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21세기 조선통신사, 규슈에 가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6년 1월 14일
sarangbang_3_ch5_cover.png
sarangbang_3_ch5_cover.png

한일교류박물관 · 김덕환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이번 답사 3일차 첫 답사지로 방문한 나고야성박물관

(名護屋城博物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의 전진기지로 삼은 나고야 성터에 조성된 곳입니다. 1993년 사가현의 현립 박물관으로 개관된 이곳은 나고야 성터 유적 보존 및 연구 활동을 수행하는 한편,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를 테마로 상설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한일교류박물관”으로 알려져 소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복잡하고 어려웠던 관계를 되 돌아보게 하는 이 박물관은 사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빡빡한 답사 일정상 충분히 긴 시간 동안 머무를 수 없었던 우리에게는 역사 속의 한일관계를 거시적으로 조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고노담화(Kono Statement) 검증과 야스쿠니 참배 논란, 독도 영유권 분쟁, 아베 정부의 우경화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등 한일 간의 관계는 여러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풀리지 않고 교착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문창극 총리 후보 지명자에 대해 이른바 ‘식민사관’과 ‘친일’ 논란이 일면서 국내정치적으로도 많은 파장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일관계에 대한 관심이 국내외적으로 매우 고조된 상황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 아침 기대와 관심을 갖고 한일관계의 역사를 담은 나고야성 박물관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사진

역사 속의 한일관계

최근의 한일관계는 한일 양국 간의 관계를 넘어서서 미국 및 중국까지 관심을 보이면서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오늘날의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반대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이 현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한일관계에서 현재 우리의 의식에 가장 크고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경험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자국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갈등의 골이 깊은 한일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발전적인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작업들 중 하나가 한일관계에 대한 역사 서술이었습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각각 중앙집권적 힘을 갖춘 정치체가 들어선 이후, 양측의 정치체는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과 내부적 필요에 의해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도 하고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시각에서 한일관계를 보면 상호 인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공식적인 외교관계나 경제무역관계, 혹은 문화교류적 측면에서 한일관계사를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일 두 나라가 사상사적 측면에서 어떻게 역사적으로 서로를 인식하고 대해왔는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한일관계가 단순히 국가 간의 군사안보적 혹은 경제적 이익 조정의 성격을 넘어서 서로에 대한 갈등과 오해가 부정적인 상황을 낳고 있다는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점을 감안해 보면, 이와 같은 연구는 현재에 큰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각 지리적 단위에 존재해 왔던 정치적 역사를 통합적으로 구성하여 출현시킨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각 시기의 정치적 행위자들은 앞선 정치체를 계승하는 나름의 서사를 구성하며 자신들의 역사와 대외관계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서사를 만드는 과정을 깊이 공부하고 연구하여, 한국은 ‘한국’으로 일본은 ‘일본’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현재 한일 양국의 서로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교류 방향을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나고야성 박물관 역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일본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유물들을 배치하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일종의 ‘서사’가 전시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우리 답사팀은 나고야성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에서 선사시대 한반도와 일본열도 간의 관계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시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조선 중후기 이후의 유물과 역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전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한일관계에서 조선 중후기가 가지는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는 것 또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답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임진왜란 시기부터 동아시아에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오기 전까지의 시기에 주목하여 조사를 하였습니다. 사전 조사과정에서 한일교류 박물관이 특별히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자료를 상대적으로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양국 간의 관계가 비교적 평온했으며,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통신사는 한일 교류의 상징이었습니다. 물론 박물관에도 통신사의 행렬을 보여주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선, 특히 후기의 외교사적 특징들을 되돌아볼 때, 한일 간의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는 현재에 이 시기를 다시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통신사 관련 유물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신사는 과연 한일 양국의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만을 상징하는 것일까? 임진왜란이라는 큰 충돌을 뒤로 하고 두 나라는 어떤 과정을 거치며 교류관계를 형성해나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교류가 가능하도록 해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박물관의 유물들은 지나온 한일관계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는 했지만, 우리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역사 속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 느끼게 해주기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유물들 앞에 기록되어 있던 설명들도 대부분 간단한 사전적 정보만 적어 놓아서,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통신사 행렬을 묘사하고 있는 전시물
통신사 행렬을 묘사하고 있는 전시물

