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 5 월 13~15 일 북·중 회담을 중심으로 모택동 기념관 정하민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들어가며
분단 70 년 동안 북한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에는 북한에 깊은
이해관계를 맺은 중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끈질긴 북·중 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대북정책과 북·중 관계를 여러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국가의 대표만남의 시발점은 모택동(Mao
Zedong)과 김일성의 5 월 13 일 베이징의 만남부터 시작된다. 이 때부터
시작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현재 2018 년 이후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며 북·중 관계는 다시 한번 밀착 관계로 변화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은 중국의 지원으로 자력 갱생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중국의 대북정책은 한반도 상황과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그동안 한미의 대북정책은 중국의 대북정책과 북·중 관계의
변화를 항상 주목해왔다. 더하여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 또한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중국의 많은 입김이 작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를 통한 정책의
성패는 중국의 협력 여부에 달렸다.
한편, 소련의 붕괴 이후 냉전 시기를 기록해놨던 많은 양의 역사적
문헌들이 쏟아지며 냉전 시대를 문헌과 대조하며 그 시절 현장을
되짚어 보는 역사적 현장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써
현재까지도 냉전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국전쟁의 북·중·소 관계 또한
다시 파헤쳐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에
시발점인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oseph Stalin)의 만남을 중심으로 그
현장을 되짚어 보는 연구가 한창이지만, 한국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적
시각으로 이 만남에 대한 다방면에 현장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 안타까울 수 없다. 필자는 이 같은 문제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김일성을 이해하기에는 북한 다음으로 가장 근접한 한국에서 김일성과
모택동의 만남을 5 월 13~15 일 회담을 중심으로 이해해보려고 한다.
더하여 중국의 중심인 시진핑은 모택동과 같이 절대권력 반열에
오르는 등 행보에 공통점이 보인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로 김정은은
김일성을 벤치마킹하며 유일 지배체제 확립과 정책 측면에서도
경제건설 핵 무력 건설 병진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이처럼 시진핑과
김정은의 사상적 배경에는 모택동과 김일성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한반도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현실이 되어버린
한국전쟁 역사의 시작점인 모택동과 김일성의 5 월 13~15 일 회담을
중심으로 들어가 그들의 역사적 관계를 파헤쳐 보는 것으로 한국전쟁
있어 모택동과 김일성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며 나아가 당시의
만남의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동
1. 한국전쟁을 위한 김일성의 구애
1945 년 일본 제국주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북쪽으로는 소련, 남쪽으로는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후 대내적으로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체제적 양립과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결국 1948 년 8 월과 9 월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제가 들어서게
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서로 통일은 강력하게 원하지만 각자
본인의 체제 아래 하나의 한반도가 이뤄지길 주장한다. 당시 북한은
무력을 써서라도 남한을 공산화하길 원했고 무력 침공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일제에 잔재로서 남아있었던 중공업 지대를
가동하고 김일성을 필두로 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해놓은 상태였다.
또한,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동맹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던 북한은
두려운 것이 없었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김일성은 1949 년
신년사에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이라는 용어를 무려 13 회나 사용하면서
무력 남침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대한민국 역사박물관, 6·25 전쟁). 이에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지원을 약속 받기를
간곡히 촉구했다.
코민포름(Cominform) 설립 이후, 스탈린은 세계 공산당 체계 내의
정보 교류와 행동 통일을 매우 강조하였다. 티토는 바로 발칸연맹 및
그리스 내전 문제에서 보인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스탈린의 분노를
샀으며, 코민포름에서 축출되었을 뿐 아니라 소련 국가 보안
위원회(KGB)에 의해 피살될 뻔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러시아 당 안에 있는 대량의 전보와 회담 기록에서 보듯 김일성의 일
처리는 신중했고, 절대 자기 권한의 한계를 넘지 않으려고 하였다(션즈화
2017, 265).
1949 년 2~4 월 김일성은 무력 통일을 계획하기 위해 소련 방문을
단행하였다. 이 방문은 북한의 다수 정책결정자와 함께 전쟁에 대한
소련 승인을 얻으려는 중요한 일정 가운데 하나였다. 이 방문 기간
중인 3 월 7 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를 전달하였다. 스탈린은
만약 남한에서 먼저 전쟁을 시작한다면 북한의 전쟁 개전에
동의하지만, 북한에서 먼저 주도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예브게니 1998, 44). 하지만 북한에 대한 원조는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49 년 3 월 17 일 북한과 소련 양국 간의 경제적
및 문화적 협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션즈화 2017, 265).
