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의 궁전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 여행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새롭게 쓰는 이화원 기행문 · 전나눔 · 이화여자대학교
원명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이화원 (頤和園) 으로 이동했습니다. 2014 년의 이화원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에, 이화원을 먼저 다녀온 이들 이 이화원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1930년 〈삼천리〉
에 실린 이화원은 사치와 향락을 누린 서
(三千里)
태후
가 중국 일만 백성들의 고혈을 짜 건립한 중국 최고의 건
(西太后)
축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삼천리〉 1930).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프랑스 의 베르사유 궁전에 비하겠느냐는 감탄은 필자의 탄식과 조소였습니다. 1941년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이화원은 “그다지 잘난 것은 아닌데, 갖은 영화를 누리다가 세상에서 갔다는 서태후”가 떠오르는 철 지난 여 름궁전이었습니다(〈삼천리〉 1941).
1949년 정부를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이후 중국)은 이후 모든 친미 국가를 적성국으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펼쳤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6. 새롭게 쓰여진 서태후의 이화원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은 거의 30년 동안 단절의 벽을 쌓고 지 냈습니다.1 1992년이 되어서야 한국과 중국은 국교를 정상화하고 민간 교류를 재개합니다. 20세기 후반의 이화원에 대한 기행문을 찾기는 어려 웠습니다. 그 시공의 단절 동안 변화에 변화들 거듭한 그들과 우리는 서로를 보는 시각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의 이화원, 새로 쓰이 는 이화원에는 중국을 보는 21세기 젊은 그들의 눈길이 담겨 있습니다.
서태후의 내정
(內政) 본래 궁녀였던 서태후는 1851년 함풍제
의 후궁이 된 후로 권
(咸豊帝)
력을 향한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함풍제가 의문사 한 후 신유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
뒤에서 수렴
(同治帝)
청정을 한 서태후는 사실상 청나라의 여제가 되었습니다(베갱 2012). 성 년에 이른 지 겨우 2년째 되던 해에 동치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자 신의 4살짜리 조카 재첨
을 양자로 들여 1874년 즉위시켰습니다.
(載湉)
이 아이가 나중에 광서제
가 됩니다. 이후 정치 일선에 본격적
(光緖帝)
으로 나선 서태후는 죽을 때까지 실권을 장악했습니다(구성희 2012). 1886년, 광서 12년에 광서제에게 정사를 넘겨준다는 조칙이 발표되기 는 했지만 헛것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시작된 서태후를 위한 이화원 1 《시사상식사전》. “한중수교”. 박문각. http://terms.naver.com/entry.nhn? docId=74000&cid=504&categoryId=504 (검색일 : 2014년 1월 20일).
▼ 인수전 입구, 인수문. 이화원 입구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재건이 권력의 실체였습니다. 1889년부터 서태후는 자금성에서 이화원 으로 거처를 옮겨 국사를 이어갑니다.
인수전
에서 서태후는 허울뿐인 광서제와 함께 정사를 보며
(仁寿殿)
외빈들을 만났습니다. 이화원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호젓하게 자리한 인수전이 보입니다. 정문 앞, 궁궐. 인수전의 위치가 독특했습니다. 조 선의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던 근정전은 궁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근정전에서 정사의 핵심적인 사항들이 정해지기 때문에 그 위치는 궁 의 핵심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식당에서도 좋은 자리는 문가가 아니라 안쪽입니다. 하지만 인수전은 이화원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 6. 새롭게 쓰여진 서태후의 이화원
당성을 잃은 술수로 자리를 지킨 서태후의 권력을 나타내는 듯했습니다.
