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일청강화기념관은 청나라와 일본이 청일전쟁을 종결 짓기 위하여 모인 곳으로 바로 이 곳에서 동아시아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일청강화기념관에 내린 직후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기념관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이었습니다. 그 곳은 일청강화회담이 열릴 당시에도 이토 히로부미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외관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간몬 해협에 바로 맞닿아 있어 좋은 전망을 누릴 수 있는 아담한 숙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 년 전, 안방과도 같았던 이 곳에서 평화롭게 묵으며 당시 나이가 70 이 넘었던 이홍장과의 담판을 당당하게 이끌어나가던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

사진 1.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의 흉상

반면 이홍장은 마지막까지 회담 장소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이미 전쟁의 승기를 잡은 이토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하루라도 빨리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시급했던 이홍장이 이토의 요구대로 시모노세키로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어쩌면 일본이 주도하는 협상의 일방적인 흐름이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 한 달의 기간 동안 협상이라기보다는 일본이 요구하는 내용을 대부분 청나라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조약이 체결됩니다. 오랜 시간 동아시아의 중심국가였던 청나라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가졌던 이홍장이 자신보다 20 살 가까이 어린 이토와의 협상을 위해서 변방 나라에 직접 온 것이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저물어가는 청나라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듯 했습니다.

사진

사진 2. 일청강화회담이 열렸던 장소 청일전쟁은 이처럼 청나라에게 충격적이고 굴욕적인 전쟁이었습니다. 국제정치사를 통틀어보아도 동아시아 지역에 청일전쟁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 전쟁은 없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5 천 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중국 주도의 지역 질서가 청일전쟁과 그 이후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인해서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청일 양국은 강화조약의 첫 머리에서 “청국은 확고부동하게 조선에 완전한 자주 독립권을 허락한다. 이제부터 청국에 조공하던 전례를 앞으로는 이체 폐지하여 독립 자주 권리와 예절에 문제가 없도록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청나라와 조선과의 전통적인 속방 관계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이승만, 2015)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조공질서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일본이 추구했던 서양의 자본주의와 만국공법의 원리, 즉 모든 국가는 평등하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 체제가 도래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또한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중국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본격적인 침탈을 겪으며 반식민지 상태로 전략하는 수모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강병론적 근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이후 러일전쟁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처럼 청일전쟁은 중국이 5 천년 간 지속해오던 지역의 패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주게 되는 종착점이자 서양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그 시작점으로서 중국인들에게는 치욕과 수모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청일전쟁이 중국에게 역사에 손꼽힐 만큼 치욕스러운 결과를 가져다 준 전쟁이었다면, 청나라는 청일전쟁에 왜 참전한 것일까요? 모든 국가는 생존과 번영을 최우선의 이익으로 추구한다는 국제정치의 기본 상식에 기반하여 볼 때, 어느 국가도 지기 위해서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나라 역시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판단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것일까요? 만약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라면, 그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 일청강화기념관 답사 보고서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를 청나라 국내정치적 요인에 주목하여 찾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사진

사진 3. 일청강화회담 당시를 묘사한 그림

1894 년, 청일전쟁의 시작

청일전쟁 발발의 중요한 배경은 동학농민운동과 천진조약입니다. 1894 년 당시 조선의 봉건적 사회 구조가 가지고 있던 폐단에 반발하여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하였고 조선 정부는 이를 진압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1894 년 6 월 3 일 청나라에 구원병 파병을 요청합니다. 청나라로서는 속방의 관계였던 조선이 도움을 요청할 때 군사를 파병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10 년 전인 1885 년 4 월, 갑신정변 수습을 위해서 체결되었던 천진조약에서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앞으로 조선에 대한 출병을 할 때에는 상대국에 통보를 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10 여 년 동안에는 조선에서 특별한 무력 충돌이 발생하지 않아서 청나라가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일이 없었는데,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서 청나라가 약 2000 명의 군사를 파병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청나라는 천진조약에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의거하여 이 사실을 일본에 통보하였고, 일본은 이에 곧장 더욱 많은 군사를 조선에 파병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문제가 해결되자 청나라는 자신들의 파병은 조선 정부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양군의 공동철수를 제안하지만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의 철병 제안을 거절하는 절교서를 보냅니다. 결국 1894 년 7 월 23 일 일본군은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7 월 25 일에는 풍도에서 청나라 해군에 기습 선제 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후 8 월 1 일, 일본과 청나라는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며 청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승만, 2015)

