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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춘하추동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 여행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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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현 · 이화여자대학교

제가 맡은 자금성

은 이번 여행 일정에서 원래는 제일 먼저 살

(紫禁城)

펴보기로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중국식 샤브샤브 훠거와 그에 사리로 넣는 국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종업원의 매력에 빠진 우리는 정해진 일정보다 길게 점심시간을 가졌고, 자금성은 국가박물관 뒤에 그 다음 날인 1월 4일에 답사하는 것으로 미뤄져 버렸습니다. 첫날이면 끝이 날 줄 알았던, 제 긴장과 두근거림은 결국 둘째 날 아침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베이징에서 첫날 밤 저를 잠 못 들게 한 자금성을 영락제의 봄, 강희제의 여름, 건륭제의 가을, 부의의 겨울로 소개하겠습니다.

자금성을 들어가다_ 오문, 금수교

자금성은 자색의 금지된 성이라는 이름처럼 비밀스럽게 감춰진 부분 과 엄청난 규모, 호화스러운 장식물로,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 3. 자금성의 춘하추동 계인을 매혹시키고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가 건설한 자금성은 오래 된 역사만큼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고맙게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금지된 성을 마음대로 드 나 들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고, 거의 완벽한 형태의 자금성을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날 자금성은 지난날 황제와 함께하던 강력한 권위를 잃었고, 신하와 백성을 무릎 꿇게 하던 위압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 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자금성에 압도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규모와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수많은 유물에서 과거 그 궁의 주인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금성의 계절을 주인

사진

▼자금성 에 따라 나눈 이유는 자금 위성지도 성이 철저하게 황제를 위 (출처 한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 자금성에는 황제가 하늘이 구글지도) 라는 생각이 문에까지 반 영되었는데요, 예를 들어 단문 을 지나면 나오 (端門) 는 오문 을 봅시다. (午門) 오문의 입구모양을 보면 들어가는 쪽은 네모나며, 궁 쪽은 둥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동양의 천 원지방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원지방은 하늘은

(天員地方)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옛날의 우주관인데요, 궁 안은 하늘인 황제가 살아 둥글게, 궁 밖은 땅인 백성이 살아 네모로 만든 것입니다. 또 태 화문과 오문 사이에는 백옥의 5개 다리가 있습니다. 금수교

(金水橋) 하는데, 중용의 5가지 덕, 인

·의

·예

·지

·신

(仁)

(醫)

(禮)

(智)

(信) 상징합니다. 중앙은 황제만이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이현국 2008). 명나라 영락제의 봄_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거대한 태화문 (太和門) 을 지나면 태화전 (太和殿), 중화전 (中和殿), 보화 전

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자금성의 3대전을 보기 전 태화문 (保和殿)

앞에서, 자금성을 건설하여 자금성의 봄을 연 영락제

에 대해

(永樂帝)

얘기해보았습니다. 영락제는 정난의 변으로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영락제는 왕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주변에 적이 많 았습니다. 그래서 반대세력이 많았던 남경 대신, 왕위에 오르기 전 자 신이 연왕으로 있었던 베이징으로 천도를 결심합니다. 남경을 기반으 로 하고 있던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락제는 천도 계 획을 비밀리에 세웁니다(이근명 2002, 225-228).

얘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태화문을 지나 태화전을 향해 걸었습니 다. 태화전은 자금성 안에서 가장 광대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황제가 옥좌에 앉아 귀빈들을 접견하던 곳입니다. 태화전의 앞에는 황제의 장 3. 자금성의 춘하추동 수를 기원하는 학과 거북이 상이 있습니다. 태화전의 뒤로는 중화, 보 화의 두 개 대전이 있는데 이 3대전이 공식 행사들을 치르던 외조

(外

입니다. 자금성은 공식행사를 위한 외조와 황제와 황후가 머물던 助)

내정

으로 구분됩니다. 외조에는 세 개의 길이 있는데, 이 길이

(內庭)

중앙의 축을 강조하면서 3개 대전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 중 가운데 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고 합니다(질베겡 2001, 15-17).