다행히 저는 이렇게 아쉬움을 느끼던 중, 사전 준비과정에서 예전에 읽었던 신유한의 《해유록》을 떠올렸습니다. 《해유록》은 임진왜란 이후인 18세기 초반(1719년) 저자 신유한이 통신사 홍치중과 동행하여 일본에 다녀온 길의 감회를 적은 여행기입니다. 사실 통신사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기록들을 찾아보면서 제가 받은 인상은, 상당수가 정부에서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공식적이며 형식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 이 기록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다녀온 경험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로서의 기록’인 동시에 조선인 신유한의 내면적인 의식 역시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문화의식으로서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유한이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기의 일본과 그 이후의 도쿠가와

(豊臣秀吉)

(德川) 막부의 일본을 구분하고, 또 한편으로는 연속적으로 인식하는 복합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과 한일 관계의 미묘한 속성을 잘 드러내고 시대에 따른 차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해유록》을 매개로 하여, 조선 후기의 한일관계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중화 조선과 일본

신유한의 《해유록》을 통해서 조선후기의 한일관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당시 국제정치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영선 선생님께서는 박물관 안을 저희와 함께 걸으시면서 시대순에 따라 한일관계를 설명해 주셨는데, 고대부터 조선중기까지는 일본이 한국에 관심이 더 많았던 반면, 그 이후부터는 그 관계가 역전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한국의 대일관은 전반적으로 일본을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긴 반면,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굴욕을 겪었기 때문에 이중적인 태도와 불안정성을 보인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보여주는 전시관에서 교과서에서 본 반가사유상이나 금관 등의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영선 선생님께서는 조선시대에 도자기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조선의 수출품이었다면, 고대나 중세에는 불상 등의 문화 콘텐츠가 한반도가 가진 매력이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그런데 조선 중기까지 한국의 대일관에 일본을 문화적으로 깔보고 멸시하는 성향이 나타났던 것의 밑바탕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부를 구분 짓는 자문화 중심주의적인 중화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고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일찍이 중앙집권적인 통일 왕국을 세우고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도달했던 중국은 시기에 따라 왕조 및 정치의 통합 정도는 달랐지만, 주변 국가들의 정치경제 및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정치질서 속에서 각 지역의 정치체들은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국내적으로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제적으로도 독립적인 세력권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편으로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의 경우, 아시카가 요시미츠

가 남북조의 분열기를 정리해가는

(足利義滿)

한편 명과의 조공관계 수립에 성공하는데, 이로써 국내에서 경쟁하는 다이묘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무로마치

(室町)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나카오 히로시 2005, 19-21).

이렇듯 조공관계는 기본적으로 중국과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지만, 더 나아가서 중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 건국 이전의 한반도 왕조들은 일본보다는 중국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질서 속에서 그들이 일본을 변방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 전기에 일본을 변방에 위치한 국가로 여기는 문화적인 멸시 현상이 더욱 심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위에서 예로 든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경우를 다시 들여다 보면, 일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명과 조공책봉 관계를 수립하여 ‘일본 국왕’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온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로 일관되게 칭하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카오 히로시 2005, 24).

그렇지만 당시 국제질서는 형식적인 조공책봉 질서와 더불어서 문화적인 차원의 위계 질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명청시대에 해당하는 14~20세기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체제’ 하에 장기적 평화를 누린 시기로 설명하는 데이비드 강(David Kang)의 《서양 이전의 동아시아》(East Asia Before the West)에 따르면, 중국은 조선과 일본은 물론이고 베트남, 류큐, 시암, 미얀마 등 다양한 정치체들과 조공형식의 교류를 하였는데, 이 중 중화문명에 동화된 정도가 더 컸던 조선과 베트남은 보다 빈번하게 조공이 이루어졌으며, 중국으로부터 얻는 이익도 더 많았습니다. 반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변방으로 여겨졌고, 교류의 양도 훨씬 적었습니다(Kang 2010, 59).

