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천년의 수도 베이징에서 새천년을 그리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자금성(紫禁城) · 오승희 · 이화여자대학교
이것만은 알고 가자!
◆ 공식명칭: 1925 년부터 고궁박물관 ◆ 개 관: 화요일~일요일(월요일 휴무)
◆ 시 간: 4 월~10 월 8:30~17:00
11 월~3 월 8:30~16:30(15:30 부터 입장금지) ◆ 입 장 료: 1 인당 40 위안(진보관과 종표관 별도판매 각 10 위안) 사랑방 4 기 베이징 답사 둘째 날 첫 번째 일정은 자금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첫째 날 오후 일정으로 계획했지만, 입장 시간을 고려해볼 때 충분히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다음 날 이른 아침 일정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자금성은 오전 8 시 반부터 입장이 시작되고, 3 시 반에 입장을 제한하기 때문에 오전 일찍 방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날 아침, 베이징 하늘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뿌연 먼지로 뒤덮여있었습니다. 아침 산책하듯이 자금성을 걸어볼까 하던 기대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넓은 자금성을 걷느라 다리가 아플 걱정보다 뿌연 공기 때문에 목이 아플 걱정이 앞섰습니다.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사진 속의 붉은 색의 천안문과 마오쩌둥 사진, 그리고 높이 솟은 오성홍기를 감싸고 있는 뿌연 하늘이 2014 년 현재 중국의 모습입니다. 중국의 고궁인 자금성은 베이징 중심에 위치한 베이징의 상징입니다. 자금성을 다녀온 한국인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며 이 넓은 공간을 거닐었을까요?
4 년 전 제가 방문했을 때 그랬듯이, 많은 한국 사람들은 한번쯤 서울의 경복궁과 견주어보게 됩니다. 크기 면에서는 자금성이 경복궁을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자금성은 1km 가 채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공식 면적으로 볼 때, 자금성이 72 만 평방미터이고 경복궁이 약 43 만 평방미터로, 2 배 이상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높은 성벽과 큰 건물 규모 그리고 구석구석 미로와 같은 공간들 때문에 더욱 넓어 보인다고 합니다(진병팔 2002). 또한 각각의 왕궁이 가진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그 우열을 가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자금성을 중국만의 것으로 그리고 경복궁을 한국만 의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자금성을 단순히 중국 황제들만이 살았던 곳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공간은 그들만의 장소이며 그들만의 이야기 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공간을 한중관계 속에서 바라보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건물들이 보이고, 이야기들이 들리게 됩니다. 이 번 답사 보고서는 자금성 안에서 실제로 살았던 조선인들을 찾아보며, 약 600 년 전 조선과 명나라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자금성 둘러보기
자금성(紫禁城)은 명과 청 왕조의 궁궐입니다. 자금성은 ‘자색의 금지된 성’이라는 뜻으로, 중국인의 우주관을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궁의 자색과,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문명인 ‘the Forbidden City’는 금지되었다는 뜻을 보다 강조한 명칭입니다. 중국인들은 ‘구궁'(故宫, 고궁)으로 부르는데, 1925 년 이후 중국에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고궁박물원입니다.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자금성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면서 건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406 년부터 1420 년에 이르기까지 14 년간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100 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800 여개의 건물에 약 9 천여 개의 방을 가진, 높이 10m 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궁궐이 만들어졌습니다. 명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500 여 년 간 24 명의 황제가 거처했던 곳입니다. 남북으로 961m, 동서로 753m 나 되는 이 넓은 자금성을 어떻게 다 둘러볼까요?
참고로, 자금성 공식 홈페이지는 시간별로 자금성을 둘러보는 코 스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건물만 살펴보는 데에는 두 시간 정도 소요되며, 반나절 코스, 하루 코스가 있습니다. 건물 하나하나 자 세히 살펴보는 데에는 하루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루 코스를 살펴보면, 오문▶무영전▶문화전▶태화문▶태화전▶중화 전▶보화전▶건청궁▶교태전▶곤녕궁▶양심전▶서 6 궁▶어화원▶동 6 궁▶봉 선전▶영수궁▶신무문 의 17 곳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오 문▶태화문▶태화전▶중화전▶보화전▶건청궁▶교태전▶곤녕궁▶어화원▶서 6 궁 혹은 동 6 궁 중 일부▶신무문으로 나오는 것이 최단 코스입니다 (고궁박물원 2014). 우리는 오늘 원명원과 이화원까지 방문할 계획이기 때문에 최단 코스로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자금성은 얼핏 보면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대 칭적인 구조를 기반으로 한 ‘3-6-9 법칙’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자금성 전체는 크게 정치공간과 생활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정 치공간은 공식적인 업무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외조(外朝)’라고도 불립 니다. 생활공간은 왕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내정(内廷)’으로 불립니다. 정치공간의 핵심 건물은 삼대전(三大殿)으로 불리는 세 개의 대전, 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있습니다. 생활공간에도 세 개의 핵심 건물이 있는데, 후삼궁(后三宫)으로 불리는 건청궁교태전곤녕궁이 있 습니다. 건청문을 지나가면서 정치공간과 생활공간의 전환이 이루어진 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각각 세 곳의 건물이 쌍을 이루어 정치공간과 생활공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대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화전과 무영전이 있습니다. 후삼궁 뒤에는 어화원이 있고, 후삼궁 양측으로 동 6 궁과 서 6 궁이 있는데, 후궁들의 거주, 휴식 지역입니다. 동 6 궁 동쪽으로는 천궁보전(天穹宝 殿) 등 불교 건축, 서 6 궁 서쪽은 중정전 등 불교 건축이 있습니다. 외 동로(外东路) 남부에는 황자가 거주하는 힐방전(撷芳殿) 혹은 남삼소(南 三所)가 있으며, 북부에는 건륭황제가 세운 태상황궁전인 영수궁(宁寿 宫)이 있습니다. 외서로(外西路) 남부에는 황태후가 거주하는 자녕궁(慈 宁宫), 수건궁(寿康宫)이, 북부에는 수안궁(寿安宫) 외에 영화전(英华殿) 등의 불상 건축이 있습니다(고궁박물원 2014).
전삼각과 후삼궁을 일직선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정문인 오문이 자리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신무문이 있습니다. 오문을 들어서면 앞에 내금수교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동화문, 서쪽으로는 서화문이 지키고 있습니다.
자금성을 보다 자세히 구역화하면, 대조전례구(大朝典礼区)-궁침생활 구(宫寝生活区)-태상황궁전구(太上皇宫殿区)-태자궁전구(太子宫殿区)-태후태 비양노구(太后太妃养老区)-황자생활구(皇子生活区)-어원과묘우구(御苑与庙宇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区)-부고와부서구(府库与衙署区)-성지호위구(城池侍卫区)로 세분화하여 살 펴볼 수 있습니다(고궁박물원 2014).
정치공간: 삼대전(태화전-중화전-보화전)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을 지나면 정치공간이 펼쳐집니다. 자금성에는 나무가 없는데, 이는 방어를 위한 목적도 있지만, 건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태화문을 지나 정 중앙에 서면 삼대전의 첫 번째 건물인 태화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황제 즉위, 각종 칙령반포, 정치, 외교 행사를 여는 집무공간입니다. 태화전 앞에는 금으로 된 용 1 만 3844 마리가 황제의 위엄을 지키고 있습니다(진병팔 2002).
태화전은 자금성에서 가장 넓은 곳으로 대부분의 공식 행사가 이 곳에서 열렸습니다. 공식 행사 때 황제가 등장하면 일제히 삼궤구고두
를 올렸다고 합니다. 태화전 추녀에는 잡상이 자리하고 있 (三跪九叩頭) 는데, 맨 앞에 봉황을 탄 선인이 있고, 그 뒤로 용, 봉황, 사자, 천마, 해마, 산예, 압어, 해치, 투우, 행십이, 그리고 맨 뒤에 용머리가 있습 니다. 잡상의 개수가 건물의 중요도를 가리키는데 태화전 추녀에 가장 많은 10 마리의 잡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진병팔 2002).
500 년에 걸친 오랜 시간 동안 이 넓은 공간에서 벌어졌던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자금성이 건설된 명나라 초기 에 있었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자금성은 영락제의 베 이징 천도 결정과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한 만큼 영락제의 삶 속에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영락제는 명의 제 3 대 왕으로 1 대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2 대 왕인 조카 건문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정난의 변’을 일으켰습니다.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우선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겨 자금성을 세우게 했고, 다음으로는 정화의 원정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으로 불리는 세 대전은 자금성 완공 당시의 이름과는 다릅니다. 자금성 초기 이들의 명칭은 각각 봉천전, 화개전, 근신전이었습니다. 1941 년(영락 19 년) 정월 초에 완성된 봉천전, 화개전, 근신전은 약 3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4 월 초 발생한 대 화재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영락제는 문무군신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조서를 발표했습니다.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봉천 등 3 대 궁전을 화재로 잃어 내 마음이 심히 두렵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정말 잘못한 곳이 있다면 모두들 필히
속마음을 털어놓게. 나에게 잘못을 바로잡고 하늘의 뜻에 따를
기회를 주게나(CCTV 2013).
조서가 하달되자 관원들은 격렬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기회로 영락제가 업적 세우기만을 중시한다는 점과 베이징 천도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두려움과 격노의 모순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영락제는 대신들이 오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서로 변론하게 했으며 그를 비난한 한 관원을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CCTV 2013).
영락제에 대한 다양한 평가 중, 《대명실록》에 기록된 환관 해수 의 말을 빌리면, 영락제는 겉으로는 엄격하지만 속으로는 자비롭고 관 대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늠름하고 용맹하였고 교묘한 병법을 사용 할 줄 알았으며, 사람의 재주를 이끌어내는 법을 알았던 유능한 황제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역사 스페셜 2014). 영락제 통치기, 우환도 있었고 죽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명나라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주변으로 부터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영락제는 유능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생활공간: 후삼전(건청궁-교태전-곤녕궁) 생활공간은 정치공간에 비해 면적은 좁지만 더 많은 건물들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후삼궁인 건청궁과 교태전, 곤녕궁은 황제의 내밀한 사적 공간입니다. 곤녕궁 좌우에 동육궁과 서육궁, 후궁 거처궁이 있습니다. 서육궁에는 저수궁과 익곤궁의 이름을 가진 두 개의 궁이 있는데 이 곳은 서태후가 생활하였던 곳입니다. 그 외에도 장춘궁, 태극전, 영수궁, 함복궁이 있습니다.
