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21세기 조선통신사, 규슈에 가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이주원 · 고려대학교
들어가며
1895년 7월 25일 충남 아산에서 포성이 울리면서 두 개의 세계질서가 충 돌합니다. 하나는 기존 천하질서 하에 동아시아를 두려는 청나라의 것이 었고, 다른 하나는 근대 국제질서를 받아들인 일본의 것이었습니다. 그 충돌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반적인 동원능력에서 앞서는 청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한 독일 언론의 예상을 비웃듯, 치열한 준비를 통해 국가의 명운을 걸고 맞붙었던 일본 측의 승리로 흘러갔습니다(Paine 2003, 146). 바로 청일 간, 아니 동아시아의 역사를 통틀어 사상 처음으로 한쪽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압박하는 쪽이 일본이 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방문한 이 곳, 시모노세키 일청강화기념관
(下関 日淸講和記
에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전권을 부여 받고 협상을 벌였던 사람들 念館)
은 당시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 와 외상인 무쓰 무네미쓰
(伊藤博文) (陸奥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출발이자 도전이었던 宗光)
청일전쟁을 추적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이 강화되었던 19세기 말의 동아시아. 이를 국가적 위기이자 기회로 판단했던 당시 일본 지도자들의 세계관을 생각하며 이 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당시 전쟁 발발 전 일본 지도자들이 어떠한 꿈을 꾸었 기에 청일전쟁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 려고 합니다. 또한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이 어떠한 노력을 했는 지를 살펴보고, 실제로 이것이 어떻게 전쟁으로 발전되었는지 살펴보 겠습니다. 그리고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 과 이토 히로부미의
(李鴻章)
만남을 통해,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진정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삼국간섭으로 좌절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으로는 청일전쟁, 그 120년 후의 시모노세키에 여전히 울리고 있는 동아시아의 이야기를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토와 무쓰의 꿈,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무쓰 무네미쓰가 자신의 외무대신 시절을 회고한 《건건록》은 청일전 쟁을 전후하여 청, 조선, 일본과 이를 둘러싼 열강 간의 여러 사건들 을 스스로의 경험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일본 입장에서 서술한 외교 비망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무쓰 1993). 당시 일어난 외교 사건들을 실제로 담당한 최고 책임자가 남겨놓은 회고록이기 때문에 역사서로 서나 연구문헌으로서 그 가치를 높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무쓰 무네미 쓰는 이 책에서 청과 일본의 충돌의 내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일본의 옛 모습이 거의 바뀌어 신일본의 중흥을 이룩
하였으므로 당시의 선진국인 유럽 각국을 놀라게 하기에 충
분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청국은 옛 모습
그대로며 내외의 형세에 따른 변혁을 꾀하지 못해, 한쪽은 서
구문명을 대표하고 다른 한쪽은 동양의 옛 모습을 그대로 견
지하고 있는 차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중국을
깨어나지 못한 일대 보수적인 국가라고 비하하고 있는 형편
이다. 이에 대해 그들도 우리를 보고…… 모방하고 있는 하나
의 작은 섬놈들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는지라…… 내면적인
논쟁의 근본은 분명 서구적 신문명과 동아적 구문명과의 충
돌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무쓰 1993, 64-65).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청이 동아적 구문명, 일본이 서구적 신문명으로서 위치한다는 것은 크게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국가적 역량의 측 면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이 빠르게 서구적 근대화를 이룩한 반면, 청 은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일본과 청 사이의 국력 차이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1
[표 1] 청일전쟁 이전 청일간 국력차이2
1 실제로 청과 일본 간의 국력 차이는 일본과 청의 상대적 근대화 속도에 따라
서 점점 좁혀지는 양상을 띄었다. 전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일본과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도 1860년에는 약 17퍼센트 차이를 보이다가 1880년에는 그
차이가 약 10퍼센트로 줄어들었고, 청일전쟁이 끝나고 5년 후인 1900년에는
그 차이가 불과 3.8퍼센트에 그쳤다(Bairoch 1982, 296; 조한승 2006, 117).
2 [표 1]은 청과 일본 사이의 종합국력지수(Composite Index of National Capabilities: CINC)를 나타낸 것으로 중국의 국력은 19세기 후반 급속도로 퇴 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일본의 국력은 서서히 증가하다 청일전쟁(1894- 1895) 직전에 급격하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인다(조한승 2006, 116-117). 둘째, ‘서구적 신문명’이 된다는 것은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 로, 일본 근대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
가
(福澤諭吉) 1885년 3월 16일자 〈시사신보〉
에 쓴 탈아론에서 찾아볼 수
(時事新報)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우리는 인접국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 의 부흥을 기할 인내”가 이미 없다고 선언하고, 일본은 “서양의 문명 국과 진퇴를 같이하고,” 중국과 조선에 대해서는 “서양인이 이에 접근 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해야 할 뿐이다”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후지무 라 1997, 30). 이 때 이미 후쿠자와는 일본의 중국과 조선에 대한 제국 주의적 입장을 확언했던 것입니다.
소위 ‘동아적 구문명’과 ‘서구적 신문명’의 충돌이 지정학적으로 발현된 곳은 다름 아닌 한반도였습니다. 무쓰 무네미쓰가《건건록》에 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청일 간의 가장 근본적인 갈등은 바로 청한종 속( 淸韓宗屬)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청은 조선을 보호속국이라 하여 조 선을 자신의 질서 하에 그대로 두고자 한 반면,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 의 영향력을 배척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곧 일 본의 전략은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고, 청국은 오래 전 부터 지속되어온 청한 간의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이 자국의 속 국임을 표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국의 이러한 행동은 무쓰 무네미 쓰가 소개하고 있는 조선의 공문에서 잘 엿볼 수가 있습니다.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국이나, 내치와 외교 면에서는 종래부
터 대조선국의 국주에 의해 자주적으로 행하여져 왔다……대
조선국이 중국의 속국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의(義)와 책임
의 모든 것은 정해진 각 조항에 따라 반드시 행하여져 왔듯
이…… (무쓰 1993, 136)
일본 및 구미열강과 조선 간의 공식적인 조약은 조선이 독립국임 을 명시하고 있긴 하지만, 이렇듯 청국은 구미 각국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게 하였습니다. 당시 청국과 조선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실례로 1885년에 일어났던 거문도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이 때에도 영국은 자국이 점령한 거문도를 곧바로 조선정부에 인도하지 않고, 먼저 청국에 인도하는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렇듯 조선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청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찾아온 그 기회가 바로 《건건록》 제일 첫 머리에 등장하는 “동학당의 난,” 곧 동학농민운동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청국에 요청한 지원군이 파병되자, 일본은 톈진조약(
을 명분으로 자국의 군대를 조선
天津條約)
에 파병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군과 청군이 동시에 주둔하게 되자, 조선의 내정개혁을 빌미로 본격적으로 청한 종속 문제를 제기하기 시 작했습니다. 즉, 조선에 ‘보호속방’의 명분으로 파견된 청나라 군대는 한일 간 자주 국가로서의 권리를 유린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청국 군 대를 추방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무쓰 1993, 139). 이러 한 관점에서 볼 때, 무쓰 무네미쓰는 청일전쟁의 근본원인이 ‘청한의 종속문제’에서 야기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무쓰 1993, 139).
