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

『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 북벌에서 북학으로 자금성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2년 8월 22일
sarangbang_18_ch2_cover.png
sarangbang_18_ch2_cover.png

김유나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17세기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등장은 단순히 왕조가 교체된

사건이 아니라 천하질서의 ‘중국’이 ‘이적’에 의해 멸망한

사건이었다. 이는 화이( 華 夷 ) 관념을 지닌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는 중화적 세계질서의 붕괴를 의미했다. 당시

조선은 청조에 굴복하여 청조 중심의 조공책봉질서에

순응해야만 했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대명의리를 강조하고

청조를 이적으로 여기면서 북벌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청조가 전성기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자 조선

사회에서는 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때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이 등장하게 됐다. 하나는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조선중화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북학론’이다. 18세기 초 김창업(

金 昌 業 , 1658 –1722)이 청조를 방문하여 남긴 『 노가재연행일기 』

에서는 ‘조선중화주의’와 ‘북학론’이 교차하며 공존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노가재연행일기 』 는 김창업이 제4대 황제 강희제(재위 1661-

1722)가 통치하던 1712년 동지사겸사은사행( 冬 至 使 兼 謝 恩 使 行 )의

정사인 김창집(1648-1722)의 자제군관( 子 弟 軍 官 )으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남긴 사행 일기다. 자제군관이란 사행단의

유력자의 친인척으로 자비를 들여 사행에 참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 노가재연행일기 』 의 「 왕래총록 」 에 따르면 김창업의 형

김창집이 1712년 6월 23일 동지사겸사은사로 임명되었는데

중병을 앓은 직후라 수행원이 필요하였고, 김창업의 둘째 형

김창협(1651-1708)이 사행단에 들어가려다 그만두어 김창업이

자제군관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당시 김창업의 나이는

56세였으며, 늘 중국 산천을 보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기던

김창업은 형의 수발을 든다는 명목을 빌어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4대 연행록 저자 중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

3명이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가하였다. 특히 김창업과

박지원은 어떠한 공식적 임무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을 남기고 있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기행의

작성이 가능했다(이호윤 2018, 220).

청대(1644-1911)는 현대 중국의 영토와 민족 구성이 갖추어진

시기로, 중국에서도 중국인 스스로의 역사적 위상을 근현대라는

시간적 연속에서 규명하기보다는 주변 제 민족을 포함해 가는

청대에서 찾고 있다 (정혜중 2015, 377). 중국 역사에서 청조는

통일다민족국가의 성격을 완성한 왕조로 평가된다. 청조가

만주족을 단순히 여진족의 후손으로 보지 않고

만주족·몽골족·한족을 아우른 ‘만족공동체’로 보았다는 데서 현재

‘중화민족’의 개념을 정의한 논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장근 2009. 47-49). 이렇듯 청대에 관한 연구는 중국인 스스로

중국의 역사적 위상을 어떻게 인식해갔는지 그리고 주변국은

중국의 형성 과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는지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18세기 초 조선 사회에서 청조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기고 그러한 변화의 축적으로 북학파가 등장하게 되었지만

청대와 관련한 연구는 북학파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18세기 말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 노가재연행일기 』 는

홍대용(1731-1783)의 『담헌연기』․『연행잡기』 (1765년), 박지원(1737-

1805)의 『 열하일기 』 (1780년), 김경선(1788-1853)의 『 연원직지 』

(1832년)와 함께 조선 후기 4대 연행록으로 불린다. 그중에서도

김창업의 『 노가재연행일기 』 는 그 내용과 묘사가 상세하여

연행록의 교과서로 불릴 뿐 아니라 가장 이른 시기인 18세기

초에 기록되어 후기 연행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가는 인식의 전환 과정이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18세기 조선과 청조의 관계,

청조에 대한 조선의 인식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인 만큼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요구된다.

『 노가재연행일기 』 에 대한 선행연구는 크게 김창업의

대청인식에 관한 연구, 청조의 문화에 관한 연구, 문학적

특징에 관한 연구 등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김창업의

대청인식에 관한 연구로는 김창업의 ‘조선중화주의’를 다룬

연구가 많았으며, 이러한 연구는 대체로 김창업이 조선의

의관과 문물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청조에 대한 우월의식을

지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 노가재연행일기 』 에는 김창업이

청조의 예악문물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김상조(2005)는 김창업의 『 노가재연행일기 』 의 의의는 무조건

청을 배척하는 비합리적 경직성에서 벗어나 융성기를 맞이한

청의 문물제도를 폭넓게 관찰하고 그 의의를 인정했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했다. 비록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게 이롭다면

이적의 것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적극적 수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김창업의 합리적, 이성적 태도가 후대

실학파 계열의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김상조

2005, 251). 이호윤(2018)은 김창업이 청조의 예악문물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한 것은 ‘북학론’의 등장을 예고하는 ‘북학론’의 맹아적

형태라고 표현했다(이호윤 2018, 218-219). 본 고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조선중화주의’와 ‘북학’의

사이를 미묘하게 오고 가는 김창업의 복합적인 심상을

‘화이관’과 ‘청조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양면적 사고의

공존으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정세 파악

노력’이라는 기준을 더한 삼중 틀로 짚어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본 고에서는 김창업 개인의 삶과 18세기 초 조선과 청조의

시대적 상황을 고찰한 뒤, 『 노가재연행일기 』 에서 드러나는

‘화이관’, ‘청조에 대한 재인식’, ‘동아시아 정세 파악 노력’ 등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북벌론이 대두되던 시기의 조선 지식인

김창업의 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기존의 연구에서 등한시되었던 18세기 초반 조선 지식인의

대청인식을 조명해보고, 그 사고가 단순히 북벌이나 대명의리론,

조선중화주의에만 매몰되어있던 것이 아니라 18세기 말

북학론으로 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밝혀내고자

한다. 더하여 당대 지식인이 오랑캐와 해적을 우려하여 나라

밖에서 적극적으로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정세를 냉정하고 분명하게 인식하고자 했음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벼슬을 멀리하는 안분지족의 삶

김창업의 자는 대유( 大 有 ), 호는 가재( 稼 齋 ) 또는 노가재, 본관은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안동( 安 東 )이며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 척화론자이며 중국 심양( 瀋

陽 )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김상헌의 증손으로 안동 김씨

가운데서도 명문의 일원이었다(이장우 1976, 7).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사에 능했으며 유명한 문장가이자 화가였다.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당대의 사대부들이 모두 왕을 보필할

재목이라 여겼으나, 가세가 너무 번창함을 경계한 부친 영의정

김수항의 훈계를 따라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친 김수항은

김창업이 진사시에 합격하기 전인 1675년(숙종1) 왕에 상소를

올렸다가 죄를 얻어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678년 (숙종4)에

김수항이 철원으로 이배되자 김창업은 그곳에서 부친을 모셨다.

