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조정 시기 자금성의 선통제 부의와 그의 12일 간의 꿈 -북경정변과 선통복벽을 바탕으로- 김민정
시간을 거슬러 동아시아의 역사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자금성 ·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 머리말
1912년 2월 12일, 융유태후는 《청실우대조건》을 받아들이고 《퇴위조서》를 반포하였고, 이로써 청나라는 종언을 맞았습니다. 《청실우대조건》에는 대청황제가 퇴위한 뒤에 취할 대우조건에 대해 적혀있습니다. 이 공문에 이르기를, “청나라의 황제는 퇴위 후에도 존호가 변하지 않으며, 중화민국 정부는 청 황제를 외국 군주의 예로서 대우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민주제가 군주제를 대체하고 새로운 공화정 정부의 민국 시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혁명”의 수단을 통해 약 2000년 간 지속되어 온 절대 왕조의 붕괴를 성공시켰음에도 이전의 대청제국 황제를 ‘외국 군주’로서 예를 갖추어 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또한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부의는 퇴위 후에도 자금성에서 거주할 수 있었으며 시위인(侍衛人)도 계속 고용할 수 있었었습니다. 게다가 위의 우대 조건에 따라 왕공작위는 예전과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자금성은 ‘나라 안의 나라’였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황제 중심의 중국적 천하질서가 20세기 민국정부에서도 유효했다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나라 안의 나라’는 잔여 봉건 세력들의 ‘봉건 왕조의 복벽’이라는 꿈을 더욱 현실화했습니다. 1917년 장훈은 3000명의 군사(‘변자군’이라고도 한다)를 이끌고 북경에 진입합니다. 장훈과 그의 군사들은 부의를 다시 용상에 올려놓고 12일 동안 이마를 조아리며 만세를 부르며 부의의 복위를 성공시킵니다. 그러나 여원홍과 단기서, 풍국장 등은 선통제의 복벽을 반대하였습니다. 단기서는 역적토벌군을 조직하고 장훈에 대한 토벌을 나섰습니다. 결국 부의의 스승과 아버지는 퇴위조서를 대리 작성하였고 부의복벽이라는 촌극은 막을 내렸습니다. 공화국 정부임에도 《황실우대조건》을 통해 절대 왕권이 계속 유지되고 복벽을 통해 절대 왕조로의 회귀를 꿈꿨던 중국 역사를 되돌아보며 《황실우대조건》의 ‘원동력’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후 부의가 신해혁명(1912)이 아닌 북경정변(1924)으로 퇴위했던 이유를 분석해보겠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져왔습니다. 2. 소조정 시기 자금성의 선통제 부의와 그의 12일 간의 꿈 -북경정변과 선통복벽을 바탕으로- _자금성
➀ 신해혁명 이후 청 왕조의 붕괴에도 《청대퇴위 우대조건》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➁ 민국 시대가 들어섰음에도 장훈(장쉰)의 병변을 통해 선통제가 복위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③ 부의가 1912년 신해혁명 직후가 아닌 1924년 북경정변으로 출궁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신해혁명 이후의 민국정부에도 여전히 황제 중심의 중국적 천하질서가 유효했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주나라(周) 시기에 형성된 중국적 천하질서가 자금성 안의 또 다른 나라 안에서 살아남았고 임시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가 절대왕조에서의 절대 권력을 획득하고자 했던 야망이 합쳐져 《청대퇴위 우대조건》과 장훈복벽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신해혁명으로 얻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근대적 혁신에 적응하지 못해 선통제는 자금성에서 왕의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민국시대를 맞이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황제제도를 폐지하였으나, 어떻게 선통제가 황궁(자금성)에서 계속 그의 권위를 누릴 수 있었는지, 그가 장훈이 주도한 병변을 통해 꿈꿨던 20세기 천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연구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더 나아가 신해혁명과 북경정변의 어떤 차이가 선통제를 출궁시킬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신해혁명과 “청대퇴위 우대조건”(1912)
홍수전이 창시한 그리스도교 비밀 결사를 토대로 1851년에서 1864년까지 청조 타도와 새 왕조의 건설을 목적으로 농민 혁명 운동인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태평천국운동은 청조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한인 관료의 대두를 촉진시키고 그 뒤 중국 혁명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898년 청일전쟁 패배 이후 청나라 사회전반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중심이 된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불리며 헌법제정과 국회개설을 목표로 한 입헌운동이었으나, ‘위안스카이의 배신’과 서태후의 쿠데타로 좌절되었습니다. 이후 청조타도(淸朝打倒),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혁명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사망하고 3살의 부의가 황제로 등극하자 청조 정치는 더욱 혼란을 거듭했습니다. 청나라는 민영으로 운영되던 철도의 국유령-원칙적으로 건전한 것이었지만, 다양한 이유로 각지에서 강한 반대가 일어났다-1을 발표하여, 그것을 담보로 열강의 금융자본 연합체인 4국 차관단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빌려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생활은 고통이 가중되었고, 철도 국유령에 대하여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1 레지널드 존스턴, 『자금성의 황혼』, 돌베개, 2008, P.120 2. 소조정 시기 자금성의 선통제 부의와 그의 12일 간의 꿈 -북경정변과 선통복벽을 바탕으로- _자금성
