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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이 만난 두 마지막 황제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7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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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 이지수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2017년 6월 22일, 사랑방 8기는 자금성이 만난 ‘두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보기 위해 먹구름 낀 하늘 아래의 자금성을 찾았습니다. 두 마지막 황제의 비극적인 퇴장 과정을 복원하려는 시도에 무대효과라도 더해주려는 듯 우리가 찾은 북경의 고궁에는 세찬 비 줄기가 내리는 중이었습니다. 자금성 남쪽의 첫 관문인 태화문을 지나자 청색이 감도는 바닥벽돌로 포장된 약 11,500평의 자금성의 가장 넓은 광장인

22 태화전광장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맞은편에는 위엄 있는 황제의 공식 직무공간이자 관료접견 공간인 태화전이 청조의 잊혀진 위상과 위엄을 뽐내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금성 내에서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로서 보는 이에게 위압감마저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북경의 기록적인 폭우 덕분에 자금성의 금지된 구역으로서의 면모도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퇴장한 두 마지막 황제의 심경을 짐작해보니 쓸쓸하고 스산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잠시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태화문 기와 아래에서 위안스카이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천상의 평화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천안문(天安門)
‘천상의 평화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천안문(天安門)

자금성이 본 마지막 황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

23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누구인가를 상정해야겠습니다. 이 글은 20세기 자금성이 두 명의 마지막 황제를 목격하였다는 전제로 출발하여 복원작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그 중 한 명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입니다. 다른 한 명은 중화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인 홍헌제(洪憲帝) 위안스카이입니다. 푸이와 위안스카이를 ‘마지막 황제들’로 상정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08년 3살 푸이는 갑작스럽게 황좌에 올랐지만 신해혁명으로 4년만인 1912년 2월 12일 청제국의 몰락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청나라 총리대신 위안스카이는 롱위태후(隆裕太后)에게 청황실이 고려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는 내전 혹은 화친뿐이라며 청조 퇴진을 전제한 화친을 제안했습니다. 롱위태후는 생령을 도탄에 빠뜨릴 수 없다며 화친에 동의하게 됩니다. 퇴위하기만 하면 외국 황족으로 우대하겠다는 민국정부의 청황실우대조건이 결정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매년 은화 4백만 냥을 지원한다는 조건을 포함한 청황실우대조건으로 선통황제 푸이는 보화전·중화전·태화전을 제외한 자금성의 제한된 공간에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공화국인 중화민국 영토 안의 고궁에는 존호가 보장된 황제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푸이의 퇴위조서가 반포 된지 불과 4년도 지나지 않은 1916년 새해 첫날, 위안스카이는 임시총통직과 정식총통직을 거쳐

24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자금성에 입성합니다. 그는 총통시절에도 폐위된 푸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보화전·중화전·태화전 삼대전을 집무실로 점유했었습니다. 하지만 군주제에 대한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결국 3월 22일 군주제 철회명령를 전달하였으며 3월 23일에는 자신의 원호(元號)인 홍헌연호를 폐지할 것과 1906년을 기준으로 다시 중화민국 5년을 시작하겠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공들여 쌓아온 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0세기 초 격변의 도시 북경의 자금성은 두 명의 ‘마지막 황제’를 목격했습니다. 쫓겨난 푸이와 자금성의 새 주인이 되려 했던 위안스카이가 자금성을 떠나게 된 과정과 그때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요? 자금성이 목격한 두 마지막 황제의 심정을 복원하고자 그들의 흔적을 찾아 비 내리는 자금성에 들어갔습니다.

푸이의 자금성

청대의 군주제가 무력으로 전복 되지 않았으며 황실제도의 종말이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위안스카이가 롱위태후와의 화친제안에서 제시한 황실우대조건의 역사적 의의는 상당하다고

