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미래의 천하질서를 엿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자금성 · 인세원 · 조지워싱턴대학교
들어가며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궁궐, 자금성의 화려함 뒤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의 희로애락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조선의 여인도 예외는 아 니었다. 고려 시대부터 수많은 여인들이 ‘공녀’라는 명칭 하에 중 국으로 보내졌고, 이러한 행렬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의 공주가 청나라로 보내진 사례는 의순공주의 사례가 유일한 데, 그녀가 청나라로 보내졌다 귀국하게 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 로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종친의 딸이었던 의순공주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전역에 반청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청나라 섭정왕 도 르곤이 조선과 혼인 관계를 요구하자 오직 청나라에 보내질 목적 으로 ‘공주’가 되어 도르곤과 혼인한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도르 곤이 사망하고 그가 역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재혼상대마저 사망한 뒤 조선에 돌아오게 되는데, 대신들이 조정과 합의되지 않은 일이 1. 17 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_자금성 라며 항의하는 등 고국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몇 년 후, 의순공 주는 28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의순공주의 굴곡진 삶은 드라마, 소설 속 등장인물 의 모티브로 활용되었으며 학계에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된 바 있다. 1960년대에 이미 최소자는 “청대 한 중통혼고 - 의순공주에 대하여 -"에서 의순공주와 섭정왕 도르곤의 통혼 성립 과정과 절차를 상세히 분석했다.(최소자 1968, 17-30) 이후 김선혜는 청과 조선의 혼인이 함축하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도르곤의 통혼 정책을 이후 실 질적 공납과 군사적 목적 위주로 시행되었던 청나라의 조공체제가 정 착하기 이전 과도기적 시기에 행해진 외교정책으로 설명했다.(김선혜 2014, 231-265) 한편 이종묵은 “중대 황실로 간 여인을 노래한 궁사” 에서 의순공주를 ‘불행한 여인’으로 설명하며 그녀를 가엾이 여기 는 내용의 궁사를 전하기도 했다.(이종묵 2011, 197-230) 이 같은 의순 공주의 타자화를 지적하는 최신 연구로는 정해은의 “병자호란의 상흔과 ‘의순공주’의 탄생” 이 있는데, 정해은은 의순공주가 가짜 공주로 청에 보내지게 된 배경과 귀환 과정, 그리고 후대인식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 인간으로서 ‘이애숙’의 목소리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보였다.(정해은 2020, 57-87) 이와 같이 의순공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제한된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모두 청 혹은 조선의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정치적 상황 혹은 이해관계에 대한 분석에 그쳤다는 한계가 있다.
효종 대의 조청 관계는 병자호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양국 관계가 정착되어가던 시점으로 이후의 조청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초석이 된다. 따라서 본고는 국제정치학 적 관점에서 청과 조선 양측의 상황을 모두 고려하여 당시 동아시 아 국제질서 속에서의 조청 관계를 파악하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 이 의순공주가 자금성에 보내졌다 돌아온 배경에 어떤 영향을 미 쳤는지 상호 유기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가 의순공주 개인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 했다. 의순공주의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상과 국제관 계의 함축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희생되었던 개인의 비극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의 복합적 대외정책과 조선에의 적용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청나라의 요구에는 당시 국제정치 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장에서는 먼저 거시적인 관점에서 당시 청나라의 상황과 대외관계를 살펴보고, 이러한 대외정책이 조선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검토하도록 하겠 다.