베이징 천도로 논란이 되던 때, 영락제가 매우 총애했던 서황후가 죽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락제는 그녀의 묏자리를 베이징 근처에서 찾습니다. 이를 통해 확고한 영락제의 천도의지를 읽어낸 신하들은 베 이징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것을 건의합니다. 영락제는 크게 기뻐하 며 조서를 내려 전국 각지로 궁전의 축조를 위해 필요한 자재들을 구 할 것을 명합니다. 황제는 가장 충직한 신하를 사천 등지의 험악한 산 악지로 녹나무 벌목을 위해 보냅니다. 녹나무는 예로부터 왕족의 관을 위해서 벌목한 목재로, 그 산지에는 호랑이 등의 맹수가 자주 등장하 여 벌목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과거 태 화전의 기둥이 바로 이 녹나무로 지어졌습니다. 이는 천 명이 산에 들 어가 오백 명이 살아 돌아온다는 녹나무의 벌목을 강제할 수 있던 황 제의 권위를 증명하는 것입니다(KBS 2007a).1

태화전 뒤에는 중화전이 있습니다.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에서 행 사를 거행하기에 앞서서 쉬던 곳이었습니다. 서태후가 친조카, 광서제 1 그러나 현재의 태화전 기둥은 청나라 때 소나무로 다시 세운 것입니다. 를 유배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는 외조의 마지막인 보화전이 있 습니다. 보화전 뒤쪽 돌층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대리석 채석 을 위해 인부 1만여 명, 병사 6,000여 명이 동원되었고, 대리석 운반 을 위해서는 도로에 500미터 간격으로 커다란 우물을 팠다고 합니다. 혹독한 추위에는 우물에서 물을 끌어와 도로에 빙판을 만든 후 대리 석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대리석을 베이징까지 운반하는 데 총 28일이 걸렸습니다(KBS 2007a). 건축자재 준비에만 10년 이상이 걸렸던 자금성은 1406년부터 15년간 축조되어 1421년에 완공됩니다 (박한제 외 2007, 132).

베이징 자금성은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중심지 가 되었습니다. 영락제에 의해서 베이징과 자금성에는 봄이 도래했고, 이것을 기반으로 자금성은 성장의 계절, 여름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청나라 강희제의 여름_ 건청문,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봄이 새싹이 트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뜨거운 태양 아래 숲이 우거지 는 계절입니다. 자금성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뜨거 움을 견디면서 강희제

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강희제는

(康熙帝)

한족과 만주족의 민족융화정책을 펼쳐서 새로운 나라의 불안함을 제 국의 안정성으로 바꾸어냈습니다. 3. 자금성의 춘하추동

강희제의 자금성은 서양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명나라 말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로 시작되었던 서양문물의 수용은 강희제 때 집성화 됩니다. 마테오 리치는 시계를 공물로 바쳐 처음으로 자금성에 입궐하 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가을’에 가서 보다 자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외조를 지나면 건청문

이 나옵니다. 2 건청문이 외조와 내정

(乾淸門)

을 나누는데, 건청문을 지나면 세 개의 궁전, 건청궁 (乾淸宮), 교태전 (交泰殿), 곤녕궁 (坤寧宮) 이 나옵니다. 건청궁은 명대와 청대 초기에 황 제와 황후의 침궁이었는데, 때로는 황제가 여기서 신하를 접견하거나 일상의 공무를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강희제도 건청궁에서 일상의 공 무를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1688년 11월 28일 프랑스 과학자 6명은 건청궁에서 강희제를 알현 합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과학을 위한 측정기구와 과학 서적을 가져 와 황제에게 선물로 바쳤습니다. 선물을 받은 강희제는 몹시 기뻐하며 그들을 입궁토록 하여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이때부터 외국인 과학자들은 청나라 궁정에 머물며 수 십 년 동안 과학을 연구했습니 다. 강희제가 특별히 서양 과학에 관심이 깊었던 것은 정치적인 이유 도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던 강희제는 과거 보정대신들 에 의한 허수아비 황제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1669년 강희제는 아담 2 기행에서는 시계가 있는 동선의 편의상 봉선전을 들렀다가 건청문으로 가 서 가을을 먼저 살피고 여름을 살폈습니다. 그렇지만 기행문에서는 계절의 순서대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샬의 조수였던 페르비스트와 당시 실질 권력을 잡고 있던 오배

(鰲拜) 의 지지를 받던 흠천감

사이에 대결을 벌입니다. 주제는 정오

(欽天監)

의 그림자 길이를 계산하는 것이었습니다. 흠천감은 전통의 역법에 따 라 계산하였고, 페르비스트는 서양의 과학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결 국 흠천감의 계산은 더 큰 오차가 있었고 보다 정확했던 페르비스트 가 이 대결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어린 황제는 흠천감 을 페르비스트에게 맡기고 보정대신들의 권력을 제약합니다. 자신이 주관했던 역법논쟁을 보면서 강희제는 기하학, 수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자금성에는 그가 사용했던 계산기, 그가 수학을 공부할 때 썼던 대수표 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KBS 2007b). 그가 중국의 전통 학문를 넘어서 예수회 선교사가 전파한 서양학문까지 사랑했고, 이들 선교사에게 명하여 전국의 실측지도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를 만 들게 했던 사실은 유명합니다(이명근 2003, 319).

