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천년의 수도 베이징에서 새천년을 그리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이화원(颐和园) · 김선경 · 파리정치대학
이것만은 알고 가자!
◆ 개 관 시 간: 성수기 4월1일~10월31일 6:30-18:00, 비수기 11월1일~3월31일 7:00-17:00 ◆ 입 장 료: 30위안(성수기), 20위안(비수기)
◆ 종합 입장료: 60위안(성수기), 50위안(비수기)
◆ 홈 페 이 지: www.summerpalace-china.com
들어가며
자금성과 원명원의 답사가 끝난 후 드디어 저의 차례가 왔습니다. 하 루 종일 밖에 있다 보니 너무 추워 급히 목도리도 하나 장만했지만 베이징의 강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정이의 발표 가 끝나고 이화원으로 향하는 차에 오르니 발표 준비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습니다. 예정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이화원에 조금 늦게 도착 한 우리는 서둘러 표를 끊고 동궁문으로 입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 두가 고대하던 저의 발표가 시작되었습니다.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베이징 시내와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화원은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전국 중점문물보호물로 지정된 이화원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 명소입니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피서와 요양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서태후가 각별한 관심을 둔 곳입니다.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을 유용하였고, 청일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동북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만큼, 이곳은 서태후와 깊은 인연이 있는 장소인 동시에 국제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이화원과 서태후의 이야기는 19 세기 말~20 세기 초의 중국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서태후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양극화된 상황에서 이 보고서에서는 서태후를 보다 균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화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배경을 이해하고, 무려 40 년 동안 청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던 서태후를 정치가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화원을 가다
이화원 (颐和园) 은 12 세기 초 금나라 때 처음 조성되었으나, 지금의 정원 형태로 짓기 시작한 건 1750 년 건륭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이화 원이 아닌 칭이위안(淸漪園, 청의원)이라는 이름이었으며, 황제가 휴양하 는 정원으로 사용되었는데 1860 년 2 차 아편 전쟁 때 원명원(圓明園) 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불타버렸습니다. 이후 서태후가 말년에 요양할 장소로 이곳을 재건축하면서 이름을 이화원으로 바꾸 었습니다. 서태후는 단오(음력으로 5 월 5 일)가 지나면 이화원을 갔다가 만수절(서태후 생일인 10 월 10 일) 전후에 다시 자금성으로 들어가곤 했습 니다. 광서제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자금성에서 이곳으로 거주지를 옮 겼고, 황제가 존재했음에도 당시 실질적인 집권자는 서태후였으므로 이화원은 정치적, 외교적 활동의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이화원 의 면적은 약 290 만 m2 로 중국 최대 규모의 정원입니다. 백 개가 넘 는 건축 명소와 3,000 개의 고대 건축물, 그리고 크고 작은 정원이 20 개나 있으며 정원 안에는 4 만개의 유래가 깊은 골동품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화원을 관광하는 주요 코스는 두 가지로, 첫 번째는 동궁 먼(东宫门, 동궁문)으로 입장해 런서우뎬(仁寿殿, 인수전)-쿤밍후(昆明湖, 곤 명호)-위란위안(玉兰园, 옥란원)-러서우탕(乐寿堂, 악수당)-창랑(長廊, 장랑)-스 팡(石舫, 석방)-쑤저우제(蘇州街, 소주가) 등의 순으로 관람한 뒤, 베이궁먼 (北宫门, 북궁문)으로 퇴장하거나 스팡(石舫, 석방)에서 배를 타고 룽왕먀 오(龙王庙, 용왕묘)를 관람한 뒤 이화원의 난먼(남문)으로 나오는 코스입 니다. 두 번째는 동궁먼(东宫门, 동궁문)-완서우산(万寿山, 만수산)-파이윈 뎬(排云殿)-포샹거(佛香阁, 불향각)-칭옌팡(清晏舫, 청안방)-쿤밍후(昆明湖, 곤 명호)-룽왕먀오(龙王庙, 룡왕묘)-스치쿵차오(十七孔桥, 십칠공교)로 가는 코스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동하면 이화원을 한 바퀴 돌아 다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시 들어온 입구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코스를 선택하였 고 동궁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이화원을 관람하기 전 잠시 지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화원 내 만수산 동쪽에는 궁궐건축이 위치하고 있고, 만수산 앞뒤로는 사찰 건축물, 뒷산 호수구역에는 강남민속건축, 뒷산 중앙에 있는 티베트 라마교건축, 곤명호 서북쪽에는 서양의 기선을 모방한 석방(石舫)등이 있어 다양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화원은 정원이 수행했던 기능에 따라 크게 조정구역, 주거구역, 원림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정구역과 주거구역은 이화원의 동쪽에 위치하며 앞쪽은 조정구역, 뒷부분은 주거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화원 곳곳에 깃들여 있는 서태후의 이야기를 이러한 공간에 따라 전개하고자 합니다.