이러한 경험이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혹은 큰형 김창집과 둘째 형 김창협이 벼슬에

오른 상태여서 자신까지 출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구본현 2008, 150-151). 김창업은 부귀공명을 멀리하여 동장( 東

庄 )인 송계(중랑천 월계동 일대)에 물러나 밭을 다스리며 일생을

마치고자 하여 스스로를 심을 가에 재계할 재를 써 가재라고

불렀다.

김창업은 지금의 석관동인 돌곶이에 동장을 마련하여 살았다.

조선 후기에는 본가 외에 화려한 별장을 짓는 풍속이

만연하였다. 그러나 김창업의 동장은 휴식을 위한 별장이

아니었다. 김창업은 아예 과거를 포기하고 식솔들과 가묘까지

모두 석관동으로 옮겨 살면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석관동은 명승지가 아니어서 김창업 이전에는 유명한 문인의

자취가 없었다. 김창업은 여가를 즐기거나 학문을 수양할

목적으로 그곳에 살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고자 했다. 북쪽으로 한양과 양주의 경계에는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이 있어 산세가 험하고 농사지을 땅이 많지 않아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서쪽이나 남쪽에 비해 외진

곳이었다. 김창업의 동장에도 연못과 정자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풍류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집의

건물들 대부분의 이름을 농사에 관한 것으로 붙인 데서 알 수

있다. 김창업은 직접 호미, 낫, 가래로 농사를 지었으며 집

주변의 꽃, 나무, 바위와 손수 기른 채소에 대해서도 시를

지으며 애정을 표했다(구본현 2011, 9-10).

『노가재연행일기』에 대한 평가

김창업의 『 노가재연행일기 』 는 일찍이 조선후기 학자들과 외국인

선교사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 연원직지 』 를 쓴

김경선(1788-1853)은 조선 후기 연행록을 평가하며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 세 사람의 글이 가장 저명하다고 기록했다.

김창업의 죽마고우였던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 조정만(1656-

1739)은 김창업의 『 노가재연행일기 』 를 읽고 이를 칭송하는 시를

썼다.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형제가 번갈아 시 지으며 북경에 가더니

만 리에서 온통 돌아옴을 잊었네.

붓을 잡아 이미 연행일록을 지었고

채찍 돌려 다시금 천산을 보러 갔지.

이적의 풍속을 자세히 빠뜨리지 않았고

이정(里程)과 요충지를 갖추어 덜지 않았네.

앞사람의 글에서 취하여 보더라도

내 벗처럼 빛나게 기록한 이 어찌 있으랴?

- 조정만, <연행일록>

조정만은 『 노가재연행일기 』 가 풍속과 이정, 요충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어 연행일기 중에서 백미라고 칭송했다(김남기 2002,

157). 1888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에서 활동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은 조선의 고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영어로 번역했다. 게일은

자신이 편집자로 있던 The Korea Magazine에 『 노가재연행일기 』

일부를 번역하여 소개했다. 게일은 김창업을 17-18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으며 그가 북경의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했다고 강조했다. 게일은 김창업이 정치적·사회적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조선 선비의 자유로운 생각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그는 『 한국민족사 』 에서 서구 열강들이 자본주의적

투기와 그로 인한 대공황으로 얼룩지던 혼돈기에 조선(인)은

이와 달리 편안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백주희 2014, 304-305). 물론 이러한

평가에 대명의리와 북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청조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해야 했던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치열한 고민이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

사람의 평가를 종합해봤을 때 김창업의 『 노가재연행일기 』 가

청나라의 산천과 문물, 풍속을 세심하게 살피고 기록한

걸작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사진사진

<그림1> 게일의 『노가재연행일기』 영문 번역본

『Translation of diary of Korean Gentleman's trip from Seoul to Peking 1712-

1713 A.D.』 원고 (백주희 2014)

18세기 초 조선과 만주족의 나라 ‘청’

역동의 시기였던 18세기는 세계사의 위대한 백년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근대적 인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이는 조선과 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과 청은 긴장의 17세기를 보냈다.

그러나 청이 새로운 ‘중국’의 통일과 전성기를 맞이하고, 조선

역시 경제적 성과를 이루는 속에 두 나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었다(윤재환 2019, 150-151).

다만 김창업이 연행하던 1712년 조선 사회에는 여전히

화이론적 세계관이 주를 이루었다. 명이 망한지 60년이 됐던

1704년 당시 조선은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을 창설하여 숙종과

대신들이 명 신종의 제사를 지내며 중화 문화의 계승자가

조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명 멸망 후 68년이 지난

1712년에도 북벌론과 대명의리론이 국가적 대의로 여겨졌으며,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전히 중화문화 중심의 화이론적

세계관을 지녔다. 청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정복 오랑캐인 청의 번영을 인정할 수 없었다(전혜숙

2005, 118-119).

이 시기 청조는 제4대 황제 강희제 재위 51년이 되는 때였다.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천문지리학 등 신학문과 기술이 중국에

들어왔고, 강희제의 통치 아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한편, 만주족이 지배했던 청나라는 그 안에서

복합적인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중국 내에서는 북경을

중심으로 해서 명조의 계승자로서 통치를 이어갔으며, 만리장성

밖 열하를 거점으로 해서는 몽고, 티베트, 위구르뿐만 아니라

비한족세력의 통치자로서 존재했다(송미령 2005, 69). 이렇듯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한족과 비한족을 아우르는 통치가 요구됐던 당대의 중국

내에서는 한족과 만주족의 풍속 역시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노가재연행일기』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청인은 다 한어(漢語)를 하는데, 한인은 청어를 하지 못한다.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를 달갑쟎게 여긴다. 그러나 청어를 하지

못하면 벼슬길에 해롭다. 대궐 안에서나 아문에선 다 청어를 쓰며

주어문서( 奏 御 文 書 )도 다 청어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만주인과 한인이 다 한어를 쓴다. 때문에 청인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도 청어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황제는 이를 근심하여

총명한 어린이를 뽑아 영고탑( 寧 古 塔 )으로 보내어 청어를 배우게

한다고 하였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1권 산천 풍속 총록

이윽고 영반이 왔다. 드디어 찰원의 한 뒷방에 앉히고 붓으로

문답하였다.

“내가 성화를 많이 들은 터라 마침 이곳에 온 김에 한번

보고싶었을 뿐이오. 반관에 들었으면 유생(儒生)일 텐데, 어찌해서

손가락에 각결(角決, 활 쏠 때 손에 끼는 것)이 있소?”

“저는 무반( 武 泮 )에 들어갔습니다. 활과 말에 익숙하고 책론( 策 論

)에 정통함을 본국에서 으뜸으로 칩니다. 다만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2권 1712년 12월 15일

당대에는 한어와 만주어가 함께 쓰이고 있었으며 한어가

만주어보다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조에서는 만주어를 하지 못하면 벼슬을 하기

어려웠다. 유목민족의 왕조답게 활과 말에 익숙하면서 책론에도

능한 것을 최고로 여겼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한족 여인은 다 분을 바르는데, 호녀(胡女)는 바르지 않는다. 전에

듣기로는 한족 여인은 남편이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모두

화장을 하고 꽃을 꽂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다 그렇지는

않았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1권 산천 풍속 총록

남녀의 복장은 사치한 이나 검소한 이를 막론하고 모두 검은

빛을 숭상하는데, 한족 여인은 그렇지 않아 푸르고 붉은 바지를

입은 자가 많았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1권 산천 풍속 총록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혜(鞋, 가죽신)나 화(靴, 목이 긴 신)를 신는다.

