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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 여행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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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 김지은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1월 4일, 여행 2일차 오후. 우리는 원명원을 보고 바로 이화원으로 가 기로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원명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제 마음은 조금씩 무거워졌습니다. ‘원명원엔 볼 게 없을 텐데…….’ 그나마 이화 원의 화려한 모습을 보기 전에 원명원 먼저 가는 걸 다행으로 여겼지 요. 원명원은 이화원보다 규모는 더 크지만 안타깝게도 옛날의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게다가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에 피서지로 쓴 장소를 겨울에 가려니 발표자로서 마음이 여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가 찾아 본 원명원의 모습들은 ‘을씨년스럽다, 황량하다, 메말랐다’ 등의 수식어가 잘 어울릴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일행이 너무 실망하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계속 말을 해두었습니다. “여기는 엄청 휑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어요! 우리는 바 5. 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 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원명원
원명원

입구에서 EAI사랑방

로 그 점에서 원명원의 매력을 찾아보는 걸로 해요!” 휑해서 볼 게 없

다면서 우리는 도대체 왜 원명원을 간 걸까요? 그리고 그 속에서 우

리가 찾은 매력은 뭘까요? 우리가 원명원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야

기하기에 앞서 원명원이 겪어온 세월을 함께 살펴봅시다.

역사 속의 원명원

원명원은 청나라의 흥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곳은 청나라의

전성기였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이 무렵 중

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면서 동아시아의 질서를 완전히 장악했지요. 원명원은 1709년 강희제가 아들 윤진

에게 하사한

(胤禛)

별장이었습니다. 최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윤진이 옹정제 로 즉위하면서 옹정 3년인 1725년부터 동, 서, 북의 세 방향으로 점점 확장되고, 황궁의 정원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옹정제는 특히 원명원을 여름 피서지로 많이 이용했다고 하는데요, 후궁들을 데리고 원명원에 가서 지내는 모습은 《옹정제의 여인들》

과 같은 중국 드라

(后宮甄嬛傳)

마에도 등장합니다. (드라마 5화를 보세요!) 그 뒤 건륭제가 바로크식 건축 양식을 더해 원명원을 더욱 크게 넓혔습니다. 1709년부터 1860년까지 황제들은 이곳에 기거하며 정무를 처리했습니다. 그 규모와 아름다움 때문에 원명원은 ‘정원 중의 정원’(萬園之園) 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청나라가 흥하던 시기의 아름다운 원명원의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중국 CCTV에서 2008년 제작된 《원명원》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를 추천합니다. 유튜브에 ‘원명원’을 검색하시면 쉽게 보실 수 있습니

사진

▼원명원 지도 5. 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 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다.1 8분 남짓의 짧은 필름 안에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의 화 려하고 아름다운 원명원의 모습들이 3D로 복원되어 있답니다. 이 필 름은 원명원의 영화로운 역사를 강희제와 옹정제 시대로 나누어서 보 여줍니다. 강희제 시대(1661-1722년)의 유적으로는 봉도요대 (蓬岛瑶台), 구주청안 (九州清晏), 정대광명 (正大光明), 만방안화 (萬方安和) 를 소개하 고, 옹정제 시대(1722-1735년)의 유적으로는 담박녕정 (澹泊宁静), 방호승 경 (方壶胜境), 홍자영고 (鸿慈永枯), 대수법 (大水法), 해안당 (海晏堂), 해 기취 (諧奇趣), 원양관 (遠瀛觀) 을 소개합니다. 이름과 사진만으로는 별 감흥이 없으실 것 같은데 꼭 한 번 필름을 감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유적들은 해기취, 해안당, 방외관, 대수법, 원양관 등으로 주로 옹정제 때에 건립된 곳들이 많습니다. 이 중 특히 유명한 곳은 대수법과 해안당 부근입니다. 대수법은 원명원 내 서양루에 위치 한 인공분수인데요, 대수법과 그 주변을 일컬어 해안당이라고 부릅니 다. 대수법 둘레에는 12시진을 대표하는 십이지동상이 있습니다. 동물 들 머리 동상의 입을 통해 매일 정오에 물이 뿜어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찬란한 전성기가 지나고 19세기 중반 청은 위기 에 휩싸였습니다. 원명원의 운명도 청의 흥망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지요.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이때까지는 외국군대가 중국 대륙의 심장부인 베이징까지는 들어오지 못하고 주 로 해안가에서만 접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난 1860년에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856년 애로 호 사건이 시 1 http://www.youtube.com/watch?v=vH9XYyq57iE (검색일 : 2014년 1월 18일).