25 할 수 있겠습니다. 푸이의 스승 레이널드 존스턴(Reginald Fleming Johnston)은 만약 위안스카이가 쑨원(孫文)과의 막후 타협으로 청황실우대조건을 내세워 황실의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몇 년간 계속될 정도의 내전이 아닌 한 황실이 혁명파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할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평가합니다(Johnston 2008, 144). 그의 주장에 의하면 황실우대조건은 중국의 정치체제 변화과정이 유럽과 비교할 때 비교적 평화롭게 이행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황실우대조건의 유효가 발효된 시작과 끝 점에서의 자금성의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금성이 만난 푸이의 자금성 퇴거과정을 세 가지 주요 장면으로 나누어 재조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자금성 양심전 동원각에서의 롱위태후와 위안스카이의 회담입니다. 회담을 통해 롱위태후는 제국 청나라에서 공화정 중화민국으로의 변혁을 허락합니다. 두 번째 장면은 양심전 황좌에서 푸이와 장쉰(孫文)의 첫 만남입니다. 푸이는 장쉰의 요청에 의해 황제에 다시 오를 것을 수락함으로써 복벽운동을 받아들였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푸이가 저수궁에서 전달받은 펑위샹(馮玉祥)의 최후의 통첩입니다. 펑위샹이 쿠데타로 점거한 민국정부는 청실우대조건수정안을 자금성에 통보함으로써 푸이의 신속한 퇴거를 명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푸이는 답답한 자금성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시

26 ‘옥좌’에 앉겠다는 이상과 함께 고궁을 떠나게 됩니다. 첫 번째 장면: 靑의 황제 民國의 푸이 자서전『황제에서 시민으로』(원제:我的前半生)를 통해 자금성에서의 마지막 나날 중 가장 인상 깊은 사건으로 푸이는 동원각에서의 롱위태후와 위안스카이의 만남을 회고합니다. 어느 겨울날 푸이는 동원각에서 롱위태후가 남쪽 창가 쪽 온돌에 기대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대화상대는 뚱뚱하고 못생긴 노인이었는데 그 역시 얼굴 가득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뚱보노인’은 눈물 콧물을 닦으며 매우 큰 소리로 무언가를 열심히 말했으나 당시 7세의 어린 푸이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뚱보노인이 위안스카이였다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환관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이 푸이가 위안스카이를 직접 본 유일한 순간이었으며, 위안스카이가 태후를 만난 최후의 날이었음을 그는 커서야 깨닫게 됩니다.

1912년 1월 28일 동원각에서 위안스카이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말한 대화의 주제는 청황실 퇴원문제였습니다. 신해혁명을 마주한 청황실에게 공화제를 실시하는 방안 이외에는 어떠한 출로도 없다며 태후와 비밀상주를 한 순간입니다. 본래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임시총통직을 물려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의

27 실현가능성을 확신하기 전까지 혁명군과 청군의 평화담판에서 줄곧 공화제 실시를 반대하고 군주입헌제를 주장해왔었습니다.

하지만 푸이가 목격한 위안스카이는 이미 총통자리에 대한 확신과 야망이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능가한 상태였습니다. 그가 들먹인 프랑스 루이 16세의 실정과 혁명으로 그 자손이 살아남지 못 한일, 쑨원이 넘겨준 황실우대조건안에 설득된 롱위태후는 1912년 2월 12일 푸이의 퇴위조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푸이는 조서반포 직후에 벌어진 일을 회고록에서 담담한 어조로 서술합니다.

위안스카이는 롱위태후의 어지에 근거해 민국 임시공화정부를

조직하고 한편으로는 남방 혁명군과 달성한 협의를 근거로

하루 만에 대청제국 내각총리대신에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돌변했다. 그리하여 나는 대총통의 이웃이 되어

작은 조정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푸이 1988, 65).

청황실우대조건의 제3조에 언급된 ‘잠시 궁중에 기거 한다’는 구체적인 기한이 규정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롱위태후를 비롯한 많은 왕공과 자금성 사람들은 우대조건이 황실의 명목적인 보존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푸이는 그렇게

28 생각하지 않았습니다(푸이 1988, 179). 우대조건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변에도 위협을 느꼈습니다. 계속해서 내전이 발생하고 어느 한쪽이 승기를 거머쥐다가도 패전하는 시세를 지켜보며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느닷없이 닥치지는 않을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중화민국 건립 직후 당시 자신의 염두는 단 하나, 당국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지 우대하는가 어떤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동원각 회담장면을 통해 롱위태후가 민국승인 어지를 내리고 황제의 퇴위조서를 발표하여 선통제가 마침내 호칭만을 유지한 채 중화민국 국민과 동등한 법률상의 지위를 갖게 된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북경의 고궁에는 황제가 계속 살고 있었기에 민국 정부에 적대감을 가진 자들은 여전히 그를 세상의 중심으로 삼았고, 결국 복벽을 위한 각종 계략들은 오히려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몰게 됩니다.

