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의 욕망이 집대성된 공간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이화원 · 김미현 · 중앙대학교
들어가며
자금성으로부터 북서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는 이화원(颐和园)이라고 불리는 황실 정원이 있습니다. 이화원은 1750년 건륭제(乾隆帝)가 어머니의 환갑을 기념해 조성하였던 청의원(淸漪園)이 전신입니다. 1860년 영불연합군의 침략으로 전소되자 서태후의 주도 하에 1884년부터 10여 년간 복구 공사를 지속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거듭납니다.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光緖帝)는 이양충화 (頤養衝和; 양생과 온화함을
64 추구한다는 뜻)라는 표현에서 이화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됩니다.
이화원 곳곳에 자리한 전각들 앞뒤로 서로의 존재를 뽐내는 곤명호(昆明湖)와 만수산(万寿山) 또한 이 곳의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곤명호는 약 300만 제곱미터로 여의도와 비슷한 크기를 자랑하고, 만수산은 곤명호를 파낸 흙을 쌓아 만들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곤명호를, 뒤로는 만수산을 아우르며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화원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으로 서태후(西太后)가 이화원의 재건을 위해 청일전쟁 당시 해군력 증강을 위해 쓰여야 했던 자금을 횡령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국가의 패망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을 이화원이 오늘날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어 북경을 찾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화원이 유명한 이유는 청나라 최후의 권력자였던 서태후가 말년에 거처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태후의 권력의지와 개인적 관심사가 잘 결합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5천년이 넘는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국가를 이끌었던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왕조시대에 궁궐에서 생활하던 황태후를 비롯한 여성들은 한정된 공간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고, 그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뛰어넘은 여성은 비난의 대상이 되곤
65 했습니다. 비난을 무릅쓰고 이를 깨는 일은 강한 자기확신과 권력의지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이영옥, 2015, 286). 그렇기 때문에 이화원과 같이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대규모의 공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태후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여성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궁궐이라는 공간을 역으로 정치 공간으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아들을 회임 후 출산함으로써 일개 궁녀에서 단숨에 의귀비로 지위가 상승한 그녀는 어린 아들이 황제로 책봉된 상황을 이용하여 수렴청정을 시작하기에 이릅니다. 모후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권력을 거머쥔 후에는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 뒤에서 실질적으로 청나라를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서태후는 남성 중심적 질서에서 자신만의 권력을 구축하고 그 범위를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이화원에서 서태후의 발자취를 찾다
북경에 있는 동안 계속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이화원을 방문하는 동안에는 비가 내리지
66 않았습니다. 흐린 날씨의 여파로 관광객이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많은 이들이 이화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이화원에 도착하여 광서제의 친필로 적힌 현판을 보면서 넓은 공간을 어떻게 하면 잘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시간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설렘과 긴장을 안고 이화원 동궁문(東宮門)으로 들어선 저희를 반긴 것은 인수문(仁壽門)과 인수전(仁壽殿)이었습니다. 인수전은 서태후와 광서제가 정사를 보고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등의 집무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1898년 광서제가 본격적인 ‘제도적 개혁’을 선언하고 캉유웨이(康有爲)를 개혁 고문으로 임명하면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強運動)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연극을 상당히 좋아했던 서태후는 실제로 여러 예술가들을 덕화원으로 불러 공연을 즐겨보았다고 합니다. 중국 황실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극장인 덕화원은 이화원에서도 서태후가 특히 즐겨 찾았던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저희도 서태후의 발자취를 따라 덕화원(德和園)에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출입구를 찾지 못해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67
다음 행선지는 광서제의 부인이자 서태후의 질녀였던 용후 황후가 기거하였던 의운관(宜芸館)이었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제압하기 위해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카딸과 광서제를 혼인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서태후에 대한 광서제의 반감은 증폭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는 아쉽게도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의운관의 남쪽에는 광서제가 이화원에서 사용하였던 침실이자 1898년 무술 정변 이후 광서제가 유폐되었던 곳인 옥란당(玉澜堂)이 있습니다. 한평생 서태후의 영향력 하에서 움츠러든 채 살았던 광서제에게 이화원은 잔인하고도 슬픈 역사가 깃든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68
의운관을 나와 장랑(長廊)으로 향하는 길에 연꽃으로 수놓아진 곤명호가 보였습니다.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곤명호는 여름의 분위기를 머금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곤명호를 따라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중국 전통 화원의 모든 복도 중 가장 길다고 알려져 있는 장랑에 도달하였습니다.