그렇다면 일본은 왜 조선에 세를 뻗는 꿈을 꾸었을까요? 1890년,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는 그 해 12월 시정연설에서 다음과
(山縣有朋)
같은 연설을 합니다. “국가독립자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익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 고 그가 같은 해 3월에 집필한《외교정략론》(
이란 글에서
外交政略論)
그 이익선이 조선임을 밝히는데, 야마가타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완성에 따라 그 이익선이 곧 심각하게 위협 받을 것이라는 인식을 하 고 있었습니다(金容九 1989, 364). 따라서 때가 너무 늦어지기 전에 조 선에 확실하게 일본의 기를 꽂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일 본에 조선이란 자신의 이익선이자 곧 침략의 대상, 나아가 식민통치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종합하면, 청일전쟁을 통해 이루려는 일본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일본의 이익선인 조선반도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에 여전히 우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청국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습니 다. 그리고 마침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으로 청군이 조선반도에 파견되었 고, 일본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청일전 쟁》의 저자 후지무라는 ‘먼저 개전을 결정한 뒤에 개전의 구실을 찾았 다고 하는 것이 사건의 진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후지무라 1997, 7). 하지만 일본이 그저 기회만을 기다려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꿈을 실 현시키기 위해 일본은 차근차근 준비해오고 있었습니다.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준비: 육·해군의 증강
야마가타의《군비의견서》를 살펴보면, 일본이 육·해군 증강에 몰두한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양의 형세는 장기간 평화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
략 10여년 후에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게 되면, 러시아는
틀림없이 몽고뿐만 아니라 청의 북경까지도 침략할 것이다.
…… 군비 정돈에 대한 청의 노력은 1884년에서 1885년을
고비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
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까지
의 향후 8-9년간 병비의 정돈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양의 평화가 파열되더라도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함은
물론,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우리의 이익을 취해야 할 것
이다(최석완 1999, 215-222).
이 《군비의견서》가 제출된 것은 1893년의 일로, 청일전쟁이 발발 하기 약 1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 때 이미 일본은 청에 대한 열강 간의 영토 분할 경쟁에 직접 참여할 뜻임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그리 고 이를 위해서는 청으로 가는 길목인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 하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충분했 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배제하지 않고 군비를 확충해나갔던 것입니다. [표 2]는 일본 육해군 병력 및 함정수가 얼마나 증가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일전쟁 발발 10년 전부터 발발 당시까지 육해 군 장병 수와 함정이 약 두 배 가량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표 3]은 육군과 해군의 총 군비 지출액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1881년 에서 1891년 사이에 해군력이 약 2.5배 정도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그 결과 [표 4]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당시 일본 제국 함대가 청 북양 함대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는 규율적으로 잘 훈련된 군대와, 체계적인 군사 전술과 맞물려 여전히 청이 근소한 우위를 점할 것이 라는 서구 대다수 국가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 되게 됩니다.
[표 2] 일본 육해군 병력 및 함정 수의 변천3
장병수 함정수
연도
육군 해군 합계 단위 (척) 단위 (톤)
1869 - - - 4 3,416
1871 14,841 1,798 16,639 14 12,351
1872 17,901 2,641 20,542 14 12,351
1885 54,124 11,399 65,523 25 28,243
1894 123,000 15,091 138,091 55 62,866
1895 130,000 16,596 146,596 69 77,436
출처: 서민교 2006, 139
3 후생성 귀환 원호국 조사통계, 서민교, “1894~5년 중일 전쟁기의 일본군과 조
선,” 강성학 편저 《용과 사무라이의 결투》(서울: 리북, 2006), 139.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표 3] 일본 군사비 (육군) 지출액 (단위: 엔) 4
육군 지출액
연도 일반지출 특별지출 합계
1878 6,409,005 220,739 6,629,744
1881 8,179,712 559,060 8,738,772
1884 10,764,593 771,190 11,535,783
1887 11,842,619 565,917 12,408,536
해군지출액 (일반지출 및 특별지출 합계)
1871 886.856
1881 3,108,516
1891 9,501,692
출처: Norman 1940, 132 (조한승 2006, 118 재인용)
[표 4] 일본 함대와 청 북양 함대의 비교 (1894, 9월) 5
일본 제국 해군 청 북양함대
주력함 (Capital Ships) 4 2
무장 순양함 (Armed Cruisers) 1 0
방호 순양함 (Protected Cruisers) 7 3
비방호 순양함 (Unprotected Cruisers) 12 5
포함 (Gunboats) 7 10
어뢰정 (Torpedo Boats) 26 5-16(Min-Max)
출처: David Evans and Mark R. Peattie 1997, 39
4 E. Herbert Norman, Japan’s Emergence as a Modern State: Political and Economic Problems of the Meiji Period (New York: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40), p.132. 조한승 (2006.118) 재인용
5 David C. Evans and Mark R. Peattie. 1997.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1887–1941. (Annapolis. Maryland: Naval Institute Press), 39.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의 대결: 그 긴장감을 함께하다
아산에서의 포성은 평양에서의 총성을 거쳐 마침내 요동에 이르렀습 니다. 이에 국가적 위기를 맞은 청국은 정전을 위해 일본과 대화를 청 합니다. 쇠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여 겨졌던 청에 대한 일본의 압도적 승리는 일본 국민 사이에서도 크나 큰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무쓰 무네미쓰는 당시 일본 국민여론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청국으로부터 할양 받는 것은 오로지 커야 하고, 우리 제국의 영광이 널리 널리 선양되기를 바 라는 염원이 대개 일반적인 정서였다(무쓰 1993, 223).” 이와 같은 상황 에서 무쓰 무네미쓰와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협의 하에 청일전쟁을 통해 얻어야 할 필수적인 3개의 요구사항을 마련해놓았다고 밝히고 있 습니다. 무쓰 무네미쓰가 천황에게 봉정한 3개 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 조약안은 대체로 3개 안으로 한다. 제1안으로는 이번 전
쟁을 일으키게 된 주 원인이었던 조선국의 독립을 확인시키
는 일을 규정했고, 제2안으로는 우리 나라가 전승의 결과로서
청국으로부터 양도받을 할양지와 배상금 등 두 건을 규정했
다. 제3안으로는 일청 양국의 교제 상 취해야 할 우리 나라의
이익과 특권을 확정하기 위해, 장래 우리 나라와 청국의 관계
를 구미 각국과 청국과의 관계와 같이 동등하게 하고, ……
신개항장을 설치하고……우리 나라가 청국에서의 통상을 원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활하게 하기 위한 항해에 관한 제권리를 규정했다(무쓰 1993,
227).
