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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초기 마오쩌둥의 전략과 마음 사이

천하질서를 앞서 근심하고, 뒤미처 즐기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9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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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 장지영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중국을 알자. 그것이 우리의 수업과 답사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중국을 구성하고, 중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중국은 공산당을 빼놓고 이해할 수 없다. 중국이라는 추상적인 단일국가 행위자가 국제관계에서 펼치는 수들을 읽고 내다보기 위해서는, 중국 공산당이 외세에 반응하는 그들의 마음과 그로 말미암은 정책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은 중국 정부의 입장을 이해함과 동시에, 중국 내 국민들의 반일감정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중국이 현대에 들어 치른 주요한 전쟁, 중일전쟁(2nd Sino-Japanese war, 1937-1945)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103 중요하다. 중일전쟁은 열강의 중국 원조와 연합군 진영의 승리에 힘입어 중국의 승리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힘과 구조의 결과물로 보여지는 태평양전쟁의 일부로 쉽게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 내부 행위자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서로 총구를 겨누던 두 적대적인 행위자가 외세에 대항하여 협력해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국내 여러 정당들 간 으레 있는 의견대립 정도가 아니라, 이들은 당시 중국 정부의 정당성을 누가 가져오느냐를 두고 군사적인 대립도 서슴지 않던 치열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과의 동침’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모택동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오쩌둥은 개인적인 권력에 눈이 먼 전략의 귀재였는가, 아니면 중국과 인민의 발전을 꿈꿨던 민족주의자였는가? 중일전쟁에서 마오쩌둥은 중국 내 세 행위자들과 왜 연합하였는가? 국민당, 공산당, 인민, 당시 그들의 마음은 어떠하였는가? 중일전쟁의 중국식 정식명칭이 ‘중국인민항일전쟁’인 만큼, 중국에게 당시 ‘항일’은 중국을 연합하게 하는 핵심과제였기 때문에, 그들이 연합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중일전쟁을 거치는 와중에도 국공내전과 연합을 반복했다는 점, 그리고 일반 학생들이 내전중지와 정부간 협력을 요구했다는 점 등을 보면 단지 외세가 침략했다는 이유 하나로 당연히 중국이 내부 단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4 중일전쟁 시기에 중국이 하나로 연합하게 된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생생히 그려보려면, 모택동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선택했던 이성적인 ‘전략’과 그 속의 ‘마음’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잘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비대칭전쟁으로서 중일전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군사적인 전략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 후, 장융(Chang Jung)과 존 핼리데이(John Halliday)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마오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에드가 스노(Edgar Snow), 존 서비스(John Service)의 중국 방문기록을 통해 마오쩌둥의 진심은 과연 무엇 이었는지 비교하고 상상해보도록 한다.

답사 마지막 날,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들어가며
답사 마지막 날,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들어가며

105 우리는 이러한 사전조사와 목적을 가지고 ‘중국 인민 항일전쟁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원래 둘째날 오전 방문 예정이었는데, 동선을 고려하여 마지막 날, 마지막 스케줄로 방문일정이 변경되었다. 막바지에 이르자 모두들 체력이 다소 떨어진 듯 했는데, 게다가 흐렸던 날씨까지 맑아지면서 우리를 더욱 집중하기 힘들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중국을 더욱 알고자, 공산당과 마오 쩌둥의 진심을 알고자 마지막까지 힘을 내었다.

마오쩌둥의 전략읽기

비대칭 전쟁으로서 중일전쟁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중일전쟁의 대표적인 전투들을 위주로 개괄적인 설명이 되어있었다. 중일전쟁은 당시 중국과 일본이 매우 비대칭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대칭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이 어떻게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많이 연구되었다. 보통 비대칭전쟁에서 두 국가가 비대칭이라고 하는 것은 국토의 크기나 인구 등을 놓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의 크기를 가지고 구분하게 된다. 중일전쟁 직전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중일전쟁이 비대칭전쟁이었음을 더 명백히 알 수 있다. 당시 육군병력을 비교하면, 일본이 38 만명,

106 중국이 200 만명, 해군은 일본이 285 척, 배수량 115 만여톤, 중국은 120 척, 배수량 6.8 만여톤, 공군(항공기)은 일본이 1600 대, 중국이 600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 중국이 육군병력 면에서는 일본보다 앞섰지만, 해군과 공군력에서는 일본이 월등히 우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의 해군은 중국 해군보다 17 배 규모였고, 공군력도 기술상의 우열을 고려하지

당시 사용된 무기들이 바닥에 전시되어있다.
당시 사용된 무기들이 바닥에 전시되어있다.

않더라도 일본이 중국보다 3 배정도 규모가 컸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중국 육군의 병력이 일본보다 5 배 정도 많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병력 규모의 차이가 바로 전장에서의 전투력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중일 간의 육군 전투력을 비교하기 위해 편제 인원과 무기 및 장비 등을 비교해보면 일본이 월등하게 우세했음을 알 수 있다.

1 何应钦,《抗战时期军事报告》, 上海书店,1990,p.38

107 심지어 이러한 군사력 비교는 중국이 내부적으로 단결되어 있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 만약 정치와 군사조직력, 군대 내부의 단결과 사기 등의 요소를 더 감안한다면 양국의 군사력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사실 당시 중국의 지방군은 명의상으로 중앙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실제 부대의 지휘권한은 지방의 실력자들에게 있었고, 이들 부대들은 개편된 중앙군과 비교할 대 질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특히 군대의 군수 보급과 인원보충 등의 각 방면에서 취약했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해도 중국군이 일본군과의 정면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비대칭전쟁인 중일전쟁에서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전략

중일전쟁을 연구한 논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념관에서 역시 각 행위자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은 많지 않았다. 다만 당시 중국이 일본을 어떻게 이겼는지 전략에 대한 연구들은 다양하게 있었는데,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선택한 전략들을 우선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시 중국이 ‘지구전’ 전략을 택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발걸음을 살펴본다.

중국의 안보전략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민전쟁’이라는 것인데, ‘적이 공격해 올 경우 최전선에서 싸우는 정규군뿐 아니라 후방지역에 위치한 전 인민이 마찬가지로 일치단결하여 광범위한 저항을 전개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108 국가수준의 전략이다. 정치, 군사, 외교,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이루어 지는 대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지구전 전략은 그 하위 전략인 군사전략으로서 순수하게 군사적인 개념이다. 즉 지구전 전략은 중국의 광활한 영토와 험준한 지형,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이용하여 적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궁극적으로 역량의 변화를 꾀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렇게 볼 때 인민전쟁은 정부와 군이 허약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인민’의 참여와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취한 전략방침이었다. 그리고 지구전 전략은 인민전쟁을 구현하기 위해 순수하게 군사적인 관점에서 제시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지구전의 긴 과정을 세단계로 세분화하고 있다. 1 단계는 적이 전략적 공격을 하고 홍군이 전략적 방어를 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아군은 적보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퇴각을 단행한다. 이 때 이루어지는 전략적 방어란 별다른 저항 없이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소극적 방어를 지양하고 적에게 부단한 기습을 감행하는 적극적 방어를 말한다. 2 단계는 전략적 대치단계로 적이 전략적 수비를 하고 아군이 반격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3 단계는 아군이 전략적 반격을 하고 적이 전략적 퇴각을 하는 단계로 결전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1934 년-1935 년간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일태도에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중일 간의 군사력 격차는 국민정부가 직접적으로 일본에 군사적 대응을 하기 어렵게

