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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기 EAI Academy] ⑥ 중동 평화, 그 험난한 여정

분류
멀티미디어
발행일
2025년 8월 21일
관련 프로젝트
EAI 아카데미

편집자 주

김강석 한국외대 교수는 ‘중동 평화, 그 험난한 여정’을 주제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역사와 평화 협상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김 교수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어진 전쟁과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좌절되어 온 배경을 짚으며, 팔레스타인 문제가 방치된 채 진행된 관계 정상화의 한계를 강조합니다. 아울러 최근 가자 전쟁으로 드러난 현실을 통해, 중동 평화가 단순한 지역 현안을 넘어 국제질서와 직결된 과제임을 환기합니다.

[9기 아카데미] 7강_ 김강석 0821.png
[9기 아카데미] 7강_ 김강석 0821.png

YouTube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VWFtuwtLP88

영상 스크립트

중동 평화: 험난한 여정의 서막

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외대 아랍어과 연구원입니다. 오늘 중동에 대해 다루게 되었는데, 여러분이 그동안 했던 주제와는 조금 다른 내용일 것 같습니다. 지역적으로 중동에 대해 여러분이 얼마나 사전 공부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흔히 말하는 중동 지역은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그래서 오늘 짧은 시간 동안 '중동 평화: 험난한 여정'이라는 제목으로 중동 지역의 여러 갈등 요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요즘 언론에 많이 나오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을 중심으로, 아랍-이스라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중동 평화 노력들이 있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외교사 발전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중동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랍-이스라엘 분쟁뿐만 아니라 아랍 국가와 비아랍 국가 간의 갈등도 존재합니다. 지도에서 녹색으로 표시된 국가들은 아랍 국가들이며, 터키, 이란 등은 비아랍 국가에 해당합니다.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갈등도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랍과 이란 간의 갈등,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문제, 그리고 아랍 국가들 간의 갈등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다층적인 갈등 요인들 중에서 오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이스라엘과 다른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언론에 자주 등장하며, 특히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가자 지구에 대한 관심이 많으실 텐데요.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는 현재 팔레스타인의 영토로 되어 있습니다. 유엔에서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이 있어 왔습니다. '중동 평화: 험난한 여정'이라는 제목처럼, 다양한 중요한 동기점들이 있었지만 오늘 제시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냉전 시대 중동 지역에서는 네 차례의 큰 전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전쟁으로, 1948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졌습니다.

1978년에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 협정을 맺는 역사적인 평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냉전이 종식된 1990년 이후 1991년에는 마드리드 평화 회담이 열렸습니다. 이는 냉전 시기 중동 평화 역상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비록 결렬되었지만, 마드리드 평화 회담에 이어 1990년대에는 오슬로 평화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오슬로 평화 과정은 노벨상을 수상하며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평화가 오는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이 드디어 이루어지는가 하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등에서, 특히 2000년 제2차 인티파다 발생 이후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총리의 알 아크사 모스크 방문 등으로 인해 결국 오슬로 평화 과정은 여러 굴곡 끝에 실패하게 됩니다. 와이 리버 협정 등 중재 노력도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000년 이후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했고, 2005년에는 가자 지구에서도 철수했습니다.

이 또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2005년 8월 15일,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첫 번째 철수를 단행했습니다. 이는 20년 전 결정으로, 현재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대한 재점령 등 군사 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도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아나폴리스 회담이 열려, 두 국가 해법을 통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이 다시 한번 집중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두 실패한 후,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인해 아랍 지역에 큰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보다는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에 더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중요했지만, 난제로 남아 외교적 노력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2020년 아브라함 협정이 체결되었고, 2023년 10월 7일, 소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건국 배경과 시온주의 운동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을 간단히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국가를 잃고 디아스포라로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토인 이스라엘 땅, 에레츠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하며, 그곳에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온주의 이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온주의 이념은 19세기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겪었던 박해, 예를 들어 드레퓌스 사건 등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온주의 사상은 점차 확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온주의 운동을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테오도르 헤르츨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 국가'라는 책을 저술하며, 유대인의 해방은 유대 국가 건설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헤르츨은 이후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됩니다.