두 번째 장면: 푸이 다시 황제가 되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위안스카이는 결국 1916년 1월 1일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즉위 5개월하고 5일 만에 명을 다합니다. 푸이는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29 위안스카이 시대에 여기저기 숨어 이었던 왕공 대신들이 다시

사교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월 초하루와 나의 생일에는

대총통이 사절을 보내어 축하했으며, 나의 부친도 여원홍과

진기서에게 진수성찬을 보냈다. 어쨋든 자금성은 다시 예전과

같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정사년(민국6년)에 이르러,

장쉰이 궁으로 들어와 문안을 드리면서 복벽의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푸이 1988, 126).

원의 죽음은 민국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청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쉰(孫文)을 비롯한 복고파 인물들의 주도아래 청조복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장쉰이 이끈 정사복벽이 그 중 하나인데, 이 사건을 통해 푸이는 11일간 다시 ‘청나라 황제’가 되었습니다. 신해혁명 당시 남경 수비를 맡았던 장쉰은 혁명군의 공격에 맞서 10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에도 여전히 청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여 휘하의 군대를 산동성에 주둔시킨 청의 충신을 자처해온 인물입니다. 위안스카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정변을 일으켜 북경을 장악했습니다. 장쉰은 1917년 6월 16일 자금성에 들어가 푸이를 알현했고 곧 7월 1일 청조의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그날 11살 푸이는 용상에 앉아 민국6년을 선통 9년 5월 13일로 고쳤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착오적 정변은 당장 중국 전역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고 쑨원(孫文)은 중화민국에 대한

30 반란이라며 토역을 선언합니다. 7월 5일 자금성의 하늘에는 한대의 복엽기가 나타났습니다. 푸이를 비롯해 비행기를 난생 처음 본 관료들과 시녀들은 신기한 새라며 어리둥절해 했지만 요란한 폭음과 함께 세 발의 폭탄이 떨어지자 곧 모두 경악하였습니다. 결국 정사복벽은 11일만에 실패했고 장쉰은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복벽소동은 장쉰에게도 심각한 좌절을 초래했지만 푸이의 손실은 그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황실의 복벽야심이 폭로되어 공화제를 옹호하는‘애국지사’들이 황제를 민국의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민국정부로부터 받아온 특별대우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고 펑위샹(馮玉祥)은 영원히 복벽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푸이를 자금성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선통제복벽이라는 촌극이 막을 내리자 이번에는 황제가 대궐 밖으로 쫓겨나는 비극이 연출된 것입니다.

세 번째 장면: 푸이 다시 시민이 되다 푸이의 자금성 생활은 결국 펑위샹의 쿠데타로 끝을 맞이합니다. ‘잠시 궁중에 기거한다’는 청황실우대조건 제3조에 구체적인 기한은 명시되어있지 않았지만 결국 그 끝은 있었던 것입니다. 펑위샹의 정변소식이 궁중에 전해지자 자금성은 복벽실패 이후 또

31 다시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24년 11월 15일 파죽지세로 북경에 도착한 펑위샹은 무력으로 자금성을 포위하여 황실우대조건수정안을 통보함과 동시에 푸이퇴거를 명령했습니다.

15일 오후 9시 무렵, 푸이는 저수궁에서 황후 완용(婉蓉)과 과일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쿠데타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민국이 기존우대조건을 폐지 할 것이며 새로운 우대조건 수정안을 만들었다는 대신들의 말에 그는 벌떡 일어나 입에든 사과를 땅에다 뱉어낼 정도로 아연실색했습니다. 청실우대조건수정안은 제1조에 대청 선통제는 이제부터 황제의 존호를 폐지하고 법률상 중화민국 국민과 동등한 모든 권리를 갖게 됨을 명시했습니다. 제3조에는 ‘청실은 원래의 우대조건 제3조에 기초하여 즉시 궁성을 떠나야 한다. 이후 주거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민국정부는 여전히 보호의 책임을 진다’는 조항이 포함되었습니다.