109 만들었다. 그리고 군사력 증강은 군대의 규모만을 확대한다고 해서 바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정부가 일본의 군사력을 단기간 내에 따라잡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렇지만 1935 년 이후부터 화북에서 일본의 군사적 위협이 심각하게 증대되었기 때문에 국민정부는 즉각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일전쟁 초기 중국정부의 지구전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의 군사고문단장으로 부임한 팔켄하우젠은 1935 년 ‘현 시국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안을 국민당정부에 제출한다. 팔켄하우젠은 베를린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였고, 1912 년에는 일본에서 무관임무를 수행하였었기 때문에 일본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현 시국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안에 따르면, 팔켄하우젠은 “현재 중국에 가장 위협적이고 가까운 적은 당연히 일본이므로 마땅히 대응방침을 정하고 그에 따라 준비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 육군으로는 현대전을 담당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구전을 이용하여 일본군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하면서 지구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팔켄하우젠이 중국 육군의 무기체계 등을 고려하여 현실적으로 중국 육군이 일본 육군을 상대로 정상적인 정면대결을 수행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중국군에게 지구전을 수행할 것을 조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10 팔켄하우젠이 말한 지구전은 본인의 강연록에서 ‘차례차례 저항하고 싸우면서 퇴각하여, 공간의 양보를 통해 시간의 연장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아군이 우세할 때에는 때때로 적과의 접전을 유도하나, 아군이 열세할 때에는 적이 만약 강력하게 공격을 한다면 어떤 한 지역에서는 당면의 적을 지체시키고 다른 방면에서는 주력 결전의 승리를 유도하고 차후 적에 대한 결전의 기도를 쉽게 달성할 수 있도록 아군에게 유리한 선으로 적 작전을 유도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2 따라서 팔켄하우젠이 말한 ‘지구전’이란 단순히 공간을 양보하면서 시간을 획득하여 전쟁을 장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후 주 결전지역에서 승리하기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제스가 실제로 전투에서 실행한 전략은 이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었다. 1937 년 7 월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3 개월 이내에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속전속결을 추구했다. 이에 대해 당시 국민당 지도부가 구상한 항일전략은 팔켄하우젠이 조언했던, 중국의 거대한 인력과 광활한 영토, 그리고 지형적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지구소모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930 년대 초부터 장제스는 일본의 대륙침공을 예상하면서, 군사적으로 우세한 적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공간과 2 军事委员会军令部第一厅第四处,《抗战参考丛书》, 1939

111 시간을 맞바꾸는 원칙에 입각하여 전쟁을 최대한 지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제스의 항일전쟁 전략은 ‘퇴각’이 아니라, ‘강한 적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전쟁을 지연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장제스의 전략은 상하이전투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그의 전략적 선택은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이와 난징을 잇는 지역에 마련된 진지에서 사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판단과 달리 전쟁이 발발한 시점은 중국에 불리했다. 일본군은 상하이에 2 개 사단을 상륙시킨 데 이어, 9 월 중순까지 6 개 사단 약 20 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였으며, 전함, 항공기, 전차, 포병과 특수부대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최초 일주일간은 중국 군이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하며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듯했으나, 중국국군의 사상자는 당시 13 만명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전략의 실패는 난징전투에서도 잘 보여진다. 국민당 지휘관들은 그들의 수도를 사수하는 데만 골몰하여 중앙군을 무모하게 투입함으로써 방어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채 최정예 전투력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난징은 함락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7 주간의 무자비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난징이 함락되기까지 약 3 개월동안 발생한 일본군 사상자 수가 4 만인데, 중국군은 27 만에 달했다. 중국군 사상자는 이 전투에 투입한 국민당 군대의 60%에 해당하는 규모로 장제스의 결전추구가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장제스가

112 중국군의 최정예 부대인 중앙군을 투입함으로써 전력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국민당정부가 ‘정면적 대응’을 통한 ‘지연전’을 통하여 얻고자 했던 것은, 소련과 미국 등을 포함한 서구 강대국의 개입이었다. 하지만 전쟁초기의 국제관계는 오히려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아직까지 일본은 소련에 대한 전면전쟁을 시작하지 않았고, 미국, 영국 등도 중립정책을 표방하고 있었다. II. 중일전쟁 개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록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군사행동을 비난하였지만,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군수품과 전략자원들을 일본에 수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국제적 상황이 변화될 때까지는 단독으로 전쟁을 지속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국제환경의 열악함 속에서 전쟁을 지속해야 했던 중국은 난징함락 이후, 일본이 불확대방침을 유지하여 잠시 소강상태가 유지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전시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전시체제를 정비하면서 1938 년 장제스는 ‘사수결전’에서 ‘지구소모전’으로의 전환을 발표한다. 팔켄하우젠이 주장한 ‘지구전’의 개념은, 당시 국민당내에서 논의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내에서도 중요시 여기고 있었다.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인민전쟁과 지구전을 주장하면서, 이를 통하여 당시 혁명전쟁(국공 내전)과 항일전쟁(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 월 22 일 산시성에서 회의를 열고 작전지침을 마련했다. 상하이전투의 결과 일본은 중국의 3 분의 1 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오가 주장한 지구전에

113 따르면 1 단계인 전략적 방어의 단계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한 셈이었다. 일본군이 7 주동안 난징에서 지체함으로서 일본이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한 채, 전쟁이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장제스의 결전추구 전략 때문이 아니라, 일본군의 과감한 전과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당이 보여준 2,3 단계는 기습을 통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며, 일본 정부가 추구하는 ‘신속한 해결’을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단계에서 시행해야 할 작전으로 적의 병참선을 광범위하게 파괴하고 적의 수송을 방해함으로써 정규군의 작전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1940 년 8 월부터 12 월까지 시행한 백단대전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공산당 팔로군은 일본군 점령지역 후방에서의 대규모의 교통파격전, 즉 철도나 도로를 파괴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추진했다. 이러한 일본의 후방작전은 상대적으로 전방에서의 전투력 집중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2 단계가 적군과 아군의 역량의 변화를 일으켜 전략전 반격을 준비하는 시기로서 보냈다면, 3 단계는 아군이 전략적 반격을 하고 적이 전략적 퇴각을 하는 단계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참전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일전쟁의 결정적인 승리가 강대국의 참여로 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군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부하면서 약 9 년

114 동안의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지구전’을 통한 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3

마오는 중일전쟁 당시 정세를 판단함에 있어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역량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 전쟁의 끝을 예측할 수 없으며, 심지어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 있어야만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오의 지구전 전략은 일본 제국주의의 무기가 압도적으로 강한 상황에서 단기전 승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마오가 ‘인간’이라는 요인을 강조한 것은 적의 무기에 굴복하지 않는 중국 인민들의 의지를 고양시킴으로써 군사력 균형을 전환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 아군의 역량을 강화할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초기 마오쩌둥이 국민당을 상대할 당시 다른 전략들을 사용하면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확고하게 지구전전략을 밀고 갈 수 있었다.

