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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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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도자문화관 · 김호인 · 한국외국어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 9 기 답사 둘째 날의 둘째 일정은 9 기 모두가 한번쯤은 왜 끼어있는지 의아해했던 아리타 도자기 마을이었습니다. 17 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는 이 마을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세계로 전파하는 매개자(Broker)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전날 방문했던 데지마는 그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뼈아픈 역사로 남아있는 1592 년~1599 년의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은 중국과 조선의 선진 문화를 대폭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생산기술은 그 대표적 예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정치 질서에서는 배제의 대상이 되었지만, 문화적 차원에서는 동아시아 도자문화권역의 주변부로 편입되었습니다. 큐슈의 아리타·이마리는 초기부터 일본 자기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공간입니다.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이마리를 통해 일본 내부와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아리타의 전통을 이은 도자기에 담긴 점심을 즐긴 후, 큐슈도자문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일본 특유의 감성이 있는 아기자기한 길 끝에 자리잡은 큐슈도자문화관은 임란 이후 일본 도자기가 밟아온 궤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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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아리타의 전통을 이은 도자기들을 팔고 있는 갤러리 아리타

도자기는 과거 첨단 과학기술의 지표, 즉 권력 측정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적 연구대상으로 제한되었던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서구가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동아시아를 만나는 과정에 있어 형성된 권력관계를 파악하는 데에 도자산업은 유용한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근대화 이전 유교권 천하 질서는 유럽식 주권 국가중심질서와는 달랐습니다. 그 안에서 꽃을 피운 도자산업은 그 교역과정에서 국가라는 단일행위자에 의해서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국가뿐만 아니라 사기장, 고린샤 등의 여러 행위자들이 서로 관계를 맺었습니다. 서구 문화권에서 들어온 VOC 역시도 매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도자 산업은 동아시아, 그리고 나아가 글로벌 네트워크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7~18 세기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네트워크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동아시아 질서가 서구식 질서와 접하기 시작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도자산업 역시도 격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때문에 복합국제정치학적 시각에 따라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가 도자산업과 권력관계에 있어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답사를 준비했습니다. 다만, 도자기라는 재화의 특성상 그 발전과정이 문헌으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준비 과정에서도 행위자로서 네트워크보다는 글로벌 차원의 과정과 구조의 양상에 보다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드디어 마주한, 조용히 전시되어 있는 큐슈도자문화관의 자기들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도자기는 국제정치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도자기의 분류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도기와 자기에 한정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도기(Pottery)는 유색 태토, 즉 도토로 만들어진 그릇으로 흡수성이 있고 투광성은 없습니다. 자기(Porcelain)는 백색 태토, 즉 자토로 만들어져 1,350~1,550 도의 고온에서 소성한 그릇으로 투명하고 흡수성이 없습니다(미스기 다카토시 2001, 20- 26). 우리 답사에서는 도기와 자기 중에 특히 자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자기는 독점공급재, 기술집약재, 문화자본, 소프트파워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동서 교역에 있어서 자기 무역은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상인들은 인도,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도서제도들에서 자라는 향신료나 중국을 비롯하여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비단 역시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재화와 다르게 자기는 18 세기 초반까지 중국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Finlay 1998, 143). 특히, 1709 년 마이센에서 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기까지 서양에서는 자기를 구울 수 없었습니다. 서구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사람들에게, 자기 제작기법은 오로지 동아시아에서만 가지고 있는 신비한 기술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의 독점공급은 기술적 우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자기는 역설계나 역공학으로 선도자의 기술을 따라갈 수 있는 형태의 재화가 아닙니다. 조립되는 형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소성과정을 통해 물리적·화학적 성질이 완전히 변화하는 제품이기 때문입니다(김유정 2017, 65). 따라서 인적 자본이 축적되지 않고는 그 전파가 진행되기 어려운 성질을 가집니다. 임진왜란을 통한 조선도공들의 일본 유출과 같은 강제적 동원이 아니고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전파과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도자기의 사회적 희소성은 자기가 세계적으로 문화자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문화자본의 정의는 문화적 가치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활용하여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한준 2009, 73-75). 부르디외(P. Bourdieu)는 사람들이 보유한 문화자본의 정도에 따라서 서로 상징적 경계를 구성하고 설명하며, 이를 재생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의미에서 문화자본이 사람들을 서로 다른 그리고 위계적인 집단으로 구별을 짓게끔 한다고 보았습니다(Bourdieu, 1984). 유럽 국가들의 아시아 해역 진출의 계기가 되었던 향신료 역시 문화자본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향신료의 경우, 16 세기 이후에 그 공급이 풍부해지면서 엘리트 계층에게서 점차 외면 받았으며 새로운 사회적 기표로 대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로 대표되는 값비싼 식기도구들이 향신료가 하던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중국 명대에는 청화대접 하나의 값어치가 쌀 66 섬과 맞먹었고, 일본에서는 뛰어난 다완 한 개로 성 한 채를 맞바꾸었으며, 서양에서는 작센의 아우구스트 1 세가 동양의 자기 100 점을 얻기 위하여 휘하의 기병대 600 여 명을 프로이센 왕에게 내주었습니다(정수일 2009, 388-389). 도자무역은 기본적으로 재화가 이동하는 현상이지만, 생활필수품이 아닌 고급도자를 선호하게 되는 문화적 취향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문화전파의 양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교역품과는 상이한 맥락을 지닙니다. 이러한 문화자본과 관련된 논의는 부르디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을 경제적 관념으로 환원하지 말고 권력관계의 표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한준 2009, 72).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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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사랑방 9 기 남자들도 홀리는 도자기의 소프트파워