수용하지 않을 시 자금성에 대포를 쏘겠다는 위협에 푸이는 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합니다(푸이 1988, 218). 자금성을 떠나기 위해 성 북문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는 “공민이 되었다니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됩니다. 장래 대총통으로 선출될 가능성도 있습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자에게 대총통으로 선출될 가능성을 친절히 일러주다니, 목숨을 내놓을 것을 권유하는 것과

32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푸이 역시 대총통이라는 세 글자가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이미 “재능을 감추고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푸이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원래 그 우대조건을 원하지 않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폐지 된 것은 내 생각과 합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황제 노릇은 자유가 없었는데, 이제 나는 ‘자유’를 얻겠군요.” 푸이는 퇴위된 황제로서 여태껏 자신에게 가해진 제한과 방해를 혐오해왔고 자금성에서의 통제된 삶에서 벗어난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가 뜻한 자유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선조의 옛 업적을 회복하고 대청제국의 위용을 다시 진작하겠다는, 그러기 위하여 옥좌에 다시 앉겠다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16년간의 명목상 황제생활은 자금성에서 쫓겨난 뒤에도 푸이 자신만이 중국의 합법한 황제라는 의식을 내재하게 했습니다. 이 의식은 대청제국광복이라는 환상을 실현하겠다는 행동으로 이어져 중국을 침략한 일본 군벌과도 결탁하고 침략의 공범이 되어 조국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후에 그는 중일전쟁전쟁 전범으로 전락하여 소련 시베리아 수용소에 장기간 구금됩니다. 푸이의 복잡다단한 운명은 중국의 진정한 황제가 되려는 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편 그 야심은 중화민국 성립허가를 전제로

33 주어진 각종 우대조건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기에, 결국 ‘청황실우대조건’이 그를 황좌에서 내려오게도 했고 오르게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금성과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입니다. 푸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황제가 되었다면 위안스카이는 끊임없는 노력과 야망으로 한 걸음씩 자금성에 가까워 졌습니다.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던 시기 황좌를 향한 위안스카이의 여정을 살펴봄으로써 민국성립 이후 자금성이 만난 위안스카이의 삶을 세 가지 주요 장면으로 나누어 조명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자금성이 본 위안스카이의 마지막 황제로서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청의 총리대신 직책에 있을 때 총통이 되기 위해 황실을 배반한 사건입니다. 우대조건을 들어 청조를 설득한 대가로 그는 쑨원의 자리를 이어받아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공화국의 민주정치적 요소를 걸림돌이라 여기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해

34 스스로를 새로운 황제라 칭한 일입니다. 위안스카이는 민주적 절차를 악용하고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임시총통에서 정식총통으로, 정식총통에서 중화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군주제 선포 후 대내외의 극렬한 반발에 못 이겨 결국 이를 무른 뒤 지병을 얻어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그는 세 달도 못 버티고 군주제를 철회했으며 다시 중화민국 5년을 시작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중화제국 처음이자 마지막황제인 위안스카이는 민국의 총통에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가 취소하기까지 총 83일이 걸렸고 5개월 5일 만에 명을 다하게 됩니다.

첫 번째 장면: 淸의 총리대신 民國의 총통 1912년 1월 1일 쑨원의 삼민주의를 필두로 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선포되었습니다. 임시총통 쑨원은 자신이 그 자리에 취임한 것은 적당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위안스카이에게 전쟁을 통하지 않고 공화정을 이루기만 한다면 반드시 총통자리를 양보하겠다 제안합니다.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있는데 어떻게 민국정부가 들어설 수 있냐며 반대했지만 속으로는 머뭇거리는 형편이었습니다. 총리대신으로서 혁명당 진압책임을 맡고 있었기에 공화제를 대놓고 주장하기는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미 광서제(光緖帝)때 “입헌을 방해하는 자는