대수법
대수법

▼대수법 유적 발점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여 청을 공격합니다. 영-프 연합 군은 아예 베이징까지 공격해 들어왔는데 바로 이때 원명원도 불탔습 니다. 해기취, 대수법 등 수많은 장소가 파괴되고 원명원의 문화재들 은 해외로 유출되었습니다.

대수법 십이지동상의 약탈과 반환을 소재로 한 영화가 바로 2012 년 개봉된 《차이니즈 조디악》(Chinese Zodiac)입니다. 우리나라 배우 권 상우씨가 출연해서 한국에 더욱 잘 알려진 영화인데 혹시 보셨나요? 제가 우리 여행에서 원명원 발표를 맡겠다고 냉큼 정하게 된 것은 바 로 이 영화 때문이었답니다. 조디악(zodiac)이란 황도 십이궁도를 말하 는데, 중국의 조디악이라고 하면 쥐, 소, 호랑이, 토끼를 비롯한 12마 리의 동물들로 상징되는 십이지신을 이릅니다. 이 영화는 중국의 국보 급 보물들이 19세기의 전쟁을 거치면서 외국으로 흩어진 지 150여 년 이 흐른 현재, 전 세계 경매장에서 고액으로 거래되는 12개의 청동상 5. 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 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사진

유적

의 행방을 주인공들이 추적해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청동상 중 토끼와 쥐 머리 동상은 2009년 2월 프랑스의 경매장에서

각각 1,400만 유로(약 270억원)에 낙찰되었습니다. 두 동상은 패션 디자

이너 이브 생 로랑과 그의 파트너 피에르 베르주가 소장해오다가 다

른 소장품 732점과 함께 경매에 나왔다고 합니다(〈한국경제〉 2009/03/06).

이로 인해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중국 정부와 이를 거절하는 프랑

스 사이에 냉랭한 국면이 펼쳐지기도 했었지요.

현대 중국인에게 원명원이란?

“불은 모든 중국인의 체면에 수치를 그을렸고 모든 중국인의 마음속

에 깊은 혐오를 새겼다. 불은 원명원을 파괴시켰지만 꿈꾸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깨웠다. 황하와 장강의 민족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목이 묶이고 눈물을 머금은 채 아름다운 정원이 타 들

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중국영화 《원명원의 불》 (火燒圓明園)(1983)의 마지막 내레이션 내용입 니다. 서양인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 그리고 그들 앞에서 힘없이 무너 져 내린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백년국치’(百年國

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현대 중국인들 중 특히 지식인들에게 널 恥)

리 퍼져있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종종 이 말로 표현하곤 합니다. 19 세기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처음으로 세계에서 상층부가 아닌 하층부로 밀려났습니다. 청나라가 전성기를 누릴 때는 전 세계에서 가 장 부유한 나라였는데 하루아침에 서구사회의 급속한 발전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특히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중국인으로서의 자 부심과 자존심이 서양의 무기 앞에서 한방에 무너져 내리면서 당시의 역사는 중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원명원은 바로 이러한 중국인들의 원래의 자부심과 서구와의 만남을 통해 겪은 백년국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5. 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 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는 원명원을 둘러싸고 여전 히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중국 〈인민일보〉 (人民日報), CCTV를 비롯 한 많은 매체에는 원명원에 대한 수많은 특집 기사, 영상 자료 등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지 150년이 된 2010년, 원명원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명원을 둘러싼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화재 반환과 관련한 논란이 고, 다른 하나는 원명원의 파괴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할 것인지 아니 며 복구할 것인지의 논란입니다.

