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천년의 수도 베이징에서 새천년을 그리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유리창(琉璃厂) · 김민걸 · 한양대학교
이것만은 알고 가자!
◆ 위 치: 北京市 西城区 南新华街
◆ 개관 시간: 1 일 24 시간(개별 상점의 영업시간은 각각 다름) ◆ 휴 무: 연중무휴(개별 상점의 휴무일은 각각 다름)
◆ 요 금: 별도의 입장료는 없음
◆ 가는 방법: 버스 이용 시 6, 102, 106, 109, 603 번 탑승 이후 류리창 정류장 하차
지하철 이용 시 2 호선 허핑먼(和平门)역 하차
들어가며
2014 년 12 월 26 일 오후 5 시경, 국가박물관을 나서며 베이징과 첫 만남이 이루어진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선의 효율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다음날 저녁에 예정되었던 유리창 문화로(琉璃廠 文化路) 방문이 당일 저녁으로 앞당겨졌습니다. 국가박물관에서 유리창으로 향하는 차 안, 머릿속에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낙관론과 ‘매를 먼저 맞으면 더 아프다.’라는 비관론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간신히 자료집을 꺼내 찬찬히 발제문을 읽으면서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는 다가오는 만남을 제대로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에서 서로 800m 남짓한 길가 일대에 100 개 정도의 서점과 화랑이 밀집한 유리창 거리. 약 250 년 전 그곳을 거닐었던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남긴 기록과 다녔던 장소를 방문함으로써 그의 꿈과 삶을 헤아려야 했기에 더욱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야만 했습니다. 유리창에 도착한 이후, 곧바로 사랑방 현장 답사 팀을 이끌고 유리창 동로와 서로의 교차지점에 위치한 기념비로 향했습니다. 찬바람에 우두커니 서서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기념비 옆에서 현장 분위기를 체감하니 긴장이 조금씩 풀렸습니다. 한층 차분해진 마음으로 1766 년 유리창과 홍대용의 만남에 주목하게 된 연유를 생각하며 2014 년 베이징과 사랑방의 두 번째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18 세기 유리창과 홍대용의 만남을 추적하며
오늘날 중국 베이징의 관광명소로 알려진 유리창은 원래 원·명나라 때 국영 가마터가 건설되어 황궁에서 사용하는 유리 기와와 벽돌을 만드 는 공장이었습니다(베이징 관광국 2014). 천자(天子)로 추앙 받던 중국 황 제가 거주하는 신성한 공간에서 쓰이는 물품을 제조하는 공간이니만 큼, 이 공장에서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기와를 구울 때면 더구나 금 기하는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속 기술자라 하더라도 모두 넉 달치 의 먹을 식량을 갖고 들어가되 한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오지 못했 다고 합니다(사행록 역사 여행 2014). 동아시아 천하질서를 관장하던 고대 중국의 첨단 제조업이 결집된 유리창은 ‘강건치세’(康乾治世)라고 불리 는 청의 전성기에 골동품을 판매하는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특히 건륭제가 중국판 백과전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만들면서 각지 의 서적상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점 또는 책방을 만들면서 유리창은 한족 관원과 재야 문인 등 당대 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지식공간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베이징 관광국 2014). 18 세기 청을 방문 했던 조선 연행사들 역시 중원을 관통하는 지식의 용광로와 같은 유 리창을 방문하여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대량의 서적을 국내로 들여와 조선이 급변하는 천하의 지식질서로부터 동떨어지지 않게 하 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홍대용은 18 세기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자로서 주자학의 교조적 인 경직성으로 질식해가던 조선 사회에 숨통을 트이게 했던 최고(最 古)의 선각자였습니다.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난 홍대용은 열두 살의 이른 나이에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10 년 이상 고학(古學)을 공부하다가, 20 대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명종과 혼천의를 제작하고 천 문관측소를 세우는 등 천문학에 관심을 쏟았습니다(실학박물관 2014). 당 시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지식 질서를 장악하고 있던 사대부들의 절대 다수가 16 세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벌인 이기론(理氣論)의 패러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추상적인 논쟁에 갇혀있었던 것이 18 세기 조선의 현실이었습니다. 홍대용은 18 세기 조선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진출하지 못했던 아웃사이더(outsider)였지만, 산업혁명에 힘입어 급속 도로 전파되기 시작했던 서구식 근대 과학의 도움 없이도 지구자전설 과 우주무한설을 주장했던 아웃라이어(outlier)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리창에 다녀온 이후 홍대용이 남긴 연행 기록에는 소중화 사상 과 북벌론이 지배하는 18 세기 후반 조선의 전통지식 질서에 도전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북학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실학자가 지녔던 ‘새로 움’과 ‘앎’을 향한 열정이 온전히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홍대용이 품은 열정은 누군가와의 ‘만남’에 따라 예상치 못한 한계에 부딪히거나, 새 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번 