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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현실주의자 모택동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7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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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 오인환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펑더화이와 마오쩌둥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맥아더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개입하더라도 충분히 미군은 중공군을 격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회담에서 맥아더는 같은 생각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했지만, 7월부터 유사시를 위해 동북변방군(東北邊方軍)으로 편성되어있었던 중공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진출했고, 1,2차 공세를 통해 예상외의 성과를 거두면서 미국과

104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이 같은 전공을 올린 중국인민지원군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의 총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중공군은 단순히 우세한 병력만으로 유엔군을 몰아부친 것이 아니라 ‘분리와 소멸’ 이라는 전략, 전술개념을 통해 중공군의 약점을 최대한 보완하고, 강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투를 수행하였고 바로 그 선두에 펑더화이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공군 1,2차 공세가 예상외의 큰 성공을 거둔 이후, 1951년 공세의 시기와 목표를 놓고 펑더화이와 마오쩌둥(毛澤東)은 지속적인 갈등을 빚게 됩니다.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펑더화이는 2차 공세까지 쉬지 않았기 때문에 병력들이 매우 지쳐있으며 병참선은 신장된데다가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인해 보급이 원할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재정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빠른 시일내에 최대한의 진격을 고수했고, 할수만 있다면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야하며 38선까지는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펑더화이는 우선 상위 정치지도자의 지침을 따라 3, 4차 공세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차 공세가 종료된 후, 펑더화이가 1951년 2월말-3월초에 북경을 직접 방문하여 마오쩌둥에게 의견을 제시한 이후에서야, 마오쩌둥은 입장을 양보하지만 여전히 가능하다면 속승(速勝)을 달성해야 한다는

105 여운이 담긴 말을 남깁니다. (팽덕회 1981)

유익한 해설을 위해 꼼꼼히 준비된 발제문.
유익한 해설을 위해 꼼꼼히 준비된 발제문.

1951년에 촉발되었던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의견충돌은 8년이 지난 1959년 여산회의(廬山會議, Lushan Meeting)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1956년 9월 15일 중국 공산당은 8기 전국대표회의를 통해 1차 5개년 경제계획이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향후에는 약진식으로 발전하자는 방침을 세웁니다. 1958년에는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을 제정하고, 인민공사를 통해 “전 인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는 주장에 따라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무리한

106 생산량 설정과 낮은 생산력으로 인해 국민경제는 더욱 어려워져 농민들에게는 식량부족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1958년 11월 21일에 무창회의를 소집하였고, 이후 1959년 2월 정주회의, 같은 해 3월 말 상해회의를 소집해 대약진과 인민공사에 대한 규정을 재정비하였습니다. 무리한 대약진운동의 오류와 이로인해 증가된 생산량을 허위로 보고하는 과장풍(誇張風)을 인식하고 있었던 펑더화이는 1959년 7월 2일부터 열린 여산회의에서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고심끝에 7월 14일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편지를 보냅니다. 마오쩌둥이 편지를 개인적으로 읽고 나름의 시정판단을 내리기를 원했던 펑더화이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오쩌둥은 이 편지를 7월 16일 당내에 인쇄하여 다른 당원들도 볼 수 있도록 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펑더화이가 우경편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편지는 반당적강령이라고 비판하였고, 이후 본래 대약진운동에서 나타난 좌편향적인 문제를 교정하고자 한 여산회의의 목적은 펑더화이에 대한 비판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펑더화이에 대한 비판은 ‘반우경투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우파로 지목받을 것을 우려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일원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여산회의는 최고 지도자들 간의 자유로운 의견발표와 논쟁을 통해 문제를 조정하는 중국공산당의 관례를 파괴한 회의가 되었으며, (강명화 2005) 이

107 여산회의를 계기로 펑더화이는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장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항일전쟁기념관 앞에서의 단체사진.
항일전쟁기념관 앞에서의 단체사진.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왜 펑더화이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1951년 펑더화이에게 3,4차공세를 통한 무리한 진격을 요구하였을까요? 또 그는 1959년 여산회의에서 왜 펑더화이의 편지를 비난하고 펑더화이의 의견에 동조했던 이들을 우경기회주의자로 몰고가면서 문화대혁명시기까지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을까요?

