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글로버와 나가사키 젊은 그들, 조슈 5 인
EAI 사랑방 11기 규슈 답사기: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나가사키 구라바엔 · 이송은 · 연세대학교
구라바엔, 일본 근대화의 시발
해질 무렵 도착한 구라바엔( グ ラ バ ー 園 , Glover park)의 정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구라바엔은 16 세기 후반 대서양의 파도를 넘어 꿈을 안고 나가사키에 온 외국 상인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곳입니다. 유럽과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래한 이곳은 19 세기 일본의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최대 무역항으로 발전하는 기점이 된 곳입니다. 나가사키(長崎)는 요코하마(横浜)와 하코다테(函館)와 함께 일본의 최대 개항지로서 일본의 화려하지만 이색적인 곳으로써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나가사키 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일본식 기와에 덮인 서양식 건물과 나란히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가 탄생하였습니다. 그 땅에서 새로운 역사를 새긴 구라바엔은 스코틀랜드의 무역 상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 저택을 비롯해 3 개의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 주택과 나가사키 시내의 귀중한 서양식 건축물을 볼 수 있습니다. 3 개의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인 글로버 저택과 오르토 저택, 링거 저택은 150 년 이상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이 세 곳 모두 국가 지정 주요 문화재로서 「 메 이 지 일본의 산업 혁명 유산( 明 治 日 本 の 産 業 革 命 遺 産 ) 」 의 구성 자산에 등록되어 있습니다(구라바엔 홈페이지 2018 년 12 월 25 일).
구라바엔은 일본의
아름답고 경치 좋은 관광지로 알려져 있는 서양 상인들의 대( 大 )저택이지만 그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을 알고 바라보면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다양한 분야를 총망라하는 방대(尨大)한 저택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일본 근대화의 시발점인 구라바엔에서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옮기면서 방대( 尨 大 )한
저택 속에 숨겨 있는 이야기들을 살펴볼까요? 그 기점에서 한국의 젊은 친구들인 사랑방 12 기와 일본의 젊은 청년들인 조슈 5(長州五傑) 와의 조우를 통해 일본의 근대화와 그 기로에 선 청년들의 스토리를 함께 들어보고자 합니다.
무사의 나라에서 산업 국가로, 메이지유신
2018 년으로 일본의 메이지유신( 明 治 維 新 )이 150 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저희 사랑방 12 기가 도착해 보았던 나가사키 곳곳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 150 주년 행사가 곳곳에 열리고 있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사회, 정치, 문화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시 되고 있는 일본의 개혁이자, 정치적 근간으로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심축으로 작용되고 있습니다. 메이지유신이란 실질적 권력을 쥐고 있던 무가정권 에도 막부(1603~1867)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를 수립한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사회적 대변혁 과정으로서, 당시 조선의 갑신정변, 베트남의 동유( 東 留 ) 운동 등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벤치마킹하려 노력할 정도로 동아시아 사회에서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이지유신이 일본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메이지유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17 세기 초부터 백여 년 넘게 쇄국 정책을 유지해온 에도 막부가 1853 년 미국 동인도함대의 페리 제독이 무력시위로 개국을 요구하자 막부의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한 데서 출발합니다. 굳건히 유지될 것이라 믿었던 막부 정권의 흔들림이 곧 일본 사회의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막부는 이 상황에 독단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조정과 각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들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조정과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개국을
반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막부 최고 기념 ‘나가사키 막말
실권자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1858 년 유신제’
개국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고메이( 孝 明) 천황의 칙허 없이 서구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위기에 강압적으로 정책을 타진하던 정부에게는 반발이 생기기 마련이겠죠? 이러한 막부의 움직임에 반발하고 천황을 높이고 외세를 배격하는 ‘존왕양이( 尊 王 攘 夷 )’ 운동이 조슈 번 (번: 에도 시대에 통상적으로 쓰인 행정단위)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막부는 이에 존왕양이파를 탄압하기 위해 사형, 유배 등과 같은 처벌을 강행하지만 막부 정부에 대한 적개심만 높아질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존왕양이파에게 암살당하자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조정과 뜻을 같이한 존왕양이파와 막부 사이의 의견 대립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에 막부는 조정과 막부로 이원화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치는 ‘공무합체론’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메이 천황은 “막부가 양이책을 포기한다면, 그때는 천황 자신이 양이를 위한 친정을 행하겠다”고 표명하며 막부의 양이시행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결국 막부는 1863 년 5 월 10 일 이미 통상조약을 맺은 서양 각국까지도 배척하는 양이를 시행할 것을 약속했습니다(대학신문 2018 년 4 월 8 일자).