영락제는 조선인에 유독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공녀와 환관을 요구했는데, 특히 미모가 뛰어나고 가문이 좋은 집안의 처녀를 요구하였는데, 환관의 경우 조선인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을 맡겨서 부릴 만하다”며 대략 300-400 명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정구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선 2002). 공녀와 환관을 중국에 보내는 것은 조공제도의 일환으로 여 겨져 왔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북위에 미모의 여인들을 보냈다는 이 야기가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고, 기록상으로는 고려시대 170 명, 조선시대 146 명 정도가 중국에 보내진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KOCCA 2014). 고려시대에도 원 순제 때 고려에서 공녀로 보내졌다 황 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기황후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되 면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 위해 좋은 가문의 여성들을 명나라 황제의 자녀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이 태종의 아들과 혼사를 제안하자, 태종은 이를 우회적으로 회피하고자, 아들 대신 조선의 여인들을 명나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태종이 공녀를 대비하여 혼가를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선왕조실록 2005).
영락제 집권기에 가장 많은 공녀와 환관이 보내졌습니다. 공녀는 세 번에 걸쳐 선발되었습니다. 1 차 선발은 영락제 6 년인 1408 년, 2 차 선발은 영락제 7 년인 1409 년에 공녀를 선발했다 무산된 후 1410 년에 헌납되었고, 3 차 선발은 영락 15 년인 1417 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환관의 경우 매우 빈번하게 요구되었습니다(정구선 2002).
영락제는 1408 년 4 월 16 일, 환관 황옌을 한양으로 파견해 조선 에서 후궁을 선발하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11 월에는 권씨, 윤씨, 이씨, 여씨, 최씨가 선발되었습니다. 1409 년 초 베이징에 도착하였는데, 그 중에서 권씨가 현비(贤妃)로 책봉되었고, 윤씨는 순비(顺妃), 이씨는 소 의(昭仪), 여씨는 첩여(婕妤), 최씨는 미인(美人)으로 각각 책봉되었습니 다.
1409 년 영락제 7 년에 두 번째 후궁 선발이 이루어졌습니다. 황 옌은 “지난해 내가 여기에 왔을 때 모든 여자가 살찌고 피부가 거칠 며 키가 작아 모두 보기에 좋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조 선에서는 공녀로 착출되지 않기 위해서 갖은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미모를 중시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외모상에 문제가 있게 만들었습니 다.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일부러 흉을 지게 만들고, 심지어 신체 일부 를 망가뜨리기도 했습니다. 처녀를 요구하였기에 딸 가진 부모들은 가 능한 한 빨리 시집 보내고자 하였는데, 심지어 갓난아이마저도 출가시 켰다고 합니다(정구선 2002).
1417 년 영락 15 년에 세 번째 후궁 선발이 이루어져 한 씨와 황 씨가 명나라로 갔습니다. 8 월 6 일 출발한 이들 일행은 10 월 8 일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영락제는 이들 중에 한 씨의 딸을 특히 아껴 한 씨 집안에 막대한 규모의 재물을 계속해서 하사했습니다.
명나라 초기에 보내진 환관 중에는 공녀 선발을 위해 명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오기도 하였습니다. 황제의 칙서를 가져온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조선의 왕은 직접 영접하였고,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예를 갖추어 대하였으며 마지막까지 환송하였습니다(정구선 2002). 조선에서 명나라로 갔던 조선인들이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할 때, 그들과 조선 왕의 관계에서 조선과 명나라 관계의 단편적인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명나라로 헌납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인, 그리고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조선인, 그리고 또 다른 조선인을 데리고 가는 역할을 담당한 조선인은 조선과 명을 오가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표1] 조선시대 공녀와 환관 기록
회차 시대 왕조 한국 왕조 공녀 (명) 환관 왕조별 합계 총계
태조
1 태조 3 년(1394) 5 월 5 5 5
홍무제
2 태종 3 년(1403) 11 월 33 192 33
3 태종 4 년(1404) 6 월 20 20
4 태종 5 년(1405) 7 월 8 8
5 태종 7 년(1407) 10 월 29 29
21
6 태종 8 년(1408) 11 년 12 33
성조 (처녀 5,여종 16)
영락제 5
7 태종 10(1410) 10 월 2 7
(처녀 1, 여종 4)
14
8 태종 17 년(1417) 8 월 4 18
(처녀 2, 여종 12)
9 세종 1 년(1419) 2 월 20 20
명
10 세종 5 년(1423) 9 월 24 24
33
11 세종 9 년(1427) 7 월 (처녀 7, 여종 16, 1 0 96 43
집찬 10)
12 선종 세종 10 년(1428) 10 월 1 (처녀 1) 6 7
선덕제 20
13 세종 11 년(1429) 7 월 6 26
(집찬 12, 가무 8)
20
14 세종 15 년(1433) 11 월 20
(집찬 2)
헌종
15 성종 14 년(1483) 10 월 19 19 19
성화제
태종 10
16 인조 16 년(1638) 7 월 10 10
숭정제 (처녀 10)
22
세조
17 청 효종 1 년(1650) 4 월 (처녀 17, 유모 1, 22 22
순치제
시녀 1, 여종 3)
합계 146 198 344 344 * 정구선 2002, pp. 51, 56, 122 참조 재구성.
** 주: 기록상 확인 가능한 수치만 표시한 것으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내졌을 것입니다.
자금성에서 생활했던 조선인들의 삶
조선에서 명나라로 건너간 공녀들과 환관들의 생활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영락제 때 중국으로 간 세 명의 공녀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1) 권 씨의 이야기: 권현비 독살사건
1 차 선발 때 가장 이목을 끌었던 권현비는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권씨는 현비(贤妃)로 책봉되어 황후의 직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명사-후궁전》에도 권씨의 자태가 깨끗하고 불순물이 없는 쌀처럼 아름다워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간지 2 년이 채 못 된 1410 년 10 월 몽고 정벌에 나섰던 영락제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추후 이것이 권씨를 시기한 같은 조선 공녀 여미인에 의한 독살이었다고 알려지면서 분노한 영락제가 여미인을 처형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미인은 누명을 쓴 것이었습니다. 중국인 궁녀였던 여씨가 여미인과의 관계에 불만을 품고 꾸민 일이었습니다(조선왕조실록 2005). 이를 알게 된 영락제는 여씨와 이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였습니다.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2) 여씨의 이야기: 어여지난
조선으로 갔던 대부분의 공녀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어여지난(魚呂之亂)입니다. 한씨와 최씨를 제외한 공녀들이 연루 된 어여지난은 권현비 독살사건에 관계된 여미인에서 시작됩니다.
상인
의 딸 여씨
가 황제의 궁중에 들어와 본국의 여씨
(商人)
(呂氏)
(呂
와 동성이라 하여 좋게 지내려고 하였으나, 여씨가 들어주지 아니
氏)
하므로, 상인의 딸 여씨가 감정을 품고, 권비
가 졸
하게 되
(權妃)
(卒)
자, 여씨가 독약을 차에 타서 주었다고 무고하였다. 황제가 성을 내
어 여씨와 궁인 환관 수백여 명을 죽였다. 그 뒤 상인의 딸 여씨가
궁인 어씨
와 함께 환자
와 간통하였는데, 황제가 알면서도
(魚氏)
(宦者)
두 사람을 총애하는 정리로 발설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스스로 두려워하여 목을 매어 죽었다. 황제가 성이 나서 사건이 상
인의 딸 여씨에게서 났다 하고, 여씨의 시비
를 국문하니, 다
(侍婢)
무복
하여 시역
을 행하고자 하였다 하므로, 그 일에 연좌
(誣服)
(弑逆)
(連坐) 된 자가 2 천 8 백 인인데, 모두 친히 나서서 죽였다. 어떤 이
는 황제의 면전에서 욕하기를, “자기의 양기가 쇠하여 젊은 내시와
간통한 것인데, 누구를 허물하느냐.”고까지 하였다. 뒤에 황제가 화
공을 시켜 여씨와 젊은 환관과 서로 포옹하고 있는 형상을 그려서
후세에 보이려고 하였으나, 어씨
를 생각하여 그러지 못하고 수
(魚氏)
릉
곁에 묻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파내어 버렸다. 이 난이
(壽陵)
처음 일어날 때, 본국의 임씨 (任氏)·정씨
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鄭氏) 황씨 (黃氏)·이씨
는 국문을 받아 참형을 당하였다. 황씨는 다른
(李氏)
사람을 많이 끌어넣었으나, 이 씨는 말하기를, “죽기는 마찬가지라,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넣을까. 나 혼자 죽겠다.” 하면서, 끝까지 한
사람도 무고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이에 본국의 여러 여자가 모두
죽었는데, 홀로 최 씨
는 일찍이 남경에 있었다. 황제가 남경에
(崔氏)
있는 궁녀를 부를 때, 최씨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난이 일어나 궁인
을 거의 다 죽인 뒤에 올라왔으므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한씨
(韓
는 난이 일어났을 때 빈 방에 가두어 두고 여러 날 동안 음식도
氏)
주지 아니하였는데, 문을 지키던 환자가 불쌍히 여겨 때때로 먹을
것을 문안에 넣어 주었으므로 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몸종은 모
두 잡혀서 죽고, 유모 김흑
도 옥에 들어갔는데, 사건이 끝난
(金黑)
뒤 특사되었다(조선왕조실록 2005).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니, 영락제를 향한 두려움과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봉천전, 화개전, 근신전의 화재가 영락제의 행동에 대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황제가 왕씨
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왕
(王氏)
씨가 죽게 되자, 황제가 크게 슬퍼하고 상심하여, 그 후의 처사가 모
두 빗나가, 형을 집행함이 참혹하였다. 어 (魚)·여
의 난을 한참 처
(呂)
리할 때, 벼락이 봉천 (奉天)·화개 (華蓋)·근신
세 전
에 떨어져
(謹身)
(殿)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모두 타버렸는데,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기를, “황제가 반드시 천변을
두려워하여 주륙 (誅戮) 을 그치리라.” (조선왕조실록 2005).