당시 회담에서 스탈린은 아직 북한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다고
하여, 남침 계획을 만류하고 더 철저한 준비를 독려하였다. 당시
국제적 상황으로 보면 소련은 원자탄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으며
남한의 미군 주둔이 북한 원조에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더군다나 2 차
세계대전 후 냉전의 초기 기류가 흐르는 당시 상황에서 미국과의
계속되는 대척 지점을 만드는 것은 소련으로서도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1949 년 4 월 말에 북한 대표가 중국을 방문하여 스탈린과의 협의
결과를 알리자, 모택동 역시 잠시 전쟁을 유보할 것을 권하였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대내적인 재편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의
안보가 우선순위 될뿐더러 모택동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전격전이 될
수도 있고 장기전으로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전쟁 장기화는 일본을
끌어들여 남한 ‘정부’를 지원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토르크노프 1998, 118). 그러나 국공내전에 도움을 줬던 북한에
남침 준비를 위한 중국 인민 해방군 내 조선인 2 개 사단은 넘겨주며
전쟁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으로부터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하사 받은 김일성은 내심 혼자의 힘으로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문제에 대한 답을 풀기 위해 계속해서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며
남침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1949 년 6 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를
완료하자 이를 기회라 생각했던 김일성은 다시 한번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 받고자 하였으나 끝내 전면전에 대한 허락을 받지 못하고
계획을 틀어 강원도 삼척지역에 일부를 점령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동시에 남한의 빨치산 무장봉기로 말미암은 혁명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현시점에서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첫째, 남한 내 빨치산에
대한 지원과 해방구의 설치, 반동체제 전복 및 남북통일 과제를
성공리에 해결한다는 목적 아래 남한 인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무장봉기를 계획해야 한다. 둘째, 인민군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강화해야 한다.”(러시아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
스탈린은 혁명으로 말미암은 공산화에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으며
이는 개성, 옹진 등 38 선 주변 지역에 빈번한 남북 간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소규모 전투가 대규모로 번질
것을 걱정하여 1949 년 10 월 김일성에게 38 선 전투 중지 지령을
내렸다.
2. 스탈린의 남침 허락
이후 국제상황은 공산 진영에 힘을 박차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1949 년 8 월 소련은 핵실험에 성공하고 10 월에는 모택동이
장제스(Chiang Kai-Shek)를 상대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며 중국을
공산화로 물들이고 있었다. 또한,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미국이 내전에
대한 민주주의 진영의 개입을 포기하고 1950 년 1 월 12 일 미국의
애치슨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북한의 남침
시에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확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제정세의 흐름으로는 전쟁의 적기라고 판단하였다.
중국이 아시아의 공산화가 된 이후 1950 년 1 월 17 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초대 주중 대사로 임명된 이주연을 환송하기 위해 소규모
오찬 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술기운에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에게 모스크바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허락을 다시 한번 요구한다. 이에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지만 한참 동안 답장을 안 하던 스탈린은 대뜸
1 월 30 일경 김일성 동지에 마음을 이해한다며 남침에 대한 일을
위하여 논의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스탈린이 마음을 바꾼 계기는 현재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으며, 한국 전쟁 이후로 많은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해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탈린의 사회주의 정책은 2 차세계 대전 이후 국제정세 변화에
의해 특정시점에서 완전히 변화하였다. 이 문제에 관해 박명림 교수는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의 설명을 인용한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스탈린은 제 2 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주의를 확장하기 보다는 확보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굳히기 전략을 선호했다. ‘확보된 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socialism in one zone) 전략이라는 것이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그어진 경계선을 성실하게 지켰다. 그러나
이후 스탈린은 중국 혁명의 승리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에 도이처는
“두 진영 간의 위험한 대립에서 스탈린은 중국혁명으로부터 거대한
지지를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세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즉, 중국혁명을 계기로 하여 스탈린은 단기적 평화공존과
영향력의 범위의 상호인정, 곧 ‘일지역사회주의’에서 일탈하였던 것이다.”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또한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통한 전략적 이익은 적었다고 보며,
모택동에 대한 그의 잠재적 경쟁관계의 관점에서 행동했을 것이다.
