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불교상 이 들려주는 이야기 (佛敎像)
천년의 수도 베이징에서 새천년을 그리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베이징 수도박물관 · 이재성 · 미야자키국제대학교
이것만은 알고 가자!
◆ 위 치: 北京市西城区复兴门外大街16号 ◆ 개관시간: 09:00~17:00 (16:00 입장 마감) ◆ 휴 무 일: 월요일 휴관
◆ 요 금: 무료(사전 전화 예약 必)
◆ 가는방법: 1호선 목서지역 하차 C1 출구에서 300 미터 정도 도보
베이징 수도박물관을 들어서며
2014년 12월 28일 오전 아침 일찍 마오쩌둥 기념관을 먼저 방문하고 제 발제 담당인 베이징 수도박물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본래 제 발제 순서는 베이징 답사 이튿날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모든 여행이 그렇듯, 계획대로 시간에 딱딱 맞춰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에는 2박 3일 중 가장 마지막 날 가장 늦게 발제를 하게 되는 불상사가 발 생했습니다. 때문에 마지막 날까지도 긴장을 끈을 놓을 수가 없었고 이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는 대부분의 사진에서 제 표정이 약간 어두운 이유와 없잖아 관련이 있 습니다.
제가 베이징 수도박물관을 답사지로 선택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수도(首都)라는 장소가 한 국가의 문명 표준을 가 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한 국가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담아 가장 잘 표현해내고 있는 공간이 다름아닌 바로 박물관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난생 처음 중국이라는 국가를 방문하는 만큼 중국의 수도 박물관이 주마간산 식으로나마 중국의 문 명과 역사를 체험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베이징 수도박물관에 도착해 이 건물에 대한 발제를 시작하면서 베이징시의 수도(水道) 및 배관 시설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라고 가 벼운 농담을 던졌으나 썰렁한 분위기와 함께 본격적인 베이징 수도박 물관 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베이징 수도박물관이 1953년에 설 립되었을 때는 본래 자금성 근처 공자 사당 안에 위치하고 있었습니 다. 공식적으로는 1981년에 개관하였으나, 제10차 5개년 계획의 주요 문화 건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신축하게 되어 2006년 5월 18일에 현 위치로 이전하여 개관하였습니다. 박물관은 지하 1층을 포함한 6층 건물이며 각 층에는 도자기, 청동기, 서예, 회화, 옥 공예품, 불교상 등 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베이징 수도박물관의 정문을 향해 바라보면 제 일 먼저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건물 조형입니다. 건물 외형에는 청 동색을 띤 토기(土器) 모양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토기 모양은 사실 박물관 내부에서 외부까지 비스듬히 위치하고 있는 원통 모양을 한 조형물의 일부분입니다. 이 원통 안에서 각종 특별 전시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특별 전시관의 관람을 위해서는 별도 요금을 내야 합 니다.
박물관은 기본 전시관, 테마 전시관, 임시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개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오후 4시까지만 입관이 가능합니다. 저는 당연히 한국에 있는 다른 박물관 과 같이 예약 없이도 언제든지 입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습니다. 답사 둘째 날 원명원에 입장하기 직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서 승희 누나와 주원이 형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 수도박물관에 전화를 걸어 문의해보니 적어도 하루 전날 예약을 해야 입관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고 일찍이 이 사실을 깨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달았기에 예정대로 박물관에 갈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의 수많은 전시관들 중에서도 베이징 수도박물관 4층에 위 치하고 있는 불교상(佛敎像) 전시관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단, 제가 불상(佛像)이 아닌 불교상(佛敎像)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타 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불교 관련 조상(彫像)들을 불상이 라 통칭하여 부르고 있으나, 본래 불상(佛像)이란 부처의 조상만을 지 칭합니다. 부처 이외에도 보살이나 사천왕과 같은 불교 인물들을 본뜬 조상들을 통틀어 말할 때에는 불교상이라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베이징 수도박물관 4층 불교상 전시관에서는 원· 명·청 시대에 제작된 불교상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전 시관에서 장족(藏族) 불교상 혹은 티베트 불교상이 저의 이목을 끌었 습니다. 중국 불교상의 양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보면 중국 전통 양식, 티베트 양식, 그리고 중국-티베트 절충 양식이 있는데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이 전시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 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해서 티베트 불교상 또는 티베트 양식의 불교 상이 북경까지 전파되었을까요? 베이징 수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중국 시대별 불교상이 국제정치적 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저의 궁금증들을 해결하기 위 하여 불교상을 유심히 관찰해보기로 했습니다.
