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21세기 조선통신사, 규슈에 가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김유란 · 런던정치경제대학
들어가며
첫 답사지인 데지마로 걸어 들어가며 신시가지와 데지마를 구분 짓고 있는 선을 따라 걸었습니다.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항구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으로 지어진 데지마 주변의 땅을 매립하며 생긴 선이었습니다. 한때는 아무나 함부로 건널 수 없었던 이 금지선을 오른쪽, 왼쪽, 마음껏 넘나들며 걸으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습니다. 데지마 안에 살던 네덜란드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도 일본 땅을 밟을 수 없었던 쇄국기간 동안 조선통신사들조차 들어가보지 못했을 데지마를 우리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데지마를 더욱 매력적이고 알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발제의 긴장 때문인지 금기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기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데지마 입구까지 그 경계선을 따라 걷던 짧은 시간이 제게는 답사기간 동안 가장 흥분되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을 허락 받은 네덜란드인들에게 데지마에서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의 삶은 특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옥에 갇혀 사는 것과 같은 끔찍한 악몽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한 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데지마에서 그들은 몇 년씩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무엇을 먹으며 지냈을까요? 다행히 예전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는 데지마 안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낱낱이 경험해보고 또 그 작은 섬에서 그들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란타’ 제국과 데지마
_아란타의 국제적 위상과 일본 국제정치 일본의 근대화는 서양 문물의 수용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의 근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서양 국가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또 끝맺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서양의 교류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미국과의 교류로 단계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일본과 서양의 첫 만남은 1543년 포르투갈인이 규슈 남단에 표착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 시기에 일본과 가장 오랜 기간 독점적 교역활동을 한 나라, 그리고 메이지 유신 직전 교역국으로서 일본에 서양 문물을 가장 활발히 전파한 나라는 아란타
로 불리던
(阿蘭陀)
네덜란드입니다. 네덜란드라고 하면 풍차와 튤립이 아름다운 유럽의 작은 나라, 고흐와 렘브란트의 나라 정도로 생각하지만 한때 네덜란드는 전 세계를 장악한 수퍼파워였습니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주도로 열린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는 해상권이 곧 국력이었습니다. 1581년 네덜란드 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지배하던 유럽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17세기 전성기를 맞이하며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합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영향권 아래 있던 인도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 지역을 제외한 새로운 무역로를 탐방하기 위해 1602년 최초의 주식회사 형식을 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동남아, 뉴암스테르담을 거점으로 북미, 그리고 일본을 거점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합니다. 무역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기독교 포교를 강조하던 포르투갈과 스페인과는 달리, 네덜란드는 철저히 이윤 중심의 무역에 집중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의 동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보장하고 그 외에도 현지에서의 조약 협상 및 체결권, 군사 지휘권, 재판권, 화폐 주조권 등의 막강한 권력을 쥐어주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1670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약 5만 명의 직원과 3만 명의 병력을 고용하고 200척 이상의 배를 소유하는 동시에 주주들에게 매년 40퍼센트에 이르는 수익을 안겨주는 세계 최대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작가 미상 1998).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이러한 성공을 토대로 네덜란드는 유럽 내에서는 물론 세계 강대국으로 올라서며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 주 교역국을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바꾼 시점이 네덜란드의 부상과 시기적으로 들어맞는다는 점입니다. 일본과 서양의 교류에서 큰 맥을 짚어보면 일본은 서양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맞추어 주 교역국을 바꾸어가며 강대국의 부상에 편승하고 그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각 시기마다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능숙한 국제정치를 펼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과 서양의 최초 만남은 우연에서 비롯되었지만, 이후의 교류는 일본이 치밀하게 짠 무대 위에서 이루어졌고 국제정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일본은 편승과 변용의 전략을 능란하게 활용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의 엄밀한 계획과 규제 하에 이루어진 서양과의 교류 흔적들은 지금의 일본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란타로 불리던 네덜란드의 번성과 쇠퇴에 따라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와 그 꽃인 난학