비록 말몰이꾼이라도 다 혜를 신는데, 그 혜는 베나 비단으로

만들어졌고 가죽으로 된 것이나 삼신, 짚신 따위는 없다. 봉성과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심양 사이에선 간혹 가족신을 신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 나라에서

부르는 다로기다. 호녀( 胡 女 )는 전각하지 않으나 간혹 화( 靴 )를

신는 수가 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1권 산천 풍속 총록

소녀의 머리는 호인의 방식을 하였고 발은 전족을 하였는데,

그것은 만한(滿漢)의 풍습을 섞어 차린 모습이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8권 1713년 2월 26일

한족 여인은 화장을 하고 만주족 여인은 화장을 하지

않았으며, 한족 여인은 푸르고 붉은 바지를 입고 만주족

사람들은 검은빛의 옷을 입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죽신이나

목이 긴 신을 신었는데 만주족 여인은 전각하지 않고 가끔가다

목이 긴 신을 신었다. 한족의 전족을 하면서 호인의 머리

모양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듯 외모를 가꾸거나 의복을

갖추는 데 한족과 만주족의 풍속이 구분되는 부분과 혼합되는

부분이 공존했다.

혹 한인( 漢 人 )은 3년제를 쓰고, 청인( 淸 人 )은 역월제( 易 月 制 )를

쓴다고도 한다. 청인은 모두 화장을 하며, 한인은 화장을 하지

않는데, 근래에 와서는 한인도 화장을 한다고 한다. 비록 화장을

하더라도 관에 넣어 태운 뒤, 그 뼈를 거두어 그릇에 담아

묻는다. 그리곤 흙을 모아 작은 봉분을 만든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1권 산천 풍속 총록

한족은 3년제를, 만주족은 역월제를 썼다. 한족은 화장을

하지 않고 만주족은 화장을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한인도

화장을 한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한족과 만주족의 의례에

차이가 존재하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변화해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팔기의 만주인을 대상으로 기존과 같이 한문 과거의 수재, 거인,

진사를 뽑기 위한 시험을 시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외에도

번역과 무예의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만주인을

대상으로 만문을 번역하게 하여 수재, 거인, 진사를 뽑는 시험,

그리고 무과거의 수재, 거인, 진사를 뽑는 시험에 관해, 사무를

총괄하는 왕과 대신들이 관할하는 부와 회합하여 어떻게 시험을

실시할 것인가, 합격자 수를 몇 명으로 할 것인가 등을 의논하여

정하고, 그 결과를 상주하라, 특별히 유를 내린다.

- <상유기무의복> 만문본 (이시바시 다카오 2009, 160-161)

한족과 만주족을 구분하여 제도에서도 변화를 주었다. 청조

시대의 과거제도는 명조 때의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1723년

옹정제는 위와 같은 상유를 내리며 만주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시험에 무예과를 추가했다.

여러 언어로 쓰인 궁정의 편액은 다민족통일국가로서

청나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곤녕궁’은 만주문과

한문으로 같이 쓰였는데 한 편액의 좌측에는 한문, 우측에는

만문이 새겨져있다. 이때 만주문은 한자의 음가르 만주어로

옮겨적은 것이다. ‘태화전’ 역시 만한 합벽으로 쓰여졌는데 이때

만주문은 한자의 의미를 번역한 것이다. 한편, 항상 만한 합벽

형식만 쓰인 것은 아니다. 피서산장이나 외팔묘의 편액은

몽골·위구르·한·티베트·만의 순서로 쓰인 오체합벽과

몽골·티베트·만·한의 사체합벽도 있었다(이시바시 다카오 2009, 62).

사진

<그림2> 만주어, 몽골어, 한자어, 티베트어, 위구르어로 쓰인

건륭제의 여름별장 ‘피서산장’의 ‘여정문’ 편각

연행 길에 드러나는 ‘조선중화주의’

1712년 11월 3일 김창업은 한성을 출발하여 12월 27일 북경에

도착했다. 연행길에서 김창업은 의관에 대한 일종의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김창업은 청조인을 대할 때 호복( 胡 服 )을 입고

변발을 하는 청조의 풍습과 달리 중화 문화를 계승한 조선의

의상에 대한 자부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래는 김창업이

한인 왕오에게 조선의 의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대목이다.

한인 왕오의 집에 들어 아침을 먹었다. 주인은 나이 50쯤 되어

보였는데, 자기는 요동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노라고 하며, 또

‘요동은 곧 당신네들이 거주하던 곳입니다.’하였다. 큰 돌 위에

벗어 놓은 나의 표범 갖옷을 보더니, 즉시 집어 입어 보면서, ‘참

좋다.’고 하였다. 내가, “당신은 우리나라의 갓과 옷을 어떻게

생각합니까?”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면서 모자를 벗고 자기의

머리를 가리키는 품이 할 말이 있는 듯하였다. 신지순( 申 之 淳 )을

시켜 물어보라고 하니, 자기의 아버지도 전에 망건을 쓰고 갓을

썼노라고 하였다. 처음엔 만주인이라고 자칭하다가, 우리가 캐물은

뒤에야 비로소 사실대로 고하므로, 어찌해서 앞뒤의 말이

다르냐고 물었더니, “선대는 비록 한인이지만 오늘엔 이미

황제에게 속한 바 되었으니, 어찌 만주인이 아닙니까?”라고

답하고, 이어서 자기는 지금 팔고산( 八 高 山 ) 군병에 속해있다고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한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2권 1712년 12월 11일

김창업의 조선 의관에 대한 자부심은 『 노가재연행일기 』

곳곳에서 확인된다. 아래는 김창업이 기모( 奇 謀 )라는 청조의 어린

수재와 나눈 대화이다.

찰원의 방이 협소하므로 나는 촌가에 나가 잤는데, 마침 서장관이

사처에 있기 때문에 들렀더니 호인 어린이 하나가 앞에 있는데

얼굴이 귀여웠다. 서장관 말이, 그 아이는 주인집 아이로 글자를

알기에 불러왔으나, 머리에 쓴 것이 싫어서 보낸다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이엄(耳掩)을 벗어서 아이의 머리 위에 얹어주고 그

집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하였더니, 아이는 웃으면서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나왔다. 내가, “너의 부모가 보고 어떻다고

하시더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더라는 대답이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와서, “너의 조상의 의관 제도는

어떠했느냐?”고 물었더니, “저는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모릅니다.”고 하였다. “나의 의관이 네가 보기에 어떠냐? 꽤

우습지?”하고 물으니, “어찌 감히 웃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다고 하였더니, “의관이란 바로 예( 禮 )인데,

어찌 웃겠습니까?” 하였다. ...(중략)...