청나라가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조선에서 철병이 불가하다는 2 차 절교서를 보낸 1894 년 7 월 14 일 이후입니다. 이틀 뒤인 7 월 16 일, 청나라의 외교 정책을 담당하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은 이홍장에게 즉시 전쟁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합니다. (고정룡, 대일, 2008) 그러나 그러한 결정이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청나라의 모든 관료들이 전쟁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7 월 전후에 열린 청나라의 어전회의를 살펴보면 관료들이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토론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척기장, 1989) 가장 의외인 사실은 북양군의 지휘관으로 청일전쟁에 참전하여 전투를 이끌었으며 당시 청나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홍장이 일본과의 전쟁을 가장 격렬히 반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러시아에 개입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며 마지막까지 외교적으로 일본과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량치차오, 2013) 그렇다면 전쟁을 주장한 세력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제당’이라고 불리는 정치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서태후와 이홍장의 반대 세력으로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그들의 주장과 논리를 살펴보고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실제 정책에 반영될 수 있었는지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1894 년, 청나라 내부를 들여다보다

청일전쟁 전후 청나라의 국내정치적 상황은 다양한 정치세력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얽힌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광서제로 대표되는 ‘제당’과 서태후의 ‘후당’ 사이의 경쟁입니다. 1894 년은 서태후가 오랜 섭정을 마치고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한지 5 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사권과 실질적인 정책결정권 등 권력의 핵심은 서태후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서태후의 정치적 기반 세력인 후당 역시 청나라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정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광서제를 중심으로 한 제당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당의 관료들은 전통적인 유교 사대부 관리들로서 전통적 주자학을 공부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을 얻었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후당과 상반되는 대내외적인 인식에 기반하여 정책 결정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이홍장이 주도하는 양무운동에 대해 반대하였으며 ‘반이홍장’, ‘반양무파’라는 입장을 공유하였습니다. 이는 제당 관료들이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들이었고 또한 양무운동과 연관된 분야에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태후의 지지에 힘입어 국가 예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양무파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고 이러한 입장에서 이홍장과 외교정책, 국방정책,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명백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제당파가 이홍장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비판하고 주전론을 주장하는 경향은 청일전쟁을 앞두고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들은 양무파가 열강의 침입 앞에서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대외 정책을 추구하자 더 이상의 굴욕적인 외교정책을 중단하고 적극적이고 강경한 대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자학과 중화사상이라는 이들의 전통적인 대외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들과 달리 이홍장을 대표로 하는 후당은 주화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서태후 역시 신속히 분쟁을 마무리하려는 의도에서 주화론을 지지하였습니다.