광둥(廣東) 등에서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쓰촨(四川)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청조가 쓰촨폭동을 토벌하기 위하여 후베이신군(湖北新軍)을 동원하자, 우한(武漢)지구에서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共進會) 등을 조직하여 신군(新軍)공작을 전개해온 혁명파는,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창봉기는 전국에 파급되어 거의 모든 성에서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후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정부가 수립되어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지도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발족하였습니다. 청조는 베이양(北洋) 군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다시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령하였습니다. 존스턴은 이를 그의 저서 『자금성의 황혼』에서 위안스카이가 재등용하는 데에 있어 그럴싸한 옹호론이 존재했다고 설명합니다. 존스턴은 위안스카이가 외국인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기에 반란 진압에 있어 외국 금융시장에서 외채를 모집할 수 있었다고 그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2 위안스카이는 호광총독湖廣總督, 황실 군대의 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어 그는 군사 문제에 착수해 양자강 중부의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2 레지널드 존스턴, 앞의 책, pp. 120-121 순식간에 전세가 호전되었습니다.3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전력을 다해 혁명군을 더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존스턴은
“원세개는분명자신을위한정책을추구하고있었으며,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그의 행위를 이끈 동기가 아니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금세확연하게드러났다.”4
고 평가합니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이양 받았고 그 해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정부(북경정부)를 조직하였습니 다.
이후 1911년 말에서 1912년 초에 걸쳐 상해에서 열린 혁명파와 황실 간의 강화회의에서 두 당사자는 ‘불편한 동거’라는 매우 특이한 타협을 맺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정부를 조직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앞장서면서도 청 왕조와《청대퇴위 우대조건》을 맺으면서 절대 왕조를 지켜주고자 했습니다. “청 황제는 사위(辭位) 후에도 그 존칭을 유지하며 중화민국은 그를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한다.” 등의 8개 조항 외에 청 황족 대우 4개조, 소수민족에 대한 대우 7개조에 대한 규정 등으로 구성된 《대청 황제 우대 조건》을 통해 청나라 황제였던 부의는 청 왕조의 몰락 이후에도 계속해서 3 레지널드 존스턴, 앞의 책, p.122 4 레지널드 존스턴, 앞의 책, p. 122 2. 소조정 시기 자금성의 선통제 부의와 그의 12일 간의 꿈 -북경정변과 선통복벽을 바탕으로- _자금성
자금성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청 황제 우대 조건》이 가능했던 이유에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대 조건은 강화회의의 ‘타협의 산물’이었기에, 제정파帝政派나 공화주의자들 모두 철저하게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존스턴은 궁정이 황제 퇴위를 포함한 타협안에 양보에 동의했던 이유를 ‘그 타협안이 위안스카이의 야망과 구상에 합치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5 황제로 등극하고자 했던 위안스카이의 집권 욕망과 고대의 중국적 천하질서 기반의 치자와 피치자의 선험적, 경험적 개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1912년 신해혁명 당시 봉건 사회의 근본적 개혁이 실패한 것입니다. 위안스카이가 반란 진압 정책을 끝까지 관철하지 않았던 것은 황제가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신해혁명을 통해 반봉건 사회성을 변화시키지 못함으로써, 공화정 이후에도 선통제가 궁(자금성) 안에서 황제의 권위를 누리면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해혁명의 진압자인 위안스카이의 집권 야망이 제정으로의 전복 가능성을 낳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의 심상 속 야망이 타협이라는 가면을 쓴 대우 조건에서 ‘황제 우대’의 모습으로 드러나면서, 결국 제정 회귀로의 여지를 남겨둔 것입니다.