그는 중국혁명의 가능성을 오판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주었던 정치적
소심성의 인상을 불식하고 그 자신이 모택동처럼 혁명에 대해 담대한
전략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심초사 했을지도 모른다는 심적인 요소도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박명림 1996, 193).
션즈화(Shea Zhihua)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참전하기로 결정한
조건으로 중국과의 관계 변화와 미국의 정책적 반응에 대한 고려라고
보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소련의 대외정책 변화 과정의 일부였고
스탈린이 소련 대외정책의 변화를 촉발시킨 진짜 요인으로 1947 년
5 월 프랑스 공산당과 이태리 공산당당의 연립정부에서의 퇴출과
1947 년 6 월 미국이 공개한 유럽에 대한 지원방안 즉 마셜
플랜(Marshall Plan)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유럽의 공산당
퇴출은 소련이 전후 집행한 각국 공산당의 연립정부 참여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줬으며 마셜 플랜은 소련에 대한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이었다. 이에 소련은 전면적으로 대외정책 변경과 공산당의
관계 강화를 진전시키게 되고 이는 유럽에서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아시아로 번져 나갔으며 대결위주의 정책으로 전화되어 한국전쟁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션즈화 2010, 52). 박명림 교수와는 대조적인
부분은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결정한 동기 중 하나로 한반도가 소련의
극동정책에 있어 전략적 이익이 있었다고 보는 부분이다.
스탈린에게 중소동맹 체결은 양날의 검으로서 아시아에서 소련의
정치력을 강화한 반면 스탈린 자신이 1945 년 장제스(Chiang Kai-shek)
수중에서 획득한 대부분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반환해야 했다. 따라서
아시아 특히 동북아에서 소련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스탈린은 얄타협정과 이전에 밝힌
극동지역에서의 전략적 목표를 지키기 위해서는 중국 영토 외에 다른
지역을 차지해야만 했으며 무엇보다 부동항의 획득이 절실하였다.
스탈린의 조선문제에 대해 전략적 지위를 위한 안전보장에 중요한
의미를 둔다는 것은 1945 년 6 월 29 일 소련 외교부 제 2 극동사의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본이 조선을 경유해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하는 것을 반대한 러시아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정의로운 행동이다”,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조선이 미래에 소련 침략의 전진기지로
전환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런
침략이 일본으로부터든지 아니면 극동지역에서 소련에 압력을 가하는
다른 나라의 어떤 시도로부터든지 모두 마찬가지다.” 이는 특히
한반도가 아시아 대륙으로의 확장을 위한 발판이 되는 것을 방지해야
된다는 점을 아주 뚜렷하게 설명해주며, 소련에게는 중요한 영토임을
반증해주고 있다(션즈화 2010, 200). 따라서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전략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 출발해 스탈린은 조선반도에서 군사적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이 지역에서 미국과의 직접적인
무장충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점이 바로 스탈린이 조선문제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본 출발점이 되었다.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러시아 학자인 토르크노프는(Anatoly Vasilyevich Torkunov)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유로 꼽고 있다. 스탈린은 미국이 대만에 있는 장제스
운명에만 관심이 있을 뿐 조선에서의 충돌에 말려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유추하였다. ‘중국은 전 세계에
아시아 혁명가들의 힘을 과시했고, 아시아의 반동 세력들과 미국 및
서유럽의 연계가 약화하였음을 드러냈다. 이에 중국과 소련의
동맹조약체결로 미국은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할 처지가 아니었고
소련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미국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 회담에서 비로소 중국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북한의 선제 남침 전쟁을 승인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토르크노프 1998,
113).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바로 소련이 미국의 핵 독점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미국이 핵을 사용해 소련을 위협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저자의 부족한 견해로 스탈린의 마음을 움직인 정확한 이유를
유추해 내기에는 문헌의 접근성과 적은 연구 경험에 의하여
능력범주를 넘어선 주제이기에 확답을 내기에는 현저히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러나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일국사회주의의 제한된
확장정책을 고수하던 소련의 정책이 션즈화가 언급했던 2 차세계대전
이후 나토설립을 포함하여 외부로부터의 사회주의 공격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압력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소련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본능적 정책 변화와 더불어 중국의 국공내전 승리에서 오는
심리적 요인, 소련의 핵개발 성공, 미국의 에치슨 선언으로 인해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등 복합적인 국제정세의
변화가 합쳐져 한반도에서의 영토적 팽창까지 영향을 주었다.