역사의 공간, 조정구역의 이야기
이화원의 조정구역인 인수전(仁寿殿)에 들어가려면 우선 첫 번째 문인 동쪽 대문으로 들어서야 합니다. 정중앙에 있는 동국문은 태후와, 황 상, 황후만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룽얼 2010). 그 양 옆에는 또 하 나의 문이 있는데 여기는 후궁들과 왕가 종친의 정실부인, 귀족과 대 신들만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모퉁이 문은 장경과 잡무 담당자들만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동쪽 대문으로 들어서면 인수 문(仁寿門)이 나오고 인수문을 통과하면 광서제와 서태후가 집무를 보 던 곳인 인수전(仁寿殿)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인수전은 외국사신 접견 등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으로 바깥 궁정에 속합니다. 본래의 이름은 근정전(勤政殿)이었으나 재건축된 이 후 공자의 《논어·옹야편》 지자락(知者樂), 인자수(仁者壽) ‘어진 정치를 하는 자는 장수한다’라는 의미를 따서 인수전(仁寿殿)으로 이름을 바꾸 었습니다. 인수전 앞에는 청동으로 된 용과 봉황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는 각각 황제와 황후를 상징합니다. 전통적으로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나, 인수전 앞에는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이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용은 양 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 치 서태후가 당시 최고 권력자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인수전은 1898년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強運動)이 논의된 중요한 역 사적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변법자강운동은 동치제의 지지 하에 서양 의 군사기술을 도입해 근대화를 꾀하려다 실패로 끝난 양무운동(洋務 運動)을 계승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무운동이 수포로 돌아 가게 된 원인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중앙권력 밑 보수세력들이 이 를 비판하고 견제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청일 전쟁의 패배에도 결정 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청일전쟁 발발 12년 전 청나라와 일본은 해군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군비 확장 경쟁을 했습니다. 하지만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상당한 해군 증강을 한 반면, 청의 북양 함대는 1880년대 말경부터 사실상 증강을 멈춘 상태였습니다. 12년 동안 청나 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동진이(董進一)의 《북양 함대와 류 공다우》(北洋海軍と劉公島)에 의하면 청나라는 1891년 재정난으로 인해 북양, 남양 함대의 함선과 대포 구입을 2년간 금지하여 북양함대는 한 척도 증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서태후 가 이화원 보수건축 등에 거액을 소비하여 재정난이 발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당시 청 조정은 광서제의 제당(帝黨)과 서태후의 후 당(后黨)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고, 이런 당파 갈등으로 인한 내부 분열로 외부 침략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청은 함선 82척, 어뢰정 25척 등 총 8만 50천 톤의 4개 해군 함대를 보유 하고 있었음에도, 북양함대만 참전했고 남양함대 등 나머지 세 함대는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재정난과 세력다툼은 청일전쟁의 패배 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청일전쟁 패배 이후 충격을 받은 광서제는 양무운동에 대해 회의 를 느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젊은 사상가들의 개혁 정책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을 지지하게 됩니다. 양무운동이 서양의 과학기술과 군수기술의 도입 에 개혁의 비중을 두었다면 변법자강운동은 근본적으로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 엔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와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가 있었습니다. 량 치차오는 1897년 후난성(湖南省)의 진보적 관료 및 학자들과 협력하여 지역을 중심으로 개혁을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황실이 무능하 다고 보았고 따라서 개혁은 지역과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캉유웨이는 북경에서 황실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개 혁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습니다. 캉유웨이는 문제를 정치제도의 개혁 에 국한시키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중국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로 확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제도적인 변화가 진정한 공자의 원칙 의 핵심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개혁 모델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광서제가 개혁 법안들을 제정하고 공표함으로써 개혁 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1898년 6 월 16일 광서제는 이곳 인수전에서 캉유웨이를 만나 2시간 가량 비밀 담화를 나누었습니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와의 개혁 논의를 통해서 입헌 군주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근본적 정책’을 공표하는데 광서제의 스승이었던 옹동화(翁同龢)는 이 순 간을 1898년 6월 11일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폐하는 황태후의 법령을 공표하였다. […] 서태후는 청나라가
지금부터 명백한 공표 등의 포괄적인 서양의 방식을 도입해야 한 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서양의 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지
만 우리의 도덕과 철학을 버리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과감하
게 의견 표명을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이 의견을 철회하고
칙령의 초안을 작성했다(장융 2013, 221).
