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_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
시간을 거슬러 동아시아의 역사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 주은우 · 이화여자대학교
현대 중국의 제국몽과 대청 제국의 유산
청 제국은 몇 세기 만에 최대한도로 성장 하였으며, 그때의 기본적인 국경 형태가 오늘날의 현대 중국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청나라가 현 시대의 중국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국경의 확장과 제국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중국이 그려 나가는 동아시아의 지도 또한 청나라 시대에 완성된 밑 그림을 배제한 채 상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시진핑의 진두지휘 하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국제 질서에 ‘중국적 가치’와 ‘중국적 표준’으로 대표되는 중화질서(Pax Sinica)로 대항하는 현대 중국의 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제국적이었던 청나라 시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전 왕조인 명나라에 비하여 영토가 두 배정도로 확장되었기도 하거니와, 내몽골 지역, 길림성, 요녕성, 흑룍강성을 포함한 만주 일대, 티베트, 그리고 오늘날의 신강위구르자치구와 같은 오늘날의 중국 영토가 청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화 세계의 일부로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에서 히말라야 산맥까지, 오호츠크 해부터 발하슈호에 이르는 외곽으로의 확장 중국 내륙과 대만을 포함한 다양한 지역의 통합 작업이 격동적으로 이루어진 이 한 세기를 읽어내는 작업은 (정교함과 섬세함을 요하는 다소 난해한 작업 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국제 정치 학도들이 중국의 심상을 읽어내고, 측정하고, 평가하려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한 조각의 퍼즐일 것입니다. 현대 중국이 펼치는 외교 정책과 대외관에서 엿볼 수 있는 제국적 공간 상상력이 지금 우리가 살펴 볼 ‘대청 제국’에 이르러 비로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는 21 세기 중국의 제국몽이 대청 제국의 것과 닮아 있다는 인상은 단순한 착각일 뿐일까요? 전통 천하 질서에서 복합 세계 질서라는 새로운 무대로 바뀌었지만, 오늘날 중국의 물상과 심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는 4 세기 이전 청나라의 그것을 돌아볼 것을 요하는 작업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나라가 중국 역사에서 위치한 지점을 개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전통 천하 질서와 근대 국제 질서로의 이행기였습니다. 그렇기에 두 가지 질서 체제 양 극단에 치우친 프레임 워크(framework) 만으로는 대청 제국이 이룩한 천하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1.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_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단원적 천하의 모습, 예치의 작동 원리에 기울여진 페어뱅크(John K. Fairbank)의 천하질서론과 근대 국제 질서에 보다 근접한 다원적 천하의 모습을 포착하고자 한 로사비(Morris Rossabi)의 논의에 맞추어 청을 제대로 알기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청의 천하를 살펴볼 때에 다른 왕조 치하의 천하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받는 이유를 그들이 이민 왕조였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설명에 귀결시키는 것은 진상의 절반만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 왕조를 통틀어 생각해 보더라도 천하 질서의 4 대 작동 원리가 가장 복합적인 양상을 띈 시기는 청나라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작동 원리의 복합성은 대청 제국의 형성과 발전을 가능케 한 가장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
전통 천하 질서를 움직이는 4 대 작동 원리인 예치, 회유, 기미, 정벌은 결국 물상과 심상이 어떠한 비중으로, 그리고 어떤 성격의 것으로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 또는 민족을 예치로써 대한다면 그것은 곧 지배하는 힘, 즉 지배력의 행사 보다는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구하는 데 더 힘을 쓴 것이지요. 또한 예치의 경우 그 정당성이 유교적 명분과 질서에 기반해 있는 것이 그 명분의 성격입니다. 이와는 완전히 대칭점에 위치한 정벌의 경우 물리적 힘에 의한 강제 라는 점에서 심상보다는 물상에 의존합니다.
대청제국의 세력 범위를 크게 중원 지역, 그리고 서북 지역의 몽골과 티베트, 그리고 준가르로 나누어 본다면, 심상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한 곳은 티베트이고 물상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한 곳은 준가르였습니다. 라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지역의 경우 대청제국을 설립한 홍타이지 때부터 이미 형성된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청의 세력 범위 내로 들일 수 있었습니다. 군사를 통한 정복 또는 군사 동맹이 아니라, 청의 황제가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통치의 권위를 세워 나간 것입니다. 비록 유교적 성격의 것은 아니었지만 예치와 같이 비강제적, 명분적 요소가 가장 두드러진 지배 원리였습니다.