1950 년 5 월 13~15 일 그 현장 속으로
1. 모택동과 김일성의 밀실 데이트
김일성이 모택동과 북한과 중국의 공산당 대표로서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상 1950 년 5 월 13 일부터 15 일까지 중국에서
가졌었던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결국 스탈린의 숙제를 풀어내고
남침에 대한 모택동의 지지를 받게 되며, 소련과 중국을 뒤에 엎은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지원을 약속받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모택동은 당시 김일성과 스탈린과의 개전 결심에
대한 사전 통보가 없었고 국공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에 관해 부담을 느끼고 있음에도 한국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동맹을 맺은 이상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일은 없으며 모택동 또한 중국혁명이 달성되는 대로 군대를 포함한
여러 수단으로 북한을 지원할 것을 여러 차례 약속했다고 밝혔다(박명림
1996, 96). 이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읽는 국제 정세가 앞서 밝혔던 여러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이유에 의하여 서로에 대한 상호이해가 통했고 남침에 관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였다.
스탈린은 김일성과의 회담을 마치고, 그에게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과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하도록 지시하였다. 스탈린이 남침에
앞서 중국의 허락을 받으라는 이유는 스탈린과 김일성 4 월 10 일
회담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스탈린은 만일 미국이 참전하여 북한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까지도 분명 고려하였다. 김일성이 남한을 점령을
못 하는 것보다 미국이 북한을 점령하여 소련의 극동지역을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중국으로 방어하기 위해 모택동에 허락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모든 요구가 모스크바에서 충족되었고, 필요한 것은
모스크바에서 지원될 것이기 때문이었다(토르크노프 1998, 128). 하지만
스탈린의 요청대로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5 월 13 일 베이징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회담하였다.
5 월 13 일 김일성 일행은 베이징에 도착하여 당일부터 중국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자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 대사 바실리비치 로신(Nikolai
Vasilievich Rosin)이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에 따르면, 회담의 초반
모택동은 김일성이 전달한 스탈린의 의견에 의문을 품었다. 13 일 당일
밤 23 시 30 분, 주은래(Zhou Enlai)는 소련 대사관으로 와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스탈린에게 즉시 보고 해주도록 요구하였다. “조선 동지들이
스탈린 동지의 다음과 같은 지시를 통지하였다. ‘현재의 형세는 과거와
달라, 북한은 행동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반드시
중국 동지와 모택동 본인과 논의해야 한다’ 따라서 모택동 동지는
스탈린 동지 본인이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설명해주기를
희망한다.”(토르크노프 1998, 293).
이에 스탈린의 답장이다.
“조선 동지와의 회담 중에 스탈린 동지와 그 친구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고려하여, 조선의 통일 실현에 관한 건의에 동의하였다. 동시에
보충할 점은,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
해결해야 하며, 만약 중국 동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를 어떻게
해결하지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세부 회담 내용은, 조선 동지가
귀하에게 설명해 줄 것이다.” (토르크노프 1998, 293).
최종적으로 “중국 동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를 어떻게 해결하지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라는 언급을 통해 결국 스탈린은 남침에 있어
중국에게 결정을 양도하며 자기 자신의 철저한 은폐를 위해 중국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였다. 즉 실질적으로는 최고의 결정권을 갖고 있었고
동의를 통해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주었으면서도 양도를 통해 이선으로
물러섬으로써 모택동에게 역할을 부여를 하고 스탈린은 ‘숨은 보스’로
소련의 참여와 행동은 숨기고 중국을 이용하여 한반도 내에서 이익을
추구하고자 했던 의도가 다분하였다.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2. 모택동의 속마음
스탈린은 5 월 3 일 모택동에게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과 협의사항에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전보를 보내게 된다. “조선 동지가 우리에게 왔다.
그들과의 회담결과는 가까운 날짜 안에 귀하에게 통보될 것이다.”(러시아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
그러나 수일이 지나도 통보는 오지 않았다. 이후 5 월 12 일
김일성은 모택동을 만나러 비밀리에 베이징에 입성하게 되었고 회담이
진행되었다. 당시 모택동은 스탈린의 남침허락에 대한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으며, 스탈린의 허락을 받아낸 김일성은 모택동을 만나 남침
허락에 관한 내용을 전하게 된다.