옹동화(翁同龢)의 일기를 보면 서태후의 개혁법안을 광서제가 공 표했다고 작성되어 있는데 그 부분에 의문이 듭니다. 서태후는 양무운 동 당시 개혁에 반대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 태후도 처음부터 광서제의 개혁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서 제는 이화원을 찾아가 서태후에게 변법 상소문을 올렸고 처음에는 서 태후도 그의 개혁을 지지했으나, 이후 개혁의 화두가 서태후를 공격하 면서 지지를 철회하였습니다. 이에 변법파는 서태후를 제거하려 했고, 당시 병권을 장악했던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하며 이 사실을 서 태후에게 알렸습니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3일만에 진압되고 서태후 는 수렴청정을 선포했습니다. 결국 서태후는 개혁 그 자체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변과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개혁운동을 좌 절시킨 것이었습니다.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광서제는 실 권을 상실하게 되고 서태후는 그를 자금성의 중남해 영대에 유폐했습 니다. 1899년 국세의 불안정으로 자금성에 돌아간 서태후는 일 년 후 인 1900년 봄에 다시 이화원으로 돌아왔습니다.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인수전 남쪽에 위치한 옥란당(玉澜堂)은 본전과 두 개의 보조전각 으로 이루어진 삼합원(三合院)형태의 건물입니다. 이곳은 본래 건륭제 가 국사를 처리하던 장소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후에 서태후가 이화원 으로 올 때면 광서제도 함께 데려와 옥란당에 연금했다고 합니다 (Warner, 1973). 선통제 부의(溥儀)의 영어 교사였던 레지날드 존스톤 (Reginald Johnston)에 의하면 광서제가 머물던 곳은 정문 이외의 다른 통 로를 벽돌로 봉쇄해 아무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 기서 흥미로운 점은 서태후가 광서제를 옥란당에서 실제로 감금시킨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은 서태후가 그를 감금시키고 모든 사람과 단절시켰다고 합니다. 하지 만 반대하는 자들은 감금에 관한 이야기가 현정권을 비판하고 중국 백성과 서구 세력에 입헌군주제 도입을 관철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개 혁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급진적 개혁파 와 그들을 지지하는 서구 세력의 글을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이 반대파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감금의 여부와 는 상관없이 광서제가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후 실질적으로 폐위됐다 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인수전 보좌에 서태후가 앉게되 고, 광서제는 구룡보좌와 영원히 고별한 채 임시 좌석에 앉게 되었습 니다. 서태후는 다시 한번 청 황실의 강력한 권력자임을 과시합니다.
황실의 서태후와 광서제의 권력투쟁이 서태후의 승리로 마무리되 어가던 무렵, 중국에서는 민중들의 반외세투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열강 세력들의 중국 이권 침탈이 심해지면서 국내외로 나라가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자급자족체제였던 지역은 항구가 개방되 고 값싼 수입품이 들어오면서 농민들은 많은 경제적 고충을 겪게 되 었습니다. 독일은 중국 내륙에 진출하고자 철도부설권을 얻었고, 이후 철도 건설로 인해 중국인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세력의 확대 및 산둥성 지역의 홍수와 자연재해로 인해 사람들 은 기아의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중국인들은 불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만을 외세에 돌렸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농민들의 비밀결사인 의 화단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서태후의 지지에 힘입어 의화단은 날이 갈수록 더 폭력적으로 변했고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과 외교관을 공격 하며 교회와 외국 공사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은 청조의 조정에게 의화단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지만 서태후는 의화 단을 잘 활용하면 이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1900년 6월, 열강들 에게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왕조의 시초부터 중국은 외국인 방문객들을 친절히 대우하였다.