사실 막부는 실제로 양이를 시행할 계획이 없었고, 조슈 번은 단독적으로 개항에 반대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쓰에이(薩英) 전쟁, 시모노세키( 下 関 ) 전쟁과 같은 일본의 굵직굵직한 전쟁들이 일어나지만 결국 다 패배하였다.
이러한 기점에서 일본은 왜 근대화가 필요했을까요? 반세기 만에 국가를 변혁시켜 산업국가로의 기초를 쌓은 것은 세계역사상 지리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처럼, 일본은 무사의 나라에서 산업 국가로 나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은 ‘강대국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근대화의 원동력이 됨으로써 빠른 속도로 근대화가 가속화되었고, 메이지유신이 시행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1840 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한 소식은 일본에도 빠르게 전해져,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므로 이 일을 계기로
‘바다를 자유롭게 달리는 증기선과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는 대표를
가졌으며, 대국인 청나라도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일본은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나가사키 관광추진과 2018, 2)
이라는 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편 전쟁 이후에 쓰인 청나라 학자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중국과 서양의 지도, 역사, 서양의 기술 등을 해설한 책)’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의 각 번에도 강한 위기감과 개혁의 움직임이 한층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에도 시대 말기에 활약한 요시다 쇼인 ( 吉 田 松 陰 ),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가쓰 가이슈(勝海舟),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은 지사(志士)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시대를 기점으로 일본의 근대화가 급격히 가속화되었습니다.
이 중심에는 영국의 기술을 일본에 도입한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가 있습니다. 난학서( 蘭 學 書 ) 등 책에 힘을 빌려 산업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던 무사들에게 강력한 지원군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글로버는 21 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타고난 상인으로서의 재능 덕분에 23 세의 나이에 글로버상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선박의 왕래와 바로 앞에 건설된 나가사키 제철소를 볼 수 있는 이곳에는 많은 외국인이 방문하였고, 산업화를 지향하는 무사들에게도 최신기술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혼란기의 일본 속에서 글로버의 깨달음: “견문각지(見
聞覺知)”의 중요성
1859 년, 일본은 카나가와(神奈川), 나가사키(長崎), 하코다테(箱館) 3 항을 개항하였습니다. 1858 년 영일수호통상조약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영일수호통상조약은 영국과 에도 막부 사이에 체결된 영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통상에 대한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일본이 맺었던 불평등 조약 중 하나로서, 이를 계기로 이 해 9 월 글로버는 매킨지의 부하 상인으로서 나가사키에 도착합니다.
영국 청년 글로버가 도착한 일본은 어땠을까요? 이미 개항 시기의 나가사키는 거대한 무역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었고, 이 시기 약 150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중 대부분은 영국인들이었고, 글로버는 이 당시 무역상으로서 경험을 쌓아 갔습니다. 글로버는
“1859년의 글로버”
상회의 나가사키 대리점으로서 토머스 · 글로버 상회를 설립했습니다. 이어 덴트상회, 새슨상회 등 대형상회와도 에이전트 계약을 했고, 1862 년에는 아널드상회, 브레인테이트상회와도 파트너 계약을 했습니다. 이후, 글로버 상회와 명칭을 바꾸고 차의 재생공장을 운영해 차 수출을 주요 업무로 했습니다. 1863 년부터 1865 년경, 글로버 상회는 나가사키로부터의 차 수출량의 20~30%를 차지하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글로버가 일본에 왔을 때에는, 이미 몇 개의 메이슨계 상사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막부와 밀접한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글로버 상회가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없고, 민간 사업으로서 차의 수출부터 장사에 착하였습니다. 이 당시 글로버의 입장에서는 사업을 실행하는 데 있어 여러 걸림돌이 있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추후에는 이러한 글로버의 정치적 결탁이 추후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윽고 에도막부 말기 시사와 관련해 반막부적인 다른 번과의 무기 탄약, 함선의 판매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무기 상인으로 활약하게 된 글로버는 적극적인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 프리메슨의 사상인 자유, 평등, 박애를 근왕의 지사들에게 배양해 나갑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장 깊이 결합하는 것이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글로버 상회와 글로버저택의 설립 글로버의 인물관계도 또한, 글로버는 1866, 일본인 아내 츠루와 결혼하였습니다. 츠루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기모노 차림으로 일본 여성의 아내로서 남편 글로버를 위해 한평생을 받쳤다고 합니다. 이 좋은 아내가 있었기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글로버는 일본의 근대화에 놀랄 만큼 다양한 공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 글로버는 일기를 통해 일본의 젊은 청년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말하였습니다.