지금까지 살펴본 3 가지 특성은 도자기가 국제적 차원에서는 소프트파워 투사 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나이(J. Nye)는 소프트파워를 강압이 아닌 끌림을 통해 다른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원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Nye 2004, 5-11). 소프트파워는 의제 설정, 매력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는데, 도자기는 이 중 매력을 유발하는 문화적 요소로 간주됩니다. 소프트 파워 개념은 ‘비물질적 변수’에 대한 강조와 함께 행위자의 속성이나 보유자원에서 우러나오는 권력을 넘어서 행위자들이 구성하는 ‘관계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권력에 대한 국제정치학계의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이가 그려내고 있는 소프트 파워란 자신의 능력이나 보유한 자원으로 측정되는, 그래서 그 효과가 고정된 것으로 파악되는 권력이 아니라,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그 효과가 유동적인 종류의 권력입니다(김상배 2009, 4-5). 해당 성질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자기의 길, 글로벌 정치 공간의 확장

인류 역사에서 개별 권역 내에 있어 해양 공간의 활용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지구적 차원에 있어 ‘육지’에서 ‘해양’의 공간적 확장은 16 세기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일본 같은 경우는 ‘대륙’보다는 ‘해상’ 무역로가 발전하는 때에 글로벌 무역 시스템에 보다 완전히 그리고 포괄적으로 통합되었습니다(Lim 2011, 44). 이번 답사에서 주목하는 일본 도자기의 전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기는 현대 국제정치학이 기본 전제로 상정하고 있는 근대 국제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근대 민족국가가 완전히 형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오히려 19~20 세기보다 오늘날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탈근대 국제질서의 다양한 층위 행위자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모델스키(G. Modelski)는 1500 년경부터 글로벌 정치 시스템이 확립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가 주장한 글로벌 시스템은 영토 개념에 얽매이기보다 대개 해상, 좀 더 나아가면 공중과 외기권 등 공역을 포괄한 장거리 거래의 메커니즘과 통로들을 규율하는 세계적 형태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세계적 리더십(World Leadership)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 때의 리더십은 글로벌 상호의존의 층위 내 질서 유지를 위한 시장 독점력과 등치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글로벌 권력의 핵심은 기능적으로 네트워크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모델스키는 100~120 년 주기로 세계체제의 변동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데, 16 세기는 포르투갈, 17 세기는 네덜란드, 18·19 세기는 영국, 20 세기는 미국이 리더십 국가였다고 봅니다(Modelski 1978). 아리타 도자기의 글로벌 무역시장 편입 및 세계적 전파가 일어나는 시기는 17~18 세기로 당시 글로벌 정치 시스템을 주도했던 네덜란드가 가지는 위치권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지할 점은 17 세기 당시 아시아 해상무역을 담당했던 주체는 네덜란드 정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1602 년 설립된 VOC 는 네덜란드 정부에게 특허장을 부여받았습니다. 46 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진 특허장은 네덜란드와 동인도 사이의 희망봉 경유 무역을 특허장 발행으로부터 21 년간 회사가 독점할 것을 명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일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도 네덜란드 국회의 이름으로 동인도에 요새를 건설할 권리, 총독을 임명할 권리, 병사를 고용할 권리, 총독을 임명할 권리, 병사를 고용할 권리, 그리고 현지 지배자와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회사에 부여했습니다. 준 국가라고 해도 좋을 존재였습니다. 당시는 아직 현재와 같이 국가와 정부가 정치·군사적 권한을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하네다 마사시 2012, 78-80). 