이 어떤 지평을 맞이하였는지 살펴보고, 또 난학이
(蘭學)
지금의 일본에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르투갈의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의 데지마로
데지마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폈던 시기에 바깥 세계와 통하는 유일한 숨구멍의 역할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데지마는 네덜란드의 무역 상관이 위치한 곳으로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학문을 공부하는 난학
의 양성소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蘭學)
그러나 애초에 데지마는 일본의 첫 서양 교역국이었던 포르투갈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1543년 포르투갈인이 규슈 남단의 다네가섬
에
(種子島) 표착한 것을 계기로 그가 지닌 조총의 위력에 크게 관심을 보인 일본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이어가며 서양 문물도 함께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어로 쓰인 서양 문물을 공부하는 남만학
이 발전하게 되는데 비단, 양모, 상아, 산호, 설탕 등의
(南蠻學)
무역품 외에 서양의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이 일본에 전해지며 일본 합리주의의 기틀을 닦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교류는 기독교의 포교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새로운 영토를 장악하고 그곳으로부터 향신료를 공급받는 동시에 그곳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항해했습니다. 포르투갈의 항해자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항해의 목적을 ‘기독교와 향료’라고 정리했습니다. 이처럼 포교의 목적이 짙은 포르투갈과의 교역은 일본에 최초의 기독교 전파로 이어져 1580년 포르투갈에 나가사키를 내어준 규슈의 다이묘 오오무라 스미타다
와 다수 지역인들의 기독교 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大村純忠)
포르투갈의 활발한 포교 활동으로 일본은 한때 유럽 밖에서 가장 큰 기독교 인구를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의 증가로 기독교 윤리에 따라 신
아래 평등을 제창하는 이들이 사회질서를
(神)
위협하기 시작하자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1587년
(豊臣秀吉)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최초로 기독교 금교령을 내립니다. 이와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주어졌던 나가사키도 직속령으로 복속시킵니다.
히데요시에 이어 에도막부
를 세우며 일본을 장악한
(江戶幕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더욱 강력한 쇄국 정책을 펼칩니다. 이
(德川家康)
시기에 일본 사회에 대한 포르투갈인의 종교적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나가사키 상인들의 투자를 받아 데지마가 만들어졌습니다. 데지마는 포르투갈 상인들의 활동영역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을 띠었습니다. 4,000평이 조금 덜 되는 인공섬인 데지마는 나가사키 앞 바다를 매워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육지와 통하는 통로는 작은 다리뿐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누구의 지시와 어떤 기술력으로 데지마를 설계하고 건설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데지마 건설과 관련한 문헌 자료의 부족으로 현재 데지마의 복원 작업 또한 매우 신중한 연구를 거쳐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당시 네덜란드 상관장이었던 니콜라스 코케바겔(Nikolaes Coeckebacker)의 1635년 일기에 “일본인들이 돌로 바다를 메우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정하미 2005, 46).
현재는 데지마 주변의 땅이 모두 메워져 더 이상 섬의 모습을 한 데지마를 볼 수 없지만 당시 데지마의 모습을 묘사해놓은 그림을 통해 부채꼴 모양의 섬 형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데지마가 일본 본토와 연결되는 지점은 작은 교각 하나뿐이었고 이 다리는 철저히 통제되어 일본과 데지마 내 외국인들의 교류도 지극히 제한적이었 다고 합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의 활동 반경을 데지마로 국한하여 격리시킨 후에도 일본 내 기독교 세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1637년 규슈에서 농민봉기까지 일어나자 에도막부는 더욱 강력한 기독교 탄압, 선교사 추방, 그리고 포르투갈과의 무역 단절로 쇄국을 강화하게 됩니다. 1639년 막부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전면 금지시키고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면서 포르투갈의 데지마는 빈 섬이 되었습니다.
