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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 글로버 가든

복합의 눈으로 재구성한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정헌욱 · 중앙대학교

들어가며

주제

글로버 가든(Glover Garden, グラバー園)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상인 글로버(Thomas Blake Glover)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체류할 당시의 저택을 일컫는다.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잇폰마츠(一本松)라 불리는 이곳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그의 동업자나 다른 상인들의 대접 장소이자 다른 존왕양이(尊王攘夷)파 정치인들이 막부(幕府)에 대한 반란을 모사(謀事)하는 장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에도(江戸) 막부의 ‘가장 큰 반역자’로 칭할 정도로 반막부 세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성공에 기여한 삿초동맹(薩長同盟)에 공헌한 무기 및 선박 지원에서부터, ‘조슈 5 걸(長州五傑, Choshu Five)’로 대표되는 조슈 번(長州藩) 출신의 사무라이들을 ‘인간 무기(生きたる機械)’로서 해군기술을 배워오게끔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영국 유학길에 오르는 것을 도운 일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중에서 본 보고서는 조슈 5 걸 중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글로버의 인연을 중점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다만 두 개인의 만남만으로 국가 대 국가의 차원에서의 관계를 논하는 주제의 비약을 경계하고, 두 개인의 심상에 들어가 그들의 가치관적 변환의 측면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핵심 질문

조슈 5 걸 중에서 굳이 이토를 선택한 이유는, 이토와 글로버 사이의 특히나 각별한 관계 때문이다. 나이도 서로 비슷했던 글로버(1839- 1911)와 이토(1841-1909)의 관계는 이토의 유학을 전후로 깊게 형성되었으며, 이토의 귀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다만 본 보고서에서는 둘의 관계에 대한 검토는 조슈 5 걸의 영국유학 전후 시기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고자 한다.

1908 년 글로버는 일본 정부로부터 산업화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미친 영향을 높이 평가 받아 외국인에게 수여되는 최고급 훈장인 2 등

훈장을 받았다. 막말유신(幕末維新)기 그의 활동시기를 감안하면 다소 늦은 수훈이었지만, 이는 그만큼 시기를 불문하고 글로버가 일본의 조선업, 탄광업 등에 기여한 공적이 지대하였음을 방증한다.

한편 총리를 역임하였던 이토는 사실 평민 출신의 양이론자였지만 영국 유학을 계기로 양이론을 버리고 개국론으로 입장을 전환하였다는 점, 무엇보다 그런 그들을 자발적으로 도운 글로버는 일본이 아닌 스코틀랜드 출신에다 심지어 관료도 아닌 일개 상인이라는 점은 그 함의하는 바는 새롭다. 이에 그들이(특히 외국인이었던 글로버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핵심 질문―글로버가 반막부 세력을 원조하기로 결심한 심상(心想)의 변화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또 이토가 양이론을 포기하게 된 심상의 변화는 무엇에 기인하는가―으로 삼아, 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보고서를 구성하고자 한다.

이토는 한국과 일본에게 각각 ‘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로 비춰진다. 다만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필자의 한국인으로서의 감정은 최대한 배제할 것이다. 본 보고서를 통해서는 단지 글로버와 이토의 당시 상황에만 최대한 집중하여 한 편의 ‘드라마’적 구성을 연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두 개인의 관점에서 당시의 일련의 사건들을 몰입하여 바라보고 그 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본 보고서의 목적이라 하겠다.

글로버와 조슈 5 걸의 탈출

1863 년 가을, 영국 런던 항구에 한 쾌속 돛배가 정박한다. 11 월 4 일 아침 8 시를 조금 넘긴 시각. 300 톤급 페가수스 범선에서 내리는 수많은 인파 중 두 명의 젊은 일본인이 있었으니, 28 세의 이노우에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가오루(井上馨)와 22 세의 이토 히로부미가 그들이다. 상하이(上海)에서 출발한 배가 희망봉을 넘어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그들은 장장 4 개월 동안 갑판원 신세로 지내며 힘겨운 노정을 거쳐야 했다. 생애 첫 항해에 심신이 지친 그들에게는 만나야 할 동료들이 있었다. 다른 배를 타고 먼저 도착해 둘을 기다리고 있었던 동료들은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엔도 긴스케(遠藤謹助)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젊은이들이었다. 그렇다. 이들 다섯은 조슈 5 걸로 잘 알려진 일본의 사무라이들이었다. 왜 그들은 일본을 떠나 영국 런던에 오게 되었을까? 그들이 떠날 당시 일본의 상황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일본에 들어온 외국 상인들

에도 시대 말, 도쿠가와 쇼군(徳川将軍)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일본은 정치와 경제 모두 난항을 겪고 있었다. 1853 년 흑선 군함을 타고 일본에 도착한 페리 제독의 함포외교로 강제 개항을 한 이래로 일본은 여러 서구 열강과 친선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1858 년에는 서구 5 개국과 무역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일본은 약 200 년간 유지해 오던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그간 굳게 닫힌 문을 국제사회를 향해 열게 된다. 다시 말해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강력한 군사력에 바탕을 둔 서구 열강들의 압박에 마지못해 자유무역조약에 승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요코하마(横浜)와 나가사키 등의 항구도시에 외국인 정착지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상업적 기회를 좇아 수많은 외국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오게 되었다.

