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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유리창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 여행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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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 이규원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옛 베이징 내성의 정문인 정양문 밖에 위치한 유리창

거리는

(琉璃廠)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관광 가이드를 살펴보면 유리창 거리를 언급할 때 간단히 한국의 인사동 거리 정도로 소개하 고, 베이징을 찾는 관광객들 역시 유리창을 가볍게 둘러볼 뿐입니다. 그러나 18, 19세기 유리창 거리는 각종 고서점과 골동품, 예술품을 파 는 국제적인 쇼핑 거리로, 베이징 최고의 시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사 실은 오늘날 초라하고 오래된 유리창 거리를 생각할 때 놀랄 만한 일 입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신 일행들은 항상 이 곳에 들러 각종 서책과 잡화들을 구입하고 그곳의 지식인들과 교류하 였습니다.

결국 18, 19세기 유리창 거리는 청나라, 조선, 그리고 서양의 문물 4. 베이징 유리창 : 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이 만나서 서로 충돌하고 변용되며 전파되는 국제 문화정치의 면모를 볼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나아가 국가 간 힘의 정치라는 거시적 차 원의 국제정치가 아닌, 사람 간 교류가 만들어내는 미시적 차원의 국 제정치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 유리창 거리였습니다.

과거 찬란한 모습을 자랑했던 유리창 거리를 이제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찾아가는 유리창 거리는 과거 사절 단들이 기록했던 모습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시장으로서의 가치가 쇠 퇴했거니와, 2009년 올림픽 개최로 인해 도로가 정비되면서 그 부산했 던 시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깔끔한 시장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 라서 우리가 유리창 거리를 걸으면서 그 당시 조선 사절단이 느꼈던 여러 가지 느낌을—충격, 혹은 공포, 놀라움—느끼기는 힘들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날 백화점이라는 현대 소비문화의 정점을 경험한 우리의 감각이 무뎌진 것도 유리창 거리에서 특별함을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베이징 유리창을 답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거 조선 사절단들이 무엇을 보고 느꼈고 누구를 만났을 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그들의 사고에 어떤 전환을 이루어냈으며, 이후 조선의 사회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유리창 거리를 걸었던 과정을 추적하고, 여기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오늘날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나아가 우리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오늘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유리창 거리의 과거와 현재_ 찬란한 과거의 퍼즐 찾기?

유리창이란 이름은 본래 명나라 시기에 궁에서 사용하는 유리기와를 제작하는 유리 공장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이후 점차 다 양한 재화를 파는 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 시기 최고의 시장이라고 불리던 유리창 거리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었을까요? 사절 일행들이 기록한 유리창 거리의 화려함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다리와 난간 이 빼어나고 사치한데, 순금이나 금벽과 단확으로 된 벽와가 영롱하여 마치 유리 같았다.”라고 합니다. 또한 조선 순조 22년 사절단에 참가 했던 서유소

에 의하면 “가게는 단청이 몹시 화려하다. 심한 경

(徐有素)

우 전부 금빛을 써서 황금옥을 이룬 것도 있다. 가게 주인은 비단 옷 에 담비 갖옷을 입고 앉아서 장사의 저울질을 맡아 천하의 이익을 농 단한다.”라고 하였습니다(정민 외 2013, 24).

유리창의 이러한 화려한 모습은 당시 거리를 찾았던 연행 사절들 에게 놀라움과 아찔함을 선사하였습니다. 연행 사절들의 말을 빌리자 면, “정신 없이 구경하느라 고개가 아플 지경”이라고 했고, “진귀한 보 물에 눈길을 빼앗겨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으며”, “눈이 아찔하여 일 일이 형언할 수 없었다.”라고 합니다(정민 외 2013, 30).

당시 유리창 거리의 모습은 오늘날 어느 곳을 바탕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오늘날 세계인의 명소로 자리잡은 미국 뉴욕의 타임스 퀘어 인근 명품 쇼핑거리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타 4. 베이징 유리창 : 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임스퀘어에는 지식인의 거점을 상징하는 서점들은 없고, 그 화려함을 비교한다면 당시 온 거리가 금과 옥으로 치장되어 있던 유리창 거리 가 압도적이었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유리창 거리가 이렇게 화려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이곳이 단지 지식인이 모이고 서적들이 넘쳐나는 서점거리일 뿐 아니라 다양한 소비 와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연행 사절이었던 이홍식

에 의하면, “유리창에는 크고 작은 서점 이외에도 각종

(李弘植)