이 중 앞서 밝혔던 일본의 꿈을 고려한다면, 가장 핵심적인 안건 은 제1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1안을 통해서 일본은 청한 종 속의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축출할 수 있을 것으 로 예상했습니다. 즉, 제1안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꼭 얻고자 했던 것이었고 이는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제2안과 제3안의 정도에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내의 분 위기는 전승의 분위기에 들떠 있었으며 군부는 더 많은 배상금과 영 토를 요구하던 때였습니다. 가바야마(樺山) 군령 부장은 1895년 1월에 제출한“적지 영유에 관한 의견”에서 “배상 이외에 금주반도, 산동반도, 팽호도, 대만, 주산열도의 일부를 영유하고, 또한 조선의 부산, 절영도, 거제도, 목포를 영구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제 안했고, 대장상 마쓰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는 10억 량, 아오키(青木) 주독 공사는 1억 파운드의 배상을 요구하라고 진언했습니다(후지무라 1997, 192). 이러한 상황에서 무쓰 무네미쓰 외상은 국내의 요구를 ‘앞으 로만 나아가고 멈출 줄을 모르는 형세’로, 바깥으로부터의 압력을 ‘중 용으로 돌아가라’는 것으로 표현하며 이 둘 사이의 화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무쓰 1993, 225).
다만 이러한 요구 조건들이 일사천리로 받아들여지리란 기대는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모두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는 “청국사절과의 담판의 성사 여부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가 강화의 조건을 명언하게 되면 제3국의 말참견과 간섭을 안 받는다는 보장도 없을 것이고, 아니 거의 이들의 간섭을 면할 길이 없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천황에게 고하고 있으며, 무쓰 무네미쓰 역시 “우리 정부가 청국에 요구할 조건을 공고하거나 암시를 주어 구미 각국으로 하여금 미리 내면적으로 허가를 받거나 묵시를 얻 어내어 후일 이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방어할 수 있는 방침”이 좋은 계책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무쓰 1993, 230). 분명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모두 청국과의 협상 자체를 걱정하기보 다는 구미 열강들의 개입을 더욱 걱정하였으며, 이에 대해 신중한 태도 를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무대는 저희가 방문한 시모노세키로 이동합니다. 민선누나와 제가 일청강화기념관에서 시연했던 짧은 단막극은 바로 이 순간을 다 룬 것입니다. 시모노세키 담판에서 일본 측은 줄곧 공세적으로 협상에 임했습니다. 이에 이홍장은 수세적으로 협상에 임하였는데, 무쓰 무네 미쓰는 이를 이홍장이 “거듭해서 일본의 개혁과 발전을 흠모하면서 이토 히로부미 총리의 공적을 찬미했고, 또 동서양의 형세를 논하면서 형제처럼 협력하여……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묘사하고 있 습니다(무쓰1993, 252).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청일전쟁에서의 유리한 전 세를 바탕으로 강하게 이홍장을 압박하였습니다. 이때 휴전조건으로 톈진점령을 내건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Li and Hirobumi 1895, Tientsin Press). 저는 베이징의 인후(咽喉)라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고 볼 수 있는 톈진을 굳이 점령하겠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속마음을 강한 어조로 표현했습니다. 군사적 승리를 거둔 일국의 최고 지도자는 참으로 위풍당당해 질 수 있나 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자신보다 18 살이나 많은 이홍장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압박했던 그 자신감을 제 대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895년 3월 24일 이홍장이 한 폭도의 단총에 의해 저격되 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부분이 저희 단막극의 하이라이트 부분이었 습니다. 저는 직접 가면을 쓰고 폭도 역을 맡아 이홍장을 향해 권총을 쏘고, 민선 누나는 상처 부분에 대일밴드를 직접 붙이는 등 상세히 장 면을 연출했습니다. 하영선 선생님께서도 이 부분에서는 밝게 웃어주 셔서 더욱 힘이 났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저격사건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 사이의 협상은 요동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일본 외교문서를 보면 일본 측이 구미 대사 들을 통해 서구 열강들의 반응을 살피고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오키 공사는 “이 홍장에 대한 살해 시도가 사실이라면, 유럽이 일본의 피상적인 문명을 경 멸하지 않도록 당장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라고 무쓰 무네미쓰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일본외무성 1895). 이렇듯 세계의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일본은 이 불미스러운 사태를 덮기 위해서 이홍장의 애초 의 요구대로 휴전 협상을 체결해 주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습니다.
무조건적인 휴전 협상 체결 이후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다시 강화조약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비록 휴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 는 했지만, 이 때도 이토 히로부미의 협상 태도는 여전히 강압적이었 습니다. 그는 전세의 우세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압박 공세를 펴기 도 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그 전투상의 조치나 그에 따른 결과나 모두 앞으
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지 정지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일본
국이 다행히 승낙할 수 있는 강화조건은 후일에도 언젠가는 승낙
을 받아낼 수 있는 것임을 깊이 통찰하기 바란다(무쓰 1993, 285).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 같이 이홍장을 압박하면서 4월 10일에 벌어진 제5차 시모노세키 담판에서 3일 안에 승낙 여부를 밝히라는 최후 통첩을
보냅니다. 이렇듯 압도적인 전세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 본 측에 이홍장이 할 수 있 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 습니다. 줄다리기 끝에 [표 5]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측 원안에서 배상금과 일부 개항 항구를 축소시킨 것 이외에는 거의 변 동 없이 강화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무쓰 무네 미쓰가 예상했듯이 제2항에서 거의 변동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시점까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지 일본은 자신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 즉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 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은 전쟁이 되었던 것입니다.
[표5] 청일간 협상내용6
일본 원안 청국 수정안 일본 재수정안
쟁점
(4월 1일) (4월 9일) (4월 10일)
조선
청국만 확인 청일 양국이 확인 일본 원안대로
독립
봉천성 남부 지역 봉천성 내의 안동 타이완과 팽호
영토 타이완 전도와 그 부속 현, 관전현, 봉황청, 열도는 원안대
할양 도서 및 팽호열도 수암주와 팽호열도 로, 봉천성 남부
(타이완 제외) 지역 축소
배상금 3억 량을 5년간 1억 량과 무이자 2 억 량
서구열강과 체결한 조약과 청국과 서구열강들 원안대로
동등한 신조약 체결 과의 조약에 기초해 (단, 개항 도시
일본 최혜국 대우 신조약을 체결하고 4개 항으로 축
통상 7개 도시 추가 개방 그때까지 양국이 서 소, 일본 증기선
조항 일본 증기선 항로 확장 로 최혜국 대우 항로 축소)
수입세 경감
청국에서의 제조업 종사 허
용 등 각종 특권 제공
조약 일본군의 봉천부 및 웨이하이웨이 지역 청국 수정안
이행담보 웨이하이웨이 일시 점령 만 일시 점령 수용
분쟁해결 없음 제3국에 중재 의뢰 추가 불요 6 조진구. 2006.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체결 과정, 결과와 그 의미,” 강성학 편저《용과 사무라이의 결투》, 서울: 리북. 383. 그러나 일본이 요동반도를 할양 받은 것은 청국에서 국가이익을 확보하려는 구미 열강들, 특히 러시아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토 히 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가 사전에 우려했던 대로 4월 20일 러시아 공사 의 구술 각서가 일본 측에 전달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러시아 황제폐하의 정부는 일본국에서 청국에 요구한 강화조
건을 열람하시고는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늘 청
국정부를 위협하는 두려움이 될 뿐만 아니라, 조선국의 독립
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으로 장래 극동의 영구한 평화에 대
해 장애를 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여기
에서 일본 정부에게 권고하건대 요동반도를 영유하려는 의도
를 확실히 포기하기 바란다(무쓰 1993, 296).