외국 상인 글로버

글로버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글로버는 스코틀랜드의 항구 도시 에버딘에서 해안경비대원의 아들로 나고 자랐으며 조선업과 상거래 등에 종사했던 형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해외에서 활동하는 상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중국에서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있던 상하이 지역에서는 일본에 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글로버 또한 일본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고 아예 일본어를 하는 가이드를 대동하고 다니면서 일본 관련 강의를 찾아 들을 정도로 일본에 대한 정보와 일본 관련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글로버는 옛날 멘토였던 멕켄지(Kenneth Ross Mackenzie)를 만나게 된다. 멕켄지는 글로버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글로버는 사업을 합치기로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차, 아편을 중심으로 하는 밀수업을 계획한다. 이들은 1859 년 9 월 19 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글로버는 멕켄지의 파트너로서 주 나가사키 영국영사관의 직원으로 등록된 상태로 일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당시 일본 내부의 정치적 갈등 때문에 외국 상인들의 무역 활동이 순탄치 않았다. 1861 년 6 월 나가사키에 상업회의소가 설립된 이후에 글로버는 그 요직에 당선되었고, 이후에는 일본에서 그의 상황이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조금씩 나아지자 멕켄지는 글로버의 성공을 질투하게 되고, 그는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글로버에게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일본 시장에서 글로버는 자립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회사를 만들었다. 1864 년, 그의 상사는 20 개 구역에 설립될 정도로 번창하게 된다.

초창기에 글로버는 차 제조업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영국 차 사업은 대성공이었고 그의 새로운 회사는 이화양행(怡和洋行, Jardin Matheson & Co.)와 협업을 시작했다. 먼저 글로버가 제조한 차의 견본은 상하이에 있는 이화양행으로 보내졌고, 거기에서 제조특허를 줄 경우 일본에서 차를 제조하는 두 단계로 협업이 이루어졌다. 비록 차 제조업이 그렇게 많은 이윤을 내지는 못했으나, 그가 무역에 대한 안목과 경험을 쌓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글로버의 무기거래

한편 글로버의 무역 활동에서 특히 주목할 점 중 하나는 그와 당시 일본 내 정치 세력들과의 관계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막부세력뿐 아니라 지방 벌족들에게 재정적이고 과학기술적인 원조와 부채를 주고 있었다. 특히 그는 1864 년과 1867 년 사이에 일본 내 정치세력과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으며 막부세력뿐 아니라 벌족들 간의 싸움에서 필요했던 군함과 엄청난 양의 총, 은 등의 금괴를 공급하였다. 1864 년 9 월경에 글로버는 일본에서 첫 선박 판매를 하였고 글로버의 상회를 통해 나가사키에 들여온 소총은 약 17 만 1,934 개에 달하였다.

1860 년과 1867 년 사이에 무기 거래는 글로버에게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결국 25 살 때 그는 사츠마 번의 주요한 브로커가 되었다. 자연스레 그는 사츠마와 조슈의 동맹인 삿쵸동맹(薩長同盟)의 주요 무기 브로커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글로버의 활동은 일본 역사에서 그를 수입소총, 대포, 폭발물의 개척자로 기억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존왕양이 운동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 정치 경제적 혼란이 외국인들이 초래한 결과라고 생각한 몇몇의 일본 사무라이들은 외국인들을 쫓아내거나

죽이는 등 ‘오랑캐를 내쫓자’는 양이(攘夷) 운동을 펼치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천황이 외국인들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해당 운동은 순식간에 퍼지게 되었고, ‘천황은 받들고 오랑캐는 내쫓자’는 ‘존왕양이’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무라이들 사이에 이러한 반외세의 이면 기저에는, 일본이 서구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깊은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한 의식의 대다수는 특히 사츠마(薩摩), 사가(佐賀), 조슈(長州), 토사(土佐) 등 일본 서부에 위치한 강력한 번(藩)들 사이에서 팽배했는데, 조선과 청나라에 가까운 해안가에 위치한 이들 지역은 해안 방어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조선(造船), 항해술, 대포주조, 총포대 등의 분야에서 서구의 해군 기술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렇듯 군사력 강화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그들의 힘은 그 결과 막부 쇼군의 군사력에 필적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1860 년부터 막부는 전국의 반외세 사무라이들이 일으키는 사건이 점차 증가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1861 년 6 월에는 에도 토젠지(東漸寺)에서 영국 영사관이 미토번(水戸藩) 사무라이에게 공격을 받았으며, 1862 년 9 월에는 나마무기(生⻨)에서 말을 탄 영국 상인이 사츠마번 사무라이에게 공격을 받아 1 명이 사망하고 2 명이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통칭 ‘나마무기 사건’). 1863 년 1 월에는 조슈번 사무라이가 에도 시나가와(品川)에서 건설 중인 영국 영사관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기도 하였으니, 외국인들이 이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황은 쇄국으로의 회귀와 함께 모든 외국인들의 추방을 막부에 지시했고, 이에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 쇼군이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교토를 찾았다. 1863 년 6 월 25 일, 천황과 쇼군 간 회담 결과 2 개월 내로 외국인을 추방하라는 정책이 결정되었고, 존왕양이파 사무라이들은 그 결정에 열렬히 환영하였다. 전쟁의 위협 속에서

1863 년 나가사키의 늦봄부터 여름까지는 매우 길고 더웠다. 특히 영국인 사회에게는 매우 위험하고 불안한 시기였고, 해당 기간 동안 글로버가 이화양행의 메디슨에게 보낸 편지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지난해 9 월 찰스 리처드슨(Charles Richardson)을 살해한 사츠마 번에 대한 영국의 보복이 임박했다는 것이 그 배경이었다. 이듬해 초 영국은 막부에 대해 배상금 10 만 파운드를 요구했으며, 사츠마 번에게는 해당 사무라이를 처형하고 그의 범행에 대해 2 만 5 천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 해군 함대의 쿠퍼 소장은 만일 그들이 요구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시 언제라도 그들을 정벌할 수 있도록 9 척의 함선과 함께 중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쇼군이 사츠마 번, 특히 근거지였던 가고시마(鹿児島)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양이파는 쇼군에게 영국의 요구에 따르지 말 것을 촉구했다. 마침내 에도에 있는 쇼군으로부터 포고령이 하달되었고, 이는 온건파에 의해서는 서방과의 항구 협정에 대한 새로운 협정의 시작으로 해석되었다. 반면, 조슈 번의 급진파에게는 마침내 일본에 상주하는 모든 오랑캐들을 공격하고 몰아내는 것에 대한 승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실제로 그들은 이를 빠르게 실행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1863 년 4 월 6 일, 앨콕 경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권한을 대행했던 에드윈 세인트 존 닐(Edwin St John Neale)은 쇼군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일본이 20 일내로 영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 대가를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에도나 요코하마보다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사츠마 번에 훨씬 가까운 나가사키에 영국 해군 함대가 유사시 자국민 보호를 위해 주둔·대기하게 되면서 그곳에서의 군사적 긴장감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4 월 14 일 모리슨(Morrison)이 나가사키에서 주일 영국공사관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그는 자국민들에게 침착을 호소하면서도, 나가사키와 사츠마 근방에서 교전이 일어날 수 있으니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츠마 번주는 항구에 요원을 파견하여 영국 정부의 예상 대처에