쇄국 정책을 실시하면서도 서양과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일본은 이미 무역을 통한 이익과 서양의 선진 문물에 눈을 뜬 후였습니다. 포르투갈을 통해 들어오던 직물과 설탕에 대한 수요가 일본 내에서 높았고 포르투갈과의 교역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상인층도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생겨났습니다. 데지마를 통해 일본으로 수입된 대표적인 무역품은 설탕이었습니다. 데지마 곳곳에서 설탕 포대를 잴 때 사용하던 대형 저울을 볼 수 있습니다. 설탕의 수입과 함께 서양의 제빵 기술이 전해지면서 새로운 식문화도 생겨났습니다. 나가사키의 명물인 카스텔라도 데지마를 통해 들여온 설탕과 서양 제빵 기술의 만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 나가사키 명물 카스텔라 국제화에 발을 내디딘 이상 그 물살을 거스를 수 없었던 막부의 묘책은 무역과 포교활동을 철저히 분리하여 신임을 얻은 네덜란드를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단절한 시점은 내부적으로 네덜란드로 포르투갈을 대체하기 위한 협의가 끝난 뒤였습니다. 에도 막부의 고위 관료는 니콜라스 쿠케바켈(Nikolaes Coeckebacker)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인과 일본인 사이의 통교교역을 단절하고 포르투갈인을 이 나라에서 추방하면 네덜란드인은 직물 및 일본이 필요한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가? (정하미 2005, 49)
네덜란드로부터 물자 공급을 보증 받은 일본은 포르투갈인을 모두 추방하고 히라도
에 무역 상관을 세우고 무역 활동을 하던
(平戶)
네덜란드인들을 데지마로 옮기도록 합니다. 이렇게 데지마는 네덜란드 의 무역 거점이 되고, 일본 쇄국 약 200여 년간 일본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무역과 정보 교류의 장이 됩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일본 간부들을 데지마로 초대해 만찬을 베풀었는데 이 때 많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인들은 데지마에서 처음 소고기 요리와 와인을 접했다고 합니다. 또한 네덜란드인들의 춤과 노래도 데지마에서만 접할 수 있는 진귀한 문화였습니다. 당시 만찬에 초대된 일본 간부들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난학의 역사적 발달_ 초기 난학의 주역들, 데지마 통역관 일본은 교류 대상국의 영향에 따라 선별적으로 서양문물을 수용하여서 시기마다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남만학이 발달하였다면, 포르투갈과의 교역 단절 그리고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와의 교류로 난학이 형성되게 됩니다. 약 1만 3천 평방미터의 작은 섬 데지마는 난학의 무대였고 난학은 데지마와 시작과 끝을 함께합니다.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가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과의 차별화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무역과 포교활동의 분리를 통해 일본의 신임을 얻고 에도 시기에 유일한 서양 교역국으로서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네덜란드도 일본의 통제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일본은 무역은 허용하되 문화적 접촉은 허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실히 했습니다. 에도막부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활동 반경을 데지마로 제한하고 일본인과 일상적인 접촉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데지마를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는 양쪽에서 감시되었고 혹시 모를 성경책, 찬송가 등 종교 관련 서적과 물품의 반입을 통제하기 위해 네덜란드 상선이 도착하면 이틀에 걸쳐 철저히 검문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네덜란드 상인들을 오로지 교역품의 전달자로서 활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쇄국정책을 끝낸 이후 일본인들과 외국인들의 친교를 위해 세워진 나가사키 클럽. 이곳에서는 ‘국립 감옥’이라고 불리던 데지마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이 들여온 네덜란드식 당구 및 배드민턴을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에도막부는 일본인들이 나가지도 외국인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외세의 영향력을 봉쇄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선진 기술과 학문, 그리고 유럽의 정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제껏 중국을 통해 받아들이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서양의 문화를 접한 후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던 탓일 것입니다. 서양과 국제정세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에도막부는 매년 정기적으로 네덜란드 상관장의 참부
를 받고 항해를 하면서 얻은 국제정세에 대한 모든 정보를
(参府)
서술하여 보고할 것을 명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이 일본을 위해 작성한 이 보고서는 화란풍설서
로 불리우며 일본이 간접적으로
(和蘭風說書)
서양세계를 경험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이 외에도 정식 교역품이 아닌 와키니모츠 (脇荷物), 즉 주변 수입품으로 불리던 것들의 상당수가 양서
나 양서의 중국어 번역본이었는데 이런 형태로 반입된
(洋書)
서적도 비공식적으로 바깥 세상의 정보를 일본 내에 전달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렇게 얻은 정보력으로 일본은 쇄국정책을 실시하는 중에도 외부 세상의 뉴스를 빠르게 접하고, 서양 문물에 완강히 저항하던 청이나 조선과 달리 비교적 순탄하게 근대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합니다.