현장 답사를 위해 격변 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곱씹어보기 위 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홍대용의 체험을 최대한 실감나게 그려내는 작 업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새로움’과 ‘앎’을 중심으로 18 세기 유리 창 일대에서 이루어진 홍대용과 서양 신부 유송령, 중국 황족 양혼, 중국 선비 엄성과의 만남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세 번의 만남을 극적인 순간을 기준으로 각각 세 개의 장면으로 나눠서 재구성한 각 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서울의 인사동 거리만한 유리창에 깃든 이야 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꿈같던 첫 번째 만남_천주당에서 서양 신부 유송령을 만나다 장면 #1. 유리창에 도착하여 천주당으로 향하는 홍대용
1766 년 1 월 9 일 홍대용은 진귀한 서양 물건이 가득하기로 유명한 천주당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진심을 담은 편지와 예물로 신부의 허락을 얻음으로써 연행사의 숙소에서 가장 가까웠던 남당(南堂)으로 향합니다(정민 2014, 204). 천주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홍대용은 경성을 떠나 북경에 이르는 지난 두 달을 가만히 되돌아봅니다. 쌀쌀한 가을 날씨가 코끝을 찡하게 하는 작년 11 월 초에 홍대용은 그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족과 친지를 뒤로하고 북경 연행 길에 올랐습니다.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작아지는 한양의 도성과 함께 고향은 점점 멀어지고, 조선과 청의 경계인 압록강 건너편 요동 벌판 너머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이역(異域)이 다가옵니다. 홍대용에게 익숙함과의 헤어짐과 낯섦과의 만남은 곧 그가 오랫동안 품었을 중국 연행에 대한 동경과 기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보지 못하니
남아의 의기 쟁영(崢嶸)함을 저버렸도다.
미호(迷湖) 한 굽이에 고기 낚는 배가 적으니
홀로 도롱이를 입고 이 인생을 웃노라(홍대용 2001, 19). 조선 중기의 뛰어난 유학자였던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이 중국 연행을 다녀와서 훗날 연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겼다는 이 한 편의 시를 접한 이후로 홍대용은 농암 선생이 말한 그 ‘넓음’을 보는 것을 평생에 이룰 ‘꿈’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 꿈에 대한 갈망으로 틈틈이 역관으로부터 한어(漢語)를 배우고 간간히 중국의 정세를 챙겼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홍대용은 산해관의 만리장성에 올라 다시 한 번 농암 선생의 시를 읊으면서 흉금을 헤쳤습니다.
농암 선생이 남긴 시를 읊으며 연행에 오르게 된 자신의 마음가 짐을 되돌아보던 홍대용은 이내 현실로 돌아와 북경에 도착하여 여독 을 푼 이후에 첫 방문지로 천주당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되뇌어 봅니 다. 홍대용은 농암 선생의 동생으로 17 세기를 대표하던 조선 유학자 로서 중국 연행을 다녀왔던 노가재 김창업(老稼齋 金昌業, 1658~1722)이 쓴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떠올렸습니다. 노가재 선생이 연행록을 남 긴 이후로 천주당은 조선 연행사가 반드시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는데, 그곳에는 저만치 멀리 있는 별을 요만치 가까이 있는 콩처럼 보이게 해주는 안경과 네모 낳고 기다란 말뚝을 밟으면 소리가 나는 악기 등 진귀한 서양 물건을 볼 수 있다는 기록이 조선 사신들의 호기심을 자 극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사행록 역사 여행 2014). 노가재 선생의 기록이 정 확하다면 천주당은 청을 넘어선 저 너머의 ‘새로움’과 ‘앎’을 품은 장 소일 것이라고 홍대용은 생각했습니다. 젊은 날 홍대용은 부모님의 실 망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스승을 찾아 고향을 떠났고, 마을 사람들의 의혹과 무관심 속에서도 자명종과 혼천의를 만들고 관측소를 세웠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꼭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다.” 농암과 노가재 형제의 연 행 이후에 천주당에서 제멋대로 물건을 만지고, 바닥에 침을 뱉고, 담 배를 펴대는 등 조선 사신들의 무례함에 질려버린 예수회 신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성스레, 그리고 간절하게 편지와 예물을 준비하던 홍 대용이 몇 번이고 되뇌었던 바입니다(정민 2014, 203-204).
장면 #2. 소통의 장벽에 갇혀버린 홍대용과 유송령의 만남
숙소를 떠난 내내 상념에 젖어있던 홍대용은 천주당 남당의 뾰족한 상단이 눈에 들어오자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서양식 그림으로 가득한 바람벽으로 둘러싸인 천주당 건물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일행과 함께 남당 안으로 들어간 홍대용은 풍부한 색감의 서양화를 둘러보며 진짜 사람으로 착각할 만한 생동감에 홀린 듯 넋을 잃게 됩니다. 남당을 관리하는 신부들이 들어온다는 일행의 기별에 정신을 차린 홍대용은 그들을 공손히 맞으러 출입문으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서양인치고는 키가 작고 몸집이 둥근 두 명의 신부가 예를 갖춘 홍대용 일행의 인사에 정중히 답례하면서 들어옵니다. 훗날 홍대용은 연행록에 천주당 신부들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유송령은 나이가 예순둘이고, 포우관은 나이가 예순넷이었다. 유송령은 양람(亮灆, 암청색) 정자를 붙였으니 종 2 품 벼슬이었고, 포우 관은 암백(暗白, 회색) 징자를 붙였으니 6 품 벼슬이었다. 그러므로 송령이 나이가 적음에도 우관의 위에 앉았다. 두 사람이 다 머리를 깎고 온몸에 호복(胡服)을 하였다. 중국 사람과 분별이 있고 나이가 많아 수염과 머리가 세었으나 얼굴은 젊은이의 기색이었으며, 두 눈이 깊고 맹렬하여 노란 눈동자의 이상한 정신이 사람을 쏘는 듯하였다 (홍대용 2001. 160).