도광제(道光帝)와 함봉(咸丰) 황제의 통치 하에 그들은 자유로이 무
역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종교를 보급할 수 있는 허가도 받
았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이러한 우리의 인내심과 관
대함을 이용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였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짓밟았으며 왕국의 부를 착취하였다. 우리가 그들에게 해준 모든
양도는 신과 현자들을 모독하고 사람들을 분개하게 하였다. 그리
하여 용감한 애국자들은 예배당을 불태우고 개종자들을 죽였다.
황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의화단과 개종자들이 국가의 아이들로
서 동등할 것을 선언하고 공사 일행들과 개종자들을 보호하는 칙
령을 내렸다. 하지만 어제 대고포대(大沽炮台)를 그들에게 내어달라
고 촉구하는 특사가 파병되었다. 그들은 대고포대를 강제로라도
빼앗아갈 속셈이었다. 이러한 위협은 모든 국제적인 문제와 관련
된 담론에서 그들의 호전적인 성향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눈물을 머금은 채 우리는 전쟁을 선포했다. 자기 보존을 위해 영
원한 불명예를 안고 가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투쟁을 하는 것이
낫다. 직위에 상관없이 모든 관료들도 이 뜻에 마음을 같이 한다.
그들은 공식적인 소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십만 명의 의화
단을 모집하였다. […] 모든 아이들이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창을
가지고 다닌다(Warner 1972, 193).
계속되는 폭력사태에 결국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 러시 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을 조직하여 베이징에 급파하였습 니다. 베이징이 2달 만에 함락되자 1900년 8월 12일 이화원에서 피서 를 즐기던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황급히 자금성으로 향하고 14일 연합군이 전면 공격에 나서자 서안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화원도 약 탈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서태후의 장신구와, 옷, 비단 등 값진 물 건들은 도둑맞고, 경극장은 불타버렸습니다. 결국 서태후는 이홍장과 경친왕 혁광 을 앞세워 열강들과 협상을 할 것을 명령했
(慶親王 奕劻)
습니다. 그리하여 1901년 12월 중국은 열강 11개국과 베이징 의정서 (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됩니다. 11개국은 의정서에서 청나라가 247명의 선교사, 66명의 공사관원, 3만 명의 중국 기독교 신자들을 죽인 대가로 배상금을 연간 4%의 이자로 6,750만 파운드, 즉 45억 냥을 1940년까 지 지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내용상 열강의 중국 통치를 강화시키는 불평등 조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는 망설임 없이 조건을 받아 들였습니다. 일방적인 조약이었기 때문에 서태후가 반대할 수도 없었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지만, 조약에 서태후의 처벌에 관한 내용도 없었고, 광서제의 재위에 관한 내용도 포함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태후는 한시름 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의화단 운동을 일으킨 대가를 누군가는 치러야 했으 므로 서태후는 단군왕 재의(端郡王), 이친왕 부정, 보국공 재란을 파직 하고, 장친왕 재훈, 도찰원좌도어사 영년(英年), 형부상서 조서교와 산 시(山西)지역의 지사 육현(毓贤)을 처형했습니다. 의화단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서태후는 역사가 다음과 같이 새로이 쓰여질 것을 요 구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의화단은 우리의 수도를 장악한 것도 모자라 왕좌까
지 탐하였다. 그 당시 공표된 법령은 사악한 태자와 대신들이 국가
혼란을 틈타 몰래 황제의 도장을 찍어 공표한 것으로 그 내용이 우
리가 원하는 바와 달랐다(Warner 1972, 216).