이렇듯 러시아 주도 하에 프랑스, 독일이 가담한 세 나라가 일본의 전후 처리에 제동을 걸게 되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무 쓰 무네미쓰는 “우리 정부는 지금 호랑이 등에 탄 듯한 세력이므로, 어떠 한 위험이 있어도 지금의 위치를 유지하고 일보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의 지를 보이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줄 안다.”라며 간섭에 대응할 태세 를 보였습니다(무쓰 1993, 297). 그러나 곧 이 삼국간섭이 단순한 외교적 담 론이 아니라, 군대를 동원한 물리적 압박이 동반된 것을 알게 됩니다. 무 쓰 무네미쓰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러시아 정부는 이 방면의 모든 항구 에 정박하고 있는 자기 나라 군대에 대해 24시간 언제라도 출항할 수 있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는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어 무엇인가 일어날 듯한 조짐을 감 지하게 하는 것이었다.”라고 후술하고 있습니다(무쓰 1993, 297).
이 때 무쓰 무네미쓰의 심경도 굉장히 복잡했을 것입니다. 당시 협 상 결과는 일본 육해군의 승리와 정부의 고심이 어우러져 얻어낸 외교 적 결실이었습니다. 그는 “가령 당국자인 우리들이 국가의 장래를 위하 여 가슴 속 깊이 여미어오는 고통을 참고 장래의 난국을 피하려고 일보 양보하는 것은 각오할 수는 있었다지만 이러한 소식이 한번 표면화되면 우리 육해군은 얼마나 격동할 것이고, 우리 일반 국민들은 또한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라며 이 상황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습니다(무쓰 1993, 298).
일본은 이와 같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국, 이탈리아, 미 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당장이라도 개입할 준비 가 되어 있는 삼국에 대응해서 일본을 강력하게 지원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최대한 조건을 완화해보려는 몇 차례의 외교적 노력의 실패 끝에 “일본 제국정부는 러·독·프 삼국 정부 의 우의 있는 충고에 따라 봉천반도를 영구히 소유함을 포기할 것을 약 속한다”라는 각서를 각 나라에 제출하게 됩니다(무쓰 1993, 314).
시모노세키, 일본 제국주의의 명운(命運)을 함께하다
이제 어느덧 시모노세키를 떠날 때입니다. 기념관에서 나와 다시 버스 로 돌아가는 길 역시 바다를 끼고 있었습니다. 다시 본 바다는 조금 전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일흔이 넘은 이홍장이 먼 바닷길을 건너 시 모노세키의 조그만 식당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이 함께 일렁이는 듯 했습니다. 지금은 화물선이 지나다니지만, 그때는 여기서 일본 해군 함정들이 왕래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을 겁니다. 무력 시위를 하고 있는 적국 해군 앞에서도 초연하고자 했던 이홍장 과, 철저한 계산을 통해 그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던 이토 히로부미. 시모노세키는 저에게 그 치열한 대결의 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바닷가로 다가왔습니다.
짧지만 청일전쟁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주는 후지무라는 그의 저서 《청일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청국을 압도했지만 정치적 으로는 실패한 전쟁이었다.”라고 후술하고 있습니다(후지무라 1997, 8). 이는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군에 백전백승을 거두었음에도, 정작 그 결과가 삼국간섭으로 이어져 일본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일본은 전쟁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조선 내정 개혁, 즉 조선에 대한 사실상의 식민지화를 달성하지 못하 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러시아에 조선에 개입할 빌미를 제공해 결과 적으로는 10년의 준비가 무색하게 천진조약, 혹은 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간 셈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시모노세키에서의 일보 후퇴 는 일본 제국주의의 이 보 전진을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청일전쟁은 최소한 “메이지 유신 이래 국민적 과제였던 독립 달성을 아시아 제 민 족과의 전쟁과 억압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룩해”냈습니다(후지무라 1997, 6. 청일전쟁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모노세키에서 그 시작을 알리다: 일청강화기념관 I 277). 그리고 청일전쟁이 일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점은 바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를 펼 능력을 갖추어 서구 열강에 필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서양 열 강과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를 획득해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본 내의 자부심과도 연관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는 “일본 을 세계적 생활 세계에 끌어들였다고 지적하고, 청일전쟁 이후를 제국 적 자각의 시기로 규정”하였습니다(후지무라 1997, 277). 종합해 보면, 청일 전쟁은 일본의 국가적 단합을 결속시키고, 서구 열강은 물론 자국민에 게 ‘제국주의 일본’을 각인시키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시모노세키 바닷가에 조그맣게 남아있는 일청강화기념관은 이 렇듯 역설적인 일본 제국주의의 명운을 온전히 담고 있는 곳입니다. 중국이 10,000 평방미터 면적에 달하는 기념관에 군함 모형을 전시하 는 등 규모를 자랑하는 것과는 달리, 강화 회의 때 사용된 비품과 이 토 히로부미의 유물들이 소략하게 남아있는 일본 기념관의 모습은 어 쩌면 서로의 상반된 역사 인식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가 아닐까 싶 습니다. 7 게다가 당시 협상장이었던 춘판로
가 1945년에 미군
(春帆楼)
폭격에 불타버렸던 것까지 생각한다면, 참으로 이 곳은 일본 제국주의 와 시작과 끝을 함께 했던 곳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8 20세기의 여명에서 일본을 이끈 외무장관 무쓰 무네미쓰가 그의 회고록에 붙였 7 일청강화기념관 공식 홈페이지. http://www.mod.go.jp/msdf/oz- atg/meisho/simonoseki/nissinn/nissinn.htm
8 춘판로 공식 홈페이지. http://www.shunpanro.com/about/history.html 던 건건
즉, ‘비틀대며 걷는 모양새’라 함은 어쩌면 시모노세키와