서화와 골동을 파는 가게들과, 서양 물품, 자명종, 오르골, 요지경, 앙금, 안경 등을 취급하는 가게들도 많았으며, 각종 은전포와 전당포가 있었 습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만주족과 한인 외에도 베트남과 일본 및 서양 등 다양한 지역에서 온 인종들이 뒤섞여 있었으며, 찻집 과 술집도 번성하였습니다.”(정민 외 2013, 242) 민간 연희도 거리 곳곳에서 종종 이루어져, 연행 사절들이 이를 본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유리창이 언제부터 그 찬란함을 자랑했는지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연행 기록을 살펴보면 청 제국이 들어선 이후 18세기부터 유리창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유리창 거리는 아마 이 시 기부터 앞서 묘사한 화려한 모습의 시장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정 민에 의하면, 유리창에 대한 가장 상세한 문헌은 청나라 이문조

(李文

가 1769년에 지은 《유리창서사기》

입니다. 한편 그전 藻)

(琉璃廠書舍記)

에 1765년에 홍대용

이 유리창을 찾았고, 1778년 여름에는 유

(洪大容)

득공 (柳得恭), 박제가 (朴齊家), 이덕무 (李德懋) 가 다녀갔으며, 1780년에 는 박지원

이, 1790년에는 유득공과 박제가가 이곳을 다시 찾았

(朴趾源) 다고 합니다(정민 외 2013, 90). 흥미로운 점은 유리창 거리의 변모가 청 제국의 형성과 이로 인한 중국의 사회변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 다. 청조 때부터 베이징은 청나라 황족들만이 사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에 한인들은 주로 성 남쪽 정양문 밖에 거처했는데, 그곳이 유리창 거리가 되는 곳입니다. “유리창 일대는 한인 지식인들의 집단 거주지 로의 성격을 띄게 되면서 고서점과 골동기완

상점들이 밀집

(骨董器玩)

한 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합니다(정민 외 2013, 12).

그렇다면 지금의 유리창 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많은 사람들 의 기억 속에 유리창 거리는 서울의 인사동 거리, 즉 옛날 물건들 혹 은 옛날 건물의 자취가 남아 있는 거리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옛날의 찬란함 대신, 오늘날에는 빛 바랜 고풍적인 거리로 남아 있습 니다. 나아가 최근 도로 정비를 하면서 북적북적한 거리의 모습 대신 깔끔한 느낌의 거리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명성과 찬란함이 빛이 바래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유리창의 모습에서 는 과거 찬란함을 조금이라도 엿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베이 징 유리창에서의 우리의 임무는 무엇이 될까요? 우선, 간간히 찾을 수 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내어 당시 연행 사절들이 느꼈던 놀라움과 아찔함의 감정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과거 유 리창 거리의 모습에 관한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상상 속에서나마 그 화려함을 가늠해보려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연행사의 마음을 읽는 타 임머신 여행에 필요한 두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겠습니다. 하나는 유 리창 서점가 내부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과 우정 교류의 장입니다. 4. 베이징 유리창 : 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유리창 서점가

당시 조선 사절들이 베이징 유리창에 도착하면 무엇을 했을까요? 앞 서 말했듯이 연행사들은 각종 잡화들을 사고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였 습니다. 그러한 활동 중에서도 특히 사절들은 유리창 거리의 서점가에 들려서 서적들을 살펴보고 사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리창 거리가 번성했을 당시에 그곳에 존재하는 서점들 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유리창 서점가에 대한 묘사는 1769년 이문 조의 《유리창서사기》와 1899년의 무전손

의 《유리창서사후기》

(繆荃孫)

가 서점가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해놓았고, 그 사이 수많은 연행 기록 을 통해 유리창 거리의 서점가가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알 수 있습 니다. 정민에 의하면 특히 이문조의 《유리창서사기》는 18세기 중반 유리창 서점가의 현황과 각종 정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귀중한 1차 자료입니다. 정민이 《유리창서사기》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한 바 를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당시 서점들은 대부분 신서 를 취급하였으며, 새로 나온 책의 경우 장정이나 종이 질이 썩 좋지 않았고 책 한 권의 두께도 매우 얇았습니다. 둘째, 고서를 취급하는 서점들이 옛날 책을 확보하는 방법은 대부분 몰락한 장서가 집안에서 책을 일괄 매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표지가 아름답고, 모두 장서인

이 또렷이 찍혀있는 고급 컬렉션이었습니다. 셋째,

(藏書印)

유리창 서점 이외에도 서적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하였습니다. 당시 베이징의 서적 구입처로는 성안 융복사 등 몇 곳의 사찰 앞에 땅바닥에 펼쳐놓고 파는 난전들이 더 있었습니다(정민 외 2013, 98-101 참 조). 이를 통해 살펴볼 때, 유리창 서점가는 가히 당시 중국 지성사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화려함을 자랑하는 유리창 거리에서 서점들 역시 엄청난 규 모를 자랑했습니다. 그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당시 조선 사절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엄청난 규모의 책들을 책장마다 표식, 즉 찌를 달아서 질서정연하게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박사호