“비록 뇌물과도 같은 예물을 찔러주기는 했지만 조선 사신들이 범한 무례를 용서하고 홍대용 일행의 천주당 방문을 허락한 대인(大 人)들에게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첫 만남에 서 유송령과 포우관 두 신부로부터 왠지 모르게 ‘노란 눈동자의 이상 한 정신’으로 표현된 이질감을 느낀 홍대용은 낯선 이들과 처음 대면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한 이들이 흔히 느끼는 데면데면함으로 알고 넘기려 했습니다. 더구 나 상대는 난생 처음 만난 이역만리의 서양인들이니 더욱 그러할 것 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추슬렀습니다. 첫 만남의 멋쩍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대용은 통역으로 따라온 홍명복을 시켜 유송령과 대화를 시도 했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바가 많아서 상당히 답답했습니다. 짧 은 한어로 유송령의 고향이 청에서 얼마나 멀고, 유송령이 청에 온 지 얼마나 되고, 유송령이 한자를 아는 지 등 사소한 얘기를 주고받 았을 뿐이었습니다(정민 2014, 216).
김빠진 대화가 지속되는 데 맥이 빠질 찰나에, 유송령이 중국 황 실이 관장하는 흠천감(欽天監, 중국 명·청 때 설치된 국립천문대)의 총책임자 인 흠천감정(欽天監正)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홍대용은 소통이 어렵 더라도 대화를 이어나갈 명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홍대용 이 기운을 차리는 것을 눈치 챈 홍명복은 일행 중 함께 온 서운관(書 雲觀, 조선 시대의 천문 담당 관청) 관원 이덕성을 가리키며 그가 유송령에 게 천문 관측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홍대 용의 주된 관심이 천문학이었으니 이를 빌미로 유송령과의 대화를 이 어가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이덕성이 한어를 할 줄 몰라 그러한 의도 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다행이었고, 유송령이 정중히 그 제안을 거절 한 것 또한 다행이었습니다. 홍대용은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가 옮겨 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홍명복을 통해서 그가 청춘을 바쳐 매달린 천 문학 연구의 결정체인 《의산문답》(醫山問答)의 우주무한설을 유송령에 게 설명했습니다. 하늘이 운행하는 것은 지구가 도는 것과 그 형세가 한가지이므로
나누어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지구는 9 만 리의 둘레를 매일 한
바퀴씩 돌아 그 속도가 회오리 바람처럼 빠르다. 저 하늘의 별들은
지구에서 겨우 반지름만큼 떨어져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천만 억의 거리인지 알 수 없다. 더욱이 별들 밖에는 또 별들이
있다. 하늘에는 끝이 없어 별들 역시 무궁무진하며, 하늘의 둘레를
말하자면 한량없이 멀다. 하루에 도는 속도를 생각해 보면
천둥번개나 포탄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정교한
역법으로도 계산할 수가 없고 제아무리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다
이야기할 수 없다. 하늘만 운행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음은
여러 말이 필요 없다(홍대용 2008, 70-71).