대해 긴밀하게 조사하고 있으며, 그의 고위 관리 중 일부는

외국인―특히 글로버 상사(Glover & Co.)의 글로버―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 글로버라는 신사분은 저에게 사츠마 번주의 총사령관이 정보를

얻기 위해 나가사키에 갔다는 사실과 함께, 또 다른 고위직 요원이

그에게 중매자가 되어 원하는 액수의 돈을 유통해줄 것을

간청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불안한 나가사키 정세

당시 글로버는 사츠마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영국인이었다. 한번은 그가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처벌과 관련하여 사츠마의 살인범을 압박했을 때, 그는 ‘의논해봐야 소용 없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그는 4 월 29 일 이화양행의 메디슨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주민들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

상당수의 일본군이 … 만 입구에 있는 요새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5 월 6 일자 내용은 이하와 같다.

“… 번 주민 소식통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사츠마가 영국의 요구에

가장 분개하고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대행위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렵습니다.”

이화양행의 메디슨은 회신을 통해 나가사키에 있는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글로버는 5 월 16 일 다음과 같이 썼다.

“전쟁은 이제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며 주민들은 귀중품을 가지고

항구를 떠나고 있습니다. 영주는 국적에 따라 구별이 이루어질

것이라 말했지만 미국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은 그

말을 크게 신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송부해드린

노스차이나 헤럴드 & 레코더(North China Herald & Recorder)

발행본에 담겨 있습니다.”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한편 모리슨의 에도 파견은 글로버의 상하이 파견과 동일한 시점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거의 영사의 정보원에 가까웠다. 그는 5 월 10 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기차는 내전을 위해 놓여져 있고, 외세 문제는 내전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아흐레 뒤 밤이 되면 그 정착지는 도둑과 악인들이

득실대는 소굴이 될 겁니다.”

5 월 중순경, 당시 24 살이었던 글로버는 외국인 지역사회의 리더로서 상업회의소를 소집했다. 한편 영국의 최후통첩은 막부의 요청으로 그 달 말까지로 연장되었고, 이는 나가사키에 발목이 잡힌 사람들에게는 (숨 돌릴 여유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매우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왔다. 상업회의소에서 그들은 최소한 고비를 넘길 때까지만이라도 그들의 소유지를 버리고 항구에 있는 두 군함으로 피난해야 할지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결국 그들은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매일 저녁 가장 방어가 용이한 윌리엄 알트의 자택에 모여, 그곳에서 무장감시를 하기로 했다.

알트의 집에서 보낸 매일 밤들은 분명 신경이 곤두서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무장감시역은 다른 사람들이 자는 시간대에 교대로 번갈아 맡는 당번제에 따라 선택되었다. 고요하고 습한 여름 밤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은 암살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칼이나 검의 반짝임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또 그들은 매미의 울음소리 위에서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침이 밝으면 그들은 각자의 집과 직장으로 돌아가 가능한 한 아무렇지 않게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글로버의 경우 5 월 26 일 이화양행의 메디슨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무역상들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에서 자신들의 책과 서류들을 가지고 나와 그곳에서 외관상 상거래를 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강요당했다고 보고했다.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 정치적 문제로 장사는 거의 중단되었습니다. … 일본 측에 대한

추가 허용 기간이 내일 만료되어 31 일에 결과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모든 신문에서 내전이 거의 불가피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 일본 측에서는 적대적인 의도가 계속해서 엿보이고

있으며, 많은 수의 남자들이 밤낮으로 모래주머니, 포대, 총을

운반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모든 재산에

대한 목록을 만들어 제출했고, 영국 영사관에서 이를 정식으로 증명

받았습니다.”

폭풍의 눈

그렇게 나가사키에도 무더위와 소나기의 틈새로 6 월은 찾아왔고, 그들은 여전히 에도에서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유언비어들이 막 나돌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쇼군이 영국 해병과 리처드슨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는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소식이 나가사키에 전해졌다. 나가사키를 옥죄던 긴장과 압박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사츠마 문제가 남아있었음―그들은 여전히 살인범을 굴복시키지도 배상금을 지불하지도 않았다―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 가능성은 희미해졌다.

6 월 중순에 사츠마와 조슈의 요원들은 나가사키에 돌아왔고 사업은 다시 회복될 조짐을 보였다. 글로버 형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알트의 집에서 매일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글로버는 6 월 17 일 상하이로 편지를 썼다.

“… 이곳 현지인들의 혼란은 상당히 가라앉았고, 그들은 하루하루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시내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상인들은 외국인들과의 상거래를 재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막간은 단지 폭풍의 눈이 지나가는 찰나일 뿐이었다.

조슈 5 걸의 형성

한편 조슈 출신의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 운동의 핵심 지지자였다. 그들과 더불어 야마오 요조와 히사사카 겐지(久坂玄随)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조직한 영국 영사관 공격에 흔쾌히 가담해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 교토에서 군사 전략가였던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만난 이노우에 가오루는, 해군력의 강화와 함께 사람을 해외로 보내어 공부시키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결국 그는 그 스스로 서구의 해군 과학을 배우러 해외로 갈 것이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야마오 또한 이에 동참하게 된다. 그들은 서구로의 유학이야말로 진정한 양이를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조슈 번의 군사력 경제력 강화 및 근대화는 곧 일본 전체의 근대화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일본의 해안 방어력을

강화시킴으로써 국가의 잠재적 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큰 인상을 받은 번의 고위 간부들은 그들의 입장을 번주였던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와 그의 후계자 모리 사다히로(毛利定弘)에게 전달했다. 1863 년 6 월 4 일, 이노우에 가오루와 야마오는 해외 유학을 승인 받게 되었으며, 세 번째 구성원으로 20 세의 이노우에 마사루가 추가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서구 학문에 친숙했으며, 야마오와 이노우에 마사루는 항해술을 공부해왔었다.