물론 중국문명 중심의 위계질서가 반드시 물리적인 힘의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의도를 품고 전쟁을 일으켜 조선과 명에 큰 피해를 끼쳤던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군사적인 측면에서 당한 굴욕이 일본의 부강함에 대한 동경이나 존경으로 이어진 것은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에 북벌을 내세우며 소중화 사상을 강화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문치주의의 조선이 무력의 일본보다 더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과 결합되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한국에 대해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을 동시에 보이며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은 거국적인 차원에서 자신들이 중국 중심의 질서 속에 있다고 여기는 동시에 일본이 중국 중심의 질서와 구분되는 독자성을 띤다라는 의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Kang 2010, 60).

18세기는 중국 중심의 위계질서가 세워져 있던 시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과 일본이 각자 독자적으로 국제정치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명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중원의 패자가 된 청에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만주 족이 무력으로 정복하여 설립된 청이 아니라 조선이야말로 이전의 명이 지닌 것으로 여겨진 ‘중화’라는 문명 표준을 이어받았다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또한 중국과의 조공 책봉 관계를 드러내는 ‘일본국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일본 연호를 사용하는 등 독자적인 국제관계를 모색하기도 하였습니다(나카오 히로시 2005, 84-85). 에도 막부는 기본적으로 쇄국을 유지하면서 일본인의 해외 왕래를 금하고, 외국인에게도 제한적 교역을 허용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선, 류큐, 더 나아가 네덜란드 등 서방국가와도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은 외교관계에서 조선 왕조와 일본의 에도 막부 간에 서로 대등한 지위를 인정하면서 통신사 외교 등을 이어갔지만, 한편으로는 각자의 시각에서 자국이 상대에 비해 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는 인식을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후기 조선의 일본관 형성과 《해유록》

신유한과 그의 저서 《해유록》은 한일관계의 역사에서 크게는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동시에 소중화 사상에 근거하 여 일본을 대하던 시기에 나온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유한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조선 후기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 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먼저 《해유록》의 내용

일본의 벚꽃과 한국의 무궁화
일본의 벚꽃과 한국의 무궁화

중 비교적 한일 양국의 상호인식을 많이 다루고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 다음 중화질서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의 국제적 지위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강하고 부유한 일본, 그러나……

먼저 신유한의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면 자신이 방문한 일본 각 지역의 경제적 수준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유한은 도쿠가와 막부가 내전을 최종적으로 종식하여 내부적으로는 혼란을 평정하고 질서를 수립하였으며, 외교적으로는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상황이었음을 밝혔습니다. 가령 신유한은 “이 나라의 번화함과 풍부함, 지리의 이로움과 풍경의 기이함은 아마 천하에 드물 것이니 옛날 문헌에 기록된 인도 계빈국이나 파사국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신유한 2006, 146).”라고 하는 등 여러 지역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물질적 번영과 안정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일본의 병제를 소개하면서 군대의 훈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검과 총이 우수하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평소 군졸들이 훈련으로 단련되어 무슨 일을 만나거나 적을 보게

되면 성난 돼지처럼 등불에 날아드는 불나비처럼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내닫는다. 대장이 설사 무능하더라도 병사들의 결사적인

전투력을 얻을 수 있으며, 군졸들이 비록 나약하더라도 싸움에는

용감하니, 이는 아무리 오랑캐의 습성이기는 해도 과연 병력을

강하게 하는 좋은 계책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군대의 조련은 달마다 여섯 번에 걸쳐 한다. 바다에서는 해군