3 박창희,《현대 중국 전략의 기원 : 중국 혁명전쟁부터 한국전쟁 개입까지》, 플래닛미디어 2011, p.124

115

마오쩌둥의 진심읽기

괴물 마오쩌둥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일전쟁이 시작할 기미가 보일 무렵부터,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입지를 강화해야 하는 동시에 공동의 적인 일본을 상대해야 하는 두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장융(Chang Jung)과 존 핼리데이(John Halliday)는 그의 책에서 38 개국, 363 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마오쩌둥에 대한 그동안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그려 놓았다. 마오쩌둥은 무엇보다 공산당 내에서 개인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개인적인 권력욕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고 하였다.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

이를 잘 보여주는 첫번째 일화가 그의 책에 소개된다. 1930 년대 초 마오쩌둥은 장시성에서 공산당 지역책임자로 성장하였으나, 공산당 중앙의 영도자들이 이 지역으로 밀어닥치자 마오쩌둥은 섬서성 지역으로 밀려 내려왔다. 당시 섬서성 북부 지역민의 존경과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혁명근거지를 이루고 있던 류즈단은 앞서 밀려내려 온 중앙 공산당 세력에 감금당해있던 때였다. 1935 년 공산당 특사들은 류즈단을 ‘홍군을 말살하기 위해 홍군 근거지를

116 세운’ 장제스의 첩자라는 죄목을 씌웠다. 당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한 그의 태도는 충성심의 발로로 인정받기는커녕 불리하게 작용하여 그는 ‘당이 그를 신임하도록 기만 전술을 쓰는 교활한 인간’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이 무렵 마오쩌둥이 도착한 것인데, 관대한 중재자 역할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그는 체포와 처형을 연기하라고 지시했고, 11 월 말 류즈단과 그의 동료들을 석방했다. 류즈단 일행에 대한 숙청은 ‘중대한 실책’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2 명의 희생양이 견책을 당했다. 이리하여 마오쩌둥은 지역 공산당 지도부를 파괴하는 동시에 그들을 구원한 사람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마오쩌둥은 그들의 근거지를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숙청 덕분에 류즈단과 그의 동료들은 마오쩌둥이 나타날 무렵 이미 충분히 겁을 먹었으며 (류즈단은 무거운 족쇄를 찬 후 간신히 걸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큰 저항도 받지않고 의사결정을 하는 지위 및 주요 군사 보직에서 그들을 축출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통치에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류즈단의 이름을 이용할 심산이었으므로, 자신이 류즈단을 숙청하는 것으로 보이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류즈단이 그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그를 살려 둘 생각도 없었다.

새 근거지에 자리를 잡자마자 마오쩌둥은 보급품과, 특히 무기를 조달할 수 있는 소련 관할의 국경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열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황허를 건너 동쪽에 있는 훨씬 부유한 산시 성으로 들어가 새로 병력과 보급품을 획득하고, 가능할 경우 근거지를

117 건설한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소련 관할의 외몽골로 진출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 원정은 1936 년 2 월에 시작되었다. 공산당은 대장정을 이야기할 때 그 목표가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라고 내세웠으며,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동족으로 간다’와 같은 구호를 내걸고 ‘항일전위대’를 자처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선전이었다. 마오쩌둥의 군대는 일본군에게 접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원정에서 소규모 전리품과 소수의 신병을 얻었으나 금세 장제스 부대의 반격을 받아 황허의 서쪽까지 격퇴당했으므로 몽골 국경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류즈단은 이 짧은 작전 기간 사이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몇몇 역사책에 따르면 그는 전투 중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증거는 그가 살해되었음을 시사한다.4 마오쩌둥은 관대한 중재자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유력한 지역지도자를 제거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세우는 데에도 성공한 것이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개인적인 야욕을 드러내지않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한 사례는 에드가 스노(Edgar Snow)와의 만남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오쩌둥이 개인적으로 남긴 글들만을 통해 그의 진심을 읽기가 어려워 가장 먼저 택한 것이 그가 만나 인터뷰한 4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32-233

118 사람들과 남겨진 글,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였는데, 마오쩌둥과 스노와의 만남은 스노의 적극적인 노력이나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오가 이를 정치적으로 계획하고 실천에 옮겨 공산당과 개인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자기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데 비해 장제스의 아들에 대한 태도는 편집증에 가까웠다. 스탈린이 장징궈를 아직 억류하고 있던 1937 년 2 월, 아들의 귀환을 간절히 원한 장제스는 또 다른 혜택을 중국 공산당에 베풀었다. 그는 공산당의 고정간첩인 사오리쯔 (1925 년 장제스의 아들을 소련에 데리고 갔다)를 국민당 선전부 부장으로 임명하여 언론을 담당하게 했다. 사오리쯔의 업무는 격렬한 반공적인 여론과 언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의 임명은 모스크바에 대한 매우 커다란 우호의 제스처였다.

이때부터 소련은 언론의 광범하고 열성적인 보도대상이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온건하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었을 때 사오리쯔와 마오쩌둥은 마오쩌둥을 선량하고 친절한 인물로 묘사하는 자서전 출간을 구상했다. 이 자서전에는, 마오쩌둥이 대일 항쟁에 전념한 것으로 묘사한 각종 선언문이 부록으로 추가되었다. 마오쩌둥은 열성적인 애국자의 어조로 다음과 같은 제사를 썼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싸웠다.’ 이 자서전은 11 월 1 일에 출판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119 마오쩌둥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공산군이 중일전쟁에 가장 헌신적이라는 신화가 탄생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수만명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이 신화 덕분이었으며, 이때 입당자 중에는 훗날 마오쩌둥 정권에서 요직을 맡게 될 사람이 다수 포함되었다.

<마오쩌둥 자서전>은 주로 1936 년 여름 마오쩌둥이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와 가진 회견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인생에 관해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은 이 때 뿐이었다. 스노는 또한 자신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 (Red Star Over China)>을 출판했다. 마오쩌둥 및 다른 고안당원들과의 인터뷰에 압도적으로 의존한 이 책은 피에 젖은 공산당의 전력을 말소하고 공산당 복권의 기초를 만들었다.

마오쩌둥이 스노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해 봄 마오쩌둥은 자신의 전기를 출판할 수 있도록 외국 언론인 1 명과 의사 1 명을 물색해줄 것을 상하이 지하조직에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신중한 조사를 마친 후 필요한 자질을 모두 갖춘 스노를 초청했다. 그는 미국인이었으며 영향력 있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및 ‘뉴욕 해럴드 트리뷴’에 기사를 기고했고, 중국 공산당에 호의적이었다. 스노는 7 월 레바논계 미국인 의사 조지 헤이텀과 함께 공산당 근거지에 도착했다. 헤이텀은 코민테른의 극비문서를 의료기 가방 속에 숨겨 운반했다. 스노는 3 개월 동안 머문 데 비해 헤이텀은 죽을 때까지 공산당과 함께 지내며 마오쩌둥의 주치의 겸 중국 공산당의 대외정보기구 요원으로 일했다.

120 마오쩌둥은 어느 것 하나 우연에 맡기지 않았고, 스노의 방문에 관해서 상세한 사항을 직접 지시했다. ‘보안, 비밀, 친절, 환대’ 스노가 사전에 제출한 질문서에 대해서 정치국은 답변을 세심하게 조정했다. 마오쩌둥은 스노에게 소중한 정보와 터무니없이 날조된 내용의 혼합물을 제공했으며, 스노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마오쩌둥 및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하고 단순하며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AB 숙청과 같은 고문 및 살인 사실을 은폐했고, 중국을 횡단했던 행군을 ‘대장정’이라고 이제 교활하게 재조명했으며, 행군 도중의 루딩 교 사건과 같은 영웅적 행동과 전추를 날조했다. 그는 자신이 병을 앓을 때를 제외하고 대장정 6,000 마일의 대부분을 일반 병사들과 함께 걸었다.’고 믿도록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또한 모스크바와 자신의 관계를 완전히 숨겼고,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원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다.