반면 제당의 구심점은 광서제였습니다. 광서제는 제당 관료들의 대외인식에 공감하였다기보다는 서태후의 막강한 힘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전략적으로 반대 입장의 관료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광서제의 가장 큰 정치적 목적은 서태후에 맞서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광서제는 비록 서태후에 밀린 권력의 2 인자이긴 했지만 한 나라의 황제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당 세력을 결집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광서제와 제당파의 처음 이어준 것은 옹동화(翁同龢)였습니다. 옹동화는 광서제의 어릴 적 스승이었으며 광서제가 황제에 오른 이후에도 주요 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광서제가 자신의 실질적인 황권을 회수하기 위해서 제당에 접근한 것인지, 아니면 제당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광서제를 이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반대 세력이 결집될 수 있는 계기가 되자 옹동화는 자신과 비슷한 입장과 생각을 가진 관료들과 제당을 형성하여 서태후와 이홍장이 중심이 된 후당과 대립관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당을 하나로 모아주는 핵심 가치는 무엇이며 이들의 원류는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1870 년대에서 1880 년대 북경정계에 소장관료가 주된 구성원이 된 ‘청류’라는 정치세력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두기, 1985) 청나라 정부가 1870 년대 들어서 내정과 외교 문제를 해결하며 보여준 굴욕적인 태도는 양무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공격을 야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일한 정치적 배경과 지도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반이홍장적인 입장과 대외강경론을 결합하여 나타났는데 이 것이 바로 청류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들이 청류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하나의 정치 집단이라는 인식을 공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초기에는 공통되고 확고한 강령과 조직으로 결합된 집단이 아닌, 특정한 경향을 가진 관료집단 및 의견으로 여겨졌지만, 1880 년대 중반 이후 청불전쟁을 전후로 반이홍장적인 입장에서 주전적 강경론을 주장하며 이들은 본격적으로 정책 형성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유사한 사회적, 정치적, 이념적 배경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의 제당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민두기, 1985) 이들의 유사한 특징인 유교적 도덕규범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정치 집단보다도 중화주의적인 대외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주자학에의 경향, 도덕주의의 강조, 청렴한 생활, 청국의 권위와 문화적 전통에 대한 긍지 등의 공통된 배경은 그들을 원칙적이고 정통적인 보수의 입장에 서게 하였습니다. 1880 년대 초반, 당시 청나라 정부는 내적으로 베트남을 둘러싼 벌어진 프랑스와의 갈등에 대해서 주전론과 주화론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국내외 정책형성과정에서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본격적인 정치적 견제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청류는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류 세력에 맞서 더욱 적극적인 군사적 대응조치를 요구하였고 그 결과 청불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청류는 약 10 년 뒤 조선과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론을 요구합니다. 1892 년 말부터 조선에서 전개된 동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나라가 군대를 파병한 이후 일본 또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 정부 내에서는 주전 강경론이 조정 내 의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이홍장은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청군의 파병에 관한 전보를 총리아문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소극적인 대외 인식을 드러냈으며 이홍장의 이러한 태도는 청일전쟁 발발 전후에도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반면에 제당파는 청일전쟁 이전부터 청군의 병력을 조선에 증파하도록 요구하였고, 일본이 첫 번째 절교서를 제출한 이후 이홍장이 주도하는 주화론과 연아책에 상반되는 정책으로서 주전론과 연영책을 주장하여 강력한 비판 여론을 형성하고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습니다.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제당파 주전강경론의 특징

청일전쟁 전후 제당의 주전강경론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째, 이들의 주전론은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중심의 전통적 국제질서 관념은 제당파가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는 중국 중심의 사대질서였습니다. 이러한 중화사상에 젖은 제당 관료들이 일본에 대해서 영원한 약소국이라고 인식하며, 광폭한 동쪽의 오랑캐 정도로 과소평가 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이 1894 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이후 전쟁을 도모할 것이라는 예측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제당은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 청나라 중심의 중화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이홍장의 주화론적인 태도를 규탄하였습니다. 즉, 제당이 줄곧 일본에 대해 주전 강경론을 펼친 이유는 전통적인 중화 사상적 인식 속에서, 중국 중심의 질서를 부정하는 행동은 중국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었으며, 유교적인 도덕과 명분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당파 주전강경론의 두 번째 특징은 청류의 또 다른 특징은 상소를 통하여 중앙정부에 의견을 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청의”라는 이름으로 사대부의 여론을 대표하며 시정이나 고궁의 행적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논하였습니다. 이들은 학문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상소’라는 전통적이고 공식적인 수단을 통하여서 정권에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를 지속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서태후와 이홍장이 주된 권력을 독점한 상황 속에서 이러한 목적을 추구할 만한 불만과 좌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학문적 능력, 가치관, 도덕적 신념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소가 보여 주는 특정한 경향은 도덕적 원칙에 입각하여 비판적인 시론을 전개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유교 국가의 도덕성 고수, 개개인의 이해관계, 중앙정치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 강화, 부정부패의 시정, 양무운동의 확대 과정에서 세력이 강화된 지방권력에 대한 견제 등이었습니다.