심상과 물상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난 지역으로는 몽골 일대와 중원 지역을 들 수 있습니다. 몽골족의 대표격인 보르지긴의 에제이가 홍타이지에게 원조 황제의 옥새인 제고지보를 바치고, 명조 멸망 이후 청조가 심양으로부터 북경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이래로 청의 황제는 ‘서북부 유목 사회 칸의 계승자’ 그리고 ‘(전통적 의미의)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라는 두 가지 칭호를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은 몽골 지역 지주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몽골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행정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 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비록 군사를 통한 일정 정도의 통제가 존재하였지만, 중원 지역에서 또한 중국 전통의 토지 관리 시스템을 계속해서 이용되고 명의 관료 1.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_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체제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몽골족과 한족에 대해서는 그 통치 권위의 기원도, 통치의 방식도 매우 달랐지만, 두 민족 모두 청이 심상과 물상 모두를 이용해 다스렸고, 그 민족적 원형이 대체로 지켜진 편에 속합니다.
물상적 요소가 가장 많이 돋보이는 준가르에 대한 청조의 대외관을 제외하더라도, 청조가 ‘제국’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실로 다양한 통치 도구들을 이용하고 있었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서북지역에서부터 발원한 이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을 포함하여 건설한 제국인 만큼 ‘천하’의 개념이 공간적으로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천하를 운용하는 작동 원리 또한 굉장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예치, 회유, 기미, 정벌의 복합된 형태 이외에도 심상을 이용하되, 불교적 질서에 기반을 둔 티베트에 대한 통치 또한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통치 하에서 각 민족들이 하나로 통합되되, 일률적으로 통일되지는 않는 독특한 풍경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청조의 천하는 가장 제국 다운 천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민족과 정치체를 하나로 묶는 제국의 품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식과 구성에 있어서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청제국은 그렇게 제국으로의 용모와 품격을 갖출 수 있었지요.
<평정준가르도>: 황제의 산 넘고 물 건너
물상의 힘이 가장 선명하게 관찰되는 청과 준가르의 관계를 통해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정벌의 원리가 극한으로 나타난 순간이 바로 <평정준가르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준가르 부족의 지배 계층 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포함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학살되거나, 당시 유행한 천연두에 의한 질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최후의 유목제국으로 서명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네 가지 작동 원리 중 청이 어째서 준가르에 대해 민족의 몰살이라는 정벌의 극치를 선택하게 된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서북 변경에 대한 청의 대외 정책의 바탕을 이룬 물상과 심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청이라는 열매를 맺기 훨씬 이전에서부터, 민족 국가로서 발아하기 위한 토양이 바로 서북 지역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청이 중원 지대를 차지하고 제국의 중심축이 황하로 이동됨에 따라 후대에는 청과 서북 지대 간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알게 모르게 일축하려는 경향이 관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흐름을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역대 황제에게 있어 서북 지역 국가, 민족과의 안정적 관계 유지는 ‘대청 제국’이라는 장편 소설의 처음에서부터 등장한 숙원 사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숙원 사업의 핵심에는 적절한 ‘심상’의 발휘를 통한 예치와 회유만으로는 통제되지 않던 ‘준가르’라는 골칫거리가 존재했습니다. 1.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_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청의 준가르 정벌 사업은 강희에 이르러 본격화 되었으며, 조부가 끝내지 못한 과업을 성실하게 마무리라도 하듯 건륭이 준가르를 멸족시키며 그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강희만 보더라도, 8 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 걸쳐 한족 군벌들이 일으킨 삼번의 난에 대해서는 직접 전선에 나서지 않은 반면, 갈단이 이끄는 준가르의 위협에 대항하여 군사를 친히 이끌고 정벌에 나선 것은 눈 여겨 볼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중국 왕조의 오랜 역사 속에서 황제 스스로가 군을 지휘하여 고비 사막의 북까지 친정한 경우는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되지않습니다. 바로 이전 왕조인 명조의 영락제가 몽골 고원을 건너는 친정에서 귀환 도중 병사한 이래로 중국 황제에게 있어 금단의 구역 마냥 여겨져 온 그곳을 강희제가 몸소 친정하였다는 것은, 대청제국의 황제는 전통 천하 질서의 중심이었던 중원 지대를 다스리는 천자 이상의 권위를 요하는 직이었다는 것의 반증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천명을 받드는 중국의 황제이자 몽골부터 티베트를 아우르는 서북 지역의 대칸으로서 갈단의 야망을 묵시한다면 머지 않은 미래에 유목 사회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게다가 알타이 산맥 너머 러시아나 이슬람 문화권이 드리우는 위협에 대한 완충지대가 무너지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그대로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습니다.
