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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연행: 짧은 만남 긴 여운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7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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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 박민주 · 서울대학교

추사의 연행을 보는 관점

서예가로 이름 높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학자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인물입니다. 어릴 때부터 글과 글씨에 뛰어났고 문인으로 성장하고 있던 추사는 24세 되던 1809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습니다. 이때 생부 김노겸이 동지부사로 선임되어 북경에 가게 되면서 추사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아버지를 따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제군관이란 외교관의 아들 등을 개인적으로 수행하게 하여 외국 견문을

82 익히게 하는 제도로 비교적 자유롭게 그곳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유홍준 2006, 37-38).

유리창의 한 찻집에서 진행된 발제.
유리창의 한 찻집에서 진행된 발제.

추사의 연행에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면 한쪽에서는 추사가 대등하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청 문화를 접했다고 보고, 다른 관점에서는 청 문화에 매료되고 압도되었다고 봅니다. 전자는 추사를 만난 인사들이 그의 학식에 경탄했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추사는 청의 석학들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고 토론을 벌일 수 있었고(김정희 2014, 16) 조선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는

83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자기화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으며 자신의 성과를 다시 청 학계에 전하여 국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유홍준 2006, 68). 하지만 젊은 추사가 자신의 의견을 굳건하게 가지고 대등한 위치에서 청조 문화를 접하기보다는 매료되고 압도되는 면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한편 동주는 추사의 연행과 청조 문인과의 교유가 추사의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신화로까지 각색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추사가 북경에서 청 학문에 상당히 압도당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완당의 입연(入燕)이 중요한 것은 옛 그림, 옛 글씨에 있어서 젊은 추사가 상국(上國)의 대관이기도 한 노석학의 지기(知己)에 감격하여 옹방강·옹성원 부자의 금석비첩학(金石碑帖學)과 동파풍(東坡風)의 문인취미에 경도하게 된 점이다.”(이동주 1996a, 314-353) 이 관점에서 추사의 연행은 추사가 청 학문과 문화에 흠뻑 젖어들어 청 문화 수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추사의 평생에 걸친 중국 학술·문화 공동체와의 교류를 촉발한 북경 지식인들과의 만남의 현장을 재현해보고, 연행 당시의 추사가 어떤 모습에 가까웠을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추사의 연행 이전에 이루어진 한중 지식인 교류를 소개하고

84 추사와 오랜 인연으로 맺어진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볼 것입니다.

한중 지식인 교류와 추사

이번 사랑방 답사에서 방문한 북경 유리창(琉璃厂)은 18세기 한중 학술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리기와를 만드는 공장 때문에 이름이 붙여지고 동서로 2리 남짓 된 유리창 거리는 북경 성 남쪽 밖 정양문과 선무문 사이에 있던 고서점가로서 18세기 건륭제의 사고전서 간행 칙령 이후 문화거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이홍식 2013, 21). 조선의 연행 사절들은 해마다 북경에 방문해 이 거리에서 각종 서적을 비롯한 물품을 구매했습니다. 유리창 거리는 당시 중국 문화 수입과 한중 지식인 교류의 최전선이었고,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도 서점가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정민 2013).

유리창 서점에서 구매한 청과 서양의 최신 서적들, 그리고 이곳에서 이루어진 한중 지식인들의 교유는 조선의 학문, 문학, 예술과 일상에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1765년 겨울 홍대용이 유리창을 찾았고, 1778년 여름에 유득공, 박제가와

85 이덕무가, 1780년에 박지원이 방문했고, 1790년 유득공과 박제가가 다시 유리창을 찾았습니다(이홍식 2013). 유리창을 매개로 한 한중 지식인 교류의 흐름 속에서 추사와 중국 지식계의 만남도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도서와 자료를 수집하던 추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번화한 유리창 거리를 활보하며 청의 문물을 접하고 사람들과 교류하였을 것입니다.

유리창 거리에서.
유리창 거리에서.