모택동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기에 앞서 대만과의 통일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의 결정을 반대할 처지가 아녔기에,
김일성을 지원하기로 동의하였다. 모택동은 경제개혁이라든지 중국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련의 지원이
경제지원이라든지 군사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미 소련과 북한이 사전에 논의하여
합의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회신을 받은 후 모택동은 모스크바의
견해에 찬성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은 불만을 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션즈화 2017, 136).
5 월 15 일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모택동은 원래 자신은 대만을
먼저 공격하여 점령한 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는 것을 계획하였으며
그때에는 중국이 북한에 충분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 공격할 것을 이미 결정하였고, 이
또한 중·북 공동의 과업이므로 동의한다고 말하며 필요한 협조를
제공할 준비를 약속하였다. 모택동은 소련의 직접 참전은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 충돌로 올 수 있는 제 3 차
세계대전을 우려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일리야조바 2014). 이에
모택동은 만약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은 분대를 보내 북한을 도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중국 군대 일부를 북한 국경 배치 필요 여부와
무기와 탄약 제공의 필요 여부를 물었다. 김일성은 이 제안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였지만 사절하였다. 모택동의 결정에 있어서 션즈화는
모택동은 공산주의 진영에 큰형 격인 스탈린의 결정에 따르며 자신의
입지를 만들 목적과 국공내전 당시 북한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에게 지원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한반도 공산주의화
계획에 힘을 실어주는 판단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시큰둥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먼저 한반도
전쟁을 지지함으로 대만의 통일을 포기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더하여
아시아를 자신의 수중으로 넣기 위해서는 북한을 끌어들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하여 지원을 약속했지만 김일성이 자신보다 스탈린의
지원으로만 움직이려고 하는 마음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로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모택동에게 북한에서 중국인 대표가 없다고 불평한다고 전해주세요.
모택동이 한반도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대표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러시아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회담 이후에도 김일성은 남침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협의를 하지 않았고 6 월 25 일, 모택동은 오후가 되어서야 프랑스
통신사를 통해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었다. 김일성의 정식 통보는
사흘 후, 그것도 베이징 주재 북한 무관을 통해서였다. 모택동은 협의
없이 전쟁을 진행한 북한에 매우 화가 났고 통역인 사철에게 “그들은
우리의 이웃인데, 전쟁 발발 문제도 우리와 논의도 없이 겨우 지금에
와서 통보”하였다고 말하였다(박명림 1996). 중공 총서기였던 후야오방(Hu
yaobang)은 당시 모택동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를 회고록에 남겼다.
“주석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수염을 깎았다.”(김명호 2011).
3. 김일성의 속마음
1950 년 3 월 30 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미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공격은 3 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고
남침하게 되면 남한 내 20 만 남로당원이 주도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Weathersby 1993, 433). 스탈린 또한 이에 동의하며,
중국은 소련과 중소 우호동맹을 체결하여서 아시아에서 미국이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고, 소련의 핵 보유가 미국을
억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스탈린은 회담에서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대답으로 김일성은 모택동은
중국혁명이 완수된 후에 북한을 도울 수 있고 필요하면 병력도 제공할
것이라고 여러 번 언급하였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또한, 북한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를 원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은 서쪽 방면에서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북한은 소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 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다시 한 번 모택동과 상의하라고 촉구하고 특히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하는 모험을 하면 소련은 직접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반복하였다(예브게니 1998, 52). 그러나 김일성은 이 회담을 통해
소련의 직접적인 개입은 어렵더라도 한반도 전쟁에서 허락을 받았을
뿐더러 지원의 약속까지 받았기 때문에 굉장히 만족스러운 회담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5 월 12 일 김일성의 베이징을 비밀리 방문했을 당시, 그의 목적은
중국에 자신들이 무력으로 조국을 통일시키겠다는 의사와 이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회담의 결과를 통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모택동을 만나러 가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그는 스탈린에게 “자신의
요구가 이미 모스크바에서 충분히 달성되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더이상
중국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러시아 연방 외교 정책 기록 보관소).