1897년 제1차 시온주의 대회가 스위스 바젤에서 열렸습니다. 테오도르 헤르츨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여러 시온주의 운동의 동력이 통합되어 체계화된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노력을 통해 이스라엘 국가 건설로 한 걸음 나아갔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8년 영국은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이 지역을 위임 통치하면서 유대인들의 이주를 상당히 장려했습니다. 영국 위임 통치하에서 유대인 인구가 크게 증가했으며, 당시 시온주의 지도자였던 하임 바이츠만은 유대인 민족 국가 건설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됩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1918년 약 8%에서 1945년 약 31%까지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향후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밸푸어 선언은 영국의 외무장관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이는 영국의 지정학적 강대국이 시온주의 운동의 후원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영국 외무장관의 이러한 선언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위임 통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인구가 크게 늘어났으며, 이는 정치적 긴장을 야기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새로 이주한 유대인들과 기존에 거주하던 아랍인들 간의 충돌이 발생하며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파견했고, 위원회는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지역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국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 땅을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유엔에 이 문제를 넘겼습니다. 유엔은 필 위원회 보고서 등을 참조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과 유대 국가로 분리하는 유엔 결의안 181호를 채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으로 민감한 지역이므로 국제적인 특별 관리를 받도록 권고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엔 결의안을 찬성했지만, 아랍 국가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새로운 국가가 생성된다는 개념 자체를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을 승인하면서 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다음 날인 1948년 5월 15일,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전쟁은 1949년 3월 휴전 협정 체결로 끝났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연합군을 격퇴하고 승리했으며, 영토가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휴전 협정에 따라 이집트와 요르단이 일부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통치하게 되었고, 요르단은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구를 병합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큰 논란이 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제1차 중동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이때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다른 나라로 흩어졌습니다. 요르단 등지에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주했으며, 난민 문제가 발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표에서 보셨듯이 두 차례의 전쟁이 더 일어나게 됩니다. 제2차 중동 전쟁은 1956년에 발발했습니다.

제2차 중동 전쟁과 수에즈 위기

제2차 중동 전쟁의 원인은 1952년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아랍 세계의 맹주였으며, 냉전 시대에 미국은 중동 지역 국가들을 자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습니다. 특히 이집트를 친미 국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나세르는 당시 영국이 오랫동안 이집트를 식민 통치해왔던 것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 지도자였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냉전 시대에도 미국과 유럽은 그들에게 하나의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세르는 미국과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1955년 만둥의 일을 거치면서 이동맹을 따른다든지 어느 정도 미국의 여러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원하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지 않게 됩니다. 원래 미국은 20억 달러를 지원하려고 아스완이라든지 이런 데 건설 자금을 빌려주는 등 여러 당근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세르가 미국이 원하는 방향을 맞이하지 않자 강한 압박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화가 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당시 지정학적 요충지로 보유할 것입니다.

결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세 나라가 침공하게 된 것이 제2차 중동전쟁입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게 수에즈 운하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2개월 정도 전쟁이 진행되다가 끝나게 됩니다. 이 전쟁의 의미는 중동 지역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매우 컸는데, 냉전이 시작되고 나서 이 전쟁으로 결국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전쟁에 개입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발을 빼야 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모두 이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쇠퇴하고 미소 양극 체제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된 것이 이 전쟁의 또 다른 의미였습니다. 전후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졌습니다. 제1차 중동전쟁에서는 아랍 연합국들이 패배했지만, 제2차 전쟁에서는 이집트라는 한 국가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라는 세 강대국을 상대로 군사적으로는 완전히 승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이겼다고 할 수 있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족주의 표방 세력의 인기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2차 전쟁 이후 홍해에서의 문제, 수에즈 문제 등이 더욱 축적된 결과입니다.

6일 전쟁과 점령지 문제의 부상

이러한 문제 속에서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선제공격하면서 6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집트가 아랍 연맹의 맹주였기 때문입니다. 6일 전쟁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6일 만에 끝난 전쟁으로, 전략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우세했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결의안은 이스라엘이 점령지를 철수하고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지만, 그 문구 자체에 대해 여러 논란이 존재합니다.

각 이해관계에 따라 결의안 해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 시나이반도, 가자지구,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게 되면서 국제 사회는 점령지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이 큰 논란이 되기 시작한 전쟁이 된 것입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서 아랍 연맹 정상회의가 열렸습니다. 아랍 연맹은 아랍 국가들의 연합체입니다.