“머리를 깎는 것이 네 뜻엔 즐거우냐? 왜 우리처럼 머리를

기르지 않느냐?” “머리를 깎는 것은 풍속이며, 깎지 않음은

예(禮)입니다.”

“이 마을에도 달자(㺚子, 서북변의 오랑캐)가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들은 달자와 친교를 맺느냐?”

“이적( 夷 狄 )의 사람이 어찌 우리들 중국과 어울려 친교를

맺겠습니까?”

“우리 고려 역시 동이( 東 夷 )인데, 네가 우리들을 볼 때, 역시

달자와 한가지로 보느냐?”

“귀국은 상등인(上等人)이요, 달자는 하류인(下流人)인데, 어찌해서

한가지이겠습니까?”

“너는, 중국과 이적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의 말을 들어서

알았느냐?”

“공자의 말씀에, ‘우리는 오랑캐의 풍속이 될 뻔하였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달자들도 머리를 깎으며 너희들도 머리를 깎는데, 무엇으로써

중국과 이적을 가리느냐?”

“우리들은 머리를 깎지만 예가 있고, 달자는 머리도 깎고 예도

없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 네 나이 아직

어린데도 능히 이적과 중국의 구분을 아니, 귀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고려는 비록 동이(東夷)라고 불리고 있지만 의관

문물이 모두 중국을 모방하기 때문에 「소중화」라는 칭호가 있다.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지금의 이 문답이 누설되면 좋지 않으니 비밀로 해야된다.”고

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내가 「 달자 」 라고 한 것은

청인을 지목함이었는데, 기모( 奇 謀 )는 몽고로 오인한 때문에

답변이 그와 같았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2권 1712년 12월 12일

청조의 어린 수재 기모( 奇 謀 )는 청조는 비록 변발은 하였지만

‘예’가 있으므로 중국이며 ‘예’가 없는 ‘달자’(몽고)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김창업은 이에 감동하며 말이 이치에 맞다고 하였다.

예악문물은 조선중화사상을 관통하는 것으로 조선이 중화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조선에 예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점에 김창업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수재는

의상만이 아닌 청조의 법과 제도 등도 예악문물이며 이를

‘예’라고 표현했다. 이에 김창업도 동의했다는 것은 중화문명의

계승자로서의 청조를 인식하는 데 한 걸음을 내민 것으로

보인다.

십리하점(十里河店)을 지나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니, 인가는 역시

쓸슬하였으나 마을 북쪽 2리쯤엔 옛 성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세 사신은 찰원에 들고, 나는 민간에 들었는데 주인의 성은 유(劉

)씨였다. ...(중략)...“우리들의 의관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것을 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2권 1712년 12월 14일

자신들의 의상을 의관이라고 할 수 없다는 한인 유 씨의

답에 김창업은 중화 문화의 계승자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의 의관이 대국과 다른데, 해괴하지 않습니까?”

“노야들의 의관을 매우 좋아합니다. 우리도 명나라 때는 의관이

그와 같았었지요.”

“그렇다면 공들의 지금 의관은 옛 제도가 아닙니까?”

“우리들의 지금 의관은 곧 만주 것입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19일

김창업은 특유의 반어법을 사용하여 조선 의관에 대한

청인들의 생각을 묻고 있다. 조선 의관을 좋아한다는 답을 들은

뒤에는 그들의 의관을 가리키며 옛 제도가 아니냐고 묻는다.

의도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자극한 것이다.

내가 묻기를, “우리들의 의관은 그대가 보기에 어떠하오, 우습지

않소?” 하니, 답하기를, “우습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의관입니다.” 하였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22일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위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창업은 우회적인 화법을 통해

조선의 의관이 우습냐고 묻고 상대에게서 조선의 의관이 정말

의관이라는 답을 끌어내고 있다.

나는 글로 써서 말하기를, “우리들의 관복(冠服)은 황제께서도 전에

가져다 구경하신 일이 있다”고 하였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8권 1713년 2월 22일

이처럼 김창업은 호복을 입고 변발을 하는 청조의

한족들에게 조선의 의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우회적으로 조선 의관의 우월함을 표현하고 있다.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의 예악문물을 조선이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의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의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청조에 의해 호복과 변발을 강요당한 한인들이 중화

문화를 그리워하고 조선의 의관을 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떠올리는 상황에서 김창업은 중화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북경 궁궐은 명 영락제( 永 樂 帝 ) 때 창건한 것인데, 갑신년 이

자성의 반란에 화재를 겪었지만, 뒤에 중수하여 제도는 모두 옛날

그대로였다. 장려하고 정제함이 정말 황제의 거쳐다왔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1일

김창업은 입궐하여 살펴본 궁궐에 대해 황제의 거처답게

웅장하고 화려하며 정밀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표현했다. 북경

궁궐은 명 영락제 때 창건한 것인데 옛 그대로였다고 표현한

점에서 명나라의 옛 제도를 떠올리며 감탄을 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람객 중에 먼저 온 자가 있기에 내가 글자를 써서 산 이름을

물으니, 한 사람이 「 토아산 」 ( 兎 兒 山 ) 석 자를 썼다. 이 산은

궁장( 宮 墻 ) 안에 있으며 태액지에서 멀지 않은데, 생각하니 역시

명나라 때 왕실에서 놀던 곳인 듯하나 지금은 황폐되었다. 각

역시 모두 퇴락하였는데, 처마를 돌아가며 세운 돌은 그 모습이

천백 가지나 되었다. 대저 모두 텅 비고 영롱하며 그 색은

푸른데, 높은 것은 한 길 남짓하고, 큰 것은 더러 몇 아름씩

된다. 태호석 중에 기이한 것은 값이 백금( 百 金 )이 넘는데 이

산에 모인 것만도 그 수가 무려 수천이 넘는다. 그것을 수레에

싣고 배로 운반한 비용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이는 송나라

휘종(徽宗)의 간악(艮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누구는 멀리 있으나

가져오고, 누구는 가까이 두고도 즐기지 않으니, 그 득실을 알

수가 있고, 흥폐의 운수가 또한 슬프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6권 1713년 2월 9일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옛날의 관복제도( 冠 服制 度 )나 중국의 풍속들은 볼만한 것이 많다.

요새 한인( 漢 人 )들의 후예가 오히려 중화의 제도를 흠모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은 것은 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 『노가재연행일기』 제7권 1713년 2월 21일

1713년 2월 9일의 글에서 명나라 때 놀던 토아산이 지금은

황폐되어 아무도 쓰지 않는 것을 보며 흥망성쇠의 운명을

슬퍼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2월 21일 일기에서는 옛 중국의

문물과 풍속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성은 어느때 쌓은 것입니까?”