마오쩌둥은 스노가 쓴 내용을 모두 사후에 점검하여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고쳐쓰는 용의주도한 조치를 추가로 취했다. 1937 년 7 월 26 일, <중국의 붉은 별>이 출간되기 전, 스노는 옌안에 머물고 있던 아내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에게 한 이야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연락 사항을 이제 나에게 보내지 마시오... 사실 너무나 많은 내용을 삭제하고 나니 차일드 해럴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오.’ 스노는 이러한 배경을 <중국의 붉은 별>에서 언급하는 것을 피했으며, 대신 마오쩌둥이 ‘나에게 어떤 검열도 가하지

121 않았다’고 주장했다. 중국어판은 스노의 표현을 더욱 미화했으며, 그는 마오쩌둥의 발언이 ‘정직하고 진실’함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중국의 붉은 별>은 1937-1938 년 겨울에 영어판이 출판되어 서방의 여론을 친마오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 공산당은 불편부당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서쪽여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중국어판 출판을 기획했다. 이 책과 <마오쩌둥 자서전>에 덧붙여 세 번째 책이 스노의 자료를 토대로 제작되었다. 이 책도 중립적으로 들리는 <마오쩌둥의 인상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중국의 붉은 별>은 중국의 급진파 청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많은 청년들이 스노의 책을 읽고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중에는 최초로 티베트 공산주의자가 된 청년도 있었다. 이는 중국 공산당 부흥의 시작이었다. 미오쩌둥은 이 책의 출판이 ‘요 임금의 치수 업적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요 임금은 홍수를 다스려 중국 문명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신화 속의 황제였다. 장제스의 언론 담당 책임자인 사오리쯔는 스노를 지원하고 마오쩌둥 및 공산당을 홍보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근 1 년 뒤 장제스가 사오리쯔를 해임시켰을 때에는 이미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그들의 불온한 이미지를 씻은 뒤였다.5

5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56-258

122 가족에게 냉랭한 마오

마오쩌둥이 개인적으로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마오쩌둥의 아이들은 1937 년 초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외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고 사진을 보냈으나 마오쩌둥은 거의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6

마오쩌둥의 아내 허쯔전은 근 10 년에 걸친 결혼생활 동안 남편의 냉담한 태도를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몇 차례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 때문에 특히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중 하나는 대장정 도중에 한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한 것이다. 그녀는 또 자신이 아기를 ‘암탉이 알을 낳듯이 쉽게 낳는다’고 조롱한 남편의 농담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마오쩌둥이 자기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4 명의 자녀가 죽거나 버림받았을 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계속 임신시킨 것을 원망했다. 자오자오라고 이름 붙인 그들의 다섯번째 아이는 1936 년 바오안에서 태어났다. 전갈과 쥑 득실거리는 바오안의 생활여건은 참담했다. 1 년 후 허쯔전은 다시 임신했고, 이로 인해서 그녀는 우울증에 거렸다. 극도로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반복된 임신이 6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56

123 가정생활의 보상을 받지 못한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이 모든 고생도 부족하여 남편은 공공연히 외도를 일삼았다.7

장제스, 일본, 공산당의 삼국시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직접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정부는 항일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국이 단결하여 항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한번도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일본과 대항하기 위해 장개석과 연합한 것이 아니라, 장개석, 일본, 공산당의 삼국시대로 보고, 일본을 통해 장개석을 제거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소련이 원하는 대로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상하이에서 벌어졌고, 소련이 마오쩌둥에게 공산당 홍군이 국민당과 연합하여 싸우도록 지시하자 이를 반대하고 소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1937 년 7 월 7 일 베이징 교회 루거우 교(마르코 폴로 다리)에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7 월 말이 되자 일본군은 중국 북부의 2 대 도시인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했다. 장제스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군 역시 7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62

124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이 시점에서 일본은 중국 북부 너머로 전투를 확대하는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몇주일 안에 1,000 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상하이에서 전면전이 벌어졌다. 상하이는 장제스와 일본 모두 전쟁을 벌일 의사나 계획이 없었던 지역이었다. 일본은 1932 년 강화조약에 따라 상하이 부근에 불과 3,000 명의 해병대 병력만을 배치했다. 8 월 중순까지 일본의 계획은 여전히 다음과 같았다. ‘육군은 중국 북부에만 배치한다.’ ‘육군을 상하이에 파견할 필요가 없다.’

7 월 들어 일본의 신속한 북부 중국 점령으로 스탈린은 매우 직접적인 위협을 느꼈다. 대규모 일본군은 이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수천 킬로미터 길이의 국경선 어느 곳에서든지 소련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했다. 1 년 전 스탈린은 일본을 주요 위협으로 공개적으로 지목한 바 있었다. 이제 그는 국민당군의 심장부에 오래 전에 심어놓은 공산당 간첩을 활동하게 만들어 상하이에서 전면전쟁의 뇌관을 건드린 것으로 믿어진다. 전면전은 일본군을 불가피하게 중국의 광활한 심장부로 끌어들여 소련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8

일본과 중국의 전면전 발발로 마오쩌둥은 즉각 몇가지 이익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장제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중요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장제스는 홍군이 자치권을 가지도록 보장하는 것을 8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67-269

125 거부했었다. 홍군은 중앙정부 군대의 일부로 간주되기는 했으나, 이리하여 마오쩌둥은 자기 군대에 대한 통솔권을 가지게 되었다. 장제스가 중국군의 최고사령관이었으나 그는 홍군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없어 ‘요청’ 형식으로 요구사항을 전달해야만 했다. 이제 중국 공산당은 사실상 합법화 되었다. 이는 8 년동안 계속되면서 대략 2 천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중일전쟁에서 마오쩌둥이 거둔 각종 이득의 시작에 불과했다. 중일전쟁은 장제스의 위상을 크게 약화시켰고, 마오쩌둥이 130 만 명의 대군을 거느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전쟁 초기에 국민당군과 공산군의 비율은 60 대 1 이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3 대 1 이 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 유발을 막후에서 조종한 후 스탈린은 중국 홍군에게 참전하도록 명령했고,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 정부와 적극 협력하여 장제스가 일본과 휴전할 빌미를 조금이라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에 반대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을 모든 중국인들이 단결하여 일본과 맞서 싸우는 전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장제스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여러 해 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을 삼파전으로 간주했다고 측근들에게 말했다. 그는 중국 역사에서 삼국시대로 아려진 시기를 환기시키며 ‘장제스, 일본 우리의 3 왕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전쟁을 일본군이 장제스를 파멸시키는 기회로 보았다. 여러 해 뒤 마오쩌둥은 ‘큰손’을 빌려준 데 대해서 일본에 몇 차례 감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몇몇 일본인 방문자들이 일본의 중국

126 침공 사실을 그에게 사과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오히려 일본 군부 지도자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일본군이 중국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산악지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빼놓고 일본군을 몰아내는 전략은 한번도 세운 적이 없었다. 그는 장제스가 패배할 경우 중국 공산당이 일본 점령군을 이길 수 있다는 꿈 역시 꾸지 않았다. 그의 모든 희망은 스탈린에게 달려 있었다. 마오쩌둥은 1936 년 에드거 스노와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계산을 분명히 밝혔다. ‘소련은 극동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무시할 수 없다. 소련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다. 소련은 일본이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중국을 전략적 기지로 삼아 소련을 공격하는 사태를 좌시하겠는가? 아니면 소련이 중국인들을 지원할 것인가? 우리는 소련이 후자를 선택할 것으로 생각한다.’9

