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중앙SUNDAY 공동기획] ‘워싱턴 해군 군축체제’가 15년간 작동할 수 있었던 까닭
편집자 주
1·2차 세계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강대국들의 패권경쟁과 무력 선호,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 그리고 권위주의 부상, 국제기구 무력화…. 오늘을 읽는 키워드지만, 100년 전에도 유효한 키워드였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며 낯설어진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100년간의 평화’ 막바지였던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 시기와의 비교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은 “(양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짓눌렀던 개전(開戰)의 공포를 우리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투자계의 스티브 잡스로 물리는 레이 달리오는 “1945년 형성된 새 질서가 진화해 1929~1939년 당시와 유사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봤다. 미 국방부전략기획담당 특별보좌관 출신의 할 브랜즈도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1930년대와 훨씬 더 닮았다”고 했다. 과연 어느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 역사의 반복(repeat)인가, 비슷한 변주(rhyme)인가. 중앙SUNDAY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4일부터 공동기획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을 통해 이 논쟁을 다룬다. ‘100년간의 평화’와 전간기가 왜 비극적으로 귀결됐는지, 오늘날 그 경로를 차단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다. 12명의 전문가가 상호의존부터 패권 경쟁, 극단주의까지 12주제를 탐색한다. 고정애 기자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가 참가한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식.
해군 군축체제는 15년 가까이 유지되며 강대국의 함대 규모를 묶어놓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1차 대전은 유례없는 규모의 ‘총력전’으로 약 4년 만에 100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낳았다. 그 참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1920년대에는 다시는 그런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군비 축소의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나타났다. 1922년 미·영·일·프·이탈리아 5개국이 해군 전력을 제한하기로 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유럽 국가들이 국경의 현상유지를 약속한 1925년 로카르노 조약, 그리고 전쟁 자체를 불법으로 선언하며 60여 개국이 서명한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그 흐름의 대표적 사례였다. 1932년 2월 제네바에서 약 60개국 대표가 모여 개막한 세계 군축회의 역시 이러한 시대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워싱턴과 제네바의 운명은 갈렸다. 1921년 워싱턴 회의에서 출발해 1930년 런던 회의로 보강된 워싱턴 해군 군축체제는, 일본이 탈퇴를 통고한 1934년까지-법적으로는 만료된 1936년까지-15년 가까이 실제로 작동하며 강대국의 함대 규모를 묶어두었다. 반면 제네바 군축회의는 2년을 끌고도 단 하나의 조약조차 맺지 못한 채 1934년 빈손으로 막을 내렸다. 흔히 전간기 군축은 ‘실패의 역사’로 묶인다. 모든 조약이 결국 무너지고 2차 세계대전이 터졌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합의의 체결을 넘어 ‘지속과 이행’이라는 잣대로 보면 두 사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낳았을까.
독일 반발, 60개국 참여 제네바 군축 실패
1930년 중후반의 전간기 군축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해군 군축체제가 15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부상국(浮上國)의 지위 추구 전략, 국방비의 감축을 지지하는 자국 내 정치적 균형, 그리고 다른 전략적 이익의 연계가 맞물리는 등의 조건이 형성되어서다. 먼저 첫 번째 조건으로 부상국이 ‘군사력의 일부 억제를 통한 지위 추구’를 선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은 미·영 대비 주력전투함 60%라는 군사적으로는 불리한 비율을 받아들이면서도 서구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명적 지위를 얻고자 했고, 이후 워싱턴 군축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보조 전투함의 비율을 69%에 가까운 비율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지위 향상을 추구했다. 여기에는 19세기 후반 이후 사실상 유일한 비백인 강대국으로서의 언제든 소외될 수 있다는 존재론적 불안이 깔려 있다. 불만족스러운 조건이지만 수용하고 내실을 기한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그 군사적 절제를 떠받친 일본 국내의 정치적 균형이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겐세이카이·민세이토로 이어진 정당 내각이 비팽창주의 노선을 견지했고, 재정 긴축과 금본위제 복귀, 그리고 미국 자본시장에 대한 접근을 군축과 한 묶음으로 묶었다.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긴축과 디플레이션을 밀어붙인 재무상 이노우에 준노스케, 국제협조 노선을 지킨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가 그 축이었다. 가토 간지가 이끈 해군 내 강경파는 주력전투함 60%, 나아가 70% 비율조차 굴욕으로 여기며 반발했지만 기존 엘리트의 정치적 우위 앞에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군축을 지지하는 국내 연합이 살아 있는 한, 강경파의 불만은 1924년 미국의 일본인 이민금지법으로 인종적 모멸감을 촉발됐음에도 군축체제를 흔들지 못했다.
군축의 자국 내 정치적 기반은 부상국 일본에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하딩·쿨리지·후버 세 공화당 대통령은 해군 증강보다 국내 경제, 국가채무 상환, 감세를 우선시했다. 군의 규모와 예산, 조약의 비준을 결정한 것은 해군이 아니라 의회였고, 의회는 해군이 줄곧 요구한 순양함 증강에 냉담했으며 워싱턴 조약을 압도적 지지로 비준했다. 1924년 의회가 8척의 대형 순양함 건조를 승인했으나 1926년 말까지 실제로 예산이 집행된 것은 단 한 척이었다. 쿨리지는 “우리의 주된 문제는 국내 문제이며 재정 안정이 건전한 정부의 첫째 요건”이라며 ‘과감하지만 질서 있는 긴축’을 내세웠다. 루스벨트가 들어선 이후의 미국이나 영국은 일본이 수정주의(무력·외교 등으로 국제정치 질서를 바꾸려는 노선)로 돌아선 뒤에도 워싱턴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결국 다자 군축의 지속 여부는 어느 한 지도자의 선의나 일탈이 아니라, 그것을 떠받치는 국내 연합이 살아남느냐에 달려 있었다.