장면 #3. 파이프오르간으로 조선 가락을 연주하는 홍대용
홍명복의 재치 덕분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졌던 홍대용은 이윽고 유송령의 답변을 듣고는 역시나 하는 실망감을 갖게 됩니다. 홍명복이 그의 과학 사상을 제대로 알아듣고 뜻을 정확히 전달할 거라고 과신한 홍대용의 잘못이 컸습니다. 홍대용과 유송령 간의 언어적 장벽을 논하기 이전에, 홍대용과 홍명복 간의 지적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겨우 홍명복을 이해시키고 유송령에게 말을 전달해도, 그가 홍대용의 우주론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송령과 홍명복의 소통은 언어·지적 이해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으나, 홍대용-홍명복-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유송령 사이에 얽힌 대화의 실타래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시 현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천문학자 사이에 끼여서 치였을 홍명복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홍대용은 유송령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천주당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뜻도 모를 긴 대화에 다소 지쳤을 유송령이 선뜻 자처해서 홍대용 일행을 인도했습니다. 홍대용은 이전에 노가재 선생의 연행록을 읽으면서 ‘새로움’과 ‘앎’을 품었으리 라고 기대했던 천주당과의 만남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것에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 실망감이 천주당 곳곳에서 눈에 띄는 머리를 풀어헤친 서양인의 그림이 유송령을 처음 만나면서 느낀 ‘노란 눈동자의 이상한 정신’을 떠올리게 하면서 불쾌감으로 바뀌어 갈려던 찰나였습니다. 홍대용의 눈에 건물 내부 벽에 의지하여 만든 높은 누각의 난간 안에 놓여있는 기이한 물건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개 이 악기의 제도는 바람을 빌려 소리를 나게 하는데, 바람을
빌리는 법은 풀무 제도와 같았다. 그 고동은 오직 동쪽 틀에 있으니,
자루를 누르면 가죽이 차차 펴져서 어느 구석의 구멍이 절로 열려
함께 바람을 틀 안에 가득히 넣은 후에, 자루를 놓아 바람을 밀면
들어오던 구멍이 절로 막히고 통 밑을 향하여 맹렬히 밀어댄다. 통
밑에 비록 각각 구멍이 있으나 또한 조그만 더데를 만들어 단단히
막은 까닭에, 말뚝을 눌러 틀 안에 고동을 쫑기어 구멍이 열린
후에야 비로소 바람이 통하여 소리를 이루고, 소리의 청탁고저는 각각 통의 대소장단(大小長短)에 따라 음률을 다르게 하는 것이다. 틀
속은 비록 열어보지 못하였으나 겉으로 보아도 그 대강의 제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유송령을 향하여 그 소리 나는 곡절을
형용하여 이르니, 유송령이 웃으며 맞는 말이라고 하였다(홍대용 2001,
165).
서양인들이 숭배하는 천주(天主), 즉 하느님에게 제사할 때 연주하는 풍류라는 유송령의 설명을 듣는 순간, 홍대용은 노가재 선생의 연행록에서 읽은 진귀한 서양 악기를 떠올립니다. '나는 그것을 꼭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다.' 악기를 연주하고 싶다는 부탁에 난색을 표하는 유송령에게 몇 차례나 청하면서 홍대용은 수 차례 되뇌었습니다. 결국 승낙을 얻어 직접 악기에 올라가 홍대용이 연주한 조선 가락. 낯선 만남에 당황하고 뜻대로 풀리지 않은 대화에 모두가 지친 하루였지만 그 가락을 듣는 유송령과 홍명복을 비롯한 조선 연행사 일행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집니다. 직접 가락을 연주하는 홍대용의 입가에도 말입니다. 꿈같던 두 번째 만남_진가의 상점에서 중국 황족 양혼을 만나다 장면 #1. 유리창 일대 상점에서 양혼을 만나는 홍대용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1766 년 1 월 10 일 홍대용은 문시종(問時鐘)이라는 또 다른 진귀한 서양 물건을 구경하기 위해서 진가(陣哥)라는 상인이 운영하는 가게로 향합니다(정민 2014, 187). 홍대용은 어제 천주당 남당에서 유송령 신부와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피곤했지만 마지막에 서양 악기를 연주하면서 답답함과 아쉬움을 해소할 수 있었기에, 다시금 ‘새로움’과 ‘앎’에 대한 기대를 품고 거리로 나섭니다. 소리를 내어 제 시간을 알려준다는 이번 서양 물건은 연행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가 천문학을 연구할 때 상당히 요긴한 것이기에 그 기대감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 물건을 갖고 있다는 양혼은 중국인이니 그동안 틈틈이 공부한 한어로 대화하다 막힐 때에는 한자 실력을 발휘하여 필담을 나누면 되니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뜻을 전하지 못하는 불상사도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양혼은 청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강희제의 증손이라고 하니, 중원을 통치하는 황제의 핏줄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지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문시종을 매개로 하여 찾아온 셈입니다. 서양 신부에 이어 중국 황족까지 만나게 된 홍대용은 다시 한 번 농암 선생의 시를 떠올리며 ‘넓음’을 향한 ‘꿈’의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북경 연행의 매 순간은 어렸을 때부터 고리타분한 성리학 경전에 얽매이길 거부했던 홍대용이 기다려왔던 순간으로 가득했습니다. 진가의 안내에 따라 상점 내부의 작은 방 안에 들어간 홍대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양혼과 만나게 됩니다. 훗날 홍대용은 연행록에 양혼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양혼의 나이는 31 세인데, 얼굴이 붉고 수염이 없으며, 몸집은 크고
걸차 문아(文雅)한 맛은 적었다. 그러나 기미(氣味)가 너그럽고
무거워서 함부로 떠들거나 웃지 않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옛 친구를
만난 듯이 대답하는 것은 아마 만주 사람의 소성(素性)이 그런
듯하였다(한국고전종합 DB 2014).