제4차 중동 전쟁과 미국의 중재 노력

정상회의에서 '3불(No)' 원칙이 발표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평화하지 않고, 협상하지 않으며,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하르툼 결의'라고 합니다. 6일 전쟁의 결과로 이러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이집트와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이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6일 전쟁과는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나세르가 1970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후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당시 국제사회는 사다트가 이집트를 오랫동안 통치할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나세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승계했기 때문에 임시 지도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다트는 매우 오랫동안 통치했습니다. 이는 정치적 위신을 강화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싶었던 의도일 수 있습니다. 전쟁 발발에는 다른 변수도 많았지만, 개인적인 변수 외에도 지정학적 변수가 작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사적으로 볼 때 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방어 준비에 깊이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름 군사적으로 자신감이 있었고, 수에즈 운하 방어를 위한 바레브 라인 등 참호가 많았습니다. 일정 시간만 버티면 반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느슨한 경계를 섰지만, 아랍 국가들의 공격이 상당히 거셌습니다. 아랍 진영은 24개국이었고, 지금도 제4차 중동전쟁을 승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후에 암살당하는데, 그 암살 행사는 제4차 중동전쟁 승전 기념일이었습니다. 즉, 이겼다는 승전 기념 행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당연히 패배한 것이고, 이 전쟁은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전쟁입니다. 오늘 주제는 전쟁 자체만이 아니라 중동 평화 협상의 여정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수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 국제 사회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은 미소 간의 대립이 있었던 만큼, 자칫 중동 갈등이 미소 관계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었습니다. 중동은 세계 화약고라고 불리며, 중동의 갈등은 국제 사회, 특히 미국과 같은 강대국 정책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재가 필요했습니다. 제4차 분쟁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중동 분쟁 중재 강화의 중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당시 키신저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키신저는 1970년대 미국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겸했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셔틀 외교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셔틀 외교는 제4차 전쟁 이후 중동 분쟁 해결을 위해 키신저가 스코크라든지 부하들을 동원하여 중동 도시들을 왕래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키신저는 다마스쿠스, 텔아비브, 카이로 등 중동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중재 노력을 '셔틀 외교'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중동에서 외교 협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키신저는 현지 방문을 통해 '철수 협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 철수 협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의미는 미국의 중재 협상이 제4차 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는데, 팔레스타인 문제보다 아랍-이스라엘 문제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방치

이집트와 이스라엘,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아까 말한 팔레스타인 국가와는 다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시나이반도나 가자지구 같은 지역에 대한 문제는 해결이 지연되었습니다. 미국이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뒤로 미뤘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정확한 답은 없지만, 아랍-이스라엘 간의 평화에 더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등장합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 협정입니다.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이루어졌지만, 이 역시 팔레스타인 문제의 직접적인 해결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 협정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미국에게는 전략적으로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중동의 맹주였고, 냉전 시대에 소련과 가까웠습니다. 단순한 평화 협정 이상의 의미로, 당시 카터 정부나 키신저 등은 이집트를 자유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동 세력 균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전략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보다 이집트-이스라엘 관계 해결에 집중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쉬웠을 수 있습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성공했습니다. 1977년 메나헴 베긴 총리가 이끄는 우파 정권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 협상에 나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고대 유대 영토에 대한 집착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는 것이 주요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보유할 정당성은 부족했습니다. 오히려 우파 정권은 요르단강 서안과 사마리아 땅, 즉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집트 경제는 좋지 않았습니다. 시나이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고 에너지 자원 측면에서도 중요했습니다. 또한, 미국이 협정의 대가로 많은 경제 원조를 제공했습니다. 이집트는 경제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원이 중요했습니다.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관계 정상화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방치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팔레스타인 문제보다 아랍-이스라엘 갈등에 더 집중한다고 말했듯이, 5년의 유예 기간 내에 수립하고 이 문제를 협의한다는 모호한 처리로 끝났습니다. 이 모호함 때문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비판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집트가 아랍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3불 원칙'을 어긴 것입니다. 1967년 아랍 연맹 정상회의에서 결의된 이스라엘과 평화하지 않고, 협상하지 않으며, 인정하지 않겠다는 규범을 어긴 것입니다. 이에 따라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를 강력하게 비난했고, 이집트는 고립되어 아랍 연맹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본부가 이전되는 등 상당한 고립을 겪었지만, 나중에 무바라크 정권 때 다시 복귀하게 됩니다. 당시 분위기는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1981년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한 계기에는 여러 다른 원인도 있었지만, 1979년 이란 혁명 등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탈냉전 시대의 오슬로 평화 협정

PPT에 나와 있는 'Cold Peace'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Cold Peace'라고 부르는 이유는, 최근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이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이를 동맹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Cold Peace'는 평화 관계 정상화를 했지만, 협력의 깊이에 있어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오슬로 협상으로 넘어가 봅시다. 냉전 시대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탈냉전 시기에 오슬로 평화 협정이 있었습니다. 오슬로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이 주도했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클린턴, 라빈, 아라파트이며, 아래에는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도 보입니다. 이들은 모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오슬로 평화 과정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나 냉전 시대의 협상과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오슬로 평화 협상의 대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가 만나 평화 협정을 맺은 것입니다. 냉전이 끝난 후 미국은 그동안 많이 개입하지 못했던 중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어느 나라도 미국의 이러한 동력에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실제로 1991년 마드리드 평화 협정이 시작되었는데, 마드리드 회담에는 소련 대표도 참가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자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꺼렸지만, 마드리드 평화 회담은 다자 회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대표와 여러 아랍 국가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한 형태였습니다. 미국이 상당한 추진력을 발휘하면서 오슬로 평화 협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마드리드 회담은 다자 회담이었고, 이스라엘 대표와 여러 아랍 국가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한 형태였습니다. 미국이 상당한 추진력을 발휘하면서 오슬로 평화 협정으로 이어졌습니다.