연습이 있고 육지에서는 보병 연습이 있는데, 다 포수를 으뜸으로

삼지만 갑비주의 기병과 살마주의 검사가 가장 용감하여 대적하기

어렵다고 한다(신유한 2006, 326).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해유록》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신유한의 문장을 얻기 위해서 신유한을 찾아오는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문장을 지어주어야 해서 그가 이것을 매우 귀찮아한다는 내용입니다. 신유한은 일본이 문화적으로 스스로를 후진적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으로 인식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보인다고 서술함으로써 조선이 일본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우세한 지위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병제와 관련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선의 활이 더 우수하며 일본인들이 조선의 활을 보고 겁을 먹어 활시위를 당길 힘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신유한은 일본의 풍속과 문화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며 평가하기도 하는데, 결국 가장 중요한 부분인 유교적 문화의 규범과 맞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평가가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적어도 당시 조선 엘리트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식이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월의식에 기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전쟁에서 우호관계로의 험난한 전환, 대불사에서 생긴 일

이렇듯 기본적으로 일본에 비해 조선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신유한과 일행들은 일본인들을 대할 때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해유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 중 하나인 대불사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양국 관계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신사 일정 중 일본의 관백이 사신 일행에게 교토 근처 대불사에 들러서 연회를 즐기게 한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에 사신 일행들이 대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당이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원수이기 때문에, 거기서 열리는 연회에 절대 참석할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일본 관백의 명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들의 완강한 태도로 인해 매우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통신사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역사 문헌인 《일본연대기》에 따르면 대불사를 중건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본의 해명을 듣고 계속 거절할 수 없던 사신 일행은 대불사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후 두 나라가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측의 내재된 갈등의 골이 생각보다 깊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조선은 여전히 과거 일본과의 전쟁이 국가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화는 현재 식민시기에 대한 역사문제가 계속 이슈화 되면서 갈등 국면에 빠져버린 한일관계의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재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국가들이 일본 유력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강하게 항의하는 것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지속적으로 교착상태에 머물고 있는 한일관계와는 달리, 대불사를 둘러싼 갈등은 그 결말이 아슬아슬하게 봉합되는 양상을 띠고 있어서 저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보다 생생하게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단순한 사건의 요약문보다는 인용문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사신이 말하였다. “내가 결단코 절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의리로 보아 원수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관백이 듣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굴종케 하여 의롭지 않은 길로 이끌 수

없거든 하물며 경윤이 다시 무슨 군소리를 한단 말인가? (중략) 만

리 파도를 헤치고 건너온 우리는 자기 한 몸을 지푸라기와 같이

보는 터이니 비록 여기서 십 년 동안 머물더라도 우리의 주장은

굽힐 수 없다.”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중략) 대마도주가 봉행과 재판 등에게 그 책 《일본연대기》을

사신에게 드리면서, “이는 우리나라에서 비밀리 소장하고 있는

역사서입니다. 여기 쓰여 있는 것과 같이 대불사를 중건한 것은

원가광(源家光)이 바로 관백이 된 해이온데 풍신수길과 원 씨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귀국에서도 이미 아는 바입니다. 원 씨의

세상에서는 풍신수길의 자손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으니 어찌 절을

지어 풍신수길을 받들 자가 있었으리까? 이 책을 보시면 원당이란 말이

그릇된 이야기임을 충분히 아실 수 있습니다.”

(중략) 이리하여 세 사신이 상의하였는데 정사께서는, “전날 우리가

전하는 말만 믿고서는 이 절이 풍신수길의 절이기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지금 이 나라의 문헌을 보아 이 절이 원 씨가 지은 것임을

확인한 이상 잠시 들러 접대를 받고 가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겠다. 또

이미 여러 왜인들에게, 우리가 결코 원수 놈의 절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과 그 절이 원 씨가 지은 것임을 안 뒤에야 간다는 것을

알게 하면 우리가 원수를 잊지 않는다는 뜻도 뚜렷하게 일본에 알리는

것이 된다(신유한 2006, 234-236).”