홍대용은 거대한 체격에 험상궂은 인상을 한 양혼을 보고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중국 황족이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조선 연행사의 일원으로 참석한 선비를 예우하는 태도와 호탕한 웃음에서 양혼의 됨됨이를 파악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명나라 이후에 중국은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없다.”라고 핏대를 세우며 숭명멸청(崇明滅淸)을 부르짖는 한양 궁궐의 사대부들을 떠올렸습니다. ‘만에 하나, 고매한 주자학의 대가들께서 북경 연행에 동참했다면 천하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지난날 두 차례 호란의 치욕을 갚자는 북벌론이 융성한 청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고 강성한 청 앞에서 얼마나 위태로운 주장인지 각성할 수 있을까?’ 짧은 순간 마음속으로 던진 물음에 대답하자니 홍대용은 그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다시 양혼과 마주앉은 현실로 돌아온 홍대용은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양혼에게 말을 건넸고, 이에 양혼은 활 쏘기와 말 타기, 한어와 몽골어를 익히는 데 전념하느라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이외에는 독서한 것이 전무하다고 답했습니다(정민 2014, 187). 대화 주제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눈치 챈 홍대용은 학문의 짧음을 개탄하는 양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의 도리는 마음에 있고 글에 있지 않으며, 교제하는 도리는 질
(質)에 있고 문(文)에 있지 않습니다. 세간에서 독서를 많이 하고 문
장을 잘하는 이로서 흔히는 밖을 속이고 잘못된 것을 꾸며서 자기의
천진(天眞)을 잃어버리는 이가 많으니, 귀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한국고전종합 DB 2014). 장면 #2. 어색함과 호탕함을 넘나드는 홍대용과 양혼의 만남 첫 만남에서 사람의 도리는 학문이 아니라 인품에 달렸다고 말하는 홍대용에게 감탄하게 된 양혼은 푸짐하게 차린 술과 안주상을 들여와 흥을 돋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본래 술에 취해 흥에 겨워 노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홍대용은 조선의 주금 정책과 본래 술을 못함을 이유로 들어 양혼의 잔을 계속해서 거부합니다(정민 2014, 188). 양혼이 성내는 기색까지 보이자 홍대용은 마지못해 술 한 잔만을 입에 털어놓고 더 이상 잔을 들지 않았으며, 강한 술기운과 향내에 정신이 아찔하여 입에 맞지 않는 안주거리를 많이 먹지도 못합니다(정민 2014, 188). 결국 술 마실 흥이 다한 양혼은 상을 물리고 담배를 피우며 말없이 홍대용과 앉아있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맙니다. 서로 말은 통하였으나 이번에는 술이 문제였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만 있던 홍대용은 양혼이 허리에 차고 있던 두 개의 주머니에 눈길을 주게 됩니다. 이를 알아 챈 양혼은 주머니를 풀어서 홍대용에게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침이 움직이며 시간을 알려주는 일표(日表)라는 물건이며, 또 하나는 소리를 울려 때를 알려주는 문종(門鐘)이라는 물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내 홍대용은 일표와 문종을 탐구하고 싶은 호기심에 휩싸이게 되고, 양혼에게 대뜸 며칠 동안 빌릴 수 있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누가 봐도 양혼이 “푸짐하게 차린 술과 안주상에는 상대방을 무안하게 할 정도로 전혀 관심이 없고 비싸고 진귀한 서양 물건은 느닷없이 빌려달라고 무례한 부탁을 하다니, 정말 염치없는 사람이 아닌가!” 라고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반문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양혼 역시 홍대용의 호기심 어린 부탁을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어색한 침묵이 깨진 것에 기분이 좋아져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일표와 문종을 빌려줍니다(정민 2014, 189). 홍대용은 단번에 일표와 문종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여 훗날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세 번을 치는 것은 미시(未時)의 정각(正刻)이요, 연거푸 두 번을 치는
것은 2 각(二刻)이다. 묻는 법은, 조그마한 자루(柄)를 가만히 대면 종
이 울리며, 연달아 물어도 그 수는 변하지 않는다. 조금 있다가 또
물어도 연거푸 세 번을 치니, 이는 3 각인 것이다. 시간과 분각에 따
라서 각각 그 수가 다르며, 묻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 들으니, 이
것은 서양에서 생산된 것으로서, 시기(時器, 시계(時計)를 뜻함) 중의 지
극히 교묘한 것이라 한다(한국고전종합 DB 2014).
장면 #3. 귀국 이후에도 양혼과 안부를 주고받는 홍대용
예기치 않은 어색한 분위기가 지배했던 짧은 만남이었지만, 홍대용의 올곧은 의리에 깊은 인상을 받은 양혼은 훗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 면서 선물을 챙겨주려 합니다. 홍대용은 타국에서 멀리 온 일개 선비 를 극진히 대접하려는 양혼에 대한 고마운 마음만 기억하겠다며 정중 히 사양합니다. 그래도 양혼이 진가를 통해 무려 100 금이 넘는 고가 의 서양산 문종을 선물로 전한다는 뜻을 전했으나, 홍대용이 선물 받 기를 거절하며 진가의 상점에 양혼이 선물한 문종을 두 차례나 주고 돌려받는 진풍경이 벌어지게 됩니다(정민 2014, 190-195). 이번에는 홍대 용과 양혼을 사이에 두고 중간에 낀 진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게 된 것입니다. 결국 양혼의 성의와 진가의 한탄에 마지못해 선물로 받은 문종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간 홍대용은 다음 연행사를 통해 양혼에게 고장 난 문시종과 함께 안부를 묻는 편지를 전달합니다(정민 2014, 197). 홍대용은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어찌 보면 집요하리만큼 극진한 예우로 대접했던 양혼의 호탕한 웃음을 떠올리며, 홍대용은 양 혼이 보낸 답장을 북경에서 교류한 청의 문인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모은《계남척독》(薊南尺牘)에 실었습니다.