그리고 17 세기 세계적 리더십으로서 네덜란드의 권력은 대체로 VOC 라는 대리적 행위자를 통하여 투사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인의 지평에서 바라본 동아시아 권역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독점적으로 생산되었습니다. 그리고 VOC 가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하는 상황은 먼저 무력을 사용하여 현지 권력을 위협한 동남아시아의 경우와 매우 달랐습니다. 적어도 중국과 일본에서 VOC 는 표면적으로는 얌전하고 선량한 상인의 얼굴을 하고 무역에 종사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네덜란드인이 아시아 다른 지역에서 보인 고압적인 태도와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크게 다른 것으로,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저자세였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 VOC 는 동남아시아에서 폭력을 사용하여 향신료 거래를 독점하려고 했습니다(하네다 마사시 2012, 128-130). 두 지역 사이의 차이는 놀라울 뿐입니다.

이러한 예외적 현상을 단지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드파워가 인도양 연안의 국가들에 비해 강했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동아시아와 버금가는 하드파워를 가지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경우가 대표적 반례입니다. 1644 년 VOC 는 사파비제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507 명의 선원과 452 명의 병사를 태운 7 척의 군함을 페르시아 만에 파견해 군사력으로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하네다 마사시 2012, 184-185). 초기에 VOC 에 의해 군사적으로 제압되는 동남아시아 지역 역시 군사적 우위가 영속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자바의 경우를 보면 이미 일찍부터 서구의 군사 기술을 도입·적용했고, 오히려 이런 재빠른 군사 기술의 수용이야말로 17-18 세기 자바 역사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서구의 한 문헌은 마타람 왕조의 지배를 받는 지방민과 네덜란드인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검은 연기가 가득하고 궁정의 화재로 인한 연기가 더해져서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네덜란드 군은 머스켓을 재장전할 시간이 없었고 창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설사

지휘관의 명령을 들었어도 병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도주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군기와 무기를 모두 버리고

도주하였다. 타크 자신도 말에 올라타고 도주하려는 순간

뒤에서 칼에 맞아서 사망하였다. (Ricklefs 1990)

물론 이러한 현상들을 VOC 가 무역을 통해 이익을 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을 채택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잠자는 거인이다. 그녀를 잠자게 내두어라. 일어나면 세계를 움직일 테니까”라고 말했던 1803 년 나폴레옹 1 세의 발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19 세기 이전 유럽인들은 중국의 힘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아편전쟁이라는 전면적인 군사력의 충돌이 있기 전이기 때문에 서구권의 평가는 소프트파워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동아시아 권역 전반에 대해서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경우, 네덜란드인들이 도리어 포 제조술을 전수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구포에 포탄을 장전한 후 모든 사람들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에게 발사를 명령했다. 첫 번째 포탄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벼가 심어진 17-18 피트 정도 깊이의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질척한 웅덩이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 포탄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지만 곧 엄청난 힘으로 터졌다. 그래서 진흙과