추사는 1786년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났고, 고향을 떠나 한양에 있는 큰 자택에서 경학 연구에 힘을 기울이며 서예에 심취했습니다. 추사는 15세 무렵 뛰어난 재주를 초정 박제가에게 인정받아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북학파의 석학으로부터 북경의

86 문물과 학예 활동에 대해 듣고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유홍준 2006, 33). 중국을 세 차례 연행하고 청조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초정은 어린 영재인 추사에게 북경 학계의 소식을 들려주며 꿈을 불어넣었고 “제2의 자신을 소생하고자” (후지츠카 치카시 2009, 138) 했습니다.

추사는 연행 이전부터 중국 문인들과의 만남에 대한 동경을 키우고 청조 학문과 예술의 동향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개연히 특별한 생각이 일어, 세상 밖 지기를 사귀고 싶다. 만일 마음 알아주는 이를 만난다면, 목숨을 내줄 수도 있네. 북경에는 명사들이 많아, 부럽기가 그지없네.” (후지츠카 치카시 2009, 68) 박제가는 영리한 제자가 북학에 뜻을 세운 것을 기특하게 여기며 자신이 북경에 갔을 때 만난 젊은 학자인 조강에게 추사의 이 시를 보여주었습니다. 추사는 1809년 10월 28일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출발해 두 달 동안 머물렀고 이듬해 3월 귀국하여 4개월여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담계 옹방강의 석묵서루

87 담계라는 호를 쓴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직예 대흥 사람으로, 한림원 편수가 되어 《사고전서》 편찬에 참가했으며 소동파를 깊이 흠모하였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49-150). 동주는 옹방강은 당시 청조에 유행하던 고증학보다는 송나라 때의 성리학에 가까운 설을 가지고 있어 추사와 호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2006b, 288). 옹방강은 금석학과 서첩학의 태두였지만 경학 연구에서도 탁월한 견식을 갖추고 있었고, 한학만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했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73).

박제가도 일찍이 석묵서루에서 옹방강을 만난 적이 있었고 귀국 후 종종 편지로 생각을 전했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51- 153). 추사도 스승으로부터 옹방강의 높은 학식에 대해 일찍이 듣고 나서, 북경에 도착하여 조강 등 문인들을 만나 인맥을 넓히며 옹방강을 만나 배움을 얻을 소망을 내비쳤을 것입니다. 추사는 담계의 제자의 안내를 받아 석묵서루에서 경전 연구에 힘쓰고 있던 옹방강을 방문했습니다. 25세의 추사를 만났을 당시 학계의 대가인 옹방강은 78세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49-155).

담계는 연로하였지만 예리한 눈과 손, 열정을 보여주어 추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소재(옹방강)가 설날 참깨 위에 ‘천하태평’이라는 네 글자를 썼는데, 그때 소재의 연세가

88 일흔여덟이었다. 글자는 파리 머리만 하였지만 역시 안경도 쓰지 않았다 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김정희 2014, 259-260) 추사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 담계 집 대문을 두드렸고 담계는 소장한 책과 자료들 을 보여주면서 추사를 지도했습니다. 추사는 옹방강의 소장품 중 <송탁화도사고승옹선사사리탑명>, <동파진적천제오운첩>, <송참주동파선생시잔본>, <소동파상>, <당각본공자묘당비>, <육방옹서시경각석탁본> 등을 감상하였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55-176).

석학인 옹방강은 추사에게 매우 친절하고 자상하였습니다. 추사는 <한중태수축군개포사도비 탁본>을 본 경험에 대해서 “자획이 가느다랗기가 금사와 같고 돌이 이지러지고 이끼가 끼어서 더욱 흐릿하게 되어, 비록 눈밝은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글줄을 찾아내고 자획을 판단하기 어려웠는데, 다행히 소재께서 하나하나 지도하여 가르쳐 주셔서 비로소 그 대체를 약간 알게 되었네.”라고 말합니다(김정희 2014, 63-65). 추사는 석학인 옹방강이 친히 자세하게 지도해주는 것에 감격하였고 조선에서 공부하면서는 알기 어려웠던 지식을 청에서 배우고 익히면서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석묵서루에서 옹방강은 서예를 직접 보여주기도 하고, 그림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어 추사와 함께 예술을 논하는 시간을