셋은 곧바로 요코하마로 떠났고, 이전에도 만난 바 있었던 이화양행의 요코하마 지점장이었던 사무엘 고어(Samuel Gower)를 만나 통행수단과 비용에 대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고어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그는 결국 그들을 돕기로 했다. 바야흐로 6 월 말이었다. 이 단계에서 두 사람이 그들 무리에 합류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27 세의 엔도 긴스케. 그들 모두 해외로 가는 것을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열망했다. 그렇게 다섯 명의 용감한 젊은이들이 해군 과학을 배워오고자 영국을 행선지로 정한 것이다.

글로버, 조슈 5 걸에 협조하다

이 과정에서 글로버의 협조를 빼놓을 수 없다. 한편 위기의 5 월 조슈의 반막부군들이 나가사키에 있는 글로버에게 접근했다. 젊은 사무라이들이 서구로 탈출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로선 상당히 위험하고 무모한 요청이었음에도 글로버는 고민 없이 이를 승낙하였다. 그는 곧바로 이화양행 요코하마 지점을 통해 메디슨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자연스레 이는 이화양행 상하이와 런던 지점에서도 관여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조슈 5 걸의 탈출 작전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요코하마에 있는 그의 회사 직원인 웨이갈도 이 음모에 가담했고,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애버딘에 있는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막부가 엄격히 규정해둔 법에 대한 명백한 위반은 그 동안 글로버가 주고받은 회사간의 서신을 통해서는 논의되지 않았다.

글로버는 이 시기동안 가장 영리한 젊은 일본인들이 기술이나 다른 진보들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또 그는 외국에서 이들이 돌아오면 그 어떤 외국인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반막부군으로 하여금 개혁에 대한 최고의 옹호자가 되게끔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조슈 5 걸의 해외 파견에 대한 글로버의 관여는 이러한 그의 신념의 첫 번째이자 아마 가장 중요한 실천적인 사례였을 것이다. 그가 이것이 매우 위험한 사업이라는 사실을 일본의 어떤 외국인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임을 감안하면 그러했다.

글로버와 이토

이 시점에서 그가 다섯 명 중 이토 히로부미와 맺은 평생의 인연은 일련의 사건 진행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1863 년 글로버가 에도 공사의 책임 하에 있었던 조슈 번 사무라이 중 한 명이었던 이토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둘은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글로버에게 이토를 비롯한 조슈 세력과의 관계 유지가 중요했던 이유는 조슈 세력과 막부 세력의 전쟁이 예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그 과정에서 현대 무기를 팔아서 한몫을 챙기려는 글로버의 계산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토는 1841 년 10 월 중순에 현재의 야마구치 현(山口県)의 구마게(熊毛, 당시 조슈 번 영역 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 사무라이의 양아들이었고, 어린 이토는 당시 사무라이 계급은 아니었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청소년기에 그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막부에 반대하는 선지자이자 교사. 후에 암살 집단을 조직한 죄로 처형당함)이 주도한 존왕양이 테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토는 당시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서구와 막부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요시자의 제자 다카스기 신사쿠가 이끄는 젊은 조슈 사무라이들―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가오루 등―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그들 모두가 토마스 글로버와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총명한 젊은이들이었던 그들은, 글로버 덕분에 서구의 군사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가 조슈 5 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가장 유력한 이유는―이후 오입(誤入), 음주, 그리고 맹목적인 야욕에 대한 정당한 비난에도 불구하고―이미 뚜렷했던 그의 강인한 성격과 함께, 그가 영어를 공부해왔었고 1863 년 언어에서의 유능함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1863 년 당시 이토와 이노우에 가오루 모두 글로버와 마찬가지로 20 대 중반이었고, 이 위대한 탈출을 계획하면서 세 사람 모두 계획의 진척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하였다. 특히 이토는 2 년 전 영국 공사관에 대한 공격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다만 과거에 어떤 경우였든 간에 그들은 이제 외국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맹목적인 혐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슈 5 걸의 탈출은 글로버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러 사건들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이 다섯 명의 젊은 그들이 서구로 탈출했던 것은 일본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인간 무기’를 자처하다

그 무렵 이화양행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외국 무역회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1859 년 요코하마의 개항과 함께 요코하마 지점을 열었고, 일본에서 선도하는 무역회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들 지점을 ‘요코하마 제 1 번지’로 불렀다. 이러한 영국의 무역회사가 ‘오랑캐를 내쫓고자’ 하는 조슈 사무라이들의 불법 통행을 지원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가히 역설적이다. 이화양행이 그들을 돕기로 결정한 그 이튿날인 6 월 25 일 조슈는 천황의 반외세 정책을 실행에 옮겼고, 시모노세키(下関) 해협에서 미국 상선을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외로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다섯 사람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죽을 만반의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항해 하루 전인 6 월 26 일, 그들은 번 참모에게 서신을 남긴다.

“소생은 소생의 행동이 지닌 중대성을 모두 잘 알고 있사옵니다.