헤어진 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연경에서 만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
니 먼 그리움을 어찌 이기겠습니까. 저는 못나고 곧이곧대로요, 어리
석은데도 친하게 대해주심을 입었습니다. 다만 각자 하늘 한 모서리
에 떨어져 있는지라 마음이 안타까워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근래 편
지를 받자옵고 형의 복이 날로 더함을 알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
다. 게다가 먼 곳에서 후한 선물을 보내심이 지극히 많은데, 물리치
자니 예가 아닐 듯하여 다만 감사를 전할 뿐입니다. 부쳐오신 문시
종은 바로 좋은 장인을 찾아 수리한 후 놓아두고 잘 맞을 때를 기다
려 다시 올려드리겠습니다. 언제가 될는지는 아직 정할 수가 없습니
다. 근년 들어 저는 그만그만합니다. 그럭저럭 조용히 지내며 벗들과
어울릴 뿐입니다. 다만 소식 편에 알려드립니다. 근래 속무 때문에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이만 줄이옵고 다 갖추지 못합니다. 애오라지 인편에 거친 물건 몇
가지를 갖춰 안부를 여쭙니다. 양혼 드림(정민 2014, 198).
꿈같던 세 번째 만남_유리창 거리에서 중국 선비 엄성을 만나다 장면 #1. 이기성과 마주친 중국 선비들을 만나러 가는 홍대용 1766 년 2 월 3 일 홍대용은 비장(裨將) 이기성을 따라서 유리창 부근에 머물고 있던 두 명의 중국 선비를 만나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이번 만남은 사실 천주당과 유송령, 진가의 상점과 양혼의 경우처럼 홍대용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단은 이기성이 1 월 26 일 유리창 거리에 나가 쓸 만한 안경을 구하러 나간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기성은 눈이 안 좋은 지인을 위해 코앞만 잘 보이는 사람은 먼 산을 내다보게 하고, 먼 산만 잘 보이는 사람은 코앞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안경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이기성이 구하는 안경은 주로 중국을 통해 조선에 전래된 안경은 연세가 지긋하셔서 눈이 침침하신 사대부 양반들이 오랫동안 독서를 하기 위해 쓰던 서양 기물(奇物)이었습니다(정민 외 2013, 36). 조선에서는 힘 꽤나 있고 돈 꽤나 있으신 양반들이 살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하고 비쌌기에, 유명 안경점들이 많은 유리창 거리에서 안경을 구하려는 것이 애초 이기성의 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웬걸, 일개 비장이 사비를 털어 살만큼 값싸면서 좋은 안경을 구하는 것은 이기성의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쁜 눈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지인을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기성의 시야에 안경을 끼고 있는 중국 선비 두 명이 포착됩니다. 안경을 구해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이기성은 초면인 두 선비에게 대뜸 값을 쳐줄 테니 안경을 팔라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이에 한 선비가 망설임 없이 안경을 건네었고 굳이 돈을 건네려는 이기성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합니다. 두 선비의 정직함을 예사로 안 것에 부끄러워진 이기성은 그들이 절강(浙江, 절강성 항주) 출신이고, 간정동(乾淨衕, 유리창의 골목 이름)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홍대용은 중국 선비들의 올곧음에 이끌려 예정에 없는 만남을 결심하게 됩니다(정민 2014, 34).
절강은 이곳에서 수천 리 밖이라. 수천 리 밖에서 과거를 위하여 행
역(行役)의 괴로움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필연 명리(名利)의 마음이 깊
은 사람이니 어찌 높은 소견이 있으며 족히 더불어 말함직하겠는가?