이 에피소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조선의 사신 일행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을 구분하면서 조선을 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임진왜란이 실패로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권력이 교체된 이후 일본은 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명과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합니다. 조선의 경우, 조선과의 중계무역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는 대마도의 영주를 통해 강화교섭을 시도하고, 일본은 전쟁에서 잡아왔던 조선인들을 송환하기도 합니다. 이에 조선은 1606년 조선국왕의 묘를 훼손한 범인을 붙잡아 조선으로 보내고 일본이 먼저 조선국왕에게 국서를 보내서 관계개선을 요청해야 한다는 강화 조건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조건에 대해서 에도 막부는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는데, 대마도 영주가 적극 개입하여 국서를 일부 위조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결국 조선이 관계를 회복하고 에도 쇼군의 국서에 회답한다는 의미의 ‘회답사’(回答使) 를 보내게 됩니다(역사교과서연구회 2007, 162). 조선과 일본 간의 관계 회복은 조선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동시에,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서로 중시하는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통의 인식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함으로써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태도를 보였던 것은 다른 부분에서도 발견됩니다. 《해유록》에서는 일본이 조선과 자국간 국교가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계속해서 일본을 ‘왜적’이나 ‘오랑캐’라고 칭하면서 모욕적으로 대하는 데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는 일본인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유한은 조선이 일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적대감이 큰 것이고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가문이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된다면 조선에서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밝힙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매우 잔인한 자로서 일본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가문이 몰살되었음을 밝히면서 조선이 일본을 보다 우호적으로 대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장애물이 되는 요인이었는데, 조선과 일본은 이를 국가 간의 비극이라기보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잘못된 정책에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당시 조일 관계를 보기 위해서 임진왜란 이후로도 지속됐던 중국 중심 문화권과 변방 지역을 살펴보는 동시에, 조선과 일본의 양자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성이 독자적으로 형성되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유한 이후의 한일관계

신유한 이후의 시기에는 세계 정치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확보해 간 서양문화권에 일본이 좀 더 일찍 적응함에 따라 이전까지의 한일관계가 역전되어 상반된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신유한의 기록은 일본과의 형세가 역전되기 이전 시기, 즉 조선은 소중화 사상을, 일본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국제관계질서를 형성해 가던 시점인 조선 후기에 조선 엘리트들이 가졌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격변했던 동아시아의 정세를 암시하는 부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는 전근대와 근대의 단절성이 크게 나타났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해유록》을 통해서 현재의 시점에서 한일관계에 적용할 만한 시사점을 주는 부분은 과거의 역사와 기억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전란 이후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라는 새로운 체제 하에 안정되어 가면서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이러한 일본의 접근에 온전히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일본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받아들였고 전쟁의 원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에게 돌리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해유록》 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문화국으로 존중하고, 과거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기의 일본을 철저히 부정하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현재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한일관계에 시사하는 점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일 양국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이 대안적인 관계를 모색했던 것과 같이, 한일 간 근현대사를 다시 바라보고 새로운 관계로 도모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공동의 서사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아쉬웠던 부분을 보충하려다 보니 신유한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 것도 같습니다만, 사실 나고야성 박물관을 뒤로 하면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감안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의 입장에서 보다 한국의 5. 역사 속의 한일관계와 앞으로의 방향: 한일교류박물관 입장을 반영해 보고자 하는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한일관계를 테마로 한 우리나라 박물관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익숙하게 배웠던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 지 않는 범위 내의 설명과 교과서에서 익히 봐 왔던 여러 유물들을 조금 낯선 일본에서 좀 더 현장감 있게 보고 왔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해야 할까요? 한국에서 접했던 한일관계에 대한 서사보다 일본에서 보는 한일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유사한 전시를 한다면 어떻게 더 잘 구성할 수 있을까,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고야성 박물관을 나왔습니다. ■

참고문헌 나카오 히로시. 2005. 《조선통신사 이야기》. 유종현 역. 파주: 한울. 신유한. 2006. 《해유록 조선 선비 일본을 만나다》. 김찬순 역. 파주:

보리.

역사교과서연구회. 2007. 《한일교류의 역사 선사부터 현대까지》. 서울:

혜안.

Kang, David. 2010. East Asia before the West.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