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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중앙SUNDAY 공동기획] 발톱 감춘 중국 ‘도광양회’…1차대전 뒤 독일과 달랐다

분류
논평이슈브리핑
발행일
2026년 5월 18일

편집자 주

1·2차 세계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강대국들의 패권경쟁과 무력 선호,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 그리고 권위주의 부상, 국제기구 무력화…. 오늘을 읽는 키워드지만, 100년 전에도 유효한 키워드였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며 낯설어진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100년간의 평화’ 막바지였던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 시기와의 비교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은 “(양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짓눌렀던 개전(開戰)의 공포를 우리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투자계의 스티브 잡스로 물리는 레이 달리오는 “1945년 형성된 새 질서가 진화해 1929~1939년 당시와 유사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봤다. 미 국방부전략기획담당 특별보좌관 출신의 할 브랜즈도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1930년대와 훨씬 더 닮았다”고 했다. 과연 어느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 역사의 반복(repeat)인가, 비슷한 변주(rhyme)인가. 중앙SUNDAY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4일부터 공동기획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을 통해 이 논쟁을 다룬다. ‘100년간의 평화’와 전간기가 왜 비극적으로 귀결됐는지, 오늘날 그 경로를 차단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다. 12명의 전문가가 상호의존부터 패권 경쟁, 극단주의까지 12주제를 탐색한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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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라인란트에 진주하기 위해 강을 건너는 독일군. 당시 연합국은

이를 응징할 힘이 있었으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2차 대전의 씨앗이 되었다. [중앙포토]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쇠퇴하면서 중국 부상 관련 논란이 새삼 뜨거워지고 있다. 부상하는 중국은 수정주의 국가인가라는 논쟁에서부터 중국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고 주도할 것인가, 그리고 한다면 국제사회에 어떤 충격과 파장을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국제질서 전환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날로 고조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전간기 독일 사례는 불만을 가진 강대국이 기존 질서와 체제를 어떻게 흔드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를 제시한다.

전간기 독일은 베르사유 체제가 가져다준 불만·굴욕·제약을 경험했지만 곧바로 수정주의 국가로 변모한 것은 아니다. 수정주의 국가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상을 변경할 수 있는 힘이 축적되어야 하고 축적된 힘을 기반으로 기존 규범에 대한 시험을 시도한다. 규범에 대한 도전이 기존 강대국으로부터 큰 저항에 직면하지 않는 경험이 쌓이면 이를 점진적으로 기정사실로 굳혀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수정주의는 불만의 서사화, 역량의 축적 그리고 규범 도전과 무처벌의 기정사실화가 순차적으로 결합하면서 점진적 과정을 거쳐 발생한 정치적 산물이다.

중국, 2001년 WTO 가입 이후 국력 축적

실제 수정주의 국가는 한 번에 모든 국제규범을 깨지는 않는다. 상대가 즉각 총력 대응하기 어려운 작고 상징적인 도전부터 시작한다. 전간기 독일은 우선 1933년 10월 국제연맹과 세계군축 회의에서의 탈퇴를 통해 재무장의 규범적 제약을 벗어나고 이어서 1935년 3월 징병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하여 베르사유 체제의 집행 메커니즘이 작동 불능임을 경험적으로 확인한 이후 연쇄적으로 규범 도전을 이어가면서 기정사실화 단계로 진입했다. 수정주의 국가는 규범에 도전하면서도 자신이 규범 파괴자가 아니라 왜곡된 규범의 교정자라고 주장한다. 독일은 베르사유 질서를 깨면서 그것을 “부당한 질서의 수정”으로 포장하면서 정당화했다.

유비(왼쪽)와 조조의 대화를 그린 상상도.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의 도광양회(韜光養晦)에 얽힌 이야기를 담았다.

겁을 집어먹은 듯한 표정의 유비가 젓가락을 떨어뜨리자 조조가 통쾌한 듯 웃고 있다. [중앙포토]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도 유사한 수정주의 국가의 패턴을 이어오고 있다. 다만 중국의 수정주의 경로는 기존 국제질서 내부에 들어와서 장기간에 걸쳐서 완만하게 진행되었고 파괴적이기보다는 생산적이었기에 사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중국은 1990년대 이른바 ‘백년굴욕(百年屈辱, 아편전쟁~신중국 수립)’의 서사를 동원해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해왔다. 이어서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도광양회(韜光養晦)’ 기조하에 국제 체제의 경제적 혜택을 극대화하며 비대칭 국력을 축적해왔다. 그리고 2013년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제조 2025’와 ‘군민융합(軍民融合)’ 전략을 통해 핵심기술 자립을 추진하고, 미국을 겨냥하여 A2/AD(반접근/지역거부) 비대칭 군사 역량을 집중 구축했다.