이화원은 본래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처음 조성되어, 1750년 청나라 건륭제
때 대폭 확
(乾隆帝)
장되었습니다. 지어질 당시의 이름은 청의원
이었습니다. 청의
(清漪園)
원이던 이화원은 제2차 아편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860년 영-프 연
합군에 의한 약탈과 방화로 훼손되었지만 1886년 재건되면서,2 그 유
명한 서태후의 이화원이 되었습니다. 실권자 서태후의 국정을 돕기 위
해 각종 전각과 사원을 새로 지은 이화원은 단순한 별장이 아니라 대
국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궁전이 되었습니다. 이화원에는 피서와 요양
2 《두산백과사전》. “이허위안[Summer palace and imperial garden in beijing,
頤和園(이화원)]”.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
method=view&MAS_IDX=101013000741428 (검색일 : 2014년 1월 24일). 을 위한 건물, 국사를 위한 건물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중 덕화원
은 휴식을 위한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德和園)
덕화원에는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습니다. 서태후가 1891년부 터 1895년 동안 은화 71만 냥을 들여 만들었다고 합니다(박미진 2013). 언뜻 위정자는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조용함 속에서 시간을 보 내고 싶어했을 것 같은데, 서태후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그녀는 춤 과 노래가 어우러진 화려하고 경쾌한 경극을 사랑했습니다. 서태후는 이화원에 온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을 빠짐없이 경극을 관람했습니다. 특히 생일 때가 되면 생일 전 3일 생일 후 5일 9일간을 계속해서 경 극관람으로 보냈습니다. 서태후는 심지어 직접 분장을 하고 경극 배우 들과 어울리며 창을 하고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김학주 2011).
2014년 1월 4일의 이화원은 1930년, 1941년의 그 날처럼 여전히 크고 웅장했습니다. 겨울이라 여름궁전의 화려함을 느끼기 어려웠지만 이화원의 규모에 압도되어 불식간에 터지는 “우와!”하는 감탄사는 멈 출 길이 없었습니다. 이화원은 서태후가 애용한 황실 별궁이고 정원이 었습니다.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호
와 약 60미터 높이의 인공
(昆明湖)
산 만수산
이 어우러진 경치는 이화원 최고의 장관입니다. 곤
(萬壽山)
명호는 넓은 바다인 듯싶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되지 않았 습니다. 실제로 곤명호는 서태후에게만큼은 바다였는지 모릅니다. 해 군력 증강을 위해 모아 놓은 국가 재정을 이화원 재건에 전용한 서태 후는 정치적 비난을 무마하고 싶었습니다. 해군 훈련은 실제로 곤명호 라는 그녀의 ‘바다’에서 이루어집니다. 서태후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한 6. 새롭게 쓰여진 서태후의 이화원
풀 꺾였고, 곤명호는 정당한 예산 집행의 결과물인 듯했습니다. 이화
원 재건으로 청나라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있을 정
도로 당시 공사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신명호 2010).
일만 백성의 고혈로 다만 자기자신을 위한 성을 지었다는 비난을
받은 서태후. 이화원은 청나라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건축
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이화원은 다만 한 사
람을 위해 한 나라의 부
가 얼마나 집중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富)
어떤 사회건 축적된 부가 어떤 사회적 형태를 취하는가를 살펴보게
되면 그 사회 내부의 권력구조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하일브로너
외 2010). 서태후는 이화원에서의 사치스러운 삶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
의 피땀을 강제할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태후 한 사람
바다, 곤명호 ▼곤명호와
만수산
▼곤명호와 만수산 을 위해 청나라의 부가 이화원에 집중될 수 있었던 까닭은 청나라의 경제가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청나라를 통틀어 가 장 강력한 명령으로 부를 재분배할 수 있던 사람은 서태후로, 그녀에 게 부가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반면, 시장에 의한 경제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다만 한 사람을 만 족시키기 위한 화려한 건축물이 들어설 곳이 없습니다. 시장경제가 이 루어지는 나라들에서 과거의 이화원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고 화려한 장소는 복합상업공간입니다. 서울의 코엑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그 나라의 부는 익명의 다수가 지갑을 기꺼이 열만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 사용됩 니다. 시장경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에는 ‘서태후의 이화원’이 들어 설 공간이 없습니다. 6. 새롭게 쓰여진 서태후의 이화원
서태후의 외교
이화원의 장랑
은 곤명호 기슭을 둘러싼 긴 복도로 인수전과 덕화원
(長廊)
을 이화원의 다른 전각, 사원들과 연결해주는 통로입니다. 장랑은 길이가 778미터, 273칸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복도이며, 천장과 벽에 수많 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일컬어집니다.3
서태후는 이 장랑을 의전
▼장랑 장소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친 구들과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두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일상 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친구 의 성격과 생각들을 알게 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술 작품을 두고 그런 것처럼, 사 람들은 자신과 타인 밖 제3의 물건을 소재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서태후 도 이화원에 찾아온 타국 정치 인들과 장랑에 그려진 그림들 3 《두산백과사전》. “이허위안[Summer palace and imperial garden in beijing, 頤和園(이화원)]”.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 method=view&MAS_IDX=101013000741428 (검색일 : 2014년 1월 24일). 을 통해 서로의 의중을 가늠하지 않았을까요? 서태후가 장랑을 의전 의 장소로 여겼을지 모를 일입니다.
