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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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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교류박물관 · 이새라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던 12 월 27 일, 사랑방 9 기의 일본 답사 둘째 날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시간을 넘는 긴 이동시간 동안 저는 지난 한 학기 동안 발표를 준비했던 나고야 성과 한일교류박물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나고야 성터 박물관을 볼 생각에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고야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축조한 성으로 부산과의 최단거리, 리아스식 해안으로 배를 숨길 수 있는 지리적 이점, 수십이 깊어 큰 선박도 정박이 가능하고 북풍이 가려진다는 이유로 선택되었습니다. 나고야 성은 약 1 년 6 개월 정도의 건축 기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특히 나고야 성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적 거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차를 마시기 위한 다실과 일본 전통 연극인 노를 공연하는 무대까지 갖춘 거대한 성이었습니다. (유홍준 2013, 264-266) 하지만 나고야 성은 정유재란이 끝난 후 권력을 이어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맙니다.

사진

사진 1. 한일교류박물관 가는 길 2.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_한일교류박물관

이러한 나고야 성이 다시 재건된 것은 1976 년의 일 이었습니다. 1968 년 나고야성도 병풍이 발견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사가현은 나고야성 재건에 멈추지 않고 이곳에 한일교류박물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합니다. 사가현 측에 따르면 한일교류박물관은 한일 양국의 교류와 우호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사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와 일본의 오래된 교류의 기록을 전시하고 있는 곳입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 회복은 비단 사가현만의 목표는 아닙니다. 특히 양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양국의 관계회복은 경제와 국내 및 국제정치 방면에서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이 FTA 를 발효한다면 한국과 일본의 실질 GDP 는 각각 9.11%와 10.45%의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성철 2005, 63) 더 나아가서 동아시아가 국제 연합의 체제로 발달하게 된다면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아시아가 국제관계에서 갖게 되는 영향력 역시 비약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김흥종 2013, 8)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한일 FTA 는 한중일 FTA 의 형식으로 여전히 실무협상 중에 있고 동북아 연합 역시 가능성 이상의 실질적인 대화로 발전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또 어떻게 하면 관계를 회복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1636 년 통신사였던 임광의 일본에 대한 심상에서 찾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임광과 1636 년 통신사

임광이라는 이름은 아마 한국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생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저 역시 1636 년 통신사에 관심 갖기 전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습니다. 임광은 1636 년 통신사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누구보다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임광은 1579 년에 출생, 인조 2 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풍저창의 직장, 홍문관 수찬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일본에 다녀온 이후에는 병자호란의 여파로 청나라 심양에 가 있던 소현세자의 좌부빈객으로 있다가 그 곳에서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기록으로는 김상헌이 쓴 비명이 있는데요, 거기에는 “공의 위인이 고상하고 강직하여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납해주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있을 적에 너나없이 두려워하였으며, 일을 만나면 마치 대를 쪼개듯이 먼저 순리적인 것부터 따라갔으므로 사람들이 그 지조를 빼앗을 수 없었는데, 이로 인해 가는 곳마다 의견이 2.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_한일교류박물관 맞은 사람이 적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257) 이것으로 보아 임광은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로, 학식이 높고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을 으뜸으로 아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임광의 1636 년 통신사는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 양국이 이해관계에 따르면 관계회복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반면, 임진왜란 후 황폐해진 조선과 임진왜란으로 조선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신한 일본이 사적인 감정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이지요. 동주 이용희에 따르면 당시 한일 관계는 제 3 기인 조선왕조시대 중에서도 중기에 속하는데, 이때 조선의 일본에 대한 심상은 일본의 침략을 오래 기억하고 일본의 무력을 두려워하게 된 것, 또 일본의 해군을 강력하게 인식하게 된 점 입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는 조선이 임진왜란을 명분의 없는 불의한 침략이라고 단정하고 일본과 구수(仇讐)의 관계라고 생각하게 된 점인데요, 이러한 관계설정에서 시작해서 조선은 일본의 비문화적(비유교적)인 것을 무식하고 야만스럽다고 생각하며 구수감이 더 깊어졌다고 합니다. (이용희 1970, 9)