Glover believed in the importance of getting the brightest young
Japanese to the West to see for themselves the technical and other
advances; it is clear that he felt this the best way forward, that on their
return the rebels would be the best advocates of change and be listened
to more than any foreigner(Alexander Mckay 2014, 48)
이러한 믿음 아래, 글로버는 후대 널리 알려진 일본의 젊은 청년 ‘조슈 5’를 영국으로 유학 보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로버의 계략: 복잡한 현실 속 청년들과의 교류
그렇다면 글로버는 어떻게 일본의 젊은 청년들인 조슈 5 인을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을까요? 또한 이 5 인들은 어떤 인물들일까요?
먼저 조슈 5 인(長州五傑)은 조슈 번에서 1863 년에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유학을 떠난 엔도 긴스케( 遠藤 謹助 ), 이노우에 마사루 (井上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 井 上 馨 ), 야마오 요조( 山 尾 庸 三 ) 다섯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쇄국령으로 인하여 일본을 떠나 해외로 여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지도로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공부하였고, 이들 중 두 명은 일본의
이토히로부미. 앞줄 왼쪽부터
유력한 정치가가 되었는데, 이노우에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오 요조
(출처: 위키백과)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그
당시 일본은 쇄국령으로 인하여
일본을 떠나 해외로 여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지도로 공부하였고, 이들 중 두 명은 일본의 유력한 정치가가 되었는데,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나가사키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글로버의 저택은 근왕 시사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글로버는 이와 같은 조슈 5 인 시사와 이후의 기업가를 지원하고, 그들은 그 후의 일본을 움직인 중요한 인물이 되어 메이지정부 실현의 음지에서 공로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모두 글로버 저택 깊숙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1863 년 9 월, 생보리 사건의 보복으로, 영국 함대가 카고시마만에 침입해, 사쓰에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글로버 저택에서 조슈 5 인은 숨어 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조슈 5 인은 마쓰기 홍암(테라시마 종칙)과 함께 지휘하던 증기선 3 척을 나포해 배를 소각당하고 포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 분노한 동번사의 목숨을 노리면서 조슈 5 인은 당분간 신축하자던 그라바 저택의 지붕 뒤쪽에 숨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글로버는 에도막부 말기 회천 운동을 추진하는 지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해, 내일의 일본을 담당하는 뛰어난 인재(明日の日本を日本を担う逸材)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글로버는, 나가슈번의 젊은 엘리트였던 이토 히로부미(당시 23 세), 이노우에 카오루(29 세) 다테 5 명을 영국 유학을 알선하였습니다. 무쓰 무네미츠, 쿠로다 키요타카 등과도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조슈 5 인을 중심으로 한 사쓰마번의 19 명의 시찰단을 밀항시켜, 그 자금 원조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멕케이(Alexander Mckay)에 따르면, 어린 사쓰마인들을 몰래 출국시키는 단서를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났고, 고요는 사쓰마번 이에노 오마츠 대도를 이어서 번에게 상신서를 제출합니다. 고마쓰는 그래버와 친한 사이이고 번은 해외 유학생 파견을 즉각 결정하였습니다.
1863 년, “내일의 일본을 위해”떠나는 젊은 청년들
이렇게 유학을 결정한 일본 청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조슈 5 중에서도 이노우에 마사루( 井 上 勝 )는 본인의 일기에서 영국 유학 당시의 경험과 과정을 저술하고 있었습니다. 이노우에 마사루는 1843 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노무라(野村)가의 양자가 되어 노무라 야요기치라고 자신을 칭하였습니다. 그는 16 세 때, 번의 명으로 나가사키에 가서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양학을 배우기 시작해, 이듬해에는 에도성으로 나가 포술과 서양학을 배웠습니다. 1 년 반 정도가 흐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에도에서의 면학을 희망하면서 다시 에도로 갑니다. 또한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주지에서 영어를 공부하였습니다. 따라서, 외국에 대한 관심은 다른 선사(藩士: 제후에 속하는 무사) 이상으로 강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의 꿈
추후 일본의 철도의 아버지가 되는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는 조슈 5 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메이지 정부의 중진으로서 오로지 정치계에 발을 담갔던 이노우에 마사루는 청년 시절 어떤 꿈을 꾸었을까요? 1863 년 3 월, 조슈번이 요코하마의 마세손 상회에서 구입한 범선 등이 효고에 입항하였습니다. 이 당시, 번으로부터 선장을 명령 받았던 것은 마사루는 측량법을 맡은 야마오 요우조( 山 尾 庸 三 )였다. 두 사람은 서양학자 다케다 아야사부로( 武 田 斐 三 郎 )의 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서양의 학문,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게 되었고, 우연히 케이코고로( 桂 小 五 郎 )와 이노우에 후미타(井上聞多)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네 사람은 국금을 범하며 영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외유 허가를 번에 신청하면서 개혁파의 상사인 스후 마사노스케( 周 布 政 之 助 )에게 실현을 향한 진력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번의 요직에 있던 카츠라만은 중요한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락을 받을 수 없어, 그 대신 이토 슌스케와 엔도 킨스케가 가세하게 되었습니다.