장랑은 건륭제가 여름에 비가 오거나, 겨울에 눈이 오더라도 어머니가 정원을 산책할 수 있도록 조성한 공간입니다. 이를 복원한 서태후 또한 이화원의 주인으로서 제약없이 거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장랑은 배운문(排云門)을 중심으로 두 편으로
69 나뉘며 총 728m의 긴 길이를 자랑합니다. 장랑의 내부에는 중국 전통 소설, 민화, 풍경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은 8천여 개 이상의 그림들로 장식이 되어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습니다. 저는 19세기 말 서태후가 거닐었을 장랑의 끝자락과 배운문이 만나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발제를 시작하였습니다.
70
개인적 특성과 주변 환경의 결합
서태후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서양의 제국 질서가 충돌했던 격동의 19세기를 살며 중국을 이끌었던 여걸들 중 가장 변화무쌍한 경험을 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악녀’와 ‘중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지도자’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을 만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기도 했습니다. 저 스스로도 그녀에 대해 탐구해보기 전까지는 ‘현실 자각은 하지 못한 채 향락만을 쫓았던 권력자’ 정도로만 인식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단면적인 서태후가 아닌, 권력자로서의 서태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고민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서태후의 개인적 관심사와 성격이 그녀의 권력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서태후는 자신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수렴청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치제의 사망 이후에도 수렴청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아래 세대가 후사를 잇는 관습법적 승계 방식을 폐지하고 황제와 같은 세대의 인물을 임명할 수 있다는 결정을 발표합니다(Rawski, 2001, 127). 황제의 모후로서 황제 ‘임명권’을 갖게 된 서태후에게로 권력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한 관심, 주변 정세 판단, 적당한 때를 노린 권모술수 등
71 자신의 야심을 추동할 만한 자질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서태후는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서 권신들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특정 정치세력이 비대해져 자신의 위치를 넘볼 수 없도록, 세력 간 상호 견제를 통해 균형을 조절하는 데 상당히 능숙한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리아오 2009, 101).
서태후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환경 또한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태후는 ‘부모-자식’이라는 관계성에서 도출한 메타포를 영리하게 이용하였습니다(Ling 1994, 400). 그녀가 집권한 이래로 제국 내 권위의 원천으로 상징화되는 태후와 도제식 황제(Apprentice-ruler)로서 존재하는 어린 황제, 그리고 황실의 엘리트였던 종친과 대신들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구축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서태후 정권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Kwong 2000, 673). 이러한 체계는 황실을 최고로 받드는 당대의 인식과 관료들의 결집과 지지 덕분에 가능하였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금지되었던 수렴청정이 서태후에 이르러서 하나의 시스템처럼 공고화된 것은 이 제도를 수면 위로 올리고 실행될 수 있도록 견인했던 서태후 주변의 관료들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서태후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서태후의 권력에 영합하여 서로를 지탱하며 세력을 키워 나가는 방향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72
신유정변, 서태후의 화려한 등장을 알리다
1861년에 발생한 신유정변(辛酉政变)은 서태후의 인생의 경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신유정변은 서태후와 공친왕이 합작하여 어린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 ‘찬양정무왕대신’에 임명되었던 숙순, 재원, 단화 등을 처형하고 수렴청정 체제를 성립시킨 정변입니다(표교열 1985, 58). 중국사학자 우샹샹(吳相湘)은 “1861년 신유정변이 없었다면, 1898년의 무술정변도 없었을 것” (Kwong 1983, 221-222)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신유정변이 청 말기 제국에 끼쳤던 영향은 지대하였습니다.