중국의 천하 질서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과 학설이 있지만, 본고에서는 하영선의 예치, 회유, 기미, 정 벌 네 가지 원칙으로 중국 천하 질서를 복합적으로 바라보는 분석 틀을 차용하도록 하겠다.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는 이 네 가지 원 1. 17 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_자금성 칙의 복합적 작용을 기반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가령 예치는 사 대자소의 예를 지키는 것을 바탕으로 다스리는 관계이며, 회유는 예치에 비해 명분적 요소는 약하나 기미에 비해서는 비강제적 요 소가 강한 오늘날의 유연 외교와 비슷한 외교 방식이었다. 또한 기미는 군사적으로 정벌하지는 않지만 외교적으로 화친하지도 않 으면서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이며 정벌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보다 강제적인 통치방식이다.(하영선 2019, 342-348) 한편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있어서는 청나라와 조선과의 관계에서 이 네 원칙 의 복합성이 두드러졌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하기 전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중국과 한국은 예치를 기반으로 한 관계를 안정적 으로 이어왔는데, 정복 왕조인 만주족을 지배세력으로 하는 청나 라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관계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1636년 12월 발발한 병자호란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회자 되는 조선의 항복으로 끝난 직후 조선의 항복조건으로 맺어진 ‘정 축화약’에는 조선이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명에 대해 시행했던 조공 의례를 청에 시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막대한 공물뿐만 아니라 왕세자와 왕자, 대신의 자제 를 인질로 삼는 등 강압적인 정책으로 조선을 압박했다. 그러던 중 1644년 청군이 북경에 입성하고 명의 수도였던 북경으로 천도 하자, ‘대사(大事)’를 달성한 청은 조선에 대한 강압 정책도 완화하 기 시작한다.(홍성구 2017, 158) 일례로 순치 연간에는 1645년, 1647 년, 1651년, 1655년 등 4차례에 걸쳐 세폐 감면 조치가 있었고, 이 후에도 추가 감면이 이루어져 최종적으로 세폐액이 1637년 정축 화약 당시의 1/3 수준으로 감면되었다. 이외에도 순치 연간에 칙 사가 조선에 갈 때의 절차, 의례, 비용 등을 간소화할 수 있도록 하고, 칙사에게 제공하는 예물의 액수도 제한하여 부담을 줄이는 조치가 취해졌다.(홍성구 2017, 160) 이는 청 제국이 주변국과의 관계 를 안정화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즉, 청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강제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벌에서 표면상으로는 예치의 성 격을 띠지만 간접적인 통치라는 점에서는 기미의 방식에 ‘압박’의 요소가 가미된 형태로 전환했는데, 이 과정에서 네 가지 원칙이 복합적으로 작용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더 이상 일방적 정벌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청은 조선에 대한 의심과 압박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시기 청이 조 선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는 조선왕조실록의 효종 대 기사를 통 해서 확인 가능하다. 가령 청 사신은 칙서를 통해 조선이 성을 수 리하거나 군사를 모으고 병기를 정돈하는 것이 왜국 때문이 아니 라 청과 문제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효종실 록 5권, 효종 1년 8월 27일) 또한 목화가 흉작이라는 이유로 무명베를 대신하여 쌀을 바친다고 한 것이나, 토산품을 무역하고 싶다는 청 의 요구를 거절한 것에 대해 성의와 신의가 없다고 힐책하는 등 혼인을 요구하기 전부터 조선의 신의에 대한 문제 제기를 지속해 왔다.(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2월 8일) 강압 정책이 점차 완화되었다고 는 하지만 병자호란이 발발한 후 청은 한동안 조선을 감시 및 감 1. 17 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_자금성 독하는 것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조선이 변심할 수 있다 는 생각으로 그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서 도르곤이 조선과 혼인관계를 맺고자 한 것은 조선을 속박하기 위한 방책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조선에서 신붓감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청의 섭정왕 도 르곤은 중사(中使) 나업(羅嶪)이 북경에 왔을 때 혼인 의사를 전달 하는데, 나업이 중간에 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먼저 보내지 않다가 청사신과 동행하여 서울 근처에 도달한 뒤에야 그를 보내 준다. 이는 조선의 척화론자들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이때 나업이 효종에게 전한 내용에 따르면 섭정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구왕(九王)이 부지(夫之)를 【 부지는 바로 고국씨(古國氏)
의 칭호이다.】 갓 잃어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의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우리들이 모두 안다. 만일 혼인이 성
사되면 여러 신하가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며, 대국에서도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다만 국왕이 필시 독단하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물을텐데, 신하들은 반드시 「그들과 어떻게 혼인
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먼저 알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5일)