라마교와 중국의 중원
불교상의 양식이 특정한 국제정치학적 속성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을 까라는 궁금증을 갖고 불교상을 유심히 관찰하기 전에 일단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중국의 역사를 먼저 살짝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 국 역사에서 북경과 티베트간 교류가 활발해졌을 법한 시대는 아마도 원나라일 것입니다. 원나라는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를 국교로 채택한 만큼 중국의 중원과 티베트의 인연은 원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 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라마교와 중국 중원과의 인연은 원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인연이 가장 깊어지고 빛을 발하는 시대는 다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름아닌 바로 청대입니다. 특히 순치제와 건륭제 재위 시절에 청조와 라마교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1653년 청나라의 황제였던 순치제(順治帝, 재위 1643-1661)는 티베트 에서 온 달라이 라마 5세(達賴五世, 1617-1682)를 극진히 환대합니다. 이 는 중국 중원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 고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이 북경까지 전파되어 오늘날 베이징 수도박 물관에 티베트 불교상 및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이 전시될 수 있었습 니다. 우선, 티베트 불교와 중국 대륙 간의 관계를 간략히 살펴본 후 달라이 라마 5세와 순치제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아시아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스레 주 변 유목 민족들과 교류가 많았고, 그렇게 다방면으로 이루어진 교류 를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습니다(조재송 2004). 기원후 7세기에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습니다. 기원후 12세기 전후에 인 도에서 주요 승려들이 티베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 결과 티베 트 불교계가 인도 불교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따라서 티베 트 불교는 자연스럽게 종교적으로 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티베트 불교는 한자로는 장전(藏傳)불교 혹은 라마교라고도 불립 니다. 여기서 ‘라마’라는 단어는 본래 ‘Blama’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 습니다. ‘Blama’는 덕 높은 스승을 뜻하는 단어로, 훗날 중국에서 티베 트 불교의 승려를 라마로 부르던 것이 고착화되어 라마를 신봉하는 불교를 라마교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달라이 라마’ 라는 고유 명사도 티베트어인 ‘라마’와 몽골어로 큰 바다를 뜻하는 ‘달 라이’가 합쳐진 말입니다. 라마교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 에 몽골어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라마교와 몽고족의 제국이었던 원나 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라마교는 주변 유목 민족들과 교류가
,
많았는데 그 중 라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민족 중 하나가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족이었습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원(元, 1206-1367) 을 건국한 쿠빌라이 칸은 티베트 승려를 국사(國師)로 임명함으로써 티베트 불교의 지위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몽고제국 내에 서 라마교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었고 중국의 중원 또한 예외가 아 니었습니다. 불교상과 관련하여 원대는 티베트 불교상의 전입기였기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때문에 베이징 수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원대의 불교상 중 상당수 가 티베트 양식입니다. 그런데 원대의 티베트 양식 불교상의 외형적 특징 중 하나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가는데, 이는 몽고족이라는 민족 적 특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두가 눈에 띄게 표현되어 있는 것은 티베트 양식 불교상의 공통적 특성입 니다. 아마 티베트 또는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을 가장 빠르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유두가 표현되어있는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여러 중국 불교상과 관련된 사진들을 보다가 발견한 방법
입니다! 이것을 말하니 처음에는 다들 민망해했 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불교상을 보면 서 티베트의 영향을 받 았는지 안받았는지 구별 하는 것을 모두들 굉장 히 즐기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저로서는 좋은 지식을 공유해서 다행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대의 라마교는 국가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종교 적 성격보다는 세속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원나라가 망 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 라마교의 영 향력도 자연스레 감소하게 됩니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明,