“구성( 舊 姓 ) 연행은 요순( 堯 舜 ) 적부터 있었습니다. 순의 아들을

계(薊)에 봉했지요.”

“이 성이, 안 녹산(安祿山)이 거주하던 곳입니까?”

“과객(過客)이었을 뿐이지요.”

“과객인데 어찌 사당을 세워서 온 고을이 제사를 지냅니까?”

“그 사당은 낭랑(娘娘)의 행궁(行宮)입니다.”

“낭랑이란 어떤 신(神)입니까?”

“태산(泰山)의 신이지요. 안 녹산은 본래 서쪽 호인(胡人) 권이지,

우리 계성(薊城)의 주인이 아닙니다.”

“대국은 전부터 과객이 많았지요?” 이 말은 호족 황제를 가리켜

한 말이었는데,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24일

김창업은 청나라 황제를 호족 황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과객 즉, 나그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청나라가

현재에는 명나라의 자리를 차지하고 중국을 장악했지만

언젠가는 그 자리를 다시 한족 왕조에 내어놓고 북쪽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용어로 보인다.

김창업은 연행길에서 청나라의 지식인을 만날 때마다 조선

의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습지 않은지 특유의 반어적

화법을 통해 물으며 그들의 관심이 중국 문화를 계승한 조선의

의관을 향하게 만들었다. 오랑캐와 중국을 구분하는 화이론을

일깨우며 중국 문화를 공유했던 데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은 명나라의 멸망 이후 경험했던 천하질서와

‘소중화’로서의 자부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또한 명나라 때 지어진 궁궐을 보며 당시의 제도를 높이

평가한 것, 명나라 왕실에서 놀던 토아산의 황폐를 바라보며

나라의 흥망성쇠를 슬퍼한 것, 옛 중국의 관복제도와 풍속이

부러워할 만하다고 표현한 것 등에서 과거 명나라의 제도와

풍속을 떠올리며 ‘숭명’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조의 황제를 호족황제와 과객이라고 표현한 점에서 조선

지식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은 화이관과 더불어 만주족이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언젠가 중원을 내놓고 본래 자리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랑캐에 대한 재인식, 북벌에서 북학으로

김창업은 북경에 입관하고 난 뒤 사람들의 의복과 머리 모양을

보면서 오랑캐가 천하를 차지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

노가재연행일기 』 를 읽다보면 김창업이 단순히 ‘북벌론’의

화이관과 ‘조선중화주의’만을 드러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글에서는 청나라의 문물과 풍속 그리고 청 황제의 통치와

인품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도 드러난다. 청의 발전된 문물,

안정적인 황제의 통치, 청나라 사람들의 후한 인심이나

너그러움 등 풍속을 확인하면서 오랑캐인 만주족이 지배하는

중국을 재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척흉, 마척뇌( 馬 踢 腦 )를 가리는 데 대해서는 그 제도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러한 복색이 비록 원래 중국 제도는 아니나 그

귀천과 품급이 또한 분명해서 문란함이 없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관대지국( 冠 帶 之 國 )이라고 하나, 귀천, 품급의 분별이 겨우 띠와

관자( 貫 子 )에 불과하며, 보복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문무 귀천의

구분을 두지 않았고, 부사( 副 使 ) 또한 백씨와 같이 선학( 仙 鶴 )을

써서, 그 무늬가 문란하니, 가소롭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1일

유 봉산이 한 호아(胡兒)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제독의 아들이라고

했다. 의표( 儀 表 )가 준수하고, 또한 귀중한 모습이 있다. 그

나이를 물으니, 14세라 대답하고, 성명을 물으니, 다만 「 부 」 ( 傅

)자만 쓰고 이름은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 의복은 극히

화려한데, 상의에는 안으로 푸른 실과 넓은 끈을 매었고, 그 좌우

전후에는 모두 금으로 새긴 대안( 帶 眼 )이 있고, 전안( 前 眼 )으로써

잠갔는데, 제작이 기교하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14일

앞에서 다뤘듯 김창업은 연행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조선 의관에 관한 생각을 물으며 은근히 중국 문화

계승자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김창업은 새해 조참에

가서 본 청나라의 관복제도가 원래의 중국 제도는 아니지만

품급의 분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문란하지 않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의 의관은 품급의 문무나 귀천에

구분을 두지 않고 품급의 분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가소롭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호인 아이의 의복이 극히

화려하고 그 제작 기술이 아주 교묘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집에서는 노새 두 마리를 사용하여 메밀을 가는데, 밀가루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치는 기구를 보니, 그 기계가 편리하고 기묘하여 잠깐 사이에

두어 곡은 뺄 수 있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2권 1712년 12월 10일

호인 주인이 베를 짜는데 보니, 북 모양이 납작하면서도

뾰족하였으며 베틀의 구조가 우리나라 것과는 달라, 편리하고

힘이 덜 들게 만들어졌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20일

김창업은 당시 청나라의 문물 발전상을 보여주는 기계에 대해

설명하며 조선의 것보다도 더 편리하다고 평가하였다. 김창업이

연행 길에서 조선의 예악문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청조의 발전된 문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김창업은 강희제의 검소함과 효, 애민( 愛 民 ) 정치, 유교 숭상

등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앞서 들으니, 조참례(朝參禮)후에는 관례로 다례(茶禮)와 연례(宴禮

)를 행한다고 하는데, 계사(효종4, 1654), 계축(현종14, 1673) 두 해의

우리 아버님 일기에는 다례와 연례에 참가했다는 말씀이 있고

계축년에는 예부 상서로 하여금 아버님을 인도하여 태화전 내에

앉게 하고 술을 내렸다 하니, 이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이겠으나,

그러나 연례 같은 것은 예년에 행하던 일인데, 근년에는

폐지되었다. 전에는 태화전 앞의 12 향로에 침향(沉香)을 태웠으나,

지금 또한 이런 일을 없앤 것은 생각하건대, 황제가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하여서인 것 같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1일

옛날에 듣건대, 황제는 창춘원에 이궁(離宮)을 15곳이나 지어놓고,

북경 및 14성의 미녀들을 모아두고 궁실제도와 의복, 음식,

기명을 모두 그 풍속에 따라 마련하고 황제가 그 가운데서

노닌다고 들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소문과는 크게 달랐다.