소생의 불법행위가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이 결단을 내리었습니다. 만약 초기의 의도를 이행하는데

실패한다면, 소생에게는 살아 돌아올 추호의 생각도 없습니다. …

소생은 겸허히 귀하의 양해와 용서를 구하옵나이다. 소생을 그저

귀하가 매수한 ‘인간 무기’로 생각해 주시옵소서.”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그들은 영국으로의 유학이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결정임을 역설하면서 양해를 간청했으며, 유학 자금으로 많은 돈을 빌린 것에 대해서도 사죄하였다. 그들은 ‘인간 무기’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가 서구의 기술을 구비한 사람으로 비춰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슈 5 걸에게 유학이란 외세를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배우려는, 생사의 기로에 선 여정과도 같았다. 즉 외국인을 내쫓기 위해 외국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조슈 5 걸의 영국유학과 귀국

조슈 5 걸의 밀항

그날 저녁 9 시경 ‘요코하마 제 1 번지’에 도착한 조슈 5 걸은 그들의 상투를 자르는 의식을 거행한 뒤, 고어가 그들을 위해 준비한 양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끔찍한 치욕이었다. 당시의 그들에게 있어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억누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출발할 무렵 이토는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의 정신을 남겼다.

“나 떠날 적에

사내로서 부끄럼 한가득이나

그리하여야만 하는 걸 알기에 천황과 조국을 위하여!”

그들은 막부 경찰에 발각될까 두려워 요코하마에 있는 글로버 대리인의 정원에 숨어야 했다. 그들의 상투는 잘려 있었고 머리는 서양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발각된다면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죽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후에 이토는 당시를 차분히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일본인 중 한 명이었으며, 1863 년에는

밀항하여 상하이로 탈출하는 것 외에는 외국으로 갈 방도가 없었다.

당시 일본은 외국과의 교류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고,

일본인들은 아직 나라를 떠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글로서 회상할 때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실제로는 되려 비참한 탈출이었다.

자정이 지나고 고어는 그들을 뒷문으로 내보내 이화양행의 첼스위크 증기선으로 향하는 자그마한 부속선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영국 선원의 제복을 빌려 입고 해안 경비병들을 지나치면서 외국어로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마치 외국어처럼 들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승선한 후에도 그들은 관리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석탄 창고에 몸을 숨긴 채 출발을 기다려야 했다.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승선을 앞두고 죽음을 각오한 송별회에도 불구하고, 내렸던 닻이 해외로 흔들리며 나아가는 선박 쪽으로 천천히 끌려 올라갈수록 그들의 두려움과 불안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선박이 외해에 안전하게 도달하기 전에 잡힐 경우 그들은 꼼짝없이 사형이라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토는 일본을 서둘러 뜨기 전에 조슈로부터 사무라이의 지위를 부여 받았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느꼈다. 노년에 와서도 그는 영국의 도움, 특히 그 중요했던 시기에 그를 일본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끔 밀항을 도와준 글로버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배는 6 월 27 일 동이 트기 전 출발했다. 조슈가 외국 선박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상하이에서 서구 문명에 눈뜨다

닷새 뒤 그들은 상하이에 도착했고, 급속히 발전한 근대 상업 중심지의 화려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상하이에 주둔한 외세의 해군력을 본 그들은 일본의 취약성을 절감하였다. 양이가 조국을 망칠 수 있는 실수이며, 해군 방어력을 강화하는 것이 일본에게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문물들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괄목할 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상하이 방문은 그들의 자신감에 위기를 가져왔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거대한 서양 기선들과 전함들이 중국 항구에서 움직이는 것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는 그러한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들의 양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화가 난 이토는 ‘어떻게 함선 몇 척만을 보고 쉽게 포기할 수 있느냐’며 대뜸 그에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이토 또한 그가 본 것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분명했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고어의 소개장을 가지고 이화양행 상하이 지점에 있는 윌리엄 케스위크를 만나러 갔다. 케스위크는 그들에게 여행의 목적을 물었으나 당시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던 이노우에 마사루는 ‘해군(navy)’을 말한다는 것을 잘못하여 ‘항해술(navigation)’을 공부하기 위해 간다고 답하고 말았다. 그들이 영국에 항해술을 배우러 가는 것으로 이해한 케스위크는 그들을 둘로 나누어 서로 다른 두 척의 런던행 배에 올라타게 하여, 각각의 선장에게 항해 도중 그들을 훈련시켜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는 페가수스 범선에, 다른 셋은 500 톤급의 화이트 애더 범선에 올라타게 되었다. 두 배 모두 중국에서 영국으로 차를 운송하는 대형 쾌속 돛배였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 문명과 만나다

이토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유럽으로 가는 페가수스의 긴 항해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견습 선원 취급을 받으며 먹을 수 없는 음식을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대접받은 그들은 뱃멀미와 설사에 시달렸고, 한때는 매우 약해진 이토가 바다에 자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가 그를 배의 측면에다 묶어야 했을 정도였다. 상하이를 떠난 지 4 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들은 런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항해 후반기에는 모든 면에서 상황이 덜 험난해졌고, 둘은 심지어 그들의 주머니 사전을 참조하여 페가수스의 선원들과 영어로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상하이에서부터의 긴 여정은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에게 있어 매우 힘든 역경과도 같았기에, 페가수스가 11 월 4 일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안도하며 매우 기뻐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한창의 영국 문명이었고, 이노우에는 충격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후 그는 한동안 무엇을 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3 층 내지 5 층짜리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기차들은 모든

방향에서 달리고 있었다. 공장에서 나온 시커먼 연기는 하늘로 피어

오르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왕래하고 있었다. 이렇게

번영하는 장면들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얼떨떨했고, 양이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증기기관차는 높은 벽돌 빌딩 사이로 요리조리 지나다녔고, 최신식 시설을 갖춘 최신식 공장 굴뚝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도시의 거리 속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눈 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본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는, ‘오랑캐를 쫓아낸다’는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불가피했던 초반의 혼란을 겪은 후, 그들은 런던 이화양행의 보살핌과 그에 따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들에게 상하이가 거대하고 경이롭게 보였다면, 런던의 항구와 도시는 (런던의 물가와 혼잡함, 그리고 의사소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새로운 발견과도 같았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펜처치 스트리트 역에 도착했고, 이후 미노리스 동부에 있는 아메리카 스퀘어 호텔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이노우에 마사루와 엔도, 야마오가 먼저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명은 그들보다 몇 주 뒤에 상하이를 떴지만 런던에는 나흘 먼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재회 당시 야마오는 이발소에 있었는데, 그들에게 그 이발 장면은 지극히 가관이었다.