89 보냈습니다. “조자고(조맹견)가 난초를 침에는 붓마다 왼쪽으로 향하였으니 소재(옹방강) 노인이 여러 번 그것을 칭찬하였다.” (김정희 2014, 372) 그리고 추사는 “담계노인의 정서(해서)는 솔경(구양순)에게서 그 원숙한 곳을 얻었고 하남(저수량)에게서 그 예서의 필의를 얻었는데, 8만 권의 금석 기운이 팔뚝 아래로 쏟아져 내려서 뚜렷하게 서가의 용상(불가에서 大德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김정희 2014, 317)라는 평을 남기며 옹방강의 학문적 경지와 서예에 담긴 기세에 대해 극찬합니다.

추사의 학문적 호기심과 경의, 한묵에 대한 조예는 담계가 “바다 동쪽 땅에 이 같은 영재가 있었던가” 하고 놀라게 했으며 옹방강은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는 글을 써주었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54). 이러한 평가는 추사의 실력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놀라워했다고만 보기 어려운데, 중국인 아닌 사람에 대한 기준에 비추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며 중국 밖에 이 정도의 학식을 갖춘 사람이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옹방강의 말에는 젊은 학자의 열정과 학식에 경탄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먼곳에서 온 손님에 대한 격려와 예의, 중화적 태도도 함께 담겨 있는 듯합니다.

청 학자들 중에서도 추사가 찾아갔던 담계는 송의 성리학을 배격하는 흐름에 맞섰던 인물이었습니다. 옹방강은 추사에게

90 자신의 신념에 기초해 경학의 본령을 설명해주고 경전 연구방법을 가르치며 지도하고자 애썼습니다. 추사는 “담계의 경학은 주자를 위배하지 않은 것으로 바른 길을 삼았다”라고 하고, “한학과 송학과 함께 헤아리되 높고 깊어 예봉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라는 시를 읊어(후지츠카 치카시 2009, 174) 옹방강의 정신과 학풍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추사는 북경에 있는 동안 담계를 자주 방문하며 그의 학문과 덕에 매료되었습니다. 연행 당시 옹방강으로부터 구양순체로 쓰인 <송탁화도사비>의 모각본을 선물받았고, 귀국 후 구양순체의 탁월함을 옹호하는 옹방강의 견해에 적극 동조합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58-159). 조선에 돌아간 이후에도 옹방강이 세상을 떠난 1818년까지 지속적으로 서신으로 교류하였습니다. 옹방강이 소동파를 좋아하여 서재에 ‘소동파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인 ‘보소재’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추사는 귀국 후 자신의 서재를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인 ‘보담재’라고 하여(유홍준 2006, 154) 옹방강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자신의 학문이 지향하는 바를 드러냈습니다. 추사는 조선에 돌아와서도 옹방강을 비롯한 중국 인사들과 서신 교류를 계속하며 중국의 선진 문물을 체화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김준석 2016, 321).

91

운대 완원과 승설차의 향기

추사가 북경에서 만나게 된 또 한 명의 스승의 이름은 완원(阮元, 1764~1849)으로, 운대라는 호를 썼습니다. 강소성 의정 사람인 완원은 “청조 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었던 인물로 《십삼경주소》를 편찬하였고 문집 《북경실집》을 냈으며 《황청경해》라는 청나라 경학에 대한 주해서를 편찬하였습니다(유홍준 2006, 58-59). 추사는 완원을 만나고 감탄하여 그의 이름자를 딴 완당(阮堂)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추사의 연행 이전 유득공과 박제가 두 사람이 북경에 갔을 때 운대는 이들을 맞이해 깊은 학연을 맺었고, 20년 뒤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은 추사가 운대의 집에 방문하여 다시 인연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82). 원래 완원은 강남 항주에 있었는데, 때마침 일이 있어 1809년 9월 23일 북경에 들어와 후실인 공씨 집안의 연성공 저택에 잠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추사와 완원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절묘한 운명이었고 추사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추사는 1810년 1월 이곳을 찾았고 당시 47세인 운대는