그런데 대부분의 조선 공녀와 환관이 죽음에 이른 이 사건은 조선에 바로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근일 어 (魚)·여
의 난은 옛날에도 없던 큰일이다. 조선국은 임금이
(呂)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하고, 또 옛 서적에 있는 말인데, 처음에 불
교가 여러 나라에 퍼질 때 조선이 거의 중화
가 되려고 하였으
(中華)
나, 나라가 작기 때문에 중화가 되지 못하였으며, 또 요동 이동이 옛
날에 조선에 속하였는데, 이제 만일 요동을 얻는다면 중국도 항거하
지 못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이러한 난을 그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다(조선왕조실록 2005).
조선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여지난으로 인한 중국 황제의 자존심과 명예의 실추가 조선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 같습니다. (3) 한씨의 이야기: 영락제의 사망과 순장
앞서 두 가지 사건을 피해 살아남았던 두 명의 공녀도 죽음을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1424 년 9 월 영락제가 사망하자 조선 공녀 강혜장숙여비 한씨를 포함한 비빈 30 여명이 순장을 당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씨의 유모였던 김흑이 조선으로 돌아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음식이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
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
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되었다. 한씨가 죽을 때 김흑
에게 이르기를, “낭
아 나는 간
(金黑)
(娘)
다. 낭아 나는 간다.”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자
가 걸상을 빼내므로 최씨와 함께 죽었다(조선왕조실록 2005).
한씨가 중국에 간 것이 15 세 혹은 16 세였으며, 순장을 당했을 때가 22 세 혹은 23 세인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한씨의 막내 동생인 공덕부인 한씨 역시 선덕제 사망 시 순장의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언니도 순장되었는데 차마 동생까지 순장될 수는 없다 하여 제외되었고, 그녀는 이 자금성에서 70 대 후반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순장제도는 1464 년 영종이 순장을 금할 것을 유조로 남기면서 종료되었습니다(정구선 2002).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자금성을 나가며: 자금성의 빛과 그림자
이번 답사에서는 자금성 속에 숨겨져 있던 영락제와 조선인들의 삶을 재현해보았습니다. 자금성의 오문을 들어서서 정치공간에만 주목했던 이전과는 분명 다른 느낌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금성은 청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황제의 삶만이 주목되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명나라 초기의 영락제와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살펴보면, 빛나던 이 드넓은 공간 속에 숨겨져 있던 두려움과 슬픔, 압박감 등이 발견됩니다. 생활공간 구석구석에서 일어났을 법한 소소한 일상생활에서부터 금지된 성 안에서의 두려움까지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상상해봅니다. 베이징 중심에서 한중관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
함께 보고 함께 생각하자! Q. 자금성에 곳곳에서 발견되는 3, 6, 9 숫자와 붉은 색과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중국인은 오방정색이라고 하여 적
색, 청색, 황색, 백색, 흑색을 하늘과 땅 그리고 살아가는 공간
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요한 색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자
줏빛 금지된 성이라는 뜻을 가진 자금성은 왜 ‘자주색’이 강조
되었을까요?
A. 자금성은 당시 중국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하여 설계되고
지어졌습니다. 대부분의 건물이 지붕에는 황색을, 벽은 적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색과 황색이
자금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줏빛의 금지된 성일까요?
중국인들은 우주가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
에서도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궁’이 중심이라고 보았습니다(진병
팔 2002).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천자가 살고 있는 성이 바로
자미성의 자색을 이어받은 자금성인 것입니다. 홍색과 남색이
혼합된 자주색은 홍색을 뛰어넘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가장 높
은 지위를 가진 존귀함을 드러내는 권력의 색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황런다 2013). 자주색은 중국인의 천하관념을 반영한 색으로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재미있는 것은, 자금성의 영문명인 Forbidden City 는 자금성의
자색의 뜻보다는 금지되었다는 의미가 강조된 명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금성이 가진 우주관과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금지의 의미, 여기에 쉽게 나올 수 없었다는 금지의
의미까지 더해지면 이 공간에 살았던 보다 많은 사람들의
생활상이 복합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자금성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그늘지고 어둡고, 쓸쓸한 면모가 이번 발제에서
느껴지셨나요? 자금성을 부르는 다양한 명칭만큼 다양한
의미를 담아 부를 수 있습니다.
이주원: 자금성 답사할 때, 궁금한 게 있어 물어보면 다 알려줬던
승희 누나. 자금성의 정치공간에서 생존과 권력을 두고
경쟁하던 조선의 가녀린 공녀들. 실제로 공부하는 것들,
사대라든가 현실주의라는 것들이 이면의 이러한 이야기들을
알고 나니 더 그 빛이 발하는 것 같습니다.
김민걸: ‘중국역사 속의 조선 찾기’라는 주제 하에 개괄적인 설명,
공간의 성격에 따른 분류, 본문과 사진의 적절한 배치
덕분에 읽는 이의 입장에서 깔끔했습니다. 조선인 공녀의
삶에 깃들었을 애환에 주목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유정: 베이징의 아침 햇살도 가릴 만큼의 짙은 대기오염 물질들은
중국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 환경문제에 대해서 앞으로
어떠한 대응을 하는지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먼지들도
자금성의 위엄을 모두 다 가리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어와
만주어가 병기된 현판들이 인상적인 자금성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상징들로 채워진 공간입니다. 수많은 건물들이
각각의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고, 계산된 위치와 각도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태화전 앞의 나무 한 그루 없는
드넓은 공간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주인공이 북방민족과 마지막 대결을 하고 황제를 구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이 공간에서 조선의 여인들을 추적해 보는
것은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김선경: 승희 언니가 들려주는 자금성 궁녀이야기 정말 재미있었고
자금성의 정치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일상의 일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신보람: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자금성에 숨겨진 조선
여인들의 비극이 꼭 한편의 궁중 드라마를 보는 듯
했습니다. 조선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공녀로 끌려온
여인들이 많았을 텐데, 침울해 지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중국의 궁중 문화가 이렇게 만들어진 ‘제국의 다문화
가족’에 어떻게 영향을 받았을지 궁금해졌습니다.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이재성: 자금성에 살았던 조선의 여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승희 누나! 왠지 그 이야기가 전래동화처럼 들
려서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자금성에서의 정치로 인한 조선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국제정치라는
것이 한 개개인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승희 누나가 자금성이 경
복궁의 2 배가 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을 때는 제 예상보다
규모 차이가 적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참고문헌 박영규. 2009. 《환관과 궁녀》.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베이징 고궁박물원 공식 홈페이지.
http://www.dpm.org.cn/shtml/1/@/9057.html (검색일: 2014. 12. 10). 역사 스페셜. 2014. “역사를 만든 사람들 - 자금성.” 12부
정구선. 2002. 《중국으로 끌려간 우리 여인들의 역사: 공녀》. 서울: 국
학자료원.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10월 17일: 중국에 뽑혀간 한 씨 등이 대행
황제에게 순사함을 사신이 말하다.”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10017_002 (검색일: 2014. 11. 30). ──────. “세종 7년 4월 29일: 호조 참판 봉여를 보내어 부녀자를
돌려보낸 것에 대해 인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4029_004 (검색일: 2014. 11. 30). ──────. “세종 17년 4월 26일: 사신 이충 등이 처녀 종비창가비
집찬비를 거느리고 오다.”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4026_002 (검색일: 2014. 11. 30). ──────. “세종 17년 4월 26일: 처녀 종비 김흑이 태후와의 일을
회고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4026_005
(검색일: 2014. 11. 30). 국사편찬위원회.
──────. “세종 17년 4월 28일: 승문원 제조 황희 등에게 사신의
일을 의논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4028_001 3. 자금성 속 숨은 조선 찾기: 자금성
(검색일: 2014. 11. 30). 국사편찬위원회.
──────. “세종 17년 5월 14일: 한 씨의 유모 김흑 등에게
음식을 먹여 보내다.”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5014_004 (검색일: 2014. 11. 30). ──────. “태종 14년 9월 19일: 원민생이 경사에서 돌아와 권비
살인 사건에 대한 황제의 지시문을 전하다.”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409019_001 (검색일: 2014. 11. 30). 진병팔. 2002. 《자금성을 걸으며 중국을 본다》. 서울: 청년정신.
질 베갱, 도미니크 모렐. 1999. 《자금성: 금지된 도시》. 김주경 역.
서울: 시공사.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문화콘텐츠닷컴 공식 홈페이지.
http://culturecontent.kr/main.do (검색일: 2014. 12. 10). 황런다. 2013. 《중국의 색》. 조성웅 역. 서울: 스튜디오 카멜.
CCTV. 2013. “고궁.” http://kr.cntv.cn/20130910/103154.shtml (검색일:
2014. 12. 10).
姜顺源. 1997. “明清宫廷朝鲜 ‘采女’ 研究.” <故宫博物院院刊>
97년 4권: 79-89.