1368-1644)을 건국한 주원장(朱元 璋, 1328-1398)은 본인 스스로가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의 승려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마 교로 인해 원나라가 피폐해졌다 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에 라마교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정책적으로는 한족들이 라마교 를 신봉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라마교 자체를 배격하지는 않았 습니다(배진달 2005). 물론 실제로 라마교 승려들이 베이징을 방문
합니다. 이는 아마도 원이 망한 이후에도 라마교가 종교적으로는 어느 정도 존중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은 명대에 중 국 전통적 양식과 티베트 양식의 특징이 조합된 절충 형태의 불교상 이 나타나는 이유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절충된 양식의 불교상에서 인물의 표정은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과 달 리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 전통 양식의 영향입니다.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그렇지만 티베트 양식의 특징인 유두 돌출로 미루어보아 당대 티베트 양식의 조상 방법이 어느 정도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북방 유목 민족인 만주족은 청(淸, 1636-1912)을 세우고 명나라에 이어 중원을 제패했습니다. 만주족의 부흥과 함께 라마교 또한 두 번째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 이는 청조가 라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태조인 숭덕제의 건국 정신은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에 있다고 할 만큼 청조는 라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계환 2014). 만주족이라는 명칭에서 ‘만주’라는 말의 어원이 문수보살의 ‘문수’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불교라는 종교가 청조에 있어서 특별했음을 의미합니다. 순치제와 특히 건륭제는 자기 자신을 문수보살의 화현(化現)이라 여기었는데, 문수보살(文殊菩薩, bodhisattva Manjusri)이란 불교에서 정의롭고 자비로운 왕의 정신적 화신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전륜성왕(轉輪聖王) 또는 산스크리트어로 차크라바르틴(chakravartins)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인물은 중국의 산서성에 위치한 오대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북경에서 남서쪽으로 16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종교적 중요성을 가진 장소로, 서기 7 세기 이래 중국에서는 문수보살의 고향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13 세기에 문수보살과 원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 인연을 맺으면서 오대산에 새로운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이는 훗날 청조 황제들이 오대산을 자주 들르는 이유가 됩니다(엘리엇 2011). 청조와 라마교의 관계는 1653 년 초에 순치제가 달라이 라마 5 세를 책봉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성사되었습니다. 당시 달라이 라마 5 세가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두 인물이 만나게 되는데, 이처럼 외국 사신이 황제를 방문하는 일은 조공(朝貢)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치제와 달라이 라마 5 세의 만남은 여느 외국 사신의 조공과는 달랐습니다(김성수 2009). 첫째, 달라이 라마 5 세를 초청하려는 시도가 숭덕제 (崇德帝, 재위 1626-1643)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황제가 궁성을 나가 황실의 화원인 남원(南苑)에서 첫 만남을 가질 정도로 달라이 라마 5 세를 극진히 대접했다는 점입니다. 셋째, 순치제는 달라이 라마 5 세에게 베푼 연회에서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높이의 자리에 나란히 앉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라싸의 포탈라와 티베트 남부 삼예 사원에 있는 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달라이 라마 5 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화살 4 개가 날아갈 만큼의 거리까지 간 후, 나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고, 황제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는 서로 십여 보씩을 걸은 후,
손을 맞잡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 후 황제는 허리 높이의 의자에
앉았고, 나로 하여금 가까이에 앉도록 했는데, 나는 황제의 의자보다
조금 낮은 자리에 앉았다. 차를 마실 때, 나에게 먼저 마시라고
했지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우리는 동시에 함께
마셨다. 이처럼 나를 대하는 예의가 돈독했다(王輔仁 1982, 328).