창춘원은 남북이 2백여 보, 동서가 1백여 보일 뿐인데, 그 안에

어찌 15개의 이궁을 설치할 수가 있겠는가? 그 삼면을

둘러보았지만 끝내 처마 끝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높고 크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진실로 놀기를 일삼고 사치에 바쁘다면

태액( 太 液 ) 오룡( 五 龍 )과 같은 아름다운 곳을 버리고 여기에

거처하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이곳은 서산( 西 山 )과 옥천( 玉 泉 )에

가까우니, 산수의 경치와 전야의 취미를 겸한 곳인데, 이러한

곳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 듯하다. 이렇게 보건대, 그 사람의

성품을 헤아릴 수가 있다. ...(중략)... 처음 와 보았을 때에 북쪽

담 안에는 대나무가 있었다. 또 이 「군방보」 (群芳譜)에는 황제가

창춘원의 벽모란(碧牡丹 )을 읊은 시가 있는데 이로써 곧 그 안에

화초를 많이 심어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옥천수를 창춘원 안으로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끌어들였지만, 좌우 언덕에는 벽돌도 놓지 않았으니, 비록 지대(地

臺)와 원림(園林)을 두었다 하나 어디까지나 검소할 따름이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2월 7일

중국을 방문한 조선 사신들은 1665년 어린 황제가

사치스럽고, 행정이 부패하여 청조는 곧 붕괴할 것이라고

하였다. 삼번의 난 진압 직후 중국에 갔던 사신들은 강희제가

반란 진압 후 통치에 대한 과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으며

군민을 징발하고 사냥하여 원성이 자자해 오랑캐의 운수가

다하려는 징조라고 보고했다. 1695년에 중국을 방문했던

사신들은 황제가 생활에 절제가 없고, 사냥을 즐겨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관료들의 부패도 여전하다고 보고했다(송미령, 2005,

72). 이러한 사신들의 보고 내용은 김창업이 청조에 대해

인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에

떠돌던 소문과는 달리 검소한 규모의 창춘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는 황제의 인품에 대한 평가로도 이어졌다. 황제가

검소한 것을 숭상한다는 것이다.

창춘원에는 관부를 설치하지 않고 백관들을 승려( 僧 廬 )에 들게

하며 또 날마다 25리나 되는 곳을 왕래케 하니, 더러는 이것을

괴이히 여기나 역시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개, 호인들은 말

등을 집으로 삼으며 춥고 배고픔을 능히 이길 수 있음이 그들의

장기였는데, 중국에 들어온 지 70년에 거처와 음식이 점차

사치해져서 그 본색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때문에 조석으로

왕래하게 하여 말달리기를 익히고, 거처할 곳을 마련하지

않음으로써 그 안일함을 경계하게 하니, 그 의도가 깊다고

하겠다. 열하( 熱 河 )로 피서 가고 패주로 관어( 觀 魚 ) 가는 것도

역시 한갓 돌아다니며 노는 것에 그친다고 할 수 없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2월 7일

또, 건이( 建 夷 ), 동이( 東 夷 )의 종족은 성격이 본래 어질고 약하여

살인을 즐기지 않는데, 더구나 강희( 康 熙 )의 검약함으로 고생을

견디며, 관대하고 간소한 규모로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권장하며, 재용( 財 用 )을 절약하며 백성을 사랑하여 50년 동안이나

통치를 하였으니, 태평을 이룩하였음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정치에

유술( 儒 術 )을 숭상하여 능히 공자와 주자를 높이며, 몸소 효도를

닦고 적모( 嫡 母 )를 잘 섬김에 이르러서는 비록 위나라의

효문왕이나 금나라의 옹왕에 비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2월 7일

김창업은 강희제가 백관들로 하여금 매일 25리씩 말을 타고

왕래하게 하는 것이 말 달리기를 익히고 안일함을 경계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했다. 또한 열하로 피서를 가고

패주로 낚시를 가는 것도 단순히 돌아다니며 노니는 것은 아닐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강희제가 백성을 사랑하는 통치로

태평을 이룩하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비록

오랑캐일지라도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와 주자를 따르고 효를

행하는 것이 충분히 중국의 예악문물과 같다고 보는 것으로

조선에 예악문물이 있어 ‘소중화’로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인 왕조가 아닌 위나라의

효문왕과 금나라의 옹왕을 비교대상으로 들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국 정통왕조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송미령 2005, 72).

김창업의 글에서는 청나라의 풍속을 통해 청을 재인식한

부분도 자주 등장한다.

아침에 수역이 와서 말하기를, “역졸 한 사람이 팔리포에서

낙후하고 지금껏 오지 않기에, 아문에 이야기해서 갑군을 풀어

찾아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날씨가 몹시 추웠고 또 그

사람은 처음 길이라 말도 통하지 않는데, 만약 인가에 찾아들지

못했다면 동사했을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조금

후에 갑군이 데리고 왔다. 물어보니 날이 추워서 한 점방에

들어갔더니 따스한 온돌방에 재워 주고 밥도 주더라고 하였다.

이곳의 풍속이 후한 것을 가히 알만 하였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28일

김창업은 팔리포 인근 한 인가에서 조선 역졸을 재워주고

밥도 주었다며 이들의 풍속이 후하다고 평가했다.

기록된 물건과 세폐문서가 달라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일찌기

듣기로는, 이 나라 사람들은 욕심이 많고 근래에는 기강이 없어

모든 일을 다 뇌물로써 해결한다고 하더니, 이번에 와서 보니,

역시 그렇지는 않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마음이 밝고 통이 크며

잘못된 일은 비록 아주 능숙한 구변으로 꾸며댄다 하더라도 믿지

않으며, 옳은 일이라면 처음에는 비록 오인했더라도 이치로

따지면 곧 의혹을 푼다. 이번 사건으로 비추어 보더라도 처음에는

다만 문서만 보고 오인하다가, 장 원익의 말을 들은 뒤에는 곧

의혹을 풀어 버리고 조금도 의심치 않으니, 이러한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치지 못할 바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17일

김창업의 글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바와

다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글을 써나간다는 것이다. 위 대목에서 김창업은 청나라

사람들이 욕심이 많고 문제를 뇌물로 해결한다고 들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고 이들이 이치에 따라 의혹을 풀고자 한다고

썼다. 이러한 점은 조선 사람들은 미치지 못할 바라고 하며

조선에 비해 이들의 풍속이 더 나은 부분에 대해 솔직한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평가를 하고있다.

서직문에 이르니 아직 열리지 않아 곧 말에서 내려 길옆에

앉았다. 문 안에는 수레와 말이 붐비고 등불과 촛불이 휘황한데

모두 창춘원으로 가는 관원들이었다. 한 작은 점포가 등을 걸어

놓고 일찍 가게를 열었는데, 매매하는 것을 보니 반랑( 檳 榔 ) 한

개를 네 쪽으로 갈라놓고 담배를 작은 봉투에 갈라 넣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사는 자들이 돈을 탁자에 놓고는 값에 따라

가져갔다. 전후에 와서 사는 자들이 많았지만 모두 한결같았다.