장
영광과 비극의 년을 노래하다
_원명원(圆明园)
김유정
서울대학교 이것만은 알고 가자
◆ 위 치 北京市 海淀区 清華西路 号 ◆ 개관시간 동절기는 까지
◆ 휴 무 연중무휴
◆ 요 금 전체 관람표 元 전체모형실 입장포함 입장표 元 서양루 미포함
전체모형관람실 元, 관람차 元(원명원 내 별도 매표소에서 구매, 이동거리에 따라
요금이 상이핛 수 있으며, 장춘원 남쪽 경계에서부터 서양루 구역까지는 1 인당 元) ◆가는 방법 지하철 호선 우다커우 五道口 역 하차 후 번 버스 위안밍위안 圓明園 하차 여행 혹은 답사에서 가장 중요핚 준비물은 튺튺핚 다리 와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상상력 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금성을 나와 차로 여 붂을 달려 향핚 원명원은 이 두 가지 준비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핚 장소입니다 답사 둘째 날을 장식핚 자금성과 원명원 그리고 이화원을 관통하는 핚 가지 키워드는 광홗함 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규모의 광대함으로 여행객든을 압도하는 세 장소를 차귺차귺 둘러보기 위해서는 상당핚 체력이 요구됩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앆 이미 원명원의 크기를 읶지핚 우리든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젅심식사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후 산더미 같은 빙수까지 후식으로 앉뜰히 챙겨먹고 본격적으로 원명원 답사에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원명원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앞서 광홗함 뿐맊 아니라 영광과 비극이 공졲하는 장소 라는 젅에서 도 둘째 날 읷정의 세 장소의 이야기가 관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세기 말 서양의 귺대 국제정치질서와 동아시아의 젂통 첚하질서가 본 격적으로 충돈하는 과정에서 결국 첚하의 중심이었던 청나라가 패배 하게 되고 그 속에서 이 세 장소의 화려함도 비극으로 젂홖되는 역사 의 흐름을 거치게 됩니다 특히나 원명원은 지금의 모습이 보여주고 있듯이 중국 사람든이 스스로 국치 國恥 의 상짓이라고 여길 맊큼 세기 말 젂홖기의 처젃핚 아픔을 고스띾히 갂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두 차렺의 큰 화재 첛저핚 파괴와 약탃의 수난을 거치면서 화려했던 옛 모습을 잃고 맊 원명원이 우리에게 든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 엇읶지에 귀를 기욳여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이야기핚 것 처럼 튺튺핚 다리로 걸어 다니며 끊임없이 상상해 보는 작업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장소와 달리 원명원과의 맊남은 그 본래의 온젂핚 모습이 아니라 파괴와 약탃의 혂장을 고스띾히 담고 있는 폐 허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숚히 무너짂 건물맊을 볼 것이 아니라 건축 당시의 모습과 파괴될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함께 교차시켜 상상해 보지 안고서는 원명원의 이야기를 충붂히 음미 하기 어렵습니다
녂은 원명원이 제 차 아편젂쟁을 거치면서 파괴된 지 주녂이 되는 해였습니다 녂 강희제가 넷째 아든읶 윢짂 胤禛 후읷 의 옹정제 에게 하사핚 별장으로 춗발핚 원명원은 녂 영국∙프랑스 연합굮에 의해서 불타기까지 약 녂 동앆 청나라 황제가 녂 중 상당핚 시갂을 보내면서 정무를 보기도 핚 황실 정원이자 궁정의 읷 부였습니다 여러 청대 황제든의 손길을 거치면서 더욱 화려핚 모습을 갖추게 된 원명원은 원림 중의 원림 으로 평가 받아 왔습니다 그러 나 핚편으로는 온젂핚 형태로 보졲된 시갂맊큼이나 파괴된 모습으로 졲재해 온 원명원은 중국 역사의 다양핚 모습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최귺에는 약탃된 원명원의 문화재를 홖수하려는 시도를 비롯해 중국 내에서 파괴된 원명원의 복원여부에 관핚 논쟁이 젂개되고 있을 맊큼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린 유적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공갂입니 다
여기에서 원명원 은 원명원과 기춖원 綺春園 장춖원 長春園 을 포함핚 원명
원을 지칭합니다 원명원은 강희제부터 시작하여 건륭제에 이르는 약 여 녂 동앆 하나의 원림에서 두 개의 원림이 더해지는 형태로 발젂해 왔 으며 혂장에서도 앉 수 있듯이 상당히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풍경구역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읶지를 염두에 두고 둘러보는 것이 좋으며, 이번 답사에서 집중해 본 서양루 풍경구역은 장춖원 북쪽 지 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자세핚 사항은 아래 사짂의 원명원 관광지도 를 참고해 주십시오.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우리는 이번 답사에서 특히 서양루 유적구역 西洋楼遗址区 에 주목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아래 사짂의 원명원 관광지도 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원명원을 거닐면서 자금성과 이화원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짂 황실 원림으로서의 원명원의 옛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남문 매표소 옆에 있던 관광지도로 지도에 표시된 붉은 선이 답사 이동경로임.
기춖원 绮春园 가장 아래에 있는 남문을 통해 입장핚 우리는 길 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장춖원 长春园 과 기춖원이 맊나는 곳에 서 코끼리 열차 라고 우리가 부른 관람차 를 타고 직선으로 쭉 뻗은 대로 를 씽씽 달려 장춖원 가장 북쪽의 서양루 구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지도상에서도 앉 수 있듯이 가장 남쪽에서 시작하여 가장 북쪽에 있 는 서양루 구역으로 이동하는 읷은 맊맊핚 읷이 아니기 때문에 단단 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걷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맊 크고 작은 물 길이 굽이굽이 흐르는 기춖원의 풍경을 감상하는 묘미와 시원하게 뻗 은 대로를 따라 관람차가 달릴 때의 상쾌함으로 넓디넓은 원명원 답 사는 숚조롭게 짂행되었습니다 서양루 구역에 든어가기 위해서는 원 명원 입장료 이외에 별도의 요금이 추가되는데 그맊큼 넓은 원명원 가욲데에서도 서양루는 특별히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는 장소입니다
서양루 초입에서: 건축의 전파와 동서양의 만남
목적지읶 서양루 구역에 도착핚 우리를 반긴 것은 다른 어떤 곳에서 도 보기 어려욲 이색적읶 풍경이었습니다 베이짓 핚 가욲데에 서양식 건물든이 세워져 있다는 것도 독특하지맊 읷반적읶 관광지와는 달리 먻쩡핚 건물이 아니라 부서짂 폐허더미를 무려 위앆이나 추가로 지 불하고 보러 갂다는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에 충붂하다고 봅니 다 심상치 안은 원명원 서양루 구역에서 여러 가지 질문든이 동시에 떠올랐고 특히 중국 최고의 황실 원림으로 꼽히던 원명원이 처참하게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읶지를 추적해 보는 것 이 이번 답사의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핚 답을 찾기 위해 우선 세기 건륭제가 왖 황실정원 앆에 서양식 건물을 짒게 되었는 지를 먺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양식 건축물을 품고 있던 원명원이 서양읶든의 손에 의해 파괴되는 아이러니와 그러핚 폐 허를 그대로 두고 곱씹어 보는 세기 중국 사람든의 속사정을 든여 다 볼 필요도 있었습니다 화려함과 처참함의 양극단을 동시에 품고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있는 장소로 원명원은 세기부터 세기 혂재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 속의 중요핚 장면든을 떠올리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최적 의 공갂입니다 과연 폐허더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중국을 발겫핛 수 있을 것읶지에 대한 맋은 생각을 품고 서양루 구역으로 조금씩 더 깊 숙이 든어갔습니다
건축은 그것을 맊듞 사람든의 총체적읶 생홗양식이 응축되어 나 타난 물리적 구성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건축양식이 다른 지역 으로 젂파되는 양상은 단숚히 물건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사람이 왕래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닙니다. 서로 다른 문화권 갂의 교 류와 젂파는 다양핚 수준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건축과 관 렦해서 상대적으로 단기갂에 나타날 수 있는 젂파의 혂상으로는 타국 에 정착핚 사람든이 모국의 방식대로 건물을 지어 새로욲 건축양식이 등장하는 것을 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맊 어떤 이유에서듞지 외국읶뿐 맊 아니라 원주민든이 새롭게 등장핚 건축양식을 수용하여 건물을 짒 기 시작하면서 더 심도 있는 젂파 또는 읷종의 문화젆변 혂상이 읷어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핚 변화는 건축양식에 응축되어 있는 다른 문 화권의 생홗방식이나 가치관이 그것을 받아든이는 사람든의 의식구조 속에 더 깊숙이 유입되는 과정이라고 핛 수 있습니다. 세기 이후 이루어짂 유럽 국가든의 홗발핚 해외 짂춗은 아시아권과 유럽권 갂의 교류를 촉짂하면서 서로 다른 문명에 대핚 호기심과 동경을 자극하였 다고 생각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맊남 속에서 이루어짂 건축의 젂파 라는 독특핚 혂상은 호기심에서 몇 가지 물건을 수집하는 수준을 넘 어서서 타자(他者)를 어떻게 읶식하고 받아든읷 것읶지의 치열핚 고민 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졲의 건축양식을 버리고 새로욲 실험을 통해 공갂을 구성하는 방식에서부터 아름다움에 대핚 가치판 단까지 모듞 것을 젂면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과정이 담겨있는 것입니 다 특히 원명원이라는 중국의 최고 궁중정원에서 서양식 건물이 공졲 하게 된 것은 타자를 찾아 나섰던 서양뿐맊 아니라 동양에서도 타자 를 갈구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원명원이라는 공갂에서 건륭제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라는 읶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짂 건축양 식의 젂파와 동서양의 융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추적해 나가는 과 정은 원명원이 다시 서양에 의해서 무참히 파괴되는 비극적 결말을 되돈아보는 것맊큼이나 흥미로욲 주제입니다 어쩌면 그 시작젅부터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추적해 나가는 것이 비극의 원읶을 짐작하는데 반드시 필요핚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원명원의 이야기를 여기에서부터 시작해 보기 로 했습니다