108

낭만적 현실주의의 성공: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1927년 정강산 유격투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오쩌둥은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2006, 257) 이후 두 차례에 걸친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중공군 1,2차 공세를 통해 낭만적 현실주의자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기서 낭만적이라 함은 객관적인 힘의 우열을 놓고보았을 때, 상대에 비해 큰 열세에 처해있어 일반적으로는 포기할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험적인 선택을 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또 여기서 현실주의라고 함은 중소관계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950년 이후에는 중소관계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생각할 수 있겠고, 그 이전의 시기에는 물리적 힘의 열세 속에서는 전면적인 대결을 회피하면서 지구전을 택했던 마오쩌둥의 전략적 투쟁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오쩌둥의 생애를 크게 둘로 나누면, 그의 낭만적 현실주의가 성공한 시기와 낭만적 현실주의가 과잉되어 폐해를 낳은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랑방 8기 답사에서 마지막날 방문하게 된 항일전쟁기념관도 마오쩌둥의 낭만적 현실주의가 성공을 가져온 시기의 주요한 국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1927년 말에 마오쩌둥이 처음 유격전을

109 수행할 때의 병력은 수백명에 불과했지만, 당시 공산당과 홍군을 토벌하려한 국민당의 토벌을 3차례 격파한 이후 홍군의 병력은 30만명으로 불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1934년 10월부터 1935년까지 국민당의 토벌을 회피하기 위한 12,500km의 대장정에서 고된 전투와 행군을 수행 하면서 30만명이었던 홍군은 3만명까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2006, 259).

이어 1937년 노구교(蘆溝橋)에서의 일본군 병사의 실종에 대한 수색을 명분삼아 일본군이 완평성(宛平城)을 포위하면서 발발한 중일전쟁은 마오쩌둥에게 있어 한편으로는 기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큰 모험의 시작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상으로 50만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일본군에 비해 중국군은 열세에 처해있었고 특히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8년경 4만 2천여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최초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상당수의 사단을 만주에 남겨두었기 때문에 초기 침략군의 규모는 50만명으로 시작했지만, 그 이후의 규모는 100만명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2006, 27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제2차 국공합작에 이어, 유격전을 중심으로한 항일전쟁을 전개하였고 습격과 회피를 반복하면서 성장한 홍군은 계속 그 수를 늘려갔습니다. 4만 2천명에 불과하던 병력은 18만명으로, 1940년에는 총 50만명에

110 이르게 됩니다. 결국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감행한 이후, 일본군과 미군의 태평양 전역의 비중이 증가하게 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노구교(蘆溝橋)입구 앞에서 진행된 발제
노구교(蘆溝橋)입구 앞에서 진행된 발제

1944년에 마오쩌둥의 홍군은 75만명을 보유하는데 이르렀고, 1945년에는 130만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역과 함께 중국에서의 전역을 수행해야하는 일종의 양면전쟁을 수행하게 되면서 중국을 점령했던 일본군은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45년 8월 9일부터 중국군은 전략적 반격을 감행하면서

111 일본군의 패망으로 몰아갔던 것입니다(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2006, 278).

우리 사랑방 8기는 바로 이 중일전쟁의 시발점이 된7.7사변으로 알려져있는 노구교 앞에서 함께 낭만적 현실주의자 마오쩌둥에 대한 내용을 발표를 통해 공유하였습니다. 또한 항일전쟁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일본군의 만행과 중국 공산당 군사지도부가 열세속에서도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해 낸 업적을 대조적으로 전시해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과 어른들을 불문하고 이 기념관을 찾아와 방문하는 수많은 현지인들의 인파를 보면서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정치적 정당성을 학습시키는 매우 중요한 현대의 거점이 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오쩌둥의 낭만적 현실주의의 성공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일전쟁보다 어찌보면 더 큰 군사적 열세를 극복해야 하는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에게는 숙제로 남아있었습니다.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한 이후 1946년 국민당과의 정치협상이 결렬되었을 당시, 국민당군은 430만명에 달하고 있었고 공산당군은 이에 비해 120만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약 4:1의 병력의 열세에 더해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국민당과 비교하여 무기와 장비면에서도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열세에 처해 있었습니다(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2006, 254).

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농촌에서 시작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사용하였고, 공산당군은 투항하는 국민당군을 흡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48년에 6월에 이르면 국민당군은 365만명으로 감소하였고, 홍군은 같은 시기에 280만명으로 증가합니다. 결국 1949년에 6월에 이르면 홍군은 400만명으로 증가하고, 국민당군은 149만명으로 줄어들면서 형세는 역전되었고 1949년 4월 20일 공산당은 최종공세를 감행합니다. 같은 해 장개석이 대만으로 망명하면서, 1949년10월 1일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던 것입니다(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2006, 279).