35 역적이다”라며 앞장서 입헌제도를 지지했었습니다. 이에 쑨원이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정이 선포된다면 반드시 임시총통의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약속을 거듭 확실히 하자 마침내 위안스카이는 막후에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전국적인 봉건타도운동으로 어려워진 군비문제 및 공화정실현이 민심이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롱위태후에게 올렸습니다. 프랑스 루이 16세가 세상물정에 어두워 그 자손이 혁명당에게 모조리 피살된 것을 예로 들며 시국을 살피고 ‘민심’을 따를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위안스카이 자신이 황제자리에 오르려는 시도에 대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처럼 되지 말고 워싱톤이 되라”고 말한 짱치엔(張騫)의 권고와 중첩되어 권력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푸이 퇴위조서 반포 다음날 쑨원은 사직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위안스카이를 임시정부 대총통으로 추천하였고 이틀 뒤인 2월 15일 위안스카이는 임시대총통이 됩니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아직 국정을 이끌 능력과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구관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혁명정신의 약화가 초래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정적을 제거하여 간접민주선거를 악용한 독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는

36 갖은 책략을 통해 정식총통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총통취임식과 무창봉기 기념행사는 함께 진행되었는데 그가 선택한 행사장소는 국회도 아니고 총통부도 아닌 청의 옛 황궁 자금성이었습니다. 1913년 10월 10일 태화전 앞에서 위안스카이는 육해군 대원수의 예복을 입고 국회의원들 앞에서 선서를 합니다.

위안스카이의 총통취임식이 진행된 태화전. 태화전은 본래 명·청의 황제 즉
위안스카이의 총통취임식이 진행된 태화전. 태화전은 본래 명·청의 황제 즉

위식 및 황실의 중요행사가 거행되던 곳 이다.

사랑방 8기가 태화전 광장에 섰을 때처럼 세찬 비가 내리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성실하게 헌법을 준수하고 총통의 직무를

37 집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다.” 취임식이 끝나자 비도 그쳤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취임행사에 일어난 세 가지 불상사를 기술한 후의(侯毅)의 <홍헌구문>에 따르면 10월 10일을 기준으로 앞 뒤 수 십일은 맑고 좋은 날씨였는데 취임식 진행 중에만 갑자기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태화전에 걸린 비단 오색국기는 비에 젖은 그 색이 모호해 마치 비단에 피눈물이 남겨진 듯 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번째 장면: 民國의 총통 帝國의 황제 당시의 국제정치는 서양에선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동양에선 서양을 만난 일본이 중국을 넘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메이지 천황도 배우려 했지만 유럽을 쥐고 흔들던 독일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Victor Albert)의 철권정치와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의 군비확장주의를 더욱 흠모했습니다(허우 이제 2003, 286). 빌헬름 2세는 “공화정은 중국에 맞지 않으니 강력한 군주제를 세워야 한다” 강조했으며 위안스카이의 아들 원극정을 독일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고 중국은 군주제를 실시할 때에만 강해질 수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황실제도의 관료제와 군대의 상명하달식 명령에 익숙한 인물이었기에 마침 민국의 국회, 책임내각, 정당정치 같은 민주정치적 요소들이

38 자신의 뜻을 실행에 옮기는데 걸림돌로 여겨지던 참이었습니다.

때문에 황실제도의 부활을 부추기는 빌헬름 2세의 서한은 현 제도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더디게 한다는 위안스카이의 불만에 명분을 부여함과 동시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한층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곧 국회와 임시약법을 대대적으로 손보기에 착수해 총통권한 확대를 요구했습니다. 총통이 약법에 속박되는 것은 4억 국민이 법에 속박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는 ‘외교권은 마땅히 총통에게 주어야 하며 전쟁의 선포·화해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참의원의 동의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정식헌법은 국회가 아닌 국민회의에서 제정하고 총통이 공포하며 작성권도 총통과 참의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화정의 민주주의정신을 유린하려는 위안스카이의 시도는 반발에 부딪히지만 결과적으로 정식약법에 반영되었습니다. 1914년 5월 1일 공포된 중화민국 정식약법은 국가체제를 총통제로 규정하나 총통의 국회해산권까지 더하여 위안스카이에게 거의 황제에 맞먹는 권력을 부여하였습니다.