신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태후는 의귀비의 신분에 머물렀습니다. 정변의 불씨는 어린 황제를 대신해 황태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하고 황제의 혈친이 보정대신체제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한 동위안천(董元醇)의 상주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황후 유호록씨와 의귀비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과 달리 8명의 대신들은 함풍제의 유조와 청조의 조법을 내세워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수렴청정을 강행할 시 파업도 서슴지 않겠다며 반기를 내걸었습니다.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던 대신들의 의지가 표출된 것입니다(김성찬 2012, 177-178).
수렴청정 체제를 밀어 부칠만큼 충분한 권력이 없었던
73 서태후는 정변을 실행할 추동력을 얻기 위해 함풍제 대신 당시 북경에서 사무를 대신 관장하던 공친왕과 손을 잡습니다(김성찬 2012, 205). 두 달간 준비한 정변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녀는 열하에 있던 대신들을 공친왕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들의 관직을 박탈하여 정변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가능성을 차단하였습니다. 북경에 도달한 지 6일만에 8명의 대신들을 모두 처벌함으로써 무혈에 가까운 정변에 성공하게 됩니다.
서태후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새로운 체제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이 처한 상황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에게 배타적이지 않은 다른 정치 세력을 판에 끌어들였습니다. 공동의 이해관계를 조성함으로써, 게임을 더욱 승산이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신유정변의 성공은 청 왕조에서 전례가 없었던 수렴청정이라는 ‘제도적 실험’을 가능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정점으로 나아가도록 만든 기제가 되었습니다 (Kwong 1983, 221-222).
신유정변을 일으키며 정치적 야망을 자신이 가진 자원과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표출해내는 데 성공한 서태후는 27세의 나이에 어린 동치제를 대신하여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휘어잡습니다. 서태후라는 명칭도 이때 생겨납니다. 북경에 돌아온 이후, 동치제가 즉위하면서 황후 유호록씨에게는 자안태후(慈安太后),
74 의귀비에게는 자희태후(慈禧太后)라는 명칭이 부여됩니다. 자안태후가 동쪽 궁궐을 사용하고, 자희태후는 서쪽 궁궐을 사용하면서 각각 동태후, 서태후라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 몇 년 간 공친왕의 도움으로 국정 운영 능력을 기른 것도 잠시, 서태후는 함께 정변에 가담하였던 공친왕을 누르고 명실상부한 자금성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무술정변, 복귀에 성공하다
서태후는 동치제를 대신한 첫번째 수렴청정 기간 동안, 쩡궈판(曾國藩), 리훙장(李鴻章), 쭤쭝탕(左宗棠) 등 한인 실력파를 여럿 등용하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군수 산업을 일으켜 기술을 도입하고 공업과 통신 및 운수 설비를 갖추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던 노력은 내우외환이 줄어들고 국세가 회복되는 동치중흥(同治中興)의 시기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청이 당면한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광서제가
75 성인이 되자 친정을 선포하고 자금성을 떠나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광서제에게 친정은 서태후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의 아편 전쟁과 20여 년간 지속된 국내 반란으로 몸살을 앓은 청은 1894년 다시 한번 예상밖의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세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신식무기를 앞세워 전방위로 압박하는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 천천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충격을 회복해가는 것처럼 보였던 청조에게 또 다른 재앙이 닥친 것이었습니다. 청일전쟁은 무너지기엔 너무 강했고, 다시 재건하기에는 너무 약했던 청의 속살을 드러냈습니다(Tan 2014, 420).