이를 통해 당시 김일성이 한반도 전쟁에 있어서 승리의 자신감이
넘쳤으며 필자는 이 배경으로는 모스크바의 허락과 함께 국공내전에
미국의 개입철회와 애치슨 선언으로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배제
시킨 부분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모택동의 국공내전 승리를 통해
국제적 분위기가 적어도 아시아 내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에 긍정적인
바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을 것으로 판단된다.
더하여 남침을 시작하면 남한에 있는 수십만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으로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오판이었으며 대만을 포기한 미국으로서는 한반도 땅이 마지노선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회담이 끝났을 때 즉시 모택동 앞에서, 회담에서
모든 의제에 관해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소련 대사에게
선언하였다(션즈화 2010). 득의양양한 김일성의 모습에서 모택동이 처했을
난처한 처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불만을 느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일성의 측면에서 보면, 북한은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큰 공헌을
하였지만, 모택동은 승리를 얻은 뒤 한반도의 통일과 해방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사실 모택동은 북한이 무력으로 국가를
통일하는 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김일성이 계획하는
한반도 무력통일의 공산화는 중국혁명의 뒤를 잇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계획에 따르면 한반도 문제는 중국의 통일 대업을
완성한 후에 다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스탈린이 1950 년
1 월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수정했을 때에는 아시아 혁명의 주도권이
중국에 떠맡겨 졌다.
모택동의 이러한 입장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중국의 불신과 불만을
만들어 냈고, 귀국 후 더 이상 모택동에게 전쟁 준비나 개전과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를 협의하지 않았다. 북한의 전 고위 군수 관의 회고에
따르면, 전쟁 발발 전 소련의 무기들은 중국 철도를 통하여 북한으로
운반되지 않고 모두 바다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특별한
목적은 한반도 전쟁 준비 작업을 중국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션즈화 2017, 295).
이후 1950 년 6 월 25 일 전쟁이 시작되고 6 월 28 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모택동은 김일성이 기반이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보면 미군이 서쪽으로 상륙하여 북한군의 허리가 잘릴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다.”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라고 건의했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말을 듣는 듯했지만 결국은
무시했다. 북한군이 계속하여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자 모택동도 서서히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김명호 2011).
맺음말
한국전쟁을 앞두고 스탈린과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의 삼중 만남은
그들로 하여금 개전을 준비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김일성의 1950 년 3,
4 월 모스크바 방문과 1950 년 5 월 13~15 일 베이징 방문은 전쟁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열쇠였던 것이다. 역사의 만약은 없다지만, 당시
모택동의 허락이 없었다면 1950 년 6 월 25 일 오전 4 시 30 분의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보고서의 목적으로
돌아와 5 월 13 일에서 15 일까지 3 일에 걸쳐 진행되었던 회담의 의의와
결과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첫 번째로 이 회담을 통해 소련은 중국에게 한반도 전쟁에 대한
책임전가를 함과 동시에 전략적 이익을 챙기려 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우려한,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스탈린의 양보적
책임 회피의 측면으로도 볼 수 있지만, 중국의 공산주의 성공에 있어서
아시아의 공산화를 중국에게 맡긴 것이다. 즉, 아시아 내에 공산주의
진영의 세력확산이라는 임무를 중국에 맡김으로 소련입장에서는 국제적
무대에서의 이념적 양립의 큰 틀을 주도하는 동시에 유럽과 다른
지역의 공산화에 조금 더 힘을 쏟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세력확산
분업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두 번째로 김일성에게 이 대담이 중요한 이유는 모택동이
이주연에게 한국의 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진술이다(박명림 1996, 154). 이는 이주연
김일성을 거쳐 모스크바에 보고된 이중 전언이다. 모택동이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낮게 평가하므로, 김일성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미국의 전쟁 불참에 가능성에 더욱 힘을 실어줬을 것이고 이는 곧바로
전쟁의 실행으로 귀결될 수 있었던 심리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미국의 불개입의견을 제기했으나 모택동은 “우리는 그들의
참모장이 아니다.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라며 이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났으며 한국에서도 이같이 신중한 입장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박명림 1996, 158).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오판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로는 김일성은 전쟁에 앞서 가장 중요한 동맹국간
상호협력과 지원 약속의 숙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낸 시점이다. 회담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를 비롯한 중국지도부는 김일성과의 회의를
중단하고 주중 소련대사 로신을 찾아 즉각 스탈린에 전보를 쳐서
김일성의 발언을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로신은 5 월 13 일 즉각
스탈린에게 해명 전보를 보내길 바랐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과의
회담 결정 내용을 확인해 줌으로써 북한의 무력 침입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최종 확인을 받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로신이 이날