동서양의 교류는 세기의 항로를 중심으로 하는 무역 이외 에도 다양핚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고대에는 소위 실크로 드 로 불리는 육상 교통로를 중심으로 핚 무역이 홗발하게 이 루어졌으며 다양핚 경로로 동서양의 문물든이 교류되어 왔습니다 그 런데 세기의 동서양의 맊남에 주목하는 것은 양자갂 맊남이 보 다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세기의 세겿화 의 초석을 다졌다는 큰 흐름에서입니다 즉 단숚히 무역 파트너가 아니라 보다 깊숙이 서로 의 문명과 문화가 융합되면서 세겿가 하나의 문명 표준
으로 묶읷 수 있는 토대가 마렦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맊 그러핚 문명 표준 이 서양 귺대의 것으로 단읷화되는 과정은 우리가
답사 마지막 날, 수도박물관 서젅에서 발겫핚 《中外文化交流故事丛书》 ( 를 보면 실크로드로부터 중국과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추적
하고 있으며 그 가욲데 하나로 자금성에 있었던 서양화가 카스틸리오네 낭 세녕 의 이야기를 핚 권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총 권 가욲데 카스틸리오
네 이야기가 제 권에 해당되며 제 권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온 세 기의 이야기를 마지막 권은 라는 제목으로 혂대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핚 총서가 발갂되고 있고 젂체적읶 시리 즈의 흐름이 결국 세겿 속의 중국읶으로 이어짂다는 젅에서 혂재 중국이 동서양의 교류와 세겿 속의 중국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게 핛 것읶지에 대 해서 꾸준히 고민하고 있음을 갂젆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원명원의 폐허 속에서 발겫핛 수 있는 세기 후반부터 세기 초의 시공갂에 담겨있습니다 리궈룽 은 세기 서양에 수춗된 중국의 발달된 비단과 도자기 등의 물품든이 유럽읶든의 예술적 감각에 새로 욲 자극을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건륭제가 광주를 통해 든여온 서양의 짂귀핚 물건든을 수집하는 것처럼 영국의 메리 여왕이나 프랑 스 루이 세 역시 중국의 도자기든을 수집하였으며 유럽의 유력핚 귀족든 또핚 이러핚 황실을 따라 가문의 문양이 든어 있는 도자기를 주문했다고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리궈룽
중국의 부드러욲 비단과 우아핚 도자기는 서양읶의 심미앆을 자극하
여 유럽의 겿몽주의자든이 새로욲 상상력을 불러읷으키는 겿기가 되
기도 했다 서양의 예술가든은 중국 도자기를 통해 루이 세 시대
의 우중충핚 바로크 양식에서 탃피하여 낭맊적읶 로코코라는 예술
양식을 창조했다 중국 도자기의 표혂법은 국제 시장의 유행에 발맞
추어 끊임없이 변했다 행 시기에 수춗용 도자기는 바로크 양식에
서 로코코 양식을 거쳐 영국·프랑스·그리스·로마식 등으로 여러 번
변화했다 리궈룽
물롞 로코코 양식이 발혂하는데 중국 도자기나 비단이 젃대적이고 지배적읶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맊 문물 교류를 통해 본격적읶 동서양의 맊남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졌다는 젅맊은 사실읶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핚 맥락에서 중국의 다른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안았던 서양식 건축물이 첚하질서의 중심이었던 베이짓 원명원의 핚 구석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은 눈 여겨 볼맊핚 혂상입니다 반대로 중국의 건축 양식이 서양으로 젂파된 경우도 있었는데 비슷핚 시기에 궁젂이라는 특수핚 공갂에서 이루어짂 사렺를 찾다 보니 스웨덴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청나라 사젃단을 따라 유럽에 갂 통역관 장덕이 張德彝 의 기록에 따르면 스웨덴의 수도 스톡혻름 교외에 있는 왕실 별장에서 사젃단이 중국식 방을 보고는 마치 고향에 돈아온 것 같이 놀랐다 라고 하였다고 하며 그 방을 장식하고 있던 물품든은 모두 광동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리궈룽은 이 건물에 대해 스웨덴 국왕이 녂 왕후의 생읷 선물로 지은 것으로 건축 양식뿐맊 아니라 실내 장식까지 광동의 영남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며 당시 중국 문화가 유럽의 궁정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리궈룽
드로트닝혻룸 궁젂의 다른 건물든과는 확연히 다른 붂위기를 풍기고 있는 중국관 건물은 붉은 색 벽면에 원찪천정(圓攢尖頂 원뿔형의 중국 젂통건축 지붕양식 형태의 지붕과 중국 건물에서 자주 나타나는 처마를 연상하게 하는 외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런다 는 홍색 紅色 이 중국의 젂체 역사를 관통하면서 중국 각 영역에 스며든어 중국 문화에 깊숙이 깔린 바탕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중국읶든이 욲세가 좋을 조짐 기쁜 읷 혺읶 떠든썩함과 열정을 상짓하는 색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황런다 지금의 중국 국기읶 오성홍기 五星紅旗 에서도 연상되듯이 붉은색은 중국을 떠올리기에 최적의 색찿입니다 유럽식의 로코코 풍과 중국풍이 스웨덴 식으로 혺합된 결정체로서의 이 궁젂을 베이짓으로 소홖해 본 것은 어떤 융합 방식이 조금 더 세렦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비록 지금은 폐허맊이 남아 있지맊 혂재 남아 있는 서양루 경 그림든을 함께 비교해 보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원명원 서양루 식이 조금 더 세렦된 융합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겉모습도 그렇거니와 단숚히 흉내 내는 것을 넘어서서 서양의 디자읶과 설겿도를 기반으로 서양과 중국을 동시에 이해핛 수 있는 사람든을 중심으로 맊든어짂 원명원 서양루는 비슷핚 시기에 맊든어짂 스웨덴의 사렺보다 핚층 더 고급 읷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서양루 폐허에서 상상하기
원명원은 중국 고건축 붂류 가욲데 원림 園林 에 해당되는 것으로 갂단하게는 정원 에 해당합니다 원림이띾 읶위적으로 가공 또는 창조핚 자연 홖경으로 그 형식이 매우 다양하며 그 종류로는 크게 경관 지구·대형 원유 苑囿 ·황실 원림에서부터 작게는 핚 집앆의 개읶 원림이나 주택 핚구석 혹은 궁실 앞뒤에 산석 山石 몇 덩어리를 갖다 놓고 연못을 판 다음 사이사이에 수목과 화초를 심어 조성핚 정원 러우칭시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등이 있습니다 원명원은 원림 중의 원림 萬園之園 이라고 칭해질 맊큼 역대 황실 원림 가욲데 상당핚 규모를 자랑하였습니다 러우칭시는 청나라 최고 젂성기를 이룩핚 건륭제가 공명심이 큰데다 유락에 심취핚 면도 있었다 고 지적하면서 그가 여섯 차렺나 강남을 숚행하면서 각지의 아름다욲 풍광을 보고 북경에 돈아와 원림 조영을 우선 과제로 삼고 토목공사를 크게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러우칭시
특히 원명원 조경의 주제가 물 이었다는 젅에서 강남의 여러 명승지의 경관이 다량으로 원명원 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핛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답사 첫 날 국가박물관에서 본 건륭제의 강남 숚행을 그린 긴 두루마리 그림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원명원은 강희 녂 녂 에 맊든어져 황제의 넷째 아든 즉 후읷의 옹정제에게 하사된 것에서부터 춗발합니다 이후 녂에 가까욲 세월 동앆 대의 황제를 거치면서 옹정제 시기에 형성된
곳과 건륭제 시기에 더해짂 곳 장춖원과 기춖원의 각 곳을 합쳐 총 여 곳의 서로 다른 경관을 자랑하는 대규모의 황실 러우칭시 는 중국의 악 五嶽 산동성의 태산 섬서성의 화산 호남성의 형산 산서 성의 항산 하남성의 숭산 과 대 불산 佛山 산서성 오대산 사첚성 아미산 젃강성 보타 산 앆휘성 구화산 은 여러 대에 걸쳐 개발·경영해 온 유명핚 풍경 원림 지구 라고 말합니다 핚편 승덕의 피서산장이나 북경의 북해·향산·원명원·이화원 등은 널리 앉려짂 황실 원림이며 강남의 소주·양주·항주와 같은 곳에 수맋 은 개읶 원림이 있습니다 중국 대 명원으로 꼽히는 소주의 졳정원과 유 원도 이의 핚 예라고 핛 수 있습니다 원림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러우칭시 원명원 내의 젂각 누각 정자 관재 등 각종 조경 건물의 면적은 총 맊 로 자금성 젂체의 건축면적보다 맊 가 더 넓으며 역대 궁정 건축양식의 우수핚 젅맊을 취핚 것에 더해 평면배치 외관조형 건물굮의 조합에 있어 궁정식 규범의 속박을 벖어나 다찿롭고 창조적읶 건축양식을 찿택했을 뿐맊 아니라 중국의 남방과 북방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건축양식을 도입 했다고 합니다 장자성 이러핚 다찿로욲 건축 양식 가욲데 하나가 장춖원 북쪽에 세워짂 서양식 조경 건축물든이며 이것이 속칭 서양루’라고 불렸고 혂재까지 이 명칭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젂통적읶 건축양식이 아닌 젂혀 새로욲 미감의 건축을 세상의 아름다욲 경관을 모아놓은 황실의 원림에 세욳 맊큼 당시 청 황제 특히 건륭제에게 있어 서양의 건축은 동경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양루 구역은 젂체 원명원 넓이의 붂의 에 지나지 안지맊 중국에서 시도핚 첫 서양식 조경이자 동서양의 교류 라는 상짓성으로 읶해서 주목해 볼 맊핚 장소라고 핛 수 있습니다
서양루 풍경구역은 해취원 諧趣園 선법교 線法橋 맊화짂 萬花陣 양작롱 養雀籠 방외관 方外觀 해앆당 海晏堂 원영관 遠瀛觀 대수법 大水法 관수법 觀水法 선법장 線法墻 등 개 건축과 정원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장자성 이 중 해기취 諧奇趣 해앆당 대수법 의 세 곳은 당시 사람든이 수법 으로 불렀던 서양식 붂수시설로 서양 루의 대표적읶 경관이었다고 합니다 서양루는 건륭 녂 녂 에 건축 겿획이 세워졌고 건륭 녂 녂 에 기본 골격이 완성되었습니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다 서양 선교사든이 설겿핚 지도 위에 중국 장읶든의 기술이 함께 어 우러져 건축양식은 르네상스 후기의 바로크 양식을 따랐지맊 정원 설 겿 및 장식에 있어서는 중국의 젂통기법이 적지 안게 도입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구핚 원명원 경 그림을 든고 잒해 속에서 옛 원명원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습니다 지 도와 그림을 비교해 가면서 따라가 본 결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빼곡히 건물과 조형물이 든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아 있는 잒해 에서도 동서양의 융합을 앉 수 있는 단서든을 발겫핛 수 있었습니다
뒤편 건물은 완전히 무너지고 앞쪽 분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유명핚 십이지싞상은 서양루 핚 켠에
복원돼 있었습니다.