중국은 부상이 본격화된 2000년대 이후 국력 증강에 상응하여 점진적으로 미국 주도의 기존 국제질서가 불합리·불공정하다는 주장을 제기해왔다. 특히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지난 13년간 일관되게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의 개혁’을 역설하고 이른바 인류운명공동체 등과 같은 다수의 ‘중국식’ 비전과 담론을 쏟아내면서 사실상 ‘부당한 규범과 질서의 개혁’ 추진 의지를 구체화해왔다. 실제로 중국은 이른바 ‘핵심이익’론을 제기하면서 제한적이지만 기존 규범에 도전하는 저항도 시도했다. 예컨대  중국은 2013년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ADIZ)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2016년에는 상설중재재판소(PCA)의 남중국해 영유권 패소 판결을 부정하면서 국제 해양법(UNCLOS) 체제에 공개적으로 도전했다. 홍콩 문제에 대해 서구의 인권 규범을 거부하고 자국 중심의 ‘담론권(話語權)’을 내세우며 보편적 규범의 한계선을 시험했다. 그리고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및 군사기지화에 이어서 최근 대만 해협에서 저강도의 군사적 압박을 상시화함으로써,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전 물리적·행정적 통제력을 지상과 해상에 ‘새로운 정상 상태(New Normal)’로 고착시키는 살라미 전술(Salami-slicing)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의 수정주의 경로는 전간기 독일의 패턴을 닮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확연히 다른 구조와 환경의 영향으로 상이한 특징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우선 중국의 부상은 상당 부분 기존 국제경제 질서, 세계무역 구조, 자본·기술 흐름, 해상 교역 체계를 활용해 이루어졌다. 즉, 중국은 세계시장, 무역, 투자, 글로벌 공급망, 국제제도 활용이라는 차원에서는 기존 질서의 수혜자이다. 동시에 중국은 안보 질서, 지역 위계, 규범 해석, 기술·제도 표준의 일부 변경 추구 차원에서는 수정주의자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전간기 독일처럼 국제질서의 취약성을 간파하고 질서를 전면 파괴하기보다, 기존 질서 안에서 수혜를 유지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규칙과 위계를 점진적으로 바꾸려는 부상국형의 선택적 수정주의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핵 억지력과 고도의 경제적 상호의존 제약 속에서 전면적 수정주의보다는 점진적, 제한적 개혁을 모색하고 있다. 여전히 대외의존도가 높은 중국은 미국-이란 전쟁의 여파로 경제 회복 계획에 차질이 우려되면서 오히려 “주권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무력 사용은 국제법과 유엔 헌장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규범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미국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라는 구조적 취약성을 내재하고 있어 자국의 경제발전과 체제 안전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이에 적합하고 유리한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조성하고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15차 5개년 규획(2026~2030년)’ 기간을 사회주의 현대화를 기본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기초를 다지고 전면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핵심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15·5 규획’은 2035년 현대화 강국 건설 목표의 기초를 다지는 가늠자일 뿐 만 아니라 시진핑 주석이 4연임을 넘어 5연임으로까지 가는 길을 여는 중요한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15·5 규획’ 기간 고품질 발전을 위한 핵심 기술의 돌파와 내수경제 회복에 외교와 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집중적으로 지원하고자 한다. 중국은 심지어 미국의 공세와 압박에 맞서기 위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있지만 정작 미국을 직접 겨냥하기보다는 오히려 내부 통합과 체제 지지의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전면전이라는 극단적 리스크를 회피하면서도, 힘의 축적과 제한적 규범 도전을 통해 점진적으로 기정사실화를 누적시키는 방식으로 장기적이고 정교한 수정주의 경로를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시장 접근, 공급망, 투자, 기술 표준, 희토류, 제조능력 등을 권력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고 있어 경제·기술·제도·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택적으로 점진적인 복합 수정주의를 수행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중국은 글로벌 가치사슬(GVC) 내 자국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희토류, 전기차 배터리를 무기화하면서 미국의 공세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유엔, WTO 등 기존 국제기구에 잔류하며 내부에서 규범을 자국에 유리하게 재해석 또는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동시에 ‘일대일로(BRI)’,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브릭스(BRICS) 확대,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미국 주도 국제기구와 경쟁할 수 있는 병렬적 다자 기구를 구축하여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를 자국의 규범적 궤도로 견인하면서 질서 변혁의 토대를 구축해 가고 있다.

ㆍ라인란트 재무장(1936)=베르사유 조약으로 비무장화된 라인란트에 히틀러가 군대를 진주시킨 사건. 영·프가 묵인, 나치 팽창주의의 신호탄이 됐다.

ㆍ백년굴욕=1840년 아편전쟁부터 1949년 신중국 수립까지 열강에 수탈당한 역사를 지칭.

ㆍ도광양회(韜光養晦)=덩샤오핑의 외교 노선으로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 굴욕의 기억을 동력 삼아 힘을 키울 때까지 드러내지 않는다는 전략.

ㆍ핵심이익=중국이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한 이익. 체제안정·영토보전·발전권익이 3대 축으로 대만·티베트·신장·남중국해 등이 해당하며 이를 건드리면 군사적 대응도 불사한다고 함.

ㆍ살라미 전술=살라미를 얇게 썰듯 상대가 각각 반응하기 어려운 소규모 행동을 반복해 점진적으로 현상을 바꾸는 전략.

혐중 벗어나 긴 안목으로 정세 대응해야

요컨대 중국은 국력의 상대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저성장, 체제 불안, 대만 문제 등 체제적 제약을 내재하고 있어 국제질서 전환이 초래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경계와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은 내부 역량 강화와 체제 안정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장기간에 걸쳐서 경제·기술·제도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복합적으로 서서히 규범과 질서의 변혁을 진행시켜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 수정주의 진행에 대한 예측과 견제, 대응은 오히려 더 어렵고 그만큼 장기적 시야를 갖고 정교해져야 한다. 따라서 혐중이라는 일차원적 감성과 정치 논리에 매몰되어 중국의 정교한 수정주의 진화 과정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각성할 필요가 있다. 어느 때보다도 긴 호흡으로 중국의 변화 흐름을 지속적으로 추적 관찰할 수 있는 연구와 분석 역량을 키워야 할 시기이다.

이동률 동덕여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베이징대 박사로 현대중국학회 회장을 지냈다. 중국의 대외관계·중국민족주의 등을 연구하며  『현대 중국의 세계 전략』(공저) 등의 저서를 냈다.

[출처:중앙일보, 고정애 기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8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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