모스크바에 타전한 전문으로는 당시 모택동은 신속한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며 승리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네 번째로는 모택동은 한국전쟁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두지는
않았지만,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반도 공산화를
중국혁명의 연속성으로 보았다. 한국 전쟁에서 모택동이 당시
회담내용을 보면 중국군의 추가배치나 무기와 탄약의 공급이
필요한지를 문의하자 김일성은 이에 감사를 표시하였으나 제의는
사양했다. 물론 김일성에 입장에 스탈린에게 모든 지원을 받은 터라
사양했지만 이를 통해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적극적 열의를 냈던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하며, “소련은 미국 측과 38 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 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그러한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가 있다.”고 하였다(박명림 1996, 158). 이미
스탈린과 김일성의 전쟁 타결은 모택동 처지에서 불만이 있었지만,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전쟁을 진행하기로 한 이상 한반도 전쟁을 간결하며 빠르게 진행하여
완벽한 공산국을 만들기를 내심 바랐던 모택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모택동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합의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션즈화를 포함한 중국의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5 월
13 일에서 15 일 회담에서 이미 모택동의 주장을 통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번째로 이 회담으로 대만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시발점이
되었다. 회담에서 중국의 대만해방 구상은 김일성의 한국전쟁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이상 모든 계획이 틀어졌고 더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대만의 장제스로 하여금 내전의 패배로 지친 내부 상황을 돌볼
좋은 기회로 작용 되었고 현재까지도 중국은 대만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하는 가장 큰 문제로 남아 있다. 이는 당시 회담에서 모택동의
한반도 전쟁 지지라는 결정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 개혁성향 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 2013 년 제 12 호에 따르면 마오는 1956 년 9 월 24 일
베이징을 방문한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Anastas Ivanovich Mikoyan)
소련 부수상과 회동에서 “조선전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스탈린이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라고 후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내가
보기에는 이 일은 중국에도 책임이 있다.”(연합뉴스 2015)라고 말하며
한국 전쟁을 막지 못한 중국의 책임에 대해 언급한다. 이 때문에
모택동의 잘못된 전쟁의 지원으로 전쟁 초기에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했던 혼란뿐만 아니라 중국의 일생일대에
숙원이 되어 버리고만 대만과의 하나의 중국을 이루지 못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의 끈질긴 구애와 무력을 동원하여
남한과 북한을 통일하려는 의지에서 구상하게 되었으며, 이를
스탈린에게 제의하여 동의를 얻고 중국 모택동에 허락을 통해
최종적인 결정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필자가 보고서를 작성하며 내린
결론이다. 당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김일성은 무력 통일을
주장하며 통일에 지나치게 급진주의적이었고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야욕 때문에 한반도를 다시 한번 전쟁이라는 파멸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고 당시 국제적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오판이었다. 이는
스탈린과 모택동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쟁을
지휘를 하되 겉으로는 빠지는 듯한 그림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해준 장본인이다. 또한, 중국에 아시아의 공산화에
대한 대업을 맡김으로 한반도 전쟁에 모택동에 허락을 중요히
여김으로 모택동에 결정을 넘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는 구조적으로
김일성이 모택동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당시 모택동의
선택은 중국의 내전승리로 말미암은 낙관주의적 분위기와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 그리고 혁명의 연장선으로써
한반도 전쟁을 진행하고자 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이 전쟁
최종합의 결정 회담인 김일성과 모택동의 만남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아쉽게도 본 보고서를 통해 5 월 13 일에서 15 일에 회담
당사자들의 당시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보려 하였지만, 회담에
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
기록이 문서로 존재하지 않아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과 소련의
비밀문서들로 최대한 풀어보고자 하였다. 이는 러시아와 중국 나아가
북한이 가지고 있는 회담 기록들이 공개된다면 참고하여 다시 한번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공개된 문서들만으로
들여다보았던 이 회담은 한국전쟁 발발에 주요 주인공들의 노력으로
회담은 구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한반도 전쟁의 최종적
합의점이라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함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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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thersby. 1993 The Soviet Role in the Early Phase of the Korean War: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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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택동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전야_모택동 기념관