1차 걸프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사실상 재정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1차 걸프 전쟁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되어 미국의 개입을 불렀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라파트는 이라크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걸프 국가들은 대부분 쿠웨이트 편이었지만, PLO 자금의 상당 부분이 걸프 국가들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아라파트가 이라크 편을 들자 걸프 국가들은 PLO에 대한 지원을 크게 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평화 협상에 나올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제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서 국제 사회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슬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오슬로 평화 협정의 영향으로 지역을 A, B, C 구역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A 구역은 팔레스타인이 민사와 치안을 모두 통제하고, B 구역은 팔레스타인이 민사 통제권을 가지지만 치안 및 군사적 부분은 이스라엘이 통제합니다. C 구역은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지역입니다. 오슬로 평화 협정의 기본 취지는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통해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슬로 평화 협정은 특히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단번에 국가를 건설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진행하기로 했으며, 1단계로 5년간 자치권을 부여하고 점차 확대하여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PLO와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대표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슬로 평화 협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강경 세력으로부터 반발을 샀습니다. 이로 인해 라빈 총리가 암살되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오슬로 평화 협정 절정기인 1993년부터 1996년 사이에는 이스라엘인들의 테러 사망자 수가 급증했습니다. 이는 하마스와 같은 무장 단체의 활동 증가와 관련이 있으며, 제1차 인티파다 무렵에 하마스가 결성되었습니다. 오슬로 평화 협정의 의의는 분쟁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직접 만나 두 국가 해법에 합의했다는 점입니다. 냉전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명확한 대표성 부재로 인해 주로 제3국(예: 이집트, 요르단)을 통해 논의되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누가 지도자가 될지에 대한 명확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오슬로 평화 협정을 통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대표로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는 '피스 위드아웃 PLO(Peace without PLO)'를 주장하며 PLO를 배제하려 했습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대표성이 달라졌습니다. 오슬로 평화 과정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전략적으로 이용되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당사자 간의 대립은 여전했고, 단계적 접근, 최종 지위 협상, 독립 선언, 정착촌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모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라빈 총리 암살 이후 1996년 베냐민 네타냐후가 집권하면서 오슬로 평화 협정은 동력을 잃었습니다.

이후 정권 교체가 반복되고, 최종 지위 협상 쟁점들이 너무 복잡하여 협상이 난항을 겪었습니다. 또한 하마스와 같은 팔레스타인 내부의 강경 세력은 두 국가 해법이 어렵다는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결국 오슬로 평화 협정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가자 지구 철수와 하마스의 부상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 철수했습니다. 2000년 아리엘 샤론 총리는 우파 성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자 지구 철수를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착촌이 철거되었는데, 이는 현재 가자 지구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됩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베냐민 네타냐후는 샤론의 가자 지구 철수에 반발하며 사임했습니다. 네타냐후는 현재까지도 가자 지구 문제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철군 경험은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2000년 레바논과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한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자 지구 철수 이후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통치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하마스가 다수를 차지했으나 국제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마스와 파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현재 가자 지구는 하마스가, 서안 지구는 파타가 통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중동 안보 환경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이란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터키도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이란과 가까운 헤즈볼라와 같은 저항 세력들이 팽창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2006년 레바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에 대한 대비를 강화했다고 분석합니다.

아나폴리스 협상 결렬과 트럼프 행정부의 중동 정책

2008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 등 여러 갈등이 있었습니다. 2007-2008년 아나폴리스 협상에서는 이스라엘이 최대한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에후드 올메르트였고, 팔레스타인 측은 마무드 아바스였습니다. 예루살렘과 같은 민감한 지역에 대한 공동 관리 방안까지 논의되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이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섰고, 오바마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킨다고 보고 두 국가 해법을 재추진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다소 경색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핵협상(JCPOA) 추진은 이스라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는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에 반대했으며, 퇴임 직전 유엔 안보리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규탄하는 결의안 통과를 지지했습니다.