병자일본일기로 본 임광의 일본 심상

임광의 일본에 대한 심상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임광의 일본에 대한 심상을 볼 수 있는 자료로는 병자일본일기가 있는데, 이는 1636 년 통신사행기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 민족문화추진회가 2008 년 국문으로 번역해 보다 편하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임광의 병자일본일기에 나온 임광의 심상은 사치스러운 나라, 무례하고 야만스러운 나라, 군기가 엉망인 나라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임광은 부산을 출발하여 처음 대마도부 서쪽 좌주나에 도착한 순간부터 대마도주를 만나고 일관산을 유람을 떠나는 모든 여정에서 일본이 격에 맞지 않게 사치를 부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이러한 심상이 잘 드러난 부분은 바로 통신사일행의 일광산을 여행할 때였습니다. 일광산의 불당들을 본 임광은

[……]등성마루의 기와나 처마의 기와는 다 금빛으로

장식했다. 석문에 이르러 보니 마치 우리나라의 홍문 같은

것인데, 두 기둥은 마주 세운 둘레가 각 두세 아름씩이나

되고 8 각(角)으로 다듬었으며 위에 가로지른 것 또한 돌을

사용했는데, 높이는 5 장이 못되지 않고 넓이는 세 칸에

지나지 않았다. [……] 난새와 봉황은 주조를 동으로 했는지

나무로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금해서 빛을 윤택하게 하지 2.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_한일교류박물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창호와 난함은 다 금, 은으로 장식했고,

염박과 유장은 구슬로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가지가지

사치를 극도로 해 놓은 형상은 다 기록할 수

없다[……]하늘은 반드시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데, 처사가

이와 같으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민족문화추진회 2008,

83-84)

사진

사진 2. 시모노세키에서 만난 조선통신사 도착지 라며 일본의 사치를 지적함과 동시에 이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임광의 지적은 정당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그림과 보물, 그리고 도공들을 데려가는 등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취해서 굉장히 부강한 상태였고, 또 정말 사치스러웠다기보다는 조선이 유교를 따랐던 것 과는 달리 일본의 문화였던 불교문화가 금색이나 붉은색 등 화려한 색을 선호한 탓에 느껴진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야케 히데토시 1996, 211)

일본이 무례하고 야만스럽다는 심상 역시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습니다. 동주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중국의 문화를 흠모하는 이른바 해바라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화와 비슷하지 않은 것을 열등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용희 1970, 15-16) 임광도 이러한 해바라기 현상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불교적 색깔을 야만적이라고 보고 이를 자랑하는 관백에 대해 이를 부끄러워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이웃나라의 사신에게 자랑하려 하는 것은 나무랄 수 조차 없을 만큼의 어리석음과 무식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민족문화추진회 2008, 85)

불교에 대한 유학자로써의 인상은 비난할 수 없지만, 일본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지적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야케 히데토시(三宅 英利)의 “조선통신사와 일본(1996)”에 따르면 당대 대 학자였던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경우, 조선통신사 일행을 반겼던 이유는 동등한 위치의 학자로써 지식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고, 2.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_한일교류박물관 조선통신사에게 글을 청했던 이유는 일본이 지적으로 열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외국의 사신을 대하는 예의였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통신사 일정이 끝나고 조선에 돌아온 임광은 인조에게 일본의 군대에 대해 “관백은 군병의 일을 힘쓰지 아니하여 포를 쏘는 일은 완전히 폐지하여서 사람들이 포성을 들으면 놀라 어쩔 줄을 모른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인조실록 1994, 257) 임광의 일본군에 대한 이러한 인상은 이전과 이후 통신사의 기록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병자호란이 없었다면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본에 대한 보복을 염두에 둔 임광의 심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607 년 통신사 기록에 따르면 일본은 “용예를 숭상하고 전진에 힘쓰며, 항상 훈련을 시켜 전쟁이 나면 백만의 병사도 바로 출진할 수 있었다” 고 합니다. (미야케 히데토시 1996, 224)