청일전쟁 패배의 여파에서 벗어나 여러 개혁을 시도하던 광서제는 1898년 청이 가지고 있던 취약점들을 극복하고 서태후를 권력의 변방으로 밀어내고자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게 됩니다.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군인, 줄어드는 자원, 숙달되지 않은 기술자와 기술에 무지한 학자들을 가지고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외세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전방위를 대상으로 하는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변법파의 대표 주자였던 캉유웨이와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인물을 등용하였습니다. 광서제는 관료들과 고문의 도움을 받으며 서태후로부터 거리두기에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많은 이들의
76 이해와 충돌하게 되면서 제도적, 정치적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한편, 자금성을 떠나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기며 권력의 뒷전으로 물러난 것처럼 보였던 서태후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동시에 권력의 궤도에 재진입하기 위한 칼날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측근들을 통해서 황제와 변법파들이 꾀하고 있는 개혁의 흐름을 알고 있었고, 이것이 '자신'의 국가와 권력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보수 세력을 규합해 개혁을 멈추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서태후를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배제시킨다는 변법파의 계획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밀고를 통해 수면위로 드러나면서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킬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유정변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펼칠 정치적 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광서제의 개혁으로 인해 생긴 정국의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관료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습니다(이영옥 2015, 290-291).
밀고를 받아 든 다음 날, 서태후는 광서제를 서원의 영대에 유폐시켰습니다. 이어 변법파인 탄시통(譚嗣同)을 비롯한 6명을 처형했으며, 해외로 달아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도입한 무술변법을 모두 폐지합니다. 이 것이 바로 서태후의 공식적인 정계 복귀를 알리는 1898년의 무술정변(戊戌政變)입니다. 정변의
77 성공은 서태후의 권력과 영향력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자, 서태후를 정치영역에서 완전히 밀어내려는 변법파의 시도가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광서제의 개혁은 안타깝게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지게 됩니다. 새롭게 정권을 쥔 서태후는 사망할 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근대의 문턱에서 청의 앞날을 결정짓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78
서태후의 숨결을 뒤로 하고
여름 궁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름의 문턱에 접어든 이화원 곳곳에 녹음이 짙어 가고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걸쳐 발제를 마친 후, 배운문 앞에서 이화원 어느 곳에서나 고개를 들면 볼 수 있다는 불향각(佛香阁)과 그 위로 켜켜이 쌓인 전각과 궁전들을 조망한 후 다시 긴 장랑을 걸어 나왔습니다. 미로 같은 이화원을 정신없이 걷다 보니 서태후의 생활 공간이었던 낙수당(乐寿堂)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입구였던 동궁문에 돌아왔습니다.
서태후의 삶은 ‘악녀’라는 단면적인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졌던 자원을 활용하여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변을 그것도 두 번이나 주도하여 성공적으로 이끌고,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청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태후의 역량에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국내외의 객관적인 여건을 읽는 데 실패한 결과는 청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뼈아픈 실수를 낳았고, 지나친 사치와 향락은 그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서태후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비판보다는 비난에 가까웠습니다. 이제는 지금껏 쉽게 받아들였던 일반적인 평가 대신, 지금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에 대한 새로운 조각들을
79 맞추며 복합적인 평가를 내릴 때입니다. 저는 이번 발제가 서태후에 대한 복합적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시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이화원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참고문헌 김성찬. 2012. “신유정변(辛酉政變(1861))과 태후대권론(太后大權論).”
<역사와경계> 82, 175-241.
리아오. 2009. 《서태후의 인간 경영학》. 강성애 역. 서울: 지식여행. 이영옥. 2015. “1900년 전후 자희태후의 불안, 격정 그리고 권력.”
<명청사연구> 44, 281-307.
표교열. 1985. “서태후정권(西太后政權)의 성립과정(成立過程)에
대하여.” <동양사학연수> 21, 57-104.
Kwong. Luke S. K. 1983. “Imperial Authority in Crisis: An
Interpretation of the Coup D'état of 1861.” Modern Asian
Studies, 17(2): 221-238.
______________. 2000. “Chinese Politics at the Crossroads:
Reflections on the Hundred Days Reform of 1898.” Modern
80 Asian Studies, 34(3): 663-695.
Ling, L. H. M. 1994. “Rationalizations for State Violence in Chinese
Politics: The Hegemony of Parental Governance.” Journal of
Peace Research, 31(4): 393-405.
Rawski, Evelyn. S. 2001. The Last Emperors: A Social History of Qing
Imperial Institution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Tan, Koon San. 2014. Dynastic China: An Elementary History, Petaling
Jaya: The Other Press.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