신해혁명 이후의 선통제는 계속해서 그의 삶을 자금성 안에서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선통제는 청 왕조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5 레지널드 존스턴, 앞의 책, pp. 144-145 복벽을 꿈꿨습니다. 선통제가 복벽을 꿈꿀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앞서 설명했던 ‘제정 회귀의 가능성’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그 권리를 그대로 보장받을 수 있었던 자금성에서의 삶으로 인해 선통제는 복위를 꿈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복벽을 그 무엇보다 꿈꾸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자서전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이 당시에 내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던 것은 동북의 백성이 많이 죽었다는것도 아니었고, 일본인이 어떤방법으로 이 식민지를 통치할것인가도아니었다.(이하생략) 나의관심은복벽을요구하며, 내가황제임을그들이인정하게끔요구하는것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6 부의의 회고록과 청대 자금성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1차 사료에 나타난 선통복벽과 장훈병변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면, ‘대청제국 회복’의 관점이 복벽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대 자금성에 살았던 태감과 궁녀의 회고록에서 나타난 궁 내부의 일반인의 생활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엄격한 규율과 제재는 자금성 안에서의 절대 왕조의 잔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를 통해 천하 질서 기반의 작은 제국이 민국시대의 자금성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실우대조건》은 청 왕조의 몰락 이후에도 선통제를 6 부의(1988), 『황제에서 시민으로(상)』, 문학과비평사, 이충양 옮김, p.369 2. 소조정 시기 자금성의 선통제 부의와 그의 12일 간의 꿈 -북경정변과 선통복벽을 바탕으로- _자금성
‘황제 우대’함으로써 선통제가 자금성을 계속해서 ‘황실’로 인식하게 했습니다. 어린 부의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황실우대조건》으로 황제의 권위를 일부 누릴 수 있었고, 자금성 내부의 잔여 봉건 세력은 그를 황제로서 예우했기에 부의의 자금성은 ‘소조정’(小朝廷)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장훈이 변자군을 이끌고 선통제의 복위를 위해 병변을 일으켰을 때 선통제 역시 그 뜻에 반대 없이 따랐던 데에는, 소조정을 ‘조정’으로 되돌리고자 했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황실우대조건》은 위안스카이와 선통제라는 두 주인공이 자금성을 무대로 한 ‘동상이몽’이라는 연기를 하게 했던 것입니다.
3. 북경정변(1924)과 부의의 자금성 출궁
1917년 7월에 장훈의 청조복원운동이 발생합니다. 당시 량구이등(楊桂堂)이 토벌령을 피해 도망한 탓에, 펑위샹이 여단장으로 복권되어 장훈을 격파했습니다. 1924년 펑위샹은 쿠데타를 일으켜 총통 위안스카이의 직계 군벌 차오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1918년에 펑위샹은 돤치루이로부터 쑨원의 토벌을 명령받지만, 평화협상의 전보를 보내 돤치루이를 격앙하게 했습니다. 이후 펑위샹은 쑨원과 교류하며 민주화를 지향하면서 중국국민당에 입당했습니다. 1924년 제 2차 직봉전쟁(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의 전쟁) 때는 펑톈파와 손을 잡아 즈리파의 차오쿤을 몰아내고 베이징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펑위샹은 베이징 점령 이후 1912년의 《청대퇴위 우대조건》을 수정한 뒤 청나라 황실을 협박했습니다. 이에 따라 펑위샹의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했으며, 청나라 황제 부의와 황후는 추방되었고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에서 축출되었습니다.
“부의출궁”은 북경정변의 가장 핵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의가 출궁당하는 일은 현대사에서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풍부한 자료의 결여가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건재했던 청나라 황실이 북경정변으로 인해 청 왕조가 자금성에서 완전히 축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단 펑위샹의 위협만은 아니었습니다. 민국정부 수립 이후의 청 황실 우대로 인한 재정상의 어려움과 이로 인한 인민들의 고통 가중, 봉건성의 잔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부의의 출궁 및 청 황실의 축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1912년과 1924년의 시대적 상황과 인물들의 심상이 달랐던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제제(帝制) 회귀를 통해 자신이 황제로 오르고자 했던 위안스카이의 심상과 민주화를 지향하며 잔여 봉건 세력을 없애고자 했던 펑위샹의 심상의 차이가 자금성 내부의 청 황실의 존재를 결정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각 혁명 당시 집권자의 ‘심상’은 선통제와 만주왕조의 운명에 있어 결정적 요소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결론을 내려 보고자 2. 소조정 시기 자금성의 선통제 부의와 그의 12일 간의 꿈 -북경정변과 선통복벽을 바탕으로- _자금성
합니다. 신해혁명은 제정파와 혁명파 간의 대결구도였다면 북경정변은 직예파와 봉천파의 군벌들 간의 권력 다툼이었다는 데 큰 차이를 보입니다. 신해혁명 당시 공화정 수립 이면에 존재했던 《대청 황제 우대 조건》이 혁명파와 신민臣民에게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북경정변은 위안스카이의 직계 군벌이었던 직예파와 봉천파의 군벌 경쟁이었기에, 풍옥샹과 봉천파의 입장에서는 위안스카이 및 직계파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애거나 바꾸고자 했을 것입니다. 존스턴은 풍옥샹이 제안한 《대청 황제 우대 조건》의 수정 요구를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공화국이 이 새로운 협약을 충실하게 준수하겠다는 보장이 어떤형태로도포함되어있지않다는치명적인결함을발견했다.”