강희제는 준가르 정벌 여정에 나설 때마다 북경의 황태자에게 매일의 일을 편지로 전했습니다. 편지의 기록에서 강희제가 갈단의 우세한 병력에 좌절하는 대신들 앞에 눈물을 흘리며 연설한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갈단이 할하와 외번 몽골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짐은 지금 ... 출정하였다. 지금 우리가 ... 이대로 돌아가게 되면 ... 북경에 돌아가 천지, 태묘, 사직에 무어라고 아뢸 것인가?” (친정평정삭막방략 22 권 중, 해석: 《강희제의 편지》, p. 108) 비단 당시 강희제의 눈에 비친 준가르 정벌 사업은 서북 민족에 대한 지배 권위 유지 뿐 아니라 ,영토 확장의 대업을 이룬 위대한 중국 황제로서 중원에 대한 지배 권위 강화가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여타 지역보다도 ‘정벌’이라는 물리적 힘과 물상적 요소가 가장 많이 반영된 방식으로 다루어졌던 것입니다. 또한 갈단이 주적으로 쫓고있던 할하의 지배층이 청에게 비호를 요청한 상황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하의 지배층의 지지를 얻는 일은 곧 외몽골 지대 영주들을 청의 세력 범위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에 몽골 지대 전반에 걸쳐 청조의 통치 이념 정당화에 크게 일조한 티베트 불교를 수호하는 것과 결부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강희의 준가르 친정이 전투에서의 일련의 승리와 갈단의 병사라는 나름의 성과를 거둔 이후, 1718 년에 할하 몽골 출신의 젭츈담바 호독토를 관할 지역 내 황교 교주로 임명한 것 역시 티베트 불교권에 대한 청조의 영향력을 보다 강화하려는 내막이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 역대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룬 강건성세의 또 다른 주인공인 건륭제는 ‘준가르 문제에 대한 영구적 해결’이라는 과업을 1.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_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이룬 인물입니다. 비록 그 해결 방법이 티베트, 몽골, 그리고 중원에서 작동하던 지배 원리와는 파격적으로 다른 형태를 띄었지만 말이지요. 한때 강희에 대견할 만한 적수였던 갈단 보쇽트의 뒤를 이은 준가르의 새로운 지도자 갈단 체렝이 사망하고 내부의 권력 투쟁이 발생함에 따라, 옹정연말에서 건륭연초에 체결되었던 청과 준가르 사이의 조약은 아주 쉽게 으스러졌습니다. 건륭에게 있어 더 이상 준가르의 변덕과 위협을 용인해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부인 강희의 친정을 시작으로 서북으로의 물자 보급망이 이미 구축된 상황이었고, 티베트, 몽골, 그리고 중원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지배하는 영토와 민족들에 대한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시키는 데 있어 준가르 정벌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강희와의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에도 준가르는 갈단 체렝 하에서 재통합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청의 관할 지역으로의 지배 야심을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막북의 몽골고원, 동쪽의 할하, 남쪽의 라싸로 빈번하게 침입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준가르를 묵인한다는 것은 훗날 대청 제국을 큰 위험에 빠뜨릴 불씨를 키우는 것과 같았습니다. 게다가 몽골과 티베트 일대에 대한 비호 제공과 수호자로서의 역할로서 그 통치 정당성을 확보 했었기에 준가르 문제에 대한 시급한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서북이라는 거대 유목 지대에서의 패권을 준가르에 내주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일어난 준가르의 내부 분열과 아무르사나가 건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건은 청에게 준가르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한 최적의 시기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당시 건륭은 청의 지배계층인 만주족이 안락한 생활과 사치 그리고 한족에 대한 문화적 동화에 젖어가는 것으로부터 ‘만주스러움’을 지켜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건륭조상유당 3 권 중 건륭이 “오늘 짐은 성조인 황제(강희) 연간의 <실록>을 훑어보다가 다음 부분을 읽게 되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평화롭지만 군사상의 준비를 방기할 수는 없다. 만주족이 계속해서 군사상의 준비를 충실히 하고, 이어서 사냥을 계속하며, 몸소 근면을 실천하고 ... 이것은 한족이 쉽게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니 ...’ 이 부분을 읽다가 짐은 전율과 공포감에 빠졌다”라고 언급한 부분만 보더라도 말입니다. 그가 십전노인을 자처한 것은 천지 통일이라는 천명을 이뤄 낸 ‘만주 출신의 천자’라는 사실을 한 단어로 일축한 것이었습니다. ‘십전노인’에서 건륭이 십전 모두를 중국 변방에서 벌어진 전투로 칭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외부로부터 중원을 수호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모습은 중원에 대한 청조의 지배 정당성을 강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1755 년 3 월 말에 시작된 건륭제의 첫번째 정벌은 청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분명하게 자각하지 못한 준가르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이 때 건륭제는 준가르를 철저히 파멸시키기 보다는 강희 연간의 준가르 때와 같은 강력한 연맹체로의 통합이 불가능 하도록 부족을 다양하게 나누어 각각에 지도자를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1.