이윽고 1915년 12월 11일 위안스카이는 비공개적으로 설립된 국민대표대회의 투표로 황제직에 추대됩니다. 신해혁명때 국민이 감정에 치우쳐 갑작스럽게 공화국을 선택해 나라가 고통을 겪고 있다며 그의 황제등극을 적극 지지하는 주안회가 조직되고,

39 전국청원연합회가 나타나 각종 입법기구에 체제개혁을 청원했으며, 국민대표대회를 통해 입법기관 표결을 거쳐 1993명 중 1993명이 군주제 찬성에 투표한 덕분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위안스카이와 그 측근세력의 주도가 있었습니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왕정복고를 지지하던 일본이 갑작스런 태도변화를 보였고 10월 28일 체제투표가 시행되자 일본·영국·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가 군주제로의 추진을 늦추거나 중지할 것을 권고한 탓입니다. 군주제진행이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자 위안스카이의 휘하세력은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황제자리에 취임해야 한다며 오히려 그를 재촉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외국의 부정적 반응에 잠시 주춤했던 위안스카이는 곧 측근의 주장에 설득되어 우선 국내에서만 제위에 오르는 의식을 거행하고 후에 길일을 택해 해외사절을 초대하자는 제안을 승인합니다. 12월 11일 참정원 회의는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모시자는 추대서를 올렸습니다. 19일에는 황제즉위 준비기관인 대전주비처가 설립되었습니다. 자금성의 태화전·중화전·보화전은 각기 승운전·체원전·건극전으로 고쳐졌고 본래의 황금색 기와는 붉은 색으로 새로 칠해졌습니다.

그러나 들뜬 마음도 잠시, 12월 23일 본래 자신을 지지하기로 했던 탕지야오(唐繼堯)와 런크어청(任可澄)으로부터 공화제를 지키고

40 군주제를 영원히 폐지하라는 전보가 도착합니다. 이어 중화민국 구국군이 조직되어 열렬한 국민지지와 함께 홍헌황제 축출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황제가 되려는 그의 야심을 겉으로만 옹호하고 비밀리에 토벌을 계획한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상 후퇴는 없으며 여의치 말고 일을 신속히 추진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1916년 1월 1일 예정대로 위안스카이는 새로운 황실의 탄생을 천명합니다. 총통부를 신화궁이라 개칭하고 국호는 중화제국, 연호는 홍헌이라 하여 홍헌황제로 등극한 것입니다. 허나 제위에 오르는 의식은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공화정 존립을 요구하는 대내외의 강력한 주장과 신변을 고려한 탓입니다. 비록 성대한 즉위식은 없었으나, 모든 상소문과 공문서는 홍헌 원년을 기준으로 작성되어야 했으며 중화제국 옥새와 문무관 예복도 만들어져 내부의 구색은 갖춘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홍헌원년을 쓴 외교문서는 모두 반송되어 돌아왔고 위안스카이는 외세가 두려워 외국에 문서를 보낼 때는 중화민국의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외교활동을 함에 있어서도 황제가 아닌 총통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중국에는 안으로는 제국이 겉으로는 민국이 공존하여 민국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며, 민국이기도 하고 제국이기도 한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동시에 위안스카이는 안으로는 황제이고 밖으로는 총통이어서 총통도 아니고 황제도

41 아니며, 한편으론 총통이기도 하고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외국 신문들은 그를 ‘황제총통’이라 풍자했습니다(허우 이제 2003, 325).