92 추사를 환대하며 자신의 서재인 태화쌍비지관으로 초청하고 승설차를 달여 대접했습니다. 고려시대에 한반도에 들어온 승설차는 조선시대에 그 존재가 잊혀진 진귀한 차인데, 다도에 해박했던 추사는 감격해하며 승설차를 맛보고 기뻐했습니다(유홍준 2006). 추사는 승설이라는 호를 지어 이를 기념했고 귀국 후 40년이 지나서도 벗인 권이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승설차의 맛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다품이 과연 승설차의 남은 향기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쌍비관에서 이 같은 차를 보았는데, 우리나라로 와서는 40년 동안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후지츠카 치카시 2009, 182) 중국에서 추사는 가는 곳마다 차 대접을 받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하며 조선에 돌아와서도 좋은 차를 마시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원은 추사를 초청하여 자신이 소장한 진의 <태산각석잔전>을 비롯하여 <송탁한서악화산묘비> 사명본, <당정관조상동비>, <칠경맹자고문보유>, 그 외 사고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진귀한 서적 등을 보여주며 학리를 전수하였습니다(유홍준 2006; 후지츠카 치카시 2009). 추사는 완원의 금석학 방법론에 심취하여 완원의 이론을 많이 필사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북경에 체류한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학문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귀중한 자료들을 보고 감탄하며 완원의 서재에서 학문을 배운 경험은 귀국 후 추사의 학문 연구에도

93 귀중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완원의 소장자료 중 야마이 가나에와 부쓰칸의 <칠경맹자고문보유>는 건륭 연간에 일본에서 청나라에 전해져 사고전서에 수록되고 청나라 경학 연구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추사는 북경에서 이 명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추사는 조선학자로서 <칠경맹자고문보유>를 처음 보는 것이었고 그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추사는 훗날 “칠경과 맹자는 문장 고증이 실처럼 상세해서 지난날 완부자(완원)을 뵐 때 그 정밀함에 탄복해마지 않으셨네. 수월루 간행본이 번각되어 세상에 유포되고 있네.” (후지츠카 치카시 2009, 187)라는 시를 읊어 이 기억을 상기하며 자신 또한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드러냅니다.

완원은 성인의 길을 궁궐에 비유하고 문자나 훈고를 그곳으로 통하는 길에 비유하여 길을 잘못 들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완원은 추사에게 학문을 연구하는 방침을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실사구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지도했고, 추사는 운대의 지론을 경청했습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198-199). 추사는 <실사구시설>을 지어 “학문하는 길은 반드시 한나라 학풍과 송나라 학풍의 경계를 나누지 않아야 하고 정현과 왕필과 정호, 정이 및 주희의 단점과 장점을 비교할 필요도 없으며, 주희와

94 육구연, 설선, 왕수인의 문호를 다툴 필요도 없다. 다만 심기를 고르고 고요하게 하여 넓게 배우고 힘써 실행하면서 오로지 ‘실제 있는 일에서 올바른 이치를 찾는다(실사구시)’는 이 한마디 말을 기본으로 실행하면 좋겠다.” (김정희 2014, 478-479)라고 하였는데 완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추사가 금석학에 있어 완원과 옹방강의 이론과 큰 유사성을 보이기에 금석고증학에 있어 이들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학문을 일구지는 못했다는 평(김준석 2016)도 제기됩니다.

완원도 옹방강과 마찬가지로 한송절충의 입장을 취하는 인물에 속하였기에 추사가 청의 학문 중에서도 조선과 맞닿은 줄기를 선택하여 만나고 배움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원의 태화쌍비지관에 걸린 희귀한 비석 탁본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면서 차를 마시고 학문을 논하는 시간은 추사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지고 은은한 차향과 함께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30대에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추사보다도 완원으로부터 받은 이름인 완당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습니다(유홍준 2006). 이러한 이름 변화는 청의 학술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찾은 김정희의 자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95

북경 학예인들과 나눈 우정

추사는 사제지의를 맺은 옹방강과 완원 같은 스승 이외에도 이정원, 서송, 조강, 주학년 등 많은 친구와 선배를 사귀었고, 이들은 대가의 뒤를 이은 차세대의 뛰어난 학예인들이었습니다(유홍준 2006, 61).