가 쓴 《책사기》

(朴思浩)

(冊

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책을 쌓는 법은 이렇다. 집에 삼 肆記)

십여 칸을 만들고 각 칸의 네 벽에 선반을 설치하여, 층층마다 질서정 연하게 배열하여 쌓아두고는 매질마다 ‘아무책’이라는 찌를 붙였다. 그 래서 책이 용마루에 차고 집에 넘쳐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문 앞에 하나의 큰 탁자를 두고 탁자 위에 십여 권의 책갑을 놓았는데 곧 책 이름 목록이었다. 사람이 의자 위에 앉아서 아무 책을 사려고 하면 한 번 손을 들어 뽑아 주고 꽂는 것이 매우 편하고 쉬웠다.” 이처럼 몇 만권인지도 알 수 없는 책들 사이에서도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체계 적인 시스템은 당시 조선 사절들에게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 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창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서점들은 조선에 존 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유리창 거리에서 고서적이 넘쳐나는 서점들을 찾 을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유리창 거리에서는 고서점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고서점보다는 큰 현대식 서점이 즐비하고, 인 사동 거리처럼 공예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 4. 베이징 유리창 : 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구하고 유리창 거리에 근근이 남아 있는 고서점들을 찾아본다면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재미는 있을 것입니다. 옛날의 방식처럼 책을 구비 해 놓았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힘드나 오래된 책들을 살펴보면서 과거 조선 사절들이 느꼈던 문화충격이 존재했음을 되뇌어 보는 것은 의미 가 있습니다.

사진

지식과 우정 교류의 장

조선 사절들은 베이징 유리창 거리에서 또 무엇을 하였을까요? 조선 연행 사신들과 중국 지식인들의 유리창 거리에서의 조우는 베이징으 로의 여행이 주는 묘미였습니다. 특히 홍대용과 항주 세 선비와의 만남 은 조선 후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사 중 대표적인 이야기로 회자됩니다.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두 나라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교류할 수 있 었을까요? 비록 말은 다르지만 조선은 한자 문화권에 들었기에 붓으 로 하는 필담이 가능했습니다. 필담을 통해서 중국과 조선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 살던 지식인들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필담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는 당시 두 나라 의 지식인들이 처했던 상황적 제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유리창 거리에서 기거하던 지식인들은 멸망한 옛 명 왕조 시기의 한족 지식 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항시 청 왕조로부터 문자옥

의 위협을

(文字獄)

느꼈고, 이에 필담의 내용을 찢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조선 사절의 경우에 이들은 조선관에서 밖으로 나가는 시간에도 제약이 일 정 부분 존재했기에 중국 지식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은 유리창 거리에서 중국 지식

(乙丙燕行錄)

인들과의 조우라는 일화를 통해 당시 중국 지식인을 만나는 조선 지 식인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청대 전기에 조선 사절단들이 머물 렀던 “옥하관”1은 출입이 엄격하게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오후 3시 이 1 조선 사절들이 머물러 “조선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4. 베이징 유리창 : 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후에는 문이 봉쇄되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문이 열렸기 때 문에 감옥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어떻게 유리창 거리를 나다닐 수 있었던 것일 까요? 그는 현명하게(?) 뇌물이라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돈으로 대사, 역관 등을 매수하여 자유롭게 출입할 기회를 얻었으며, 엄격한 출입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홍대용과 엄성

의 만남과 필담 교류는 그들에게 평생의

(嚴誠)

우정을 남겼습니다. 두 사람의 교류는 조선과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엄성과의 만 남은 홍대용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었고, 그 후 그의 사상에 영 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홍대용과 엄성이 만나게 된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만남에서 이들을 이어준 것은 안경이라는 물건이었습니다.

2월 초1일에 비장

이기성

이 망원경을 사려고 유리창

(裨將)

(李基成)

에 갔다가 두 사람을 만났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문인의 기질이 있다.

그런데 모두 안경을 썼으니 아마 근시이던 모양이다. 이가 청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척이 있어서 안경을 구하는데 거리에서 진짜 물건

을 사기 어렵다. 당신이 쓴 안경이 근시안에 매우 적합할 것 같은데

내게 팔 수 없겠는가? 당신은 혹 여벌이 있을 것이고 새로 구한다

해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니 그 한 사람이 벗어 주면

서 말하기를 “그대에게 구하는 사람은 아마도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내가 안경 하나를 아끼겠는가? 팔기는 무엇 을 팔아. 가지고 가게.” 하고 뿌리치고 가버린다. 기성은 자기가 경 솔히 말했다가 공연히 남의 물건을 가지게 된 것을 후회하여 곧 안 경을 가지고 쫓아가서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아까 한 말은 장난으로 한 말이요,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물건 을 받을 수 없다.” 하니 두 사람이 모두 불쾌해 하면서 말하기를 “이 것은 조그만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 리는 서로 도와 줄 의리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사양하는가?” 한다. 기성은 부끄러워서 감히 다시 말을 못하고 그 내 력를 물었더니 절강