메디슨과의 만남

며칠 후 페가수스 범선의 보어 선장은 그들을 이화양행의 상무이사였던 휴 메디슨(Hugh Matheson)에게로 데려갔다. 메디슨에게 영국에 있는 일본 젊은이들의 생활에 대한 조언과 지도를 부탁한 것으로 보였다. 메디슨은 그 일본인들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런던에 도착한 그(보어 선장)는 그의 젊은 승객들을 내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그들의 이름은 이토, 시데(이노우에 가오루),

야마오(야마오 요조), 노무란(이노우에 마사루), 그리고 엔도였다.

오직 노무란만이 그나마 서툰 영어를 조심스레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적절히 하숙시키고 그들의 교육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내가 윌리엄슨 박사―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UCL)의 화학 교수, 이후 영국협회 회장―로 하여금 그의 집에

그들을 들이도록 설득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교수님과의 상의

후 나는 그들이 영어를 배우고, 정말 좋은 교육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수업에 배치되도록 주선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윌리엄슨

박사의 조언은 매우 귀중했다. 나에게 있어 그들은 모든 것을

의미했다. ‘세탁은 어떻게 하나요?’ ‘신발은 어디서 살 수 있나요?’

그들은 시간을 부지런히 사용했다. 나는 그들을 자주 만났다.”

“이러한 점에서 윌리엄슨 박사의 조언은 매우 귀중했다.”는 메디슨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윌리엄슨은 메디슨에게 자신이 UCL 에서 직접 강의하면서 실천해 온 종합과학교육에 대한 견해를 바탕으로, 일본 학생들이 올바르게 교육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방법을 설명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UCL 에 공부하러 온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이라는 사실은 윌리엄슨에게 있어 상당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윌리엄슨이 평생 추구하던 목표는 바로 ‘다름 속의 하나됨(Unity out of difference)’이었는데, 그에게 있어 일본 학생들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메디슨은 UCL 의 고문 어거스트 프레보 경에게 일본 학생들의 멘토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간 윌리엄슨의 성격, 교육관,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적인 안목에 대해 크게 존경하고 있었던 프레보는 주저없이 윌리엄슨을 선택하였다.

윌리엄슨, 일본 학생들을 환영하다

1863 년 당시 39 살이었던 윌리엄슨은 그의 인생의 전성기에 있었다. 윌리엄슨과 그의 부인 엠마는 지난해 태어난 딸 앨리스를 키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또한 1863 년은 윌리엄슨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는데, 이는 비단 그 일본인 학생들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862 년 그는 왕립학회로부터 왕실훈장(Royal Medal)을 받았으며, 1863 년에는 영국 화학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런던화학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게다가 그는 뉴캐슬에서 열린 총회에서 영국협회의 화학부문 책임자로도 선정되었다. 다만 윌리엄슨은 그에게 주어진 권위를 남용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온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들은 교육계에서는 보기 드문 참된 스승을 영국에서 만난 것이다. 윌리엄슨은 그들 모두를 프로보스트 거리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살도록 불러들였다. 갓난아기 앨리스와 두 명의 하인이 있는 부부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그들은 이 외국인 방문객들을 기꺼이 환영하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수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고, 결국 메디슨은 이노우에 가오루와 야마오를 대학 앞 고어 가 103 번지에 있는 쿠퍼네 자택으로 보내게 되었다. 알렉산더 데이비스 쿠퍼(Alexander Davis Cooper)는 풍속화를 전문으로 하는 꽤 유명한 화가였으며, 그의 부친과 아내 역시 화가였다. 쿠퍼네로 거처를 옮긴 둘은 분명 그림들로 둘러싸인 예술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쿠퍼 가족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은 그들은 그 집을 매우 쾌적하고 편안하게 느꼈을 것이다.

UCL 의 학업 분위기에 적응하다

다섯 명의 일본인들이 UCL 에서 학업을 시작할 때가 왔다. 그들은 ‘비공식 학생’의 지위로 윌리엄슨이 속한 교양법학부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과목을 선택하고, 수강료를 납부해 강의를 들었다. UCL 자료실에 보관된 학생기록부에는 그들이 선택한 과목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863 년 이토, 야마오, 이노우에 마사루와 엔도는 분석화학 강의를 수강했는데, 이는 윌리엄슨의 담당 과목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학생기록부 상 이노우에 가오루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그가 수강료 납부 마감일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는 1864 학년도가 시작되기 전에 일본으로 돌아갔고, 남은 학생들은 분석화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864 년부터 2 년간 야마오는 화학과 토목공학을, 이노우에 마사루와 엔도는 화학과 지질학, 광물학을 추가로 수강하였다. 이듬해인 1866 년 야마오는 글래스고로, 엔도는 고향으로 떠나게 되자, UCL 에 혼자 남게 된 이노우에 마사루는 그 해 기존의 분석화학, 지질학, 광물학에 더해 영어, 불어, 수학, 수리물리학을 수강하였다. 그가 선택한 과목들은 교양교육에 대한 윌리엄슨의 생각을 그가 충실히 따르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3 년째 되던 해에 그는 이미 고등교육에 필수적인 파운데이션 과정을 완수하고 있었다.

윌리엄슨의 버크백 연구소는 일본 학생들의 대학 생활의 중심지였다. 연구소는 기초과학 과목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면서도 실험실에서의 분석화학 작업을 통해 기술과 응용력을 발달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윌리엄슨의 목표는 이론과 실제 양 측면에서 화학을 가르침으로써 과학 연구의 본질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후에 이토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낮에는 대학에서, 이른 아침과 저녁에는 집에서 공부를 했다.

우리는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윌리엄슨 선생님의 자택에서

하숙하며 그분께 수학을 배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생님께서는

낮에는 대학에 계시며 화학을 가르치셨고, 이른 아침과 저녁에는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집에서 수업을 해 주셨다. 또 낮에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것이 우리의 하루 일과였다.”