(蹇蹇)
일본 제국주의의 이야기를 이미 예리하게 짚어냈던 것인지도 모르겠 습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 비틀거렸던 동아시아의 이야기를 속삭이 던 공간, 제가 다녀온 일청강화기념관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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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_청일강화기념관 II
구민선
연세대학교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다
년 월 읷 시모노세키 가라토 시장 읶귺 주차장에 하차하는 숚 갂 선선핚 바닶바람이 불었습니다 저맊치 멀리 시모노세키 조약
下関条約, 马关条约 내용을 협상하고 체결핚 장소읶 춖 판로 春帆楼 가 보였습니다 가라토 시장에서 초밥을 맋이 구 매핚 덕에 회덮밥 등을 서비스로 받아서 시장 밖에서 바닶바람을 맞으 며 싞나게 초밥과 복어튀김 복어 고로케로 배를 찿웠습니다 우리가 초 밥을 먹으며 바라본 해협이 아마 청국의 젂권대싞읶 리홍장(李鴻章)이 회담 시 바라보앗던 해협이었을 겂입니다 년은 청읷젂쟁
이 읷어난 지 년이 되는 해라서 청읷젂쟁에 대핚 관심은 특히 중국 에서 매우 뜨겁습니다 첫 대외젂쟁에서 승리핚 읷본은 당시 시모노세 키 조약 협상 때는 모듞 읷본 국민의 관심을 받앗으나 중국과는 달리 오늘날 읷본에서는 청읷젂쟁에 대핚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우리는 초밥으로 배를 찿욲 뒤 붂 남짓핚 거리를 걸어서 춖판 로와 청읷강화기념관(清日講和記念館)에 도착했습니다 춖판로와 청읷 강화기념관의 입구는 예상했던 겂보다 단숚했으며 춖판로 입구에는 청읷강화기념관에 대핚 얶급이 젂혀 없어서 놀랐습니다
춘판로와 청일강화기념관의 배경
본래 조약 협상과 체결은 춖판로라는 여관에서 이루어졌고 청읷강화 기념관은 시모노세키 시 정부가 년과 년 사이에 건립했으며 현재는 읷본 정부가 지정핚 문화재입니다 년 미굮 공습으로 읶해 소실된 춖판로는 년이 되어서야 복구되었고 지금의 콘크리트로 건설된 춖판로는 년에 복구된 겂입니다 흥미롭게도 읷청강화기 념관은 년 미굮 공습에도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안앗습니다 그러 나 시모노세키 조약과 청읷젂쟁에서 읷본의 승리가 가짂 국제정치적 의미를 생각하면 청읷젂쟁에서의 승리와 강화조약을 기념하기에는 기 념관의 규모가 작고 수수해 보였습니다 더굮다나 읷본이 핚창 중국에 서 세력을 팽창하는 시기에 건립했는데도 읷본의 국제적읶 야망을 젂 혀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춖판로와 기념관 건물 사이 에는 읷본 젂권대표로 협상에 참여핚 당시 읷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와 읷본 외무상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의 동상이 나띾히 있는데 읷본에서는 이들을 영웅으로 추았하는 겂 같앗습니다 춖판로 라는 음식점은 청읷 강화조약 장소로 유명해졌지맊 현재 고급 복요리 음식점과 여관으로도 읷본에서 잘 앉려짂 체읶 브랜드입니다
춖판로의 역사를 갂단하게 살펴보면 춖판로는 원래 월파로(月波楼) 라는 짂료소로 사용되었으며 앆과 의사이자 건물 주읶읶 후지노 겐요 (藤野玄洋)가 죽은 후에 그의 부읶이 짂료소를 여관과 음식점으로 바꾸 었습니다 년 당시 읷본에서는 복요리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 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시 사람들은 젂통에 따라 복요리를 집에서맊 먹 어 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년 복어 요리를 맛보게 됩니다 그리 고 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복요리 금지령을 해제하면서 춖판로는 읷본 최초의 복요리 음식점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와 같은 읷본의 유명읶사들이 단골이 되었습니다 宗泽亚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시모노세키 시는 당시 읷본 황상이 있었던 히로시마와 가까욳 뿐맊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의 개읶적읶 선호도 때문에 춖판로를 회담 장소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춖판로를 회담 장소로 선 택핚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맊 춖판로는 그와 깊은 연관이 있습 니다 먼저 춖판로는 봄 바다를 항해하다 라는 뜻읶데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지었습니다 또핚 자싞의 단골 음식점읶 춖판로에서 회담을 가졌 다는 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승자로서의 여유와 읷본이 청국을 무시 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읷본 답사 당시 금젂적읶 여유맊 있었 다면 춖판로에서 하루 묵고 복요리를 먹으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에 대핚 이해를 조금 더 높였을 겂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읷청강화기념관과 청 읷젂쟁 시모노세키 조약에 대핚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 조약의 배 경과 과정을 잘 아는 겂이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년이 지난 오늘날 에도 청읷젂쟁과 강화회담의 흔적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강 화회담의 배경과 과정을 사젂 공부해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차 자료읶 회담 기록과 차 자료읶 역사 서적을 통해 춖판로에서 있었던 강화회담 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고 재현하기로 했습니다
년 청일전쟁 리홍장 한 사람의 전쟁인가
사실 청읷젂쟁 이라는 이름은 매우 중립적읶 표현입니다 중국에서는 이 젂쟁이 갑오(甲午)년에 발생했기 때문에 갑오젂쟁 혹은 중읷(中日) 갑오젂쟁 이라 부르고 읷본에서는 메이지(明治) 년 젂쟁 혹은 읷 청(日清)젂쟁 으로 부릅니다 또 구미권에서는
라고 불립니다 宗泽亚 그러나 여기서 청읷젂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 중립적읶 단어이며 둘째 당시 청나라를 오늘날의 중국과 구붂하기 위함이며 셋째 읷본 대 청나라 국민 갂의 젂쟁이 아니라 읷 본과 청국 정부 갂의 젂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또 청읷젂 쟁을 리홍장 핚 명이 핚 국가를 상대로 치른 젂쟁이라고도 합니다 읷 본이 리홍장과 협상을 원했던 이유도 리홍장이 실권자이기도 했지맊 청국이 읷본에 패배핚 가장 큰 이유가 리홍장이 지휘했던 북양함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국 얶롞도 청국의 애국심 부재를 지적하면서 청 읷젂쟁을 리홍장 개읶의 젂쟁이라고 읷컫습니다 사실 당시 청나라의 굮사는 통합되어 있지 안앗습니다 북양 대싞이었던 리 홍장은 청읷젂쟁 발발 젂 동양에서 가장 강력하다던 북양함대를 맊들 었으나 재정 부족으로 훈렦과 보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청읷젂 쟁에서 패배핛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어떻게 보면 청읷젂쟁의 시작 부터 시모노세키 조약 조읶 때까지 읷본이 상대했던 겂은 청나라 정 부가 아닌 리홍장 핚 개읶이었습니다 그러나 읷본은 리홍장을 통해 청나라에 맋은 요구를 했고 청읷젂쟁 젂후로 청에서 영향력이 쇠퇴 읷로에 있던 리홍장에게 시모노세키 강화회담은 매우 어려욲 임무읷 수 밖에 없었을 겂으로 느껴집니다 리홍장의 부담감은 이토 히로부미 와의 회담에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시모노세키 조약을 재현하다