즉, 청은 조선의 사신들이 청과의 혼인관계를 반대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조선의 대청 인식이 부정적이라는 것 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순공주가 청으로 간 이후 섭정왕이 보여준 태도 변화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청이 압박 정책의 일환으 로 혼인관계를 요구했음을 보여준다. 가령 의순공주가 청에 보내 진 뒤 얼마 되지 않아서는 섭정왕이 청사(淸使)를 통해 저채(紵綵) 6백 필, 적금(赤金) 5백 냥, 은 1만 냥과 함께 의순공주를 직접 맞 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을 표하면서 “왕께서 업신여긴다고 생 각하실까 두렵소. 이에 특히 나의 뜻을 알리니 왕께서는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라는 말을 전한다.(효종실록 4권, 효종 1년 5월 12일) 이 는 형식상의 언사였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표면적으로 ‘예’를 차린 청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섭정왕은 태도를 바꿔 공주가 아 름답지 않고 시녀도 못생긴 것은 조선이 이들을 불성실하게 선발 했기 때문이라며 조선의 사신들을 힐책한다.(효종실록 5권, 효종 1년 8 월 27일) 원치 않은 혼인으로 타국에 간 데 이어 섭정왕이 공주의 외모를 문제 삼은 것을 의순공주가 알게 되었다면 그 비참함은 차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국가 대 국가의 차원에서도 적어도 한 나라의 공주의 신분을 가진 여인의 외모를 문제 삼아 불성실함 을 논한다는 것 자체도 ‘예’와는 거리가 먼 행동이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예를 저버리는 모습에서 청나라가 혼인을 통해 예치의 차원에서 조선과 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새 로운 관계 구축 과정에서 조선을 압박할 수단을 추가한 것임을 추 1. 17 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_자금성 론할 수 있다. 즉, 청 역시 조선이 자신들을 사대자소의 예를 바탕 으로 섬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혼인과 같은 상 징적인 관계를 통해 조선을 압박하고 신의를 증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다만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결혼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아 사망하고 청의 혼인 정책이 정비되면서 더 이상 혼인이 청이 조선 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후 청국의 혼인 정책을 살펴보면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를 요구한 것은 일종의 과도기적 정책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 대 중국 본토를 점령한 만주족에 있어 황실의 여인들의 혈 통은 만주족의 종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일정 부분 중요 한 역할을 하였다. 황실의 여인은 크게 황후와 후궁으로 이루어진 황제의 배우자 그룹과 아이신교로(Aisin Gioro)의 딸들로 분류될 수 있었는데, 강희제 이후 황제의 배우자 그룹은 팔기제 출신의 여인 들만이 될 수 있었다.(Walthall 2008, 137) 이러한 황실의 혼인 정책 은 의순공주의 귀환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개윤이 청 나라 사신으로 가서 딸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청 세조는 다음과 같은 칙서를 보낸다.
“배신(陪臣)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이 과부로 집에
살고 있으면서 부모 형제를 멀리 이별하였으니, 내가 측은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 지금 개윤이 공물을 바치느라 조정에 와
서 그 딸을 보고자 주청하니, 전부터 가엾이 여긴 나의 뜻이 더 욱 절실해졌다. 이에 특별히 태자 태보(太子太保)의정대신(議政
大臣) 합집둔(哈什屯)을 보내 귀국하게 하고 친척에 의지하여 자
수(自守)토록 하니, 왕은 그리 알라”
청 세조가 의순공주의 귀국을 선뜻 허락해 준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먼저 도르곤의 흔적을 지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도르곤이 사망한 뒤 1651년에 친정을 시작한 세조(순치제)는 도르곤이 생전 모반을 꾀했다는 이 유로 역적으로 단죄하여 부관참시하고 그의 지위와 재산, 식구를 몰수한다. 이때 청 측의 기록에 따르면 의순공주는 누루하치의 손 자 박락에게 보내졌는데, 박락마저 1652년 사망하게 된다. 이후 역적이 된 도르곤의 전 부인이면서도 명목상 조선의 공주였던 의 순공주를 어떻게 처우해야 할지의 문제는 청 세조의 입장에서도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이다.(정해은 2020, 77) 두 번째로는 앞서 언급 했든 이후 만주족 종족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황실의 혼인 정책이 자리 잡았는데, 때문에 청 세조 시기 이미 청나라가 더 이상 조선 과 ‘결혼 동맹’을 맺을 계획이 없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더 이상 외교적 압박 카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의순공주의 위치는 더 욱 애매 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마침 의순공주의 친부 인 이개윤이 사신으로 와 공주를 보기를 청하자 청 세조는 선뜻 의순공주의 귀국을 허락한 것이다. 따라서, 물론 청 세조가 인간적 으로 의순공주에게 측은지심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의순 공주의 1. 17 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_자금성 귀국을 허락한 결정적 요인에는 실리적 계산이 우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반청 인식과 현실적 한계
주지하듯이,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반청정서는 지배적이 었다. 비록 내실은 없었지만 북벌론이 등장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조선은 심상과 물상의 괴리 속에서 겉으로는 청을 자극하지 않 으려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반청정서를 여과 없이 드 러냈다. 특히 의순공주의 사례는 민중과 지배세력 모두에 팽배했 던 반청인식과 그럼에도 저항할 수 없었던 조선의 사정을 단적으 로 드러내주는 예이다.