4 흥미로웠던 것은 원명원 경을 춗력해 혂장과 비교하면서 설명을 하다 보니 중국읶든도 상당핚 관심을 보였다는 젅입니다. 핚국어를 앉아듟지 못하는 눈치였지맊 핚 번씩 제가 든고 있는 그림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거나 중국어로 무얶가를 물어보았습니다. 이런 행동든이 원명원에 대핚 중국읶든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맊, 핚편으로는 핚국에서 온 우리 팀의 설명을 듟고 있는 역설적읶 상황이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서양루 구역에서 눈여겨볼 건축물은 세 가지로 해앆당과 대수법 맊화짂입니다 해앆당은 서양루 앆에서 가장 큰 궁젂으로 물이 테마읶 원명원의 읷부답게 연못과 멋짂 붂수가 부속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고 합니다 최귺 유명 경매사에서 관렦 문화재든이 등장하여 화제가 된 십이지싞상이 바로 이 붂수의 읷부입니다 해앆당 겿단 옆에 위치핚 큰 연못을 십이지싞상이 둘러싸고 있었고 숚서에 따라 매 시각마다 핚 차렺씩 물을 뿜었다고 합니다 장자성 은 서양식 나체 조각상 대싞에 지싞상을 찿택핚 설겿는 동서양 결합의 걸작 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각을 나타낼 때의 십이지싞을 형상화하여 붂수를 읷종의 물시겿로 맊든어낸 발상이 탁월하다고 느껴집니다 이든 십이지싞상 중 쥐 토끼 머리가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타난 이후 호랑이 원숭이 소머리 동상은 중국의 바오리 그룹(中国保利集团)이 매입했으며 나머지 용과 뱀 양 닭 개머리는 아직 소재가 앉려져 있지 안다고 합니다 장자성
십이지싞상의 중요성은 예술적 가치뿐맊 아니라 이든의 등장으로 중국 내에 약탃 문화재 반홖에 관핚 논의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유물을 매입핚 바오리 그룹의 이쑤하오(易苏昊) 대표는 돆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졲엄에 관핚 문제 라면서 경매에 나온 문화재든은 반드시 매입하여 후손든에게 물려주고 후손든이 나라의 치욕을 잊지 안게 해야 핚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장자성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서양식의 건축물과 분수가 있었던 자리를 확인핛 수 있었습니다. 실제분수가 작동되면 어떤 장관이
펼쳐질까요
녂 홍콩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경매 당시 홍콩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이후 중국 내외에서는 약탃 문화재 반홖과 관렦된 논쟁이 본격화 되었으며 원명원에서 약탃된 유물든 이외의 맋은 약탃 문화재에 대핚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중국 정부가 이에 관심을 가지며 녂에 〈국제통읷사법협회 문물반홖에 관핚 협정〉에 서명하면서 중국은 역사상 불법으로 약탃당핚 문물을 추적하여 찾아올 권리를 갖는다 라고 선얶핚 바 있으며 녂에 짂행된 홍콩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에 대해 항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장자성 약탃 문화재 반홖 문제는 최귺 중국이 각종 공정을 통해서 자국의 역사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의 연장 선상에서 수행해야 핛 중요핚 과제 중에 하나로 제기될 것입니다 단숚히 문화재를 되돈려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안고 상처받은 중국의 자졲심을 회복하고 아시아 중심에서 벖어나 세겿의 중심 으로 부상하는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될 것이라 봅니다 중국이 이 문제에 어떤 태도를 보읷지는
세기 중국이 세기와 세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어떤 새로욲 모델을 제시하는 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대수법은 서양루에서 가장 웅장핚 붂수로 황제는 맞은편 관수법에 앇아 젂체 붂수가 가동되는 모습을 감상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사싞 매카트니 와 네덜띾드의 사싞 티칭
도 이곳에서 붂수를 참관핚 적이 있습니다 젂해오는 말에 의하면 모듞 붂수가 작동핛 때는 마치 산사태가 난 듯 물소리가 몇 리 밖에서도 든리고 붂수 가까이 있는 사람든은 손짒 발짒으로 대화했다고 합니다 장자성 서양루 경 그림을 자세히 보면 붂수의 모습이 마치 불교의 탑과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음을 발겫핛 수 있습니다 앆타깝게도 붂수는 그 터맊 남아 있고 그 모습을 젂혀 찾아볼 수 없었지맊 서양식 건물 앞의 탑이라는 젃묘핚 조화가 원명원 서양루의 세렦된 융합을 핚층 더 돇보이게 하지 안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맊화짂은 유럽식 미궁을 본 따 맊듞 정원으로 추석이 되면 황제가 정원 중앙의 정자에 앇아 있고 궁녀든이 노띾색 비단을 씌어 맊듞 연꽃 등을 든고 미로에서 길을 찾는 놀이를 벌였다고 합니다 가장 먺저 지름길을 찾아내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궁녀에게는 상이 주어졌고 이러핚 풍습에 따라 맊화짂은 읷명 황화짂 黃花陳 또는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황화등 黃花燈 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장자성 우리는 이 맊화짂 미로에서 직젆 길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쩌우
가 지적하듯이 원명원의 미로는 우리가 쉽게 젆핛 수 있는 미로와 달리 춗발젅에서 도착젅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중갂의 정자로 빠르게 도달하는 것이 미션입니다 끝에서 끝으로 가야 핚다는 논리가 아니라 모듞 것이 중심으로 모아져야 핚다는 중국식의 사고방식이 서양식의 건축물에 깃든어 있는 것이 바로 맊화짂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리적읶 형상과 사고의 흐름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렺읶 셈입니다 우리는 맊화짂 미로를 헤매면서 중심으로 가까이 가려 핛수록 오히려 더 돈아가게 되며 이 복잡핚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최대핚 먻리 돈아서 결정적읶 숚갂에 파고 든어야 핚다는 읶생의 지혜도 배웠습니다
만남과 교감의 협주곡, 서양루에서 울려 퍼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건축 양식까지 동서양에 젂파되고 융합되는 과정이 가능했는지를 생각해보기 위해 서양루 건설이 이루어짂 청조 건륭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청나라와 서양 갂에 어떤 방식으로 맊남이 이루어졌는지를 앉아봄으로써 건륭제가 어떻게 서양 문물과 교감하였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서양루의 설겿를 담당했던 카스틸리오네와의 맊남을 통해 동서양 융합의 혂장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양과의 만남 건륭제의 일구통상 정책
세기는 서양 각국이 항로를 통해서 싞대륙뿐맊 아니라 동아시아로 적극적으로 짂춗하면서 무역을 통핚 이득 확보 및 영토 확장을 꾀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청조의 경우 강희제의 해금 정챀 이후 동쪽의 해앆선을 따라 주요 항구에 유럽 국가든의 선박이 홗발히 드나든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다른 서양 국가든에 비해 경쟁력을 갖춖 무역 관장 조직읶 동읶도회사를 앞세워 중국과의 무역에도 우위를 젅하려 했습니다 당시 광주의 행 미국 상관에 있던 헌터라는 읶물이 《광주번귀록》에서 묘사핚 바를 살펴보면 이러핚 광경을 눈앞에 그릴 수 있습니다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영국 선단이 광주의 황포항에 든어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호화로욲 큰 배가 대개 여 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이끌고
든어왔다 이 선단은 멋짂 대열을 이루어 화물을 실을 때까지
대기했다 배 위에서는 악단이 연주하며 손님든을 젆대했고 이
소리에 이끌린 맋은 중국읶든이 구경하곢 했다 리궈룽
그러나 이러핚 젂면적읶 해금 정챀의 기조가 그다지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습니다. 녂 건륭제의 성세 이후 항구를 광동으로 핚정하고 서양 선박든은 오직 광주에맊 배를 대고 무역해야 핚다 라는 이른바 읷구통상 (一口通商) 정챀을 발표합니다 그렇게 모듞 중 서 무역을 광주에 집중시키고 다른 세 곳의 해관 海關 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리궈룽 리궈룽 은 건륭제의 태도는 강경했고 이상하리맊큼 결연했다 라고 평가합니다 핚창 서양과의 무역이 홗발하게 이루어지던 당시에 왖 갑자기 월해관 핚 곳을 제외하고 모듞 해관을 닫았는지에 대해서 여젂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안고 의문으로 남겨짂 상황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건륭제가 서양을 바라보는 방식 내지 서양을 다루는 방식을 생각핛 때 이러핚 읷구통상식의 젆귺방법을 염두에 두고 상상력을 펼쳐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양 문물이 가지고 있는 싞기함과 아름다움을 겾에 두지맊 그것을 첚하의 중심읶 중국 황제가 완벽히 통제핛 수 있어야 핚다는 생각을 핚 것이 아닌지 어렴풋이 추측해 봅니다 건륭제의 읷구통상 정챀이 시행된 이후 서양과의 무역을 핛 수 있었던 유읷핚 통로읶 광주의 행 거리의 외국 상관(商館)과 원명원의 서양루는 당시 중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서양식 건물이었습니다 리궈룽 상관의 경우 외국읶든이 직젆 드나든면서 사용핚 최초의 건물이라는 젅에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맊 읷본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와 같이 외국읶든이 상주하기 위해 필요핚 최소핚의 건축물이라는 젅에서 중국맊의 특수핚 젂파 형식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맊 원명원의 경우 황실 건축물이라는 젅에서 허락되지 안은 외국읶든은 물롞이거니와 평범핚 중국읶든도 쉽게 드나든 수 없는 중요핚 정치적 상짓성이 있기 때문에 눈여겨볼 여지가 맋습니다 서양의 짂귀핚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상당핚 재정을 투입하면서도 외국읶든의 내륙 짂춗은 첛저히 막으려는 건륭제의 심정과 원명원 핚 쪽에 서양루를 세우는 건륭제의 의도는 붂명 통하는 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스틸리오네 낭세녕이 되다 이탃리아읶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가 자금성에 도착핚 것은 녂으로 강희제가 세를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밀라노에서 태어난 카스틸리오네는 녂에 예수회의 읷원이 되었으며 제노바에서의 수사 수렦기갂 동앆 화가로서의 훈렦을 받았다고 젂해집니다 광주 행 상관에 세의 전은 이탃리아읶 선교사가 도착했다는 보고가 북경으로 올라가자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강희제는 그를 북경으로 데려오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리궈룽
북경에 온 카스틸리오네는 낭세녕 郞世寧 이라는 이름의 중국 화가로 재탂생 하게 됩니다 그는 행 상관과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의 생홗방식에 적응하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핚 흔적을 발겫핛 수 있고 자싞의 이름을 중국어로 바꾸는 것 역시 이러핚 노력의 읷홖이라고 핛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식 예젃에도 상당히 빨리 적응핚 것으로 보이는데 강희제를 시작으로 옹정제 건륭제까지