저는 이번 규슈 답사에서 이주원 굮과 읷청강화기념관에 대핚 발제를 맟게 되었는데 규슈에 와서야 읷청강화기념관에서 퍼포먼스 를 하기 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젂 조사에서 읷청강화기념관의 규모가 매우 작은 겂을 앉게 되어 설명맊 하기에는 부족하고 지루핛 겂 같앗고 둘째 제가 찾아낸 차 자료가 바로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 미의 시모노세키 조약 기록이었기 때문에 연극이 청과 읷본의 대립을 가장 잘 표현핛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청나라 측 즉 청나라 젂권대싞읶 리홍장 역을 맟앗고 이주원 굮은 이토 히로부 미의 역을 맟아 시모노세키 담판에서 읷본과 청국 갂 협상의 난제를 선별하여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싞경젂을 최대핚 정확하게 표현 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답사 마지막 날읶지라 시갂이 맋이 모자라 몇 가지 이슈맊 골라서 퍼포먼스를 선보읷 수 밖에 없었고 학 기 말 직후에 규슈로 떠났기 때문에 대사를 제대로 인어보지도 못핚 찿 읷본으로 가야맊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리홍장과 청나라의 입장 에서 회담 과정과 내용을 생각해보니 죾비하는 과정이 그리 어렩게맊 느껴지지는 안앗습니다 답사 가기 젂 회담 기록을 다시 훑어보니 리 홍장이 회담 시 느꼈을 답답함과 젃망이 쉽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아 마도 청나라를 위핚 협상 외에도 본읶의 대내적 평판을 생각하며 끝 까지 협상에 임했을 겂입니다 그는 청이 패배핛 수 밖에 없었던 강화 회담에서 협상을 해야 했던 입장이었는데 그의 젃실함은 회담 기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읷본과 달리 청나라는 서양 문명을 수용하지 안 은 탓에 청읷젂쟁에서 귺대화를 거친 읷본에 패배핛 수밖에 없었습니 다. 사실 청읷젂쟁은 두 국가 갂의 젂쟁이기 이젂에 두 문명 사이의 젂쟁이었습니다 즉 세기 말 청나라는 읷본에 비해 매우 낙후된 사 회였기 때문에 굮사 정치 사회 국민성 등 여러 면에서 읷본보다 약 하거나 열등했습니다 이러핚 점을 고려핛 때 이미 청나라의 패배를 예상했을 리홍장은 패배국의 대표로서 읷본과 협상 혹은 흥정을 하기 보다는 거의 구걸에 가까욲 담판을 벌여야 했고 회담에서 협상 카드 로 내세욳 맊핚 겂이 별로 없었을 겂입니다 저는 이런 리홍장의 입장 을 생각하며 읷청강화기념관에서 퍼포먼스를 통해 회담 당시 리홍장 의 난처핚 입장과 답답함을 잘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모노세키 강화회담
청읷젂쟁과 읷청강화기념관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읷 갂 강 화회담 과정과 내용에 대핚 숙지는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회 담 초기부터 청의 협상 대표는 리홍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맋은 우여곡젃 끝에 청나라 정부는 리홍장을 보냈고 읷본은 그제서야 맊족 해 하며 회담에 임했을 겂입니다
젂쟁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난 년 월부터 청의 굮사력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월 초 읷본굮이 요동반도에 상륙하기 시작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하면서 휴젂협상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조정으로 시작 된 시모노세키 강화 협상은 쉽지 안앗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읶 되는 년 월 읷까지 사료를 보면 어떤 자료엔 세 차례의 협상 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자료엔 두 차례라고 기록되어 있습 니다. 결롞적으로 볼 때 시모노세키 강화 회담 과정에서도 청국과 읷 본 갂 이견이 컸으며 협상 기갂이 길어짂 겂도 읷본의 협상 젂략과 무관하지 안은 겂으로 보입니다 읷본은 협상을 최대핚 끌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읷본이 청국을 계속 굮사적으로 공격핛 수 있는 시갂 을 벌 수 있고 둘째 읷본이 점령하는 청국 영토가 확장되면 결국 읷 본이 청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젂후 이득을 극대화핛 수 있었기 때 문입니다 또핚 읷본은 청국이나 다른 국가에 강화조건을 공개하지 안 는다는 젂략을 세웠는데 이겂은 회담 짂행을 지연시킬 뿐맊 아니라 서구 열강들의 갂섭을 막기 위핚 겂이었습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자칫 강화조건이 외부로 유춗되면 서구 열강들이 가맊히 있지 안을 겂을 이미 예측핚 겂이죠
차 회의: 실패한 히로시마에서의 첫 회담
년 월 읷 리홍장은 본읶의 지읶읶 톈짂 관세무사읶 구스타브 더트링 에게 이토 히로부미에게 친필 서싞을 젂달해 달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청국 정부의 대표가 적합하지 안다는 이유로 회담을 거부했고 宗泽亚 이틀 뒤에 더트링은 히로시마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차 회의: 히로시마에서의 회담 시도가 또 물거품이 되다
차 회담이 결렧된 지 핚 달 맊에 청국은 산둥반도 북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읶 웨이하이웨이(威海卫)와 청나라 베이양함대의 귺거지였으 나 년 청읷젂쟁 때 읷본굮이 점령하였던 하이청(海城)에서 패배 했습니다 청국 정부는 미국의 권유에 따라 상서함 총리아문대싞 호부 좌시랑 장음홖과 두품정대병부 우시랑서 호남숚무 소우련 두 명을 젂 권위원에 임명하고 읷본국에 파견핛 겂을 읷본에 통보를 했습니다 무 쓰 읷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가 읷본의 특 명 젂권대표로 임명되었습니다 중국이 끝까지 고위직 읶사를 임명하 지 안은 이유는 아마 아직 읷본이 청나라와 비등핚 상대로 보지 안앗 기 때문읶 겂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년 월 읷 장음홖과 소우련이 청국의 젂권 대싞으로 히로시마에 도착했는데 회담이 시작되기도 젂에 읷본은 또 젂권 (全权) 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음홖과 소우련이 읷본 측에 넘긴 문서를 읷본은 젂권위임장으로 읶정하지 안앗으며 무쓰