아나폴리스 협상 결렬 이후 아이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세기의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팔레스타인에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되, 안보 측면에서는 국가를 수립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 협정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우선순위 하락

트럼프 행정부의 '세기의 거래'는 팔레스타인에 산업 지구 등을 조성하여 경제 활동을 지원하는 대신, 군사적 주권은 인정하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기존 이스라엘 정착촌은 그대로 유지하는 구조였습니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는 아브라함 협정을 주도하며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결정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했을 때, 예상과 달리 아랍 국가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시리아 내전, IS 문제 등 중동 지역의 다른 복잡한 문제들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부차적인 사안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브라함 협정이 더욱 추진력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과 UAE, 바레인, 수단 등이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국제 사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발발과 현황

가자 지구에서의 사건은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했습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많은 이스라엘인이 사망하고 250여 명이 인질로 잡혔습니다(현재 약 20명 생존 추정). 이스라엘 남부 마을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사망자도 급증했으며,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자 지구 전쟁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당시 키부츠 마을들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오전 6시 29분, 공격받은 그 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안보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자 지구 전쟁은 현재 진행 중이며,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공격으로 많은 인명 피해와 인질 피해를 겪었으며, 팔레스타인 역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갈등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29분에. 인상 깊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세계를 멈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이스라엘이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마치 9·11 테러와 같았습니다. 미국에서 봤을 때도 옆에 있는 손잡이는 무엇이냐면, 이스라엘의 방공호에 보면 대피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피를 하죠. 그 대피소는 주로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안에서 손잡이를 잠그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즉, 밖에서 열면 다 열린다는 것입니다. 대피소 자체가. 왜냐하면 주변에 피해를 입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 빨리 대피할 수 있도록 밖에서 문을 열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마스 대원들이 밖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손잡이는, 그것을 안에서 잠그려고 하는 사람들의, 열려고 하는 사람들의 상징적인 의미를 전시했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이스라엘도 전경 지대에 하마스나 헤즈볼라 같은 세력들이 있는 것에 대해 전쟁 이후 안보 정책이 많이 바뀌게 되었죠.

전쟁의 배경과 역사적 과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하마스 입장에서는 오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 2005년 가자 지구 철수 이후 가자 지구의 삶이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양측 모두에게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며, 여러분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배경에는 지금까지 말했던 역사적 부분이 누적되어 있겠지만, 아브라함 협정 당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면서 특히 언론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것은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까지 되면 더 이상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겠구나 하는 반대 급부도 있었고요. 우파 이스라엘 정권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번 하마스 전쟁의 작전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작전명은 '알아크사 홍수'였습니다. 알아크사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알아크사 사원, 즉 무슬림들의 상징인 알아크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지칭합니다. 예루살렘 문제는 이스라엘 우파 정권의 강경한 정책으로 인해 아랍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마스가 '알아크사 홍수'라는 작전명으로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마스 내부에서도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단순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마스와 이란의 대리전 양상도 있었습니다. 6월에 이란과 이스라엘 전쟁이 있었죠. 중동 전체가 대리전의 관점에서 이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이스마엘 하니예 등 관련 인물들이 언급되었고, 최초의 전면전이 있었습니다.

트럼프가 이란 핵 시설을 공습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벙커버스터 작전이었습니다. 이란이 카타르 미군 기지를 타격하면서 상황이 종료되었는데, 서로 간에 최초 전면전 때 트럼프의 변수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규모 공습은 불가능한 의거적인 모습이었고, 이란의 억지력이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특히 헤즈볼라가 많이 무력화되었습니다. 전방위 방어는 전통적으로 이란의 방어를 위해 주변 국가들을 활용해 왔는데, 이러한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마지막 슬라이드입니다. 질문과 답변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역사 속에서 제가 던지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중동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시간이 없을 것이고 생소한 지역일 수 있지만, 중동에 많은 갈등과 분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아랍-이스라엘 분쟁입니다. 현재 가자 전쟁 등을 통해 관심을 받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이란 전쟁도 가자

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와 엮여 있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역사를 통해 많은 평화 협정을 위한 노력들이 존재해 왔고, 두 국가 해법 등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경험, 트라우마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모두 여전히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역사를 반추하며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소개해 드렸습니다. 세 가지를 듣는 것은 아랍-이스라엘 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평화 없는 아랍-이스라엘 평화는 가능할까?

아브라함 협정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랍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하여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런 접근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평화 협상이 좌절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6번의 가자 전쟁에 대해 2005년 철수 이후에도 여러 이야기를 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전수는 제가 답하기보다는 문제를 던지고 여러분들이 외교사적으로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강석 한국외대 아랍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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