먼지가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두 번째 포탄은 구포 안에서 폭발하여 사수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고 우리들 모두 조금씩 상처를 입었다. 나무판과

차폐막도 모두 잘게 부서졌다. 그들이 우리에게 달려왔을 때

우리 대부분은 피범벅이 되었고 특히 사수인 크리스티안이

상처를 입어서 가능한 빨리 휴게소로 데려가도록 했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고 때문에 그들이 실험을 중지하라고 명령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우리보고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실험을 할 때에는 그런 사고는 흔히 일어나는

법이니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Boxer 1931)

소프트 파워의 주요 자원으로는 제도(Institution), 가치(Values), 문화(Culture), 정책(Policies)등이 거론됩니다. 그러나 당시 서구권이 동아시아의 제도, 가치, 정책에서 매력을 찾았다고 말하기에는 비약이 있습니다. 당시 동서 교역은 정체성이 아닌 이윤에 기초해서 형성되었습니다. 역사적 제도주의에서 언급하는 경로의존성(Path-dependency)에 비추어보아도 이러한 사고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들 자원이 소프트파워로 투사되는 요소들이었다면 서양식 국민국가(Nation-state) 모델이 아닌 중국식 천하질서가 근대 국제질서의 기초로 자리를 잡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동아시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문화들이 전파되어서 역내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쉬누아즈리라고 통칭되는 17~18 세기 유럽의 문화적 현상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만, 도자기와 같은 재화들에서 발현되는 소프트파워가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외정책 상의 구체적 영향력으로 발현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도자기의 매력은 유럽 내에서 네덜란드의 영향력 강화로 귀결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규명해내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권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적용한 소프트파워 개념은 ‘관계적 맥락’을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위자 차원의 작위로 환원되는 권력에 대한 논의에 머물고 있어서, 행위자의 명시적 또는 암묵적 의지의 차원을 넘어서 작동하는 권력 메커니즘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김상배 2009, 147-148).