먼저 문화재 반환 문제를 봅시다. 원명원은 중국 문화재 반환 문제 의 중심에 있습니다. CCTV의 원명원 약탈 및 소실 150주년 기념 특 별리포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2006년 유네스코는 대략 160만 점의 중국 문화재가 현재 전 세계

47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추산했다. 그 중 100만 점은 원명원

에서 약탈되었다고 알려졌다. 예를 들어, 2미터짜리 불교 사리탑

(stupa)은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Fontainebleau Palace)의 중국 파빌리온

에서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중략) 이 중국 파빌리온은 1,000

여 점의 중국 문화재를 소장하고 320점을 대중에 공개하고 있는데

모두 원명원에서 약탈한 것들이다(CCTV October/20/2010).

앞서 소개한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의 모티프가 된 대수법의 십 이지상은 원명원의 문화재들 중에서도 특히 부각되었습니다. CCTV의 같은 해 특별 리포트의 다른 보도 내용에 따르면, 십이지상은 “중국의 잃어버린 문화재의 상징”이라고 불리며 세계 경매시장의 인기 품목이 되었다고 합니다(CCTV October/20/2010).

또 하나의 논란은 원명원의 파괴된 모습을 보존할 것인지 복구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지난 2004년 10월, 20명의 중국인 전문가들이 베이징에 모여 원명원의 재건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재 건을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에서는 원명원의 파괴된 현장은 바로 19 세기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뼈아픈 역사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 대로 두고 길이길이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원명원은 서 양의 악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교육 을 할 최적의 장소라고 평했지요. 이외에도 나머지 경관과의 조화라든 지 재건 비용과 관련한 반대도 있었습니다. 반면 복원해야 한다는 입 장도 팽팽히 이에 맞섭니다. 만약 아름답게 재건해서 사람들의 경탄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러한 엄청난 경관을 파괴했던 서양 세력의 악 행을 되새길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People’s Daily Online January/21/2005).2

문화재 반환 문제, 그리고 원명원의 보전 또는 복구의 문제들은 왜 오늘날 이렇게 논란이 되고 있을까요? 문화재 소실의 규모라든지, 원 명원의 파괴 수준이 워낙 크고 심각하니 논란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 만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원명원이 갖는 상징성에 있습니다. 앞서 이 야기한 중국인의 ‘백년국치’ 정서와 연결지어 생각해 봅시다.

2 http://www.chinadaily.com.cn/english/doc/2005-01/21/content_411124.htm (검색일 : 2014년 4월 18일). 5. 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 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제임스 헤비아(James Hevia) 시카고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2013년 5월 21일 “파괴 이후 : 중국과 서양에서의 원명원”(The Afterlives of Ruins: The Yuanmingyuan in China and the West)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헤 비아 교수는 이번 학기 사랑방에서 읽은 글들 가운데 하영선 선생님 께서 흥미롭게 소개해주신 Cherishing Men from Afar: Qing Guest Ritual and the Macartney Embassy of 1793의 저자입니다. 헤비아 교수 의 강연 동영상도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보실 수 있답니다.3 헤비아는 오늘날 중국 정부가 원명원에 이처럼 주목하는 점을 중국 정책결정자 들의 마음 속 깊이 박힌 백년국치와 민족주의 정서로 설명했습니다. 앞의 두 가지 논란을 각각 적용해볼까요?