1901년 7월 수도로 귀환한 서태후는 1898년 광서제가 추진했던 변법자강운동과 비슷한 신정개혁(新政)을 발표하였습니다. 신정개혁은 중앙 업무 기구인 독판정무처(督辦政務處)의 설치를 시작으로 근대적인 개혁방안을 마련하였고, 교육, 경제, 군사 등의 분야에서도 개혁을 진 행하였습니다. 이렇듯 서태후는 다양한 방면에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내외적 역량 부재로 개혁은 또 한번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서태후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주거 구역 이야기
옥란당 뒤쪽에는 서태후의 주거구역인 덕화원과 낙수당이 있습니다. 덕화원(德和園)은 서태후가 경극(京劇)을 관람하기 위해 거의 맨날 찾던 곳으로 중국 4대 경극극장 중 하나입니다. 1891년부터 1895년 동안 서태후는 은화 71만 량을 들여 덕화원을 지었습니다. 서태후는 이곳에 서 광서제와 오페라를 관람하며 중국 예술과 오페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따라서 이 곳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곳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낙수당(乐寿堂)은 원래 건륭황제가 모후를 모시고 곤명호의 절경 을 감상하던 곳이었는데 훗날 서태후는 이곳을 개조하여 생활 공간으 로 사용하였습니다. 낙수당 안에는 옥좌를 중심으로 그 뒤에는 팔자현 병풍이 있었고 그 앞에는 화로와 병 등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옆에 는 낮은 침대가 있었는데 침대 위에는 베개가 놓여져 있었고 침대 아 래에는 등받이가 없는 낮은 의자가 있었습니다(룽얼 2010, 214). 서태후 가 일상 생활을 하던 이 곳에는 많은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화원은 사방이 물과 산으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환경으로 인해 각다귀, 나방, 모기 등의 벌레가 많았습니다. 벌레가 증가하는 여름이 되면 서태후는 벌레를 피하기 위 해 낙수당 침전에 차양을 쳤습니다. 이 차양은 바람이 통하고 햇빛이 들 수 있게 했고, 자유롭게 여닫을 수 있었습니다. 또 낙수당 정전 앞 을 포함해 차양 사면에는 물을 빼는 고랑 시설이 설치되어있었습니다. 여름에 차양을 치고 나면 서태후는 대부분을 차양 안에서 생활했지만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동물을 매우 좋아하여 아침이 되면 낙수당 밖 층계 아래서 비둘기 떼 들을 감상하곤 했다고 합니다(룽얼 2010). 서태후는 지상낙원 같은 이곳 에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예컨대 그녀는 매끼마다 120가지의 요리와 400여 가지의 후식을 즐겼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특히 패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장소에 따라 옷을 바꿔 입었으며 한번 입은 옷은 절대 다시 입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인 외교의 현장, 원림 구역의 이야기
원림 구역은 자연과 조화된 풍경유람 공간이며 만수산과 공명호를 중 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공간은 황족의 휴양, 연회잔치, 예불 등 의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체 수면의 3/4을 차지하는 공명 호(昆明湖)는 중국인들이 손수 파서 만든 인공호수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만수산(万寿山)은 공명호에서 파낸 흙을 쌓아 만들었다 고 하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공명호는 크게 세 부분으 로 나뉘고 매 구역에는 작은 인공섬이 있습니다. 그 외의 원림 구역의 구성은 루(樓), 각(閣), 정(亭), 랑(廊), 석방(石舫), 사(寺), 교(橋)등의 공 간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은 덕화루(德和樓), 옥대교(玉 帶橋), 석방(石舫), 장랑(長廊), 소주가(蘇州街), 십칠공교(十七拱橋)이며 간 략하게 장랑과 석방에 대해 소개를 하겠습니다.
광서 12년에 재건된 장랑(長廊)은 동쪽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 까지 이어지는 복도로 모두 273칸이 있고 총 길이는 무려 728m에 달 합니다. 서태후가 산책을 하기 위해 지어진 장랑에 그려져 있는 그림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은 무려 14,000폭에 달합니다. 장랑의 대들보에는 인물, 산수, 화초, 조류 등 각종 채색화 8천여 폭이 그려져 있고 그 외에도 소제춘효, 평 호추월, 단교잔설 등의 고전 소설과 서태후의 애호에 맞춘 희곡 문화 이야기 등 다양한 소재가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간에 류 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淸遙) 4개 8각 처마로의 정자가 있으며 중국의 옛 정원 중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반면 장랑의 서쪽 호숫가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수상건 축물인 석방(石舫, 스팡)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건륭제가 만든 대리석 배에 서태후가 2층의 목조 건물을 추가적으로 쌓아서 만든 것 으로 달빛을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연회가 열리기도 했습니 다.