1863 년 5 월 12 일 그들의 유학의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조슈 5 인 노무라, 야마오, 이토, 이노우에, 엔도의 5 명을 태운 마세손 상회의 증기선인 첼스윅호는 요코하마에서 상하이를 향해서 출항하였습니다. 그때 마사루는 5 명 중 최연소인 20 세였다고 합니다. 상하이에서는 배 2 척에 나눠 타고 영국으로 향하였습니다. 마사루, 야마오, 엔도 등 세 사람을 태운 '화이트 어더(ホワイトアッダ)' 호가 도버 해협에 들어서자 마침내 런던 남부로 펼쳐지는 백악질 절벽이 하얗게 빛나는 웅대한 경치가 보였다고 마사루는 추후 회고합니다. 이국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 생활이나 습관도 포함해 첫 해외 유학은 분명 놀라움의 연속이었다고 그는 후술하였습니다.
일본을 출발하고 나서 약 4 개월 후, 화이트 어더 호는 런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젊은 청년 3 명은 윌리엄슨 박사(화학 교수)의 집에 하숙해, UCL 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마사루는 그곳에서 분석 화학, 나중에는 지질 광물학과 더 나아가 수리물리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마사루는 영국 유학 당시 일본 철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는 런던의 교통수단 발달에 대해 감탄했고, 일본에도 철도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후술하였습니다. 대학에서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철도나 광산의 현장을 둘러보았고, 실제로 기관사를 배우면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1864 년 4 월, 조슈 번이 외국선을 포격 해 보복 당할 것 같은 것 같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알게 된 이토와 이노우에가 번을 구하려고 급히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에는 엔도가 컨디션이 안 좋아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윽고 야마오도 조선기술을 배우기 위해 글래스고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런던에 남겨졌던 마사루는 3 년이 지나고, 유학 자금은 바닥이 났지만. 그는 윌리엄슨 교수에게 도움을 받아 겨우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끝으로, 이노우에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국가에 대한 걱정은 국내에 있을 때보다는 오히려 해외에 있을 때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어 영주는 지금 얼마나 걱정하고
계실까? 동지 번사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그들이 양이에게
전사한 것이 아닐까 또는 패전의 결과 토지를 할양하는 궁지에 빠진
것이 아닌가?” (Sidney DeVere Brown, 1994)
나라의 존폐는 청년의 가슴에서,
글로버가 일본의 젊은 청년들인 조슈 5 인을 영국으로 밀항까지 시킨 이유는 글로버가 무역 상인으로서 영국 외교정책의 실현을 활성하게 하려는 그의 경제적 이점 등이 일차적인 목표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 ... owing to the political trobues Trade is almost completely
stopped...” (Alexander Mckay 2014, 46)
실제로 그는, 본인의 서신을 통해 일본 국내 생보리 사건을 시작해 사쓰에이 전쟁까지 일본 내 막부와 반 막부 세력 간의 갈등 속에서 영국 공사 파크와 함께 프랑스를 물리치고 일본 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로버의 개인적인 희망에 대한 실현도 있었지만, 그는 젊은 청년들의 꿈을 그 누구보다도 응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때 영국을 다녀온 일본의 젊은 청년들은 일본 최고 개혁인 메이지유신의 중추적인 인물들로 급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초대 외무장관, 농맹아 교육의 아버지, 초대 내각 총리대신 그리고 일본 철도의 아버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당시 일본 사회를 좌지우지 했던 인물들은 모두 20 대 청년입니다. 우리 사랑방 기수들 또한 미래를 꿈꾸는 20 대 청년들입니다. 그 기점에서, 나가사키에 있는 청년들의 꿈과 희망을 가슴에 담고 찬란한 미래를 꿈꿔볼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나가사키 관광추진과. 2018. “메이지 시대(1868 년~1912 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의 근대화 유산.” https://travel.at-
nagasaki.jp/resources/ko/main/industrial.pdf (검색일: 2018. 12.
22.)
대학신문. 2018. “150 년 전의 명치(明治), 현대 일본의 등불이 될 수
있을까.”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
no=18091 (검색일: 2018.12.22.)
McKay, Alexander. 1993. Scottish Samurai: Thomas Blake Glover
1838-1911, Edinburgh: Canongate.
Sidney Devere Brown. 1993. “Nagasaki in the Meiji Restoration:
Choshu Loyalists and British Arms Merchants,” Accessed
December 22, 2018. http://www.uwosh.edu/home_pages/f
aculty_staff/earns/meiji.html.
杉山 伸也.1993. 『明治維新とイギリス商人:トマス・グラバー
の生涯』(岩波書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