제당이 청일전쟁에 미친 영향

제당은 유교의 전통적, 보수적인 입장에서 중화 사상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했으며,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양무관계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유교적, 도덕적,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며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태후로부터 독립하려는 광서제의 정치적 목적과 맞아떨어지면서 더욱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당 관료들은 중화적, 유교적 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것에 반대했습니다. 이들이 숭배했던 주자학은 예를 중시하는 학문으로 개인 간의 예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도 예가 작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속방 관계였던 조선과의 관계에서도 예의 논리가 중국을 지배했고 유교적 전통에 따라서 조선을 도와주고 중화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본을 벌하기 위해서 출병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결국 청나라 조정은 이홍장에게 일본과의 전쟁을 지시하고 중화 중심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인 서태후는 왜 청일전쟁을 승인한 것일까요? 서태후의 대외인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대외 정책 측면에서 이홍장과 대부분 유사한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에 기본적인 입장은 이홍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서태후는 주화론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인데, 왜 이홍장의 전쟁을 승인한 것일까요? 가장 기본적인 이유로는 제당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을 딱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당의 모든 대외인식과 정책적 논리의 출발은 당시 주류 학문이자 절대적 진리로 사회에서 여겨지던 주자학과 중화 사상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전통적 질서의 관성이 강하게 남아있던 중국 사회에서, 예의 명분으로 어려움에 처한 속방을 도와주고 오랑캐를 제압하자는 주장을 반대할 명분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당의 모든 주장은 공식적인 상소문과 서신을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국내정치적 측면에서도 수많은 상소들을 받으면서 이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서태후의 권력 유지의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광서제의 정치적 목적이 서태후를 견제하는 것이었던 것이듯, 서태후의 가장 큰 목적 역시 자신의 국내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이 점점 커지자, 서태후도 이에 대해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서태후가 광서제를 결국 독살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태후로서는 광서제의 정치적 기반인 제당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면서 이들의 불만이 결집하는 것을 막고, 실질적인 전쟁은 자신의 편의 핵심인 이홍장을 투입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과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면, 직접 전쟁을 지휘한 이홍장과 자신의 위치가 더욱 올라가고 그 정당성도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전쟁에서 패하게 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광서제의 기반이 되는 제당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약화될 것이기 때문에 서태후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세력과 상대의 세력 간의 경쟁을 통해서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서태후는 이홍장의 주화론과 기본적인 대외인식을 같이 했지만 사실 더 근본적인 권력과 정치 행위의 동기는 자신의 국내정치적 권력의 유지와 강화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태후는 어느 정도 전통적, 유교적 명분을 내세우는 상대편의 입장을 들어주는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이홍장을 이용하여 상대 정치 세력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견제를 할 수 있는 청일전쟁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청나라의 청일전쟁 참전의 결정은, 광서제의 친정 이후 점점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키워나가던 제당파의 정책적 제안의 영향이 컸습니다. 특히 이들의 주장은 광서제라는 탄탄한 권력 기반과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중국 사회를 지배해왔던 주자학의 전통, 예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논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제당의 원류가 되는 청류의 활동이 19 세기 후반,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서양 열강으로부터 도전 받았던 시점에 집중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의 안전에 대한 위기 의식이 팽배할 수록 제당파의 대외 인식은 중국적인 가치관 또는 중화관념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것입니다. 가장 군사적 위기였다고 할 수 있는 1884 년 청불전쟁과 1894 년 청일전쟁 시기에 제당파는 꾸준히 주전 강경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제당파가 주장한 주전론이 받아들여져 시작된 청불전쟁에서 패하면서 이들의 현실정치적 입지도 약화되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더욱 무시하고 약소하게 보았던 중국의 전통적인 중화 사상은 청나라 정부도 쉽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제당파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가치관에 기반한 서양 열강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안은 청일전쟁에서의 계속되는 주전 강경론으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당의 정책적 제안은 당시 정치적으로는 상대편이었지만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의 권력 기반 유지라는 전략과 부합하여 청일전쟁 참전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동북아 질서를 뒤바꾼 시모노세키 조약, 그 후