그러나 다시 만나거든 그 사람의 거동을 자세히 살피고 인하여 내
말을 일러 조선 선비 한 명이 들어왔으니, 그대의 성문(聲問: 명성)을
듣고 한번 만나고자 한다고 하여 저희의 뜻을 보라(홍대용 2001. 205).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장면 #2. 진심 어린 마음과 마음이 통한 홍대용과 엄성의 만남 홍대용은 이기성을 통해서 안경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유리창 부근의 건정동에 머물고 있던 두 명의 중국인 선비를 직접 찾아갑니다. 홍대용은 서른다섯 살의 엄성과 스물다섯 살의 반정균, 그리고 이후에 합류한 마흔여덟 살의 육비와 함께 필담을 통해 세상살이와 학문에 대한 뜻을 나누게 됩니다. 첫 만남에서 홍대용은 마른 체구에 골격이 있는 엄성의 외모에서 그의 강단 있는 성품을 알아챕니다. 홍대용은 엄성에게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세상을 조롱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언사가 삐딱한 태도로 비쳐질 여지가 있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엄성의 말과 글재주는 분명 논리정연하고 세상의 잘못된 이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고 칭찬합니다(정민 2014, 45-46). 엄성 역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면서 개선해야 할 부분을 분명하게 짚어주는 홍대용의 진심에 크게 감동합니다(정민 2014, 46-47). 서로의 인품이 진실하고 한결같음을 알게 된 이후에는 홍대용과 엄성의 사귐은 한없이 깊어졌습니다. 홍대용과 엄성 모두 우연으로 시작된 서로의 만남이 이렇게 신실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을까요? 북경을 떠나기 직전 홍대용과 엄성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헤아리는 고도의 지적·심적 교류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있네요.
그윽히 현제의 자품(資稟)을 살피니, 격렬한 기운이 유여(裕餘)하나 혹
함축한 기상이 부족하고, 착함을 좋아함에 진실로 궁함이 없으나
사나움을 미워함에 혹 이심(已甚: 지나치게 심함)함이 있을지라. 사람이
그른 곳을 보면 포용한 덕량이 넉넉지 못할 듯한지라. 다행히
스스로 살펴 허물이 있거든 고치기를 아끼지 말고 없거든 더욱
살핌이 마땅하도다. 천만 회포는 오직 덕이 날로 새롭고 일백 복을
누림을 축수하노라(홍대용 2001. 438).
성이 사람을 사귐이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마는, 능히 이런 학문을
강론하여 서로 도와 얻기를 책망하는 자는 대개 보지 못하였더니,
이제 요행으로 과거 이름을 얻어 몸이 서울에 이르러 족하와 더불어
교도(交道)를 정하나, 실로 족하의 학문을 살피니 가히 유익한 벗이
될 뿐이 아니라 또한 가히 이름난 스승이라 일컬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귀중하여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실로 항복되니, 이는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구구한 과거를 봄이 족히 기쁜 것이 아니라 이를 빙자하여 족하를
사귐이 짐짓 큰 기쁨입니다. 족하가 매양 성의 과도히 칭찬함을
혐의로이 여기나, 그러나 성은 범범(泛泛: 데면데면함)한 시속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내게 족하의 유익함이 적지 않은 줄을
아는데, 성은 거동이 경솔하니 족하의 방엄(方嚴: 방정하고 엄숙함)한
기상이 실로 본받음이 됨직하고, 성은 말씀이 조급하고 망령되니
족하의 신묵(愼黙: 삼가서 침묵을 지킴)한 덕성이 실로 사법(師法)이
됨직합니다(홍대용 2001. 440).
장면 #3. 엄성의 죽음을 가슴깊이 통탄하는 홍대용
조선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던 홍대용은 엄성이 몹쓸 병에 걸려 36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됨을 알게 됩니다. 홍대용은 엄성이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홍대용에게 부친 두 편의 시를 건네준 조선 연행사로부터 귀국 이전에 홍대용이 선물로 준 묵향을 맡으며 숨을 거둔 엄성의 이야기도 전해 듣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를 알아주는 마음은 바로 곁에 있는 ‘천애지기’(天涯知己)였던 엄성. 이제는 흙으로 돌아간 그를 그리는 홍대용은 마냥 서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연경에서 반가운 소식 전하니 아득히 먼 해동에서 온 것이라네.
사문(斯文)이 우리에게 달려 있나니 이역(異域)이나 이 마음은 한가지
일세. 정은 이미 형제와 다름이 없고 참된 사귐 변함없이 훌륭하였지.
그리워도 서로를 보지 못하니 가을바람 맞으며 통곡한다오(정민 2014,
49).
얼굴 볼 날 없음을 슬퍼하다가 마음 논한 글월 보고 기뻐한다네.
이 편지 만리 밖서 온 것이어서 예까지 일 년 넘게 걸리었구나.
격려함엔 좋은 벗이 필요하거늘 쇠잔하여 홀로 지냄 안타까워라.
이름없이 마흔 나이 코앞에 두니 어이 차마 촌음인들 헛되이
쓰리(정민 2014, 50).