그러므로 중일전쟁에 대한 마오쩌둥의 기본 계획은 스탈린이 행동하기를 기다리면서 중국 홍군의 전력을 보존하고 홍군 점령 지역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상하이 지역은 물론 북부 중국에서 내륙으로 점점 깊이 밀고 들어갔을 때 마오쩌둥은 홍군을 전투에 배치하지 않고, 정부군의 보조적 지원부대로 활동하도록 한다는 데 장제스가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홍군이 9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70-271

127 침략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았다. 그는 홍군 지휘관들에게 일본군이 국민당 군대를 패배시킬 때까지 기다린 다음, 일본군이 진격한 뒤 일본군 전선 후방의 영토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그들이 정복한 중국의 방대한 여러 지역을 수비할 수 없었으며, 일본군의 점령지는 마침내 일본 영토 자체보다 훨씬 더 커졌다. 일본군은 철도와 대도시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주소 도시와 농촌 지역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또한 홍군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패배한 국민당군 병사들을 끌어모으라고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일본군에 편승하여 홍군의 영토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군대 지휘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소나기처럼 보냈다. ‘근거지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어라. 전투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일본군이 산시 성을 휩쓸고 지나갈 때 이렇게 명령했다. ‘산시 성 전역에 우리의 영토를 설정하라.’ 그는 여러 해 뒤 자신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수록 더 좋다.’ 마오쩌둥의 접근 방식은 일본군과의 전투에 열성적이었던 공산군 지휘관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이 일본군과 싸우기를 원했고 자신의 정책 시행을 위해서 1937 년 11 월 자신에게 가장 충성을 바치는 중국인 동지를 소련 비행기에 태워 옌안으로 보냈다. 이 사람은 왕밍이었는데, 스탈린은 그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가장

128 중요한 사안은 전쟁 (즉, 일본과의 전쟁)입니다. 전쟁이 끝면 우리는 내전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대다수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스탈린의 노선에 동조했다. 왕밍이 귀국한 후 처음으로 12 월에 정치국 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항일 전투 우선’ 정책의 창도자가 되었다. 홍군은 장제스가 최고사령관직을 맡고 중국 공산당이 그 일부를 이룬 국민당 군대 본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중공 정치국은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결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분명한 명령에 직면하여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료들은 마오쩌둥을 1 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마오쩌둥의 목표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모스크바는 1928 년 마지막으로 열렸던 중국 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정치 보고서를 발표하도록 정치국이 선정한 사람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왕밍이었다.

마오쩌둥은 또한 핵심적인 의사결정 기구인 서기처에 대한 통제도 상실했다. 1927 년 국민당과 갈라선 이후 처음으로 서기처의 회원 9 명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중 5 명이 마오쩌둥을 지지하지 않았다. 다수를 차지한 반대파의 지도자는 왕밍, 신사군의 사련관인 샹잉은 오래 전부터 공개적인 마오쩌둥 반대자였다. 장정 기간 동안 마오쩌둥이 집중적으로 타도 대상으로 삼은 장궈타오는 마오쩌둥을 증오했다. 그리고 저우언라이와 보구는 둘 다 왕밍을 지지했다. 저우언라이는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을 지지했고, 다수파의

129 의견에 기꺼이 따랐다. 마오쩌둥은 소수파였다. 왕밍은 모스크바의 권위를 등에 업고 모스크바에서 당을 대표하는 자격을 행사했으며, 스탈린을 만났고,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친한 사이였다. 러시아어에 능숙했고 크렘린의 행동 방식에 정통했던 그는 무자비한 야심가였다. 소련의 대숙청 기간 동안 그는 다수의 중국 공산당원들을 감옥이나 사형장으로 보냈다. 동안에 키가 작고 뚱뚱한 체구였으나 극도로 자신만만했던 이 서룬세 살의 공산당원은 마오쩌둥에게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1938 년 2 월 마오쩌둥이 장제스와 합의된 전략에 배치되는 명령을 계속 내리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정치국은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왕밍은 이러한 목적 외에 또 하나의 긴급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1 월에 마오쩌둥의 주도 아래, 장제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진차지의 새 공산당 영토는 공식적으로 공산당 근거지라고 선포한 것이다. 또 다시 정치국원의 과반수가 왕밍을 지지하였고 왕밍은 최고사령관 장제스에 홍군이 복종해야하며, 모든 새로운 공산군 근거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사전 동의와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회의록을 작성하였다. 이것은 모스크바의 노선이었는데,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우선정책’을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심각한 신경과민 상태가 된 마오쩌둥은 모스크바가 자신의 본심을 알지 못하도록 에방조치를 취했다. 1937 년 12 월 정치국 회의에서 ‘보안유지’라는 구실하에 참석자들의 자필 기록을 모두 압수했다.

130 1938 년 10 월말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들 (저우언라이, 샹잉, 보구, 왕밍)은 도시를 떠났다. 반대파를 공격하며, 전체회의에서 자신의 정책을 강압적으로 제시했다. 즉 홍군 근거지들을 적극 확장하고 필요할 경우 국민당 군대와 전쟁을 벌인다는 정책이었다.10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이 시작하기 이전부터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 먼저 장쉐량을 이용하였다. 마오쩌둥은 장쉐량이 장제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기꺼이 도와주고 그와 동맹 맺기를 원했다. 장쉐량이 소련에 의존하면 중국 공산당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고, 마오쩌둥은 전 중국을 통치하는 권좌의 막후 실세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장쉐량과 중국 공산당의 반(反)장제스 동맹을 제안하고, 장제스 대신 그가 국민당 정부의 새 최고지도자가 되는 데 지원할 것이라는 제안했다. 광둥성과 광시성이 동맹을 맺어 장제스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자, 마오쩌둥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동일한 반란을 일으켜 북서지방을 독립시켜 공산당과 동맹을 맺는 기회로 삼으라고 장쉐량을 설득했다.

장쉐량은 중국 공산당과 동맹을 맺고 ‘일본과 결정적인 투쟁을 벌일’ 용의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즉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인데, 장제스는 여전히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대가로 장제스 대신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도록 소련이 장쉐량 10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85

131 자신을 지원해주기를 원했다. 이 같은 제안은 스탈린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는 중국이 일본에 대항하여 전면전쟁을 벌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1 년 이후 중국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었다. 만주를 합병한 수, 일본은 1935 년 11 월 북부 중국의 일부 지역에 또 하나의 괴뢰정권을 세웠으나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면전쟁을 회피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일본이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다. 중국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중국의 광활한 내륙지방으로 끌어들여 그곳에서 발목이 잡히도록 하여 일본을 소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스탈린의 목표였다. 장쉐량의 제안은 소련에 적절했으나 스탈린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만주의 군벌 출신인 장쉐량에게 중국 전체를 단합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중국이 내전에 빠져들 경우, 이는 일본의 승리를 촉진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사태는 소련에 대한 일본의 위협을 배가시키게 될 것이었다. 소련 측은 자국이 제안을 검토하고 있는 듯이 속이면서 장쉐량을 유도하여 중국 공산당을 돕도록 만들었다. 소련 외교관들은 장쉐량에게 중국 공산당과 비밀리에 직접 접촉하라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협상 대표와 장쉐량의 첫번째 회담은 1936 년 1 월에 열렸다.