VOC 의 도자기 무역 그물망 짜기

네덜란드는 16 세기의 포르투갈보다 유럽 시장에 있어 도자 무역이 가지는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적극적으로 교역망을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건설하였습니다. 1619 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VOC 이사회에서는 ‘도자기를 비롯한’ 진기한 물품들을 파는 것이 회사에게 최고의 사업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Volker 1971). 네덜란드에서의 경매가 성공리에 끝난 이후에 VOC 는 도자기의 상품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인들의 인식은 그들이 구축한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의 구조와 결부되어 일본 도자기의 세계적 전파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에스타도(Estado)’라고 지칭되는 포르투갈의 해외 거점 제국과 비교해볼 때, VOC 는 다른 방식의 네트워크 권력을 구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 전체 구도에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같은 허브의 기능을 수행한 노드임에도 다른 ‘중심성(Centrality)'에서 유발되는 위치권력을 가집니다. 이때, 중심성은 공간적으로 네트워크의 정중앙에 위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함을 의미합니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해상 무역로를 건설했으나 그 방식은 아시아의 기존 상업 네트워크의 일부를 빼앗은 다음 군사력을 이용하여 강제 교역을 수행하거나 통행료를 징수하는, 소위 재분배 방식이었습니다(Steensgaard 1974). 이러한 방식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네트워크는 크게 확대되었으나 오히려 안정성이 떨어졌습니다. 에스타도는 비록 아프리카로부터 마카오까지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기는 하지만 중간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프리먼(L. C. Freeman)의 구분을 따르면(Freeman 1979, 215-239) 포르투갈은 ‘연결 중심성(Degree centrality)’을 발휘한 노드였습니다. 연결 중심성이란 네트워크에서 다른 노드들과 연결된 링크의 숫자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늘림으로써 발휘하게 되는 중심성입니다. 어떠한 형태로건 관계를 맺어서 끊어진 링크가 없어야 다른 노드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됩니다. 그리고 연결 중심성이 높은 노드는 네트워크상의 노드들과 가장 많이 직접 소통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합니다(김상배 2014, 85). 그러나 포르투갈은 아덴만 지역을 장악하는데 실패하면서 지중해 무역상들과의 링크를 차단하는데 실패했고, 이후 네덜란드 등 신흥국들이 등장하면서 직접 소통에 있어서 우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VOC 는 ‘현지 무역(Country trade)'이라고 불리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체제를 아시아에 구축했으며, 이것은 정치적·군사적 힘이 곧바로 잉여 수취에 쓰이기보다는 새로운 교환 체제를 구축해 가는 데에 사용되었음을 의미합니다(주경철 2008, 61). 이와 같은 네덜란드의 방식은 '매개 중심성(Betweenness centrality)'을 가지는 노드에 해당합니다. 매개 중심성은 위치 권력의 개념 일반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중개 권력과 관련되는 개념입니다. 매개 중심성이란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네트워크상에서 어느 노드가 다른 노드들 사이에 놓일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매개 중심성이 높은 노드는 자신을 통하지 않으면 소통이 단절될 노드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매개 중심성은 노드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하는데, 이러한 능력은 노드와 노드, 그리고 좀 더 넓게는 노드군과 노드군 사이에 다리를 놓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중개 권력으로 통합니다. 또 이러한 중개 권력은 주변 노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내용이 무엇이냐, 또는 그 중개자가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권력의 종류가 다양하게 개념화될 수 있습니다. VOC 는 서로 다른 종류의 정보 흐름에 호환성을 제공하는 변환자(Transformer)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유럽과 아시아의 흩어진 수요를 반영하여 도자기를 주문함으로써 도자 문화의 급격한 발전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아시아 해역의 수많은 상관을 네트워크로 엮어 역내 무역을 전개하는 것이 VOC 사업의 특징이었습니다. 각지의 수요를 고려하여 교환할 때마다 이익을 보게 구축된 시스템으로, 17 세기 중반 이후에는 유럽-아시아 간 무역과는 별도로 아시아 역내 무역만으로도 회사 운영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네덜란드가 행사하는 위치권력의 핵심은 형식이 다른 것들에 호환성을 제공함으로써 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을 지원하고 동시에 이러한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발생했습니다(김상배 2014). 이러한 권력관계는 글로벌 도자 무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형성되었습니다. VOC 는 유럽 각국 내부에서 문화자본으로 기능하던 도자기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면서 동아시아의 소프트파워를 네덜란드의 경제적 영향력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사진

사진 3. 일본 도자기에 남아있는 포르투갈인들의 흔적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명·청 교체기가 뒤바꿔놓은 일본 자기와 VOC 의

만남

처음 히라도와 데지마를 통해 일본 도자기 무역 네트워크가 VOC 와 연결되었을 때에 일본은 순수입국의 지위에 놓여있었습니다. 1631 년 히라도 상관의 상인 반 네옌루드(Van Neyenroode)가 쓴 편지를 보면 중국 정크선을 통해 들여온 도자기들을 나가사키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Volker 1971, 118). 그러나 1592 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납치된 도공들을 통해 일본 도자산업 역시 자생성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도자기 제작에 있어 필요한 산화코발트는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데지마 상관의 VOC 기록에 의하면 1651 년 500 캐티의 분량이 수입되었고, 1658 년에는 중국 도자기의 수입 없이 산화코발트만 1340 캐티가 반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에 VOC 상선은 데지마로부터 일본 도자기를 수출품으로서 싣고 출항하기 시작합니다(Volker 1971, 125-128). 1641 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추방되고, 네덜란드 상관 역시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이전된 이후, 데지마는 사실상 일본 도자기의 유일한 공식적 수출창구였습니다.