21 세기 유리창과 사랑방의 만남을 추억하며
어설프게나마 홍대용을 ‘초혼’(招魂)하여 그이의 넋을 앞세워 거닐었던 유리창 거리 위에서 희미하게나마 18 세기 동아시아 천하의 지식인들이 스치고, 엇갈리며, 사귀었던 만남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당대 조선의 지성을 대표하는 홍대용이 서양 신부 유송령, 중국 황족 양혼, 중국 선비 엄성과의 만남에서 늘 보여줬던 지적인 호기심, 그리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감사함과 충분히 교감하였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맘때면 송년회로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휩싸였던 과거의 일상에서 벗어나, 지난 한 학기 동안 서로의 꿈과 앎을 공유했던 사랑방 동기들과 함께 유리창 거리를 거닐었던 홍대용의 발자취를 가만히 뒤좇아본 경험은 분명 오랫동안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기억에 남을 일탈(逸脫)이었습니다. 유리창 거리에서 저녁식사를 할 식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층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리창 길가의 어느 서점에 들어가 18 세기 천하의 지식을 품었을 홍대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그 순간을 떠올려봅니다. ■
함께 보고 함께 생각하자! 이주원: 유리창하면 생각나는 것은 추운 날씨, 좁은 골목, 그리고
그 골목을 지나다니는 차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발표하던 민걸이. 민걸이의 설명을 따라
홍대용이 어떤 마음으로 이 곳을 방문했을지 상상하던
기억.
오승희: 해질녘 즈음 고유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민걸이의
발제가 참 잘 어울렸던 장소였습니다. 홍대용의 세
번의 만남 속 각각의 세 가지 장면들에 대한 해석을
듣다 보니, 어느 새 민걸이가 홍대용이 되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김유정: 유리창 거리는 난신화지에(南新华街)를 중심으로 동서로
뻗어 있었습니다. 우리 답사 팀은 서쪽 거리를 먼저
둘러본 뒤, 동쪽 거리로 가서 본격적인 유리창에서의
세 번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민걸이에게 들었습니다.
동쪽과 서쪽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는데, 서점이 많았던
서쪽 거리가 조금 더 활기찼고 골동품이나 유리
공예품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주를 이루었던 동쪽은
차분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18 세기 연행사들이 방문
했을 때는 과연 유리창 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있었을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상점들이 들어서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찾는 사람들,
흥정하는 사람들로 뒤엉켜 왁자지껄하지는 않았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 거리에서 1969 년 한국어로
출판된 《모주석어록》(毛主席语录)을 발견했는데, 중국어와
영어가 병기된 판본은 본 적이 있지만 한국어로 정식
출간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당시 북경에서 한국어로
된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고,
연행사들의 경우도 계획된 만남도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우연히 좋은 책과 사람을 만나서 지적 교류와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21 세기의 지식질서는
서양을 중심으로, 특히 영어를 중심으로 짜여지고 있기
때문에 18 세기의 유리창만큼 활기찬 모습은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만약 다시 지석질서의 중심이
중국으로 돌아온다면 유리창은 또 어떤 모습의 변화를
이루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김선경: 첫날 열정적으로 홍대용과 유송령, 양혼, 그리고
엄성과의 만남을 설명해준 민걸이의 발표가 기억에
남네요.^^ 덕분에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비슷한
곳이구나.’ 라는 생각만 하고 지나쳤을 유리창을 실감나게 둘러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민걸이의 글을
읽으면서 세 만남을 직접 경험한 듯 사실적으로 묘사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보람: 홍대용이 겪은 각각의 만남에서 때로는 모순될 수도
있고 때로는 보충이 될 수도 있는 ‘새로움’과 ‘앎’의
관계를 서술한 거 같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번
여행이 어떤 새로움과 어떤 알아감의 계기가 되었나요?
역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것’의 교류 장소에서 ‘옛 것’의
거래 장소가 된 유리창 탐방이 과연 ‘18 세기가 아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앎’과 ‘새로움’이란 어떤
관계에 놓여야 하나‘라는 의문을 제시하는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재성: 초저녁에 유리창에 도착하니 중국식 가옥과 거리가
즐비해있어서 중국드라마 세트장에 온 듯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거리를 걸으면서 민걸이 형이 홍대용의
유리창 방문기를 재구성했었던 것이 정말 흥미로웠고
실제로 바로 옆에 홍대용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소와 민걸이 형의 재구성이 조화를
이루어 홍대용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2. 유리창과 홍대용, 꿈같던 세 번의 만남: 유리창 참고문헌 베이징관광국. “관광명소: 유리창.”
http://visitbeijing.or.kr/detail.php?number=321&category
(검색일: 2014. 12. 1).
사행록 역사 여행. “북경체험기: 유리창.”
http://saheng.ugyo.net/user/contents/contents3/flash_map.ht
ml (검색일: 2014. 12. 8).
───────. “북경체험기: 천주당 남당.”
http://saheng.ugyo.net/user/contents/contents3/flash_map.ht
ml (검색일: 2014. 12. 8).
실학박물관. “실학자연보: 홍대용.”
http://silhak.ggcf.kr/archives/439?pn=2 (검색일: 2014. 12. 15). 정민. 2014.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파주: 문학동네. 정민 박성순 박수밀 박현규 왕쩐중. 2013. 《북경유리창: 18·19
세기 동아시아의 문화거점》. 서울: 민속원.
한국고전종합 DB. “고전번역서: 담헌서.”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검색일: 2014. 12. 15). 홍대용. 2001.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 <을병연행록>》. 김태준 박성순 역. 서울: 돌베개. ───. 2008. 《의산문답》. 김태준 김효민 역. 서울: 지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