건청궁 뒤의 교태전은 황후가 황족의 하례를 받던 곳이었습니다. 가장 안 쪽에 있는 곤녕궁은 청대에 와서 동과 서 두 부분으로 나뉘 어 사용되었습니다. 동쪽 부분은 황제부부가 신혼 첫날밤을 보내던 곳 이었습니다(질베겡 2001, 16).

강희제 시기의 중국은 동서양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가 그를 친한 친구라고 표현하며 편지를 보낼 정도 였습니다. 강희제의 자금성은 밖에서 들어오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만큼 안정적이었고, 그 문명을 받아들였기에 수확의 계절, 가을로 향 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여름이었습니다. 3. 자금성의 춘하추동

청나라 건륭제의 가을_ 종표관, 봉선전

명나라와 청나라를 통틀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는 건륭제

(乾隆帝) 치시기입니다. 봄과 여름을 거쳐서 수고했던 땀들이 가을에 열매를 맺 듯이, 강희제와 옹정제

가 만들어둔 토대에 힘입어 건륭제는

(雍正帝)

화려하고 찬란한 시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자금성도 이 시기 가장 활발했으며 역동적이었습니다.

자금성의 화려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종표관

에 있는

(鐘表館)

시계들입니다. 2004년 9월 각국의 시계를 전시했던 고궁 종표관은 봉 선전

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여기에는 궁정시계가 약 200점 정

(奉先殿)

도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시계전시실”(Hall of Clocks)이라 하여 추가요금 을 내고 보아야 하는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는 속해있지 않

사진사진

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시계들이야 말로 중국 전성기의 찬란함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사진

수 있습니다. 건륭제 시기의 시계에 대해서 살피기에 앞서, 자금성에서 시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름에서 언급했듯이, 자금성에 서 양문물의 수용은 마테오 리치로부 터 시작되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교 선교사로서, 중국에 천주교 3. 자금성의 춘하추동 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당시 황제인 만력제

를 천주교 신자로 만드

(萬曆帝)

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 여러 공물을 바치는데, 만력제의 눈길을 끈 것이 시계였 습니다. 만력제는 자명종을

동도금사자인종. 높이가 231센티미터로 태엽을 감으면 시
동도금사자인종. 높이가 231센티미터로 태엽을 감으면 시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마테오 리치에게 주기적으로 입궐하 여 시계의 수리를 명합니다. 이렇게 서양인이 처음으로 출 입하게 된 계기가 된 시계는 건륭제가 가장 좋아하던 공물 이었습니다. 중국은 명나라 말기 때부터 시계 제조를 시 작하여 강희제 시기가 되면 시계 제조업은 크게 번성합니 다. 시계는 시간을 알리는 기 능을 넘어 음악이 나오는 스 스로 움직이는 신기한 기계장 치이면서 또한 호사스런 장식 품이기도 했습니다(KBS 2007b).

자금성에 남아있는 건륭

계 밑 바탕에 서양인이 팔방향화 구토래왕이라는 글을 쓰

기 시작합니다. 건륭황제가 아끼는 시계로 늘 곁에 두었습 제 때 만들어진 유화나 시계

니다. 서양에서는 시계를 바칠 때 건륭황제의 취미를 고려

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KBS 2007b).

들을 보면 자금성이 이 시기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계의 장식을 보면, 서양인 들을 동원하고 그 정교함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서양문물이 자금성에 많이 수용되던 청나라 초기, 강희제는 시계를 받아들이면서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원리 등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강희제는 서양으로부터 부국강병을 위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기를 원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건륭제 시기를 거치면서 시계 등의 서양 문물은 대부분 감상용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서양의 시계는 끊임없이 들어왔지만,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따라잡지는 못했습니다.

청나라 말기에도 전등과 전화 등은 끊임없이 자금성으로 들어왔습 니다. 그러나 중국황실은 이 시기에도 서양문물을 단지 향락의 도구로 만 생각합니다. 결국 각종 시계를 만들던 과학기술로 서양은 군함 등 을 만들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자금성은 서양에서의 공물을 전시한 박물관이자 동시에 감옥이 되고 맙니다(KBS 2007b). 이 시기 자 금성은 어느 시기보다도 화려한 물건들로 가득했지만, 추수 후 눈밭에 아무것도 심겨져 있지 않은 가을이었고 겨울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겨울, 마지막 황제 부의_ 양심전, 어화원