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_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얼마 안가 부족 간 동맹이 형성되고 이를 통해 건륭의 의지에 저항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건륭은 준가르를 완전한 청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단하였고, 결국 두번째 정벌을 통해 인구의 대부분이 피살되거나 병사함으로써 준가르라는 민족 자체가 사실상 전멸하게 됩니다. 그렇게 준가르는 최후의 몽골 유목 제국으로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역사의 패자인 준가르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준가르와 관련하여 남아있는 기록 마저도 청에 의해서 그리고 청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에 비하여 청은 서적, 그림, 비석, 지도 등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건륭의 업적을 기리고 이를 통해 중원과 서북부 지대에 대한 청조의 통치 정당성 강화를 꾀하였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북경의 공묘(태학) 대성전은 청대 왕조의 ‘문(文)’과 관련된 인물과 공적을 기리는 일명 ‘문(文)’의 성지라 할 수 있습니다. 태학이나 공자를 기리기 위한 이곳에서 본래 목적과 전례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무(武)’의 업적과 관련된 비석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준가르 전승비입니다. 유목민족을 제압하고 기존의 천하적 세계관을 확장한 건륭의 업적은 단순히 ‘위대한 무공’이상의 가치를 가졌고, 이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한족에게 복종을 요구하려는 청조의 정치적 목적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과거 황조(강희)와 황고(옹정)께서 여러 차례 중가르를 공격했지만 ...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 짐은 천하의 만물을 다스리는 군주로서 모든 것을 포괄 하나니, 먼 미래를 염두에 두고 유목민의 일을 규제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옳다. ... 우리 만주족의 오래된 관습은 전쟁으로 소집될 경우에 모든 사람이 결집하는 것이니, ... 이제 짐은 오히려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청고조실록> 490 권 중, 《건륭제》, p. 213 해석 참고) 와 같은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건륭이 칭하는 ‘천하’란 한족출신의 왕조들이 그려온 천하에서 한 차원 더 확대된 공간을 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를 다스리는 청조는 중원의 천명을 받드는 황제, 천자인 동시에 서북부 유목 민족의 위대한 칸이기도 했지요. 또 다른 기록에서는 건륭이 이룬 천하 대통일의 업적을 한, 당, 송, 명 왕조의 것과 비교하며 만주 출신의 청 왕조의 울월함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청고조실록> 587 권 중, 《건륭제》, p. 211 해석 참고).
대청 제국과 준가르: <평정준가르도> 속 청사진을
찾아라
<평정준가르도>에 천하 질서의 작동 원리 중 정벌의 요소가 가장 짙게 나타난 것은 건륭제 개인의 호전성이 나타난 결과 라기 보다, 중원과 서북방을 아우르는 청의 지배력과 지배 정당성에 대한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강화하기 위한 철저하고 세밀한 계산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이 제국이 될 수 있는 것은 1. 제국의 품격: 무엇이 제국을 제국 답게 만드는가_중국국가박물관 <평정준가르도> 마치 여러 개의 다른 재질과 색깔의 헝겊 조각들을 맞추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이 정교한 심상과 물상의 조화를 요하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민족과 정치체들을 하나로 잇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군사적 힘과 타당한 지배 정당성이라는 실과 바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이음새를 계속해서 약화 시키려는 준가르에 대한 최종 해결과 서북 지역에 대한 지배의 안정화, 그리고 막대한 영토 확보를 통한 중원의 황제로서의 위상 강화. 이 모든 것이 <평정준가르도>에 숨겨진 청조의 청사진이었던 것입니다.
<평정준가르도>를 통해 떠난 400 여년 전으로의 여정에서 대청제국의 ‘제국으로서의 품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가 준가르를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면의 사정’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분명한 역사의 드라마를 논하는 것은 패자의 입장은 전혀 알 수 없다는 비극이 존재하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과 준가르, 그리고 서북 지역의 이야기는 청이 현실로 만든 제국의 꿈과 다시 한번 그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현대 중국을 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또는 제국의 국제 정치라는, 보다 넓은 국제 정치적 상상력을 얻고자 하는 우리가 ‘동아시아 질서 건축’의 현장에서 발굴한 귀중한 유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은 분명히 기존의 전통적인 중화 세상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현상(phenomenon) 이었지만, 청이 제국으로서 성공하는 데 있어서는 과거의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형태의 지배 방식과 논리, 이념, 정당성이 존재했습니다. 옛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온고지신’의 가치가 청의 제국 정치에서 적절히 발휘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우리가 <평정준가르도> 를 통해 들여다본, 현대 중국의 제국몽 속에 감추어진 청나라 시대의 제국적 심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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