최초의 화란풍설서는 1641년에 작성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기밀 문서로 분류되어 막부 내에서도 고위 관료들만 접할 수 있었다고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합니다. 당시 일본은 일본 내 양서 보급 역시 금지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데지마의 통역관들이 었습니다. 이들은 데지마 출입을 허가 받고 네덜란드인들과 직접 접촉하며 무역을 위해 필요한 번역과 통역 업무를 지원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외부 지식을 우선적으로 수용하게 되었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하면서 일본 지식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의 통역관들은 데지마라는 무대에서 난학의 형성과 발달에 공헌한 숨은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데지마의 안정과 난학의 확산
에도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안정시키면서 1720년에 양서의 수입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 내 난학의 지평이 확대됩니다. 에도막부의 통치기간 동안 약 1만 권에 달하는 네덜란드어 서적이 일본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유럽, 동남아, 중국, 그리고 일본으로 이어진 정보의 네트워크는 당시로선 최대 규모의 네트워크였을 것입니다. 이미 네덜란드어를 익히고 초기 난학자로 활동해오고 있던 데지마 통역관들은 양서를 번역하여 지식인층에 난학을 전파했습니다. 당시 수입된 프랑수아 할마(François Halma)의 난불사전을 토대로 네덜란드어- 일어 사전인 《에도 할마》를 엮은 것도 이시이 쇼스케
로
(石井庄助) 알려진 데지마의 통역관입니다. 통역관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있었으며 실력 차이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네덜란드어를 우수하게 구사하는 통역관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로 데지마에 거주한 칼 툰베르그(Carl Thunberg)는 통역관들의 네덜란드어 실력에 대해 대다수가 이상한 표현과 흔하지 않은 문구를 사용한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에도 할마》보다 후에 쓰인 데지마 상관장 헨드릭 도프(Hendrik Doeff)의 《도프 할마》가 더 대표적인 네덜란드어-일어 사전으로 평가 받습니다. 그러나 도프 할마의 번역 작업에서도 일본 통역관들의 공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통역관들을 ‘난학의 선구자’라고 칭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데지마라는 무대에서 능동적으로 지식을 수용하고 또 변용하면서 일본 전체로 난학의 확산을 도왔습니다. 현재 데지마 서기장의 주택이 난학관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곳에 《도프 할마》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데지마의 기능 상실과 난학의 쇠퇴
1795년 나폴레옹이 네덜란드 본토를 점령한 후 영국 해군선인 판테온(Phaeton)이 네덜란드 상선으로 위장하여 데지마에 불법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후 일본에서 네덜란드의 위상과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난학은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에도 한동안 데지마를 통해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역이 지속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과 화란풍설서를 통해 아편전쟁 소식을 접하면서 일본 내에서는 네덜란드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들의 존재가 새로이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의 방문과 협상 강요로 일본은 1854년 미국과 카나가와 조약을 맺고 잇달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과도 비슷한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의 쇄국정책은 끝이 납니다. 일본 문호 개방으로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 독점권을 잃게 되고 1856년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데지마에서의 엄격한 규제에서 벗어남에 따라 데지마 시대도 막을 내립니다. 데지마의 쇠퇴와 함께 난학이 곧 서양 학문으로 통하던 시절도 끝이 나면서 난학은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구미의 지식을 총체적으로 공부하는 양학
이 라는 새로운
(洋學)
학문으로 확대됩니다.