세 번째 조건은 군축과 다른 전략적 이익의 ‘연계’였다. 미국은 워싱턴 회의 기간인 1921년 미·영·일·프 4개국 조약을 체결해 영일동맹을 해체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미국이 보기에 영일동맹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모험주의를 부추기는 장치였다. 미국은 해군 군비제한과 태평양 정책을 “동일한 전체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묶고, 군축을 다루는 대규모 다자 포럼과 미·영·일 비밀 소그룹을 병렬로 운영하며 의제를 통제했다. 미국의 입장은 영일동맹을 폐기하지 않으면 어떤 해군조약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역시 불리한 주력함 비율을 받아들이는 대신, 하와이·알래스카·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미국령 태평양 도서의 요새화 동결이라는 반대급부를 얻어냈다.
이렇듯 부상국의 지위 관념, 군축의 국내정치적 기반, 그리고 다른 전략적 이익과의 연계, 이 세 조건이 맞물렸을 때 5개국 체제는 사실상 미·영·일 세 핵심국의 균형 위에서 잠시나마 기능할 수 있었다.
제네바 군축회의의 실패는 이 조건들의 부재로 설명된다. 워싱턴 군축체제에서 일본이 절제를 통한 지위 추구를 선택한 부상국이었다면, 1933년 들어선 나치 독일은 처음부터 군사력 증강을 통한 지위 추구를 선택했다. 나치는 집권 전인 1932년에도 제네바 군축회의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프랑스의 국내 정치적 지지도 군축보다 자국의 안전보장을 향해 있었다. 프랑스는 “안보 없이 군축 없다”를 고수하며 미국의 유럽 방위 공약을 요구했으나, 미 상원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었다. 프랑스는 안전보장 없이 군축할 수 없었고 독일은 자국의 군사력을 제한하는 기존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북극항로·기후변화 등 새로운 교환의 지점
다른 전략적 이익의 ‘연계’ 또한 부재했다. 육·해·공군 전체의 감축을 동시에 다룬 제네바에서 60여 개국이 전략적 이익을 교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차·항공기·화학무기가 공격용인지 방어용인지 합의할 수 없었고, 각국은 자국에 유리한 분류를 들고 나왔다. 측정 가능한 단일 군종(주력함 톤수와 주포 구경)에 집중하고 참여국이 다섯으로 제한되었던 워싱턴 군축체제와 달리, 제네바에는 합의의 기준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독일의 수정주의 위협을 직시하지 못한 영국의 정치적 둔감성이 더해지면서 워싱턴 체제에서 미·영·일 사이에서 이뤄진 전략적 균형은 영·독·프 사이에서는 형성될 수 없었다.
전간기의 군축 사례가 21세기에 던지는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첫 번째 부상국의 전략과 관련, 오늘날의 중국은 전간기의 일본·독일과는 다른 수정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 질서 일체를 부정하진 않고 선택적 비판과 부분적 수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미국·중국·러시아를 모두 고려할 때, 두 번째 조건인 자국 내 정치적 기반 역시 군축을 떠받치는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서가 군사력 사용에 대한 신중한 선택과 집중을 암시하기는 했으나, 미·이란 전쟁과 예정된 국방비 증액에서 보듯 실제 정책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다만 세 번째 조건인 다른 전략적 이익과의 연계는 중장기적 변수로 남아 있다. 북극항로의 개방, 기후변화, 그리고 인공지능이 군사·경제·산업·기술력에 미치는 영향은 강대국들이 상호 억제로부터 이익을 얻을 새로운 교환의 지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전간기가 던지는 함의는 군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군축에는 그것을 떠받치는 정치적 하부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군축체제의 전망은 어둡지만 글로벌 위기가 중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그 하부구조의 정렬이 다시 형성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한국 또한 그 조건을 만드는 쪽에 설 것인지, 그 부재의 비용을 치르는 쪽에 설 것인지를 신중히 선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일동맹=러시아의 아시아 팽창을 막기 위해 1902년 영·일이 체결한 군사동맹. 일본은 이 조약을 발판 삼아, 러일전쟁 승리와 조선 식민지화를 달성했다. 제1차 대전 후 일본의 부상을 경계한 미국의 압박으로 1921년 워싱턴 회의 중 체결된 4개국 조약이 비준되며 대체됐다.
·워싱턴 회의=1921년 11월 미국 주도로 열린 해군 군축 및 태평양·극동 문제 협의체, 주력함 총톤수를 미·영·일·프·이탈리아=5 : 5 : 3 : 1.67 : 1.67로 제한하는 5개국 조약이 체결됐다. 식민지 현상 유지와 중국 주권 존중을 명시해 약 15년간 동아시아 질서의 뼈대를 형성했다.
·제네바 회의=1932년 국제연맹 주도로 육·해·공군 전체의 군축을 시도한 대규모 회의. 프랑스의 안보 우선주의와 집권 직후의 나치 독일의 군비 평등권 요구가 정면충돌했고, 이듬해 나치 독일이 이 회의와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종말을 맞았다.
오인환 동아시아연구원(EAI) 수석연구원. EAI 수석연구원 및 사무국장이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보스턴컬리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윌리엄앤메리대 비전임 조교수를 지냈다. 국제안보, 외교정책, 미·중 관계를 주로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