의순공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금오동 천보산에 있 는 정주당터와 족두리 산소에 얽힌 일화는 병자호란 이후 상처 입 은 민중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족두리 산소는 의순공주가 청나라 로 가던 도중 평안도 정주에 다다르자 ‘짐승보다 못한 오랑캐 놈 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가마를 멈추고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는데, 공주의 주검은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건져 올려 천보산에 의관장을 하게 됐다고 하여 지어진 산소의 이름이다. 또한 정주당터는 의순공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가 멀리 북쪽 정주당 땅만 바라보며 딸을 찾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
앞서 언급했듯 정사는 족두리 산소와 정주당 터에 얽힌 설화 와 다르게 흘러간다. 의순공주는 청나라에 도착하여 섭정왕과 혼 인을 했으며, 과부가 되어 조선으로 다시 귀국한 뒤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일화가 남아 있는 것은 의순공주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민중이 알지 못했을 정도로 의순공주 의 귀국 과정과 이후의 삶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거나 혹 은 민중이 알면서도 애써 후대에 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두 가지 일화는 조선의 공주가 청으로 시집을 간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당시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 다. 그러나 의순공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살아 있음에도 존재 를 부정당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의순공주’는 조청관계의 구 조적인 갈등 속에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지워진 것이다.
민중들이 이처럼 청나라로 시집간 의순공주의 존재를 부 정하는 방식으로 심리적 보상을 받은 반면, 조선의 지배세력은 표면적으로는 청의 혼인 요구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며 실제로 공주를 보내는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중사(中 使) 나업(羅嶪)을 통해 섭정왕 도르곤의 혼인 의지를 알게 되는데, 이때 나업은 효종에게 도르곤의 혼인 요구를 전하면서 “혼인에 관 해서는 신이 응답하기를 ‘현재 있는 공주는 2살이다.’고 하니, ‘공 1 의정부시, 의순공주와 정주당터.
https://www.ui4u.go.kr/tour/contents.do?mId=0305040000 1. 17 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_자금성 주의 나이가 어리면 종실(宗室) 가운데 적합한 자로 선택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청나라에서의 상황을 보고한다. 그 러나 현재 있는 공주가 2살이라는 나업의 발언은 거짓이었다. 효 종은 인선왕후 사이에 딸 여섯과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1950년 당시 첫째 숙신공주는 일찍 사망하였고 둘째 숙안공주가 15살, 셋 째 숙명공주가 11살, 넷째 숙휘공주가 9살, 다섯째 숙정공주가 6 살, 막내 숙경공주가 3살이었다.(정해은 2020, 68) 둘째 숙안공주는 이미 혼인하였지만, 현재 있는 공주가 2살이라는 나업의 말은 명 백히 거짓이었던 것이다. 사신이었던 나업이 조정의 뜻에 반하여 독단적으로 조선 왕실의 계보를 거짓으로 고했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청국에 대한 조선의 만연한 반감을 숙지하고 있던 그가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은 도르곤의 요구를 거절할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특히 조선에 대한 청의 의심과 힐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조정은 도르곤의 사돈 관계 요구를 수락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청에 보낼 여인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청의 입장에서는 기만적일 수 있는 공주 선발 과정이 이처럼 가능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관 료들이 친청 성향을 띠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결 과적으로 금림군 이개윤이 자신의 딸을 효종의 양녀로 삼을 것을 자원하면서 그의 딸 이애숙은 청의 요구가 있고 한 달이 안 되어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의 삶을 살게 된다. 