이렇듯 동아시아 도자문화권의 변방에 머물던 이마리 도자기가 세계적으로 약진하게 된 것은 명·청 교체기의 영향이 컸습니다. 청은 명을 무너뜨렸지만, 그 잔당들은 중국 대륙 곳곳에서 저항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중국 남부 해안과 대만의 정성공이었습니다. 청은 이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해금령이 내려집니다. 게다가 정성공 세력이 VOC 사절이 무역 재개를 위해 청의 황제를 예방하였다는 이유로 항구를 폐쇄하고 VOC 의 대 중국 무역 거점이었던 대만의 상관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대중국 무역이 불가능해지자 VOC 는 데지마를 거점으로 일본 도자기를 주문하였습니다. 그 결과, 1653-1682 년 일본 수출 도자기는 중국 경덕진 도자의 대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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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큐슈도자문화관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의 도자기

1959 년 5 월 27 일 바타비아에서 데지마로 띄운 편지는 35,000 점의 도자기를 주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수량의 주문을 요청한 편지가 같은 해에만 2 통 정도가 더 발견됩니다. 이후 1660 년대를 기점으로 일본의 수출량이 중국의 수출량을 압도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680 년 이후, 중국의 해금령이 해제되기 이전까지 일본 도자기는 글로벌 도자 무역 네트워크의 주요 재화로서 자리잡았습니다(Volker 1971).

그러나 일본 도자산업은 갑작스러운 수요의 증가에 힘입어 급격하게 발전했지만, 공급의 불안정성과 높은 가격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경덕진과 달리 아리타·이마리는 특히 대형 도자기에 있어 대량생산의 역사가 비교적 짧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일본 내에서 이마리부터 데지마까지의 운반비용이 상당했습니다. 직접 주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개비용 역시 가격 인상에 반영되었습니다. 때문에 1683 년 이후 중국 경덕진이 재건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VOC 가 중국 자기 시장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역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09 년 일본 사료에 의하면 82,275 점의 도자기가 수출되었으나, VOC 자료는 오로지 9,820 점 정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712 년의 경우, 일본 사료는 179,246 점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VOC 기록에는 한 점도 수입하지 않은 것으로 기술되어있습니다(Jorg 1982).

세계 정치에서 일본 도자기의 전파와 공진

16 세기 말에야 처음 제작되기 시작했음에도 17 세기 일본 도자기는 유럽에서 중국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색채 변화 등에 힘입어 중국 자기들과의 경쟁 구도를 형성해냈습니다(Finlay 1998, 159). 이마리 도자기는 크게 고이마리 양식, 가키에몬 양식, 이로나베시마 양식의 세 종류로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나뉩니다. 이 중 이로나베시마 방식은 국내 진상용으로 시판되지 않았기에 수출용 도자기는 앞의 두 종류였습니다. 고이마리 양식은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초기 양식입니다. 조금 더 일본 특유의 색깔을 가진다고 하는 가키에몬 양식은 여백을 능숙하게 남기면서 주로 매화 등의 초화문, 때로는 인물문 등이 그려졌으며 적색, 옅은 청색, 녹색, 부분적인 금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채화자기였습니다. 가키에몬 양식은 본래 내수용으로 생산되었으나 유럽인들의 취향에도 부합하여 수출용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초기 유럽 자기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가키에몬 양식이었습니다(Schiffer 2007, 271). 경덕진이 힘을 되찾아 유럽 수출을 재개할 무렵부터 유럽에서는 청화백자 유행이 수그러들고 채화자기가 환영받았습니다. 유럽에서 초기의 쉬누아즈리는 하얀 바탕에 남색 문양만으로도 중국에 대한 동경을 북돋우었지만 프랑스 문화를 중심으로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이 유행함에 따라 더욱 화려한 것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710 년 이후 마이센에서 유럽 자기가 생산될 때도, 처음에는 중국풍의 적색 자기나 백자 관음상 등을 만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이마리 도자기, 특히 가키에몬 양식의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 일본의 가키에몬 디자인이 마이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유행하게 되었습니다(미스기 다카토시 2001, 108-171). 서구권이 주요 시장 중 하나였던 경덕진 역시 이러한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였습니다. 글로벌 도자 무역 네트워크에 재진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도자기를 그대로 모방한 ‘차이니즈 이마리(Chinese imari)'가 일시적으로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서구와 중국, 일본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도자문화 발전에 있어서 공진(Co-evolution)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서구권과 동아시아권의 길목인 동남아시아에도 일본 도자기는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VOC 는 이러한 무역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였습니다. 아시아 역내에 유통되는 일본 자기의 양은 유럽에 유통되는 양을 훨씬 능가하였습니다.