마오쩌둥은 장쉐량이 장제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기꺼이 도와주고 그와 진정한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 장쉐량이 소련에 의존하면 중국 공산당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고, 마오쩌둥은 전 중국을 통치하는 권좌의 막후 실세가 될 수도 있었다.

132 마오쩌둥은 자신의 협상 대표인 리커눙에게 장쉐량과 중국 공산당의 반(反)장제스 동맹을 제안하고, 장제스 대신 그가 국민당 정부의 새 최고지도자가 되는 데 지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 해 6 월 광둥성과 광시성이 동맹을 맺어 장제스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오쩌둥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동일한 반란을 일으켜 북서지방을 독립시켜 공산당과 동맹을 맺는 기회로 삼으라고 장쉐량을 설득했다. 그러나 장쉐량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지배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계획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모스크바는 노골적으로 그 계획에 반대했다. 스탈린은 분단된 중국이 아니라 일본을 전면전으로 끌고 들어갈 통일된 중국을 원했다. 스탈린은 중국을 단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장제스라고 확신했다. 모스크바는 중국 공산당에 이정표적인 명령을 내려 장제스를 적으로 취급하지 말고 동맹자로 간주하라고 말했다. ‘장제스를 일본인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홍군과 장제스 군 사이의 적대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 맞서 함께 싸우기 위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일은 항일의 대의명분에 따라야 합니다.’ 라며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이 적어도 당분간 장제스를 통일된 중국의 지도자로 받들기를 원했다. 모스크바는 장제스와 동맹을 맺기위해서 진지한 협상에 들어갈 것을 중국 공산당에 단호히 지시했으며 마오쩌둥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통일전선’에 관한 협상이 9 월에 시작되었다.

133 모스크바와 마오쩌둥 양측은 이러한 정책 변화를 장쉐량에게 숨긴 채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장제스 교체 문제에 대해서 장쉐량이 계속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마오쩌둥의 입장에서도, 장쉐량이 모스크바의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부추겼다.11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납치하고 죽일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기기까지 하였다.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장제스가 납치되자 한 지도자는 마오쩌둥이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장제스가 잡혔으므로 마오쩌둥은 이제 한가지 커다란 목표가 생겼다. 장제스가 죽도록 만드는 것이다. 장제스가 살해되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될 것이고, 따라서 소련이 중국 공산당 및 마오쩌둥 자신에게 권력을 안겨주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죽이기 위해서 공작을 벌이는 동안 스탈린은 장제스를 살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장제스가 잡힌지 3 일이 지난 12 월 13 일 소련의 난징주재 대리대사가 ‘이번 쿠데타에 중국 공산당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고, 만약 장제스의 안전이 위협받을 경우 국민의 분노가 공산당을 넘어 소련으로 비화될 것이며,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과 연합하라는 (중국 정부에 11 장융, 존 핼리데이,《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38-241

134 대한)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이번 납치 사건이 자신의 전략적인 각종 이익에 긴박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이해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일본과 공모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스탈린은 소련의 ‘노련한 중국 전문가’를 거의 모두 체포하여 고문과 신문을 이미 시작했다. 장제스가 납치된 지 4 일 수, 고문을 당한 한 몇 사람의 자백 내용 가운데 마오쩌둥의 이름이 곧 드러났다. 코민테른 서기장 디미트로프는 16 자로 마오쩌둥에게 이 사건이 ‘항일 통일전선에 명백한 손상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중국 침략을 도울 수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납치 사건을 비난했다. 이 전문의 요점은 ‘중국 공산당이 평화적 해결에 찬성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장제스 총통의 석방과 권좌 복귀를 보장하라는 명령이었다.

전보가 도착했을 때 마오쩌둥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고.. 발로 땅을 구르며 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다음 조치는 그 전보가 자신에게 도착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전보가 도착한 사실을 모두에게 비밀로 했는데,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죽이도록 장쉐량을 설득하기 위해 시안으로 가는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나중에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12 월 16 일자 전보가 ‘수신불량으로 해독이 불가능’했고, 중국 공산당은 18 일에 재전송해줄 것을 모스크바에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날조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 작전의 핵심에서 일한 무선 통신사들은, 판독이 어려운 전부의 경우 즉각 모스크바에 재전송을

135 요청하는 것이 표준적인 업무절차이며 적어도 위기사태 시에는 절대로 이틀 동안 기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19 일에 마오쩌둥은 공산당 정치국에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는 모스크바를 상대로 한 위험부담이 큰 전술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장제스의 납치 계획을 부추겼다는 사실만을 숨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직접 내린 명령을 숨기고 거역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으로서는 장제스를 제거함으로써 기대되는 전망이 스탈린을 화나게 하는 위험부담보다 더 컸다. 한편, 장쉐량은 모스크바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장제스를 안전하게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를 석방하고 함께 시안을 떠나 자신의 신병을 장제스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20 일 모스크바는 중국 공산당에 다시 전보를 보냈고, 마오쩌둥은 ‘평화적 해결책’을 지시한 이 두번째 전보도 숨겼다. 이제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자유 회복’을 도와주라는 지시와 함께 이 전보를 저우언라이에게 보냈다. 이리하여 마오쩌둥은 자신의 목표들을 스탈린의 목표들과 일치하도록 방향을 전환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주의자 박멸 정책’의 중단을 약속하도록, 또한 장제스가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의 납치 직전, 장제스 정권의 모스크바 주재대사 장징궈의 귀국요청이 있었는데, 모스크바는 그제서야 이를 받아들일 용의를 보였다. 저우언라이가 이와 같은 스탈린의 직접적인 약속을 들고가자, 장제스는 공산당의 요구사항에 동의하고 ‘직접 협상을 위해 난징에 오도록’

136 저우언라이를 초청했다. 이 순간부터 중국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산적집단이 아니라 합법적인 정당으로 대접받게 되었다.12

마오쩌둥 그는 정말 괴물이었는가?

그레고어 벤턴(Gregor Benton)과 린춘(Lin Chun)의 편저, Was Mao Really a Monster? 는 장융(Chang Jung)과 존 핼리데이(Jon Halliday)의 책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장융(Chang Jung)은 중국 자료들을, 그의 남편이자 공동저자인 존 핼리데이(Jon Halliday)는 러시아 자료를 담당하였으며, 38 개국, 363 명의 인터뷰를 통해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심도있게 연구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라는 것은 과장된 소지가 있다고 하였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발견이라기 보다는 이전에는 없던 마오에 대한 평가 혹은 비난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헌신은 전혀 없이 오직 권력욕으로만 점철된 삶이었다는 것인데,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좋은 가족은 아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가족을 너무 지극정성으로 돌봤다면, 당시 그의 군사들로부터 사적인 목적을 위해 당을 희생시킨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장융과 존 핼리데이의 마오에 대한 적개심은 단지 그들의 해석뿐 아니라,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적 12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까치, 2006, p.247