그들은 점차 UCL 의 자유로운 학업분위기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들은 실증주의적 접근법을 통해 혁신적인 교육을 경험하며 그 기본 원리들을 받아들였다.

‘서구의 본질’을 찾아서

수업 시간 사이마다 그들은 왕립 조폐국(Royal Mint)부터 박물관, 미술관 조선소와 공장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을 방문했다. 서양 문명이 작동하는 원리를 두 눈으로 직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양의 지식으로 ‘인간 무기’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학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몇 가지 기술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며, ‘서구의 본질’을 발견해내는 것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을 찾아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엠마 부인은 그들의 이해를 돕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윌리엄슨의 전기를 쓴 해리스와 브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또 그들은, 그들을 가족처럼 대해주고 영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어 교습에도 도움을 준

엠마 부인의 선한 영향을 받을 수 있어 행운이었다.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영어가 늘었고, 영국 산업과 상업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빠르게 습득했는데, 이는 그들 고국의 성공적인

발전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엠마 부인은 그들이 일상에서 서구 문명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그들을 배려해 주었다.

한편 윌리엄슨은 그들을 수많은 산업공장에 단순히 보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몸소 그들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실험실에서 여러 실험들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들을 공장으로 데려가 그러한 실험들이 실제로 응용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게끔 하였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과학의 원리를 이해시킨 다음, 현대 과학에 기반한 문화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름 속의 하나됨’이라는 그의 철학과 ‘다양한 문화를 가진 개인과 국가가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문명이 꽃핀다’는 신념이 그를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이러한 그의 가르침에 다섯 명의 일본 학생들은 매우 좋은 반응을 보였다.

1864 년 1 월 22 일, 그들은 스레드니들 거리의 영국은행에 방문하였다. 영국은행은 당시 유럽 최고의 조폐술을 자랑하고 있었고, 한번에 수천 장의 지폐를 찍어내는 고도의 기술 수준에 그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조슈 5 걸의 은행 방문 기록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데, 그들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인쇄된 천 파운드 지폐에 그들은 로마자와 한자 모두를 사용하여 그들의 이름을 적었다. 이는 특별한 손님이 방문할 때에만 진행되는 것이었다.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새로운 일본을 위하여

다섯 사람이 영국은행을 방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휴 메디슨은 지난해 8 월 일본에서 영국과 사츠마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는 중대한 소식을 들고 그들을 방문했다. 1863 년에 발발한 사츠에이 전쟁(薩英戦争)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외국 선박들에 대한 조슈의 공격과 그에 따른 반격, 그리고 사츠마에서의 전쟁에 대해 보도한 영국 언론을 통해 해당 사건을 이미 조금은 들었을 것이다.

그날을 회상하며 이노우에 가오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슈에 대한 보복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매우 우울해졌다. 나는 이토와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아무리 우리가 해군에 대한 전문지식을 얻는다 한들

조국이 멸망해버린다면 그런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우리 중

둘은 돌아가 다이묘와 다른 관계자들을 만나 유럽의 상황을

설명하고, 방침을 선회하여 ‘존왕개국(尊王開国)’ 정책을

채택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이토는 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나와 이토는 나머지 셋을 영국에 남겨두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서구 문화와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일본이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를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느낀 위기감은 그로 하여금 ‘부국강병’이라는 표어와 함께 개국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토는 영국에서의 시간을 회상하며 ‘유럽 각국이 부현제(府県制)로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일본의 봉건제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일본은 통일국가로 생각하고 있었고, 번으로 분단된 국가를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에 대한 그들만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결국 다섯 학생은, 심사숙고 끝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를 일본으로 돌려보내 외세의 공격으로부터 일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메디슨에게 보냈다. 주변에서는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기엔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며 그들을 만류했으나, 그들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머지 셋도 함께 일본에 돌아가고자 했으나, 이노우에 가오루는 ‘인간 무기’로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초심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며 그들이 영국에 남도록 타일렀다. 그렇게 1864 년 4 월 말경,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는 런던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영국 외교관에게 유학의 본 목적을 숨기다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이들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6 월 말, 이노우에 마사루, 엔도, 야마오 등 남은 세 명은 영국 외교관 레지널드 러셀(Reginald Russell)을 만났다. 그는 3 년 전인 1861 년 6 월 로렌스 올리펀트 주일 영국공사관의 제 1 서기관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2 년간 일본어를 배운 바 있다. 영국·미국·프랑스·네덜란드 연합군이 시모노세키의 포대를 공격할 계획을 알고 있던 러셀은 조슈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인 유학생들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존 러셀 경(Lord John Russell)은 주일 영국 대사였던 러더퍼드 앨콕 경이 작성한 시모노세키 군사원정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레지널드 러셀에 따르면 학생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주인(즉 조슈의 다이묘 모리)은 유럽의 공격에 대한

방책으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먼저 당시 올바른

생각을 가진 모든 일본인들이 혐오했던 다이쿤(大君, 에도 시대에

외국에 대하여 사용한 쇼군의 다른 이름)의 ‘부정한 정부’를

전복시키기를 바랐다. 또한 외국인의 추방이 아닌, 다이쿤이

오랫동안 빼앗아온 미카도(帝, 천황)의 권력 복원을 통해서 나라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다이쿤 정부는 그들을 포함한

모든 반정부 인사들의 목표물이자 타도의 대상이었다. 천황과 다른 많은 강력한 다이묘들을 포함한 국민 대다수는, 우선 ‘서구 열강’들의 힘에 다이쿤을 휘말리게 만듦으로써 그 권력을 약화시킨 뒤 일본 국민들이 정당한 주권자에게로 그 권력을 복원시키기를 희망했다. 둘째로 그들은 외국인들의 눈을 가리던 베일을 걷어내어, 그들이 다이쿤과 맺을 수 있는 그 어떤 조약도 (진정한 황제에 의해 승인·인정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국가 전체의 국민 감정에도 반하는 것이므로) 구속력이 없거나 어떤 방식으로도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들은 외국의 열강들이 모든 국민이 인정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황제인 미카도와 직접 조약을 맺기를 희망했으며, 이로 인해 외교통상의 이익이 모든 계층과 당사자들에게로 확장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들은 현재 다이쿤의 ‘부정한 정부’가 이 모든 이점들을 독차지했다고 말했다.