이것은 곧 펑옥샹과 봉천파 군대가 절대 왕조의 진정한 멸망을 원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청 황실을 예우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던 제정帝庭의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북경정변의 중심이 되었던 풍옥샹의 심상에는 황제에 등극하고자 하는 야심이 없었던 것으로 감히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더욱이 우대 조건의 수정과 폐기, 더 나아가 선통제와 황후의 자금성 출궁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4. 맺는말
장훈병변을 통해 선통제가 복위하고자 했던 목표를 다룬 연구 자료와 복벽 후 12일 간의 선통제의 생활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어 글을 작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자료가 장훈이 변자군과 함께 단기서에 대한 배신으로 선통제를 복위시키려 한 사건을 일차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통복벽과 천하天下의 개념을 연관 지어 설명하는 연구는 전무한 실정입니다. 선통복벽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 번의 퇴위를 거친 선통제가 다시 복위하고자 했던 이유를 천하질서天下秩序의 회복과 함께 조망한 연구는 없었습니다. 12일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장훈복벽을 통해 어린 부의가 그가 경험했던 절대 왕권으로부터의 실리를 취하려 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의가 그의 자서전에서 기술했듯이, 성인이 되어서도 만주국에서조차 황제로서의 권위를 갈망했던 것은 황제 교육에서의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황제로서의 권익 추구뿐만 아니라 자금성 안에서 함께 살았던 잔여 봉건 세력의 심상이 결합되어 선통복벽이 일어났다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선통복벽이 실패했지만 여전히 선통제와 청 황실은 자금성 안에서 그들의 권위와 권한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청 황실 권한의 유지 원동력은 《청대퇴위 우대조건》이었는데,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혹은 신왕조 건립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의 야망이 이러한 청 황실의 2. 소조정 시기 자금성의 선통제 부의와 그의 12일 간의 꿈 -북경정변과 선통복벽을 바탕으로- _자금성
우대조건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왕조의 몰락’이라는 신해혁명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 자금성 안의 청 왕조의 잔여에 대한 ‘청 왕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는 이유는 상당한 모순점을 가집니다.
신해혁명 이후의 자금성 내부의 선통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호화로웠을 것입니다. 《청대퇴위 우대조건》의 조항에 따라 선통제가 몰락한 왕조의 황제라는 이름에 비해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의는 궁녀, 태감(내시) 등을 고용하면서 자금성 안에서의 편안한 삶을 영위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도 1924년의 북경정변으로 인해 부의가 축출되면서 끝났습니다. 여기서 앞서 연구 질문이었던 부의가 왜 1912년의 신해혁명이 아닌 1924년의 북경정변으로 인해 출궁되었는지도 반추해볼 수 있습니다. 혁명의 주체가 위안스카이와 펑위샹이었던 점을 고려해보면, 부의의 출궁 위협이 같은 내국인으로 인해 야기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상에 존재했던 각기 다른 목표는 청 왕조의 생사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습니다. 청 왕조를 유지시켜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했던 위안스카이와 민주화를 지향했던 펑위샹의 근본적인 심상 차이가 절대 왕조의 성쇠를 결정했습니다. 북경정변으로 인해 자금성에서 추방된 부의와 청 왕조의 축출은 중화민국 수립 이후의 진정한 민주주의 시작의 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주나라 때 형성된 중국적 천하질서 기반의 절대 왕조는 약 4000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20세기 초, 공화제 수립과 봉건제의 몰락을 주장하는 혁명 운동으로 절대 왕조는 위기를 맞았지만 마지막 청 왕실의 몰락 이후에도 여전히 궁궐 안에서의 작은 제국(절대 왕조)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연구를 통해 혁명 주체의 심상에 따라 봉건 사회가 유지되는지 혹은 몰락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현대 중국사회에서 절대 왕권 시기의 질서가 작용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공화정 속에서 중국적 천하질서를 주도하려는 주체의 심상을 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시의성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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