먼저 문화재반환 문제와 관련해서 중국 정부는 원명원에서 애국심 을 고취시키는 각종 행사를 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0년에는 제2 차 아편전쟁 때의 문화재 약탈 150주년 기념행사를 원명원에서 진행 했습니다(CCTV October/20/2010). 이 행사에서 유명 배우인 성룡은 ‘국가’ 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러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지요. 이 행사 는 서구에 의해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을 촉구하는 동시에 전 세계에 서 진행되고 있는 원명원 문화재의 경매를 비난했습니다. 이 행사에서 성룡은 원명원의 약탈된 문화재 반환을 촉구하는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는 뜻을 밝혔는데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2012년 개봉된 《차이니즈 조디악》이랍니다. 그는 특히 이러한 뜻이 단지 중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나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을 3 http://www.youtube.com/watch?v=hAiLsuk_gLo (검색일 : 2014년 1월 18일).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서구 열강들에 대항하여 위 나라들과 연대감을 찾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날 참여한 가수들은 모두 무급으로 공연에 임했고, 가수들은 중국인들의 집단적인 기억의 일부로서 과거의 역사는 길이 남을 것이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습니 다.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매우 잘 드러난 행사였지요. 제2차 아편전쟁 때 원명원이 가장 많이 파괴되고 문화재들이 소실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명원이 오늘날의 모습처럼 심하게 파괴된 것은 그 이후 1900년의 의화단운동, 그리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문화 대혁명 시기의 대 혼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Lee 2005, 155-156). 굳이 “약탈 150주년”이라고 강조하며 서양 침탈의 역사만을 부각시키는 중 국 정부의 의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서구의 침탈에 파괴된 현장을 복원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중 국 정부는 원명원의 보존/복원 문제를 이슈화함으로써 19세기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규범적인 우위를 점하고자 노력하는 듯합니다. 오늘날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두 나라는 군사, 경제 분 야에서뿐만 아니라 가치와 규범의 차원에서도 대결 구도를 보이고 있 습니다. 그 동안 중국은 가치와 규범의 면에서 열세에 있었습니다. 예 를 들어 소수민족 독립을 막기 위한 중국 정부의 통제에 대해 서방세 계에서는 계속해서 인권문제를 제기했지요. 소수민족 문제뿐 아니라 전반적인 민주주의 가치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공격에 중국은 상당 히 취약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중국 정부가 원명원으로 상징되는 19세 기 당시의 서구의 침탈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바로 이 5. 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 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장소를 통해 서구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일말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치, 규범 차원에서 중국이 지금은 많은 공격을 받지만, 과 거로 거슬러 가보면 서방세계 역시 그리 떳떳하지는 않지 않느냐는 반격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나오며_ 원명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까지는 중국인의 눈으로 원명원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원명원 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중국인의 것만 있지는 않겠지요. 서양인들은 어 떻게 원명원을 보고 있을까요? 이번에 원명원을 가면서 저는 그곳을 거닐고 있는 서양인 관광객들에게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서양인 관광객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운이 없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서양인들이 정말 이 현장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일까요? 헤비아의 강연 제목에서도 드러 나지만, 같은 원명원이라도 중국인이 보는 원명원과 서양인이 보는 원 명원은 다르겠지요. 똑같은 시공간을 거치면서 같은 사건을 겪었더라 도 중국인이 겪은 제2차 아편전쟁의 역사와 영-프 연합군이 겪은 그 역사는 분리된 채로 재생산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원명원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바로 “우리 는 어떤 눈으로 원명원을 볼 것인가?”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중국인 나 름의 시각이 있을 것이고,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우리의 19세

대수법과 함께 서양루에 있는 황화진 앞에서. 황제가 궁녀들과 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대수법과 함께 서양루에 있는 황화진 앞에서. 황제가 궁녀들과 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기 역사를 떠올리며 함께 서세동점을 겪었던 중국인의 시각에 공감하 는 것이 당연한 걸까요? 아니면 반대로 조선을 속국으로 삼았던 청을 대신해서 눌러준 서양인의 시각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 맞을까요? 둘 다 아니라면 우리만의 제3의 독법은 무엇일까요? ■ 5. 백년국치의 상징, 원명원 : 21세기 연행사의 눈으로 다시 보기 참고문헌 Lee, Haiyan. 2009. “The Ruins of Yuanmingyuan: Or, How to Enjoy a

National Wound.” Modern China 35, 2: 155-156.

〈한국경제〉. 2009. “이번엔 문화재 싸움…중국-프랑스 ‘3차 한랭전선’”.

3월 6일.

CCTV. 2010. “Gala Marks 150th Anniv. of Looting of Yuanmingyuan.”

October 20.

───. 2010. “Yuanmingyuan Animal Head Sculptures: Symbol of

China’s Lost Relics.” October 20.

───. 2010. “1.6 million Chinese Relics Held by 47 Museums

Worldwide.” October 20.

People’s Daily Online. 2005. “Should Yuanmingyuan be rebuilt?” January 21. http://www.youtube.com/watch?v=vH9XYyq57iE (검색일: 2014년 1월 18일). http://www.youtube.com/watch?v=hAiLsuk_gLo (검색일: 2014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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