화려했던 자금성의 스산해지는 겨울의 주인은 마지막 황제, 부의일 것 입니다. 답사에서는 시간관계상 건청문에서 양심전

에 대한 이

(養心殿) 3. 자금성의 춘하추동 야기를 하고 실제 양심전을 방문하지는 못하였지만, 양심전과 어화원

은 부의가 자금성의 겨울을 보내던 곳이었습니다. 양심전은 (御和園)

1723년 이래 황제들의 사저로 사용되던 곳이었습니다(질베겡 2001, 17). 중국의 2000년 봉건군주제는 이 양심전에서 막을 내리고 맙니다. 1911 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융유황태후가 강압에 못 이겨 퇴 위선언을 했던 곳입니다.3

건청문을 지나 3궁 다음으로 나오는 내정의 맨 뒤쪽에는 어화원이라 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습니다. 어화원은 자금성에서 유일하게 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자금성에서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 기 힘들었습니다. 자객이 숨을 위험 때문에 자금성 내에는 나무가 없답 니다. 어화원은 영화 《마지막 황제》 속에서 부의가 놀았던 곳입니다.

자금성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성의 주인으로 있던 그에게 청소부로 서의 말년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자금성의 마지막 주인 이 그러하였듯, 자금성의 겨울도 매우 혹독하였습니다. 모진 겨울을 겪으며 자금성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유물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열강이 돌아가며 자금성의 유물을 빼돌렸고, 황조에 등을 돌린 환관들도 외부의 도적에 다르지 않았습니다. 말년에는 주인 이었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직접 자금성의 유물을 빼돌리고, 중일전쟁 과 국공내전 등 연이은 전쟁으로 자금성은 중국 황실의 권위와 함께 3 네이버 지식백과의 검색어 “푸이” 참조 (검색일 : 2013.12.30). 네이버 지식백 과의 출처는 두산백과임을 밝혀 둠. 처절하게 추락하고 짓밟혔던 것입니다. 자금성은 이 시기 중국의 겨울 을 함께 겪고 있었습니다.

자금성을 나가다_ 퇴수산, 신무문

어화원에는 퇴수산

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중국 태호지방에서

(堆秀山)

난 “태호석”으로 조성한 10미터 높이의 인공산입니다. 이 인공산을 보 면서 자금성 가장 북쪽에 있는 후문, 신무문

으로 나오면 운하

(神武門)

가 흐르고 있으며 그 맞은편으로 북해를 파낸 흙을 쌓아올려 만든 인 공산인 경산공원

이 보입니다. 부의의 자금성, 그 치욕스러움

(景山公園)

과는 대비되는 대국, 중국의 역량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필요에 따 라 산이면 산, 호수면 호수를 지어버리는 중국 특유의 추진력에 감탄 할 뿐입니다.

1925년 마지막 황제가 떠난 후, 이 거대한 궁궐의 용도는 박물관으 로 변경되었습니다. 수많은 황실 소장품들은 중국의 복잡한 근현대사 아래 뿔뿔이 흩어졌지만, 고궁박물원 직원들이 목숨을 걸고 운반하여 많은 유물들이 다시 자금성, 고궁박물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장개석 이 값나가는 물건들을 대만으로 가져갔지만 중국 대륙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 후, 중국 정부는 1만여 개 이상의 상자에 유물을 담아 상당수 를 다시 자금성 안으로 회수합니다. 이에는 국가뿐 아니라 나라의 유 물을 지키기 위하여 애쓴 민간 기증자들의 덕도 컸습니다(KBS 2007c). 3. 자금성의 춘하추동

더 이상 자금성에 황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금성의 주 인 자리를 황제가 아닌 과거 중화제국의 역사가 채웠기에 아직도 자 금성은 중국의 상징이자 중국인의 자긍심의 대상입니다. ■

사진

참고문헌 박한제·김형종·김병준·이근명·이준갑. 2007. 《아틀라스 중국사》.

서울 : 사계절.

이근명 편역. 2002. 《중국역사》. 서울 : 신서원.

이현국. 2008. 《중국시사문화사전 2008-2009》. 서울 : 인포차이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6709&cid=726&c

ategoryId=1510 (검색일 2013년 12월 30일)

질베겡. 김주경 역. 2001. 《자금성》. 서울 : 창해. KBS. 2007a. “자금성 1부 : 탄생 비화”. 《다큐멘터리 아시아의 창》. 8월

3일.

──. 2007b. “자금성 2부 : 궁에 부는 서쪽 바람”. 《다큐멘터리 아시아

의 창》. 8월 10일.

──. 2007c. “자금성 3부 : 유물의 이동”. 《다큐멘터리 아시아의 창》.

8월 17일.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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