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복합 대청제국의 실낙원(失樂園)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원명원 · 이하형 · 연세대학교
들어가는 글
사랑방 답사 둘째 날 아침. 전날 내린 비로 인해 북경에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상쾌한 공기와 서늘한 날씨 속에서 우리는 다시 과거로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시간여행의 첫 목적지는 동아시아 전통의 천하질서(天下秩序)가 서구 근대의 국제질서(國際秩序)와 ‘충돌’하던 19세기말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형성된 질서가 부딪히면서 발생한 지진파에 의해 동아시아 전통 천하질서의 마지막 ‘수호자’ 대청제국(大淸帝國)이 붕괴했습니다.
48 중화세계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청과 흥망성쇠의 길을 함께 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답사지 원명원(圓明園)입니다.
원명원은 문명복합제국으로서 대청제국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원명원은 청의 전성기인 이른바 강건성세(康乾盛世)의 토대를 세운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때인 1709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860년 북경을 점령한 영불연합군에 의해서 약탈 및 방화를 당하기까지 약150년 동안 원명원은 꾸준히 증축되었습니다. 중흥을 꿈꾸던 청은 원명원을 복원하기도 하였으나 1900년 의화단운동을 진압하러 파견된 유럽연합군에 의해서 원명원은 다시 한 번 훼손됩니다. 청은 결국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원명원은 폐허가 되어 오랜 시간 방치되었습니다. 이처럼 원명원의 건설과 파괴는 대청제국의 흥망성쇠와 그 궤를 같이 했습니다.
원명원이 대청제국의 역사만을 닮은 것은 아닙니다. 원명원은 유교, 불교, 도교 등 동양의 문화와 더불어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재된 문명복합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는 문명복합제국으로서 청이 지닌 특징과 유사합니다. 청은 본래 천하질서에서 ‘오랑캐’로 취급을 받았던 만주족(滿洲族)이 세웠지만 단순히 이민족이 중화(中華)를 점령한 정복왕조가 아니었습니다. 청은 중화제국을 넘어 만주족, 몽골족, 한족을 포괄하는 화이일가(華夷一家)의
49 세계제국을 지향했습니다(이시바시 2009). 원명원은 다민족 다문화 세계제국으로서 청이 가지고 있던 개방성과 포용성이 응축된 원림(園林)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답사를 위해 대청제국과 원명원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들었습니다. 청은 왜 기존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상실하고 19세기말 서구문명에 대해서는 그토록 경직된 태도를 보였을까? 청이 만주족, 몽골족, 한족의 문화를 복합에 성공하였듯이 서구문명 또한 복합해낼 수는 없었을까? 대청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원명원은 왜 파괴될 수밖에 없었을까? 잔해만 남은 원명원 내의 서양루(西洋樓)를 바라보며 그 답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국치(國恥)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억되는 원명원
훗날 중국공산당을 설립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대부로 추앙을 받게 되는 리다자오(李大釗)는25살 청년이던 1913년 11월 1일 친구들과 함께 원명원을 찾았습니다. 리다자오는 언덕에 올라 잔해만 남은 쓸쓸한 원명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50 남기었습니다(왕롱주 2015, 315). 원명원 두 차례나 오랑캐의 겁난 만났으니 圓明兩度昆明劫, 천년 묵은 학은 차마 돌아오지 못하네. 鶴化千年未忍歸。 한 곡조 구슬픈 피리소리 다 불지도 못하고 一曲悲笳吹不盡, 남은 재만 오히려 저녁연기와 날리누나. 殘灰猶共晚煙飛。 아름다운 궁궐과 누각은 푸른 먼지투성이요 玉闕瓊樓委碧埃, 금수의 자취만이 황폐한 땅을 달리네. 獸蹄鳥跡走荒苔。 깨어진 비석 묻혔고 궁인은 늙었는데 殘碑沒盡官人老, 하릴없이 쑥대머리에 묻은 재만 터누나. 空向蒿萊撥劫灰。
여기서 두 차례의 ‘오랑캐의 겁난’은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한 1차 파괴와 이후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가 1900년 의화단운동 기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열강들에 의해 발생한 2차 파괴를 가리킵니다. 리다자오의 시에서는 중화문명이 금수와 같은 서구의 ‘오랑캐’에 의해서 침탈당했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몰락했던 중화문명의 부흥을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끈다는 소위 ‘100년간의 국치(a century of humiliation)’의 기본적인 역사관이기도 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원명원을 복원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아직까지 중국공산당은
51 원명원을 본격적으로 예전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복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폐허로 남은 원명원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지난 세기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답사를 했던 장소들 가운데에서도 원명원은 항일전쟁기념관과 함께 중국인 관광객이 유독 많은 곳이었습니다. 아마 그들 가운데 여럿이 무너져 내린 건물들과 황폐한 원명원의 옛터를 보면서 리다자오와 같이 울분을 삼키며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꿈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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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복합의 두 공간, 대청제국과 원명원
원명원을 건설하기 시작한 강희제는 호기심이 참 많은 황제였습니다. 특히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에도 큰 흥미를 보였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의 천문학, 수학, 의학 등을 접하였습니다. 한번은 의사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가 동면하고 있던 불곰을 해부하는 작업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선교사인 조아심 부베(Joachim Bouvet)는 자신이 저술한 『강희제전』에서 강희제의 서양문명에 대한 높은 호기심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서양과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우리와 함께 하였다. … 때로는 몸소 기하 수식을
동원해 거리를 측정하거나 야산의 해발과 연못의 넓이를
측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스스로 위치를 지정하고 각종 기기를
동원해 정밀히 계산해냈다. … 자신이 측정한 결과와 수치가
맞을 때면 한없이 기뻐하였다(옌총니엔 2014, 113-114).