이러한 세 가지 차이점은 당대 라마교가 청대에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라마교에 대한 우대는 순치제가 달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라이 라마 5세에게 수여한 칙봉오세달뢰라마책문(敕封五世達賴喇嘛冊文) 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내용인 즉, 서로의 인연이 숭덕제 이래 계속 이어졌으며 달라이 라마 5세가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임을 공표하는 것이었습니다(김성수 2009).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현재를) 다스리는, 황제의 명령, “내가 듣자
하니, 모두를 아울러 다스리는 자와 홀로 선한 자가 근원을 밝히는
도리는 같지 않다고 하며, 세상을 떠난 자와 세상에 존재하는 자가
가르침을 세우는 이치 또한 다르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마음을
맑게 하고, 천성에 따른 행위를 분명히 하며, 온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만민의 영도자는 모두 한 가지 뜻으로 통하게
된다. 롭상잠소(롭상갸쵸) 달라이라마 당신은 빛나는 지성을 바르게
키우고, 지혜가 매우 깊은 까닭으로, 마음과 행동 모두를 다스려,
일체의 사물을 헛된 것이라고 하고, 그로써 불법을 널리 알려
우매한 중생을 가르쳐 이끌었으니, 불법이 서쪽에서 성하여, 그 선한
이름이 동쪽에 알려진 것을 아버지 태종 문황제 가 들어
(太宗文皇帝)
찬양하고, 영접하러 사신을 보내 만났을 때, 그대(달라이라마)가 미리
하늘의 뜻을 알고, ‘용해(1652 년)에 만나도록 합시다.’ 라고 하였다.
나는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한 후,
진정으로 초청하기에 적당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아하니,
사람됨이 자애롭고, 언사에 절도가 있으며, 총기와 현명함, 학식을
고루 갖춘 등 은혜를 베풀고, 이치를 궁구하는 문을 널리 열었으니, 이는 마치 밝은 길 위의 계단과 배 같으며, 또는 불법이 [높은] 산과
[하늘의] 별 같음이다. 이에 나는 극찬하는
과 인장을 주어,
金冊
‘西天大善自在佛 이며, 세상의 모든 불교 교단을 이끄는,
(普通金剛持)달라이라마’라고 추대하였다. 적당한 때에 가서 불교를
융성하게 한 까닭으로 모두 기뻐하며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불법을 떨치게 하고, 수없이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으니, 이것으로
상중의 상(上上乘)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과 인장을
金冊
주었다.”(中國第一歷史檔案館 2002, 10-11; 김성수 2007, 75 재인용).
순치제와 달라이 라마 5세의 만남에 이어 청조와 라마교의 또 다른 중요한 만남은 건륭제 때 이루어집니다. 건륭제 가 칠순이 되는 1780년에 판첸라마 6세가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열하(현재는 승덕(承德)으로 불림)를 방문했습니 다. 1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 사신단과 함께 열하에
갔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1 판첸라마는 라마교에서 달라이 라마 다음의 지도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에 따르면, 건륭제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조선 사신단에게 판첸라마 6세는 자신에게 스승과 같은 분이니 스승의 예로 알현하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이는 건륭제가 판첸라마 6세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티베트 불교상: 티베트에서 베이징까지
베이징 수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을 보면 우 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불교상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 습니다. 티베트 양식 불교상들의 특징은 관능미(sensuous beauty)인데 이 는 인도와 네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중원을 기준으로 티베트 양식 불교상의 전래가 원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전성기는 청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조와 라마교 의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원대부터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은 북 경과 만주와 몽고에서 유행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중국 전 통 양식의 불교상이 주류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때 청조의 지원을 등에 업고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이 많이 만 들어지기 시작합니다(배진달 2005). 과거 중국에 대해 유교 국가 이미지 만을 가지고 있었던 저에게 관능적인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이 황제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베이징 수도박물관을 나서며
청조에게 유교는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품기 위한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습니다. 실제로 건륭제는 청조가 유가를 숭배하고 도를 소중히 하며 공자를 기리는 예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언급하기 도 했습니다(엘리엇 2011). 유학을 신봉하고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의 정 책과 비교하면 청조와 라마교 사이의 깊은 관계는 굉장히 흥미로워 보였습니다. 청조에게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을 보존하면서도 다수인 한 족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와 동시에 제국 내에 소수민족들을 품는 것 이 중요한 정치적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두를 껴안지 않으면 제 국은 분열될 테니 말이죠. 이는 청대 불교상에서 티베트 양식뿐만이 아니라 중국 전통 양식이 보이는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상이 중국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자금성에서 불교상 제작과 관련하여 일련의 지침들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건륭 5년 (1740)에 불교상 제작의 기준이 서술되어 있는 〈조상량도경〉이 찬술되 어 여기에 의거하여 티베트 불상을 조성함으로써 더욱 일률화되고 형 식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고, 건륭 14년(1749)경에 롤페 도제가 저술 한 〈제불보살성상찬〉은 청 황실 발원의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과 관련 되는 중요한 책으로, 이 책에 근거하여 많은 불교상이 제작되었을 것 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배진달 2005). 자금성에서 내려온 일련의 불교 상 제작 지침서들은 ‘단일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 습니다. 즉, 불교상 제작은 제국 통합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고 이러한 목표는 중국화 또는 한족화와 결부되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티베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트식 불교상의 중국화는 당시 청대 라마교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수 민족인 한족이 등을 돌리지 않는 선에서 라마교를 품 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청나라 황제들이 티베트 양식의 불교상 제작 을 위해 후원을 했던 것은 청조가 티베트를 제국의 일부분으로 남겨 두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함께 보고 함께 생각하자! 오승희: 티베트 불상 전문가가 된 재성이의 유쾌한 발표 덕분에
불상을 자세히 그리고 재미있게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베이징’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베이징이
수도로서 갖는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신보람: (I hear your pain……) 중국의 외교사에서 불교(더 정확하게는
라마교)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불교상의
변천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재치 있는 글인 것 같습니다.