날씨가 좋으면 서태후는 공명호에서 연꽃을 가로지르며 배를 타 고 호수를 유람했습니다. 서태후가 한번 움직이면 호위병에서 요리사 까지의 모든 궁인들이 함께 움직여야 했습니다. 선상의 요리사만 20명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인원이 따라다녔는지 짐작이 됩니다. 서태 후가 타는 배는 용주(龍舟)라고 불렸습니다. 용주 가운데에 있는 선실 은 높고 실내가 탁 트여 있었으며, 선실의 덮개는 목재를 유리 기와식 으로 새기고 그 위에 황색 도료를 칠했습니다. 선실 안 양쪽 가장자리 에는 진주조개를 박은 칸막이가 있었고, 용과 봉황이 그려진 휘장이 걸려있었으며, 금 낚시바늘 두 개가 높이 걸려 있었습니다. 선실 한가 운데는 팔자형 병풍이 놓여있었고 병풍 앞에는 옥좌가 있었으며 옥좌 앞에는 불상과 화로 등의 장식품들이 있었습니다. 서태후는 용주에서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곤 했습니다.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연회장소가 아닌, 서태후의 중요한 외교적 거점이기도 하였습니다. 의화단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서양과 적 극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한 서태후는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외교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였습니다.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과 사절단의 부인들을 궁으로 초대하여 차도 대접하고 선물 공세를 하는 등, 이곳 원림 공간은 그러한 만남의 장으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당시 서태후는 주도쿄 대사이자 주파리 대사였던 유경(裕庚)의 딸 인 유덕령 (裕德龄) 과 용령 (容齡, Rong Ling)을 궁으로 불러들여 서양 문 화와 정세를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두 딸은 서태후와 함께 이화원에서 지내면서 통역과 중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유덕령과 용령에게는 친 오 빠인 훈령 (勛齡, Xunling)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 지만 일본에서 취미로 사진을 배웠다고 합니다(Hogge 2011). 어떻게 훈 령 이 서태후에게 소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훈령
(勛齡) (勛
은 서태후에게 사진을 소개하였고, 서태후는 사진 찍는 매력에 푹 齡)
빠지고 맙니다. 서태후는 낙수당에 스튜디오를 세우고 훈령
을
(勛齡) 초대하여 사진을 찍게 했습니다. 현존하는 서태후의 사진들은 이 당시 에 찍은 것들입니다.
그녀가 사진을 찍는 데는 여러 가지 의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사진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진을 통하여 자신의 손상된 이미지를 황실권위, 종교적인 경건함 등 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개선하여 무너진 황실의 명성을 되찾고자 했으 며,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국제적인 지지를 받으려 했던 것으로 추 측됩니다. 따라서 이화원의 원림 공간은 서태후 말년 외교적 노력이 엿보이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8년간 천하를 호령했던 여인 서태후, 우리는 그녀를 어떻
게 평가해야 하는가?
앞서 말한 개혁과 외교관계 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조의 운명은 이미 기울어져있었습니다. 의화단 운동 후 무력하고 민심을 잃어버린 청 제국을 뒤집고 한족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한족의 혁명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저기 반란과 사변이 물 끓듯 일어났습니다. 광서 34년 7월에 중국에는 광서제가 사망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달 스무 하룻날 밤에 큰 별이 서북 편에서 날아와 길응을 거쳐갔 는데 그 소리가 우뢰 같고 꼬리가 수십 발이 되며 빛이 황홀하였다. 그런데 그 별이 마침내 동남 편에 날아가서 떨어졌다(양백화 1988, 259).” 광서제의 몸은 날로 쇠약해져 갔고 그 해 11월 14일 운명하고 말았습 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5일, 청나라를 호명하던 서태후도 74세의 나이로 그녀가 사랑한 이화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48년간 천하를 호령했던 철의 여인 서태후. 파란만장한 삶이었던 만큼 아직도 그녀의 인생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과 연 그녀는 청조를 멸망하게 한 잔혹하고 악랄한 통치자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화려한 삶에 가려진 황실의 외로운 여인이었을까요?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분명 서태후에게서 잔혹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청조가 멸망한 후 서태후의 이야기는 열강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더 잔혹한 여자로 표현이 되었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훌륭한 통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 또는 본인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잔인하게, 때 로는 국익을 뒤로 한 모습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심화되는 열강들의 침략 속에서 청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하는 모습도 엿 볼 수 있었습니다. 서태후의 이러한 모습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정치 가의 모습, 그리고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태후를 다양한 시각으로 재조명해본다면 우리는 과연 그 녀만을 비판할 수 있을까요?