막상 청나라와 일본 두 국가의 무력충돌의 뚜껑이 열리자, 일본의 압도적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청나라 정권이 나름대로 양무 운동을 통해서 군사력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전,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해전에서 모두 일본에 패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세에 몰린 청나라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종결하는 조약으로 맺었던 것이 바로 우리가 방문하였던 일청강화기념관에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입니다.

사진

사진 4. 일청강화조약 일본어판의 전문

국제정치에서 전쟁은 단순한 두 국가의 충돌을 넘어서서 힘의 균형의 변화, 국가 간의 이익의 재조정, 지역질서의 변동 등의 결과를 낳는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일전쟁 또한 그 역사적 의미가 실로 막대합니다. 청일전쟁만큼 한 번의 전쟁으로 국제 질서를 급격히 변동시켰던 사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3 국이 모두 관여하였고 한반도를 두고 중국과 일본 중에 누가 더 영향력을 확보하느냐의 결과를 명백히 드러나게 해준 전쟁이었습니다. 청일전쟁은 또한 일본과 중국 사이의 강병론적 근대화 경쟁의 1 차적 승리의 판정이 나타난 전쟁이었으며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비로소 서양 국가들에게 군사적 강국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제국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시모노세키조약의 결과로 영일동맹의 초석이 만들어집니다. 반면 중국의 무력함의 천하에 드러남에 따라 잠재적이지만 세계 강국으로 인식되던 중국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식의 변화도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서양 열강들의 중국 대륙에 대한 직접적 침탈이 시작되었습니다. (김기정, 1991)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서 그 이후의 동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세력균형, 구조적인 문제, 국제 질서가 모두 바뀌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으로부터 약 120 년이 지난 지금, 동아시아 지역은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 년의 수모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굴기를 준비하는 중국과 미국의 힘을 빌려 과거의 영향력을 지속하려고 하는 일본, 그리고 이에 더하여 한반도에서는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북한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통해 점점 전쟁 5. 청은 왜 청일정쟁에 참전했을까_일청강화기념관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국내정치적 배경으로 거친 말들을 뱉어내고 있고, 어느 순간 평화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합니다. 일청강화기념관을 나오자마자 보인 평화로운 바다의 모습이 전쟁과 평화의 경계가 순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사진

사진 5. 일청강화기념관에서 바라 본 바다

전쟁과 평화의 결과는 작은 선택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청일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이 지역의 국가들이 전쟁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살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답사보고서는 청나라의 국내정치적 상황과 그 바탕이 되는 대외인식을 통해서 청일전쟁의 원인을 살펴보았으며, 이렇게 한 국가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을 자세하고 복합적으로 분석하는 노력이 앞으로도 필요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민두기. 1985. “戊戌變法運動의 背景에 대하여.”

이승만. 2015. 《쉽게 풀어 쓴 청일전기》, 김용삼, 김효선,

류석춘 역, 북앤피플.

김기정. 1991. “세계체제의 구조변동과 19 세기 후반기의

동양외교사” <한국과 국제정치> 경남대학교. 척기장 (戚其章). 1989. 《갑오전쟁사 (甲午战争史) 6 권》

고정룡 (顾廷龙),대일 (戴逸), 《이홍장전집 (李鸿章全集) 24, 25,

26 권》, 2008. 안휘교육출판사 (安徽教育出版社)

량치차오. 2013. 《리훙장 평전 :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

동시대 실권자 리훙장을 말하다 (원제: 李鴻章 評傳)》,

박희성, 문세나 역, 프리스마.

←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