그 주인이 보지 않으나, 가져가는 자들이 없었으니 풍속은 정말

가상하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5권 1713년 2월 6일

나는 연 3일 동안 창춘원에 가 보았는데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절대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안 들렸고, 책을 줄 때에도

우리나라 같으면 반드시 각 관청 사람들을 다 불러 거동이

분분했을 터인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하고

책만 내어줄 뿐이었다. 쌀 물건도 내어주니 싸서는 곧 들고 나올

뿐이며 사관에 옮겨놓기까지 일시반각도 지연함이 없으니 오직

이러한 일은 우리 나라에서는 미치지 못할 바이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5권 1713년 2월 6일

사동비의 문자는 명 나라 지휘동지( 指 揮 同 知 ) 왕평( 王 平 )과

도독부첨사(都督府僉事) 왕성종(王盛宗) 두 사람에게 내린 칙유(勅諭

)의 글이다. 좌측의 2개의 비는 왕성종이 만력 3년(1575)과 5년,

18년에 요동 전문 유격장군(遼東前屯衛遊擊將軍)을 제수한 칙서(勅

書 )다. 우측의 비석은 왕평이 만력 20년(1592) 및 21년에

유격장군(遊擊將軍)을 제수한 칙서다. 이 두 사람은 일찍이 금주(金

州), 복주(復州), 해주(海州), 개주(蓋州), 금주(錦州) 등의 위(衛)와

철령위( 鐵 嶺 衛 ) 등의 수장( 守 將 )이 되어 누차 변방의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데 비문 가운데 「노추」 ‘奴酋’ 두 자는 모두 쪼아

내면서도 비석만은 그대로 두었으니 역시 너그러운 처사이다.

- 『노가재연행일기』제8권 1713년 2월 29일

김창업은 서직문 근처 무인 점포를 보며 주인이 없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다며 그들의 풍속이 가상하다고 썼다.

창춘원에서는 사람이 많아도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질서정연하게 책을 나눠주었다며 이러한 모습이

조선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명나라 때 지휘동지와

도독부첨사에게 내려진 칙서가 적힌 비석을 그대로 두고 몇

글자만 쪼아 낸 것을 두고 너그럽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창업이 풍속을 통해 청을 재인식한 것은 조선에서 풍속이

지녔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건국

때부터 풍속을 교화함으로써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추구했다.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조선에서 풍속은 정치의 주된 목적이자 정치적 교화의

결과이며, 임금의 정치적 능력과 그 방향을 가늠하는 주요한

기준이기도 하였다. 풍속이란 창으로 중국을 바라보면 중국의

정치 상황을 알 수 있고, 황제의 정치적 능력을 헤아릴 수

있으며, 중국이 오랑캐의 나라인지 문명국인지 판단할 수

있었다(정훈식 2021, 41-42). 김창업은 청나라의 풍속을 자세히

살피고 이를 나름의 기준을 통해 평가하면서 오랑캐의 나라와

문명국으로 나눠놓은 경계에서 한 걸음 벗어났다.

그러나 김창업의 글에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청의 풍속과

문물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적’인 청나라에 대한 무시는

여전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북벌에서

북학으로 옮겨가는 전개과정에서 ‘이적’과 ‘문물’을 구분해서

바라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가 오래도록 번성할 수록

조선의 지배층은 청나라의 몰락을 더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청나라의 몰락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가 오랫동안

번성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다. 그러나 전통적

화이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하면서 청나라의 번성 이유를

청나라의 근본적 속성에서 파악하기보다는 그들이 중화의

문물을 빼앗아서 그러다는 논리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적’으로서의 청나라와 ‘중화의 문물’인 청나라의 문물을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청나라의 문물이 곧 중화의

문물이라는 관념으로 이어지며 청 문물의 도입을 용이하게 하는

맥락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허태용 2007, 412).

18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다

김창업은 단순히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을 관찰하는 수준을

넘어 멸망청초의 상황을 논하고 몽고의 동향을 살피고 해적에

관한 정보를 묻는 등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명나라 말기에 이 성을 지킨 장수는 누구였습니까?”

“처음엔 조대수였고 뒤엔 오삼귀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오삼귀는 곧 오삼계를 말한다.

“조 장군이 지켰는데 어찌해서 이 곳을 떠나고 오삼계가 대신

지키게 되었습니까? 오삼계는 항복하였습니까? 아니면 패전해서

후퇴한 것입니까?”...(중략)...

“조 장군이 끝내 항복하였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조이수가 항복한 것은 진( 陳 )이 북문 밖에서 망한데다가

조대수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조씨 집안은 지금의 조정에서

모두 3품의 직분입니다.”

“조대수의 형제로는 조대락 한 사람뿐인데, 조이수는

누구입니까?”

“이수는 조대락의 속명입니다.”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조대락은 송산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어 잡혔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송산에서 잡혔다는 것은 사실이나, 뒤에 다시 도망쳤습니다.”

“어디로 도망했습니까?”

“영원으로 도망했습니다다.”

“그 뒤에 끝내 어느 편이 되었습니까?”

“뒤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과 진이 북문 밖에서 망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15일

아버지와 형이 모두 영의정을 지낸 조선왕조의 대표적

권문세족 출신이었던 김창업은 청나라의 정치 현실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중원 장악의 원인을

따져보고 역사를 현장에서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오삼계와

조대수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은

명말청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태극달자(太極㺚子)도 진공합니까?” 물었더니 ”하지 않습니다.”

“그 달자는 이롭습니까, 아니면 해롭습니까? 황조에서는 그들을

두려워합니까?”

“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군병이 많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19일

“은(銀)을 만들어 바깥 달자들에게 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바깥이란 어느 곳이오?”

“영고탑 바깥입니다.”

“이 달자들에게 상을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모릅니다.”

“달자가 곧 몽고인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몽고에서 여기 와서 머무르는 자가 몇이며,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48가인데, 48가가 다 와서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1년에 은 얼마씩을 상으로 주오?”

“매년 48가에 약 4만, 5만 냥입니다.”

“은 외에 비단도 주오?”

“별도로 비단 같은 물건도 줍니다.”

“달자들이 1년에 바치는 공물은 무엇이며 얼마나 되오?”

“이는 모두 이번원(변방 사무를 총괄하는 관청)을 거치고 우리

예부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비록 예부의 일이 아니라 해도 혹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어찌 모르겠소?”

“듣건대 공물로 바치는 것은 인삼과 피혁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3일

통관배들이 말하기를, “몽골인들은 3월이 되도록 머물다가 황제

생일이 지나야 돌아가며 하루에 바치는 양고기와 술과 양식과

목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렇듯 오래

머물게 하는 뜻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고, 이어서 황태자를 책립하기 때문에 묵고 있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13일

김창업은 청조가 몽고를 두려워하는 이유, 청조와 몽고의

관계, 몽고의 진공 등을 물었다. 통관들로부터 몽골인들은

3월까지 머물다가 황제의 생일이 지나야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해 궁금해했다. 김창업이 이처럼

몽고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기존에 몽고에 대해 지닌 인식

때문일 수 있다. 1702년 중국을 다녀온 사신은 청조에서 가장

두려워한 것은 서북방의 몽고이며 병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금과 비단으로 뇌물을 썼으나 그들의 환심을 사지 못하여, 이후

청조의 근심은 오직 거기에 있다고 보고했다. 청조와 몽고의

충돌은 청조의 기틀이 마련되어 가는 강희제 때 시작되었다.