요시다 쇼인 의 쇼카손주쿠 와 메이지 유신
(吉田松陰) (松下村塾)
_난학의 끝자락을 잡은 요시다 쇼인의 국제정치학
난학이 확산되면서 직접 제자를 받거나 공부방을 열어 난학을 가르치는 일본 학자들도 생겨났는데 이 중에는 메이지 유신의 사상가로 존경 받는 요시다 쇼인
도 있었습니다. 근래 들어
(吉田松陰)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 총리 아베 신조
에 대한 국내
(安倍晋三)
여론이 매우 비판적인 상황에서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으며 사상적 스승이라고 칭하는 요시다 쇼인을 곱게 보는 사람은 국내에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에도막부 말기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칭송 받으며 메이지 유신에 이론적으로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꼽히는 그의 삶을 통해 난학이 어떤 모습으로 메이지 유신 및 일본의 근대화로 이어지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30년이 안 되는 짧은 생애 동안 일본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놓은 인물입니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대한 재능을 인정 받았던 그는 10살 무렵 아편전쟁으로 동양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서구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제정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1850년 병학
을
(兵學) 배우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유학하는 중 데지마를 방문하여 네덜란드인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음식을 먹어보는 등 서양 문물을 직접 접합니다.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들어오는 서적을 읽으면서 난학에도 눈을 뜹니다. 이후 에도에서 수학하며 사쿠마 쇼잔
을 스승으로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쇼잔은 (佐久間象山)
네덜란드어가 유창하여 당시 데지마를 통해 들어오는 난서
들을
(蘭書) 읽으며 서양 사정에 매우 밝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쇼잔을 통해 더 깊이 있게 난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말기 난학을 접한 것이 쇼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사무라이로서 배워온 것과 너무 다른 서양의 문물을 접한 그는 크게 충격을 받고 아편전쟁을 통해 청을 무너뜨린 서양 세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 위력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서양을 직접 견문하겠다는 호기심에 쇼인은 일본인의 출국이 금지된 쇄국 시기에 밀항을 여러 차례 시도합니다. 대표적 일화는 통상을 강요하러 왔던 미국의 페리함대가 개항 요구 이후 다시 도쿄만에 나타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페리는 그의 《일본원정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요시다 쇼인 일행은 교양이 몸에 배어 있고 유창하고 우아하게
한문을 적었다. 또한, 예의가 바르고 매우 세련되어 있었다. ……
2명의 젊은이들의 행동을 통해 일본인이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러한 일본인의 기질이야말로 장래에 대한
희망이다(페리 1856, 421).
요시다 쇼인은 페리함대의 미시시피호에 승선하여 페리에게 자신을 미국으로 데리고 갈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조약을 존중해야 했던 페리가 그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쇼인은 결국 적발되어 투옥되고 맙니다. 당시 외국인과의 접촉이 일절 금지되어 있던 상황에서 밀항을 시도한 것은 매우 엄중한 처벌의 대상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도 밀항을 시도한 쇼인의 행동은 그가 후에 제자들에게 강조하던 ‘행함의 학문’, ‘실천의 학문’을 살아낸 방식이기도 합니다. 감옥 생활 중 그는 나가사키에서 서양의 문물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느꼈던 바를 《유수록》
에 적어냈습니다. 《유수록》은
(幽囚錄)
《외정론》
과 함께 쇼인의 국제정치학을 엿볼 수 있는
(外征論)
저서입니다. 《유수록》에는 밀항을 시도한 이유가 실려 있으며 부국 강병을 통한 동아시아 침략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일본이 청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존왕론
입니다. 서양의 세력 앞에
(尊王論)
무력한 막부를 개혁하여 천황 중심의 강력한 국가를 세울 것을 담은 이 이론은 기존의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조공체제와 화이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과 전진을 희망하는 이론입니다. 쇼인은 천황의 권력 아래 하나로 통일된 일본만이 서양과의 불평등한 조약 앞에 무릎을 꿇은 막부 체제 하의 일본을 서양과 동등한 위치로 되돌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유수록》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담겨있습니다.
군사 시설이나 장비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홋카이도를 봉건한 후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는다. 조선을
정벌하여 예전처럼 공물을 바치도록 한다. 북으로는 만주를,
남으로는 타이완과 필리핀 일대 섬들을 노획하여 이전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 기세를 보여야 한다(요시다 쇼인 1854).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이는 후에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밑바탕이 된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위 내용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형에게 보내는 그의 서한에는 미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이 담겨있습니다(김봉진 2012, 48). 어떤 기준에서 아시아는 정벌하고 미국과 러시아와는 신임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살펴보면 그 기준은 군사력, 기술력, 정보력 등으로 가늠한 국력입니다. 당시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손해를 떠안고 천한 대접을 받아야 했던 일본의 상황과, 그러한 서양 국가들에 의해 한때 아시아의 중심이던 청나라마저 무너진 것을 본 쇼인은 약육강식의 지배 논리가 만연한 국제정치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일본이 청나라나 조선과 같은 운명이 아닌 미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서양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탈아론
을 주장하며 덕과 예를
(脫亞論)
토대로 이루어지던 명분의 국제정치가 아닌 서양의 실리 중심의 국제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일본에게 서양은 두렵지만 본받고 싶었던 존재였습니다. 쇼인의 현명한 점은 그의 학문이 서양 학문에만 전적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중국의 관점에서 서양에 대해 서술해 놓은 서적도 즐겨 읽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위원
의 《해국도지》
(魏源)
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해국도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海國圖志)
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쇼인은 중국의 입장에서 서양을 이해하려던 위원의 노력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이를 다른 양서를 통해 얻은 깨달음에 적용하여 일본의 실정에 맞게 관점과 원칙을 새로이 제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쇼인의 학문은 일본이 강대국들과 전략적으로 교역하며 이어온 역사와 맥을 같이합니다.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은 과감히 수용하고 그것을 일본의 실정에 맞게 적절히 변용하여 제시하려 했던 노력이 돋보입니다. 나가사키에서 우연히 접한 난학을 통해 시작된 그의 서양 공부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 새로이 재해석된 모습으로 일본 근대화의 이론적 기틀을 조성하게 됩니다.