그 중 조강(曹江)은 추사가 북경에서 제일 먼저 만난 학예인으로, 박제가와 유득공이 1801년 3차 연행 때 만나 교류한 사람입니다. 조강은 상해 명문가 사람이었고 시와 글씨로 명성을 얻어 1801년 박제가와 유득공의 연행 시 교류했습니다. 그는 추사가 북경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추사의 ‘세계로 넓게 지기를 찾을 의지’를 높이 사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추사는 조강을 통해 서송을 만났고, 옹방강과 주야운 등과 자주 만나고 있었던 서송을 통해 북경의 여러 학예인을 소개받을 수 있었으며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유홍준 2006; 후지츠카 치카시 2009).

또 한 명의 친구인 야운 주학년(朱鶴年; 1760~1834)은 뛰어난 화가로 추사에게 자신의 그림을 많이 선물하였고 귀국 후에도 그림을 보내주었습니다. 추사는 분방가의 의도시옥에 있는 주학년에게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는 고향인 강남성에서 북경으로

96 올라와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담계 문하에 있었고 글씨와 그림이 모두 뛰어났습니다. 추사는 주학년의 그림에 대하여 “주야운의 그림에 가슴에 가득 찬 십년 산림의 삶. 야운의 오묘한 필치는 천연에서 이루어졌네.” (후지츠카 치카시 2009, 206)라는 감상을 적어주기도 했습니다. 온화하고 선행을 많이 했다는 주학년은 완원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두루 오래 친분을 유지했다(후지츠카 치카시 2009, 200)고 하니 추사에게도 자신의 지인을 많이 소개해주었을 것입니다. 주학년은 추사와 헤어진 뒤 추사의 생일마다 술을 따라 뿌리며 축하해주겠다고 약속하여(유홍준 2006, 62)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고 국경을 넘어서 계속 교류하고자 했던 두 사람의 우정을 보여줍니다. 주학년이 세상을 떠난 뒤 어느 해 추사는 생일을 맞아 친우의 기억을 떠올리며 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하늘 끝에서 그림 앞에 두고 눈물짓노니, 유월 초사흘 슬픔이 더욱 북받치네. 의도시옥에서의 즐기던 때가 생각나, 허공 멀리 술 한 잔 뿌려 생일을 자축하네.” (후지츠카 치카시 2009, 208-209)

주학년의 <추사전별도>는 추사가 북경을 떠나게 될 즈음 중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열어준 잔치의 장면을 담았습니다. 북경의 학예인들은 1810년 2월 1일 북경 법원사에서 송별연을 베풀었습니다. 노령의 옹방강 대신 그의 아들 옹수곤이 참석했고, 완원, 이정원, 조강, 주학년, 이임송 등이 모였습니다. 주학년은 이

97 송별연 장면을 즉석에서 스케치하고 참석자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림 속 노송과 괴석이 운치 있는 별채에서 사람들은 이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탁상 가운데에서 추사는 자제군관으로서 무관 복식을 하고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잔치에서 지어진 전별시는 책으로 엮여 추사에게 기증되었습니다(유홍준 2006, 63).

유리창 찻집의 찻잔.
유리창 찻집의 찻잔.