친아버지 이개윤은 그 대가로 가덕(嘉德)의 품계가 더해지고, 비단과 미두를 후하게 하 사받는다.(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25일) 얼마 후 애숙의 오빠였던 이준과 이수도 각자 장릉 참봉과 전설사 별검에 봉해진다.(효종실록 4권, 효종 1년 5월 1일) 당시로써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청나라 에 딸을 시집 보낸 대가였다. 인간적으로는 비정한 아버지로 보일 수 있더라도, 효종의 입장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종친의 딸을 보냄 으로써, 외교적 실리를 취할 수 있게 해준 충신이었을 것이다. 효 종은 이로써 청이 조선을 대하는 태도가 누그러질 것을 기대하기 도 하였다.(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9일)
이처럼 의순공주를 보낸 것은 반청인식이 현실적 한계에서 부딪힌 상황에서 실리를 추구한 결정이었기에, 도르곤이 사망하고 막상 의순공주가 기대했던 효과를 가져오지 않자 그녀는 외면 받 게 된다. 심지어 조선의 지배층은 의순공주가 순치제의 허락 하에 조선으로 돌아오자, 청나라에 가서 조정과 상의 없이 딸을 돌려달 라고 청한 이개윤을 삭탈관작 할 것을 청한다. 가령 대사간 조한 영과 사간 심세정은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간 것은 조정의 명령 때문이었으니 의순 공주가 돌아오는 것도 또한 반드시 조정의 명 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라며 이개윤의 치죄를 청한다.(효종실록 16권, 효종 7년 윤5월 10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보내진 것은 민중에 게나 지배층에게나 비통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귀환이 환영 받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청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은 ‘예 치’가 아닌 외교적 난제였으며, 도르곤의 요구에 순응하여 신붓감 1. 17 세기 조청관계와 의순공주의 비극_자금성 을 찾아낸 것도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에서 실리를 추구한 행위였던 것이다.
결론
의순공주가 청나라에 보내지고 돌아오게 된 배경에는 명나라가 멸하고 청나라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변동과 조율 과정을 겪고 있었던 17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있었다. 즉, 17세기 중반 이후 청과 조선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청나라가 조선이 명에 시 행했던 의례를 똑같이 요구하면서 ‘예치’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적어 도 효종대까지 그 실상은 정벌에서 기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 였다고 정의 내릴 수 있다.
본고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청나라와 조선의 각각의 관점에서 이 시기를 조망해 보고 동시에 의순공주의 삶을 논의하면서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조청관계를 분석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청나라의 관 점에서 섭정왕 도르곤과 청 세조가 어떻게 국가의 기반을 정비해 갔는지를 검토해 보면서 이러한 상황들이 의순공주의 혼인 및 귀국 과정과 어떠한 인과관계를 갖는지 살펴보았다. 그 다음으로는 조 선의 대청인식을 조선왕조실록과 의순공주와 관련된 설화를 통해 확인해 보았다. 이를 통해 의순공주가 보내지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대청인식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해석하고, 당시 지 배층 뿐만 아니라 그 시대 민중에 만연했던 반청정서를 재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역시 표면적으로만 예치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의 비극은 종종 사회현상과 그 시류의 흐름에 기인할 수 있게 되기도 하지만, 의순공주의 삶이 특히 우리에게 있어서 주목 받게 되는 이유는, 그녀의 삶의 굴곡이 병자호란 이후 동아시아 국 제정치 상황하에서 조선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애숙은 '의순공주'가 되는 순간부터 청나라와 조선 의 국제정치학적 이해관계에 의해 삶 자체가 완전히 좌지우지되었 고, 우여곡절 끝에 고국에 돌아와서 조차 오히려 그녀의 존재를 부 정하는 시대적 사회적 분위기의 압박 속에서 28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규정했던 ‘예’는 청나라가 명나 라의 자리를 대신한 이후 조청관계에 부재하였지만, 의순공주 개인 의 삶에 있어서도 조선 혹은 청이 진정으로 ‘예’를 갖추어 준 흔적 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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