137 서술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1925 년 소련으로 간 것은 장제스의 허락에 의한 것이었지, 납치당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장융의 초기 작품 『대륙의 딸』과도 모순이 생기는 등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많은 사실들이 검증되지 않은 채 정황적인 증거로만 판단되고 추측되었다. 익명의 인터뷰 당사자도 너무 많고,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을 참고하였다는 점 역시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또한 마오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객관적인 학술서가 아니라 격정적인 비판만 가득한 글 같다고 평가하고, 반대의 근거들을 제시하였다.13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매우 그럴싸하고 흥미진진했지만, 다소 한쪽으로 치우쳐진 마오의 일면만 보게 되는 것 같아, 마오쩌둥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 본 그 당시 에드가 스노(Edgar Snow)와 존 서비스(John Service)의 글들도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항일을 위한 민족주의

마오쩌둥은 1937 년 8 월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항전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자’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일부 국민당원들은 항전이 승리한 후에 가서 정치개혁을 하자고 한다. 13 Gregor Benton and Lin Chun, eds., Was Mao Really a Monster? The academic response to Chang and Halliday’s Mao: The Unknown Story, Routledge, 2010

138 그들은 정부의 단독항전만으로 일본침략자를 타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정부의 단독항전만으로는 어떤 개별적인 승리나 얻을 수 있을 뿐 일본 침략자를 철저히 타승할 수는 없다. 오직 전면적인 민족적 항전에 의하여서만 일본침략자를 철저히 타승할 수 있다. 그러나 전면적인 민족적 항전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국민당 정책의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전환이 있어야 하며 전국의 상하가 철저한 항일의 강령을 공동으로 실행하여야 한다’. 14 77 사변이 일어난 직후 마오쩌둥은 일치항일의 공식적인 주장을 내놓으며 공산당을 단결시키려 한 것이다.

에드가 스노(Edgar Snow) 역시 1935 년 12 월 9 일 학생시위가 “내전을 중지하라! 항일을 위해 공산당과 협력하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것을 보여주면서 당시 항일을 위한 단결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해주었다. 이것은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15 또한 상하이의 선교사 학교에서 교육 받은 왕목사에 대한 소개가 간단히 나오는 데, 그는 청방의 회원이었다. 교회 일과 관직을 떨치고 나온 왕 목사는 한동안 공산당과 협력해 왔다. 그는 군벌이나 관리들과 접촉하는 공산당의 일종의 밀사였는데, 그 때 14 마오쩌둥,《모택동 선집 2》, 범우사, 2002[1991], p.29

15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2013[1939], 홍수원 외 역 《중국의 붉은 별》 (서울: 두레), p.34

139 공산당은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항일민족전선 제안에 대한 이해와 지지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16

또한 그는 글에서 1936 년 마오쩌둥의 집에서 개인적으로 만났을 당시, ‘나는 마오가 감정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라는 짙은 인상을 받았다.’17고 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고 하였다. ‘그는 개인의 중요성을 매우 하찮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내가 만난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위원회, 단체, 군대, 결의안, 전투, 전술, 방책’ 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하고 개인적인 체험은 거의 말하려 하지 않았다. 개개인의 자세한 역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이 없고 ‘집단’적인 측면에서만 중요성을 가진 듯 했다.’18

마오쩌둥의 회고담은 ‘개인이력’의 범주를 벗어나 왠지 선뜻 감지되지 않은 채 하나의 거대한 운동의 진행과정 속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이 운동 속에서 그는 계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의 개인적인 모습을 뚜렷하게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는’이 아니라 ‘우리는’이었고 마오쩌둥이 16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2013[1939], 홍수원 외 역 《중국의 붉은 별》 (서울: 두레), p.41

17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2013[1939], 홍수원 외 역 《중국의 붉은 별》 (서울: 두레), p.111

18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2013[1939], 홍수원 외 역 《중국의 붉은 별》 (서울: 두레), p.159

140 아니라 홍군이었으며, 홀로만의 삶의 체험에 비쳐진 주관적인 인상이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운명의 변전을 역사 자료로서 관심깊게 지켜본 방관자 같은 객관적 기록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에는 내가 그 자신에 관한 것을 캐물어야 할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 당시에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당시 ‘그’의 직위는 무엇이었나?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 그의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되는 다음 이야기 가운데 그 자신에 관한 언급이 섞이게 된 것은, 대체로 그러한 내 질문을 통해 억지로 이끌어 낸 것이었다.19

1933 년 10 월부터 1934 년 10 월까지는 제 5 차 초공전이었다. 우리는 두가지 실책과 장제스의 새로운 전술, 전략이 국민당군의 압도적인 수적, 기술적 우세와 연결되어 홍군은 1934 년 급속하게 악화되는 장시에서의 존립 여건을 타개할 방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밖에도 국내 정치상황이 주요 활동 무대를 서북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어요. 일본이 만주 및 상하이를 침략하자 소비에트 정부는 이미 1932 년 2 월에 공식적으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했습니다. 국민당군이 소비에트 중국을 봉쇄하고 포위하는 바람에 이 선전포고는 물론 실행할 수 없었지만, 이 포고에 뒤이어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중국 내의 모든 19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2013[1939], 홍수원 외 역 《중국의 붉은 별》 (서울: 두레), p.219

141 무장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1933 년 초 소비에트 정부는 내전 중지, 소비에트 지역 및 홍군에 대한 공격 중지, 인민대중에 대한 시민적 자유권과 여러가지 민주주의적 권리 보장, 항일전쟁을 위한 인민의 부장화 등을 수락하는 조건이라면 어떠한 백군과도 협력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20

반일감정이 점차 매서워지자, 국민당정부는 일본에 강력하게 대응해야하는 압박감을 느꼈다. 또한, 1937 년 12 월 시안사변에 이어 장제스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미래의 공격에 저항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시안에서 석방을 받아낸 것이었다. 따라서 1937 년 2 월 장제스는 그의 오랜 적인 공산당과 화해를 맺기 시작할 수 있었다.21

만주사변 직후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일화배척운동과 경제절교운동 등 배일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미 만보산사건 이후 시작된 배일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918 만주사변 이후 일화배척운동 (日貨排斥運動)은 관민(官民)의 일체적인 행동을 통해 철저하게 수행되었다. 실제로 1932 년 8 월 1 일에는 광동(廣東)에서 20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2013[1939], 홍수원 외 역 《중국의 붉은 별》 (서울: 두레), p.231

21 Lloyd Eastman, et al., Nationalist China during the Sino-Japanese war 1937-1945, Ca 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120

142 일화검찰원(日貨檢査員)이 일화(日貨)를 밀수입한 혐의로 총살에 처해졌으며, 18 일 남경(南京)에서 항일회 (抗日會)는 밀수혐의로 체포된 사람에게 사형(死刑)을 선고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제품을 공개적으로 유통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22 이정희(2017)에 따르면, 중일전쟁시기 조선화교들 역시 활발한 항일활동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민항일전쟁 기념관에서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기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항일한 모습
중일전쟁기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항일한 모습

22 김지환, ‘중일전쟁기 중국의 전시외교와 국제관계’, 동양사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 집(1), 2019, p.150

143 이러한 항일정신은 당시 분위기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이 탄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자체가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 침략에 따른 중국인들의 민족주의의 자각’과 ‘봉건왕조와 군벌정치의 폐해를 타파하기 위한 반봉건적 민주주의의 실현 욕구’ 등, 그 시작 자체가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23