(중략) 그들은 만일 그(황제)가 외국에 대해 더 많이 파악하게 된다면―즉 그들이 교토에 있는 천황에게 그가 독자적으로 외국과의 조약을 맺기 용이해질 것이라고 말한다면―모든 일본 국민들은 그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 또 그들은 미카도와의 조약의 이점은 외국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으며, 일본인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이로 인해 내전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간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다이쿤 관료들이 독점해왔던 통상(通商)의 혜택을 일본 내 모든

계층이 동등하게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레지널드 러셀과 일본 학생들은 두 번의 만남을 가졌고, 영어와 일어를 모두 사용해가며 대화를 나눴다. 조슈 5 걸의 방영(訪英) 목적을 묻는 러셀의 질문에 그들은 ‘응용 과학’과 함께 ‘조국발전에 유용한 기술’을 연구하고 유럽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또 그들 중 두 명이 돌아간 이유에 대해 ‘그들이 경험한 모든 것을 보고하고 더 많은 학생들을 유럽으로 보낼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가 일본으로 돌아간 진짜 이유를 숨긴 것이다. 아마 그들은 더 많은 양이파가 유럽 문명을 경험한다면 정말로 일본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막부가 아닌 황궁이 외국 열강과의 조약을 체결하도록 설득하여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를 원했다.

러셀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해군 전문지식’보다는 ‘응용 과학’과 ‘기술’을 여러 차례 강조했고, UCL 에서의 6 개월 동안에는 ‘일본의 근대화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에 더욱 명확하게 접근하게 되었다고도 역설했다. UCL 에서의 우수한 성과는 그들의 깊이 있는 헌신을 입증해 주었다. 실제로 1864 학년도 말 응용화학 과목에서 야마오와 엔도는 각각 전체 4 등과 5 등을 차지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증을 수여받았다. 귀국한 두 사람을 포함한 이들 다섯 명의 마음 속에는 일본 통합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있었다.

나가며

조슈 5 걸의 영국유학은 일본의 발전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했던 정세와 함께 막부가 해외로의 이동을 절대적으로 금했던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해외로 몸소 찾아가서 배우겠다는 결심은 목숨을 걸 정도의 각오가 아니고서는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당시 이토를 포함한 조슈 5 걸은 확고한 존왕양이의 목적 하나만을 가지고 ‘인간 무기’가 되어 ‘서양의 오랑캐를 몰아내기 위해 서양을 배운다’는 역설적인 다짐을 한 것이다. 특히 출항 직전 눈물을 흘리며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는 과정은 성공적인 밀항의 조건이기 이전에 그들이 살아온 생활 양식과 전통적인 정체성을 스스로 죽이는 치욕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랬기에 오히려 그들이 조국을 위한다는 가치관만큼은 변치 않는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겠다.

이러한 조슈 5 걸을 향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그러한 다짐을 할 수 있도록 깨우쳐준 군사 전략가 사쿠마 쇼잔과, 그들에게 유학 자금을 대준 조슈 번 정부의 유력자 스후 3. 상투를 자른 이토,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_글로버 가든 마사노스케(周布正之助) 등 내부적인 도움이 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실질적으로 영국으로의 밀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요코하마 제 1 번가의 사무엘 고어, 이화양행에 연락하여 그들을 받아줄 수 있도록 하며 막부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상인 글로버의 역할 또한 외부적인 도움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내외부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영국에 도착한 데 이어 그곳에서도 그들이 잘 적응하며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해 준 알렉산더 윌리엄슨 가족, 그들의 생활을 꾸준히 책임진 이화양행의 휴 메디슨과 알렉산더 쿠퍼 가족의 도움도 필수불가결했다. 특히 윌리엄슨과 쿠퍼의 숙식 지원은 조슈 5 걸 이후 사츠마의 19 인 등 영국의 문물을 배우러 추가로 파견된 일본 유학생들이 안정적으로 지내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들 중 어느 한 명의 도움이라도 없었으면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조슈 5 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위험했던 초기 출발 단계에서 영국과 일본의 은밀한 가교 역할을 했던 글로버의 도움은 가히 결정적이었다 할 것이다.

이토를 포함한 조슈 5 걸과 글로버의 심상에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여러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존왕양이를 실천하겠다는 목적을 지닌 초기의 심상에는 사쿠마 쇼잔의 주장을 통해 서양을 배우겠다는 수단이 추가되었다. 또 양이론을 목적으로 한 심상은 상하이와 런던에 밴 서구 문명 앞에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접한 서양 문화를 통해 일본의 개국과 폐번치헌(廃藩置県) 등에 대한 생각을 새로이 가지게 되며 그들은 변화하였고, ‘인간 무기’로서 귀국하게 되었다.

글로버의 경우 또한 멘토 멕켄지와 함께 상업으로 돈을 벌겠다는 목적의 초기의 심상에서,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 속 막부와 반막부 사이를 중개하며 그 사이에서 무기를 통해 돈을 벌겠다는 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가사키에 주재한 반막부 번 상인들과의 통상을 무조건적으로 막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발전하여 반막부 세력에 대한 은밀한 지원자 역할을 자처하고자 하는 의도로 변하게 되었다.

결국 두 행위자의 만남은 각자 변화의 과정 속에 있었던 심상에 서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결국 조슈 5 걸의 성공적인 파견과 일본의 새로운 새벽 메이지 유신의 성공적인 발판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다. 상투를 자른 이토와 사무라이가 된 글로버의 만남은 19 세기 영일 관계 속 신비한 양상을 띠며 발전한 역사의 큰 일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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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好徹. 2000. 史傳 伊藤博文. 東京:徳間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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