의 거인

으로서 과거 보러 북경에 올

(浙江)

(擧人)

라와 정양문

밖 건정동

에 하숙하고 있다고 하더라

(正陽門)

(乾淨衕)

는 것이다. 기성은 그날 저녁에 그 안경을 가지고 내게로 와서 그 사유를 말하고 나에게 화전

을 구해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보

(花箋)

답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두 사람이 다 우아하고 가애

한 사람이니 한 번 가서 만나보라.”라고 한다. 나는 화전 한 (可愛)

묶음을 주고 가서 자세히 알아가지고 오라고 부탁하였다. 다음날 기 성은 과연 그들의 거소

를 찾아가서 부채와 먹과 환약

(居所)

(丸藥) 주었더니 다 사양하다가 받고 다시 다연

등 물건으로 회예

(茶烟)

(回

를 하는데 매우 예모

가 있고 언사나 용모가 고결하여 반드 禮)

(禮貌)

시 남보다 뛰어난 재학

을 가진 것 같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才學)

만나보라고 한다. 그래서 내일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김재행 평중이 이 소식을 듣고 같이 가기를 원해서 동행을 하였다. 초3일 조반 먹 4. 베이징 유리창 : 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고 우리 세 사람은 인력거를 타고 정양문을 나가 2리쯤 가서 건정동

이라는 곳에 이르니 상점이 있는데 천승점

이라고 간판이 붙

(天陞店)

었다. 여기가 그 두 사람의 거소이다. 차

에서 내려 문 밖에 서서

(車)

마부를 시켜 먼저 들어가 통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듣고 중문

(中門)

밖에 나와서 마중한다.

《항전척독ㆍ건정동필담》 (杭傳尺牘ㆍ乾淨衕筆談)2

이런 만남을 계기로 홍대용은 엄성과 반정규 등 중국의 지식인들 과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 때 단 한 번, 20여 일 간 얼 굴을 마주 보고 세상사에 대해 필담을 나누면서 ‘홍엄지교’로 불릴 만 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항주로 돌아간 엄성은 병을 얻어 이듬해 세상 을 떠났는데, 이승과 결별하는 순간 홍대용이 선물한 조선의 먹을 가 슴에 품고 그 먹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는 《일하제금집》

에 포함돼 홍대용에게 전

(日下題襟集)

달되었습니다(허진석 2012). 이러한 홍대용과 엄성의 교류 일화는 시대 를 넘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 옵니다. 그리고 홍대용이 연행을 갔다 온 이후에 펴낸 《건정동필담》

은 이후 조선 지식인들

(乾淨衕筆談)

사이에서 번지면서 향후 한중 지식인 간 교류를 증대시키는 기반을 마 련했습니다.

2 국가지식포털 한국고전 번역원.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 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K%26finId=001% 26gunchaId=bv002%26muncheId=01%26seojiId=kc_mk_c002 (검색일 : 2014년 3월 31일). 우리에게도 외국인을 만나는 일 역시 하나의 강렬한 경험입니다. 한편 우리가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그곳 주민들과 의사소통을 시도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그곳 주민들의 얘기로부터 현재 유리창 거리의 모습 및 생활상이 훨 씬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답사, 넓게는 여행의 묘미가 그런 것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며

유리창 거리의 찬란했던 역사를 알고 나면, 우리가 유리창 거리를 방 문하는 순간에 그 거리는 단순히 한국의 인사동과 같은 거리로 각인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과거 유리창 서점가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유리창 거리 고서적 가게를 둘러보는 것도 흥미로 운 일일 것입니다. 과연 유리창 거리에 과거 찬란한 역사의 흔적이 얼 마나 남아 있을까요? 이것이 이번 유리창 거리 답사의 중요한 포인트 입니다. ■ 4. 베이징 유리창 : 타임머신을 타고 연행사의 마음을 읽다 참고문헌 정민·박성순·박수밀·박현규·왕쩐중. 2013. 《북경 유리창 : 18, 19세

기 문화거점》. 서울 : 민속원.

허진석. 2012. “박현규 교수와 함께 한 대륙 속 우리문화 흔적을 찾아서 5 :

베이징 류리창(琉璃廠) 거리”. 〈동아일보〉. 7월 30일. http://news.donga.

com/3/all/20120729/48163686/1 (검색일 : 2014년 1월 1일).

국가지식포털 한국고전 번역원.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

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K%26

finId=001%26gunchaId=bv002%26muncheId=01%26seojiId=kc_

mk_c002 (검색일 : 2014년 3월 31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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