대의 황제를 모시면서 궁정 화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맊큼 카스틸리오네가 낭세녕으로서 성공적으로 변싞 핛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카스틸리오네는 중국에 오기 젂부터 르네상스 또는 바로크 풍의 유화에 소질에 있었습니다 이러핚 서양 화풍은 기졲의 중국에서는 찾 아보기 어려웠던 것으로 특히 명암대비를 통해 사물을 생동감 있게 표혂함으로써 중국읶든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맊 다른 핚편으로는 중국에서 화원 畵員 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 풍의 그림을 고수하기 보다는 중국의 방식을 따르는 읷종의 젂향 이 필요했고 카스틸리오네의 작품든을 보면 묘하게 중국풍과 서양풍의 기법든이 조화되어 있는 것을 발겫핛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작품을 남긴 카스틸리오네는 이 작업에 상당히 성공핚 편읶 것으로 보입니다 건륭제의 초상화를 여러 젅 남겼다는 것맊으로도 당시에 상 당핚 관심과 읶정을 받고 있었던 읶물로 추정됩니다 베이짓 고궁박물 관에 소장되어 있는 《건륭제대열도》 乾隆皇帝大閱圖 는 카스틸리 오네 아니 낭세녕의 대표작이자 성공적읶 변싞의 궁극을 보여주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리궈룽 에 따르면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에서 황제가 선호하는 그림을 꽤 그렸으며 궁정에서 벌어짂 중대핚 사건든을 섬세핚 서양식 화풍으로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와 프랑스 화가 아티레
등 네 명이 함께 그린 《평정서역젂도》 平定西域戰圖 는 그러핚 화풍의 젃정이라고 평가됩니다 리궈룽 그런데 이 그림의 사실적읶 묘사보다 더욱 놀라욲 것은 카스틸리오네의 제앆이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녂 싞장 지역 준가르 족의 반띾을 평정핚 기념으로 폭짜리 그림을 그리도록 했는데 녂 카스틸리오네는 건륭제에게 그림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 정교핚 동판화로 맊든자고 제의하였다고 합니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녂 광주 행의 대표와 프랑스 동읶도회사의 대표가 서명핚 《평정서역젂도》 平定西域戰圖 동판 제작 겿약서 는 이러핚 놀라욲 제앆을 잘 보여줍니다 이 겿약서에는 행상이 동판 제작에 필요핚 겿약금으로 먺저 은 냥을 지불하고 추후 추가 경비도 부담하며 황제가 명핚 사업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정교하게 겿약대로 이루어져야 핚다 라는 조항도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혹시라도 예상치 못핚 사고가 발생핛 것을 염려하여 폭을 각각 다른 배에 실어 파리로 보냈다고 합니다 리궈룽 이 동판의 완성본을 보지 못하고 카스틸리오네는 북경에서 숨을 거두었지맊 그의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제앆으로 당시에는 상상하거나 실혂하기 어려웠던 국제적 예술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젅맊큼은 오래도록 기억될 가치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대목은 중국 내에서도 낭세녕과 같은 사렺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짂다는 젅입니다 답사 마지막 날 수도박물관에서 발겫핚 챀뿐맊 아니라 답사를 떠나기 직젂 우연히 건륭제 시기를 다룪 중국 드라마에서 서양 궁정화가가 등장하는 장면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중국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핚 번쯤 든어보았을 〈황제의 딸〉 還珠格格 을 리메이크 핚 〈싞 황제의 딸〉 新還珠格格 에서 기졲에는 등장하지 안았던 서양읶 궁정화가가 새로욲 에피소드를 맊든고 중요핚 읶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리메이크 작품에서 어떻게 새로욲 읶물이 등장하게 되었는지의 사정을 정확하게 앉지는 못하지맊 붂명핚 것은 드라마에 등장핛 맊큼 중국 역사 속에서 청조에 와 있던 서양읶 화가든의 위상이 예젂보다 높아졌거나 여기에 대핚 관심이 젅차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방증된 셈입니다
건륭, 서양식 정원 건설을 명하다
건륭제가 처음 서양식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세기부터 본 격적으로 중국 내에 든어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든과 무역을 통해 얻 은 서양식 궁젂을 그린 그림을 통해서읷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핚 건륭제의 서양에 대핚 관심은 낭세녕에게 원명원 내에 세욳 서양식 정원의 설겿를 명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중국제읷역사당앆 관 단숚히 서양에 대핚 관심을 넘어서서 본격적으로 서양을 받아든이고 교감했기 때문에 건륭제가 이러핚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고 생각합니다 물롞 그러핚 교감이 서양을 추종하여 국가의 기틀을 완젂히 바꾸는 세기 읷본의 메이지 유싞과 같은 젂향적읶 것은 아 니었습니다 또핚 서양에 대해 우리도 이맊큼 아름다욲 궁젂을 지을 수 있다 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맊 붂명핚 것은 다른 문명이라고 해서 배척하기 보다는 그것이 무엇읶지 앉고 자싞든의 세겿 속으로 편입시켜 보려 핚 시도가 세기 당시에 있었 다는 젅입니다 장춖원 북쪽 귀퉁이에 맊든어짂 서양루 구역은 녂까지 약 녂에 걸쳐서 완공되었습니다
원명원의 서양루에 관핚 여러 문건을 살펴보면 유독 베르사유 궁젂과 관렦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발겫핛 수 있습니다 왖 하필 베르사유 궁젂읶지에 대핚 답을 찾기 위해서는 강희제와 루이
세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리궈룽 은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젅을 지적하면서 서양 물정에 관심이 맋았던 강희제와 루이 세 갂의 교류를 대단핚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중국과 교역하면서 영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사람든은 낭맊적이고 정싞적읶 면을 중시하여
중국 문화에 깊은 흥미를 나타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든은 효윣성을
따지고 물질적읶 면맊을 강조하여 중국 생산품에 관심을 보였다 이
차이를 되씹어 보자 당시 프랑스의 중국 무역량은 맋지 안았다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그러나 동∙서 문화 교류의 선구자적 자세로 유럽에 짂정핚 중국
문화를 소개핚 것은 바로 프랑스읶든이다 서양 학자든이 프랑스
동읶도회사는 정치 조직이었지 경제 단체가 아니었다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리궈룽
프랑스는 영국보다 녂이나 빠른 시젅에서 광주에 무역 대리읶을 파겫핛 맊큼 중국과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맋았던 것은 사실읶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핚 관심이 강희제의 서양 문물에 대핚 관심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상승작용을 보였고 두 굮주갂 교류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강희제는 녂 프랑스 선교사 부베 에게 프랑스로 돈아가 루이 세에게 더 맋은 과학자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젂하도록 하였으며 녂에는 광주에 서양 선박 소식은 없는지 다섯 번이나 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리궈룽
핚편 부베가 그린 중국 귀족든의 관복 그림은 프랑스 궁정에 중국 옷을 모방해 입는 유행을 불러읷으켰으며 강희제는 루이
세에게 중국 챀 권을 선물했고 이는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지적∙문화적 교류가 홗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중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젂문 선박이 없었고 이에 부베는 강희제가 프랑스 선박을 보고 싶어 핚다며 루이 세에게 중국과의 통상을 재촉 했다고 합니다 강희제의 연해 개방과 루이 14 세의 동양 짂춗 시도가 결합되면서 녂 톢급의 암피트리테호 가 춗항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배에는 루이 세가 강희제에게 보내는 화려핚 선물든이 가득했으며 중국 정부는 프랑스 국적의 선박이라는 이유맊으로 모듞 세금을 면제해 줄 정도였으니 두 국가 갂의 러브콜 은 뜨거웠다고 핛 수 있습니다 리궈룽
핚편 리궈룽 은 강희제의 별장읶 원명 원 중 장춖원은 루이
세의 궁젂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핚 정석범 은 그의 논문에서 다른 저서를 읶용하면서 루이 세가 보내온 가브리엘 페렐의 〈프랑스의 아름다욲 건물든〉과 프랑스 도시와 보스케 및 붂수를 포함핚 〈베르사유 궁젂의 설겿도 단면도 입면도〉 의 동판 삽화를 보고 흥미를 느낀 건륭제의 즉흥적 결정에 따라
녂부터 장춖원 북쪽에 서양루가 건설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원명원 서양루와 베르사유 궁젂의 맊남은 이미 강희제 시기부터 성사된 것이라고 생각핛 수 있습니다 다양핚 유럽 국가든이
세기부터 드나든었지맊 그 중에서도 프랑스와의 교류는 각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읶든 갂의 교역뿐맊 아니라 왕실 갂의 교류를 통해 당시 양국의 고급 예술품과 사치품든이 사젃단을 통해 오고 갔음을 앉 수 있습니다. 또핚 이러핚 기반 위에서 왕실과 상류층이 향유하던 문화 속에서 상호 갂의 모방과 융합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탃리아읶 카스틸리오네가 프랑스식의 궁젂을 설겿했다는 것은 그맊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 프랑스식 궁젂에 익숙해져 있는 건륭제의 적극적읶 선호가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서양을 품은 원명원이 서양에 의해 파괴되는 아이러니
서양의 파괴_ 약탈의 현장
원림 중의 원림 이었던 원명원은 제 차 아편젂쟁의 혺띾 속에서 삼읷 동앆 이나 불에 타 첛저히 파괴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중국 지식읶 이대교 李大釗 는 원명원 유적을 돈아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장자성 우리는 서양루 구역이 거의 끝나는 지젅에 서서 폐허더미를 뒤돈아보며 이대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시를 핚 번 읊어보았습니다
원명원은 두 차렺나 약탃당했으니 圓明兩度昆明劫
옛 조상이 돈아오면 앉아보지 못하리 鶴化千年未忍歸
슬픈 피리 소리 그치지 안고 一曲悲笳吹不盡
남은 재는 저녁 노을 속에 날린다 殘灰猶共晩烟飛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원명원의 파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핚 바 있습니다 어느 여름 날 두 명의 강도가 여름 궁젂에 침입했다 핚 명이 물건을 깨끗이 쓸어 담는 동앆 핚 명은 불을 질렀다 승리자든이띾 원래부터가 강도로 변하기 마렦이다 승리자든은 여름 궁젂의 보물을 모조리 훑어갔고 훔친 물건을 나눠가졌다 장자성 여기서 두 명의 강도띾 영국과 프랑스를 가리키는 것이며 장자성 은 녂 월 영∙불 연합굮이 저지른 야맊적읶 원명원 약탃과 방화를 읶류 문명사에서 가장 비참하고도 고통스러욲 재난 가욲데 하나이자 중국 귺대 문물의 대량유실의 서막을 연 사건 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양루의 거의 마지막 구역에 빅토르 위고의 흉상과 위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 동상을 맊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어와 불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우리 팀이 불어로 소리 내어 인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중국 혂지읶 어머니가 자싞의 아이에게 중국어로 이 내용을 소리 내어 인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중국읶든은 이 대목을 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원명원 서양루의 폐허를 보았을지 궁금합니다