장제스에 대한 자신감

중일전쟁 당시 미 외교관이었던 존 서비스(John Service)의 글에서 그의 마오에 대한 주된 평가는 ‘마오는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중국정부를 장악하고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의 라이벌 국민당에 대해 비난은 아꼈다. 그리고 대신 이렇게 표현하였다. “장개석에 대한 우리의 지지는 폭정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그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직 90 명의 단독 정당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었는데, 히틀러가 오히려 더 민주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적어도 히틀러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으니까” 24 마오쩌둥은 장개석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은 삼가면서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1937 년 9 월에는 ‘국공합작 성립 23 이건일,《모택동 vs. 장개석: 중국국공혁명사》, 삼화, 2014, p.75

24 Lynne Joiner, Honorable Survivor: Mao's China, McCarthy's America, and the Persec ution of John S. Service (2009) p.71

144 후의 절박한 임무’라는 그의 글에서, ‘지금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통일전선으로는 완수하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양당의 통일전선을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오늘의 항일통일전선에는 아직도 국민당의 전제정책을 대체할 만한, 양당이 공인하고 공식적으로 공포한 정치강령이 없다.’며 ‘정부와 군대의 단독항전만이 아닌, 민중을 불러일으켜 통일전선을 충실히 이행시켜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25

이러한 자신감 넘치는 마오쩌둥의 영향은 중일전쟁 후반기 옌안지역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존 서비스(John Service)는 1944 년 7 월 22 일 옌안지역에 도착하고 느낀 당시의 분위기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마침내 옌안지역에 도착했다. 무엇보다 우리를 놀랍게 했던 것은 옌안지역의 분위기였다. 충칭지역은 이제 전쟁이 끝나기만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상하이와 난징지역에 있는 집과 가족들에게 곧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옌안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가난하고, 야외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은 열정과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그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공산당들이 항상 말하는 것처럼, 상황은 매우 좋았다. 모든 25 마오쩌둥,《모택동 선집 2》, 범우사, 2002[1991], p.41-43

145 것이 긍정적이고, 모든 것이 좋고, 우리는 이길 것이고, 이기는 길로 가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국민당은 우리를 휩쓸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 이 지역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다. 그들의 태도는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굉장히 새로운 것이었는데, 우리를 받아들여주고, 환대하고, 우리를 경계하거나 밀어내지 않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그들의 연락담당자는 우리가 있는 곳에 함께 머물러 시간을 보냈다. 허물없이 편안했고, 그 곳의 사람들은 서로 굉장히 가깝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26

호탕하고 우호적인 마오

마오쩌둥은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잔인하리만큼 냉정하고 차가웠던 반면, 그의 동료들 심지어는 서양에서 찾아오는 외부인사들에게는 매우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 서비스(John Service)는 당시 공산당 지도자들과 마오쩌둥을 굉장히 비격식적인 자리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새로운 공산당 지도자들을 만나서 거의 하루에서 이틀간 우리에게 보고해주었다. 모든 고위 군 관료들, 주더(Chu The), 예젠잉(Yeh Chien-Ying), 펑더화이(P'eng Teh-Huai), 린피아오(Lin Piao)와 여러 26 John Service, Interview with John Service, The Bancroft Library University of Califor nia at Berkeley, 1977, p.319

146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미 옌안지역에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7 번째 당대회에 대해 말했고, 분명히 시의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또 여러 외부에서 온 많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1-2 달 정도 걸려서 그곳으로 왔다. 그래서 그들은 미리 옌안에 와있었다. 나는 그들과 인터뷰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매우 두꺼운 메모를 남겼다. 마오쩌둥은 초기 만남에서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어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 또한 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고 조금 더 알아가고, 당신이 우리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난 뒤에 우리가 이야기를 나눴다면 우리의 대화가 좀 더 유용했을 것 같습니다.” 한달 뒤, 나는 “다음날 2 시반 경에 만날 수 있겠습니까?”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두시였었나. 나는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날의 대화는 오후 2 시부터 밤 10 시까지 이어졌다. 나는 모든 것을 메모했으나, 내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50 년 그녀(Caroline)는, 아마도 그 메모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항상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모두 버렸다. 27 마오쩌둥이 저녁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우리는 거의 아무 때에나 만나서 어딘가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전화가 있었는데, 전화로 본사에 연락해서 “제가 잠깐 가도 될까요?” 27 John Service, Interview with John Service, The Bancroft Library University of Califor nia at Berkeley ,1977, p.321

147 “물론입니다.”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었다. 만약 그렇게 만나게 되면, 점심을 같이 먹거나 하는 그런 식이었다. 마음이 잘 통하는 듯 하였고, 친절하였으며, 솔직한 그런 분위기였다. 물론 그들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웃음)’28

1942 년 있었던 공식적인 환영만찬에서 미 외교관 존 서비스(John Service)는 마오쩌둥의 오른쪽에, 콜로넬바렛(Colonel Barrett)은 마오의 왼쪽 (주더의 옆에) 앉았다. 마오쩌둥은 진심으로 미국과 협조를 요청했었는데, 존 서비스(John Service)는 그것이 진심이었음을 회상하면서, 당시에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실수라고 말했을 정도였다.29

나가며

중국인민항일전쟁 기념관 중반부쯤 들어섰을 때,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 초판본 등이 당시 외신기자들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너무 신기하기도 했고, 또 전시된 사진 중에 에드가 스노를 찾느라 정신을 28 John Service, Interview with John Service, The Bancroft Library University of Califor nia at Berkeley, 1977, p.320

29 Lynne Joiner, Honorable Survivor: Mao's China, McCarthy's America, and the Persec ution of John S. Service (2009) p.72

148 빼앗겨 책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움에 남는다. 그러나 이 사소한 책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움이 남을 만큼 그 순간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 순간이 마치 내게 ‘그래, 중국을 알아가는 옳은 길로 잘 들어섰어!’라고 격려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개인적인 권력에 눈이 먼 전략의 귀재였는가, 아니면 중국과 인민의 발전을 꿈꿨던 민족주의자였는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의 본 모습이라는데, 공산당과 마오 개인이 위협당하던 중일전쟁시기에 마오쩌둥의 전략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중국의 본 모습을 엿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려는 명백한 상황이었고, 소련은 자국에 위협이 될 이 같은 상황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을 마오쩌둥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하였다. 그는 개인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 노련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전쟁과 같은 위기의 순간에도 일본을 이용하여 자신의 적을 견제하는, 가족은 거의 버리다시피 한 지독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는 그저 자신의 사상에 자신감이 넘쳤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호탕한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택한 ‘인민전쟁’과 ‘지구전’이라는 군사전략은 항일전쟁을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주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전략은 공산당의 홍군 점령지역을 확장하기 위한 소극적인 항일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전히 중국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인물 마오쩌둥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복수 정답을 인정해줘야 하는

149 문제일는지 모른다. 역사 속에서 누군가 ‘사실은 이랬다!’면서 그들의 진심을 속 시원하게 밝혀놓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쩌면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 진심이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답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답사를 준비하고 직접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걸음 나아간 것은 우리가 중국을 알아가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 국가 지도자 개인의 진심읽기가 위인전을 읽거나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의가 있기를 바란다. 겨우 짧은 보고서를 쓰기 위한 이러한 시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더 깊은 연구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어떤 또 다른 어려움을 실제적으로 맞이하게 될 것 인가. 실제 벌어진 사건이나 정책을 넘어서 한 국가를 이해하는 데 지도자 개인의 진심읽기가 과연 중요한가,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진심읽기는 어떠한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국가를 얼마나 더 이해할 수 있는가는 본 주제와 관해 좀 더 고민하고 연구해 나아가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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