흥미로운 점은 펑더화이가1928년 2월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1934-1935년의 대장정, 중일전쟁 중에1940년 8월부터 3개월간 중국 공산당이 실시한 백단대전(百團大戰), 1946년 이후에 재개된 국공내전, 그리고1950년 한국전쟁 참전과 중공군 1,2차 공세에 이르기까지 같은 호남성(湖南省) 상담현(湘潭縣) 출신의 형이자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을 보좌하며 지지한 군사지도자라는 점입니다. 항일전쟁기념관을 돌아보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군 편제에서 총사령관으로 주더(朱德)가 있었고, 부사령관으로 바로 펑더화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지난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속에서 마오쩌둥과 함께한 군사지도자 서열 1,2위는 주더와

113 펑더화이였습니다. 1950년에 약속되어있었던 소련의 공군지원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한국전쟁에 참전을 두고 벌어진 중국 공산당 내부의 토론과정에서도 펑더화이는 당내 참전을 설득하고 추진한 마오쩌둥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에 속했습니다. 결국 한국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총사령관으로 펑더화이가 파견되면서 향후 그는 중국 공산당내의 군사지도자 서열 1위의 지위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1950년 중공군 1,2차 공세가 예상외의 큰 성공을 거둔 것도 마오쩌둥이 애초에 전략적 기지를 확보한다는 수세적 전략적 지침을 가능한 유엔군을 남쪽으로 몰아낸다는 공세적 지침으로 변경한 것을 펑더화이가 별다른 이견없이 지지한 것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낭만적 현실주의의 성공은 지금까지의 결과적 성공에 대한 과신의 축적으로 이어집니다. 1951년 중공군 공세의 시기와 목표에 대해서부터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은 의견을 달리 하기 시작하였고, 마오쩌둥은 자신의 지침이 생각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펑더화이가 예상했던 한국전쟁에서의 지구전을 승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9년에도 지속된 마오쩌둥의 낭만적 현실주의의 과잉은 중국의 미래를 퇴행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114

낭만적 현실주의의 과잉: 1951년과 1959년

펑더화이는 1950년 12월 향후 공세를 준비하면서 한국전쟁의 전황 및 향후 전망에 대한 마오쩌둥의 의견에 대해 각각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펑더화이의 예측은 매우 정확했습니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볼 때, 마오쩌둥이 유엔군의 철수나 38선 점령이후의 휴전협상의 개시 등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펑더화이는 그렇게 쉽게 유엔군이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조선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것도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펑더화이는 실제 전황에 있어서 1,2차 공세는 중공군이 초반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으며 남쪽에 비해 북쪽의 전선이 넓었기 때문에 운동전에 따른 공격효과를 노릴 수 있었지만, 남쪽으로 병력이 전개될 시에는 유엔군이 더 유리한 좁은 정면이 펼쳐지며 열악한 보급의 상황을 고려하면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습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패전하지는 않겠지만, 큰 승리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펑더화이의 예측은 당시 마무리되고 있던 2차 공세를 넘어 3,4차 공세의 결과에 대한 예측으로서도 맞아떨어졌습니다(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2002, 103).

115 마오쩌둥은 12월 21일에 보낸 전보를 통해 펑더화이의 12월 19일 전문에 회신하면서 표면적으로는 펑더화이의 고충과 이견을 들어주는 척하면서도 펑더화이가 요구한 충분한 휴식 이후의 결정적인 공세가 아니라 단기적인 휴식 이후의 지속적인 공세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정공세라 불리는 1월의 3차 공세와 유엔군의 반격이후에 시행된 2월의 4차공세로 나타난 것입니다.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2002, 105) 1950년 12월초부터 1951년 2월까지 펑더화이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38선 돌파와 이른 3,4차 공세를 지시한 마오쩌둥의 결정 또한 같은 중소관계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1950년 12월 4일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주소련 중국대사와의 회담에서 중국은 휴전회담이 열리기 전 우세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 38선을 횡단함으로써 성공적인 공세작전을 계속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어 12월 7일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전투를 계속할 것과 유엔에 까다로운 휴전조건을 제시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적 해결과 당시 전황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있었던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의해, 1951년의 공세 결정이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데이빗 쑤이 2011, 243).

하지만 똑같이 38선을 돌파한다 하더라도 마오쩌둥은

116 펑더화이의 의견에 따라 좀 더 충분한 휴식과 부대재편성을 한 이후에 공세를 취할 수도 있었고, 펑더화이와 타협하여 펑더화이가 건의한 3월이 아니라 2월에 3차 공세를 실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공세의 범위와 시기는 사실 스탈린과 합의된 부분 안에서 마오쩌둥의 재량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무리하게 여겨질만큼 38선돌파를 위한 3차 공세를 서둘러 12월 말에 공세를 재개하였고, 그리고 2월에는 다시 4차 공세를 하는 선택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당시 중소관계의 내면적인 갈등, 즉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충성심을 의심하였으며 (션즈화2010, 33) 마오쩌둥은 그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소련의 미온적인 군사적 지원에 대해 불만을 가진 상황을 기억하면 마오쩌둥이 1951년에 내린 결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펑더화이가 제시한 객관적인 군사적 상황과는 배치되는 낭만적 판단이었지만, 중소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나름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낭만적 현실주의의 과잉과 그 폐해는 1959년에 더 크게 나타납니다.