종교와 외교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향후 더 연구해 봐도
좋을 주제인 것 같아요(미술사와 인류학, 정치외교학을 한 번에
잡는 다면적이면서도 융합적 연구가 되겠군요). 그럼 정말 그들이 왜
유두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겠죠. 신의 얼굴이라는 게 사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함과 욕망을 드러내는
거울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유난히 도드라진 부분도 뭔가
의미가 있을 겁니다.
김유정: ‘국가’ 박물관과 ‘수도’ 박물관이 가지는 위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부터 고민하기 시작하여 멋스러운 불상을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도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은
수도박물관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건륭제에
대한 특별전이 끝나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복합
군주’로서의 건륭제의 모습을 다른 유물들을 통해 7. 베이징 불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베이징 수도박물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수단으로서 폭력과
‘문화력’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균형감은 건륭제가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만한 역량의 기반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수도박물관은 다른 어떤 장소보다 기념품점이
잘 정돈되어 있었는데, 각자 베이징을 다시 회상할 때
요긴할 것들을 하나씩 득템(?)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나섰던 것이 떠오릅니다.
김선경: 재성이 마지막 날 발표하느라 발 마사지도 마음 편히 못
받아서 많이 안타까웠었어요. 티베트 불상의 특징을
말하며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발표가 기억에 남네요.
이 글을 읽으면서 딱 재성이가 묻어나네요~^^
김민걸: 청조 불상을 중심으로 중국 역사에 깃든 ‘복합’ 요소를
분석하는 글의 주제가 읽는 이의 입장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근거리에서 직접 촬영한 불상 사진들을 활용해서 생동감이
더욱 느껴져서 인상적이었고요.
이주원: 배관 시설을 전시해놓았다는 야심찬 애드리브(?)부터
가슴(?)으로 본 불상 관람기까지(순화하면 재성 식의 독특한
불상 해석기) 재성이의 발제는 톡톡 튀는 재미와 함께 알찬
내용도 함께! 마지막 발제여서 힘들었을 텐데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참고문헌 계환. 2014.《중국불교》. 서울: 민족사.
김성수. 2009. “청대 불교 세계의 여행.” 동양사학연구 2, 봄: 33-58. 김성수. 2004. “티벳불교권의 형성과 청조 번부 지배체제.” 명청사연구
22, 105-131.
마크 C. 엘리엇. 2011.《건륭제》. 양휘웅 역. 서울: 천지인. 박지원.《열하일기》.
배진달. 2005.《중국의 불상》. 서울: 일지사. 장진성. “열하와 대청제국”.
https://mpep.snu.ac.kr/common/download.asp?fileidx=1366&filena
me=%C0%E5%C1%F8%BC%BA_%B0%C7%B8%A2%C1%A6_%B
0%AD%C0%C7%C0%DA%B7%E1_2.pdf&filepath=%2FUploadFil
e%2FBoard%2F61f15ea3-5aac-4ddc-89d1-58c670fa498a.pdf (검색일:
2014 년 12 월 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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