세 번째 장면: 황제 복장을 한 총통의 장례식 새로운 군주제를 반대한 것은 외국정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월 1일 중화제국이 선포되자 전국 여러 지방이 독립을 선언했고 호국군이 결성되어 북경을 향해 출병했으며 민중의 들끓는 반대는 새로운 황제를 곤경에 빠트렸습니다. 그는 장군 장쉰을 설득하여 국내상황의 전세를 역전하려 했습니다만 장쉰은 청 황실을 다시 세우자는 복벽파로 진심으로는 위안스카이를 옹호하지 않던 인물입니다. 장쉰은 군대를 내보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선통연호가 아직 살아있는데 분별없이 황제라 자칭하였으니 롱위태후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며 비난했습니다. 청조에 대한 도리를 저버린 위안스카이와 인연을 끊겠다는 친지들의 통보도 그의 심정을 괴롭혔습니다(신동준 2010, 573). 사촌동생 원서정은 “우리는 대대로 청조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총통이 된 것은 보물을 도둑질한 것과 같습니다. 황천에서 태후를 어찌 만나려는 것입니까”라고 불만을 토로했고, 동생들은 “우리는 형제자매의 의를 철저히 끊는다. 군주제가 이뤄져도 부귀공명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42 실패해도 그 죄과에 우리는 아무 책임도지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여러 위협과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중화제국 선포였지만 제국은 석 달도 채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3월 22일 군주제 철회명령을 내렸고 23일에는 홍헌연호를 취소했습니다. 민국의 총통이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가 다시 내려오기까지 총 83일이 걸린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병을 얻은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황제즉위를 선포한지 5개월 하고 5일 만에 운명을 다하게 됩니다. 처음 얻은 병은 방광결석이었는데 서양의원을 믿지 않아 초기에 진료를 받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요독증으로 병이 악화되자 그는 먹지도 못하고 배뇨도 못해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뒤늦게 프랑스 의사가 치료를 시도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6월 6일 새벽 임종을 맞이하였습니다. 시신이 입관될 때 그의 머리에는 황제의 관이 씌어졌고 천제를 지낼 때 입는 예복이 입혀졌으며 붉은색 신발이 신겨졌습니다. 황제의 차림새였습니다. 하남성 안양(安陽)에는 황릉을 연상시키는 위안스카이의 4만평대 묘역이 있습니다. 홍헌연호가 취소되었기에 제왕의 묘지인 능(陵) 대신 성인의 묘지를 뜻하는 림(林)이라 칭해졌으나 공림(공자의묘)과 관림(관우의묘)을 본떠 ‘원림’이라는 특별한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43 임(Lin)이 능(Ling)과 발음이 같으니 이름은 피하되 실질을 갖자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록 ‘황제총통’이었지만 중화제국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로서의 예우를 받으며 자금성 무대에서 퇴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진 그의 측근세력이 주도한 일이었을 뿐, 그는 전국적으로 ‘나라 훔친 도둑’이라 비난 받았습니다(윤혜영 2016, 121).

자금성을 나서며 사랑방 7기 학생들이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다.
자금성을 나서며 사랑방 7기 학생들이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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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에서 나가며

여섯 가지 장면을 통해 자금성이 만난 두 마지막 황제의 최후는 비슷하면서도 달랐습니다. 푸이에게 자금성이 운명처럼 주어진 ‘집’이라면, 위안스카이에게 자금성은 운명을 걸고 얻어낸 ‘집념의 산물’인 것입니다. 푸이에게 자금성은 애증의 공간이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담 넘어 바깥세상과는 달리 멈추어 있는 자금성의 생각과 사람들에게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편 위안스카이에게 자금성은 선망의 공간이었습니다. 권력을 향한 야망은 그를 자금성 총리대신에서 민국 대통총자리에 앉혔으며 마침내 스스로를 황제로 칭해 황좌에 앉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자금성이 만난 두 황제의 퇴장은 모두 비극이었습니다. 푸이는 짧았던 재위기간에 ‘등극-퇴위-복벽-퇴위’라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청나라의 열두 명 황제 가운데 유일무이한 일입니다. 자유를 찾아 벗어나고 싶기는 했지만 막상 최후의 통첩으로 떠나게 된 순간에는 다시 옥좌에 앉겠다는 이상을 더욱 확고하게 한 공간이 바로 그가 17년간 주인이었던 자금성입니다. 자금성이 지켜본 위안스카이의 연극 같은 삶 역시 비극입니다. 밑에서부터 황제의 자리에 올라온 그는 위협과 반대를 무릅쓰고 중화제국을 선포하였지만 석 달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45 물러났습니다. 황제 옷을 입은 그의 연극은 군중의 멸시로 끝을 맺게 된 것입니다. 가족은 등을 돌렸고 세상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두 마지막 황제’의 흔적을 찾아 들어간 자금성에서 우리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와 중화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 홍헌제 위안스카이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20세기 초 격변의 도시 북경의 자금성이라는 같은 무대에서 서로 다른 연기를 펼쳤지만 둘 다 야유를 받으며 퇴장한 비극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사랑방 8기가 자금성에 들어갈 때 쏟아진 비와 어두운 하늘은 그들이 섰던 비극무대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주었습니다. 마침내 두 황제의 흔적을 찾는 여정을 마치고 북문으로 퇴장하자 연극의 대단원이 막을 내리듯 세찬 비 줄기도 함께 그쳤습니다. 참고문헌 레지널드 존스턴. 2008. 《자금성의 황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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