장랑의 그림뿐만 아니라 장랑 속 곤명호도 서태후와 타국 정치인 을 매개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입니다. 장랑 기둥, 바닥, 지붕은 액자가 되고 그 가운데에 펼쳐지는 곤명호는 계절에 따라 얼굴을 달리하는 그림입니다. 햇살이 비치는 물비늘을 드리운 아침의 곤명호. 겨울 날 오후 물안개 사이에 드러나는 그 광활함. 그 사이에 어떤 담화들이 오 고 갔을지 상상하니 장랑을 걷는 마음이 새로웠습니다.
장랑을 따라 이화원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싶었던 곳은 청안방
이었지만, 시간이 늦어 직접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1755년 (清晏舫)
건륭제 때 처음 지어진 청안방은 대리석으로 만든 배로, 총 길이가 36 미터입니다. 청안방 위에 건축물들은 고대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습 니다(유인혜 2009).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지만 청 안방 만큼은 그럴 수 없다고 하여 청안방은 청조에 비유되었습니다. 청안방은 어떠한 외환에도 청조는 전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륭제 치 하의 막강한 청나라의 국력을 나타냈습니다(인민넷 2010).
청안방은 제2차 아편전쟁 때 영-프 연합군에 의하여 소실된 곳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청안방을 1893년 서태후가 서양식으로 새롭게 개 조합니다(유인혜 2009). 서양식으로 개조라. 임진왜란 때 불 타버린 경복 궁을 일본식으로 재건했다면, 조선의 조정과 민
은 결코 받아들이
(民)
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태후가 아무런 변고 없이 서양 연합군에 파괴 된 청안방을 서양식으로 재건하고 그곳에서 풍류를 즐길 수 있던 역 6. 새롭게 쓰여진 서태후의 이화원 사적 배경이 궁금해졌습니다. 오래 전부터 국제도시였던 베이징에서 서 양문물을 사치품으로 향유했던 청나라 황실문화 때문에 서태후가 청안 방을 서양식으로 재건하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 개조일 수 있던 것일까 요? 아니면 절대권력자였던 서태후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이화원을 나서며
이화원을 거니는 일은 감탄과 탄식, 질문이 서로 꼬리를 무는 여정이 었습니다. 이화원 안에 살아 숨쉬었던 서태후를 의식하는 발걸음 속에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EAI 사랑방에서 배운 관점으로 이화원을 뜯어보 려는 패기로 시작한 답사였지만 마음만큼 이화원을 다 담아내지는 못 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래도 책으로만 보던 중국의 역사를 직접 만 날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베이징의 추위를 느끼며 경험한 과거의 현장, 몸으로 배우는 공부. 사랑방 수업 을 마치며 온 답사 여행이었는데 또 다른 사랑방 수업이 시작되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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