에필로그
하루 종일 밖에 있었던 터라 너무 추웠던 탓에 모두들 재빨리 이화원 을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답사 보고서에 쓸 사진 한 장이라도 더 찍으 려고 했지만 이화원 개관시간이 마감되어 쫓겨나듯이 밖으로 나갔습 니다. 발표를 마치고 차에 올라탄 기분은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어제 밤늦게까지 답사 발표를 준비하며 느꼈던 모든 피곤감과 긴장감, 그리 고 하루 종일 느꼈던 추위가 이 차의 온기와 함께 눈 녹듯 사라져버 렸습니다. 저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밤의 하이라이트인 딤섬 음 식점으로 향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오는 딤섬을 배불리 먹은 뒤 발 마 사지를 받으며 저도 모르게 잠이 솔솔 쏟아졌습니다. ■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함께 보고 함께 생각하자! 이주원: 엄청 추웠던 것이 생각나요! 하지만 꿋꿋하게 발제를 해냈
던 선경 누나. 추운 날씨만 아니었다면 누나가 가고 싶었
던 석방 같은 장소들, 발품 팔면서 갈 수 있었을 텐데……
악조건에서도 성공적으로 서태후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줬
던 ‘불굴의 발표’!
김민걸: 서태후에 대한 무관심 혹은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한 국내
에서 ‘서태후 다시 바라보기’라는 주제로 글이 전개되는
것이 읽는 이의 입장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구역의 성격에
따라 공간에서 드러나는 서태후의 각기 다른 모습을 나타
낸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오승희: 여름 궁전인 이화원을 겨울에 가서 그런지 건물도 나무도
춥고 황량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 바람에 맞선
선경이의 열정적인 발표 덕분에, 서태후에 대한 기존의 선
입관을 넘어서 정치인으로서 여인으로서의 서태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유정: ‘여름 궁전(Summer Palace)’답게 이화원은 다른 어떤 장소보
다 추웠습니다. 12월이 아닌 한여름에 방문을 했더라면 진
정한 여름 궁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까 상상해 봅니
다. 자금성의 웅장함은 아니지만, 이화원도 그 나름의 위 압감을 지니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만수산의 높이는 호수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였고, 긴 회랑을 따라 호수 너머로 피어
나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서태후는 과연 이 길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산책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에 적당한 거리의 회랑을 따라 걸으며 서태후에게
도 그 당시 그런 선택들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
던 것은 아니었는지, 결과론적으로 그녀를 비난만 할 수 있
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라 더
일찍 해가 져서 그런지 왠지 모를 을씨년스러움과 호수를
바라보며 궁벽에 기대어 악기를 연주하고 있던 한 악공의
노래자락이 어울려져서 비극적이었던 청나라 말기의 이야
기를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 아픔을 어떻게 극
복하고 어떤 ‘중국의 꿈’을 펼쳐나갈지 앞으로도 계속 생각
해 볼 문제라는 여운을 남기게 하였습니다.
신보람: 서태후가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정치 방식이라든가 정
당성(legitimacy) 구축 방식이 전통적인 그 것과는 근본적으
로 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 예외성이 또 우연찮게도 청의
몰락기와 맞닿아 그녀 스스로도 ‘여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 같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여자를 탓하는 게 한 두 번이 아니긴 하지만) 어쩌면 중심에서 벗
어난 공무가 아닌 휴양을 위한 장소였던 이화원이란 공간
자체가 중국의 여자 지도자로서 서태후가 당면했던 한계 5. 서태후가 살아 숨쉬는 이 곳: 이화원
와 현대에 와서는 그녀에 대한 평가의 한계를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이재성: 원명원을 돌 때, 계속 혼잣말로 발제 연습을 하던 선경이
누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히
죽히죽 웃으면서 강 건너 불구경의 심정으로 선경이 누나
를 관찰했죠. 선경이 누나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한강
고수부지나 테마파크 정도로만 생각하고 대충 보았을 원
명원인데 선경이 누나의 설명 덕분에 이화원과 관련된 서
태후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룽얼. 주수련 역. 2010. 《서태후와 궁녀들》. 서울: 글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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