마오쩌둥은 사실 1958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1959년 4월 주석에서 사임한 상태였습니다. 이로 인해 처형당한 사람의 수까지 합쳐 약 수천만명 이상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했고,

117 펑더화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기존 노선을 고수한 결과, 1960-1963년에는 식량부족사태까지 발생하는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오쩌둥은 현실에 근거한 합리적 비판을 했던 펑더화이의 의견을 듣지 않고 우경기회주의자로 몰고갔을까요?

강명화를 비롯한 기존 연구는 인민해방군이라는 큰 지지기반을 가진 펑더화이를 견제하기 위한 권력투쟁의 결과였다는 점과, 여산회의를 통해 대약진운동과 사회주의 총노선에 대한 회의를 불식하고 그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강명화2005, 88-89) 하지만 1951년의 마오쩌둥의 판단을 낭만적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했듯이 1959년의 마오쩌둥도 당시 중소관계라는 국제정치적 요인을 통해 다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1951년과는 달리 더욱 표면적으로 악화되는 중소관계가 마오쩌둥의 1959년 여산회의 결정에 미쳤을 영향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1951년과 1959년의 중소관계가 다른 점은 1953년 3월 5일에 스탈린이 사망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살아있었던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자신이 아시아의 티토가 일수도있다는 스탈린의 최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점을 전술한 바 있는데, (션즈화2014, 36-37) 우선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했던 스탈린이 부재한

118 시기라는 점은 주목할만 합니다. 더 나아가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죽음 이후 자신이 세계공산주의 운동에서 탁월한 지위로 향상된 것으로 생각했고, 소련의 새로운 지도부보다 자신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앞서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956년 2월 소집된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이를 계기로 중소관계는 더욱 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평화적 방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중국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념적으로도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향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잔인성과 비인도성을 비판하였고,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무력사용이 없어도 평화공존을 통한 세계적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소련은 1957년 중소가 체결한 국방신기술에 관한 협정에서 소련이 중국에게 원자탄 견본과 기술자료를 제공하기로 했던 약속을 1959년에 6월에 일방적으로 폐기하였는데, 국가간에 영토, 주권과 독립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중국에 대하여는 대국주의를 펴면서 중소갈등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 같은 중소갈등의 심화 속에 1959년 7월 여산회의가 열렸던 것입니다.

119 마오쩌둥에게 있어 스탈린이란 존재를 통해 상정된 중소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순응해야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의심을 해소해야하는 강박을 주는 국제정치적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초반에 이 같은 압박을 주었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에 대한 비판과 서구에 대한 평화공존론을 주장하는 1956년 이후가 되자 소련에 대한 대립각을 충분히 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마오쩌둥이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오쩌둥은 1956년 3월 31일 실시한 유딘 소련대사와의 대화에서 그 동안 스탈린이 국민당의 입장에서 중국 공산당의견과 능력을 과소평가 했다고 언급하였고, 스탈린이 실시한 정책의 폐단(불법적인 강압, 전쟁수행에서의 오류, 집단지도체제의 거부와 독재, 유고와 같은 국가에 대한 외교정책의 실패)을 지적했습니다. 1957년 1월에도 주은래가 마오쩌둥에게 소련 공산당 리더십의 전략 및 전술,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취약점을 분석해보고하기도 하는 등, 중국은 이제 소련과의 갈등을 표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지하면서 중국만의 노선을 모색합니다. 1958년에는 장거리 무선 통신국을 중국과 함께 설치하자던 소련의 제안에 대해 중국은 독자적인 설치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1959년 6월 소련의 핵무기 기술원조 거부직후, 7월에 열린 여산회의는 마오쩌둥에게 있어서 중국과 소련의 노선구분을

120 확실히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흐루시초프의 서구와의 평화공존 노선이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난 수정주의로 비춰질 수 있었던 맥락속에서 소련과의 차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진단된 대약진운동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더욱 ‘좌경화’된 운동노선을 추진했습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개인적인 편지로 대약진운동의 폐해가 수정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펑더화이의 비판은 소련에서 이미 탈-스탈린화가 진행되면서 독재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등장하던 시기에 제기되었고, 마오쩌둥은 이를 당시 사업에 대한 비판을 넘어 2선에 물러나 있었음에도 실권을 쥐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번질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요컨대, 마오쩌둥에게 당시 악화된 중소관계는 소련의 간섭이나 방해를 넘어 사회주의진영에서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중국만의 노선을 추구하고자 동기를 유발했을 수 있으며, 특히 소련에서의 독재비판은 마오쩌둥에게 중국 내부의 독재비판에 대한 예방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결론: 낭만적 현실주의자, 마오쩌둥