임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그렇다면 임광의 이러한 심상은 양국관계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요? 또 이 이야기의 결론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우선, 임광의 심상은 당시의 일본을 현실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통신사들의 심상에 근거한 외교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올바르지 않은 심상에 근거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사실 1636 년 통신사는 비운의 통신사라고 불릴 만큼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36 년 통신사의 주 임무는 일본과의 관계를 재정비 하는 것이었는데요, 이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탈중화적 가치관의 성립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우봉 2011, 37) 따라서 임광의 통신사는 일본의 장군과 노중에게 따로 서계와 예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일본의 답서에 일본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는 등, 조선의 가치에 위배되는 일면 굴욕적인 관계를 만들 임무를 띄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이들이 1637 년 조선에 돌아왔을 때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인해 또 한번 나라가 위태로운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이전의 명나라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새로운 국제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때 만약 임광의 통신사가 가져온 일본에 대한 심상이 긍정적인 것이었다면,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의 균형자 노릇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임광의 심상은 인조에게 일본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주었고 이에 따라 2.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_한일교류박물관 청나라가 조선에게 일본의 사자를 데리고 오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인조는 적극적으로 두 나라 사이의 가교가 되는 대신 “일본인이 교활하여 조선이 청나라에게 항복한 것을 알면 필시 우리나라를 깔볼 것”을 고민하며 이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미야케 히데토시 1996, 224)

현재 우리와 일본의 모습도 이와 많이 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제시대 이후 쭉 답보상태에서 도무지 나아질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일제시대 후 국제정세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했어야 하는 이전의 심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동시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은 상태가 유지된 결과일 것입니다. 하지만 임광의 심상이 조선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일교류박물관을 나서며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를 찾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한국의 일본에 대한 제대로 된 심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저는 한일교류박물관이 이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

사진 3. 한일교류박물관 전경

박물관을 돌며 사랑방 친구들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나고야에 한일교류의 뜻을 가진 박물관을 지은 것이 어찌 보면 얄궂고 어찌 보면 기발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갈등이 시작된 곳에서 갈등을 끝내려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발상이 한국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를 만들고 싶은 사가현의 진심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고야 성이 일본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한일교류박물관을 짓는다는 결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진심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일교류박물관은 임진왜란을 壬辰倭亂으로, 정유재란을 2.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_한일교류박물관 丁酉再亂으로 병기하는 유일한 일본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진형석 2006, 267) 원래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말은 文禄の役(분로쿠노 에키, 분로쿠는 당시 일본 왕의 연호, 에키는 전쟁이라는 뜻), 정유재란을 부르는 말은 慶長 の役(게이초노 에키, 게이초는 당시 일본 왕의 연호, 에키는 전쟁이라는 뜻)인데, 이런 명칭으로는 전쟁이 일어난 년도만 알 수 있을 뿐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일교류박물관이 한 것처럼 한자로 병기하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한일교류박물관의 역사를 바르게 보려는 노력은 박물관 끝에 있는 양국의 역사교과서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한국과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전시되어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관람객들은 역사 교과서의 차이를 볼 수 있고 지나간 역사를 정확하게 직시하게 해 줍니다.

유난히 날씨가 화창한 날, 얄미울 만큼 경치 좋은 곳에 있던 나고야 성터와 한일교류박물관을 방문했던 이 날은 앞으로 일본을 생각할 때 이전과는 다른 심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이용희. 1970. “한일관계의 정신사적 문제: 변경문화 의식의

갈등에 대하여” <신동아> 8 월호

민족문화추진회. 2008. 《(국역)사행록 해행총재 제 5 권》.

서울:한국학술정보

후마 스스무. 2008. 《연행사와 통신사》. 정태섭 역. 서울:신서원 미야케 히데토시. 1996. 《조선통신사와 일본》. 김세민 역.

서울:지성의 샘

김흥종. 2013. 《Regional Integration in East Asia: Lessons from

European Integration》. 서울: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성철. 2005. 《한국의 국가전략 2020: 동북아 경제협력》.

성남:세종연구소

하우봉. 2011. “조선시대의 통신사 외교와 의례문제”

<조선시대사 학보> 58

손승철. 2006.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교린관계의 허와

실》. 서울:경인문화사

유홍준. 2013.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파주:창비 진형석. 2006. 《일본 속 우리문화》. 서울:청년정신

한중일 FTA 홈페이지. http://www.fta.go.kr/cnjp/ (검색일: 2017. 12. 9) 조선통신사 문화사업 홈페이지. http://www.tongsinsa.com/html/

(검색일: 2017.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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