강희제는 또한 자명종을 사용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 감탄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자명종을 읊으며>라는 제목의
53 시에서 강희제는 “그 기술은 서양에서 왔네. 그러나 우리도 배워서 그 기술을 익힐 수 있지”라며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활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스펜서 2001, 125). 이처럼 강희제는 서양의 과학기술이 지닌 우수함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거부하기보다는 수용함으로써 중화문명을 더욱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청의 황제들은 서양의 문물에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중화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오랑캐’들로부터 중국을 보호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즉, 한 편으로는 서구와 교류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중화의 수호자를 자처해야 했던 딜레마를 만주족 황제들은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만주족이 지닌 이민족 출신이라는 태생적 ‘결함’은 청의 황제들에게 늘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은 강희제가 1689년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조약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대청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맺었습니다. 본래의 천하질서는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인 구조이지만 네르친스크조약에서 양국은 평등한 관계로 간주되었습니다. 대신 한족 관리들은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54 네르친스크조약은 러시아어와 중국어뿐만 아니라 만주어와 라틴어로도 작성되었습니다(크로슬리 2013, 186).
그런데 만주어로 쓰인 만주문본과 중국어로 쓰인 한문본은 내용상 차이를 보입니다. 만주문에서는 청과 러시아가 대등한 관계임이 드러나는 반면 한문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은폐되어 있습니다(구범진 2012, 163-168). 다시 말해 네르친스크조약은 1648년 유럽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주권평등의 ‘베스트팔렌체제’가 유라시아 동쪽 끝으로 전파되어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55 ‘오랑캐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있던 청은 중화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내적으로는 네르친스크조약을 서구 근대의 국제질서가 아니라 전통 천하질서 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雍正帝)는 중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절대독재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미야자키 2001, 25). 옹정제는 군주제를 강화하면서 적극적인 한화(漢化)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한화정책이 심화될수록 ‘오랑캐’라는 만주족의 정체성과 중화사상이 충돌하여 모순을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옹정제의 노력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의 간행과 반포였습니다.
『대의각미록』은 대의를 통해서 청의 정통성에 대한 미혹을 일깨운다는 뜻으로 ‘오랑캐’인 만주족이 중화에게 보내는 답변이었습니다. 『대의각미록』은 황제가 직접 재판에 참석하여 청을 오랑캐가 세운 국가라며 비판하는 죄인을 문책하는 형식입니다. 황제는 반청(反淸)사상에 대해서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황제는 청을 아직도 ‘오랑캐’의 나라로 여기는 자들을 꾸짖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이시바시 2009, 245-246).
56 하늘은 중국 내지에 유덕한 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 바깥의
오랑캐를 중국 내지의 군주로 삼은 것이다. 어찌하여 안을
중국이라 하고 밖을 이적이라 하는 것인가? 우리 청조가 군주가
되어서 중국 내지에 들어와 천하에 군림한 이래, 몽골을
병합함으로써 변경에 살던 여러 부족이 모두 판도 안으로
귀복했다. 이것은 중국의 영토가 개척되어 멀리까지 넓어진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곧 중국의 신민에게는 위대한 행운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화이(華夷), 중외(中外)의
구분이 있다고 논할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옹정제는 대청제국의 ‘중화적 정통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이 중화세계의 수호자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할수록 바깥 세계에 대한 개방성은 떨어져갔습니다. 중외(中外) 출신으로서 중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중외를 배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청의 최고 전성기였던 건륭제(乾隆帝) 시기에 들어서면 청은 서양에 대한 종래의 유연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삼궤구고두의 예를 둘러싸고 매카트니사절단(Macartney Mission)과 건륭제가 벌인 ‘실랑이’입니다. 건륭제는 매카트니사절단을 지구 반대편의 영국 여왕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천자(天子)에 대한 예를 갖출 것을
57 요구했습니다. 건륭제는 또한 강희제와 달리 서구의 문물이 청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역을 요구하는 매카트니에게 건륭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습니다.