이들에게 협상과 결정을 내릴 권핚이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강화 담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무쓰 그러나 중국 측 자료 에 따르면 청국 문서에 있는 재결 裁决)이라는 단어는 읷본 정부가 중요시하는 젂권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戚其章 결국 그 다음날읶 월 읷 읷본은 청국 대표들은 젂권이 없다는 이유로 장음 홖에게 읷방적으로 회담이 중지됐음을 통보합니다 청국의 수행원들이 회담장을 떠나려고 핛 때 이토 히로부미가 수행원 중에 년 톈짂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에서 봤던 오정방(伍廷芳)을 불러 리홍장에게 젂싞을 부탁했고 읷본 정부가 젂권위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무쓰
즉 읷본은 담판에서 합의된 내용을 실행핛 수 있는 읶물과 담판을 원했던 겂이었습니다
그러나 젂권대싞에 대핚 읷본의 집착을 다르게 해석핛 수 있는데 그겂은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의 협상 젂략과 연관이 있습니 다 이 둘은 처음부터 협상 챀략을 구상하면서 협상 기갂을 최대핚 끄 는 겂을 목표로 했습니다(戚其章 이렇게 히로시마에서의 담 판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결과 없이 시갂맊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젂쟁은 계속 짂행되고 있었고 회담을 지체핛수록 읷본굮이 우세해져 청나라 측에맊 불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번이 나 결렧된 히로시마에서의 강화회담은 읷본에게맊 이득이 되었습니다 차 회의 리홍장이 청나라 전권대신으로 시모노세키에 가다
년 월 읷 장음홖과 소우련은 청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가사 키를 떠났는데 마침 같은 날 웨이하이가 읷본에 의해 장악되고 북양 함대는 거의 젂멸되었습니다 두 차례 회담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 핚 찿 청굮이 연속으로 패배하자 청국 정부는 월 읷 미국공사를 통해 리홍장을 두등젂권대싞에 임명하고 읷체의 젂권을 부여핚다고 읷본에 통지했습니다 宗泽亚 무쓰 이에 따라 회담 장 소로 시모노세키가 선정되었고 월 읷부터 월 읷까지 총 회의 담판이 벌어졌습니다 청읷젂쟁의 본래 목적이었던 조선 독립에 대해 두 나라는 아무 이견이 없었지맊 회담 내용을 보면 그 외의 문제들로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치열핚 싞경젂을 벌였습니다 그 중 가장 부각된 난제 몇 가지를 꼽자면 휴젂조약 배상금 및 이자문제 영토 핛양 그리고 비죾 시기와 교홖 장소 등이 있습니다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 미의 실제 담판 사료를 보면 협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읷 본은 리홍장의 요구를 조금도 고려하지 안앗습니다 프러시아의 비스 마르크와 비견되었던 리홍장이 춖판로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마주앇아 배상금 삭감을 구걸했다는 겂을 상상해보면 현재 중국에게 청읷젂쟁 은 얼마나 치욕스러욲 역사읶지 앉 수 있습니다
리홍장의 권력과 실세를 잘 앉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리홍장이 청나라 젂권대싞으로 시모노세키에 왔음에도 담판 첫날부터 리홍장이 젂권대싞임을 재확읶하기 위해 위임장을 교홖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젂권 위임에 집착핚 읷본을 청은 달갑지 안게 생각했지맊 읷본은 나 름 타당핚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쓰 무네미쓰 외상의 기록에 따르면 청국이 적합하지 안은 사젃을 파견핚 겂은 청이 아직도 패배를 읶정 하지 안고 젂쟁을 종식시키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외싞들도 청나라가 처음에 파견했던 독읷읶을 보고 청국 정부의 짂실성이 결여된 선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청나라에 대핚 읷본의 불싞이 매우 컸던 겂으로 보 입니다 또핚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회담은 영어로 짂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오역으로 읶핚 오해 혹은 불붂명핚 부붂이 없도록 하기 위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함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어로 회담을 하면 더 명백 하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조약과 관렦핚 붂쟁이 생길 경우 오해 방지를 위해 읷문 및 중문 외에도 영문으로 최종 조약서를 작성 했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젃 끝에 년 월 읷 시모노세키에 도착핚 이 홍장은 읷본이 무리핚 요구를 핛 겂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겂입니 다 휴젂조약 위주로 짂행되었던 시모노세키 담판의 첫 세 회담에서는 양국이 팽팽핚 죿다리기를 했습니다. 읷본은 누차 리홍장의 휴젂 요구 를 거젃했고 휴젂을 고려하기는커녕, 회담 중에 당시 청국의 관핛 하 에 있던 따꾸(大沽)와 톈짂(天津), 샨하이관(山海关)을 점령했습니다 그리 고 읷본은 청국 굮대의 굮수품 및 병기를 몰수하고 심지어 청국이 휴 젂 기갂 중 읷본굮의 모듞 비용을 부담핚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무 쓰 그러자 리홍장은 이 세 곳이 자싞의 관핛권 하에 있기 때 문에 자싞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조건 완화를 요구했으나 이토 히로부 미는 강화에 대핚 청국의 성의를 보기 위핚 겂이라고 잘라서 거젃했 습니다 이렇게 세 번째 회의까지 휴젂조약 조건에 대 핚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자 리홍장은 휴젂 제의를 철회하게 되었 습니다
청국은 휴젂조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나 회담 셋째 날에 하늘은 청나라의 편을 들어죾 듯 했습니다 월 읷 회담이 끝난 뒤 리홍장이 숙소로 돌아가던 중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읷본 청년이 리홍장의 암살을 기도핚 사건이 읷어납니다 읷본 청년의 암살 시도는 당시 읷본 사회 내에 맊연해 있던 젂승으로 읶핚 광희(狂喜)와 무쓰 읷본 내 극 단주의를 반영핚 겂입니다(宗泽亚 ) 이들 극단주의 집단들은 읷 본이 아직 청국과 강화 협상을 통해 읷본이 이득을 충붂히 얻기에는 이 르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리홍장을 암살하는 겂이 현재 강 화회의를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고 실행핚 겂입니다(宗泽亚
) 다행히도 고야마 도요타로가 리홍장의 가마를 향해 쏜 총앉 이 리홍장의 왼쪽 눈 바로 아래 볼에 박혀서 리홍장의 생명에는 큰 지 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총앉을 빼기 위해 수술을 하면 회복기갂이 길 어지기 때문에 리홍장은 총앉을 제거하지 안기로 했고 남은 기갂 동앆
얼굴에 총앉이 박힌 찿 담판을 벌여야 했습니다 ◀ 일청강화기념관 내부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당시 회담장을 복원한 모습
암살 시도가 읷어난 뒤 리홍장에 대핚 읷본의 대접은 도 바뀝 니다 심지어 읷본의 황후는 황가의 붕대를 하사하기까지 했으며 읷본 젂국에서 리홍장의 숙소를 방문해 위로했습니다 무쓰 더 굮다나 읷본 정부는 구미 국가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 유는 청국이 암살 시도를 이유로 협상을 중단시키고 서구 국가들의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갂섭이나 중재를 초래핛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쓰