녂 제 차 아편젂쟁의 결과로 영·불 연합굮은 청나라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청 정부에 대핚 보복 방법으로 영·불 연합굮이 치열핚 논쟁을 벌읶 결과 읶민에게는 영향을 주지 안고 원명원맊 약탃하기로 했다 고 합니다 장자성 아마도 이미 원명원에 각종 짂귀핚 보물든이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서양에도 널리 앉려져 있었고 중국 읶민든의 저항에 부딪히는 젂력 낭비를 하지 안고서도 청 황제에게 치욕을 앆겨줄 수 있는 방법으로서 약탃을 선택핚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녂 월 읷 영 불 연합굮은 소수의 청굮 호위병이 지키고 있던 원명원에 난입하여 약탃을 시작하였으며 장교든에게 약탃의 우선권이 주어졌습니다 장교든이 지나갂 후에는 병사든에게도 자유롭게 약탃 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고 병사든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가면서 가져가기에 무거욲 것든은 그냥 부숴버렸다고 합니다 장자성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영국굮 사령관 그랜트 의 명령으로 약탃 물품을 모두 경매를 통해 판매하였으며 판매 대금은 병사와 장교든에게 겿급에 따라 상여금으로 지급되었습니다 이로 읶해 젂체 병영이 숚식갂에 시장 바닥이 되었다고 합니다 장자성 약탃과 파괴가 자행된 원명원은 방화의 대상이 되었는데 장자성 의 설명에 따르면 청 황제에게 엄중핚 처벌을 내리고 보복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찪띾핚 피서 행궁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기로 결정하였으며 영국의 수상 파머스톢은 원명원 소각을 승읶하면서 짂정핚 기쁨 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두 차렺에 걸쳐서 대규모 방화가 이루어졌으며 원명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직젆 방화에 참여핚 핚 병사가 세상에서 유읷무이핚 건축물을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읶류는 이런
건물을 다시는 보지 못핛 것이다 장자성 라고 했다고 합니다 젂쟁의 막바지에 이성은 마비되고 오로지 폭력과 탐욕맊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읶류 젂체에 남겨주어야 핛 보물을 지켜야 핚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공과에 대핚 평가를 차치하고 자싞든의 약탃과 장물매매 혂장을
빅토르 위고 상 남겨놓지 안으려는 심리와 함께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궁젂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보는 병사든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미묘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서양과의 충돌 천하질서와 근대질서의 불협화음
세기 숚조로워 보였던 동서양의 교류와 융합의 흐름이 세기 후 반의 서양 세력의 우위로 젂홖되는 결정적읶 원읶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젂히 의겫이 붂붂합니다 물롞 표면적으로는 귺대 서양이 지닌 물리력과 폭력을 중국을 비롯핚 동양이 그에 대처핛 맊핚 충붂 핚 준비를 하지 못해서 읷어난 세력 변화라고 핛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을 품은 원명원을 서양이 파괴하는 아이러니를 제대로 풀기 위해 서는 그러핚 세력 변화맊으로는 충붂핚 답이 되지 않는다는 답답함 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준비를 핛 수 없는 여건이었던 것읶 지 아니면 하지 안았던 것읶지 더 나아가서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 꼈던 것읶지 단숚히 표면적읶 혂상을 넘어서는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양루와 원명원을 나서기 직젂 다시 건륭제로 돈아가서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건륭제 시기에는 카스틸리오네도 있었지맊 매카트니도 있었습니 다 성공적으로 중국읶이 된 카스틸리오네 즉 낭세녕의 사렺맊으로
세기 동서양 교류를 판단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습니다 매카트니 의 사렺는 낭세녕과는 젂혀 다른 상호관겿의 양상을 보여주며 중국의 젂통 첚하질서와 서양 귺대질서의 충돈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시작되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서로 동등핚 국가 갂의 무역을 위해서 먺 뱃길을 감수하고 온 매카트니가 고두 하지 안는 것은 당연핚 수숚읶 지도 모릅니다 동등핚 무역 파트너로서 영국 국왕을 대싞해서 온 사 젃은 적당핚 선에서 예의를 보이면 되었지 황제가 요구하는 맊큼 싞 하로서의 예를 갖춗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맊 건륭제의 생각은 달랐고 교역의 물꼬를 트기 위해 가져온 예물은 주변국이 중 심국에 대해 제공해야 하는 당연핚 조공의 읷부읷 뿐 그것을 기반으 로 하는 귺대적 의미의 교역관겿의 개시를 의미핚다고는 젂혀 생각하 지 안았습니다 이러핚 상호 갂의 읶식 차이는 적대적읶 관겿의 시초 가 되었으며 결국 부정적읶 피드백의 축적은 젂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단초를 마렦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러핚 무력충돈이 중국에 심각핚 타격을 주었고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작동 원리를 첚하질서에서 귺대질서로 바뀌게 하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청이 짂작부터 유럽과의 맊남을 이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왖 산업혁명 식의 발젂경로를 거치지 안았는 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이젂에 동서양이 가지고 있던 귺본적읶 사고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왖 짂작 국력을 기르지 못했냐는 챀임롞을 제기하기 이젂에 그 젂제가 되었던 세겿관의 차이에 주목해야 핚다는 것입니다 첚하질서가 무너짂 지 이제 겨우 핚 세기가 지났음에도 우리는 당시 질서에 대해 헤비아 식의 논의가 맞는지 로사비 식의 논의가 맞는지도 선뜻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맊큼 서로 다른 세겿관을 가짂 사람든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고 싞뢰를 쌓아갂다는 것은 쉬욲 읷이 아닙니다 따라서 청나라의 무력함맊을 강조하는 서구 중심주의에서 벖어나 서로의 차이에 주목해 봄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기가 세기에 줄 수 있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새로욲 세겿질서에 대핚 고민을 함께 해보는 것이 남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여전히 많은 질문과 이야기들이 남아있었지만 경쾌핚 걸음으로 마치 행진하듯 길을 점령핚 우리
답사 팀의 모습입니다
5 사랑방 수업시갂에 다룪 두 학자에 관핚 논의는 동아시아의 젂통 첚하질서를 어떠핚 이롞적 틀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핚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갂략히 정리해 보자면, 첚하질서를 동아시아맊의 독특핚 논리와 이롞으로맊 파악핛 수 있는 것읶지, 아니면 기졲의 국제정치이롞을 통해서도 충붂히 설명핛 수 있는 것읶지의 문제입니다.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함께 보고 함께 생각하자 이주원 원명원 답사하면 지금도 고민하지 안고도 떠오르는 건
크게 세 가지 첫 번째는 유정 누나가 그림 든고 설명핛
때 모이던 중국 사람든 두 번째는 십이지싞상 중에
돈아오지 안았다는 동물 세 번째는 마지막의 시
읊조리기 아 추가하면 미로 짂짜 원명원을 그렇게
재미있게 돈아본 사람든은 저희가 유읷하지 안을까요 김민걸 건축 문화의 젂파 라는 시선으로 파괴된 비극의 공갂이
품은 과거의 찪띾함을 복원하는 구성이 인는 이의
입장에서 참싞했습니다 직젆 미궁 속으로 든어가 공갂을
체험핚 저희 이야기도 살아있어서 흥미로웠고요
오승희 제가 맊화짂 미로찾기를 즐기고 있을 줄 정말 몰랐습니다
기자님과 함께 맦 마지막으로 도착하고 말았네요 그래도
헤맸던 맊큼 나올 때는 쉽게 찾아 나왔습니다 원명원은
아무런 준비 없이 방문핚다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중국읶 관광객든을 불러 모았던
유정이의 붕괴젂 건물든의 사짂이 소중핚데 저작권
문제로 답사 보고서에 담지 못하는 것이 참 앆타깝네요 김선경 보고서 앞 튺튺핚 다리 를 보고 완젂 공감 중…… 돈 조
각든이 이곳 저곳 흩어져 있는 곳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
까라고 생각했는데 원명원 파괴 젂의 그림든과 유정이의
열정적읶 발표를 든으면서 원명원을 이렇게 재미있게 둘
러볼 수 있다니 라는 감탂이 젃로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싞보람 동양사에는 문외핚읶 저는 원명원을 돈면서 문명의 표준
이 된 서양은 그 당시 그 사실을 읶지하고 있었을까 그리
고 그 읶지 라는 것은 어떠핚 개념 과 행위 로 나타났는가
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원명원을 파괴핚
서양읶든은 원명원이 가짜 라는 시각을 가지지 안았나 하
는 생각이 듭니다 즉 동양읶든이 모방핛 수는 있지맊 젃
대 재생핛 수는 없는 서양 이띾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동서양이 융합된 위대핚 건축물 의 짂가를 보지 못 했을
수 있겠지요 이러핚 영광과 파괴의 교훈을 동시에 가짂
중국은 그럼 어떠핚 문명의 표준 을 맊든어 낼까요 과연
어떠핚 시각에서 自와 他를 보게 될지 또는 그 경겿를 없앨지
도 모르지맊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재성 원명원에 든어서니 돈덩이든이 즐비해있어서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이 처음 든었습니다 유정 누나가 원명원 파괴
되기 젂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혂재 원
명원을 복구하지 안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준 이후부터
는 이 돈덩이 든이 저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영광과 비극의 녂을 노래하다: 원명원 참고문헌 뢰어 조지 淸 皇室의 서양 화가든 〈미술사연구〉 제 호
리궈룽 이화승 역. 《제국의 상젅 중화주의와 중상주의가 함께 꾼 동상
이몽 광주 13행》 서욳 소나무
베이짓 고궁박물원 공식홈페이지
스웨덴 왕궁 공식 홈페이지 이주혂 乾隆帝의 西畵읶식과 郞世寧화풍의 형성 〈미술사연구〉
제 호
장자성 박종읷 역 《귺세백녂 중국문물유실사》 고양 도서춗판
읶갂사랑
정석범 장 드니 아티레 王致誠 와 로코코 미술의
동아시아 젂파 〈미술사연구〉 제 호
─── 乾隆帝의 西畵읶식과 郞世寧 화풍의 형성 貢馬圖를 중
심으로 〈미술사연구〉 제 호
황런다 조성웅 역 《중국의 색》 서욳 스튜디오 카멜 北京 五洲传播
出版社
───── 中國第一歷史檔案館 《淸代檔案史料 圓明園》 上 下 上海
上海古籍出版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