쇼카손주쿠
로 이어진 데지마 난학과 메이지 유신
(松下村塾)
요시다 쇼인은 수감 생활 중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밀항을 시도한 죄로 수감되어 여러 차례 감옥을 옮겼지만 가는 곳마다 공부 모임을 만들어 동양과 서양의 서적을 균형 있게 읽고 토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죠슈번
의 노야마
(長州藩)
감옥에 투옥되었을 땐 간수들조차 그의 방 앞에 앉아서 함께 공부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그는 그곳에서 600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이광훈 2011, 96). 이런 학문에 대한 열정은 후에 고향인 하기
에 쇼카손주쿠를 세워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는
(萩)
업적으로 이어졌습니다.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쇼인은 쇼카손주쿠에서 난학만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다독을 즐겨 최대한 많은 정보원으로부터 지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되 가장 일본적인 방법으로 그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쇼카손주쿠에 오고 싶을 때 오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났으며 각자 원하는 글을 교재 삼아 공부했기 때문에, 수업은 정해진 커리큘럼이나 교재 없이 각 학생의 관심사에 맞게 진행되었습니다. 또 학생이 많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론 형식의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토론으로 밤을 지새운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독특한 교육관 때문에 쇼인은 교육학자들의 관심을 받는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가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교육기관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그곳이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로 여겨지기 때 문입니다. 그는 ‘실천의 학문’을 가르쳤으며 이를 위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그 지식이 생겨난 배경과 상황을 강의했다고 합 니다. 쇼인으로부터 지행합일
의 배움을 받은 그의 제자들은
(知行合一)
훗날 쇼인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됩니다. 막부 체제를 개혁한 다카스기 신사쿠 (高杉晉作) 와 구사카 겐즈이 (久坂玄瑞), 메이지 신정부의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
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차후
(伊藤博文)
(山縣有朋)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대다수 쇼카손주쿠 출신입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서양의 것을 배우기 위해 난학의 무대였던 나가사키에서 유학 하고 서양의 막강한 파워 앞에 놓인 일본의 운명을 걱정했던 쇼인은, 이러한 위기 의식에 사로잡혀 쇼카손주쿠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실 천적으로 데지마의 난학을 살려내고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에 게까지 이어져 현재 일본의 모습에 녹아들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일본의 모습은 데지마라는 무대에서 시작된 난 학을 요시다 쇼인이라는 한 사람이 일본의 근대화로 승화시켰기 때문 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2. 일본의 해외 창구 데지마의 번성 참고문헌 김봉진. 2012. “선비와 사무라이의 공공의식.” <공공의식 국제학술회의:
한국과 일본의 공공의식 비교 연구> 발표, 서울, 11월 21일. 이광훈. 2011.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
서울: 따뜻한 손.
정하미. 2005.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사》. 파주: 살림. Perry, Matthew Calbraith. 1856. Narrative of the expedition of an
American squadron to the China Seas and Japan: performed in
the years 1852, 1853, and 1854, under the command of
Commodore M.C. Perry, United States Navy, by order of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Washington: Beverley Tucker,
printer. Accessed June 20,
2014. http://archive.org/stream/narrativeofexped0156perr/narr
ativeofexped0156perr_ djvu.txt.
Varma, Sarita. 1998. “A taste of adventure: The history of spices is the
history of trade.” Economist 12.
Yoshida, Shoin. 1940. “Yushuroku.” Yoshida Shoin Zenshu 1. Tokyo:
Iwanami Sho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