북경에 머무는 기간은 짧았으나 추사는 많은 석학과 명사들을 찾아다니며 경전의 뜻을 묻고 깊숙이 수장된 서적들을 즐기면서 오랜 소망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추사는 타국의 젊은 학자를 반겨주는 따뜻한 대우에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추사는 이별시를

98 읊어 북경에서 만난 학자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감사를 표합니다. 이 시는 “내가 태어난 곳은 미개한 나라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있네” (김정희 1986)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조선을 직설적으로 낮추는 추사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됩니다. 예의상의 표현일 뿐이 아니라 추사 스스로 조선의 부족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학문적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북경에서의 체류는 추사가 당시 조선의 학술·문화적 한계에 대해서 더욱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추사가 북경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해 요약하는 이 시는 청과 조선의 사이에 있는 압록강 물을 술로 빚고 말려보겠다는 통 큰 수사법을 통해 이별의 아쉬움과 함께 두 나라의 경계를 허물고 교류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노래합니다. 북경에서 사귄 사람들과의 우정과 더불어, 청의 문화·학술공동체에 매력을 느끼고 그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추사의 속마음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사는 큰 감동과 학예에 대한 의욕을 안고 북경을 떠나 1810년 3월 조선에 돌아왔습니다.

추사의 길을 돌아보며

99 추사는 담계와 운대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아 조선에 돌아왔습니다. 이후 추사의 삶은 평탄하지 않아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북경에서의 만남들을 계속 추억하고 교류를 이어가려 하였습니다. 추사는 자신의 삶의 정신을 옹방강과 완원의 말을 빌려 요약하며(김정희 2014, 407) 경학에 대한 깊은 이해에 뿌리를 두고 금석고증학을 연구하며, 기존 조선의 주류와는 차별화되는 국제적인 수준의 학문과 예술을 지향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북경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조선에 돌아온 추사는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숙성시키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청조 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북경을 방문해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고 조선의 한계에 대해 깨닫는 바가 많았던 젊은 추사는 청의 문화에 흠뻑 젖어든 모습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번화한 유리창에서 수많은 도서들을 접하고, 글에서 언급되기만 했던 귀한 서적들을 눈앞에서 보고, 조선에서 공부할 때는 알 수 없었던 것을 청의 석학들에게 배우고, 관심사를 공유하는 친우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은 두 달 남짓한 기간이었으나 그의 일생을 바꾸는 진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직접 가서 보고 느낀 북경은 추사의 기억 속에 감동과 흥분으로 오래도록 남아 계속해서 상기됩니다. 추사의 몸은 중국을 떠나왔으나 마음은 북경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0 추사는 조선에 돌아와 북경에서의 경험을 계속 언급하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지적해서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추사는 조선의 학술·문화 특히 서예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명필로 꼽히던 원교 이광사와 석봉 한호의 서체마저 공들인 것에 비해 “극히 속된 곳”이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김준석 2016, 328-329). 추사는 조선의 문화적인 표준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며, 중국의 선진문화를 접하고 실제로 가서 경험해야 비로소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추사가 청에서 귀국한 뒤 추구한 고아한 문인취미는 그의 생전과 사후 조선 문화의 주류로 자리잡게 됩니다. 동주는 추사로부터 시작된 ‘완당바람’으로 인한 문인화의 유행이 한국 화단에서 유행하던 진경산수와 속화의 터전을 부수게 되었다는 점을 안타까워합니다(이동주 1996a, 350-353). 추사의 청 편향이 조선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자생적 문화가 성장할 기회가 상실되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추사는 유배기간을 거쳐 독특한 추사체를 만들어내게 되었고 추사의 연행은 그 바탕이 되는 재료와 정신을 흡수하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조선 학문과 예술의 거목인 추사가 조선에 대해 냉담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청 문화에 흠뻑 젖어들어 궁구하였기에 그 핵심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 역설적으로 독자적 세계를 열 수 있었던 측면도

101 있었습니다.

사랑방 사람들과 함께 고즈넉한 다원에서 차를 마시고, 추사가 걸었을 유리창 거리를 따라 걸으며 오늘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추사의 시대에 청에서 받아들인 학문과 예술을 조선이 자기화하고 개성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성과를 거두고, 조선의 자생적 문화가 청의 문화까지 품으면서 세련되고 보편적인 미감을 실현할 수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 보았습니다. 추사가 걸었던 길은 우리나라의 학문과 문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표준을 만들어내는 것에 기여할 수 있을지 질문해보게 합니다. 2017년 여름, 추사의 연행보다 짧은 답사 일정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억과 여운을 가슴에 품고 북경에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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