준가르의 갈단은 수령이 된 후 여러 몽고 세력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강희제는 강력한 유목제국 출현을 우려했다.

이에 준가르 연합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청조와 준가르는 1690년에 전쟁을 시작했고,

1696, 1697년 강희제가 친정을 하였다. 당시 조선은 청조가

붕괴되어 본거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만약에 청이 본거지로 회귀한다면 그 과정에서

몽고에게 길이 막혀 조선으로 우회할 것을 염려했다. 이에

조선은 몽고의 동향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송미령 2005, 83-84).

김창업의 몽고에 대한 관심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전에 황제가 우리나라에 보낸 자문에 지금 금주 지방에 해적이

출몰하니 주의하여 방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그 해적이 지금도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다만 철산 통자구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철산은 어느 부입니까?”

“산동 등주에 속해 있습니다.”

“등주는 여기서 뱃길로 몇 리나 됩니까?”

“바람만 순조로우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여러분의

성명을 써서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혹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예전의 사귐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14일

“금주( 錦 州 ) 해적 가운데 대왕이라고 부르는 자가 있다는데

그렇소?”

“있습니다. 진상의라고 합니다.”

“대단하오?”

“산동, 절강을 어지럽히고 다섯 성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대개

해적은 바람을 타고 달리며 출몰이 무상합니다. 지난해 10월

성경장군 패화락이 청자 절자로 계주한 것이 내각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어찌 군대를 풀어서 소멸시키지 않소?”

“대개 해상의 도적은 주거지역을 측정하기 어렵고, 또한 지금

관병은 모두 죽음을 겁내는데, 누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겠습니까?”

“적병은 얼마나 되오?”

“듣건대 3만, 4만이라 합니다.”

-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3일

김창업이 연행을 떠난 1712년은 상고선(무역선)이나 조선

어선을 상대로 노략질을 해오던 중국 해적선이 요동반도에서

가까운 황해도 해역 일대에 자주 출몰했던 시기다. 중국 해적은

황당인이나 해랑적으로 불렸는데 이들 우두머리는 왕을

참칭하기도 했다. 해적선의 출몰로 숙종까지 “황당선이 나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금년은 특히 황해도에 더욱 많으니 매우

염려스럽다.”며 경계를 철저히 하고 발견 즉시 추적해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김창업 역시 중국 해적의

동향을 살피는 데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김창업은

단순히 청나라의 산천과 풍속, 문물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명말청초의 상황과 몽고 세력과 해적의 동향을 살피며

18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나가며

18세기 조선은 전통적 천하질서와 화이관을 바탕으로 중화의

예악문물을 숭상하면서도 청조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이 혼재하는 시대였다. 통설적으로 북학론은 18세기

말에나 등장했다고 여겨지지만, 북학론은 18세기 초 맹아적

상태로 형성되었다.

김창업은 『 노가재연행일기 』 에서 ‘소중화’의 자긍심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청조의 의관과 문물을 조선의 것과 비교하며

우월의식을 나타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의 문물과 풍속에

감탄하고 조선의 것은 이에 비할 수가 없다고 표현하였다.

멸망한 명나라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기면서도 청 황제의 통치를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높게 평가하는 등 역사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를 실용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모습도 보였다.

김창업이 ‘화이관’을 지니면서도 청의 풍속과 문물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북벌에서 북학으로

옮겨가는 전개과정에서 ‘이적’과 ‘문물’을 구분해서 바라보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청나라가 오래도록 번성할 수록 청나라의

몰락을 더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던 조선의 지식층은 청나라의

몰락을 기대하기보다는 청나라가 오랫동안 번성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청나라의

근본적 속성에서 파악하기보다는 그들이 중화의 문물을

빼앗아서 그러다는 논리로 설명했다. ‘이적’으로서의 청나라와

‘중화의 문물’인 청나라의 문물을 구분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이

곧 중화의 문물이라는 관념으로 이어졌다. 이는 청 문물의

도입을 용이하게 하게 하였고 북벌에서 북학으로 가는 중간

단계로 작용했다.

김창업은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을 관찰하는 수준을 넘어

명말청초의 상황을 논하고 몽고의 동향을 살피고 해적에 관한

정보를 묻는 등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이는 김창업이 기존의 뿌리 깊은 관념을

바탕으로 중국을 바라보면서도 연행 중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통해 괴리를 느끼며 때로는 기존 관념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소극적인 관찰자의 수준을 넘어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연행에 참가했음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숭명멸청의 시기 중화적 세계질서의 붕괴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당시 조선사회의 지식인이 기존 관념과 변화된

세계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의 갈등 양상을 보이면서도 과거에

머물기보다는 현재를 개척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복합적인 심상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1차 자료>

재단법인민족문화추진회. 1976. 『 연행록선집Ⅳ 』 (노가재 김창업

저). <고전국역총서> 98.

<2차 자료>

구본현. 2008. “노가재( 老 稼 齋 ) 김창업( 金 昌 業 )의 동장( 東 庄 )에

대하여.” <퇴계학논총> 14.

구본현. 2011. “옛 文 人 들이 사랑한 서울의 동북 지역.”

<인문과학연구> 15.

김남기. 2002. “김창업과 김창흡을 추도한 조정만의 만시.”

<한국한시연구> 10.

김상조. 2005.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 老稼齋燕行日記)

2.『노가재연행일기』에 비친 베이징: 북벌에서 북학으로_자금성

연구.” <영주어문> 10.

백주희. 2014. “J. S. Gale의 老稼齋燕行日記 英譯本 一考.” Journal

of Korean Culture 27.

송미령. 2005. “18세기 조선 지식인이 본 청조( 淸 朝 )의 통치.”

<명청사연구> 23.

유장근 외. 2009. 《중국 역사학계의 청사연구 동향-한국 관련

분야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재단.

윤재환. 2019. “18세기 전반 연행록( 燕 行 錄 )에 나타난 뒤얽힌

인식과 하민(下民)의 묘사.” <한민족어문학> 85.

이시바시 다카오. 2009. 《대청제국 1616-1799: 100만의 만주족은

어떻게 1억의 한족을 지배하였을까?》. 홍성구 역.

휴머니스트.

이장우. 1976. “가재연행록해제.” 『 국역연행록선집Ⅳ 』

<고전국역총서> 98.

이호윤. 2018. “18세기 조선의 청조인식- 『 노가재연행일기 』 를

중심으로.” <석당논총> 72.

전혜숙. 2005. “18세기 初 <燕行錄>에 기록된 朝鮮知識人의 服飾

觀-金昌業·崔德中의 燕行錄을 중심으로.” <한복문화>

8(1).

정혜중. 2015.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 金昌業과 朴

趾源의 기록을 중심으로.” <중국학보> 73.

정훈식. 2021. “조선후기 燕 行 錄 에 기록된 청대 風 俗 인식의

추이.” <한국문학논총> 87(1).

허태용. 2007. “17․18세기 北 伐 論 의 추이와 北 學 論 의 대두.”

<대동문화연구> 69.

←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