사해의 문물을 다스리는 천조는 정부의 일을 잘 처리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며, 희귀하고 값비싼 것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 우리는 기발한 물품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너희 나라의 상품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엘리엇 2011, 305).
건륭제는 또한 서구열강들을 동등한 제국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구열강들을 천하질서 안에서 중화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조공을 바치는 ‘오랑캐’로 인식하였습니다. 건륭제는 한 시에서 “포르투갈이 옛날 직공을 닦더니 잉글랜드가 오늘 신성을 바치네”라며 자신의 치세로 중화세계가 절정에 달했음을 뽐내기도 하였습니다(왕롱주 2015, 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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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건륭제는 매카트니에게 서구의 문물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원명원 안에 대규모의 서양식 건축물들을 세운 황제는 바로 건륭제였습니다. 유럽식 궁전과 정원을 원명원에 지음으로써 건륭제는 청이 이끄는 중화문명이 서양세력까지 천하질서에 편입시켰음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청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건륭제가 사망한 1799년 이후 청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강하던 청은 불과 60여년만에 수도 북경이 함락 당하고 황제가 피난을 떠나는 상황에까지 내몰렸습니다.
59 동서양의 건축물들이 혼재되어 문명복합제국으로서 청을 상징하던 원명원은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히고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咸豊帝)는 원명원이 영불연합군에 의해서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노하였고, 그 상실감 때문이었는지 이윽고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대청제국은 서구열강들에게 ‘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하였고 반(半)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대청제국과 원명원, 두 문명복합공간은 흥망성쇠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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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글
원명원이 영불연합군에 의해서 약탈과 방화를 당했다는 소식이 유럽에 알려지자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1861년 버틀러(Butler) 대위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Hugo 1861). 빅토르 위고는 청의 원명원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노트르담과 같은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하며 영불연합군의 행위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야만’의 행위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버틀러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의 흉상과 함께 원명원 내에 동판에 새겨져 전시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원명원을 찾아서 150년전 서구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게 저지른 ‘야만’의 행위를 잔해만 남은 원명원을 통해 생생히 목격하고 있습니다.
문명복합의 세계제국을 지향했던 대청제국은 ‘오랑캐’라는 출신의 결함을 극복하고 천하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과정에서 결국 중화세계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청은 초기에 보여준 타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포용성을 상실하고 점차 외부세계에 대해서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61 19세기 중엽 부국강병에 성공한 서구세력들의 접근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전통 천하질서와 서구 근대 국제질서가 충돌하는 가운데 ‘서구와의 만남’은 ‘서구로부터의 충격’이 되어 청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한때는 동서의 문물을 모두 간직한 지상의 낙원(樂園) 원명원은 이제는 잔해와 먼지만 쓸쓸히 날리는 낙원(落園)이 되어버렸습니다.
대영제국은 대청제국과 1858년 천진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문서에 더 이상 오랑캐를 뜻하는 이(夷)를 쓰지 못하도록 강력히 요구하여 결국 관철시켰습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누가 문명이고 누가 야만인지 그 표준을 둘러싼 동아시아에서의 싸움은 19세기 후반 일대 전환을 맞이하였습니다(Liu 2004). 두 차례에 걸친 원명원의 파괴는 동서양의 세계관 충돌이 폭력적으로 나타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다시 한 번 동서양 사이의 문명의 표준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19세기의 상황이 21세기에 반복되지 않도록 18세기 문명복합의 공간이었던 원명원을 새롭게 설계해야 합니다. 특히 동서가 교차하고 고금이 중첩되어 있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이 21세기의 ‘원명원’을 누구나 들어와서 살고 싶은 시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62 참고문헌 구범진. 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 민음사. 미야자키 이치사다. 2001. 《옹정제》. 차혜원 역. 서울: 이산. 옌 총리엔. 2014. 《청나라, 제국의 황제들》. 장성철 역. 서울:
산수야.
왕롱주. 2015. 《잃어버린 낙원 원명원》. 김승룡, 이정선 역. 서울:
한숲.
조너선 스펜서. 2001. 《강희제》. 이준갑 역. 서울: 이산. 마크 엘리엇. 2011. 《건륭제 – 하늘의 아들, 현세의 인간》.
양휘웅 역. 서울: 천지인.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2013. 《만주족의 역사 – 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 양휘웅 역. 파주: 돌베개. Liu, Lydia He. 2004. The Clash of Empires: The Invention of China in
Modern World Making.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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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o, Victor. 1861. “A Letter to Captain Butler.” Accessed on 7 July
2017.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
empires/articles/the-chinese-expedition-victor-hugo-on-the-sack-
of-the-summer-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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