121 1962년 9월 마오쩌둥이 당 내에서 실시한 연설을 보면, 마오쩌둥은 1945년부터 이미 스탈린과의 내면적인 갈등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사실 소련이 자신들의 혁명이 성공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고 회고합니다. 당시 스탈린은 오히려 공산당에게 내전은 일어나서는 안되며 장개석과 협력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중국혁명을 예방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혁명을 지속했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49년 중국 공산당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스탈린은 중국이 유고슬라비아와 같이, 그리고 자신이 티토와 같은 지도자가 될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있었고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러 갔을 때도 스탈린은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스탈린의 의심이 1950년 한국전쟁 참전과 중공군 1,2차 공세이후 사라졌으며, 자신의 충성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1951년 중공군 3차 공세에 대한 마오쩌둥의 결정은 바로 이 같은 중소관계의 내면적 갈등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스탈린이 마오쩌둥을 통해 전쟁지도를 했으며, 따라서 38선을 넘어서는 군사작전을 빠른 시일 내에 하도록 한 것은 스탈린의 의도라는 해석은 너무 단순합니다. 스탈린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어도, 이미 어느 정도 스탈린의 자신에 대한 의심을 해소한

122 것으로 생각한 마오쩌둥은 유엔군이 공중우세로 인한 보급품의 전달지연과 파손, 그리고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쉬지 못하고 지속적인 공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중공군을 대변한 펑더화이의 의견에 따라 38선을 넘더라도 그 시기를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1950년 말의 두 차례의 중공군 공세에 이어 1951년의 신정공세와 2월공세를 큰 휴식없이 지시한 마오쩌둥의 결정은 중국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위(demonstration)인 동시에, 더 확실히 자신에 대한 스탈린의 의심을 해소하고자 했던 낭만적 현실주의자로서의 판단이었던 것입니다.

1959년 여산회의에서, 7월 14일의 펑더화이의 편지와 7월 23일 마오쩌둥의 연설은 1951년의 의견충돌보다 더욱 극적인 갈등을 보여주었습니다. 펑더화이는 당시 비현실적인 수확목표, 강압적인 지시, 과장풍, 공산풍등 실제 생산량의 달성과 농, 공업의 현대화를 저해하는 요인들을 확실히 교정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마오쩌둥은 혹자가 말하듯 ‘낭만적 혁명가’ 혹은 ‘낭만적 군사주의자’(Zhang 1995) 가 맞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낙관적인 전망과 펑더화이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으로 반우경투쟁을 천명하고 기존 노선을 ‘모험주의’로 명명하며 강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지 내면적 갈등관계에 그쳤던 중소관계가 표면적 갈등관계로 전환되어간 1956년 이후의

123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마오쩌둥은 소련과의 국제적 구별짓기를 위해 국내적으로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였던 맥락을 고려하면, 중국 내부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독재비판을 예방하는 효과도 노렸을 것입니다.

1920년대에 시작된 마오쩌둥의 낭만적 현실주의는 기적적인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승리,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에서의 중공군 1,2차 공세의 대승을 낳았습니다. 마오쩌둥이 회고하듯이, 1950년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중공군이 1,2차 공세를 통해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라고 여겨지던 미군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두고 나자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의심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고, (데이빗 쑤이2011, 241- 242) 미온적이었던 군사원조의 태도를 바꾸어 당장 2000대의 수송차량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2002, 106- 107) 하지만 마오쩌둥은 당시까지의 성공 속에서, 한편으로 자신의 성공이 2차대전이라는 더 큰 구조적 요인에 의해 견인되었다는 사실과 유엔군의 중공군에 대한 정보실패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오쩌둥의 지속된 낭만적 현실주의의 과잉은 큰 성과 없었던1951년 중공군 3,4차 공세로 이어졌고, 1959년 다시

124 마오쩌둥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한 펑더화이에 대한 정치적 비난과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수행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 공산당의 정책방향은 수정되지 못하고 퇴행하면서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중국 현대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문화대혁명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1951년과 1959년에 펑더화이의 의견을 마오쩌둥이 들었다면, 그리고 그의 낭만적 현실주의의 과잉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21세기의 미중관계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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