VOC 의 쇠퇴와 변화하는 일본 도자기의 성격

VOC 는 17 세기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세계 리더십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1680 년대 이후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 내 VOC 의 위치권력은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대만 상관을 정성공에게 빼앗기며 중국 무역의 거점을 잃었고, 일본의 도쿠가와 정권 역시 무역량 제한 정책을 채택하였습니다. 나아가 18 세기가 되면서 정세가 불안해진 페르시아에서 금과 은을 수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VOC 의 아시아 무역은 적자로 전락하고,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본국에서 귀금속을 반출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하네다 마사시 2012, 275-277).

게다가 도자기는 점점 유럽에서 그 상대적 가치가 낮아졌습니다. 1658 년과 1660 년, VOC 이사회는 도자기를 포함한 낮은 중요도의 물품들은 공개 경매를 통해 처리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심지어 1682 년에는 제값을 받지 못하는 도자기는 경매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Volker 1971, 118).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도자기 무역의 수요와 이윤이 모두 감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일본 도자기는 1757 년 공식적으로 수출이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일본 도자기는 주로 내수용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습니다.

나오며: 21 세기 소프트파워로서의 도자기

앞선 시대의 양상들을 살펴볼 때, 17~18 세기에 도자기가 가졌던 소프트파워 투사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글로벌 무역 도자 네트워크가 확장되면서 점차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사회적 희소성의 감소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19 세기 몇 차례의 세계박람회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인들을 사로잡는 매력을 선보였고,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새로운 수요 트랜드를 형성합니다. 도자기가 소프트파워의 매개수단으로 재부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은 글로벌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권력자원으로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식 문명표준을 선도적으로 받아들여 근대 국제질서 속에서도 더 이상 타국의 위치권력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행위자로서 일본의 네트워크 내부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탄생한 독특한 도자기들은 다시 한번 유럽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 살펴본 구조로서의 네트워크 분석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행위자의 행위 능력이 유의미해지는 것은 네트워크 구조 내에 배태되어 있는 자원들을 적절히 활용할 때입니다(김상배 2014, 75-77). 따라서 구조로서 글로벌 도자무역 네트워크와 개별 행위자의 무역 네트워크를 연계하여 복합적으로 조망해야 그 실체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겠으나, 아쉽게도 현재 일본 내부 도자 네트워크 발전과정에 대한 사료들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조슈번, 사쓰마번에 의해 의도적으로 소멸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일본의 선례는 현대 한국의 도자문화에도 상당한 함의를 가집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 도자문화는 과거의 유산이라는 좁은 범주의 논의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문화에 내재되어 있는 소프트파워는 국가의 권력 자원으로서 기능할 수 3. 서구를 홀린 동아시아의 매력을 만나다_큐슈도자문화관 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B. Leach)는 “현대 도예가 나갈 길은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이미 다 제시한 바,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습니다. 오늘날 매력국가를 외치고 있는 한국의 중견국 외교는 ‘한류’를 위시한 대중문화에 편중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고급문화의 대표주자로서 여전히 자리를 매기고 있는 도자문화를 공공외교의 일환으로서 사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부족합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지만 이미 세계의 전문가들로부터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고 있습니다. 바다 건너 큐슈에서 만난 17~18 세기 VOC 와 일본 도자문화는 21 세기의 대한민국에게 소프트파워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한 가지를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사진 5. 큐슈도자문화관 앞에서 시연한 사랑방 9 기의 행위예술 참고문헌 김상배. 2009. “서론: 소프트파워와 21 세기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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