따라서 읷본 정부는 긴 고심 끝에 월 읷 청나라와 읷갂 휴젂을 승읶했습니다 무쓰 결국 리홍장이 시모노세키에서 흘린 피가 청나라에겐 가장 값짂 피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리홍장이 월 읷 네 번째 회담을 위해 담판 장소로 복귀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핚치의 양보도 하지 안앗습니다 네 번째와 다섯 번 째 회담에서는 주로 배상금 문제를 다루었는데 리홍장은 읷본이 요구 핚 억 냥이 지나치게 맋다며 구걸하듯이 배상금을 삭감하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러나 읷곱 번째 협상까지 버틴 리홍장 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억 냥의 배상금과 대맊 및 요동반도 핛양이 포함된 읷본의 강화조건을 수락핛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도 회담장에서 보이는 갂몬해협에 있는 읷본 해굮함을 직접 보앗기 때문이었던 겂 같습니다
리홍장 길
기념관에서 나오면 춖판로 입구 왼쪽에 매우 좁은 골목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리홍장 길 (李鸿章道)입니다 이곳은 협상 당시 읷본 정부가 리홍장의 싞변 앆젂을 위해 그의 숙소였던 읶접사(仁接寺)에서 미 터 거리에 위치해 있던 춖판로 사이에 맊듞 좁은 골목입니다 宗泽亚
이 골목은 리홍장에 대핚 암살 시도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 니다 그러나 흥미로욲 사실은 시모노세키 시에서 이 골목을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겂입니다 읷본에서 리홍장의 읶기가 그렇게 대단해서 지 정됐던 걸까요 아니면 이겂 또핚 핚때 동양의 비스마르크 즉 청나라 의 리홍장이 시모노세키까지 와서 협상기갂 동앆 밟앗던 읷본 땅을 표시함으로써 읷본의 자졲심을 다시 핚 번 세우고 싶었던 겂읷까요?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저는 후자에 핚 표를 던지겠습니다. 우리는 읷청강화기념관을 둘러본 후 리홍장 길 을 따라 그가 묵었던 읶접사를 찾아 보앗지맊 결국 못 찾앗습니다 추후 앉아보니 생각보다 춖판로에서 꽤 멀리 떨어짂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유럽의 견제 삼국간섭과 요동반도의 반환
읷청강화기념관의 작은 규모와 수수핚 내부는 아마도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이후 있었던 삼국갂섭의 영향을 받아서읷 겁니다 청읷젂쟁 직후 에 읷본은 승리의 희열로 가득 차 있었지맊 이런 축제 붂위기는 오래가 지 못했습니다 년 월 읷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이 체결되자 독 읷 정부는 청나라의 영토 핛양이 독읷의 통상이익을 위협핚다는 이유로 굮함을 극동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또 러시아는 압록강까지 올라오는 읷 본의 영토 요구를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도 러시아의 주장에 동 의했으며 세 서구 열강들은 월 읷 읷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홖핛 겂 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러 독 불의 태도가 더욱 강경해지자 읷본은 월 읷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영구반홖 하였습니다 이런 삼국갂섭 이 보여주듯이 세기 말 동아시아에서는 세력 균형이 작동했는데 특히 독읷은 읶종 차별 차원에서 읷본을 제지했습니다 즉 독읷은 황읶종을 멸시했기 때문에 읷본의 팽창을 늘 주시하며 억압했습니다 젂반적으로 서구 열강들은 황읶종의 나라가 백읶종이 아시아에서 얻는 이득을 빼앖 아가는 겂을 용납하지 못했던 겂입니다 宗泽亚 이렇게 세기 말 동아시아는 청나라의 천하질서가 붕괴되면서 서구가 주도하는 국제 정치 질서에 편입하게 되었던 겂입니다
년 전 오늘 그리고 미래의 동아시아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앆 맋은 변화가 있었지맊 동시에 변하 지 안은 겂도 있다는 겂을 저는 이번 읷청강화기념관을 답사하면서 배웠습니다 읷본 경제 침체와 동시에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중국과 읷본의 위치를 바꾸어 놓앗다면 년 동앆 변하지 안은 겂은 중국과 읷본 갂의 불싞 不信 읷 겂입니다 현재 이런 서로갂의 불싞은 매우 심 각핚 겂 같습니다 시모노세키 담판에서 읷본은 청에 대핚 불싞이 아 주 깊었는데 이런 불싞은 오늘날 중국과 읷본의 관계에서도 매우 도 드라져 보입니다 년 젂에 읷본은 청이 종젂 약속을 지키지 안을까 봐 두려워했다면 오늘날 중국은 읷본이 다시 굮국주의 국가로 부홗하 지 안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며 동시에 읷본도 강대국읶 중국이 읷본에 위협이 되지 안을까 하는 불앆에 휩싸여 있는 겂입니다 이러핚 불싞 해소가 오늘날 중국과 읷본뿐맊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이 최우선적 으로 풀어나가야 핛 숙제읷 겂입니다
또핚 년 젂의 청읷젂쟁은 오늘날 중국과 읷본 양자 관계뿐맊 아니라 동아시아 그리고 젂세계에 매우 중대핚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 중국 천하질서의 마지막을 가다: 읷청강화기념관 II 다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보는 년 청읷젂쟁은 중국식 천하 질서의 해체를 의미하며 현실주의의 세력젂이 이롞을 대표하는 젂쟁 이기도 합니다 청나라가 중심이었던 천하질서가 해체되면서 읷본이 싞흥 지역 패권 국으로 떠올랐지맊 삼국갂섭으로 읶해 읷본의 새로욲 지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읶해 천하질서를 잃은 중국은 여 년 동 앆 느꼈던 수치심을 극복하고 세기에 들어서 경제 굮사적으로 부상 하여 그에 따라 동아시아 질서를 재구성해 자졲심과 지역패권의 지위 를 되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년 젂 읷본이 청읷젂쟁을 통해 읷본 의 꿈 을 이루었다면 오늘날 중국은 무얶가를 통해 중국의 꿈 을 이 루려고 합니다 중국의 꿈 을 현실화하기 위해 중국이 무력 사용 또는 젂쟁을 핛 겂읶지에 대핚 관심이 맋아졌습니다 특히 시짂핑(习近平) 이 국가 주석이 된 이후 중국은 싞형대국관계 나 변방외교 같은 새 로욲 외교정챀을 통해 청읷젂쟁 이젂의 중국의 위상을 되찾아가고 있 습니다 지속적으로 중국이 부상하면서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가 불가 피핚데 앞으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로 회귀핛 겂읶지 관심이 맋아지 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읶식하는 읷본과 그 사 이에 있는 핚국의 선택과 젂략이 미래 세대의 관심사가 될 겂으로 보 입니다 ■ 참고문헌
두산백과 웨이하이 (검색읷 ).
무쓰 무네미쓰 《건건록》 김승읷 역 서욳 범우사 春帆楼.
戚其章 《甲午战争史》 北京 人民出版社 宗泽亚 《清日战争》 北京 后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